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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db1ce><colcolor=#fff> 록 허드슨 Rock Hudson | |
본명 | 리로이 "로이" 해럴드 쉐러 주니어 Leroy "Roy" Harold Scherer Jr. |
출생 | 1925년 11월 17일 |
미국 일리노이주 위넷커 | |
사망 | 1985년 10월 2일 (향년 59세) |
미국 캘리포니아주 베벌리힐스 | |
국적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체 | 196cm |
직업 | 배우 |
활동 | 1944년 - 1985년 |
학력 | 뉴 트라이어 고등학교(New Trier High School) |
배우자 | 필리스 게이츠 (1955년 - 1958년)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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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화 <자이언트>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 제임스 딘과 함께 |
2. 위상
골든 글로브 '최고 인기상'을 1959년에서 1961년까지 3년 연속으로, 그리고 다시 1963년, 1966년에도 이어받았을 정도로 50-60년대에 미국에서 어마어마한 인기를 자랑했다. 검은 눈빛, 깊은 목소리, 196cm의 훤칠한 키 덕분에 로맨틱한 남자 주인공의 전형이었다. 영화 <자이언트>에서 보여준 수트핏은 그야말로 끝판왕. 1950년대 말에서 60년대 초 도리스 데이와 공동 주연으로 찍은 영화들, 그리고 감독 더글러스 서크와의 멜로드라마 협업들이 유명하다.3. 생애 및 활동
3.1. 데뷔하기까지
1925년 폭음 버릇이 있는 차 정비사와 전화교환수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말로 쟁기를 끌고 트랙터를 몰며 가족 농장일을 도왔다. 1930년 대공황의 정점에 아버지가 가족을 버렸지만 어머니는 일 년 뒤 재혼했고 양아버지는 허드슨을 입양했다. 그러나 양아버지는 어머니와 어린 허드슨 두 사람을 매일 폭행했고 둘은 함께 도망쳐 동네 극장에 같이 숨곤 했다. 자연히 허드슨은 연기자를 꿈꾸게 됐고 해당 극장의 자리 안내원 일도 해봤지만, 당시 배우는 '계집애 같은 놈들이나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꿈을 대놓고 다른 사람들에겐 말하지 않았다. 게다가 대사 한 줄 제대로 외우지 못해 학교 연극에조차 출연하지 못했다.제2차 세계 대전에서 해군 비행기 정비사로 복무한 뒤 LA로 향했다. 서던캘리포니아 대학 드라마 프로그램에 응시했지만 내신이 나빠 떨어졌다. 허드슨은 말린 과일을 배달하는 일을 하며 중간중간 트럭을 세우고 영화사 문앞에 죽치고 서서 사람들에게 얼굴 사진을 돌렸다. MGM 창립자 루이 B. 메이어와 마주치면 발탁될지도 모른다는 백일몽을 꾸고 있었다.
메이어는 허드슨을 보지 못했다. 대신 1948년, 1950년대의 근육질 남성 열풍을 불러온 탤런트 스카우트 헨리 윌슨[1]의 눈에 들었다. 윌슨은 전설적인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2] 사단에 속해있기도 했다.
1940년대 사진 |
허드슨은 윌슨에게서 지브롤터 암벽(Rock of Gibraltar)과 허드슨 강을 합친 예명을 받았다. 윌슨은 사비로 허드슨에게 집과 옷을 사주고 치아교정까지 시켜줬다. 남성성을 강조하는 자세와 표정을 일일이 가르쳤다. 영화사에서 춤, 노래, 승마, 연기, 펜싱 등을 훈련 받은 허드슨은 1948년 전쟁영화 <전투비행대>에서 처음 두 줄 짜리 대사를 받았다. 38번 이상 재촬영을 할 정도로 허둥댔지만, 윌슨은 그해 있던 첫 언론간담회에 허드슨을 아카데미상 수상감 재목으로 홍보하기 위해 허드슨에게 금색 트렁크만 달랑 입히고 전신에 금칠을 해 인간오스카상으로 만들어 내보냈다.
허드슨은 1952년 <스칼렛 엔젤>로 주연급으로 성장한 뒤, 1954년 제인 와이먼 주연의 <마음의 등불>에서 드디어 대중의 주목을 받는다. 소위 '나쁜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뇌외과의가 되어 시력을 복구시켜주고 생명도 구한다는 내용의 로맨틱 코미디였다. 인기가 치솟으며 가장 문제가 된 것은 그의 성적 지향이었다.
1954년 사진 |
3.2. 성적 지향
록 허드슨은 게이였다. 그러나 비밀리에 애인을 두고 자신의 성적 지향을 대중의 눈으로부터 숨기며 배우 경력을 이어갔다. 역시 게이였던 헨리 윌슨이 타블로이드 입단속을 시킨 덕분이었다. 윌슨은 자신의 '상품들'인 고객들 가운데 허드슨이 최상품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1955년엔 라이프마저 허드슨의 성정체성을 간접적으로 묻는 기사를 냈다. 1950년대는 동성애자 마녀사냥이 만연하던 "자색 공포(lavender scare)"[3]의 시대였다. 리버라치를 아웃팅했던 잡지 칸피덴셜이 아예 폭로성 기사를 준비 중인 걸 알게 된 윌슨은 할 수 없이 허드슨에 대해 입 다물어주는 대가로 다른 인기 고객 두 명을 팔아넘겼다. 로리 캘훈은 감옥에서 복역한 전과자이며 태브 헌터는 1950년에 체포된 적이 있다는 게 이때 폭로되었다.
윌슨과 허드슨 |
사실 헨리 윌슨은 이 시절의 남성 연예인들에게 하비 와인스틴 같은 사람이었다. 윌슨은 마피아와 연줄이 있었고, 키워준다는 구실로 순진하고 가정환경이 좋지 않은 젊은 남자 배우들을 고객으로 모은 뒤 약점을 잡고 성적으로 유린하거나 잔인하게 억압했다. 허드슨의 친구이며 모든 사람에 대해 격의 있게 말하기로 유명한 배우 로디 맥다월조차도 윌슨에 대해서만큼은 구정물 같은 인간이라며 치를 떨었다.
