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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2 13:42:14

내 차고 안의 용

1. 개요2. 내용3. 상세4. 타조 증후군5. 현명한 접근법6. 차고 안에 용이 없다고 확신하면 독단인가?
6.1. 그렇다6.2. 아니다6.3. 알 수 없다
7. 관련 문서

1. 개요

내 차고 안의 용(The dragon in my garage)은 칼 세이건이 집필한 책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The Demon-Haunted World)[1]≫에 등장하는 비유다.

'내 차고 안의 용'은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의 전반부를 꿰뚫는 하나의 명제로, 세이건은 이 명제를 통해 현대에 만연한 심령술, 초심리현상, 점성술 등의 존재를 '건전한 회의론'적 관점으로 바라볼 것을 역설한다. 여기에서 언급된 수많은 검증은 이러한 회의론을 위한 도구이자 회의론 그 자체다.

위의 내용이 담긴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은 현대에 만연한 음모론, 초능력 사기, 외계인론, 기술신화 등에 반박하고 과학적 사고에 기반을 두어 건전한 회의론으로 돌아갈 것을 설토하는 내용이며, 현대 인문, 사회, 자연과학의 기본이 되는 '건전한 회의론'을 역설한 책이다.

해당 도서는 국내에서 2001년에 김영사에서 출간되었다가 절판되었지만, 2022년에 사이언스북스에서 개역판이 출간되었다. 번역에 관해서는 토머스 홉스리바이어던을 '리바이 언덕'으로 번역했던 구판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부족한 면을 보인다. 예를 들자면 37페이지에서 '유사 과학은 강력한 감정적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과학은 이런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유사과학은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지 않지만 갈망하는 개인적인 힘에 대한 환상을 부추긴다.[2]'이라는 오타가 버젓이 나온다.

세이건은 대중화를 소홀히 한 과학의 틈새를 사이비 과학이 재빨리 채웠다며, "어떤 것이 지식임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수용되기 전에 적절한 증거를 제공해야 한다는 점을 사람들이 널리 이해했다면 유사과학이 발을 붙일 여지가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내 차고 안의 용을 통해 적절한 증거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2. 내용

"우리 집 차고에는 불을 뿜는 용이 살고 있다."

내가 진지하게 그런 주장을 한다고 가정해보자. (다음은 심리학자 리처드 프랭클린(Richard L. Franklin, 1925년~)의 집단 치료법을 따른 것이다.) 물론 당신은 직접 보고 싶을 것이다. 용 이야기는 지난 몇 세기 동안 수없이 회자되어왔지만, 증거라고 할 만한 것은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대단한 기회가 아닌가!

"보여 주세요."라고 당신이 말한다. 나는 차고로 당신을 안내한다. 안쪽을 들여다보니 사다리와 빈 페인트 깡통과 오래된 세발자전거가 보이지만 용은 보이지 않는다.

"용은 어디 있습니까?" 당신이 묻는다.

"용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나는 어정쩡하게 손을 흔들면서 대답한다. "이 용은 보이지 않는 용이라고 말하는 것을 잊었군요."

당신은 차고 바닥에 밀가루를 뿌려서 용의 발자국이 찍히는 것을 보자고 제안한다.

"좋은 생각이지만, 이 용은 하늘을 납니다."라고 나는 말한다.

그러면 당신은 적외선 감지기를 사용해서 보이지 않는 불을 탐지해 보자고 할 것이다.

"그것도 좋은 생각이지만, 보이지 않는 불은 열도 없습니다."

당신은 용에게 스프레이 페인트를 뿌려 보자고 제안한다. 그러면 보이지 않겠냐고.

"좋은 생각인데요, 우리 용은 물질로 되어 있지 않아서 페인트가 묻지 않습니다."

당신이 물리적 조사 방법을 하나하나 제시할 때마다 나는 이러쿵저러쿵 핑계를 늘어놓으며 당신의 제안을 무효화해 갈 것이다.

그렇다면 보이지도 않고 물질로 되어 있지도 않고 날아다니며 뜨겁지도 않은 불을 뿜는 용이 있다는 것과 용이 아예 없다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나의 주장을 논파할 방법도 없고 나의 주장을 반증할 만한 실험을 생각해 낼 수 없다면, 용이 존재한다는 내 주장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내 가설을 무효화할 수 없다고 해서 내 가설을 참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두 주장은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검증할 수 없는 주장들, 반증할 수 없는 단정들은 아무리 영감이나 경이감을 준다고 하더라도, 진실과 관련해서는 가치가 없다. 내가 하는 이야기는 당신에게 증거 없이 믿어 달라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용이 차고에 산다는 내 주장에서 실제로 알 수 있는 것은 내 머릿속에서 무언가 우스운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뿐이다. 물리적 검증을 단 하나도 할 수 없는데, 나는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일까? 꿈이나 환각을 본 것일까? 꿈이나 환각을 본 것이라면, 어떻게 그렇게 진지할 수 있을까? 아마 나는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의사의 도움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인간의 오류 가능성을 과소 평가했음이 틀림없다.

당신이 마음이 넓은 사람이라고 해 보자. 증거는 하나도 없고 검증 방법도 없지만, 당신은 내 차고에 불을 뿜는 용이 산다는 생각을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틀렸다고는 생각하지만 판단을 유보한다. 현재까지 나온 증거들에 따르면 내가 매우 불리하지만 새로운 자료가 나오고 데이터가 쌓인다면 다시금 조사해 볼 생각을 한다. 그런 당신에게 내가 믿어 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거나 답답하고 상상력이 없다고 비난한다면 부당한 일이 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증명되지 않았다."라는 이유로 내 주장을 온전히 믿지 않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일이 다른 식으로 진행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여전히 용은 보이지 않지만 당신이 지켜보는 동안 밀가루를 뿌리면 발자국이 찍힌다. 적외선 탐지기의 바늘이 떨리며 무엇인가 탐지해 낸다. 스프레이 페인트를 뿌리니 공중에 위아래로 울퉁불퉁한 벼슬이 보이기 시작한다. 당신이 용의 존재를 얼마나 의심하는지 상관없이(보이지 않는 용은 논외로 하자.) 당신은 이제 여기에 무언가가 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보이지 않는 불을 뿜는 용과 모순되지 않는다.

또 다른 시나리오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용이 있다고 주장한 게 나만이 아닌 경우이다. 당신이 아는 다른 사람이, 그리고 서로 모르는 게 분명한 사람들이 모두 자기 집 차고에 용이 산다고 주장한다고 상상해 보자. 게다가 모두 다 증거는 뜬구름 잡듯 모호한 것뿐이라고 해 보자. 다들 물증도 없는데 이렇게나 확신하게 되었다고, 스스로도 당혹스럽다고 말한다. 정신이 이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실제로 전 세계의 차고에는 보이지 않는 용이 오래전부터 살아 왔고, 우리는 그 사실을 이제 겨우 파악하기 시작했을 뿐이라면 어떻게 될까? 나는 오히려 그것이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용에 관한 신화는 고대 유럽과 중국 등 동서양을 가리지 않고 존재해 왔다. 어쩌면 그 신화는 실제로는 신화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용의 발자국 같은 게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나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발자국은 용 회의주의자가 보고 있을 때에는 전혀 만들어지지 않는다. 정밀 조사 결과 발자국이 가짜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시되고 대안적인 설명도 나온다. 이번에는 또 다른 용 신자가 화상 입은 손가락을 보이며 용이 뿜는 불길이 드물게 물리적 작용을 해서 데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다른 가능성이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 용의 숨결 이외에도 손가락을 태우는 다른 방법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증거들은 결정적인 물증이라고 할 수 없다. 용 신자들이 그것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든 말든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현명한 접근법은 용이 존재한다는 가설을 일단 부정하고 장래에 물리적 데이터가 쌓일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 겉보기에 제정신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서로 똑같은 이상한 망상을 공유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고찰하는 것이다.[3]

3. 상세

음모론이나 종교 등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다룬 비유이다.

일반적으로 음모론자들과 종교인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음모론과 의 존재가 진짜라는 증거가 없다는 지적을 받을 때마다 반대로 그게 가짜라는 증거도 없지 않느냐는 반박을 해 왔다. 이를 "파파기아니스의 법칙"이라고 하는데 '증거의 부재는 부재의 증거가 되지 않는다', 즉 어떤 이론이 진실이라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 그것이 거짓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이야기다.[4]

하지만 음모론자들과 종교인이 놓치고 있는 것은 동일한 논리가 반대 방향으로도 적용된다는 점이다. UFO와 전지전능한 인격신이 있다는 증거가 없다고 해서 UFO와 신이 없다고 단언할 수 없듯이, UFO와 신이 없다는 증거가 없다고 해서 UFO와 신이 존재한다고 단언할 수 없다.

칼 세이건은 '보이지 않는 용'을 예시로 들어서 그런 근거 없는 믿음을 비판했다. 보이지 않는 용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도 없고 반대로 없다는 증거도 없다면, 그런 상황에서 해야 할 것은 있다나 없다 중 한 쪽을 증거도 없이 맹목적으로 믿는 게 아니라 '그 생각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고 '용의 가설은 잠시 거부한 채 미래의 물리적인 자료들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라는 것.

