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등려군 鄧麗君[1] | Teresa Teng | |
영어명 | 테레사 텡 Teresa Teng |
출생 | 1953년 1월 29일 |
대만 윈린현 바오중향 | |
사망 | 1995년 5월 8일 (향년 42세) |
태국 치앙마이주 매핑 호텔 | |
국적 | [[대만|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가수 |
데뷔 | 1965년, 1집 〈풍양화구〉 |
활동 | 1966년 ~ 1995년 |
신체 | 165cm |
학력 | 로주초등학교 (졸업) 진링여자중고등학교 (중퇴) 타이페이미국학교 (졸업)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영문학 / 수료) UCLA (일어일문학·생물학·수학 / 학사) 왕립예술대학 (학사) |
수상 | 금곡장 |
가족 | 4남 1녀 중 넷째 |
종교 | 가톨릭(세례명: 테레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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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등려군 금마장 축하 공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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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려군 관련 다큐 |
▲ 白天聽老鄧, 晚上聽小鄧(백천청노등, 만상청소등)[2][3] |
1965년부터 1995년 사망 직전까지 중화권과 동남아시아, 일본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대만인 여성 가수다.
대만, 홍콩/마카오, 일본[4], 중국까지[5] 동아시아의 많은 국가들은 물론 화교가 많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등 동남아시아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으며 '아시아의 가희(歌姬)'라고 불렸다.
진숙화와 함께 대만이 배출한 가장 뛰어난 여자 가수 중 하나다.
소위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는 소리'라는 표현에 딱 맞는 청아한 미성과 간드러지는 소프라노 음색으로 유명했다. 원래 중국 전통가요는 남자든 여자든 맑고 서정적인 음색과 가사를 선호한다.
등려군의 한국 내 인지도는 중화권이나 일본 등 타 동북아시아나 동남아시아에 비해 상당히 낮다. 그래도 '야래향(夜來香, 예라이샹)',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 위에량따이뱌오워디[6]신)'[7], '첨밀밀(甜蜜蜜, 톈미미)'[8] 등 그녀의 노래는 드라마 OST[9] 등으로 쓰였기 때문에 그 시절을 산 사람들은 다수가 알 만큼 노래는 유명하지만 정작 가수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적은 특이한 경우다. 어찌보면 당연한 게 이 노래들이 한국에 알려졌을 때 그녀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그녀의 노래를 한국에 알리는 데 공을 세운 홍콩 영화 첨밀밀도 홍콩에선 1996년, 한국에선 1997년 개봉되었는데 역시 사후 개봉된 작품이며, 애초에 플롯 중 등려군의 사망이 보도되는 장면이 있다. '테레사 텡(Teresa Teng)'과 등려군이 동일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극히 드물다.
2. 이름
본명은 덩리윈(鄧麗筠, 등려균)이지만 어릴 때부터 가족들이 덩리쥔(鄧麗君, 등려군)이라는 애칭으로 불렀고 이 이름을 활동할 때 썼다. 중국어에서 筠[yún, 윈]과 君[jūn, 쥔]은 본래 발음이 다르지만 예외적으로 筠이 지명/인명에 쓰일 때는 [jūn, 쥔]으로 읽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쓰촨성의 筠連縣(Jūnlián Xiàn)[10]은 쥔롄현으로 읽는다. 중국에서는 발음이 같은 글자로 애칭을 많이 붙여 주는데 이를 그대로 예명으로 쓴 것이다. 원래는 한국식으로 읽을 땐 일반적으로는 이름에 두음법칙이 적용된[11] 등여군이 되어야 하지만 관습적으로 등려군으로 굳어졌다.영어 이름은 Teresa Teng으로, 이 이름은 일본에서 활동할 때도 '테레사 텐(テレサ・テン)'[12]으로 계속 불렸다. 이 영문 이름 테레사는 그녀 자신이 존경한다고 이야기했던 테레사 수녀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라는 설이 있었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세례명을 사용한 것으로 밝혀졌다.
3. 인생
3.1. 출생, 그리고 데뷔
1953년 1월 29일 대만 윈린현 바오중향에서 출생했다. 양친 모두 중국 출신의 외성인으로 부친은 허베이성 한단시, 모친은 산둥성 타이안시 출신이다. 부친은 국민혁명군의 직업군인[13]으로, 국부천대 당시 대만으로 후퇴한 국민당 정부를 따라 대만으로 왔다. 부친의 영향인지 군 위문공연에 열심히 활동[14]했고 대만에서는 '군인들의 연인'이라는 별명도 있었다. 아직도 중화민국 국군에서는 등려군이 인기다. 인기투표에서 늘 1등을 한다.사실 등려군과 군대와의 인연이 깊을 수밖에 없는데 아버지도 군인이었지만 그의 셋째 오빠도 아버지를 따라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해 군인의 길을 걸었고 그녀가 첫 노래를 한 장소도 군대였다.