윌슨은 변호사에게 칸피덴셜 지의 기사 발행을 막을 방법이 없는지 상담했던 날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뒤 소문을 완전히 잠재우기 위해 자신의 비서 필리스 게이츠[4]와 허드슨을 강제로 결혼시켰다. 자신을 해고하면 자기 밑의 애들을 시켜서 얼굴에 산 테러를 하겠다는 협박 때문에 허드슨은 뭐든 윌슨이 시키는대로 따라야만 했다. 제임스 딘은 이런 허드슨을 이성애자를 연기하는 사기꾼이라고 생각해 싫어했다. <자이언트> 촬영장에서 만나기 전에 허드슨은 이미 양성애자인 딘을 꼬시려고 한 적이 있었다. 이런 위장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었고, 1957년 허드슨은 <자이언트>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후보 지명되었다.
왼쪽부터 워너 브라더스 수장 잭 워너, 나탈리 우드, 헨리 윌슨, 필리스 게이츠, 록 허드슨 (1956) |
하지만 애정없는 결혼이 잘 될 리가 없었고 결국 3년 만에 파경을 맞아 필리스에게 거액의 위자료[5]를 준 다음에 이혼하게 된다. 그 뒤엔 허드슨의 비밀을 아는 여자친구들의 도움이 따랐다. 허드슨과 자주 어울리던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는 의도적으로 언론이 자신을 애인으로 오인하게 유도했다.
그리고 허드슨은 도리스 데이와 나온 <필로우 토크>(1959)를 통해 로맨틱 코미디 계열에선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위치를 차지했다.
<필로우 토크>(1959) 홍보 이미지 | 영화 내 장면 |
홍보샷 | 포스터 |
1962년 유니버설 영화사에 모인 허드슨, 케리 그랜트, 말런 브랜도, 그레고리 펙 |
그래도 허드슨이 게이라는 소문은 어느새 공공연하게 퍼져있었다. 허드슨의 개인 조수 마크 밀러[6]에 따르면 1967년 <제브라 작전>의 초연 행사에서 허드슨이 레드카펫에 나타나자마자 "이 호모새끼야!"라는 고함이 울려퍼졌다. 허드슨은 이후 다시는 초연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유명 사립탐정 프레드 오태시를 고용해 남성과 성관계를 한다는 걸 시인하는 허드슨의 목소리를 몰래 녹음했던 전 아내 필리스 게이츠의 협박도 이어졌다.
말런 브랜도 같은 경우엔 남자와도 잔다는 점을 대중에게 별로 숨기지 않았다.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도 후리고 다닌다는 섹스심벌 반항아 이미지에 맞아 떨어져서 대중은 쉽게 넘어갔다. 반면에 허드슨은 양성애자가 아니라 게이였기 때문에 호모포비아가 극심하던 당시에는 이를 숨길 수 밖에 없었다.[7]
그러나 할리우드 동료들은 대중보다 훨씬 관대했다. 거기엔 누구에게나 늘 밝고 친절하고 서글서글한 허드슨의 붙임성 있는 성격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술을 좋아하는 가정부를 위해 '먹는 날'과 '취하는 날'이라는 걸 만들어놓고, 가정부가 밥을 해주는 '먹는 날'엔 집에서 밥을 먹고, 가정부가 취해 있으면 그걸 '취하는 날'이라 부르고 싫은 소리 한 번 않고 근처 호텔에 가서 밥을 먹고 돌아올 정도였다. 말단 제작 인력 한 명 한 명에게도 친근하게 구는가 하면, 밤을 새워 타이론 파워 같은 친구들의 고민을 들어주는 게 일상이었다. 마릴린 먼로, 주디 갈런드는 번갈아가며 허드슨을 찾아와 상담을 하고 품에 안겨 눈물을 지었다. 1969년 <철인들>을 같이 찍은 존 웨인도 허드슨의 성격에 감화된 사람 중 하나로, 허드슨과 브리지와 체스를 하루에도 몇 시간씩 두곤 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동성애자든 말든 내가 알 바야? 체스만 잘 두면 됐지."
허드슨은 70년대에 71년부터 77년까지 여섯 시즌이나 이어진 NBC의 인기 TV 드라마 "McMillan & Wife"의 주연을 맡았다. 추리력이 상당한 아내를 둔 경찰청장이 매화 새로운 사건을 맞닥뜨리고 부부가 함께 해결한다는 설정이었다. 그러나 이즈음 출연한 영화들은 주로 범작이었다. <엠브리오>(1976)같은 의학공포물에서부터 눈사태를 소재로 한 저예산 재난물 <아발란체>(1978)같은 영화들이 그 예다. 레이 브래드버리 원작 SF 소설 "화성 연대기"를 바탕으로 만든 1980년작 TV 시리즈에도 나왔다.
McMillan & Wife |
한편, 허드슨이 헨리 윌슨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건 1966년이었다. 18년 만이었다. 윌슨이 알코올 의존증으로 건강이 무너지고 일마저 제대로 못하게 되면서 할리우드에서 행사하던 영향력이 예전같지 않아진 덕분이었다. 윌슨은 결국 음주운전으로 체포되고 은행에 집을 넘겼다. 정기적으로 집을 치워주는 청소부에게 지급할 돈이 없어 가구로 대신 지불해 나중엔 집이 텅 비게 되었다. 윌슨과 연락을 완전히 끊고 살던 허드슨은 이 소식을 건너서 전해듣고 윌슨에게 2만 달러[8] 짜리 수표를 보내주었다. 윌슨은 1978년 간경변으로 죽었는데 묘비 세울 돈조차 남아있질 않아 나중에 누군가가 묘비를 세워줄 때까지 한동안 묘지가 익명으로 있었다.
3.3. 에이즈와 커밍아웃
1984년 백악관 파티에 참석한 친구 록 허드슨을 본 영부인 낸시 레이건은 바싹 마른 허드슨의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고 며칠 후 파티 사진을 보내면서 목에 점이 있던데 검사 좀 받아보라고 권유하는 편지를 동봉했다. 6월 5일 조직검사를 마친 피부과 의사는 에이즈라고 예후했다. 당시로선 사망 선고나 다름 없었다.1984년 백악관 행사에 참석한 허드슨과 로널드 레이건 부부 |
허드슨은 현실을 부인하며 일에 몰두했다. 영화 유작이기도 한 TV 영화 <라스베가스여 영원히!>(1984)에서 만난 신인 섀런 스톤에게 멘토도 되어주었다. 이 영화는 다스 베이더 목소리로 유명한 배우 제임스 얼 존스와 <베스트 키드>에서 사범 역으로 나온 팻 모리타가 조연으로 출연했고, 1986년에 대우비디오에서 비디오로 나왔다. 정영일이 뒤표지에 허드슨의 유작이며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볼 영화라고 싣기도 했다.
