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한반도와 요서, 산동반도를 오가며 영토를 확장한 근초고왕은 글로벌 리더였다. 그러나 공영방송이 분명하지 않은 주장으로 역사를 왜곡할 수 없다."
- 이재영(책임 프로듀서) #
- 이재영(책임 프로듀서) #
2. 설정 및 전개
2.1. 문제 가득한 기획의도
중국의 요서지방을 수중에 넣고 산동반도를 중심으로 西백제를 건설했으며, 50여 개국으로 할거되어있던 마한의 군소왕국을 통일해 삼한일통(三韓一統)을 이뤘으며 아직까지 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해 야만의 시대였던 왜국을 경제, 문화의 한 체제 속에 편입시켜 야마토(大和) 시대를 연 근초고왕. |
우리가 하면 정복이고 남이 하면 침략이라는 식의 그릇된 인식이 보인다. 근초고왕을 주목하는 이유가 단순히 정복 때문이라면, 거꾸로 근초고왕은 자신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남의 나라에 깃발을 꽂은 침략자에 지나지 않는다. 작중 근초고왕은 주구장창 예(濊), 맥(貊), 한(韓)이라는 세 종족의 일통을 부르짖지만 도무지 그들이 근초고왕의 발 아래 통일되어야 할 정당한 명분이 없다. 있다면 고작해야 삼국지의 옥새와도 같은 예왕지인이 있을 뿐인데, 이게 워낙 일회성 아이템이라 맥거핀의 냄새가 진하게 난다.
이렇게 근본 취지가 잘못되었으니, 역사 왜곡은 자연히 딸려오는 것이다. 일단 근초고왕이 중국의 요서지방을 수중에 넣었다는 말부터 이미 오류가 있다. 백제가 요서 지방에 진출했다는 근거로 제시되는 것은 송서의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도 요서를 차지했다"는 구절인데, 그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한 것이 고국양왕 또는 광개토대왕 때의 일, 그러니까 근초고왕이 죽고 나서도 20년은 더 지난 뒤의 일이다. 그러니 근초고왕 시대에 요서로 진출했을 리 있나. 설령 정황상[1] 근초고왕 때 진출했다고 치더라도, 당시 요서의 터줏대감이던 연나라가 백제와 접촉한 기록이라는 것 자체가 아예 없다는 점에서 '서백제' 운운할 영토는 없었다고 단언할 수 있다.
엄연히 실재하는 기록에 근거를 둔 요서경략설이 이러한데, 그조차도 신빈성이 거의 없는 산동반도는 어련할까.[2] 백제가 산동반도를 점거했다는 주장은 경기만에 있는 백제가 요서에 진출하려면 산동반도를 거쳐야 한다는 논리이나,[3] 이는 전형적인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 주장이다. 근초고왕 당시 산동반도는 연나라의 소유이고 산동반도의 해안 일대를 다스리는 동래태수는 국은(鞠殷)이란 사람이라고 기록에 아주 잘 남아 있다. 심지어 연나라가 망하고 난 380년에는 석월(石越)이 동래에서 바다를 건너 요서를 공격했으니 산동반도에는 백제가 발 디딜 땅 따위 없다.[4] 이것이 있지도 않은 '백제도래지왕'[5] 기록을 운운해봤자 씨알도 안 먹히는 이유다.
게다가 당시의 왜국을 '아직까지 문물을 받아들이지 못해 야만의 시대'라고 정의함으로써 얼마나 자기들이 편협하고 한민족 우월주의적인 시선에 사로잡혀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6] 또 자칭 재야사학자, 타칭 유사역사학자들을 향토사학자라고 지칭함으로써 향토사학자들에게 모욕감을 선사한 것은 덤이다.
후술하겠지만 이 드라마는 이 문제많은 기획의도 조차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였다. 정복군주로서의 근초고왕을 묘사해야겠으나 정작 결과물은 아침드라마에나 볼법한 막장드라마였기 때문.
