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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7 18:23:10

건전가요

1. 개요2. 역사
2.1. 민주화 이후 건전가요
3. 대표적인 곡4. 음반 수록 형태5. 평가6. 외국의 비슷한 사례7. 관련 문서

1. 개요

대한민국제4공화국제5공화국 시기에 강제로 지정, 보급한 노래. 표면적으로는 건전한 대중가요라는 뜻을 담고 있으나 그 실상은 박정희-전두환 정권을 찬양하는 어용 선전매체였다.

건전가요는 대개 정권에 대한 찬양을 담고 있었으며, 직접적인 정치성이 없는 경우에도 대한민국을 예찬하는 정도의 내용을 갖추었다. 후자는 그나마 나은 편이지만 그 배경에 따라서 가수나 엔터테인먼트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이루어졌기보다는 정부기관과 공안당국의 묵시적인 강요에 의해 우러나온 산물로 해석할 수 있겠다.

대부분의 가요 음반의 맨 마지막 트랙에 건전가요가 수록되어야 했다. 국가가 정하여 강제로 보급한 건전가요는 금지곡 제도와 함께 당시의 음악에 대한 규제를 잘 드러내는 규정이다. 상대되는 개념을 가진 단어로 민중가요가 있다.

2. 역사

건전가요는 해방 이후 통용된 용어이나 그 기원은 일제강점기에서 출발한다. 일제는 식민지정책의 일환으로 전방위적으로 노래를 통제하였는데 ‘가정가요운동’이란 이름으로 시행되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일제는 한국을 전선보급기지인 ‘총후’(銃後)로 규정하고 총후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조선문예회」를 발족하여 가요정화운동을 벌였다. 1940년대에는 일제의 전시체제를 위해 만들어진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주도로 국민가곡, 혹은 국민가요라는 명칭으로 국민개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렇듯 일제에 의해 전개된 일련의 가요정화운동과 국민개창운동은 일제의 지배 정책에 의해 수행된 관제노래운동이었다.

해방이후에도 건전가요운동은 지속되어 1949년 7월 공보처 내 「선전대책위원회」를 통하여 국민가요를 공모하였는데 이때 선정된 「일터로 가자」, 「저축의 노래」 등은 해방이후 첫 건전가요에 해당한다. 1957년 문화공보처에서 전파를 타고 유행되는 대중가요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건전가요의 제작과 보급에 노력하게 되었다. 이때 애창된 노래로는 박시춘 곡 「금수강산에 백화가 만발하였구나」, 이재호 곡 「고향에 찾아와도」, 송민영 곡 「청춘목장」, 손석우 곡 「소녀의 꿈」, 김교성 곡 「고향역」, 전오승 곡 「여반장」, 나화랑 곡 「산골처녀」, 황문평 곡 「꽃중의 꽃」 등이 있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방송국 제작자들을 중심으로 「가정가요운동」이 전개되었고 음악방송의 기준을 마련하여 시행하였다. 1960년대 건전가요로는 「잘살아보세」, 「올해는 일하는 해」, 「살기좋은 내고장」 등이 있다.

그 이후에도 문공부에서는 계속 건전가요 보급을 위해 건전가요보급위원회를 조직, 순수음악가측와 대중가요측 인사들, 유명시인들도 참여시켜서 해마다 건전가요를 만들어 레코드를 보급하였다. 1976년 공연윤리위원회에서도 「애국가요 권장방안」을 발표하였는데 이때 선정된 애국가요로는 박정희 작사·작곡의 「나의 조국」, 박목월 작사·김성태 작곡의 「대통령찬가」를 비롯하여 여러곡이 있다.

1980년대 건전가요는 노래의 정서가 상업적인 대중가요의 정서와 비슷하여 방송 가요프로그램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는데 특징이 있다. 정수라의 「아 대한민국」, 인순이의 「아름다운 우리나라」, 윤시내의 「공부합시다」 등이 그것인데 이런 가요들은 ‘신국민가요’로 칭해졌다. 공연윤리위원회는 1979년에 건전가요의 ‘음반삽입의무제’를 시행하여 새 음반을 발매할 때 마다 건전가요 한곡을 반드시 수록하도록 하였고 건전가요 목록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1980년대의 음반에는 음반의 마지막 순서에 음반 기획과 관계없는 건전가요 한 곡이 짧게 수록되는 관행이 생겼다. 그러나 건전가요운동과 음반삽입의무제는 보급목적과 달리 ‘관제가요’라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1. 민주화 이후 건전가요

21세기 인터넷, 특히 네이버 뮤직엠넷닷컴에서는 건전가요라고 검색하면 1970~80년대의 대표적 가수의 음반이 나오며 꼭 마지막 트랙으로써 실려있다. 저작권과 관계가 없으면 청취 가능하다.