그러나 당대 최고의 인기를 끌던 드라마 "다이너스티"에서 상대역이었던 린더 에번스[9]에게 키스를 해야만 하는 순간이 다가왔다. 허드슨은 간부, 감독, 제작자가 다 나서서 키스를 하라고 종용하는데도 끝까지 볼에 뽀뽀밖에 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에번스는 나중에 "날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까지 버텼다는 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매우 감동적이다"라고 회상했다.[10] "다이너스티"는 허드슨의 TV드라마 유작이 되었다.
드라마 "다이너스티" 린더 에번스와 허드슨 |
사실 허드슨의 건강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는 소문은 이미 전부터 어느 정도 얘기가 돌고 있었다. 이미 "다이너스티" 촬영 중에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것은 물론, 때로는 말조차 못하는 상태가 돼서 대사를 못 치는 바람에 NG가 나는 상황이 자주 발생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대중들이 허드슨에게 심각한 건강 문제가 있다고 처음 확신하게 된 건 도리스 데이가 진행하게 된 CBN의 "Doris Day's Best Friends" 첫 화에 허드슨이 찬조출연하게 됐을 때였다. 이 방송은 유명인사를 초대해 동물들(주로 개)을 주제로 얘기를 나눈다는 기획이었는데, 데이는 개를 좋아하는 허드슨이 가장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유명한 콤비의 짧은 재결합을 알리기 위해 7월 15일 허드슨이 기자간담회에 나타났을 때 데이는 물론 전 기자단이 할 말을 잃었다. 허드슨은 유령을 방불케 하는 핼쑥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데이도, 그리고 기자들 중 그 누구도 몸상태가 얼마나 심각한 거냐고 대놓고 물어보지 못했다. 데이는 충격을 애써 감추며 웃으려 애썼다. 이때 허드슨은 데이에게 그냥 감기에 좀 걸렸고 식욕이 없다고만 했다.
데이가 허드슨을 초대손님으로 택한 건 그가 애견가였기 때문이었다. 1967년 3월 사진 | 재결합을 기념하며 기자들 앞에 선 허드슨과 데이 1985년 7월 사진 |
얼마 안 있어 허드슨은 파리의 리츠 호텔에서 쓰러졌다. 그리고 파리 미국 병원[11]으로 실려가 그대로 열흘을 파리에 있었다. 처음엔 허드슨이 파리에 있던 이유가 수술로는 치료가 불가능한 간암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실은 당시로선 실험적인 에이즈 치료법이었던 항바이러스제 HPA-23을 시도하려고 갔던 것이었다.
7월 25일 언론들이 개떼처럼 몰려든 가운데 허드슨이 에이즈에 걸렸다는 사실이 정정 발표되었다.[12] 이는 또한 게이라는 간접 시인이기도 했다. 조수 마크 밀러가 곁에 돌아오자 허드슨은 "개들한테 다 던져줬어?"라고 물었다. 밀러가 "네"라고 답하자 허드슨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하,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군."
이때 영부인 낸시 레이건은 허드슨의 기존 주치의가 허드슨을 진찰할 수 있게 허드슨을 군 병원으로 이송해달라는 요청을 거부해 비난을 받았다. 친구에게 특혜를 베푸는 셈이 되는 거라 거절했다고 나중에 변명하긴 했다.
7월 30일 허드슨은 들것에 몸을 뉘인 상태로 전세비행기에 실려 LA로 돌아와 다시 헬리콥터에 실려 UCLA 종합병원[13]에 한 달 동안 입원돼있다가 8월말 자택으로 옮겨졌다.
3.4. 고백 후 사망까지
로널드 레이건 행정부는 많은 사람들이 에이즈로 목숨을 잃는 와중에도 성소수자나 걸리는 병이라는 인식을 버리지 않고 방치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허드슨의 에이즈 발병 소식을 들은 이후 정부에게 사회와 언론의 비난이 가해지자 9월 17일에 기자간담회에서 최초로 에이즈를 공개적으로 언급하며 정부의 최우선 과제라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정부가 지금까지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특별히 지원을 추가할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9월 19일, 절친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허드슨의 에이즈 발병 사실이 공식 발표되기 전부터 성소수자 인권운동가 피터 스콧[14]과 함께 미리 조직하고 있던 "Commitment to Life" 모금 행사가 열렸다.
행사 프로그램을 짠 건 ABC 엔터테인먼트의 부사장이었던 게리 퍼드니(Gary Pudney)였다. 행사 표 2500장은 한 장 당 250-500달러에 달했는데 총 판매액은 백만 달러가 넘었다. 원래는 몇 백 장 정도로 기획됐던 행사였지만, 허드슨의 에이즈 발병 발표 후 표를 구하려는 사람들의 문의가 쇄도해 규모를 늘린 것이었다. 테일러가 기부한 앤디 워홀의 작품 판매 등으로 추가 금액을 더 모았다.
이날 참석한 독지가 월리스 애넌버그[15]는 "허드슨은 자신의 고통을 통해 에이즈 환자들을 존중 받아야 할 존재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아카데미상을 받을 만하다"고 말했다. LA 시장 톰 브래들리(Tom Bradley)도 행정가로서 의지를 천명했다. 로드 스튜어트, 신디 로퍼,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등의 공연도 잇따랐다. 그 전해에 모금을 위한 패션쇼가 열린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정식으로 A급 뮤지션들의 경축 공연까지 동반한 에이즈 관련 모금 행사는 처음이었다.
그렇게 버트 레널즈, 셜리 맥클레인, 전 영부인 베티 포드, 베트 미들러, 라이자 머넬리 등이 행사에 모인 가운데 전날 발표됐던 허드슨의 메시지를 버트 랜캐스터가 대리 낭독했다. 랜캐스터는 혹시 행사에서 대신 발표해야하는 허드슨의 글이 있다면 자신이 꼭 읽고 싶다고 미리 요청한 바 있었다. 허드슨은 개인적으로 1,000달러 어치의 표를 구매했지만, 너무 아파 참석할 수가 없었다. 허드슨은 해당 글에서 테일러에게 감사를 표하며 "나는 에이즈에 걸려 불행하지만, 내가 에이즈에 걸린 게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건 내 불운이 일종의 긍정적인 가치가 있다는 의미"라고 적었다. 바로 뒤에 레이건 대통령이 보낸 편지 전보도 낭독되었는데 레이건은 "정부의 노력이 큰 진전을 보이고 있다"고 해 참석자들의 야유를 받았다.