1967년 14세의 나이에 첫 스튜디오 앨범인 <鳳陽花鼓>가 발매되었고 대만의 인기 드라마인 '징징(晶晶)'의 주제가인 '당신만 보면 웃음이 나요(아일견니취소, 我一見你就笑)'[15]를 불렀으며 이후 5년 정도 대만과 홍콩을 중심으로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1973년에는 홍콩에서 만난 '토라스 레코드(トーラスレコード)'의 사장 후나키 미노루(舟木稔)를 만나 일본에서의 활동을 시작하였다.
3.2. 일본 활동
1974년 아이돌 계열의 노래인 '오늘밤일까 내일일까(今夜かしら明日かしら)'[16]를 취입했으나 별 성과를 얻지 못하자 곧 엔카 계열로 전환하여 '공항(空港; くうこう)'을 취입했고 대히트하여 당시 '일본 레코드 대상 신인상'을 받았으며 일본 방송에도 활발하게 출연했다. 더 드리프터즈의 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한 것도 이때의 이야기다. 그러나 1979년 인도네시아 위조여권을 사용한 것이 발각되어 국외 추방당했는데 급히 일본에 가야 해서 인도네시아 출신 친구가 만들어 준 여권을 사용했다고 한다.1984년까지 미국, 홍콩, 대만에서 활동하다가 일본 시장에 재입성했는데 '속죄(償還; つぐない)', '애인(愛人; あいじん)'이 각각 150여만 매, 1986년에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겨(時の流れに身をまかせ)'가 200여만 매가 팔리는 대히트를 기록해 '전일본 유선방송 대상(全日本有線放送大賞)' 최초의 동서(東西) 유선 대상 3해 연속 대상 및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1985년 12월에는 생전 마지막이 되는 솔로 콘서트를 NHK홀에서 진행하였으며 조용필의 일본 활동 후 '돌아와요 부산항에(釜山港へ帰れ)'를 부른 가수로도 유명하다.[17] 이후 일본의 음악방송에서 조용필과도 합동무대를 펼친 적도 있었다.
1987년 이후 일본에서 그다지 활동하지 않다가 1994년 11월 NHK '가요 자선콘서트(歌謡チャリティーコンサート)'에 출연하였다.
1995년 취입할 예정이던 '잊지마(忘れないで; Time to Say Goodbye)'는 그녀의 사망으로 취입되지 않았다가 2001년 일본 가수 幸治에 의해 추도음반으로 발매되었다.
3.3. 중화권 및 동남아시아 활동
대만 출신이라서 대만 및 홍콩, 마카오 등 중화권 지역이나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태국 등 화교가 많은 동남아시아에서의 활동도 활발했다.1979년 위조 여권 사용으로 일본에서 추방된 후 대만 여권으로 활동하였는데 그녀의 오리지널 노래도 흥행했지만 만주국에서 활동한 이향란(李香蘭;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의 노래들을 다시 불러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이렇게 유명해진 곡들로는 '夜來香(야래향/예라이샹)', '三年(삼년/싼녠)' 등이 있다.
1979년 인도네시아 위조 여권 사건으로 대만 내부에서 호된 비난을 받은 후 1980년에 귀국하여 다수의 중화민국 국군 위문공연에 출연했다. 당시 대만의 외교적 고립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침체된 국내 분위기를 일신하는 데 기여해 달라는 요청이었는데 간단히 말해 '대만판 군통령' 역할을 했던 셈. 덕분에 대만 내부 인기도 회복하고 정부 표창도 받았다. 1980년대에는 중국과 인접한 진먼다오를 방문하여 중국 본토를 향해 심리전 방송을 하기도 했다. #
그러나 대만 출신이 문제가 되었는지 리샹란(이향란)이 만주국 찬양, 2차대전 종전 후 일본 귀국 활동 등을 한 이유가 문제가 되었는지, 중국은 1983년까지 등려군의 곡을 금지했다. 명목상으로는 양안관계가 해소된 1987년까지 등려군의 노래를 금지했는데 형식적인 금지였을 뿐이다. 다들 등려군의 노래를 듣고 다녔고 심지어 단속하는 공안원들도 등려군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녔다고 한다. 심지어, 등려군 노래의 열렬한 팬 가운데는 나중에 중국의 주석이 된 인물도 있었다. 불법복제한 녹음테이프가 다 늘어져서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들었다고 했다. 참고로 시진핑과 등려군은 똑같이 1953년생으로, 동갑이다.