세이건은 내 차고 안에 용이 살고 있다는 주장은 결국 나의 독단을 증거 없이 믿으라는 것이라고 일갈했다. 예를들어 진중권신은 안 믿는 사람에겐 존재론적으로 수퍼맨, 아이언맨과 크게 다르지 않은 허구에 불과하다며 성경을 들이대려거든 인간의 해석이 아니라 그분의 뜻임을 입증할 녹취를 따서 공증받아 오라고 했다. 결국 세이건이나 진중권은 대놓고 '없다'고 하지 않고 불가지론적 자세를 취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다른 과학 이론과 대등하게 취급하진 않고 드래곤이나 슈퍼맨과 같은 취급하며 사실상 신뢰하기 힘들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음모론자들은 음모론과 비판적 사고는 종이 한장의 차이라며 미국 정부가 외계인을 은폐하고 있다는 주장은 비판적 사고일 뿐인데, 세이건이 음모론이라는 프레임을 씌워 억압한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자신들을 지동설을 주장한 갈릴레이에 비유하며 회의론자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갈릴레이가 설사 지동설을 맞췄다고 해도 과학적 근거가 아닌 "나의 마음의 울림에서 지동설을 느꼈다"는 둥 아무런 근거가 없는 주장을 했었다면 소발에 쥐잡기 취급 받았을 것이다. 음모론자의 주장이 운좋게 들어맞는 경우도 있기야 있겠으나, 점쟁이 점치는 빈도라면 유의미한 데이터가 아니다. 이는 종교인(세이건은 미국에서 활동했기에 대부분 기독교인인)들의 반발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년에도 수십명씩 자신이 재림예수라거나 야훼 또는 예수, 천사의 은총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미국 전역의 종교학자, 기호학자, 과학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오지만 막상 그들의 주장의 근거를 까보면 아무런 물증이 없다. 결국 신앙이란 입증이 되지 않았다는 측면에선 음모론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다시 갈릴레이의 지동설 건으로 돌아가보면, 과거에 지동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지구를 나가보지 않고도 천체의 움직임을 수학적으로 계산한 결과 천동설은 맞지 않고 지동설이라고 가정했을 경우에 딱 맞아떨어진다는 것을 알아채고 지동설을 주장했다. 즉, 내 차고 안에 용이 실존한다는 믿을만한 증거를 내민 셈이다. 반면 미국 정부가 외계인을 은폐하고 있다는 음모론은, 뭐 '상상은 자유'니까 그렇게 생각은 해볼 수 있겠지만 확실한 물증이 없이 독단적으로 판단했다는 문제점이 있다. 비유하자면, 경찰이 직감적으로 범인 냄새를 맡았을 시 바로 "저 사람이 범인이다! 하지만 증거는 없다"면서 관심법으로 체포하면 음모론자에 가깝고, 설령 의심이 가도 증거가 확보될 때까지는 판단을 보류하며 하나둘씩 증거를 모으다 결정적인 물증이 확보됐을 때 범인으로 체포한다면 회의론자에 가깝다. 특히 경찰들이 확증편향에 빠져 생사람 잡은 사례도 많았으므로 의심병 마냥 근거없이 범인으로 의심하지 말고 가급적 회의론적인 자세로 신중하게 방어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이건의 가르침 역시 긍정이든 부정이든 확실한 증거없이 함부로 판단하지 말란 것이다.

개신교 교인들이 (특히 무신론자를 상대로)전도 활동을 할 때 파스칼의 기독교 변증론을 내세워 '경우의 수'로서 믿는게 낫다는 논리를 들기도 한다. 없으면 믿든 안 믿든 쌤쌤이고, 있으면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므로 믿는 게 이득이란 논리다. 하지만 이런 논리는 다른 경우에도 적용이 가능하다. 그들이 믿지 않는 존재인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이나 '내 차고 안의 용'도 없으면 쌤쌤이고 있으면 좋으므로 믿어야 한단 말인가?[5] 이러한 논리는 심지어 도덕적이지도 못하다. 신을 믿는다면 진심으로 믿어야지, 있으면 좋고 없으면 말고 식으로 신 앞에서 게임을 하며 계산하고 믿는 것을 '신앙'으로 부른다면 그다지 도덕적이지 않다. 신학적으로 바람직한 것도 아닌데, 신이 존재한다는 증명으로 합리적인 전도를 하는 것도 아니고 '일단 믿어라 그래야 내가 천국가지'라고 전도하는 짓은 게르만족에게 포교하던 초기 기독교 선교사들도 안했다.

그나마도 이 세상에 종교가 딱 하나라면야 뭐 믿어서 손해보는 것도 아닌데 믿는게 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종교가 너무 많으니 문제다. 그들이 믿지 않는 종교들과 다른 신에도 적용이 가능하기에 다른 종교들도 믿어야 이득이란 결론이 나온다. 모든 종교 다 믿으면 되지 않냐고 하지만, '유일신'을 표방한 종교들도 있고 교리가 상충되는 부분들이 많아 다 믿으려면 충돌이 난다. 또 단순히 믿고 끝이라면야 손해가 아닐지 몰라도, 해당 종교에 꽤 돈과 시간, 수고를 들여야 하는 종교라면 '신이 없는 경우' 손해가 된다. 예를 들어 히잡을 꼭 쓰고 다니며 기도와 의식에 정성을 들이고 여러모로 자유의 제약을 받는 이슬람 여성들은 만약 신이 없다면 헛고생을 하는 셈인데 손해가 적지 않다.

세이건은 과학에서 신성불가침의 질문은 없다며 과학자들끼리 모여있는 울타리를 벗어나 과학이 더 보편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부에서는 이슬람 여성들이 히잡을 쓰는 전통을 따름으로서 사회적 규범을 단단하게 만들 수 있으므로 과학자들에게 종교에 개입하지 말라고 비판한다. 하지만 "과학은 우리가 가진 최선의 도구일 뿐"이라고 강조하는 세이건은 전세계에서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아동들의 빈곤 퇴치 문제를 위해 과학자들과 정치인들의 노력을 강조하기도 했으니, 연장선에서 종교로 탄압받는 여성들을 보면 '내 차고 안의 용'을 떠올리며 비판적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일장일단'인 만큼 종교를 통해 마음의 안정을 얻거나 공동체의 결속력을 강화한다든지 장점은 분명 있으며 세이건도 일정 부분 종교의 순기능을 인정하긴 했다. 하지만 아동과 여성 등의 '인권'을 중시하는 세이건 입장에서는 종교를 위해 여성들의 자유와 인권을 희생시킬만한 가치는 있는가라고 '신성불가침한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는 것이다. 또 어느 빈곤한 국가가 '내 차고 안의 용'을 기린다며 막대한 돈과 희생(노동력 등)을 갈아넣어 크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짓는다면 차라리 그 돈으로 굶주린 아이들 먹을 거 사주고 농업 연구에 투자를 하는 것이 낫지 않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세이건은 '내 차고 안의 용'이 수록된 '악령이 출몰되는 세상'에서 "사후 세계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종교나 국가가 팔아먹기에 좋은 것이었다. 그 증거가 거의 무(無)에 가까울 정도로 희미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믿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라고 비판한 대목이 있기에 '내 차고 안의 용'과 연관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책에서는 정치, 사회, 종교, 문화 등 총망라했기에 일부에서는 왜 과학이 개입하냐며 사회는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고 지적하나, 엄연히 '사회과학'이라는 분야가 존재한다. 과학이 사회와 동떨어진 학문이라면 우생학도 연구를 이어나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 '흑형'이라든지 분명 인종간 신체적 특성이나 지능적 특성이 있을 것도 같으니 순수하게 학문적 차원에서 연구 못할 이유는 없지만 금기시되고 있다. 차별이라는 사회문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애초 모든 연구에는 '돈'이 들어가므로 국가와 기업 등의 투자를 받으려면 국가가 원하는 분야나 상용화 가능성이 있는 분야에 치중할 수밖에 없다. 줄기세포 연구에 장애인들이 환호한 반면, 윤리적인 논쟁도 벌어지며 종교계 등에서 비판했던 것처럼 과학자에게 연구 주제와 윤리 문제는 밀접하므로 과학자에게 왜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냐는 것은 우문일 수도 있다. 시민단체, 종교단체가 연구에 개입하기 때문이다.

