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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 2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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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a0029><colcolor=#fff> KIA 타이거즈 No.83 | |
나카무라 타케시 [ruby(中村, ruby=なかむら)] [ruby(武志, ruby=たけし)] | Takeshi Nakamura | |
출생 | 1967년 3월 17일 ([age(1967-03-17)]세) |
교토부 교토시 우쿄구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학력 | 하나조노 고등학교[1] |
신체 | 178cm, 85kg |
포지션 | 포수 |
투타 | 우투우타 |
프로 입단 | 1984년 1차 지명 (주니치) |
소속팀 | 주니치 드래곤즈 (1985~2001)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2002~2004)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2005) |
지도자 | 쇼난 시렉스[2] 배터리코치 (2006~2007)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1군 배터리코치 (2008) 주니치 드래곤즈 1군 배터리코치 (2009~2012) 치바 롯데 마린즈 1군 배터리코치 (2013~2014) KIA 타이거즈 1군 배터리코치 (2015~2017) KIA 타이거즈 2군 배터리코치 (2018) 주니치 드래곤즈 1군 배터리코치 (2019~2021) KIA 타이거즈 1군 배터리코치 (2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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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일본프로야구 선수이자 現 KIA 타이거즈 1군 배터리코치.일본프로야구 선수 시절 애칭은 타케시.[3]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교토 하나조노 고등학교를 다녔고 고교 1학년 시절 우연히 재일동포팀의 일원으로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 참가하였다가 감동을 해 고교 시절 내내 봉황대기 재일동포 야구팀으로 참가하였다. [4]2.2. 주니치 드래곤즈
1985년 주니치 드래곤즈에 1차 지명을 받고 입단했다. 주전 포수였던 나카오 타카요시가 부진하자[5] 1987년부터 본격적으로 1군 주전 포수로 자리잡았다. 그 해 그는 121경기에 출전해서 수비율 0.994, 64번의 도루 시도 중에 33번을 저지하며 도루저지율 .516을 달성하는 등 최고의 포수 수비를 보여주었다. 그 후 1995년에도 54번의 도루 시도 중에 28번을 잡아내며 도루저지율 .519를 달성했다.타격에서는 정확도는 떨어졌지만[6] 1번의 20홈런(1991)을 포함해 두 자릿수 홈런도 4차례 기록하는 등 한방도 있었던 선수였다.
예전에 선동열이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활약하던 시절 경기를 봤던 사람은 이 유명한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와일드 피치 후에 공을 열심히 쫓아가서 홈 송구를 하는 포수가 바로 나카무라 타케시다.[7]
주니치 부동의 주전 포수[8]이자 프랜차이즈 선수였으나 1998년 이후 부진하며[9] 수비능력도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2001년에는 그의 장기였던 도루저지 능력도 급감했다.
2.3.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다니시게 모토노부가 2001 시즌 후 FA를 선언하고 주니치로 이적하면서 보상선수로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이적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양 팀 주전포수 맞트레이드가 된 셈인데, 첫 해에는 100경기 넘게 출장하며 주전 포수 역할을 했지만 역시나 센트럴리그 최악의 포수로 뽑힐 정도였고, 요코하마는 조금 더 젊은 아이카와 료지에게 기회를 주며 주전에서 밀려났다.2.4.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요코하마에서 3년을 보낸 뒤 2005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창단 멤버로 합류했는데, 라쿠텐은 불공정한 선수 분배 드래프트 방식으로 인해 퍼시픽리그의 최하위 두 팀이었던 오릭스 블루웨이브와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의 선수단 중에서 오릭스 버팔로즈가 먹고 남긴 쩌리들만 주워갈 수밖에 없어서 전력이 매우 약했다. 이 때 요코하마에서 무상 트레이드로 빈약한 전력으로 창단 첫 시즌을 맞이하려던 라쿠텐에 나카무라를 넘겨준 것이다. 라쿠텐에서는 이미 선수 생활의 황혼기에 접어들은지라 결국 1년밖에 뛰지 못하고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통산 기록은 1955경기 6419타석 1380안타 137홈런 604타점 통산 타율 .242 출루율 .309 장타율 .355 OPS .664.