허드슨의 저택은 난장판이 되었다. 이때를 이용해 남자친구들이 찾아와 모종의 거래를 해댔고, 할리우드 개신교 신자들은 허드슨이 거부하는데도 잔뜩 몰려와 찬송가를 불러대면서도 정작 허드슨이 누워있는 침대로부터는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병문안을 와서 그 꼴을 목격한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아, 제발 좀!"이란 탄식과 함께 침대 곁으로 급히 달려가 허드슨을 품에 부드럽게 안고 살살 흔들어주었다. 테일러는 허드슨이 게이인 것을 밝혔을 때도, 나중에 에이즈에 걸린 것을 알았을 때도 이전과 같이 대해주었고, 테일러의 병문안은 허드슨이 투병 중에 행복해하던 몇 안 되는 순간 중 하나였다. 그렇게 악몽 같은 10주를 보낸 후 허드슨은 1985년 10월 2일 베벌리힐스에서 사망한다. 화장된 유해는 태평양에 뿌려졌다. 지켜보던 친구들과 가족들은 이때 무지개가 뜨는 걸 목격하고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
많은 신문사들이 허드슨의 죽음을 1면에 대서특필했다 |
한국에서는 1985년 8월 30일 토요명화에서 글래머 이탈리아 배우로 유명했던 지나 롤로브리지다와 같이 주연으로 나온 <9월이 오면>(1961)이 더빙 방영[16] 중이었는데 그가 투병 생활 중이라는 뉴스 보도가 나왔다. 그로부터 한 달 조금 지나 허드슨은 세상을 떠났다. 당시 KBS 뉴스에서 이 영화 더빙판 장면을 조금 보여주면서 록 허드슨이 세상을 떠났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3.5. 사망 후 여파
도리스 데이와 찍은 "Doris Day's Best Friends"가 허드슨이 사망하고 며칠 뒤에 방영되었다. 촬영분을 보여주기 전에 데이는 촬영 당시의 일화를 시청자들과 공유했다. "허드슨은 자기 인생 최고의 순간이 같이 코미디 영화를 만들던 때였다고 말했"는데, 데이 자신 역시 그렇다며 울먹였다. 데이는 허드슨이 에이즈에 걸린 건 몰랐지만, 허드슨은 매우 피곤해했고 음식 섭취가 아예 불가능했다고 밝혔다. 촬영이 끝나고 둘은 울면서 헤어졌는데 그게 데이가 본 허드슨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데이는 관객들이 둘이 함께 나오는 영화들을 사랑했던 이유는 자신과 허드슨이 실제로 서로를 아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1화 방송 장면과 촬영 당일을 떠올리는 데이 |
이 방송은 이후 수도 없이 미국 방송사들을 통해 반복 재생되며 에이즈의 존재를 환기 시켰다. 허드슨이 사망했을 때 역사상 최강의 로맨틱 코미디 콤비 중 하나였던 두 사람의 우정을 모두가 알고 있었기에 전화가 미친듯이 쇄도해서 데이는 그중 누구에게서 허드슨의 사망 소식을 들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다.
3.5.1. 에이즈 인식 및 연구 관련
에이즈로 인한 허드슨의 사망에 대중은 크게 두 갈래로 반응했다. 첫째로는 그 어떤 사람도 에이즈로부터 면역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각인되었다. 둘째는 허드슨의 기존 이미지에 따른 충격의 여파였다. 허드슨은 애정영화 속 배역들을 통해 최고의 남편감 및 애인감으로 군림하고 있었고, 그와 동시에 책임감 있는 신사 배역도 많이 맡아 미국의 이상을 구현한 남성의 표상으로도 꼽히던 인물이었다.록 허드슨은 에이즈로 사망한 최초의 스타였으며, 그의 비극적 죽음은 에이즈에 대한 경종이 되어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 환자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난 그저 에이즈에 걸린 아무개에 불과했고 그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제 난 "록 허드슨의 병"을 갖고 있는 사람이 되었고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전까지 에이즈는 정맥 주사로 삽입되는 마약을 상용하는 중독자들이나 유색인종, 이민자들, 그리고 게이들"만" 걸리는 질병이었지만, 이젠 허드슨 같은 사람들"조차도" 걸리는 병이 된 것이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가 처음 에이즈를 에이즈라고 부른 것은 이미 1982년 9월 24일의 일이었지만 그때까지 대중들은 그냥 "게이병"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허드슨의 사망을 통해 질병 이름도 에이즈로 정착되었다.
중대한 공중 보건 위기에 대한 관심도 크게 환기 되었다. 미 의회는 서둘러 에이즈 치료법을 위해 2억 2천 백만 달러를 예산으로 책정했다.[17] 미국 국립보건원은 에이즈 연구 자금을 두 배로 올렸다. 평생 게이임을 숨기다 병을 통해서야 고통스럽게 아웃팅되었음에도 성적 지향을 공개적으로 밝혀온 성소수자 인권 운동가들보다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은 일종의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해 말 에이즈 환자수는 총 15,527명, 사망자는 총 12,529명으로 집계되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허드슨 때문에 에이즈 관련 운동을 유명인사 최초로 시작했고, 해당 문제에 전세계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허드슨은 유산 중 250,000 달러를 테일러가 공동창립멤버가 되는 에이즈 연구 재단 앰파(amfAR)의 설립 기금으로 남겼다.
영부인 낸시 레이건은 친구 허드슨과 로이 콘 두 사람의 죽음에 영향을 받아 에이즈 사태를 부인만 하고 있던 남편에게 에이즈 연구 기금을 조성할 것을 촉구하기도 했다.
1993년, 에이즈를 주제로 한 최초의 주류 영화인 <필라델피아>가 제작되고 주연이었던 톰 행크스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까지 타게 된 것 역시 허드슨의 죽음이 만들어낸 큰 흐름이 낳은 결과 중 하나로 해석된다.