그만큼 등려군의 인기는 엄청났고 그녀의 노래들을 금지하면 금지할수록 오히려 그녀의 곡들을 더 많이 들었다. 그래서 등려군이 활동하던 당시에는 "낮은 덩샤오핑이 지배하고, 밤은 등려군이 지배한다" 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심지어 덩샤오핑은 등려군을 중국 본토에 불러들여 살게 하려고 했는데, 등려군은 공산주의 체제를 싫어하여 거부하면서 결렬되었다고 한다.
중국 본토에서 금지곡이었던 등려군의 노래였지만 상기했듯 현실은 높은 인기를 얻어 금지곡이었음에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듣고 있었다. 다만 중국 공연을 추진할 때쯤 터진 천안문 6.4 항쟁 때문에 더이상 추진이 어려워졌다. 1989년 천안문의 학생들을 지지하기 위해서 열린 홍콩의 콘서트였던 민주가성헌중화(民主歌聲獻中華)[18]에도 전격적으로 참석했다.
당시 매염방, 장학우, 성룡[19] 등 내로라는 중화권 연예인들이 참여하고 홍콩 역사상 유례가 없는 호왈 백만의 군중이 몰린 이 행사의 대미를 장식하였는데 대만에서 텔레비전을 통해서 콘서트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주최 측에 전화하여 왜 자신은 초대하지 않았냐고 물었고 주최 측에 참여를 요청하여 급히 홍콩으로 와서 63번째 공연자로 참석해 우리의 집은 산 너머에 있다(我的家在山的那一邊/워더지아짜이샨더나이볜)[20]를 불렀다.
아래는 당시 콘서트 영상이다. 등려군의 광동어식 발음인 탕라이콴(Tang Lai Kwan)[21] 시우제(小姐)[22]라고 소개하는 것을 들을 수 있다.
해당 영상인데 머리띠를 한 젊은 여성이 등려군이다. 광동어를 쓰는 홍콩인들 사이에서 혼자 표준 중국어로 연설해서 금방 눈에 띈다. 단아한 평소 이미지와는 매우 다른 투사같은 모습인데 등려군은 생전 반공 성향이 아주 강한 인물이었다.
1987년 일본에서 홍콩으로 이주한 이후로는 홍콩 및 대만에서 간간이 활동하다가 이후 약혼자가 거주하던 프랑스의 파리로 거주지를 옮겨 동거했다.
등려군 노래는 이때쯤 중화권을 이미 넘어서 동남아시아를 주축으로 화교 사회에도 널리 알려졌으며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서 특히 중국계 말레이시아인 및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이 자주 듣게 되었다.
3.4. 사망
등려군이 사망한 해인 1995년에 군인들과 함께 찍은 사진. 사진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당시 등려군은 평범한 중년 여성이었다.
그녀가 사망했다는 소문은 1990년과 1991년에 한 번씩 돌았으나 유언비어였으며 갑자기 1995년 5월 8일 요양을 목적으로 가끔 방문하던 태국 치앙마이의 매핑 호텔에서 기관지 천식 발작으로 향년 42세에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1990년부터 동거 관계에 있었던 14세 연하 프랑스인 스테판 퓨엘이 마지막까지 간호를 했다고 한다.
1995년 5월 28일 타이베이시에서 국장급의 장례가 치러져 전 세계 3만여 명의 팬들이 몰렸다. 그녀의 관은 청천백일만지홍기와 중국국민당 당기로 덮였다. 묘소는 타이베이시 동북에 자리하고 있으며 묘 앞에는 동상과 레코드 장치가 설치되어 등려군의 노래가 끊임없이 흐르고 있다. 사람들은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사체를 화장하지 않고 그대로 매장[23]했으며 사후 50년 정도는 생전 모습 그대로 둘 예정이라고 한다.
공식적으로 기관지 천식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발표되었지만 마약 복용설, 민주화 운동 및 반정부 운동에 관련한 중국공산당에 의한 암살설 등 여러가지 음모론이 있다. 천안문 6.4 항쟁이 일어나자 규탄시위에도 참석했으니 암살설도 그럴 듯하지만 음모론일 뿐 검증된 바는 없다.