3. 지도자 경력
3.1. 일본프로야구 시절
주니치 드래곤즈 배터리 코치 시절.
은퇴 후, 2006년부터 요코하마 베이스타즈 2군 팀인 쇼난 시렉스에서 배터리코치를 맡은 걸 시작으로 2014년까지 주니치 드래곤즈, 치바 롯데 마린즈 등 여러 팀에서 배터리코치로 일했다.
3.2. KIA 타이거즈 1기
3.2.1. 2015 시즌
KIA 타이거즈 김기태 감독의 부름을 받고 KIA 타이거즈 1군 배터리코치로 부임했다.KIA 타이거즈에 있으면서 젊은 두 포수인 백용환과 이홍구의 급속한 성장을 이루며 김상훈의 은퇴로 인한 포수 공백은 거의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여전히 경험이 부족하지만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서 어느 정도 포수 구실을 이뤄냈다는 점에서 성과를 이뤄냈다. 다만 여전히 나카무라 코치 눈에는 성이 차지 않는지 시즌 마무리 캠프에서 두 영건들에게 지옥훈련이 기다리고 있음을 언급했다.
3.2.2. 2016 시즌
2015 시즌이 끝난 후, 이마나카 신지를 투수 인스트럭터로 데려왔다. 주니치 드래곤즈 시절 같이 뛴 경험도 있고 해서 오게 됐다고 전해진다.등록명도 바꿨는데, '나카무라'에서 '타케시'로 변경했다.
스프링캠프에서는 이홍구, 백용환, 신범수를 지도했다.
3.2.3. 2017 시즌
SK 시절의 김민식의 도루저지, 블로킹 능력을 마음에 들어했고 시즌 중에 트레이드돼서 KIA로 온 김민식에게 경기 내외적으로 최대한의 자율을 보장했다고 한다.# 덤으로 KIA가 2017 한국시리즈 우승을 통해 생애 첫 우승 반지 수집과 함께 콩라인 탈출에 성공하는 기쁨을 누렸다.3.2.4. 2018 시즌
김상훈 코치와 자리를 맞바꾸어 2군 배터리코치로 갔다. 김기태 감독은 풍부한 코칭 경력으로 2군 포수 육성을 기대한다고 밝히기도 했다.3.3. 주니치 드래곤즈
2018 시즌 종료 후 며칠 되지 않아 이적설이 뜨다가, 결국 2019년부터 친정팀인 주니치 드래곤즈의 배터리코치로 복귀하게 되었다. 스프링캠프에서 주니치가 KIA와 경기를 하게 되면서 오랜만에 선수 및 코치진과 가벼운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마침 선동열 위원이 참관한 경기라서 양팀 모두 훈훈한 분위기였다.2021 시즌 개막 직전이던 2월 21일, 위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곧이어 주니치 구단이 직접 나카무라 코치의 팀 이탈을 발표했다. 수술 후 3월 18일 현장에 복귀하였고 나중에 위암 선고를 받아 투병 중이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시즌이 끝나고 건강 문제의 여파인지 10월 29일부로 주니치 드래곤즈 코치직을 사임하였다.
2022년부터 추쿄 TV, J SPORTS, DAZN에서 야구 해설가, 스포츠 닛폰에서 야구 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3월 21일에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도 개설했다
3.4. KIA 타이거즈 2기
2023 시즌 종료 후 KIA 타이거즈의 마무리 캠프에서 포수 인스트럭터로 초빙되어 KIA 포수진을 다시 지도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2023년 12월 20일 KIA의 2024 시즌 코칭스태프 발표 과정에서 1군 배터리코치로 선임되며 약 5년만에 KIA 코치로 돌아왔다. 취업이 돼서 60% 기쁘지만 갑자기 일본을 떠나게 되어 40% 슬프다 라는 심경을 밝혔다. 2017년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배터리코치였던 나카무라 코치가 선임됐다고 하자 KIA 팬들은 일제히 환호하는 중.[10]
등번호는 83번을 달게 되었다.