2.2. 원작과 따로 노는 스토리
드라마공식 원작은 이문열의 역사소설 '대륙의 한'이다.[7] 문제는 원작과 넘사벽스러운 차이가 있다는 점.드라마에서 공식적으로 원작이라 내세우는 것은 이문열의 소설 '대륙의 한'인데, 충격적이게도 이 소설의 주인공은 근초고왕이 아니다. 이 원작의 스토리가 어떠한고 하니 "왕위에서 밀려나고 상인의 아들로 자라난 계왕의 왕자가 근초고왕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용서받고(1부), 이에 선대의 원한을 풀고 요서로 이주하여 중원의 광풍 속에서 꿋꿋이 백제인들의 영역을 마련한다(2부)"는 것이다. 더불어 이문열이 이 소설을 쓰면서 공부를 꽤 했는지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비수대전과 후연 건국 사이의 전개 과정이 그럴듯하게 극화되어 있어서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 할지언정 팩션으로 읽기에도 수준급의 작품이다.
그러니 원작은 드라마와 주인공과 소재부터 다르며, 전개 과정은 더더욱이 말할 것도 없다. 이문열 스스로도 원작이랍시고 자신의 책을 내걸고는 전혀 딴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에 많이 실망했는지, 드라마를 계기로 재출간한 판본의 서두에서 드라마의 역사적 사실이 본서와 매우 딴판으로 왜곡되었음을 적시하는 패기(?)를 보였다. 종종 드라마 때문에 원작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원작과 드라마는 딴판인 정도가 아니라 그 수준 자체가 차이난다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하자.
이러한 전후사정에 따라, 한편으로는 윤영용 작가의 환빠 소설인 '근초고대왕'과의 관련성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물론 완전히 사이비 역사에 매몰되어 불쏘시개의 극치를 달리는 당 소설과는 그나마 차이가 있는 수준인지라 이것이 정말 원작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드라마 전반에 나타나는 유사역사학적 경향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고, 원작을 훼손하면서까지 만든 스토리가 막장 드라마라는 사실은 실드의 여지를 앗아가버린다.#
2.3. 공감할 수 없는 인물상
스토리를 전반적으로 훑어보면 왕비들 사이의 갈등, 형제 간 골육상쟁을 중심으로 미치도록 착한 주인공, 흑화하다 불치병 걸리는 여주인공, 자존심에 열폭하는 라이벌, 어딘가 허술한 흑막, 진지한 상황에서 분위기 깨는 개그캐, 출생의 비밀, 가로채기, 원수지간인 두 집안, 난 이 결혼 반댈세, 권력을 둔 싸움, 역적놈의 새끼들, 데우스 엑스 마키나, 복수가 뭐죠 먹는 건가요, 억지스러운 훈훈한 마무리라는 현대 막장 드라마의 특성이 고루 갖추어져 있다보니 도무지 극중 인물상에 공감할 수가 없다.가장 단적인 것이 한 없이 착하며 절대로 나쁜 마음을 품지 않는 주인공과 자의식 과잉인 속 좁고 교활하고 못된 라이벌이라는 한없이 식상한 대립 구도. 이에 주인공이 아무리 나쁜 짓을 당해도 결국은 상대방을 용서해주다 보니, 그런 우유부단한 대처 때문에 라이벌은 반성하지 않고 계속해서 음모를 꾸민다. 라이벌들이 하나씩 죽어나가는 것도 ‘결코 주인공이 의도해서가 아니라 같은 악당들에게 독에 중독되고 칼에 찔려서 살해당하고, 전쟁하다가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저격당해서 전사하고, 마지막에 이미 죽은 여주인공을 그리워하며 칼로 스스로를 찔러서 자살’한다. 그것도 수괴만 그렇고 남은 잔적들은 고스란히 사면.