세이건이 유사 과학과 미신의 전형적인 헛소리로 꼽은 것 중 하나가 "임사 체험 같은 유체 이탈 체험은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외적 체험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흔히 사후세계를 경험했다는 사람들은 죽음에 임박했을 때 자신의 모습을 봤다며 증거라고 하나, 그렇다고 하기엔 가위 눌렸을 때도 몸이 붕 떠올라서 자신의 모습을 봤다는 체험담도 많고, 명상으로 유체이탈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널려 있다. 왜 이런 체험을 하는지 의문을 갖는 사람들에게 노벨상 과학자가 쓴 '신비의 사기꾼들'이란 책에서 힌트를 찾을 수 있다. 먼저 이 책에선 이렇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 아침밥을 먹는 모습을 떠올려 보라고 한다. 그리고 다음 페이지에서 당신은 이렇게 떠올렸을 것이라며 그림을 보여주는데, 그 그림은 내가 1인칭이 아닌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밥을 먹고 있는 것을 바라보는 형상이다. 그러면서 우리 기억이란게 컴퓨터 캡쳐하듯 그대로 저장하는 것이 아닌 '가공'을 거친다고 한다. 따라서 자신의 모습을 명상이든 꿈에서든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뭐 딱히 특이한 현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아침밥을 먹는 모습을 3인칭으로 떠올린 사람들은 유체이탈을 하여 자신의 모습을 봐서 그렇게 기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명상이나 최면으로 유체이탈을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오래 전부터 있었는데, 문제는 '초능력자 사냥꾼' 어메이징 랜디를 보면 다들 빤스런 한다는 것이다. 세이건은 '투시'도 비판했는데, 90년대 한국에선 투시를 배울 수 있다는 열풍이 불었다. 투시학원도 존재했고 투시 배우기 책 따위도 나오고 무책임한 방송사들로 인해 확대 재생산 됐었는데, 랜디가 출연한 SBS '도전 백만달러 초능력자를 찾아라'에서 투시 능력자들에게 도전해보라고 연락하자 다들 잠수탔다. 다른 방에 있는 것을 알아맞추는 실험은 투시든 유체이탈이든 둘 중 하나는 증명할 수 있는 실험이므로 가능하다면 랜디에게 도전을 하면 좋을 텐데, 아무도 랜디에게는 얼씬도 하지 못했다.[6] 게다가 혼수상태에 임박한 사람들이 겪은 환각이 유체이탈 경험담으로 많이 나도는데, 혼수상태에서 기억 못하는 많은 사람들은 묻히는 반면, 특이한 경험을 한 사람들만 집중조명 받으니 '생존자 편향'에 걸릴 수 있다. 또 한두 사례만 보면 신기하지만 확장할수록 큰 수의 법칙에 걸린다. 경험자들의 세부사항이 너무나 다르다. 염라대왕과 거래를 했다는 둥(날 살려주는 대신 누구를 데려가달라), 저승사자가 데려갔다는 둥, 조상들이 와서 데려갔다는 둥, 누가 갑자기 멱살 잡더니 발로 차서 깨어났다는 둥(발로 차는 순간 심장충격기가 들어갔는데 꿈에서도 누가 소리지르는 순간 알람이 울리며 깨기도 한다) 귀신방송에서 몇개 모아놓은 것도 일화들이 너무 중구난방인데, 방송에서도 그 점을 의식했는지 "빛을 봤다는 공통점이 있다"면서 억지로 공통점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아기들도 빛에 반응하고 인간과 빛이 얼마나 밀접한지를 떠올려 보면(생체시계가 빛으로 돌아간다) 환각상태에서 공통점이 빛을 본 거 외에 없다는 것은 일반화할 수 없는 개인의 경험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세이건은 체험담들이 자신이 속한 문화권을 벗어나지 않는 한계를 보인다며 그 문화권에선 클리셰에 가까울 정도로 익숙한 이미지란 점을 지적했다. 알라신의 이슬람에선 알라를 보고, 조상신을 모시는 유교문화에 심취한 한국인은 조상님들이 일렬종대로 헤쳐모여 데리러 왔다고 하고, 기독교인은 하나님과 빛을 보는데, 이런 얘기들이 익숙하게 느껴진다면 이미 그 사람의 잠재의식 속에 각인된 기억인 셈이다. 세이건이 이 책을 저술할 당시 미국에선 UFO가 화제였기에 저서에서 UFO 체험담에 관한 분석이 많은데, 한국에서 후기를 보면 UFO 부분은 한국에서는 UFO가 그다지 유행하지 않았기에 잘 공감이 안간다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UFO 얘기에 별로 공감하지 못하는 한국에선 UFO가 잘 나타나지 않는다. 또 한국인이 외국에 놀러갔다가 사고를 당해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본인이 전혀 알지 못하는 그 나라의 현지어를 쓰는 저승사자를 만나서 정확히 기억해낸다면 이것은 나름 블라인드 테스트 통과한 셈이지만, 한국어 쓰는 익숙한 저승사자를 본다면 그냥 자기의 잠재의식대로 보는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 있다.

4. 타조 증후군

칼 세이건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내가 분명 외계인 또는 신을 '느끼고' 있는데 그까짓 증거가 뭐가 중요하냐고 반문한다. 더 나아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은 자신의 생각이 그것을 끌어왔기 때문이라며 원하는 걸 상상하라는 "끌어당김 법칙"-더 시크릿이라는 것까지 고안해낸다. 하지만 임신을 하는 상상을 하면 실제로 임신이 되는 것이 아니라 상상임신이 될 뿐이다. 원래 믿는대로 느껴지고 몸이 반응하므로 정신승리하면 온 몸에 승리의 전율과 쾌감이 느껴지지만 그냥 행복회로라고 비하될 정도로 자기합리화라는 방어기제에 의한 위안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의처증에 걸릴 정도로 아내를 의심하면 정말 바람피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뇌내망상'에 불과할 수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소망의 실현을 상상하는 맹목적인 심상화는 진통제처럼 정신적 고통은 가라앉혀주니 마르크스의 유명한 문구 중 하나인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가 학계서 논의된 원문의 진의와는 다르게 자주 인용될 지경.[7] 진통제를 남용하면 통증이 없으니 모든 게 다 해결된 것 같지만 단지 느끼지만 못할 뿐이다.

세이건은 저서에서 '뇌내망상'에 심취한 여배우에 대한 일화를 언급했다. 그 여배우가 세이건을 보고 "당신은 내 마음이 만들어낸 환영"이란 식으로 말을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금 당장 상상하라, 원하는 모든 것이 현실이 된다"는 사람들도 있으나, 그렇다면 '뇌내망상'이란 말도 없을 것이다. '뇌내망상'에 심취하면 현실이 된 것처럼 느껴지는 것 뿐이지, 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이 사기꾼을 은행원이라고 믿고 대출을 더 해준다는 말에 기뻐하며 대출받는 상상을 해도 현실은 시궁창일 뿐이다. 특히 스토커들은 뇌내망상이 심각하여 여자가 속으로는 자신을 좋아하는데 부끄러워서 저런다는 둥 망상으로 계속 접근하여 사달이 나곤 한다. 젊은 시절 고학력자에 미모의 여성이었던 '맥도날드 할머니' 권하자는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리란 믿음을 중년을 넘어 할머니가 될 때까지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으로 기다렸으나, 안타깝게도 끝내 왕자는 나타나지 않아 성냥팔이 소녀처럼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성냥팔이 소녀도 마지막에 환상을 보며 사망하지만 그것도 '뇌내망상'이었다. 분명 맥도날드 할머니는 순수한 소녀 감성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으나, 마음과는 달리 생로병사는 피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원효대사 심리'를 가지고 있다.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모르고 마실 땐 꿀맛이었다가 해골물인걸 알고서는 역겹게 느꼈는데, 이런 플라시보 효과로 인해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는 것이다. 이렇듯 세이건처럼 과학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은 인간의 감성은 불완전하니 '객관적인 증거'로 세상을 이해하고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주술적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은 원효대사가 맛있는 물이라고 믿었을 땐 맛있었던 것에 주목하여 성공한 사람들은 성공을 상상했기에 성공한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2018년 올해의 과학 도서상 수상작인 '우연은 얼마나 내 삶을 지배하는가'에서 말하길, 성공의 법칙은 '생존자 편향'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일례로 패가망신한 도박중독자가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말해봐야 "형 정신차려! 형은 시발 아무것도 없는 병신이야!"란 비난만 듣고 묻힐 수 있는 반면, 성공한 사람은 주목을 받으니 마치 꺾이지 않는 마음이 성공의 비결처럼 보일 수 있다. 연장선에서 용에게 소원을 빌었더니 이루어졌다라는 것도, '이뤄진 사람만' 모아두고 보면 정말 효과가 있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이와 비슷한 사기가 '아들 낳는 한약'이었는데, 전문가들이 성분을 조사한 결과 '쌍화탕' 수준으로 밝혀졌음에도 엄청난 거액에 입소문이 나며 화제가 됐었다. 50% 확률의 장난으로, 딸을 낳은 사람은 조용한 반면 아들 낳은 사람은 주변인들에게 자랑하고 권유하며 퍼져나가는 '생존자 편향'이었다.

과학적 회의주의자인 세이건은 90년대의 이 저서에서 "세상 사람들이 회의주의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게 되면, 우리의 자유는 서서히 깎여 나갈 것이고 언젠가 깊숙이 침해당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90년대 한국의 분위기를 엿볼 수 있는 사건이라면 1992년 휴거 대소동이 있다. 한 목사의 곧 멸망한다는 황당한 주장에 전국이 들썩였으며 지상파 언론에서도 난리가 났었다. 당시 서울대생 교인은 휴거 전날, 조영남의 '도시여 안녕' 마냥 "난 지금 천국 가. 너희들은 이제 큰일났다. 히히히"라며 회의론자들을 조롱했다. JMS 등은 여전히 위세를 떨치고 있으며, 2020년대 들어서는 주식투자나 코인 사기, 전세 사기, 보이스 피싱 등 조금만 방심하면 귀신같이 허를 찌르는 기상천외한 사기꾼들이 설치고 있기에 세이건의 선견지명은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다. 사기꾼들은 끌어당김 법칙을 역이용하여 피해자에게 돈이나 헌금을 끌어당기는 수법을 쓴다. 대박을 노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접근하여 화려한 말빨로 코인이나 주식 등의 투자를 권하는데, 대박에 혹한 사람들은 '긍정의 힘'으로 대박을 꿈꾸며 투자를 하나, 현실은 돈을 자신에게 끌어당기는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주머니에서 사기꾼에게 돈이 블랙홀 마냥 빨려나가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정부나 은행에서 사기 문자 조심하라고 끊임없이 안내하고 있는데, 세이건이 강조한 회의주의 자세와 일치한다. 예를 들어 "대박이 있다!"는 사람은 "용이 있다!"는 사람처럼 증거는 제시하지 못하고 긴 혓바닥으로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신공을 쓰므로 '회의주의'로 가드를 올린다 해도 깜빡 속아넘어갈 수 있으며 의사도 보이스 피싱에 거액을 날렸다.