이후 2024시즌 KIA 타이거즈는 김태군, 한준수로 매우 안정된 포수진을 구축하게 되었다. 몇년간 KIA의 약점과도 같은 매우 취약한 포지션이였던 포수 포지션이 팀의 장점으로 불릴 만큼 환골탈태한 모습을 보이자 팬들은 나카무라 코치가 종신 배터리코치를 해야한다는 반응.
2024년 KIA 타이거즈가 정규시즌 우승을 하게되면서 2017년에 이어 2번의 정규시즌 우승을 하게되었고 한국시리즈마저 우승하면서 기아에서만 2개의 반지를 가지게 되었다
4. 여담
- 유튜브를 운영 중이며, 기아 코치 부임 이후로도 유튜브 업로드를 지속하는 중이다.[11]
- 본인이 공식 석상에서 직접 밝힌 적은 없지만 한국 언론 기사와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의 기관지인 민단신문 기사[12]에 의하면 재일교포 출신 한국계 일본인이며 귀화 전 한국명은 강무지(姜武志)[13]라고 한다.[14]
- 장난스럽게 「원래 착하게 생겼는데, 얼굴이 변형될 정도로 맞았다」라고 말할 만큼 주니치 시절에 감독이던 호시노 센이치의 철권 제재의 단골이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경기 중에 덕아웃 뒤에서 호시노에게 맞아서 코뼈가 부러진 적이 있을 정도. 하지만 그것은 호시노가 나카무라를 미워해서라기 보다는 팀의 중심인 주전포수를 갈굼으로써 선수단 전체에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호시노가 나카무라를 감정적으로 미워해서 때렸다는 게 아닌 것을 증명하는 에피소드도 있다. 나카무라가 주니치에 입단한 이후 2년동안 1군에서 기회를 못잡자 1986년 당시 구단 프런트는 나카무라를 정리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새로 감독으로 취임한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나카무라를 버리지 않고 계속 데리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팀에 잔류시켰고 호시노식 훈련을 시켰다. 그런데 그 훈련이 너무 힘들어 나카무라는 야구선수로서 자신의 재능에 회의감을 가지고 선수생활을 그만두려고 했었다 한다. 하지만 어머니와의 통화에서 「너 요즘 열심히 하는가 보다. 감독님이 넌 믿을 만한 아들이니, 안심하라고 말씀하시더라」라는 말을 듣고 야구를 포기하려는 생각을 거뒀다고 한다. 이후 나카무라는 10년 이상 주니치 드래곤즈 주전포수로 자리 잡았다. 즉, 나카무라에게 호시노는 자신의 프로 커리어의 길을 열어준 은사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래서 그런지 선수 시절 호시노에게 그렇게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호시노와의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 성실하고 온후한 성격으로, 투수들을 잘 배려하여 히어로 인터뷰 시 그의 공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야마모토 마사와 호흡이 좋아 사인 교환 전에도 이미 구종을 예상할 수 있었다고 한다. 선동열도 주니치 시절 나카무라의 사인에 고개를 흔든 적이 거의 없었다고 증언했을 정도로 신뢰가 두터웠다고 한다.
- 도루 저지 능력이 좋아 일본프로야구 사상 한 시즌 절반 이상 경기에 출장한 뒤 도루 저지율 5할을 넘긴 11명의 포수들 중 하나이다. 이 중 2번 이상 5할을 기록한 포수는 나카무라(2회) 외에도 후루타 아츠야(5회), 타부치 코이치, 오야 아키히코(각 4회) 단 4명뿐이다.[15]
- 광주에서 코치 생활을 하면서 광주 음식이 입맛에 맞는지 한국에 오기 전에 비해서 많이 후덕해졌다. 2024년 시범경기 때도 1차로 순대국집을 가고 2차로 치킨집을 갔다.