특히 대단원의 59화에서 '근초고왕이 대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하고 잡혀온 진씨 가문 사람들을 절절히 설득하자 반란을 꾀했던 그들은 뜨거운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갱생하고, 이에 아직도 때가 늦지 않았다며 백제에는 모두가 필요하다는 말로 그들을 일괄 사면'하는 전개는 걸작 중의 걸작. 역사책을 보면 알겠지만, 반란이 진압되면 거기에 연루된 집안은 말 그대로 삼족이 멸한다.[8] 뭐, 그렇다고 아신왕 때까지 멀쩡히 활동하는 진씨 가문을 멸족하는 것도 엄연한 역사왜곡이긴 하지만. 첫 단추부터 잘못 낀 폐해라고 할 수 있다.#
근초고왕이 이처럼 호구대마왕[9]이다 보니 치세 전후 30년 동안 본격적인 내란만 4번이나 일어났다. 정말 모든 에피소드의 갈등관계는 결국 내란으로 귀결된다고 할 정도. 사실 말이 쉬워서 내란이지, 정말 이대로 갔으면 상식적으로 저 멀리 수천 리 바다 건너 해외정복하는 국력은 고사하고 나라 자체가 먼저 멸망했을 것이다. 뭐, 그리고 다시 무조건 용서하는 것으로 대단원.
여타 인물들의 행동이 지나치게 오락가락한 것도 한몫했는데, 비류왕은 태자가 무능해서 대방고지를 고구려에게 내줘야 했다고 태자를 죽여버리려 들지를 않나, 이에 왕비 해소술은 부여준의 도움을 덥석 받아들여 남편을 독살하지를 않나, 과연 해소술을 뒤통수치고 직접 왕위에 오른 부여준은 자기가 뒤통수친 해소술을 왕후로 받아들이지를 않나. 애초에 처음부터 태자를 내버리고 땅을 얻던가, 부여준의 제안을 의심을 좀 하던가, 해소술의 뒤통수를 칠 거면 끝까지 치던가, 인물들의 행동에 도무지 일관성이 부여되지 않으니 인물들의 설득력도 제로에 수렴했다.
이것은 정성희 작가가 전작 자명고에서 이미 보여준 바 있던 지루한 권력 다툼 전개가 한참을 다운그레이드되어 재현된 셈이다. 당초 그리겠다던 정복군주의 이미지는 온데 간데 없이 말이다.
3. 역사 왜곡
3.1. 터무니없이 부풀려진 백제의 영토
예고편에 등장하는 백제의 판도를 보면 일본(관서·구주)-한반도(전라·충청·경기·황해·평안)-만주(요동·요서·내몽골 동부)-중국(화북·산동·강회·강동)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서기 4세기, 적어도 작가의 설정에 따르면 아직 강력한 중앙집권조차 이루지 못한 국가가 중국 대륙에 이렇게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다는 것이다. 고증이고 자시고 애당초 말이 안 된다.[10] 이런 식의 터무니없는 설정은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이라던가 대쥬신제국사, 근초고대왕, 왕인과 같은 역사에 문외한이 쓴 자위적 공상역사소설들에서나 보일 뿐이다. 오히려 백제의 강역이라기에는 강원도 방면이 좀 축소된 느낌이다. 당시 백제는 화천과 춘천까지 진출해 들어가 있었는데, 여기서의 판도는 고작 서울까지나 닿을 정도의 수준이다.
더 나아가 애당초 부제를 환서해대백제(環西海大百濟)로 달아놓아서 원작으로 참고한 것이 대륙의 한은 고사하고 박영규가 쓴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임을 사실상 인정해버리고 말았다. 거기에 위 이미지 지도의 판도는 '대쥬신제국사'와 비슷하다. 백제의 역사와 관련하여 그 강역에 황해도와 요동까지 포함시켜서 환서해 영토의 구축을 운운하는 것은 오로지 이 책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이 장면이 역사 왜곡 논란으로 비화될 기미를 보이자, 제작자가 근초고왕의 개인적 소망이라고 밝히고 부제를 '백제영웅'으로 전환하는 등 진화에 나섰으나, 같은 동네에 인접해 있는 가야와 신라는 무시하고[11] 바다 저 반대편에 있는 중국 해안과 일본의 관서 지방을 소망한다니 도무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래도 저렇게 해명한 덕분에 이후 대륙으로 진출한 백제는 접어둘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여전히 요서경략에 대한 내용은 빠지지 않았다! 이는 요서에 본래 백제의 무역 조차지가 있었으며, 비류왕이 바로 이 무역 조차지를 근거로 세력을 키워 백제 정계에 본격 드랍했다는 주장으로 시작된다. 이후 비류왕은 근초고왕이 되는 부여구를 불러 "서해를 장악하면 중원으로 갈 수 있다"는 대사를 했다.사실 그전에 내정이 안정되어야 겠지만...[12] 그래도 여기까지는 역사적 상상력의 범위 안이라고 어떻게든 눈감아 줄 수도 있지만, 이에 따라 백제에서 쫓겨난 부여구가 바로 이 무역 조차지를 기반으로 기존의 부여 유민을 규합하여 정치적 세력을 구축, 힘을 키워서 백제로 돌아온다는 스토리가 진행된 것이 문제.