"휘날리는 태극기", "이기자 대한건아", "유신의 노래", "조국찬가" 같은 군가 성향의 건전가요들은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까지 국민학교 음악 교과서에 실려 있었으며 대부분 교사 재량으로 스킵되었으나 일부 학교에서는 국민학생[1]들이 직접 부르기도 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군사정권 시절의 잔재가 아닌 일부 노래들은 6.25의 노래처럼 참여정부 시기까지 초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려 있기도 했다.

1990년대까지도 그 여파가 남아서 그런지 많은 앨범의 마지막 곡에는 건전한 가사의 노래가 실려 있던 앨범이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듀스의 여름안에서[2]가 있다. 2000년 즈음부터는 기존의 건전가요는 거의 자취를 감췄는데 대부분의 가수들이 정식앨범보다는 싱글앨범을 내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현재는 주로 비유적인 의미로 사용되는데 그 가수의 성향과 다르게 가사 내용이 비교적 건전하거나 가사에 공익적인 내용이 있다면 이를 가르켜 비유적으로 건전가요라고 부르는 식이다.

특히 민주화 이후로는 조롱의 의미나 퍼포먼스적으로 건전가요를 내는 경우도 있었다. 신해철윤상의 프로젝트 앨범인 노땐스의 앨범 골든힛트에 '시장에 가면'이라는 제목의 트랙이 있는데 모든 음원 사이트에서도 들을 수 없으며 앨범에도 재생 시간이 0:00초라고 나온다. 이는 1980년대 초반에 건전가요를 음반마다 한 곡씩 의무적으로 넣어야 했던 정책을 풍자하기 위한 페이크 트랙이며 '시장에 가면'이라는 제목의 노래가 건전가요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자주 수록되었다는 것도 반영한다.[3]

올라이즈 밴드의 2005년에 발매된 3집 음반에서도 '건전가요(?)'라는 제목의 노래가 실려있으나 실질적 의미는 항목이 서술한 건전가요의 정의와 정반대이며 가사에는 욕설이 가득하다. 아이유가 2014년에 발매한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의 LP에도 B면 마지막 트랙에 건전가요 '어허야 둥기둥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는 정해진 의미가 없이 그저 7080 시절의 레트로한 감성의 분위기를 재현해내기 위한 의도적 연출이다.

이렇듯 민주화 이후로 과거와 같은 의미의 건전가요는 추억이 되고 있지만 아예 없어진 것은 아니다. 현재도 사회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가수들이 연합하여 우리하나되어 같은 곡을 내면서 아직도 간간이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곡을 내는 빈도 자체는 적어졌지만 자발적인 참여와 당시 상황 등이 겹치면서 과거 형식적으로 내던 건전가요보다 오히려 사회적인 울림은 더 커졌다고 볼 수 있다.

3. 대표적인 곡


특히 정수라가 부른 것으로 유명한 '아! 대한민국'은 무지막지하게 사용해댔다. 작사자 박건호는 건전가요로 작사하기는 했지만 특정 정권에 아부하기 위해 쓴 작품이 아니었고 이상적인 국가에 대한 본인의 바람을 솔직히 쓴 것이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작사자의 의도를 생각하면 건전가요보다는 민중가요에 가깝지만 많이 사용했던 이유도 건전가요치고는 정치성이 떨어지고 곡이 들을 만해서 넣는 입장에서도 좋고 청자들의 반감도 덜 샀기 때문이다.

김민기아침 이슬은 건전가요로 지정되었다가 긴급조치 9호에 의해 금지곡이 되기도 하였다. 곡에 등장하는 태양김일성 혹은 공산주의를 연상시킨다는 소문은 덤. 태양은 대한민국 정부, 묘지는 민중 혹은 민주주의가 죽은 대한민국, 한낮의 찌는 더위는 정부의 민주주의 탄압, '나'는 민주화 운동가라는 해석이 붙는 등 온갖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군가 등 정부에서 보급한 노래들은 장르 관계없이 건전가요에 해당됐다.

4. 음반 수록 형태

파일:들국화_2집_트랙리스트.jpg

들국화 2집.

음반에는 대개 마지막 곡으로 건전가요가 실렸다. 일례로 조용필 9집까지에는 목록을 보면 맨 마지막 트랙에 건전가요가 꼭 수록되어 있다. 수록된 노래만 해도 군가인 "너와 나", 건전가요인 "산마을", "어허야 둥기둥기", "오빠 생각", "진짜 사나이", "서로 믿는 우리마음" 등 당대의 건전가요를 총망라했다. 그러다보니 당시의 청취자들은 대부분 막곡은 알아서 거르고 거기서 레코드판이나 테이프를 돌렸고, 음반 잘 듣다가 갑자기 군가나 장르에 맞지 않는 좀 이상한 노래가 나온다 싶으면 다들 오디오를 그냥 꺼 버렸다.