3.5.2. 마크 크리스천 소송
사망 후 연인 중 하나였던 마크 크리스천(Marc Christian)이 재산권 소송을 하면서 평생 감춰져있던 허드슨의 개인적 삶에 대한 진실 공방이 벌어져 팬들을 경악시켰다. 크리스천은 허드슨이 에이즈에 걸린 걸 인지한 상태에서도 자신과 매주 3-5회 콘돔을 끼지 않고 삽입 관계를 했다고 주장하며 천만 달러 소송을 걸었다. HIV에 감염은 안 됐어도 에이즈에 걸린 사람과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 자체가 정신적 고통을 유발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허드슨의 주변인들은 허드슨이 에이즈에 걸린 걸 확인하기 이전부터 이미 크리스천과 관계를 맺지 않고 있었다고 반박했지만, 허드슨과 비서가 여느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러했듯이 크리스천에게도 허드슨의 상태를 숨긴 것은 사실이었다. 크리스천은 6년에 걸친 재판 끝에 합의로 육백만 달러를 받았다. 허드슨 측의 소득이 하나 있었다면 크리스천이 허드슨과의 관계를 책으로 내려던 계획을 적발해 포기시킨 것이었다.[18][19]크리스천은 2009년 HIV와 무관한 질병으로 죽었다. 허드슨은 자신이 HIV에 감염된 걸 모르는 상태에서 관계를 맺었던 네 사람에게 "제발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보라"고 익명의 편지를 보냈을 정도였기 때문에[20] 크리스천의 주장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많지만, 이 소송은 성관계를 통해 전염가능한 병에 걸렸을 때 상대방에게 이를 미리 고지할 필요성을 알린 것으로 시사된다.
3.5.3. 전 아내 필리스 게이츠
아내였던 필리스 게이츠는 1987년 "My Husband, Rock Hudson"라는 회고록을 내며 아무 것도 몰랐던 순진한 피해자 행세를 했다. 2004년 3월 20일에 방영된 CNN의 래리 킹 라이브는 게이츠의 최초 방송 인터뷰였는데, 킹은 여기에서 게이츠의 주장이 전부 허구라는 걸 파헤치는 데 집중하고 있다.게이츠는 이 방송에서 87년에 낸 회고록과 같은 거짓말을 반복했다. 게이츠는 상사인 헨리 윌슨은 "매우 좋은 사람"이었고 윌슨이 허드슨이 게이라는 걸 "알고 있었는지 모르겠다"며 홀로 업계인들과 상반된 주장을 했다. 허드슨과의 식사 자리를 만들며 만남을 "부추기고 엮으려고 한" 것도 윌슨이고, 프로포즈조차 윌슨의 사무실에서 윌슨이 보는 앞에서 이뤄졌고, 식장과 시간 등 결혼식과 관련된 일체를 윌슨이 일방적으로 정하고 통보했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자신은 허드슨이 게이란 소리는 소문으로조차 들어본 적이 없고 이혼하고서야 그런 루머가 도는 걸 알았다고 했다. 본인이 그걸 직접 무마하고 다닌 사람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조하는 비서였음에도. 게이츠가 고용했던 사립탐정 프레드 오태시의 녹취에는 결혼생활 중에 허드슨이 게이라는 사실과 남자들을 만나고 다닌 걸 알고 있었다는 게 다 나와있는데도, 래리 킹에게는 이 역시 이혼 후에 알았다고 말했다.
허드슨이 몇 안 되는 데이트 자리마저 자꾸 피했다고 말해놓고, 몇 분 뒤엔 결혼 전 허드슨과 일 년 동안 동거까지 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자기를 그렇게 좋아하던 허드슨이 갑자기 자신에게 흥미를 잃고 집에 거의 들어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이혼 신청을 했지만 자신은 허드슨에게서 돈을 뜯어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이혼하면서 받은 게 거의 없다고 수차례 강조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집, 차, 그리고 10년 동안 250,000달러[21]를 받았다. 자신은 허드슨과의 결혼에서 얻은 게 없다고 하다가 바로 몇 분 뒤엔 허드슨이 자신을 너무 좋아해서 보석 선물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이 받아서 전부 은행에 숨겨놓았고 자신도 그 정도 얻어가는 건 있어야 하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장면도 몇 번 반복된다. 허드슨의 비서 같은 주변인들이 거짓말로 오명을 씌워 고생만 했다면서도 래리 킹이 그 문제의 험담꾼이 정확히 누구냐고 묻자 말꼬리를 돌렸다.
래리 킹은 2012년 12월 14일자 스웨이 인 더 모닝에서 자신이 만나본 최악의 게스트 1위로 필리스 게이츠를 꼽았다.
2005년 언론인 라버트 호플러(Robert Hofler)는 게이츠의 거짓말을 폭로하기 위해 허드슨 전기인 "The Man Who Invented Rock Hudson(록 허드슨을 발명한 남자)"를 썼고 이후로도 여러 차례 관련글을 기고했다. 호플러는 게이츠가 사실 레즈비언[22]이며, 처음엔 윌슨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지만 막상 결혼을 하고 보니 슈퍼스타 배우자 역할에 중독돼 이혼을 원치 않았다고 밝혔다. 유명세를 간접적으로 세례 받으며 돈을 풍족하게 쓰고 다른 스타들과 만나 친구처럼 지내는 삶이 영원히 이어지길 원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게이츠는 허드슨의 집에 놀러온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함께 수다를 떨며 요리를 하던 일과 해외여행을 갔을 때 테일러가 자신의 리무진과 수행원들을 빌려주며 편의를 봐준 일을 결혼생활 중의 멋진 기억들로 꼽았다.[23] 그리고 허드슨과 헤어진 뒤론 단 한 명의 할리우드 친구도 남아있지 않다는 것도 시인했다.
게이츠를 동정적으로 볼 수 있는 하나의 시선이 있다면, 그건 그녀 역시 레즈비언이라는 성 정체성을 사회로부터 철저히 숨겨야만 했던 시대의 희생양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이다. 동성애자들에게 가혹한 시대를 살았고 생각이 그 시대에 머물러있어서, 허드슨이라는 남성과 결혼까지 한 번 했던 이성애자라는 가면을 죽을 때까지 고수하려 했을지도 모른다는 견해가 있다.
게이츠는 실내 장식 인테리어 사업을 하여 그럭저럭 성공했지만, 이후로 재혼을 하지 않았으며, 2006년 오빠 러셀과 여동생 메이비스가 바라보는 자리에서 죽었다.