한편 북한에서는 그녀가 사망하자 돈 좀 벌어 보려고 등려군 사망 기념우표를 발행[24]하기도 했다. 북한에서 발행한 추모 우표엔 '華人歌星鄧麗君(화인가성등려군)'라고 적혀 있다. 맞는 말이긴 한데 대만과 가까울 리 없는 북한이 이런 걸 만드니까 어색하다는 평이다. 엄밀히 말하면 화인=화교란 얘기이니 그냥 중국 출신으로 간주했을 가능성도 있다.
등려군이 사망한 지 [age(1995-05-08)]년이 지난 지금에도 대만군과 국민들은 아직도 여전히 등려군을 잊지 않고 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등려군의 무덤을 찾아와서 추모를 하는데 일본 팬, 그리고 등려군이 생존했을 때 위문공연을 갔던 군부대의 장병, 장교 출신들이 손자, 손녀를 데리고 오기도 한다.
4. 인간 관계
역시 대만 출신인 배우 임청하와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냈던 친구 사이이며 평생 절친으로 남았다. 둘의 나이도 비슷하고 함께 비슷한 전성기를 보냈다.[25]일생 동안 몇 차례 결혼을 생각할 정도의 교제 상대를 몇 명 만나기도 했지만 모두 맺어지지는 못했다. 그 중에는 동남아의 화교 재력가가 있었는데 남자 쪽에서 "결혼 후에는 은퇴하여 가정주부로만 살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에 등려군이 "무대 출연은 포기하되, 음반 제작은 허락해달라"고 요청했고 상대 남자는 집안을 설득해 보겠다고 약속했지만 끝내 남자 측 집안에서 거절하여 결혼은 성사되지 못했다. 워낙 대외적인 활동을 해서 무척 외향적인 성격일 거 같지만 실제의 그녀는 생각 외로 조용하고 가정적인 여성이었던 것 같다.[26]
성룡이 처음 헐리우드로 진출했을 시기인 1980년대 초반에 미국에서 지내던 등려군과 사귄 적이 있었지만 성룡이 친구들과 밖에서 어울리는 걸 좋아하는 반면 등려군은 집에서 조용히 지내는 걸 좋아해서 헤어졌다고 한다. 이에 대해 등려군 측에서는 "성룡과는 친구 사이였을 뿐, 연인 관계는 아니었다"고 부인했다. 성룡의 바람기를 견디기 힘들었을 듯.[27]
사실 성룡은 이때 삼각관계였는데 등려군을 버리고 임봉교를 택했다. 한편 임봉교는 당시 기준으로 차세대 최고의 배우 유망주였으나 성룡의 아기를 임신하는 바람에 혼인 문제에 대해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엄격했던 당시 연예계의 상황상 임봉교는 연예계를 떠나야 했는데 이걸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룬 적이 있다. 후일담을 보자면 성룡이 나쁘다. 임봉교와 그렇게 결혼했는데도 불구하고 또 오기리와 사통해서 득녀했는데 그게 오탁림이다.[28]
중화권 최고의 스타인 등려군이지만 개인사는 불행하기 그지없다.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여러 지방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친구들을 제대로 사귀지 못했고 10대에 데뷔하다 보니 학업을 초등학교에서 끝내야 했기 때문에 유년 시절에 친구 한 명 제대로 사귀지 못했다고 하며 20대부터는 활동으로 너무 바빠 연애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위조여권 사건으로 일본에서 추방당하고 결혼이 엎어지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등려군의 마지막을 지킨 14세 연하의 프랑스인 남자친구는 인터뷰에서 생전에 등려군은 자신이 학업을 마치지 못한 것이 늘 후회가 되어 기회가 된다면 대만에 자기처럼 학업에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학교를 짓는 게 꿈이라고 했고 자신의 곁을 지켜준 사람은 남자친구 본인과 배우 임봉교, 그리고 대만의 군인들뿐이었다고 늘 말했다고 한다.
5. 기타
등려군이 한국에서 이름이 많이 알려지게 된 계기는 1996년 개봉한 '첨밀밀'이라는 홍콩 영화 덕분이지만 반대로 말하면 생전 등려군이 동아시아/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인기를 얻지 못한 나라가 동아시아의 한국이었다.[29] 물론 홍콩 영화가 많이 들어오던 시절에 홍콩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쓰인 '첨밀밀(甜蜜蜜)'이나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은 인기가 높았다. 등려군이라는 가수는 물론, 심지어 노래 제목을 모르는 사람들도 노래를 들려주면 한 번쯤 들어봤다고 할 정도이며 한국 가수들도 여러번 리메이크해 불렀다.사망한 지 20년이 넘게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등려군은 많은 중화권 사람들 및 화교들에게 근대 이후 역대 최고의 중화권 가수로 평가받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 본토의 가요계는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아예 전멸하다시피 해 버렸고 그 여파로 아직까지도 아시아권에서 이름을 알린 중국 본토 출신 가수는 왕페이를 제외하고는 하나도 없기 때문[30]이다. 그나마 2000년대 이후 대만과 홍콩 지역 이외의 중국 본토 가요계도 나름 성장하곤 있지만 여러가지 제약이 있어서인지 등려군만한 인지도와 반향을 누리는 가수는 없다.