애로부부에서 정신과 의사 양재진 원장은 누가봐도 괜찮은 상대가 무조건적인 호의를 베풀 때 의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심병을 가지란 것이 아니고,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판단으로 "저런 사람이 나를 왜 좋아하지???"라는 합리적 의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하지만 시크릿에선 정반대로 말한다. 당신이 지금 그 모습으로 사는 건 스스로를 의심했기 때문이라며, 심지어 주변에서 부정적인 말을 하는 사람들도 부정적인 기운을 주니 손절하라며 진심으로 믿어야만 우주의 기운을 받아 현실에서 이뤄진다고 한다. 이 시크릿의 이론을 완벽히 따른 사람들이 사기꾼에게 결혼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이다. 주변 지인들은 딱 봐도 수상한 걸 눈치 깠으나 정작 당사자들은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인지 주변 지인들 말을 외면하며 홀린 듯 속아넘어갔다. 특히 검사 사칭한 여성과 의사 사칭한 남성은 둘 다 모두 인터넷 신분증 위조 업체에 의뢰하여 정교하게 복제하였고 어플 인증까지 통과할 정도로 사기가 점점 정교해지기에 더더욱 칼 세이건의 회의주의적인 자세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다른 일이 일어나기 바라는 것은 정신병 초기 증세이다”[8]란 말을 했는데, 맹목적으로 백마 탄 왕자나 드래곤이 눈 앞에 나타나길 바라다 보면 객관화를 하지 못하고 판단력이 흐려져 맥도날드 할머니처럼 끝내 '우주의 기운'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사기꾼의 먹잇감이 되기 십상인지라 양재진 원장은 자기 객관화(주제 파악)를 강조했다. 현실적으로는 그나마 로또 확률로 로또 당첨자가 생기는 기적 정도만 보고될 뿐, 너무 완벽한 스펙을 지닌 사람이 평범한 서민에게 일방적인 구애를 하는 '신데렐라' 사례는 잘 보고되지 않는다. 사실 신데렐라도 외모빨로 왕자의 눈길을 사로잡아 인생역전을 한 것이기에 평범하진 않았다.

21세기 들어선 비과학적인 사기는 많이 도태된 반면, 가상의 캐릭터를 창조해 믿게 만드는 신종 사기가 활개를 치고 있다. 일례로 MBC 실화탐사대에 나온 피해여성은 '재벌남자'라는 캐릭터에 빠졌으나, 마치 '내 차고 안의 용'처럼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캐릭터였다. 심지어 피해여성은 전재산이었던 2억 뜯긴 걸로도 모자라 딸까지 낳아서 양육 지원도 못받고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런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캐릭터를 내세워 사기치는 자들은 신분증을 정교하게 위조하고 상견례는 대행업체 알바를 고용하여 연극하는 등 아차하면 속아넘어갈 정도로 나름 준비를 꽤 철저히 해서 어설픈 검증은 통과할 수 있다. 마치 90년대 사기꾼 초능력자들이 어설픈 검증은 가볍게 통과했듯이 말이다. 내 차고 안의 용에선, '용의 발자국 같은 게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나오나 가짜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시된다'라고 했는데, 마찬가지로 의사라는 신분증을 보여줘도 가짜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하는 것이다. 사실 아무리 정교한 신분증과 거짓말로 위장을 했어도, 검증 방법은 간단했다. 유명 대학병원 의사라면 홈페이지에 가보면 간단하게 조회할 수 있다. 흔히 친구가 의사가 됐다고 하면 의심해서가 아니라 신기하고 반갑기도 해서 병원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살펴보기도 하는데, 안타깝게도 피해자들은 이런 간단한 확인 절차조차 없었다. 결국 나중에 병원에 전화 한통화로 이런 분 있냐고 물어보자 없다는 말로 간단하게 검증은 끝났다.



세이건은 "사물을 회의적으로 검토하는 태도는 악랄한 사기꾼과 허풍쟁이와 헛소리꾼을 근절하는데 필수불가결한 도구다."라고 강조했다. "유사과학과 미신의 전형적인 헛소리들"이라며 몇페이지에 걸쳐 일일이 나열했는데(내 차고 안의 용들), 영혼이나 임사 체험, 간절히 바라면 우주가 도와 바라는 대로 된다는 마음, 1917년에 종말이 온다던 종말론자들, 바이오리듬이나 혈액형 성격 등은 물론 '얼굴 형상과 두상으로 성격이나 운명을 알 수 있다는 학설'을 꼽았다. 흔히 우스개로 '관상은 과학'이라고 하는데, 이 역시 '생존자 편향'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큰 수의 법칙을 벗어나진 못한다. 90년대에는 한국에서도 바이오리듬 성격이니 혈액형 성격이니 하는 것들이 유행했었는데 2020년대에는 한물 가고 MBTI(성격유형검사)가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이에 대해 한국에서 12년 거주한 영국인 기자 라파엘 라시드는 한국인이 워낙 유행에 민감한 민족이라며 요즘은 다들 MBTI에 미쳐 있는 것 같다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MBTI가 뭔지’를 꼭 묻는다고 비판했다. 실제 중앙일보에서는 MBTI 중독된 한국사회(2022) 기사를 실었는데, 한국 MBTI 연구소 김재형 연구부장은 온라인에서 떠도는 검사지는 전혀 근거가 없다며 "MBTI뿐 아니라 모든 심리 검사는 전문가에게 정식 검사를 받아야 하며, 전문가가 없이 자의로 받는 심리검사는 효력이 없다"고 일축했다. 실제 전문가들이 과장된 미디어에 의해 남용되는 것으로 사이코패스를 꼽는데, 역시 온라인의 사이코패스 설문지는 전혀 근거가 없다고 한다. 하지만 유튜브에 보면 "이런 질문에 이런 대답하면 사이코패스/소시오패스/나르시시스트니 손절하라" "얼굴이 가로로 넙적하면 사이코패스" 등 신우생학 뺨치는 내용들이 넘쳐나는데, 세이건이 보면 한탄할 일이다.

세이건은 천문학자임에도 우주에 대한 여러가지 질문에 대해서도 "맞다고 말할 증거가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철저한 증거주의자이다. 회의적인 사고 방법 중 하나로서 "권위주의에 빠지지 마라. 과학에 권위자 따위는 없다. 기껏해야 전문가만 있을 뿐이다"라며 과학 또한 회의주의의 대상임을 분명히 했다. 특히 유튜브에서는 무슨 양자역학자가 "믿으면 우주의 기운이 온다"고 했니, 평행세계가 있다고 했니 하는 '썰'들이 있는데, 과학자들 역시 과학 신봉자들을 대상으로 얼마든지 '역끌어당김 법칙' 마냥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심리학의 거대한 사기극"을 폭로했다는 '심리학에 속지 마라- 내 안의 불안을 먹고 자라는 심리학의 진실(2014)'이란 책에서 독일의 저명한 심리학 전문 잡지 편집장이자 심리학자인 스티브 아얀은 심리학이 인간의 마음속에 내재한 ‘불안’과 ‘성공 욕구’를 어떻게 교묘하게 이용하는지를 고발했다. IQ와 EQ 테스트, MBTI 검사 등의 ‘심리 상품’들이 어떻게 우리를 ‘유혹’하고 ‘배신’해 왔는지, 이 외에도 심리전문가들이 어떻게 가벼운 문제를 정신질환으로 몰아 ‘장사’를 하는지를 다양한 실험과 통계, 각종 마케팅 사례, 전문가들의 인터뷰를 통해 생생하게 드러냈다. 아무에게나 증후군 딱지 붙이기가 유행인데, 대중들은 이를 그대로 믿는 경향이 있으나 실제 연구를 보면 허접하기 그지 없는 경우도 많다. 21세기 실험인 뉴스데스크 게임 폭력성 실험 사건보다도 못한 조잡한 실험 가지고 대충 그럴듯한 '~증후군' 딱지를 쉽게 만들 수 있으며,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것에 혈안이 된 미디어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곤 한다. 당장 유튜브에도 "이렇게 말하는 친구는 소시오패스니 당장 손절하라"는 둥 당신 주변에 소시오패스가 많을 거라는 둥, 소시오패스는 머리가 좋아 자신을 숨기고 있다는 둥, 거의 관심법 수준으로 막 나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뇌MRI로는 전혀 문제가 없는 사람을 획일적인 기준을 멋대로 정해놓고 단지 자신들의 기준에 어긋난다고 정신병자 취급하는 것은 편견이 될 수 있다.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지 '숨기고 있는 소시오패스'라는 모순된 설명으로(원래 아이땐 제멋대로이다가 사회화 교육으로 대부분 사회생활을 한다), 함부로 타인을 '악인'이라 낙인 찍고 차별을 선동하는 심리학자를 세이건이 본다면 칭찬하지는 않을 것이다.

