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6년에 채택된 라트갈레의 군대 문장.
1. 선사
(이후 추가 바람)2. 역사
2.1. 고대
고대 이전의 머~나먼 과거부터 지금의 발트(Balt) 라트비아(Latvia)의 라트갈레(Latgale) 지역에는 발트슬라브족의 하위 분류인 발트족의 무리인 동발트족(Eastern Balts)의 부족들 중 하나인 라트갈레족(Latgalian tribe)이 거주해왔고, 나머지 라트갈레족들은 러시아(Russia)에 있는 오늘날의 프스코프(Pskov) 주와 벨라루스(Belarus)에 있는 비쳅스크(Vitebsk) 주의 일부 지역들에서 거주했왔다.[1]2.2. 중세
라트갈레의 루자 구역에 위치해 있는 중세 시대 라트갈레 유적.
라트갈레의 본격적인 수난의 시대가 시작된다.
2.2.1. 리보니아의 침공
예르시카 공국과 아트젤레 공국의 영토가 위치해 있던 영역.
10세기 ~ 12세기, 발트족들이 세운 두 공국들인 예르시카 공국(Principality of Jersika)과 아트젤레 공국(Principality of Atzele)이 오늘날의 라트갈레 지역과 비제메(Vidzeme) 지역의 동부 지역에 존재했었다.
13세기 초인 1201년 ~ 1209년, 렛치아(Lettia)로도 알려진 예르시카 공국은 리보니아의 감독회(Bishopric of Livonia)에 맞서 대항하여 폴라츠크 공국(Principality of Polotsk), 리투아니아(Lithuania) 공작들과 동맹을 맺었지만, 1209년에 결국 패배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일부 지역들은 감독회와 리보니아 검의 형제기사단(Livonian Brothers of the Sword) 양측으로 분할되어졌고, 나머지 지역들은 신하국(vassal country)이 되었다.
1239년, 왕 비스발디스(King Visvaldis)의 사망 이후, 나중에 리보니아 기사단(Livonian Order)의 영토 안으로 완전히 병합되어졌다.
1242년, 얼음 위의 전투(Battle of the Ice)라고도 불리는 페이푸스 호 전투에서 패배한 후, 라트갈레의 동부 구역인 로티골라(Lotigola)는 오늘날 러시아의 노브고로드 주(Novgorod Oblast)인 노브고로드 공화국(Novgorod Republic)에 잠정적으로 넘겨졌다.
1263년, 리보니아 기사들(Livonian knights)은 오늘날 라즈나 국립 공원(Rāzna National Park)에 속하는 라즈나 호수(Rāzna Lake) 근처에 볼켄부르크 성(Volkenberg castle)을 짓기 시작했다.
1277년, 리투아니아(Lithuania)의 대공 트라이데니스(Grand duke Traidenis)는 새롭게 지어진 다우가프필스(Daugavpils)의 성을 포위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1481년 ~ 1493년, 중간에 러시아의 대공인 이반 3세(Grand Prince Ivan III)는 일시적으로 라트갈레를 점령했다.
리보니아 전쟁(Livonian War) 동안, 라트갈레는 리투아니아 대공국(Grand Duchy of Lithuania)에 의해 병합되었다.
1569년, 그러던 중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폴란드 왕국(Kingdom of Poland)과의 동군연합을 이룸에 따라, 라트갈레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Polish–Lithuanian Commonwealth)에 속해지게 된다.
1577년, 세력이 커진 러시아의 이반 4세(Ivan IV)가 라트갈레를 병합했다.
1582년, 잠 자폴스키의 휴전(Truce of Jam Zapolski)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리보니아(Livonia)에 그의 주장들을 단념(renounce)해야만 했다. 그렇게, 라트갈레는 다시 리보니아의 치하에 들어가게 된다.