3.5.4. FBI 관련
90년 초반에 방송된 성우 이선영의 영화음악실 라디오 방송에 의하면 FBI는 진작에 그의 성적 지향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배우 출신 대통령인 로널드 레이건이 나온 마당에 인기면에서 차기 대통령감으로 대두되어도 이상할 게 없는 배우 1순위로 록 허드슨이 꼽혔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50년대에 FBI가 몰래 허드슨을 조사하다가[24] 자연히 사생활에 대해서도 알게 됐던 것. 하지만 이를 외부에 알리면 몰래 조사 중이었다는 게 들통나 엄청난 비난을 받을 게 뻔해 그냥 덮어버렸다고 한다. 정보의 자유법에 따라 조사 보고서가 일반인 대상으로 공개되었기 때문에 현재 문서는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열람 가능하다.3.5.5. 한국
비슷한 시기에 스타덤에 올랐던 제임스 딘, 말런 브랜도보다 한국인들에게 인지도가 떨어지는 이유도 이런 비참한 최후와도 연관되어있다. 허드슨은 게이인데다 에이즈는 '문란한 성생활을 하다 감염되는 질병'이라는 인식까지 겹쳐져 사망 이후 보수적인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허드슨의 이름을 쉬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4. 주요출연작
- 1948년 전투 비행대(Fighter Squadron)
첫 영화 출연작. 크레딧에는 오르지 못했다. 라울 월시 연출.
- 1950년 윈체스터 73(Winchester '73) - 영 불(Young Bull) 역
서부극. 안소니 만 연출. 제임스 스튜어트, 셸리 윈터스, 토니 커티스 출연. 조역 중에 와이어트 어프가 있다.
- 1951년 Iron Man - 타미 "스피드" 오키프(Tommy "Speed" O'Keefe) 역
권투 영화. 조저프 페브니 연출. 진 할로우가 출연했던 동명의 1931년작에 대한 개작이다. 1931년작과 달리 경기 내용 묘사 분량이 넉넉하며, 여주인공(에벌린 키스[25] 분)은 남주인공에게 헌신하는 인물로 완전히 변모 시켰다.
가난한 광부 코크 메이슨(Coke Mason, 제프 챈들러 분)는 도박꾼인 형 때문에 권투선수가 되고 코크는 트레이너 스피드의 정석 지도에도 불구하고 분노에 몸을 싣고 상대를 죽기 직전까지 때리는가 하면 부정 시합으로 의심을 받으며 권투팬들의 인심을 잃어 시합마다 야유를 당하게 된다. 스피드는 코크의 챔피언 방어전 도전 선수가 되는데...[26]
- 1952년 Bend of the River - 트레이 윌슨(Trey Wilson) 역
서부극. 안소니 만 연출. 제임스 스튜어트, 아서 케네디, 줄리 애덤스 출연. 1월 23일 개봉.
1866년 오리건 포틀랜드 배경. 주인공 무리의 편이 되는 도박사로 나왔다.
- 1952년 Scarlet Angel
6월 15일 개봉.
- 1953년 The Lawless Breed - 잔 웨슬리 하든(John Wesley Hardin) 역
라울 월시 연출. 마이클 앤새라, 휴 오브라이언, 리 밴클리프 출연. 1896년 배경. 유니버설-인터내셔널 제작/배급. 1월 3일 개봉.
- 1954년 마음의 등불(Magnificent Obsession) - 밥 메릭(Bob Merrick) 역
더글러스 서크 연출. 부부작가 에드너 L. 리[27]와 해리 리 원안. 페그 페닉 대본. 원제는 "아름다운 집념"이란 뜻이다. 그리스 신화의 알케스티스에서 영화의 심상을 따왔다고 한다. 존 M. 스털이 연출하고 로버트 테일러와 아이린 던이 주연한 1935년 동명 영화의 개작이다. 8월 4일 개봉.
1948년, 다니던 의대마저 때려친 재벌 2세 밥은 생각 없이 쾌속정을 몰다가 사고로 의식을 잃는다. 밥은 실려간 병원에서 단 한 대 밖에 없던 인공호흡기를 쓰면서 본의 아니게 같은 시각 심장마비를 일으킨 해당 병원 의사 필립스가 사망하게 만든다. 밥은 유족인 아내 헬런 필립스(제인 와이먼 분)를 좋아하게 되는데, 헬런은 밥의 구애를 피하려다 차에 치여 장님이 된다. 개심한 밥은 다시 의학에 매진하기로 결심하고 다른 사람인척 헬런을 돌보는데 정체가 탄로난 뒤 청혼한다. 그러나 헬런은 자신이 밥의 앞길을 막을 거라 생각해 잠적하는데...[28]
- 1955년 순정에 맺은 사랑(All That Heaven Allows) - 란 커비(Ron Kirby) 역
더글러스 서크 연출. 8월 25일 영국 개봉.
남편을 먼저 보내고 대학생 남매 둘을 둔 부유한 캐리 스캇(Cary Scott, 제인 와이먼 분)은 돈 없는 연하의 나무 치료 전문가 란을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자녀들의 반대와 사회적 경제적 계급차 때문에 망설인다. 서크는 란이 사고를 당하며 끝나는 열린 결말을 원했지만 제작사 유니버설이 흥행을 위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하게 강요했다. 남편과 사별한 중년여성들에게조차 정숙한 어머니상만을 강요하며 새 동반자를 찾지 못하도록 억압하던 1950년대 사회에 대한 서크의 비판이란 분석이 있다.
- 1956년 애수의 이별(Never Say Goodbye) - 의사 마이클 파커(Dr. Michael Parker) 역
조지 샌더스, 클린트 이스트우드(크레딧 미기재) 출연. 3월 10일 개봉.
- 1956년 바람에 쓴 편지(Written on the Wind) - 미치 웨인(Mitch Wayne) 역
더글러스 서크 연출. 남부 고딕물. 제작사 유니버설의 역대 개봉일 흥행 최고 기록을 갱신했다. 로런 버콜, 로버트 스택 출연. 10월 5일 개봉.
- 1956년 자이언트
10월 10일 개봉.
- 1957년 전송가(Battle Hymn) - 딘 헤스 중령 역
2월 14일 개봉.
6.25 전쟁에서 공군 비행기 조종사이자 목사인 딘 헤스 중령은 P-51을 몰고 공산군과 싸운다. 허드슨은 주인공이 군인과 목사라는, 모순된 두 정체성 속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연기한다.