2012년 11월 11일 갑자기 네이버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 1위를 유지했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등려군의 일대기가 방영되었는데 지도에 '일본해(동해)'라고 영문 표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015년 응답하라 1988 9화에서 성덕선이 중국으로 떠나기 위해 짐싸는 장면에서 첨밀밀 노래가 나왔다.
이안 감독이 2011년에 탕웨이 주연의 영화를 만들려고 했는데 무산되었다고 한다. 타계 20주기가 되는 2015년에는 중국 후난(湖南) 위성TV가 대만의 등려군 추모 단체와 함께 그녀의 생애를 다룬 TV 드라마를 제작할 계획이 발표되기도 했지만 이후 대만에서 독립 성향의 민진당이 집권하여 양안관계가 불편해지면서 소식은 없는 듯하다.
그녀가 부른 노래 중에는 원곡이 있지만 이후 다시 부른 건전가요에 가까운 노래도 있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등려군에 관한 책이 없었는데 2017년 7월에 <등려군 -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해요>, <가희 덩리쥔>이라는 제목으로 2권이 동시 출간되었다. 전자는 지난 2013년(등려군 탄생 60주년)에 대만의 등려군추모재단(鄧麗君文教基金會)이 승인한 공식 전기 <<절향[31]: 영원의 등려군(絕響: 永遠的鄧麗君)>> 를 번역한 책이고 후자는 대만 전문 작가 최창근이 쓴 것이다.[32]
일본에서 부른 노래 중 '이별의 예감(别れの予感)'이라는 노래가 있었는데 이 노래의 가사 중 '바다보다도 더 깊이'라는 부분을 따 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영화를 만들었다. 한국판에서는 태풍이 지나가고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애니메이션 초시공요새 마크로스의 히로인으로 이름난 린 민메이는 많은 점에서 등려군을 연상케 한다. 10대부터 아이돌 가수로 절대적인 인기를 모았고 사랑을 이룰 수 없었던 불행한 개인사, 그리고 군인과 연이 깊었다는 점까지 흡사하다.
2022년 1월 중국 장쑤위성 TV에서 홀로그램으로 출연시켜서 공연을 했는데 대만에서는 고인드립이라고 크게 분노했다. 생전에 그녀는 “내가 중국에서 공연하는 그 날은, 우리의 삼민주의(三民主義)가 중국에서 실현되는 그 날일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강한 반공 성향이었고[33] 천안문 사태가 벌어졌을 때도 공산당에 항쟁하는 시민들을 격려하기도 했다.[34] 등려군 뿐 아니라 대만 출신의 연예인들 중에는 정치적으로 공산주의를 싫어하는 인물들이 제법 있다.[35]
6. 추천곡
아래의 곡들은 추천하는 곡들이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멜로디라는 게 공통점이다. '원곡명(한국식 독음)'으로 작성한다.鄧麗君(등려군) - 甜蜜蜜(첨밀밀) |
鄧麗君(등려군) - 月亮代表我的心(월량대표아적심,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해요.) |
- 美酒加咖啡(미주가가배)[39]
- 我心愛的小馬車(아심애적소마차)
- 我只在乎你(아지재호니)[40]
- 相思淚(상사루)
- 忘記他(망기타)[41]
- 何日君再來(하일군재래)[42]
- 南海姑娘(남해고낭)[43]
- 留不住你的心(류부주니적심)
- 好夢太匆匆(호몽태총총)
- 小城故事(소성고사)[44]
- 但願人長久(단원인장구)[45]
- 愛你一萬倍(애니일만배)
- 你可知道我愛誰(니가지도아애수)
- 再見我的愛人(재견아적애인)
- 江水悠悠淚長流(강수유유루장류)[46]
- 夜來香(야래향)[47]
- 絲絲小雨(사사소우) - 이슬비라는 뜻이다. 후렴구의 애절함이 아주 인상적이다.