세이건은 우리가 정치인이 무능하다는 사실을 알면 실망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르는 것이 정답은 아니라고 했다. 사람들이 믿어 왔던 용의 실체를 폭로하면 실망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누군가는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정신적 진통제도 필요하다며 옹호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진통제를 치료제라고 속여 팔면 사기죄다. 단순한 현실부정이나 자기합리화 정도는 본능적 방어기제이나 "믿으면 현실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약을 팔면 사기가 될 수 있으며 희망고문으로 더 괴로울 수도 있다. 끌어당김 법칙 신봉자들은 양자역학을 겉핥기 식으로 논하면서 단순히 바라기만 한다면 양자장이 인식할 수 있는 언어가 아니며 세계 평화로 자신이 둘러 쌓여 있는 것처럼 느낄 때 비로소 인식된다고 한다. 그냥 진심으로 믿으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니 달콤한 유혹이나 자칫 타조가 평야에서 맹수나 사냥꾼을 만나면 모래에 머리를 파묻는 타조 증후군이 될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한복판에서 홀로 평화롭다고 상상한다면 그것은 '현실도피'에 지나지 않으며 자칫 방심하다 죽을 수도 있다. 끌어당김 법칙이 증명됐다는 사람들이 스스로 늙지 않는 상상을 하며 생로병사를 피할 수 있음을 증명해보인다면 좋겠지만, 직접 보여주지는 못하고 양자의 세계를 길게 논하고 있을 뿐이다. 설사 양자의 세계에서는 관찰자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해도 양자와 사람이 다르므로 인간 세계에서 증명해 보이면 좋으련만, '내 차고 안의 용' 마냥 보여주지는 않고 길게 말하는 특징이 있다. 인간의 의식으로 우주도 바꾸거나 창조할 수도 있다는데, 세이건에게 말한 여배우도 이와 비슷한 이론에 푹 빠져 있었다. 그 여배우는 자신의 마음이 세이건이란 인물을 창조했다고 믿으니 그렇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제3자에겐 '뇌내망상'처럼 보일 수 있다.

5. 현명한 접근법

세이건은 '내 차고 안의 용'에 대한 현명한 접근법은 멀쩡한 사람들이 똑같이 이상한 망상을 공유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미 '삼인성호'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세사람이 우기면 없는 호랑이를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또 '개인의 망상은 정신병, 다수의 망상은 종교(내지는 풍습)'이란 말도 있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마을 사람들이 나를 죽이려 한다는 사자개 저택의 비밀(SBS 공식 요약) 편에서 칼 세이건이 문제 제기한 '멀쩡한 사람들이 똑같이 이상한 망상을 공유하는 이유'에 대해서 자세하게 분석했다. 어머니야 피해망상이라고 쳐도, 문제는 멀쩡한 아들과 딸마저도 엄마의 피해망상에 동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신과 전문의가 설명하길 전혀 근거 없는 소문이더라도 백사람 이백사람이 이야기할수록 그 소문의 힘은 커지며 셋이서 동일한 이야기를 하다가 보니까 어머니를 해치려고 한다는 생각에 같이 몰입하게 되는 일종의 소규모 '군중 심리'라고 한다. 특히 가족 간의 유대관계가 강할 수록 쉽게 일어난다고 하니, 하물며 다른 올바른 정보를 접할 수 없는 환경에서 어려서부터 부모와 주변 사람들에게 '미신'을 믿고 자라면 세뇌될 수 있다. 엄마의 망상을 부정하면 엄마가 슬퍼하니까 동조했듯이, 부모가 믿는 풍습이나 미신, 종교를 따라 참여해주면 부모가 좋아하니까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각인되니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특히 사람이든 동물이든 어린 시절 '각인'은 세살버릇 여든간다는 속담처럼 큰 영향을 끼친다.

인간에게는 '거울 뉴런'이라고 있는데, 내가 직접 행동하지 않고 타인의 행동을 보는 것만으로도 거울처럼 반응하는 신경 네트워크이다. 일례로 주사 맞는 장면을 보면 인상을 찡그리거나 슬픈 얘기를 들으면 같이 우울해지는 등 이런 동조화 현상으로 인해 매일 부정적인 말이나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친구는 피하라고 조언하는 심리학자도 있다. 즉, 남에게 맨날 우는 소리만 하는 것도 민폐란 것이다. 북한에서도 군중들이 울부짖으며 김정은을 찬양하니 너도나도 다 따라한다. 사이비 종교 단체에서도 이런 동조화 현상을 볼 수 있으며, 인터넷에서도 밈은 파급력이 높다. 실제 지상렬 몰카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관찰됐는데, 라디오 방송하는 지상렬에게 주변인들이 어디서 자꾸 이상한 냄새가 난다며 바람을 잡으니 처음엔 안난다고 하다가 주변에서 자꾸 난다고 우기니까 나중에는 딱히 부정하지 못하고 소극적인 긍정을 표했다.

과학자들조차 종종 '확증편향'에 빠져버리고 마는 이유가 바로 믿는대로 느껴지는 심리 때문이다. 한편 '만물XX설' '이게 다 XXX 때문이다'처럼 '신내림'이라는 편향에 빠진 사람은 안 좋은 일을 다 신내림과 연관지어 해석하는데, 90년대 미신조장 논란으로 폐지되었던 MBC '이야기 속으로'의 클리셰도 '편향'으로 해석된다. 중고를 샀다가, 혹은 음침한 장소에 갔다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느니, 모든 걸 다 자신이 믿는 것과 연결지으면 실제 그렇게 느껴진다. 풍수지리에 푹 빠진 사람은 안 좋은 일이 일어나면 터가 안 좋다는 둥 '풍수적 세계관'으로 해석하고 사주나 삼재 등 '운명론적 세계관'으로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면 정말 그렇게 느껴진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녀가 불교를 믿어 집안에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고 상담한 부모에게 다른 설명을 해줘도 씨알도 안 먹히는데[9], 아이러니하게도 신내림 일화 중에는 기독교 집안에서 신내림을 거부하니 안 좋은 일이 일어나다가 신내림을 받은 뒤에야 좋아졌다는 일화도 있다. 사실 '말이 씨가 된다'고, '안 좋은 일'이란 것도 '꿈보다 해몽'처럼 해석하기 나름인지라 이런 무속적인 확신에 굳게 빠져버린 종교인들은 설사 안 좋은 일이 일어나도 신이 나에게 뭔가 메시지를 준 것이라고 마음대로 결단해버리니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이현령비현령)인 셈.

이런 '편향'심리를 다룬 우화도 있다. 어느 아저씨가 도끼를 잃어버린 뒤 옆집 아이를 의심했더니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다 의심스럽게 느껴져 점점 더 심증이 확증으로 변해갔는데, 알고 보니 다른 곳에 두고 까먹었던 것이다. 눈에 콩깍지가 벗겨진 뒤 아이를 다시 보니 전혀 의심스럽지 않더라[10]는 이런 편향의 심리로 인해 21세기 과학의 시대에도 온갖 미신과 음모론이 횡행하고 있으며, 그래서 법원에서는 심증을 배제한 채 철저히 객관적 증거로만 판결한다. 제아무리 판사라도 용의자가 범인이라고 믿어버리면 편향에 빠질 수 있는데, 하물며 일반인들이 자신이 믿고 싶은 음모론 유튜브에 쉽게 빠져드는 것은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다. 만약 '용'이 실제 있다고 믿고, 이 용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긴다고 확증편향에 빠지면 '신내림' 환자와 똑같은 증세가 나타날 것이다. 몸이 이유 없이 여기저기 아픈 '신병'은 신이 원인이라기보다 보통 확증편향으로 인한 신경쇠약, 피해망상이 원인이다. 그것이 초자연적인 계시라는 의견을 지키기 위해 진찰 결과나 적절한 치료법을 거부하기 시작하면 용을 차고 속에 숨기는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과학적(철학적 논증과 수학적 정리를 포함한다) 근거가 없는 미신도 때에 따라서는 요긴하게 필요할 때가 있긴 하여 도구적 존재인 인간이 만들어냈고 긍정적인 역할도 있으나, 남용하면 부작용이 있고 '과유불급'이다. 이슬람 과격파들은 그런 부작용을 여실히 보여준다. 2020년에도 프랑스에서 선지자 무함마드를 모욕한 중학교 교사가 길거리 한복판에서 이슬람인에게 참수당했는데, 그 광신도들은 자신의 행위가 범죄라는 자각이 없고 쿠란대로 처벌했기 때문에용서와 전도가 먼저라는 내용은 쏙 빼고 '정의실현'이라고 믿고 있다는데 이는 8세기의 정통 이슬람 율법주의자가 봤다면 기겁을 했을 일이다. 이슬람 아버지가 직장 다니는 딸을 못마땅히 여겨 사람을 시켜 딸의 두 눈을 칼로 찔러 멀게 해버린 사건도 보도되었는데 이들은 다 자기 딴에는 '신의 믿음으로' 정의라고 믿고 그리했다. 이처럼 도덕으로, 율법으로 정당화 되지 못하는 일들이 어느새 무슬림들 사이 새 교리로 등장하여 세계를 혼돈에 빠뜨리고 있다. 차고 속의 용을 지키려고만 하는 문제점은 여기서 드러난다. 과학적인 검증을 거부하는 순도 100% 광신은 개선할 수가 없으며 오직 이 '근거 없는 믿음'에 의존하는 광신도들로 용의 추종자들이 생겨나면 이들은 논리적으로 상대를 굴복시키지 못하니 쪽수를 믿고 상대(온건 무슬림, 자유주의 신학파가 될 수 있다)를 아예 '제거'해버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결국 진짜로 신이 와서 천국의 왕국을 열지 않는 이상 종교는 어떻게든 맛이 가버릴 일이 많기에 이런 부작용을 경계하는 현대 민주국가들은 '정교분리 원칙'을 세워, 믿음은 자유지만 정치 쪽에 개입은 하지 말라고 타협했다. 철저히 정치나 법 등 국가 시스템을 움직이려면 '증거' 위주로만 작동하도록 방침을 세웠다. 하지만 칼 세이건이 '내 차고 안의 용'의 개념을 소개할 적의 미국의 상황은 반지성주의, UFO, 초능력, 신복음주의등이 '신과학'이니 '뉴에이지'니 하는 포장지로 바뀌어 한창 뜨고 있었고, 기독교 근본주의가 진화론을 부정하며 과학 교과서에 창조설을 넣으려고 지속적으로 로비하는 등 또다시 성서무오설이 커지며 개입을 시도했었다. 대중과학자인 세이건은 일반 대중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계몽서적을 출간했고, '내 차고 안의 용'도 전혀 어려운 과학 용어 없이 쉽게 비유적으로 근거 없는 믿음의 모순을 설명해주었다.