- 1957년 흑아(Something of Value) - 피터 매켄지(Peter McKenzie) 역
리처드 브룩스 대본/연출. 팬드로 S. 버먼 제작. 로저 미클로시 음악. 웬디 힐러 출연.케냐 마우 마우 항쟁을 소재로 하고 있다. 많은 할리우드인들이 관심 혹은 지지를 보낸 화제였기 때문에 상당수의 동시기 영화에서 이 항쟁이 언급된다. MGM 배급. 5월 10일 개봉.
대영제국 지배하의 케냐에서 종교적 신념 때문에 백인 이주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는 키쿠유족의 흑인 노동자 키마니 와 카란자(Kimani Wa Karanja, 시드니 푸아티에이 분). 그러나 키마니는 부당한 대우를 받은 끝에 폭력 수단으로 백인들을 몰아내려는 집단에 합류한다. 어려서부터 키마니와 형제처럼 자랐으며 아프리카가 터전이라고 생각하는 백인 이주민 피터는 이 과정에 얽혀 매형과 어린 조카를 잃는다. 키마니와 피터는 폭력으론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다는 데엔 뜻이 일치하게 되지만...[29]
- 1957년 무기여 잘 있거라
12월 14일 개봉.
- 1961년 9월이 오면(Come September) - 라버트 탤벗(Robert Talbot) 역
로맨틱 코미디. 라버트 멀리건 연출. 8월 9일 개봉.
미국인 갑부 사업가 라버트는 해마다 9월이 되면 리구리아 해안 별장에서 로마인 여자친구 리사 펠리니(Lisa Fellini, 지나 롤로브리지다 분)와 휴가를 보낸다. 어느 날 별장 관리인에게 연락을 하지 않고 별장에 들렀다가 별장 관리인이 자신 몰래 별장을 호텔로 통해 돈을 벌고 있었음을 알게 되는데...
- 1961년 연인이여 돌아오라(Lover Come Back) - 제리 웹스터(Jerry Webster) 역
제리는 정체를 속인 채 라이벌 광고회사의 캐럴 템플턴(Carol Templeton, 도리스 데이 분)에게 접근했다가 사랑에 빠진다. 토니 랜들 출연. 12월 20일 개봉.
- 1964년 러브 앤 플라워스(Send Me No Flowers) - 조지 킴벌(George Kimball) 역
노먼 주이슨 연출. 도리스 데이, 토니 랜들 출연. 10월 14일 개봉.
- 1965년 Strange Bedfellows - 카터 해리슨(Carter Harrison) 역
로맨틱 코미디. 멜빈 프랭크 연출. 기그 영 출연. 유니버설 스튜디오 배급. 2월 10일 개봉.
부유한 미국인 카터과 관습에 연연하지 않는 이탈리아인 토니 빈센테(Toni Vincente, 지나 롤로브리지다 분)는 런던에서 만나 충동적으로 결혼한다. 그러나 공통점이 전혀 없는 둘은 곧 별거한다. 7년 뒤 이혼 직전 둘은 다시 사랑에 빠지지만, 안정적인 가정생활을 원하는 카터와 달리 토니는 시위에 나서면서 둘은 전보다 더 심하게 충돌하기 시작한다.
- 1966년 세컨드
- 1984년 라스베가스여 영원히!(The Vegas Strip War)
5. 여담
- 제임스 딘은 허드슨이 유일하게 사이가 안 좋았던 동료였다. <자이언트> 촬영장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두고 서로 더 친해지려고 경쟁하며 대놓고 신경전을 벌인 것은 유명한 일화다. 뿐만 아니라 둘은 연기 양식도 너무 달랐다. 고지식하고 영화사에서 가르친대로 연기하던 허드슨은 직관력에 의존하고 메소드 연기를 하는 딘을 "이기적이고 고집스럽다"고 여겨 연기하면서 자주 부딪혔다. 허드슨과 딘은 감독이 상대방에게만 유리하게 영화를 이끌어간다고 생각해 번갈아가며 감독에게 항의했다. 허드슨은 차라리 딘이 "죽어버렸으면"하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딘이 죽었을 때 원체 마음 약한 허드슨은 매우 큰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러나 1974년쯤 죄책감이 가시자 딘을 두고 "멍청이"였다고 말했다.
- 한참 어린 액션배우 실베스터 스탤론과 얼굴이 닮았다. 허드슨이 키 190cm가 넘는 엄청난 장신에 귀공자 풍의 배우로 유명했다면, 스탤론은 키 170cm 중반의 의외로 평범한 덩치에 사회의 비주류이지만 오히려 그 점 덕에 더 강인하게 보이는 남성의 역을 많이 맡았다.
- 1953년 유니버설 시티의 시장이 된 적이 있다. 유니버설 시티는 영화제작사 유니버설 픽처스 산하의 영화사들이 모여있는 작은 마을인데, 우체국, 소방서, 경찰서까지 갖추고 있다. 심지어 이때 단독 후보도 아니어서 경쟁 후보였던 배우 매럴린 맥스웰(Marilyn Maxwell)과 겨뤄 이겼다. 사진 속 여성은 허드슨의 "선거운동 본부장"으로 뛰었던 배우 캐슬린 휴즈(Kathleen Hughes)다. 해당 선거에서 표를 행사한 전체 유권자 수는 1,984명이었다. 도리스 데이도 1962년에 이 마을의 시장이 된 적이 있다.
- 세계 최대 규모의 공동체 미술작품인 NAMES 프로젝트 에이즈 추모 퀼트(NAMES Project AIDS Memorial Quilt)는 에이즈로 사망한 사람들을 기리는 퀼트 조각들로 이뤄져있는데, 허드슨을 기리는 퀼트들도 이 기념물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다큐멘터리인 <Common Threads: Stories from the Quilt>(1989)는 허드슨의 와병 및 죽음과 관련된 뉴스 영상 토막들과 퀼트를 조명하며 시작한다.
- 찰턴 헤스턴과 같은 고등학교 출신이다. 헤스턴은 허드슨의 발병과 사망으로 HIV 감염자 인식 재고 운동이 할리우드 전체에서 활발해진 가운데 감염자 혐오를 조장하는듯한 발언을 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 <앵무새 죽이기> 주연을 맡을 뻔 했다.