- 高山靑(고산청) - 阿里山的姑娘(아리산적고낭)이라는 제목으로도 불린다.[48]
- 逍遙自在(소요자재)[49]
- 一水隔天涯(일수격천애)[50]
- あなたと共に生きてゆく(아나타토토모니이키테유쿠)[51]
- 情人的黃襯衫(정인적황친삼)[52]
- 往日的時光(왕일적시광)[53]
- 我和你(아화니)[54]
- 秋冬(추동)[55]
[1] 간체: 邓丽君.[2] 낮에는 늙은 등(老邓)을 듣고 밤에는 젊은 등(小鄧)을 듣는다는 의미다. #[3] 참고로 영상에 게스트로 등장하는 이는 등려군의 친오빠다.[4] 일본에서의 활동명은 테레사 텐(テレサ・テン). 다만 일본에서는 그녀가 원톱이었던 것은 아니다. 등려군이 활동하던 시기의 일본은 마츠다 세이코와 나카모리 아키나를 대표로 하는 아이돌 전성 시대였다. 등려군도 나름 팬덤은 있었고 방송 1위도 거머쥐었지만 일본인 1급 가수의 인기에 미치진 못했던 듯하다. 다만 등려군의 명곡들은 그녀의 사후 명곡으로서 꽤 재조명되는 편이다.[5] 후술되어 있듯 냉전 시절 중국본토에서 대만인인 그녀의 곡은 금지곡이었지만 현실은 암암리에 다 퍼져 많이들 듣고 있었다. 시진핑도 등려군의 광팬이라 "젊은 시절엔 불법테이프 늘어지도록 등려군 노래를 즐겨들었다."고 언론에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범죄 고백[6] 중국 본토/대만 모두 더(的(적))의 발음이 일반적으로 '더'이지만 노래를 부를 때는 的가 ‘디’로 발음된다.[7] 한국에서는 재한화교 출신 가수 주현미가 번안 및 원곡을 불러 많이 알려진 곡이다. 이후 홍진영도 '기다리는 마음'이란 제목으로 리메이크해서 부르기도 했다.[8] 한국 가수들도 많이 리메이크를 해서 불렀던 곡이다. 대표적으로 드라마 사랑해 당신을 O.S.T를 부른 두리안이 있다.[9] MBC 주말연속극 사랑해 당신을(1999), MBC 미니시리즈 네자매 이야기(2001), KBS 주말연속극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2019).[10] 간체: 筠连县[11] 엄밀히 규칙으로 정해진 건 아니고 역사인물이나 외국인의 한자 이름에 대해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사항이다.[12] 중국식으로 읽으면 ’테레사 텅’이 맞으나 일본에는 ㅓ발음이 없으므로 ㅔ발음을 사용했다. 사실 이도 대만에서 표준적으로 사용되던 중국어의 영문 표기법인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을 사용한 것으로 한어병음으로는 덩샤오핑의 경우처럼 덩(Deng)이 된다. 대만인들은 아직도 이름의 영문 표기에는 웨이드-자일스 표기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13] 황푸군관학교를 15기로 졸업한 장교였다. 국부천대 이후에도 군에 남았다가 등려군이 어릴 적에 퇴역한 것으로 보인다.[14] 스케줄이나 건강 문제로 인해 공연을 부득이하게 취소시키는 일이 있더라도 군 위문공연만큼은 빠지지 않고 참가하려고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15] 등려군은 이 곡을 1968년에 녹음하였는데 이 곡을 최초로 녹음한 가수는 등려군이 아니라 1950~60년대 홍콩의 유명 가수 배뢰(蓓蕾)다. 배뢰는 이 곡을 1966년에 녹음하였다.[16] 물론 不論今宵或明天이라는 제목으로 보통화 버전도 발매되었다.[17] 단, 최초 취입은 1983년 아츠미 지로(渥美二郞). 이후 계은숙,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모리 마사코(森昌子) 등이 취입/노래했다.[18] 매염방, 장학우, 증지위, 성룡 등 중화권 올스타전에 가까운 공연이었으며 주윤발, 유덕화, 장국영, 장만옥 등 많은 스타들이 응원을 보냈다.[19] 현재 친중파가 되버린 성룡의 모습에 다소 의아할 수 있는데 이 당시에는 아직 중국 대륙이 완전 개방되기 전이라서 성룡도 중화민국을 지지했다. 성룡이 중국 대륙이 돈이 되는 걸 인지하고 친중파가 된 건 2000년대 이후 얼마 안 된 일이다.[20] 원래 1950년대 후반 제작된 대만의 반공 영화의 주제곡을 개사해서 부른 거다. 극 중 영화의 주인공은 원래 중국 본토 출신의 중국인이었으나 국공내전 때문에 대만으로 이민을 오게 되면서 본래의 고향이었던 본토를 그리워하면서 부르는 노래다. 다만 등려군은 원곡과 달리 가사를 어느정도 개사해서 불렀는데 원곡의 가사인 "자유의 불을 붙이자(把自由的火把點燃)"를 "민주의 불을 붙이자(把民主的火把點燃)"라고 개사해서 불렀다.