- 2024년 시즌 전 인스타그램 사진을 보면 맥주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듯하다. 분명 연장코드, 휴대용 충전기, 세제를 사러 갔는데 카트에는 테라 맥주, 포카칩이 들어있었다(...).
- 야구가 없는 월요일에는 CBC 라디오 <도라타마킹(ドラ魂キング)>에 오후 5시경 전화 출연하고 있는데, 일본 내 KBO 리그 팬을 위하여 기아 썰을 풀어주기도 하며 주니치 이야기를 많이 한다.
[1] 열혈 시리즈에 나오는 학교이다. 럭비부가 유명하다.[2]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2군 팀으로, 2010년 이전까지는 별도의 팀명과 법인으로 운영됐다.[3] 그래서 2015년 '나카무라'였던 등록명을 2016 시즌부터는 '타케시'로 바꿨다.[4] 첫 참가한 82년 봉황기때 많은 관중이 들어찼으나 프로야구 개막이후 의도적인 고교야구 인기 죽이기에 나서 84년도 봉황기때 줄어든 관객에 깜짝 놀랬다고 한다.[5] 이 때문에 호시노 센이치 감독으로부터 외야수로 전향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나카오는 이를 거절해서 결국 1989년에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됐다. 대신 나카오는 1989년 일본시리즈에서 주전 포수로 활약하며 역스윕 우승을 이끌었다.[6] 출루율은 타율에 비해 나빠보이지 않지만 커리어의 대부분을 8번 타순에 나선 것을 고려해야 한다. 센트럴리그는 지명타자가 없으므로 보통 마지막 타순인 9번에 투수가 들어서기 때문에 굳이 8번에서 승부를 하기보단 투수를 상대로 아웃카운트를 벌기 위해 고의사구를 많이 얻기 때문. 실제로 그의 통산 고의사구(112개)는 일본프로야구 역대 10위의 기록이며 도이 마사히로, 야마우치 카즈히로, 카네모토 토모아키 같은 강타자들보다도 많다.[7] 나중에 판독 결과 오심으로 밝혀졌다. 다른 각도에서 본 리플레이 영상 투수인 선동열도 2010년 KBS에서 방영한 천하무적 야구단에서 사실은 세이프였다고 자백했다. 그래도 전년도의 부진을 딛고 새 시즌의 첫 등판 경기에서 세이브를 거두는 산뜻한 출발을 할 수 있어서, 이 경기는 선동열 본인이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활약하게 된 계기가 된 경기라고 한다.[8] 나카무라에게 밀려서 백업 포수 자리와 외야를 전전하다가 1998년에 한신 타이거스로 트레이드된 선수가 바로 야노 아키히로. 야노는 한신에서 주전 포수로 자리잡으며 늦게나마 꽃을 피웠고 만 42세까지 현역으로 뛸 수 있었다.[9] 1999년엔 정확히 규정타석 타율 2할(.200)을 기록했는데, 잘못했으면 1982년 야마쿠라 카즈히로 이래로 나오지 않던 규정타석 1할 타자가 될 뻔했다.[10] 물론 후임 배터리코치였던 김상훈이 워낙 평가가 나빴던 영향도 있었다. 실제로 나카무라 코치 재영입 후 김상훈은 전력분석원으로 자리를 옮겼는데, 사실상 좌천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11] 다만, CBC라디오 프로그램은 야구가 없는 월요일에 비대면으로 출연하는 듯하다.[12] 민단신문은 재일 언론이지만 해당 기사는 일본인 저널리스트 오시마 히로시(大島裕史)가 작성했다.[13] 강무지는 1982, 1984년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재일동포 팀으로 출장했으며 1984년 대회 때는 최다 타점상과 감투상을 차지하면서 재일동포 팀을 봉황대기 준우승으로 이끌었던 선수이다.#[14] 일본어 위키백과 정보에 의하면 1988년 8월 24일자로 관보에 귀화 고시되었다고 한다.[15] 나머지 포수들 중에도 조지마 겐지, 다니시게 모토노부, 나시다 마사타카 등 NPB에 이름을 남긴 명포수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