이 과정에서 사료상에 백제의 요서 영토로 등장하는 "요서와 진평 2군"을 요서의 '진성'과 '고평성'으로 전환시키는 발상의 전환을 보여주기도 하였는데 당연히 작가가 창작한 지명이다. 그나마 어떻게든 변호해보려는 이들은 어차피 스토리상 갈등의 중요한 갈등 소재는 낙랑과 대방이고 최종 보스는 고구려의 고국원왕이지, 중국 요서에 있는 백제 영토야 고작 성 한두 개 차지한 건데 뭐 이 정도를 가지고 왜곡이라고 그러냐고 하기도 하지만...
작중 등장한 지도를 보면 아주 환상이다. 39회에 나타난 지도와 함께 이전 방영분에 수차례 등장한 지도자료들을 보면, 바로 그 요서마저도 산동에 자리하고 있거니와[13] 고작 성 한두 개라기에는 땅덩이 크기가 장난이 아니다. 이 인간들이 '요서와 산동반도'라는 당초의 역사 왜곡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것. 심지어 중국 영토에서 전투를 벌이면서 백제가 지금의 스좌좡(石家庄) 일대까지 밀고 들어갔다는 자막을 띄웠는데, 스좌좡은 중국에서도 꽤나 내륙에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정확히는 지금의 허베이성 서남쪽에 있으며 서쪽으로 가면 바로 산시성이다.
게다가 위 지도에서 한반도에 있는 백제 영토를 유심히 보면 실제로는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서부에 걸쳐 있어야 할 백제의 영역이 정작 수도인 한성은 어디가고 전라도와 충청도로 찌그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도에 표시된 백제의 영토가 이러한데 하물며 고구려와 연나라, 조나라의 영토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당연하겠지만 실제로는 당연히 연나라, 조나라와의 전투 및 갈등조차 없었으며, 정황상으로보면 전투는커녕 오히려 외교를 맺었거나 그조차 없었을 확률이 높다.
3.2. 터무니없이 찌그러진 일본과 신라
종국에 근초고왕은 예(濊), 맥(貊), 한(韓)을 아우르는 군주[14]가 되고자 하는데, 이 과정에서 당연히 태클을 걸어야 할 신라가 아무런 비중이 없다. 실제 역사상으로 근초고왕은 남방을 경략하는 과정에서 신라에 명마를 선물하는 등 동등한 국가로 신라를 예우하였고, 야마토에 사신을 파견해서도 신라에 대한 견제를 제안하는 등 상당한 외교적 고려를 기울인 흔적이 있다. 그럼에도 나중에 근초고왕이 달아난 독산성주를 송환하라고 신라에 요구하자 '너나 잘하세요' 식의 회답을 받기도 하였으니 당시 신라의 위상이란 것은 절대로 공기가 아니었다.하지만 49회가 되어서야 비로소 등장한 신라의 위상은 초라하기가 짝이 없다. 신라에서 사신으로 온 실성(!)[15]이 하는 말에 따르면 이 시기 신라는 동쪽의 궁벽한 나라로 물산이 부족하교 교역이 여의치 않으며, 북으로는 말갈이 발호하고 동으로는 왜에서 온 해적들에 시달리고 남으로는 가라와의 분쟁에 직면해 있으니 근초고왕에게 교역로를 열어달라고 부탁하는 처지다. 하지만 일본서기를 통해 유추해보면 실제로는 거꾸로 백제가 신라에게 주변국들의 교역을 방해하지 말라고 탄원을 빙자한 협박을 하는 판국이었다.