[21] 등(鄧)씨의 광동어 식 독음은 탕(Tang)이다.[22] 시우제는 소저(小姐)의 광동어식 발음인데 표준 중국어 샤오지에와 같은 아가씨라는 뜻이다. 홍콩 및 마카오에서 젊은 여성에게 의레 시우제라고 부르며 젊은 남성은 씬상(先生)이라고 부른다. 아주머니나 할머니는 포포(婆婆)라고 칭한다.[23] 가톨릭은 여타 종교와는 달리 이런 매장 방식을 따른다.[24] 북한은 영국과 공식적으로 수교한 국가이기 때문에 영국의 찰스 3세, 다이애나 왕세자비 우표도 만든 적이 있다. 그러나 정작 등려군은 국민당의 대륙 수복을 지지했고 반공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다.[25] 1991년 홍콩 영화 '종횡사해'에서도 잠깐 이름이 나오는데 주인공인 주윤발, 장국영, 종초홍이 프랑스의 한 해변에 갔을 때 주윤발이 해변에 "청하~ 려군!"이라고 외친다. 왜 그러냐고 묻자 주윤발은 그들이 이 해변에서 일광욕을 즐긴다고 말한다.[26]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시 남자의 어머니는 등려군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했다고 하지만 상견례까지 마친 상태에서 남자 쪽 어머니가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이후 손자며느리로 가수를 들이는 것에 부정적이었던 남자의 할머니가 집안의 주도권을 쥐면서 등려군에게 무리한 요구를 했다.[27] 등려군은 과거부터 꾸준히 대만군 위문 공연을 다니며 중화민국을 지지했고 당시에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현재 성룡은 중국공산당에 충성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다. 두 사람은 여러 면에서 상반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등려군의 집안도 그렇거니와 등려군 자신도 반공 성향의 외성인이다 보니 중공을 매우 싫어했다.[28] 이 때문에 막상 홍콩에서도 성룡을 좋지 않게 보는 사람들이 예전부터 꽤 많았다. 오죽하면 성룡의 대표적인 부정적 별명이 본명인 방사룡(方仕龍)을 비튼 房事龍일 정도다.[29] 동남아시아로 따지면 화교 인구가 많은 싱가포르 및 말레이시아는 물론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에서도 인기가 많았고 동아시아에서도 한국 빼고는 모두 인지도가 높았다. 이것은 등려군이 홍콩 영화의 전성기와 다소 비껴가 있는 순수 가수였는데다 한국에서는 활동을 하지 않았던 탓이 크다. 무엇보다 1970년대~1980년대의 한국은 아직 경제성장 초기 단계여서 대중문화 시장이 덜 성장한 상태였고, 때문에 외국 가수가 진출하여 활동할 여건이 못 되었다.[30] 왕페이도 본토 출신이지만 홍콩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심지어 왕페이 역시 등려군의 노래를 듣고 가수를 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2000년대 이전까지의 아시아 시장은 나문, 진숙화, 엽천문, 장학우, 양채니, 주화건, 임현제 등 홍콩과 대만 가수들이 주로 활약했다.[31] 전통이 끊긴다는 의미의 고사.[32] 대만 국립정치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2011년부터 다수의 한국-대만 관계, 양안관계 등 대만 관련 저서를 출간하고 있다.[33] 1980년 10월 4일 공연 인터미션 중 진행한 인터뷰에서 대륙에서의 인기와 관련된 질문에서 이렇게 답변했다.[34] 다만 21세기를 기점으로 철저히 대만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한 민주진보당 및 본성인들과 달리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컸고 정치적 성향도 국민당에 더 가깝긴 했다. 다만,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중국국민당은 반공 성향이 매우 큰 정당이었다. 한편 그녀의 오빠들은 무조건 중국 본토가 싫지만은 않았는지 마잉주가 집권하던 시절 중국 본토의 TV 방송에 가끔 출연하여 여동생에 대한 회고 인터뷰에 응하는가 하면 가오슝에 등려군기념관을 설립하여 본토 출신 관광객들을 유치하는 사업을 열기도 했었다.