'내 차고 안의 용'과 비슷한 이야기가 '말의 치아수 논쟁'이다. 어느 두 학자가 길을 가다 말을 보고 말의 치아수에 대해 논쟁이 붙었는데, 서로 각종 문헌을 근거로 논박했더니 지나가던 사람이 두 학자의 토론을 듣고는 "그냥 말의 입을 벌려보면 되는거 아니냐?"고 촌철살인 한마디를 남겼다는 이야기다. 사실 제아무리 과학계의 주장이라도 증거가 없이 함부로 믿으면 위험한 것을 보여준 사례가 있다. 최고의 우주물리학자로 인정받는 스티븐 호킹 박사가 블랙홀에 빨려들어간 물질과 그 물질에 대한 정보는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한다고 하여 오랜 기간 '팩트'처럼 알려졌었고, 당시 블랙홀에 누가 가서 직접 그런지 확인한 증거가 있냐는 의문엔 "니가 호킹보다 잘 알아?"라고 권위로 찍어 눌렀다. 하지만 호킹 스스로가 기존의 입장을 180도 수정, 블랙홀에 빨려들어간 정보는 방출될 수 있다고 말을 바꿨다.# 이걸 문화일보에서는 '대학자의 용기있는 고백'이라고 칭송했는데, 누가 ‘말의 입을 벌리듯이’ 블랙홀에 직접 가서 확인해볼 수 없으므로, 호킹이 침묵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에 용기있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호킹이 용기가 없었다면 지금도 위키 등에서는 잘못된 정보를 '팩트'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 아닌가? 또 '용기없는 학자'들은 더이상 한명도 없는 것인가? 따라서 무슨 양자역학이니 우주니 하는 일반인들이 증거를 보기 힘들고 전적으로 과학자에게 맡겨야 하는 분야는 무턱대고 부정해서도 안되지만 전적으로 믿기는 위험할 수가 있다. 줄기세포처럼 까보기 쉬운 것도 국민들에게 주목을 받아야 후원이 늘어나니 과장을 하다가 들통났을 정도인데, 하물며 국민들이 실체 확인이 힘든 것들은 더욱 과장의 유혹에 넘어가기가 쉽기 때문이다. 일단 과학자들의 입장이 연구 실적을 발표해야 정부와 기업 등으로부터 돈을 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 당시 대중들의 믿음과는 달리 줄기세포는 없었던 것처럼 인류가 천동설을 믿어도 지구는 돈다.

이와 비슷한 토론을 이보다 이전에 했던 유명인이 있는데, 바로 비트겐슈타인버트런드 러셀이다. 물론 비트겐슈타인은 유명해지기 전[11]이지만. 맨체스터로 유학왔다가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12]와 버트런드 러셀이 쓴 "수학 원리(Principia Mathematica)"를 읽고 나서 무작정 대학원을 휴학해버리고 충동적으로 그가 강사로 일하는 케임브리지로 찾아간 비트겐슈타인은 그의 강의를 청강하다가, 어느날 강의가 끝난 러셀에게 "교수님의 강사 사무실에 코뿔소가 없다는걸 제게 증명해 보십시오"라고 논리학적 증명을 요구했고, 몇시간의 대화 끝에 러셀이 못하겠다고 포기했다[13]고 한다. 안타까운건 논쟁 내용은 전하지 않고 이 사실만이 전한다는 것이다. 대신 칼세이건의 드래곤 논리와 비슷한 질문을 계속 했을걸로 추정된다. 러셀은 그날밤 당시의 감정에 대해 호소하기 위해 자신의 연인에게 편지를 써 보냈고 거기 이 논쟁을 했다는 사실과 괴로워 죽겠던 감정만이 적혀있다. 대신 이 논쟁 후 다음 강의부터 러셀이 비트겐슈타인에게 "당신은 논리학과 철학에 대한 생각이 남들과 차원이 다르니까,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14]고 설득하기 시작하여[15], 나중에 실제로 철학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6. 차고 안에 용이 없다고 확신하면 독단인가?

6.1. 그렇다

반대로 말하자면 저 차고 안에 용이 없다는 것도 독단을 그대로 믿으라고 하긴 마찬가지다. 저 수많은 Ad Hoc[16]들 모두가 전부 진실이라는 것이 거짓이라고 100% 확신할 수 있는가? Ad Hoc을 모두 제외한다고 해보자. 당신은 당신 화장실의 변기가 당신이 나무위키를 보고 있는 지금도 실존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버트런드 러셀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간의 사이에 대한 한 일화가 있다. 두 사람 간에 러셀의 방 안에 코뿔소가 존재하는지 아닌지를 가지고 토론이 일었는데, 비트겐슈타인은 러셀의 방 안에 코끼리가 없다고 확신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펼쳤고[17], 러셀은 온갖 다앙한 시도에도 불구하고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굽히지 못하고 항복했다. 결국 불가지론자의 입장에선 무신론이나 유신론이나 다 거기서 거기다. 물론 용이 없다는 것이 더 개연적으로 보이기는 하나, "개연적"임의 의미는 무엇이고 그것의 기준은 무엇인가? 용이 없음이 개연적이라는 것 또한 하나의 Ad Hoc이 아닌가? 없다는 쪽의 임시변통 가설이 더 적다는 반론이 가능하긴 하다. 그러나 가설의 많고 적음을 객관적으로 비교할 수 있는지는 증명되지 않았고, 극히 의심스럽다. 가설은 당연히 분할가능하다.

가정하여서 만약에 구분하여 확답을 주는 절대자가 있다면 구분이 가능했겠지만 인간과 같이 해석적인 판단 내에서는 절대적인 확증 없이 모두 다 선택의 연속일 뿐이게 된다. 이건 특정 감각을 넘어서 확증에 대한 영역이다. 한정적인 것을 결정해야할 상황이라면 특정한 것을 선택하는 것으로 실질적인 결과를 얻는 게 가능하겠지만, 결코 무언가를 확증해줄 수 있는 절대자가 존재하는 지 알 수 없고, 특정한 관찰자인 자신이 무언가를 확인하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질 수 있지만 확증을 가질 수 없게 된다. 어떠한 것도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선택과 해석의 일부이기 때문에 특정한 확신이 아닌 절대적인 확증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없다. 어떠한 논제에 대해서도 선택 공리처럼 특정한 관찰자내에서는 선택적으로 적용하는 문제가 될 수 있고, 과연 정말 확증이 아니고 선택인가?하는 문제 마저도 선택의 연속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절대적인 확신이 존재하는 지 모르며, 있다고 하다라도 특정한 관찰자의 확신이 정확하다는 확증도 없고, 더군다나 어떠한 관찰로도 이에 대한 확증이 발견되지 않았다. 그저 현재는 경험에 의한 자기 확신을 모두와 합의하고 그 합의를 개선해서 나아간다는 부분이 관찰 내에서 조금 더 실질적인 확인이 가능하다는 것 뿐이지 이에 대해서 더 큰 의미를 갖거나 하지는 않는다. 결론적으로 관찰을 기반으로 하는 관찰자는 결국 관찰 자체를 부정하면 아무것도 확증할 수 없게 되고, 사실상 관찰 자체에 대한 확증은 관찰로써 확증될 수가 없으니 관찰자는 확증에 대해서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실 후술될 내용들에 대해서도 논리학적으로는 전부 다 반박가능하다. 처음부터 논리학적 엄밀성에 기초한 논리가 아니라, 오차가 인정되는 사법적 주장[18]이나 상식[19], 효율성[20] 등을 빌미로 한 집단주의적 주장들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아래의 주장들은 엄밀히 말해 그 무엇도 논리학적으로 엄밀하지 않다. 아래의 주장들보다는 "용의 '정의' 자체를 요구하고, 상술된 조건이 정의에 나올 경우, 그런 조건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그런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용이 있다는걸 어떻게 증명'하는지" 요구하면 된다. 안 보이는 발자국을 증거로 대건, 안 보이는 불을 증거로 대건, 그것을 주장하는 자에게 존재 증명을 모두 떠넘기고 합리적인 증명을 하기전까지 아무것도 인정해주지 않으면 그만이다. 증명의 부재는 "대기하는 것일 뿐", 독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6.2. 아니다

논리학을 떠나 '독단'이란 사전적 정의부터 제대로 인지를 못하고 있다. 독단이란, '1.혼자서 판단하거나 결정함. 2.객관적 자료에 따른 연구를 하지 않고 주관적 인식만으로 판단하는 일. 또는 그런 명제(고려대한국어대사전)'이다. 따라서 '집단주의적 주장들밖에 없다'란 말 자체가 독단이 아니란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말인 것이다. '집단주의적 주장들밖에 없으니 독단이다'란 논리는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와 같은 수준의 논리다.