1621년, 대부분의 리보니아 대공국(Duchy of Livonia)은 스웨덴 제국(Swedish Empire)으로 양도(cede)되어졌지만, 라트갈레를 포함한 대공국의 일부 지역은 폴란드-리투아니아(Polish-Lithuania)의 지배 하에 남게 되었다. 이것은 인플란티 보이보더쉽(Inflanty Voivodeship)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2.3. 근대
오늘날의 라트갈레 지역.
폴란드 인플란티(Polish Inflanty)의 창설로 인해 드디어 우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라트갈레 지역이 발생한다.
이 기간 동안에 라트갈레의 방언(Latgalian dialect), 즉 라트갈레어(Latgalian language)는 폴란드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게 되었고, 라트비아의 다른 지역들 안에서 라트비아 구어로부터 별도로 발생하게 되었다.
1722년, 라트갈레는 러시아 제국(Russian Empire)에 의해 병합되어졌다.
1865년, 러시아의 반폴란드 정책들(Russia's anti-Polish policies)의 일부로서 러시아화(Russification)가 시작되어진 기간 동안에 라트갈레어는 금지되어졌다.
1904년, 비로서 이 금지는 해제되었고, 라트갈레어 재각성(부흥)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2.3.1. 독립 선언
라트비아 공화국의 독립 선언을 하고 있는 모습.
1917년, 레제크네 회의(Congress of Rēzekne)에서 라트비아의 나머지 지역들과 함께 많은 라트갈레 공식 모습들이 재통합한 반면에, 몇몇은 자치나 러시아 안으로 병합을 선호했다.
1918년 11월 18일, 라트갈레 지역들을 라트비아 국가의 일부로 주장한 독립 선언과 앞선 의회의 결정은 라트갈레 지역의 해방을 위해 싸우는 라트비아 군과 지역 당원 모두를 이동시켰다.[2]
1920년, 드디어 라트갈레는 라트비아의 안으로 병합되어졌으며, 1920년의 평화 협정에 의해 소련 러시아 비쳅스크 주와 프스코프 주의 일부 지역들은 새로운 라트비아 공화국(Republic of Latvia) 안으로 병합되어졌다.
다른 민족들의 라트비아 영역은 독립 선언서에 의해 주장되어졌으며, 통합되지 못하고 결국 나중에 그들은 다우가프필스과 루자(Ludza), 레제크네(Rēzekne), 자운라트갈레(Jaunlatgale), 이후의 아브레네(Abrene) 구역들을 형성했다.
1944년, USSR(소련)에 의한 라트비아의 두 번째 정복의 시작, 아브레네를 포함한 아브레네 구역의 동부 지방 자치체들(municipalities)은 러시아 연방(Russian Federation) 안으로 병합되어졌다.
3. 현대
1990년 5월 4일, 라트비아는 USSR(소련)로부터 독립과 라트비아 공화국의 복구을 선언했다.[3]그렇게, 소련 연방(Soviet Union)의 붕괴(dissolution) 후에 라트갈레는 오늘날 라트비아 공화국의 문화적인 지역들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몇몇 러시아인들은 아직까지도 러시아 안으로 라트갈레가 편입되어 재결합을 하기를 선호하고 있다.
2014년 4월, 모스크바(Moscow)의 라트비아 대사관(Latvian Embassy) 앞에서 일어난 작은 시위에 의해 그들의 주장들이 입증되었다.[4]
[1] 현재는 대부분 슬라브족에 동화되었다.[2] 이후로도 매년 11월 18일 라트비아 공화국의 독립 선언 기념일(Independance Proclamation Day of the Republic of Latvia)을 국경일로 지정하여 우리나라의 광복절처럼 휴일이 되었으며, 만약 그 날이 주말이라면 그 다음주 월요일은 대체공휴일이 된다.[3] 이전의 독립 선언 기념일과 마찬가지로, 이후로도 매년 5월 4일 독립의 회복 기념일(Restoration of Independence day)을 국경일로 지정했으며, 만약 그 날이 주말이면 그 다음주 월요일은 대체공휴일이 된다.[4] 출처: 레타(라트비아 정보 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