더불어 해당 화에서는 야마타이의 사신도 드디어 등장하는데, 배우의 발연기도 발연기이거니와 내용이 참으로 아스트랄하다. 야마타이국이 일본을 호령한 야마토 정권으로 성장한 배후에 백제가 있었다는 나레이션으로부터 시작해 왜의 사신들은 이미 다녀갔다며 문전박대를 당하질 않나, 사신단의 우두머리인 왕녀 진구[16]가 야마타이는 사방 50리의 작고 가난한 나라라고 하여 비웃음을 사기까지 한다. 이후 진구는 백제에 얹혀살면서 부여근과 러브 플래그.
그런데 전방후원분으로 상징되는 고분시대의 고고학적 증거들에 비추어 보았을 때, 야마타이는 적어도 한 세기 전부터 이미 일본의 맹주로 떠올랐어야 고증에 맞다. 문헌상으로도 야마타이는 한 세기 전인 3세기 전반에 히미코가 일본의 맹주로서 신라와 중국에 사신을 보냈던 바 있다.[17] 더욱이 당시 천황[18]은 이미 탁순국을 매개로 백제와 처음 만나서 근초고왕의 마한정복에 보조를 맞추어 활동하였는데, 그러한 반(半)역사적 기록들이 다 가위질되고 마한 정복이 끝난 이 시점에야 처음으로 등장하니 도무지 무엇이라 형용해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3.3. 비행
하늘을 날았다. 이 시기는 서기 4세기이다.
주역은 백제와 말갈군, 장소는 고구려 고모리성. 하긴 중국 영화 '묵공'에서는 전국시대 조나라 군대가 열기구를 만들어 타고 다른 영화 '연의 황후'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오는데 우리라고 못할 게 뭔가라는 생각으로 보인다. 사실 비행기보다는 행글라이더에 가깝긴 한데, 조선 시대 비차에서 영감을 얻은 듯하다. 5월 21일 방영분에서 당삼채 등장. 이외에 세기 어렵다.
어쨌든 이런 희대의 개드립으로 방영 이후 유머 자료에 자주 등장했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었는데...
3.4. 생활 고증
3.4.1. 복장
드라마 근초고왕에 나오는 근초고왕과 그의 두 왕후인 부여화와 위홍란 | 문헌 및 유물을 토대로 재현한 백제 왕과 왕후의 복식 |
일단 호평점에서 언급했지만 복식 고증은 갑주 고증과 더불어 여태 방영했던 한국 고대 국가를 다룬 사극 중 가장 탁월하다고 평가받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세세한 오류가 없지는 않지만 무협풍의 봉두난발이나 중국식 관모 일색이었던 남성의 두식 역시 변형모를 적극 차용해서 한국적인 느낌을 살렸다.
백제 왕의 경우, 오라관을 쓰고 나온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다고 평가되지만,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조(서기 260년)에 기록된 공복(公服)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오른쪽의 재현처럼 긴소매의 자주색 수포(袖袍 ; 큰 소매가 달린 도포)와 청금고(靑錦袴 ; 파란 빛깔의 견직물 바지)를 입고 소피대(素皮帶 ; 하얀 빛깔의 가죽띠)로 외투를 묶었으며, 오위리(烏韋履 ; 까만 빛깔의 가죽신)에 머리띠와 함께 순금제 금화입화식을 전후 혹은 좌우에 꽂은 고깔형 비단 관모를 썼다. 게다가 드라마사에서 왕후의 복식에 보이는 관모는 고증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창작품으로, 해당 소품의 개략적인 형태는 화관과 비슷하지만, 이는 당나라 스타일의 복식으로서 한국 고대 국가에 화관이 도입된 것은 문무왕 시절로 당대 백제 왕실에서는 화관을 사용하지 않았다.