내 차고 안의 용이 없을 확률이 100%가 아니니 독단이라면, 사법체계도 독단이다. "99.9999% 이상"…구미 3세 여아와 친모 석씨 친자 확률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오차 가능성이 사실상 제로라며 확신했고 법원은 이를 증거로 채택했다. 하물며 용이 존재할 확률은 훨씬 더 낮으므로 사법부가 독단이 아니라면 용이 없다고 확신해도 독단은 아닌 것이 된다. 오히려 사법부의 판단이 독단이라는 것 자체가 독단적인 주장이다. 유전자 검사, 용의자 수사 결과 등 신중하게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내린 현실적인 판단임에도 단지 100%가 아니란 이유로 독단으로 매도하는 것은 부당하다.

"대리운전 업체 1만 곳 돌겠다"‥'보복운전 유죄' 이경 돌발선언 이경 전 더불어민주당 상근부대변인은 보복운전 혐의에 대해 대리기사가 있었다고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어떤 경위로, 누가 대리운전을 부르고 비용을 냈는지에 관해 아무런 자료가 없고 피고인도 전혀 정보를 제공하지 못했다"며 유죄판결했다. 대리기사가 있었다는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니 없었다고 판단한 재판부는 독단인가? 물론 지지자들은 "대리기사가 없었다는 증거는 있냐"거나 "전국 대리운전 업체 다 확인해봤냐"며 이경을 옹호하지만(용이 없다는 증거는 있냐? 전국의 모든 차고 다 확인해봤냐?), 여론은 대리기사의 존재를 입증할만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으니 대리기사는 없었다고 판단한 재판부의 판단을 존중했다. 세이건도 내 차고 안의 용을 빌어, 어떤 존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적절한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는 사실을 대중들이 알았다면 유사과학이 발을 붙이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는데 재판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령 훗날 대리기사가 나타난다고 한들 당시 재판부는 대리기사가 없었다고 믿을만한 상당한 사유가 있었기에 독단이라고 볼 수는 없다. 어차피 과학이든 법이든 훗날 이론이나 판결이 뒤집힐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으므로, 그 범위 안에서 믿는 것은 독단이 아니다.

'All or Nothing' 마냥 100%가 아니면 다 똑같이 취급하는 논리는 확률과 통계란 학문을 무시하는 흑백논리이다. 일례로 모든 약은 설명서에 부작용이 적혀 있는데, 100% 부작용이 없어야 약이라면 이 세상에 약은 없을 것이다. 괜히 어린 시절부터 확률과 통계를 교과 과정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야구란 스포츠도 일종의 '확률게임'인데 10할 타자가 아니라고 해서 절대 다 똑같은 취급하지 않으며 1할 타자와 3할 타자의 연봉이나 인지도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많이 난다. 마찬가지로 내일 일기예보에서 대대적인 비 소식을 전했기에 비 온다고 믿는 것을 독단이라 하지 않으며, 굳이 독단이라면 내일 지구가 멸망할 확률이 비현실적임에도 0이 아니니 멸망할 수도 있다며 믿는 정도가 해당될 것이다.

불가지론은 언뜻 공평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또 그렇지 않다. 만약 5.18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지만원 박사의 의견을 교과서에 실어야 한다고 주장하면 어떻게 될까? 한 방송사에서 5.18 논란에 대해 지만원과 반대하는 학자를 출연시켜 양비론적으로 다뤘기에 언뜻 중립적인 것처럼 보였으나 오히려 편향된 방송이란 비판을 받았으며 심지어 지만원은 구속까지 됐다. 이것을 단지 학계와 법조계의 폭력이자 집단주의적 주장이라며 독단이라고 할 수 있을까? "5.18에 북한군이 없었다는걸 제게 증명해 보십시오"라고 논리학적 증명을 요구한 뒤 말꼬투리 잡아서 결국 나를 논리학적으로 승복시키지 못했다는 건 그저 정신승리일 수 있다. 그런 말장난으로 북한군의 존재가 입증되는 것도 아니다. 개입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실증적인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맞고, 제시하지 못하면 패하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만원의 주장이 독단의 사전적 정의에 부합한다.

지만원 박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갈릴레이에 비유하며 갈릴레이도 독단이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전혀 사전적 의미에 부합하지 않는다. '1.혼자서 판단하거나 결정함.' 갈릴레이의 주장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이미 논의가 어느정도 끝나 정설로 인정받고 있던 상황이었고 단지 종교계에서 인정하지 못하여 신성모독죄로 탄압받던 상황이었다. 또 '2.객관적 자료에 따른 연구를 하지 않고 주관적 인식만으로 판단하는 일.' 이 부분에서 갈릴레이와 지만원이 결정적으로 갈린다. 갈릴레이가 "지구가 동그랗게 생겼으니 공처럼 빙글빙글 돌 것 같다"고 주관적 느낌으로 주장을 했다면 독단에 부합할 테지만, 이미 객관적 자료에 따른 연구를 통해 과학적 증거를 갖추고 있었다. 반면 지만원은 특유의 '광수설'로, 5.18사진에 찍힌 사람들과 북한 장성들 사진 비교하며 이 사람이 이 사람이라고 관심법 수준의 주장을 펼치기에 독단의 정의에 부합한다.

언뜻 보면 불가지론자의 자세가 오픈 마인드처럼 편견없이 중립적으로 보이지만 문제점은 '광수설'과 '창조설'에 힘을 실어 줘서 더 진실에서 멀어지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불가지론자들은 만에 하나라도 5.18에 북한군이 개입했을 수도 있는 것 아니냐, 북한군이나 간첩이 단 한명도 없었는지 확증할 수 있는가라며 어차피 불가지론자의 입장에선 학계 정설이나 북한군 개입설이나 다 거기서 거기라며 똑같이 교과서에서 가르쳐야 중립적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중립적인 마인드는 편견 없이 객관적 증거로 바라보는 자세지, 그냥 광수설이든 창조설이든 다 교과서에 넣고 황희정승 마냥 너도 맞고 너도 맞다는 기계적 중립만을 뜻하진 않는다.

인터넷 게시판에 누군가 "우리 집에 애완견이 있다"는 글을 올렸다고 생각해보자. 다짜고짜 증거를 대라는 댓글보다는 귀엽겠다, 부럽다 등등의 의견이 달릴 것이다. 그러나 코끼리가 있다고 올린다면 못 믿겠다는 댓글이 훨씬 더 많아질 것이다. 나아가 "우리 집에 외계인(용)이 있다"는 글을 올린다면 그때부터 주작이니 관종이니 하며 거짓을 확신하는 댓글이 많이 달리기 시작할 것이다. 이런 네티즌들의 반응이 '독단'이 아닌 이유는 상식적인 확률을 근거로 했기 때문이다. 애완견이야 주변에 흔하니 애완견 키운다는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의 확률은 아니지만 코끼리를 애완동물로 키우는 한국인은 보기 힘들고 나아가 외계인이나 용은 100% 없다고 단정할 순 없지만, 없다고 봐도 무방할 확률이므로 애완견과는 달리 '인증샷'이란 증거가 없는 한 못 믿는 것이다. 자기 집 화장실의 변기가 나무위키를 보고 있는 지금도 실존한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확신할 수 있을 만큼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스마트폰 시대에 '인증샷' 올리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인증샷도 없이 자기가 방 안에서 코끼리와 같이 껴안고 잔다면서 믿으라고 한다면 이는 독단이다.

6.3. 알 수 없다

일단 주장을 더욱 명확히하기 위해서는 "독단이다"라는 주장과 "독단인지 알 수 없다"라는 주장을 서로 구분할 필요성이 있다.
"그렇다"와 "아니다"의 주장은 서로 다른 주장이지만 특정 관점이 더욱 올바르다고 할 수 없다면 두 주장의 가치는 동일하다. 문제는 특정 관점이 "더욱 올바르다"는 것을 먼저 정해버린다면 그 이후에 해당 관점 안의 속하게 되는 주장들은 앞서 정한 "더욱 올바르다"는 사실에 의거하여 선후 관계가 뒤집혀 사실 관계를 입증할 필요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두 주장 모두 독단이거나 두 주장 모두 독단이 아닐 수 있다.