- 도리스 데이는 허드슨을 어니(Ernie)로, 허드슨은 데이를 유니스(Eunice)나 모드(Maude)로 칭했다. 한편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허드슨을 라커비(Rockaby)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 술, 담배 때문에 에이즈에 걸리기 전에 건강으로 크게 고생한 적이 있다. 1981년 심장마비로 오중 혈관 우회 수술을 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높은 시청률로 야심차게 시작했던 NBC 형사 추리 드라마 "The Devlin Connection" 방송이 일 년 동안 중단됐고 수술을 마친 뒤에는 시청자들이 관심을 잃어 연장이 취소되었다.
- 마크 래퍼포트(Mark Rappaport)가 만든 다큐멘터리 <Rock Hudson's Home Movies>(1992)가 있다. 에릭 파(Eric Farr)라는 배우가 허드슨을 연기했는데, 이게 이 배우의 유일한 영화 출연작이다.
- 넷플릭스 드라마 "오, 할리우드"에서 허드슨과 헨리 윌슨을 영상화했다. 허드슨 역은 제이크 피킹(Jake Picking)이, 윌슨 역할은 짐 파슨스가 맡았다. 대체역사물인 본작에서는 윌슨이 정신을 차리고 갱생한데다 본인도 연인이 생긴 뒤 용기를 내어 커밍아웃하고 배우로서 인정받는 해피엔딩을 맞이한다.
[1] Henry Willson. 1911 - 1978. 로버트 웨그너, 태브 헌터(Tab Hunter), 트로이 다너휴(Troy Donahue), 가이 매디슨(Guy Madison), 채드 에버릿(Chad Everett), 로리 캘훈(Rory Calhoun), 예일 서머즈(Yale Summers) 등 당시 할리우드를 수놓은 젊은 미남 스타들을 키웠다. 라나 터너의 성공도 그의 작품으로 여겨진다.[2] David O. Selznick, 1902-1965. <킹콩>(1933),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제작자.[3] 반공 매카시즘이 벌인 공산주의자 마녀사냥을 뜻하는 적색 공포에서 따온 것이다.[4] 1925 - 2006. Phyllis Gates.[5] 밝혀진 내역만 해도 넘겨준 집과 차를 포함해 오늘날 가치로 45억원에 달한다.[6] Mark Miller. 1926 - 2015.[7] 지금도 양성애자는 이성만으로는 만족을 못해서 동성까지 넘보는 호색한/호색녀이고, 게이는 특이 취향 변태라는 잘못된 인식이 있다. 이를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보면 양성애자는 그저 문란한 인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게이는 그조차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8] 2022년 가치로 대략 1억2천만원.[9] Linda Evans.[10] 에번스는 나중에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조직한 모금행사 "Commitment to Life"에 참석했다. 원래는 이날 에번스가 허드슨의 성명서를 읽기로 돼있었지만 허드슨이 남자니 남자 배우가 읽는 게 낫겠다는 의견들이 있어 버트 랜캐스터에게 역할을 넘겼다.[11] Hôpital américain de Paris.[12] 대변인 중 한 사람이었던 데일 올슨(Dale Olson)의 권유를 허드슨이 받아들인 것이었다. 올슨도 게이였다.[13] UCLA Medical Center.[14] Peter Scott. AIDS Project L.A.의 수장. 얼마 안 있어 본인도 에이즈에 걸린 게 확인되었고, 1989년 사망했다.[15] Wallis Annenberg. 언론재벌 가문 자제. 아버지가 전 대사인 월터 H. 애넌버그(Walter H. Annenberg)다.[16] 국내 첫 방영은 1978년 9월 17일 일요일 밤 10시 TBC 방영이다. TBC가 KBS에게 강제로 넘어간 뒤 1983년 9월 4일 명화극장에서 재방영했고, 85년이 3번째 재방영.[17] HIV.gov[18] 이 소송 과정에서 크리스천은 허드슨을 세상에 둘도 없는 폐급 인간쓰레기로 묘사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올 책의 내용도 이에 준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었다.[19] 그런데 소송이 끝나자마자 크리스천은 태도를 180도 바꿔 언론에서 이 소송을 근거로 허드슨을 욕하면, "겨우 이거 하나 갖고 허드슨을 매도하지 말라"고 반박하며 "허드슨은 좋은 사람이었다"고 주장했다.[20] 다행히 그중 누구도 HIV에 걸리지 않았다. 이중 한 사람은 허드슨이 죽고 18개월 뒤에 이 편지를 10,000 달러에 한 타블로이드에 팔았다.[21] 오늘날 가치로 거의 40억 원에 달한다.[22] "게이츠를 아는 사람들은 전부 그녀가 레즈비언이라고 했다. 이성애자도 아니고, 양성애자도 아니고, 정확히 레즈비언이라고."[23] 테일러는 허드슨이 이혼한 후에 그가 게이라는 걸 알게 됐다.[24] 사실 FBI는 이렇게 유명인들을 몰래 조사하고 감시하던 일이 수두룩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라든지 존 스타인벡 같은 유명 작가, 루이 암스트롱 같은 연예인 등도 표적이었다. 음모론이라고 반박하던 적도 있었지만 수십년 뒤 공식으로 인정했다. 스타인벡은 저술 작업이 잘 안 되면 산림 감시원으로 일하며 몇 달이고 홀로 지냈는데 날 감시하는 놈들이 보인다며 비웃기도 했을 정도.[25] 한때 아티 쇼의 아내였으며,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세 번째 남편 마이크 타드와 결혼하기 전 타드의 연인이었다.[26] 스포일러 스피드는 시합 전 코크를 매우 두려워했지만 정작 링 위에선 코크를 심하게 몰아붙인 끝에 우승한다. 그러나 패배한 코크는 그 대신 팬들의 응원을 되찾는다.[27] Edna L. Lee.[28] 스포일러 밥은 최고의 뇌외과의가 되고 긴급한 뇌수술이 필요해진 헬런의 수술 집도를 맡는다. 수술은 성공하고 동시에 헬런은 시력을 되찾는다.[29] 스포일러 오해와 갈등이 재발생한 끝에 키마니가 마우 마우에서 파놓았던 구덩이에 떨어져 죽는다. 피터는 키마니의 아기를 새로 태어난 조카와 함께 키우기로 한다. 아프리카 동부의 흑인 차별이 사라지길 빌며... 케냐는 1963년 독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