A면의 끝이나 CD 1의 끝에 건전가요를 수록한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 MP3로 발매된 음반을 구입하면 앨범의 한가운데에서 뜬금없는 노래가 튀어나온다. 이선희 1집에 수록된 "빛의 자손들"(12개 곡 중 6번째), 3집에 수록된 "도요새의 꿈"(12개 곡 중 5번째) 등.[5]

1980년대 최고의 명반에 뽑히는 이문세 음반과 유재하 1집에도 건전가요가 실려 있었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동요 음반조차도 예외는 아니어서 당시 발매된 가수의 캐럴 음반에도 건전가요가 수록된 사례가 있다. 1970년대 말~80년대 초 '똑순이'로 유명했던 아역 배우 김민희가 부른 크리스마스 캐롤 음반의 마지막 트랙은 뜨악하게도 '공군가'였다. 코미디언이 낸 음반에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심형래의 음반에는 캐롤 분위기와 달리 '우리의 서울'이라는 노래가 실려있었고, 록 음반도 예외는 아니라 부활 1집인 'Rock Will Never Die'에서도 맨 마지막에는 건전가요가 수록되었다. 한국 최초의 헤비메탈 앨범으로 평가받는 시나위 1집 앨범에도 마지막에 '아 대한민국'이 들어있어 헤비한 분위기를 확 깨주신다.

그래서 전인권의 "액막이 타령", 이문세의 "어허야 둥기둥기" 처럼 직접 불러도 됐고 조영남혜은이의 사례처럼 다른 사람이나 악단 등이 부른 곡을 넣어도 됐다. 곡이 어떤 것이냐 및 수록을 했느냐만 검열했지 이 부분까진 크게 터치하지 않았다. 특히 군가 등 정부가 보급한 곡을 썼다면 그대로 복붙해 넣은 경우가 많다.[6]

예외적으로 들국화 1집 초판에 수록된 '우리의 소원'은 상당히 잘 어울려서 당시 들었던 팬들 사이에서 그리워하는 목소리가 많다. 하지만 초판 이후 삭제되었다.

아세아레코드에서 발매한 음반은 '온 국민이 함께 부르는 노래'로 표기했었다. 지구레코드는 사회정화추진위원회와 함께 공동기획했다. 오아시스에서도 별도로 건전가요 앨범을 판매했다.

5. 평가

해방 이후 시도된 건전가요 운동의 논리적 시작은 왜색가요말살과 민족 주체성을 찾는 운동의 성격을 가졌으나 일방통행적인 것으로서 감정적인 역효과를 내었다고 할 수 있다. 정부나 관 주도로 보급된 건전가요는 당시 심의제도를 통해 양산된 수많은 금지곡과 함께 국민에 대한 효과적인 이데올로기적 통제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건전가요는 발상 자체가 일제의 전시체제에서 식민지 지배 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노래통제 정책과 비슷하게 권위주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6. 외국의 비슷한 사례

대만에서도 건전가요 같은 것으로 보이는 것이 있는데 "아! 대한민국"과 같은 급에 가까운 중화민국송이라는 노래도 있으며, 매화라는 노래와 국은가경(國恩家慶)이라는 노래도 있다.[7] 북한이나 중국, 구 소련 같은 나라에서도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다.

중국은 이런 노래들이 세계에서 제일 많은 국가다. CCTV3에서 중국을 찬양하는 곡들을 자주 방영하고 신곡들을 소개하기도 한다. 공산당이나 마오쩌둥을 직접 언급하며 찬양하는 곡과 단순히 중국의 아름다운 자연이나 밝은 미래를 언급하는 곡으로 나뉜다. 인기있는 곡들은 거의 국가에 버금가는 취급을 받는다. 국가인 의용군 진행곡도 원래는 건전가요였다.

7. 관련 문서



[1] 1995년까지는 국민학교, 1996년부터 초등학교이다. 국민학교를 조금이라도 다녀 본 사람은 2024년 기준으로 최소 30대 중반이다.[2] 한 인터뷰에서 마지막 트랙채우기용으로 거의 건전가요급의 가사를 실었는데 이게 터질줄은 몰랐다고 언급했다.[3] 소방차 1집의 마지막 곡의 제목도 '시장에 가면'이다.[4] 이문세 3집에서 이문세가 직접 불렀다.[5] 2집의 건전가요는 B면 끝에 수록된 "이 세상의 어린이"이고, 4집부터는 없다.[6] 예외로 조용필은 9집에서 진짜사나이를 무반주로 부르기도 했다.[7] 여담으로 쯔위를 비난했던 황안이 이 노래를 불렀던 게 발굴되면서 이중적인 태도가 큰 비판을 받아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