사전적 의미의 독단을 근거로 든다면 역사적으로 한동안 묻혀있었던 지동설은 계속 독단으로 간주되었어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그리고 "'객관'과 '주관'"에 대해서는 좀처럼 쉽게 구별될 수 없는 부분이며, "'개인의 생각'과 '다수 집단의 합의'"는 "다수 집단의 합의"가 여러 의견들 사이에서 통일된 의사결정을 하는데 있어서는 실용적일 수 있으나 본 명제와의 직접적인 상관관계가 존재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7. 관련 문서


[1] 우파니샤드에 나오는 구절에서 따왔다[2] 원문 Pseudoscience speaks to powerful emotional needs that science often leaves unfulfilled. It caters to fantasies about personal powers we lack and long for.[3] 칼 세이건, 『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과학, 어둠 속의 촛불』 (서울: (주)사이언스북스, 2022), 256-259 (일부 구문은 나무위키에서 자체 강조)[4] 보스턴 대학의 천문학자 파파기아니스 박사가 본인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법칙이다. 파파기아니스 박사는 UFO의 존재를 굳게 믿어왔던 사람이었는데, 회의론자들이 UFO의 증거를 보여달라고 하자 지금까지 UFO의 파편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해서 UFO가 없다고 확정할 수는 없다며 파파기아니스의 법칙을 고안했다.[5] 파스칼의 내기 항목에도 반론되어 있듯, 애초에 파스칼의 내기 자체가 기독교가 유일한 주도종교의 입지를 차지하고 있던 근세 유럽의 세계관을 기반으로 하기에 성립하는 것이다. 좀 조야하게 반론하자면, 만약 '불신자는 벌하지 않지만 타 종교의 신자는 벌하는, 기독교의 신이 아닌 다른 신이 저승을 다스리고 있다면 오히려 기독교를 믿는 것이 손해이고 안 믿는 것이 이득일수도 있지 않으냐?' 식의 반론이 가능한 것.[6] 어느 케이블 귀신 방송에서 명상으로 유체이탈하여 다른 방에 있는 걸 맞추고 심지어 다른 방에 간 영혼이 촛불까지 끄는(영혼 보내기 신공) 그야말로 세계 과학계를 뒤흔드는 충격적인 방송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랜디에겐 얼씬도 못하고 영혼을 증명할 수 있는 초유의 실험이 고작 케이블 방송 한번으로 종료되고 한국에서조차 별로 화제가 되지 않은 채 더 이상의 실험이나 연구도 없던 것을 보면 큰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90년대는 당시 정부에게 지원을 받던 '과학교양' 프로그램 SBS 호기심천국조차 초능력 주작하다가 김어준의 딴지일보에게 적발돼 망신당했을 정도로 방송가에서 주작은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딴지일보 기자가 경악했던게, 알고보니 지들도 이미 '영혼의 캐비닛' 같은 실험을 빙자한 쇼를 할 때 안에다가 몰래카메라 슬쩍 설치해놔서 트릭을 알고 있었음에도 시청률에 눈이 멀어 초능력이라고 방송했다는 것이다. 하물며 대놓고 자극적인 귀신 소재를 다루는 케이블 방송에서 과학적인 검증을 기대하긴 힘들다. 실제 그 케이블 방송에서 유명한 무속인이 사기 치다가 SBS 그알에서 '귀신장사 하는 사람들'이라고 폭로했으며, 자극적인 방송을 해야 시청률이 올라가는 방송에서 철저한 과학적 검증을 해버리면 재미없어지는 문제도 있다. 케이블이나 유튜브에서 제보자 점 봐준다면서 무속인에게 제보자의 사전 정보를 흘리는 등의 주작질을 할 위험도 있는데, 물론 무조건 다 거짓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유체이탈이든 투시든 다른 방에 있는 걸 알아맞춘다면 세계 과학계를 뒤엎을 만한 대사건인데, 고작 케이블 방송에서나 그런 쇼를 보여주고 트릭을 모두 막아놓고 엄격한 통제를 하는 랜디 앞엔 못간다는 점에서 엄격한 검증을 통과했다고 보긴 힘들다.[7]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항목의 4.2 문단 참고.[8] 비슷한 명언으로 허버트 맥매스터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가 나오길 비는 것은 광기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소련과 중국, 베트남 등 많은 공산권 국가들이 현실을 깨닫고 그나마도 태세전환하여 살 길을 모색하며 변화를 시도했던 반면, 북한은 '죽은 아이 불알 만지기'란 속담 마냥 되도않는 공산주의에 집착하다가 공산주의가 악성으로 변형되어 산으로 가버렸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의 안좋은 사례인데, 그래서 "잘 모르고 무식한 사람이 신념을 가지면 무섭습니다"란 말도 있다.[9] 김제동은 아침마다 109배를 하며 날렵한 몸매를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108배가 아닌 109배인 이유가 어머니가 교회 권사라 108배 하면 죽인다고 해 109배 한다고 했더니 그건 괜찮다고 해서 그렇다고 한다(...).# 이 정도야 애교 수준인데, 가족간은 물론 부부간에도 '종교 갈등'으로 인해 연을 끊는 불상사도 적지 않다. 서로 상대방의 종교 때문에 재수없는 일이 발생했다고 굳게 믿고, 이렇게 확증 편향에 빠져버리면 백약이 무효이다. 실제 '신내림'에 확증편향에 빠지면 다른 설명 씨알도 안 먹히고 그냥 본인이 믿는대로 신내림을 해야만 문제가 해결되는 것처럼, 배우자의 종교로 인해 불행이 닥친다고 굳게 믿는 사람에겐 다른 설득이 안 먹히기에, 배우자와 갈라서야만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10] 여씨춘추열자에 수록된 이야기이다.[11] 대신 그의 부친이 오스트리아의 전설적인 재벌이라서 부친과 회사가 유럽 내에서 유명하긴 했다. 부친이 오스트리아의 카네기라 불리우는 사람으로, 수십개의 철강회사 및 광산회사, 화학공업회사, 유통회사 등을 가지고 있던 철강 재벌이었고, 오스트리아 최고의 부자였다. 소수의 회사는 소유주는 바뀌었어도 지금도 100년 넘게 체코나 슬로바키아, 헝가리 등지에 남아있다. 사실 동유럽에서는 지금도 아들보다 아빠가 더 유명하다.[12] 이 사람은 케임브리지대학에서 책을 내고 나서 런던대 교수가 되어서 영원히 만날 수 없었다.[13] 그가 당일밤에 연인에게 쓴 편지에는 "나는 어찌된 일인지 말을 할 수록 그의 앞에서 무력해졌소. 말을 할때마다 내 말은 다 틀린 것 같고, 그 독일계 청년의 말은 다 맞는 것 같았소."라고 써있었다. 당시가 11월이었고, 영국의 11월은 한국의 12월보다 추운데, 그는 그 논쟁으로 퇴근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 칠흑처럼 어두워진 늦은 저녁에 온몸을 덜덜 떨며 패배자의 마음으로 교직원 숙소로 갔다고 한다.[14] 비트겐슈타인은 독일로 유학 가서 기계공학 석사학위를 받고, 박사가 되기 위해 영국에 온 공대생이었다.[15] 겨울방학때 러셀이 주는 주제에 대해 에세이를 써와보라고 했고, 비트겐슈타인이 써 왔다. 이를 읽고 러셀은 "내가 확신한다. 당신은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고, 이 말에 공대 박사과정 대학원을 때려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과 교수가 된 러셀의 추천으로 케임브리지대 철학과 대학원에 입학했다.[16] 여기서 얘기하는 Ad Hoc은 차고 안의 용을 입증하라는 주장에 대해 '이 용은 보이지 않는다' '그 용의 불 또한 보이지 않으며 온도가 없다''그 용의 발자국은 너희에게는 보이지 않는다'고 반박한 내용들을 의미한다.[17] 사실 상술된대로 세부 토론내용은 전혀 전하지 않는다. 공적인 논쟁이 아니라, 사적으로 단둘이 대학교 사무실에서 말로만 한 일이었기 때문에, 기록이 남을리가 없다. 단지 당일날 밤에 러셀이 연인에게 편지로 이런 일이 있었다고 호소해서 후대에도 알려지게 된 것이다.[18] 법의 유죄 무죄 판결은 본질적으로 틀릴 수 있는 것을 전제로 한다. 무고한 사람에게 중죄를 씌운 사건은 세계 어디에나 흔히 존재하며 지금도 일어나고 있고, 범죄자에게 무혐의 판단을 내리거나 무죄를 선고했다가 뒤늦게 밝혀진 사건도 전세계 역사에 다 있다. 사법적 주장을 논리적 엄밀성에 적용하려면 사법이 옳은 경우가 많은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사법이 누구나 인정할만큼 틀린 경우 자체가 하나도 없어야 한다. 판사에게 그냥 "법"이 아니라 "법과 양심"에 따라 재판하라고 하는 말은 법은 본질적으로 온전할 수 없고 빈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19] 상식 역시 시대에 따라 변하며, 문화와 기후환경 등에 따라 다르기까지 하다. 논리학적 엄밀성에 기초하지 않는다.[20] 효율이라는 개념 자체도 "틀려서 생기는 손해를 신경쓰는 것보다, 옳은 걸 많이 건지면서 조금만 틀리는 게 이익이 손해보다 커지므로 낫다"는, 오차의 실존에 기초한 개념이므로, 논리학적으로 따질 가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