[35] 서희원도 중국 본토 사람과 결혼했음에도 정치적인 입장 등등 때문에 대만에 그대로 눌러앉아 있었다. 지금은 결국 이혼하고는 구준엽과 재혼하긴 했다.[36] 마에카와 키요시(前川清)라는 가수가 녹음한 유명한 엔카인 '長崎は今日も雨だった(나가사키엔 오늘도 비가 내리네)' 라는 곡의 번안곡. 원곡은 일본에서는 국민가요 수준으로, 나가사키를 상징하는 대표곡 중 하나다.[37] 한국의 듀오 그룹 두리안이 'I'm Still Loving You'라는 제목으로 번안해서 불렀다.[38] 장국영 혹은 그 외 여러 가수들도 이 노래를 커버했는데 커버한 사람들마다 음원에서 的을 원곡처럼 'di(디)'로 부르거나 'de(더)'라고 부르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한국인 입장에서는 느낄 수 없지만 대만 등 남부 중화권에서는 的를 '더'가 아니라 '디'로 발음하면 좀 더 여성적인 느낌이 난다고 한다. 장국영은 남자여서 굳이 '디'로 발음할 필요가 없었다. 2016년 6월 홍진영이 원곡과 번안곡을 리메이크한 앨범을 발표했다.[39] 중국인들에게 '첨밀밀'과 함께 가장 많이 알려진 곡.[40] 일본에서 테레사 텡 명의로 발표된 '時の流れに身をまかせ'의 번안곡이다.[41] 왕가위 감독의 영화 타락천사의 삽입곡으로 유명하지만 영화에 삽입된 음원은 등려군의 곡이 아닌 관숙이(關淑怡)라는 가수가 리메이크한 곡이다.[42] 1930~40년대 상해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주선(周璇)이라는 가수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곡으로, 그녀의 노래들은 수많은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었는데 대표곡으로 '夜上海(야상해)', '天涯歌女(천애가녀)', '花樣年華(화양년화)', '永遠的微笑(영원적미소)' 등이 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가 그녀의 노래에서 제목을 따 왔으며 그 곡이 영화에 삽입되기도 하였다.[43] 姑娘 시리즈에서 가장 유명한 노래. 등려군의 노래들 중 제목이 '姑娘'으로 끝나는 노래들을 팬들이 '姑娘 시리즈'라고 부르기도 한다.[44] 이 사람이 가장 즐겨듣던 애청곡이었다고 한다.[45] 소식의 사인 水調歌頭(수조가두)에 곡을 붙였는데 왕비의 리메이크로도 유명하다.[46] 중국적인 느낌이 강한 곡. 중국에서는 줄여서 '江水悠悠'라고 표기하기도 한다.[47] 영화 댄서의 순정에서 문근영이 부른 OST인 '그댄 몰라요'의 원 버전이다. 극중에서 중국어로 부르기도 했다. 원곡은 만주국과 일본의 배우 겸 가수 야마구치 요시코(중국에서의 예명은 李香蘭)의 곡으로, 요시코가 부른 일본어 버전도 있다. 원곡 가수 요시코는 등려군보다 33살이나 많아 거의 엄마뻘 정도이지만 등려군이 요절했고 요시코가 장수해서 오히려 등려군이 죽고 나서도 20년이나 더 살았다.[48] 영화 감독 장철이 가사를 쓴 곡으로, 그의 첫 번째 영화 '아리산풍운'의 삽입곡으로 쓰였던 곡을 리메이크하였다. 노래는 대만 원주민 민요를 약간 편곡했다. 참고로 아리산풍운은 대만 원주민에 대해 다룬 영화로, 대만 광복 후 최초의 극영화라 알려져 있고 장철의 첫 번째 영화, 즉 감독 데뷔작이다.[49] 渡哲也(와타리 테츠야)의 'くちなしの花(치자나무의 꽃)' 의 번안곡으로, 원곡은 후카사쿠 킨지 감독의 'やくざの墓場(야쿠자의 무덤)'이라는 영화의 주제곡으로 사용되었다.[50] 森森(삼삼)이라는 여가수의 곡을 리메이크했다.[51] 위의 제목 규칙에 따라 한국어 독음으로 기입. 오다 테츠로가 작곡하고 ZARD가 작사했다.[52] 한명숙의 '노란 샤쓰의 사나이'의 번안곡. 이 곡은 동남아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끌었으며 대만에선 1967년에 사뢰(謝雷)라는 가수가 1967년에 최초 녹음하였고 등려군은 10대 시절인 1968년에 녹음하였다.[53] 'Those were the days(by Mary Hopkins)'의 중국어판이다.[54] 일본의 가수 센 마사오가 부른 일본 엔카인 봄 노래 키타구니노 하루를 표준 중국어로 번안하여 부른 노래.[55] 原大輔(하라 다이스케)의 동명 원곡을 커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