백제의 왕후 복식은 그에 대한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남겨진 일부 유물과 관련문헌 및 동시대 주변국의 복식 등을 참고한 위 사진으로 볼 때, 화려한 금제 경식, 이식의 장식과 더불어 순금제 금화입화식을 전후 혹은 좌우에 꽂은 고깔형 관모를 썼으며,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그 위에 포나 반소매 옷인 반비를 덧입었다. 일반 귀족들과 차이를 두기 위해 값비싼 염색에 더하여 화려하고 섬세한 문양 및 금실이나 금박으로 옷감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고급 장신구로 치장했을 것이다. 장신구로는 목걸이, 귀걸이, 팔찌, 가락지 등을 착용했다.
위처럼 왕후 역시 근초고왕이 쓴 오라관이나 고깔형 비단 관모를 착용해야 맞고, 본편에서 등장한 정체불명의 화관은 시대를 300년 정도 거슬러 올라갔을 뿐더러 그 형태도 용도도 고증과는 거리가 멀다.
드라마 근초고왕에 나오는 백제 귀족 | 문헌 및 유물을 토대로 재현한 백제 귀족의 복식 |
백제 귀족들의 경우, 고이왕대에 6품 이상은 자주빛깔의 옷을 입고 은화(銀花 ; 은꽃 모양)로 관을 장식했고, 11품 이상은 웃옷에 복비(服緋 ; 빨간 빛깔의 옷. 비단으로 만든 옥)를 했으며, 16품 이상은 웃옷에 복청(服靑 ; 파란 빛깔의 옷)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중국의 양나라(541)에 공물을 바치는 그림에서 백제의 사절은 마루를 끄는 옷을 입은 것으로 묘사되었다. 이 모델들은 소매, 옷단, 옷깃 주위에 진한 자주색 천 띠를 덧댄 녹색의 외투에 녹색 벨트를 했다.
3.5. 인물 고증
3.5.1. 허구의 인물
드라마 초반부터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었던 문제. 한국 사극 대부분이 그렇듯, 말 그대로 있어야 할 사람이 없고 없어야 할 사람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사료에 등장하는 근초고왕 시대 왕족 외 인물의 이름을 대충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진정, 구저, 미주류, 막고, 사백, 개로, 목라근자, 사사노궤, 사지비궤, 막고해, 고흥, 진고도, 아직기.그러나 정작 드라마에 등장하는 것은 이 가운데 진정, 고흥, 진고도 정도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행방이 묘연한 채 대신 진승, 위비랑, 부간태, 해건 등이 난입하여 그 자리를 채웠다. 일각에서는 혹시라도 복구검이 나중에 막고해로 개명하는 것 아닌가 하는 기대 아닌 기대가 있었으니, 4월 10일자 방영분에서 드디어 복구검이 목라근자로, 두고가 막고해로, 아지카이가 아직기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문제가 있는 것이, 희대의 외교활동을 펼친 구저, 미주류, 막고의 3인방은 아직도 행적이 묘연하고 아직기는 원래 이름이 '아지'에 '키시'라는 존칭이 붙은 것임을 알지 못한 채 통째로 아직기로 개명당했다. 하긴 애초부터 이름이 아지카이긴 했다.
3월 6일 | 3월 6일 | 4월 10일 | 4월 10일 | 4월 10일 | 4월 23일 | 5월 14일 |
부여구 | 사어달 | 복구검 | 두고 | 아지카이 | 사기 | 쇠꼬비 |
근초고왕 | 사기 | 목라근자 | 막고해 | 아직기 | 사기 | 부여구수 |
이처럼 극중 개명 드립을 무식하게 때려대면서 가공인물을 잘 알려진 역사에 맞춰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으로 보아 명백히 설정이 고증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고증이 설정을 따라가고 있다. 왕인의 아역 큰어지가 등장함으로써 다행히 침미소 → 왕인은 나오지 않았다.
3.5.2. 가계의 위조
백제의 귀족 가문으로 진씨, 해씨, 사씨, 국씨, 연씨가 등장한다. 진씨와 해씨는 삼국사기에서, 사씨는 일본서기에서 그 기록이 확인된다지만 연씨와 국씨는 대체로 그 등장이 5세기 중반 이후로 비정되고 있다. 물론 애시당초 이에 대한 근거 사료가 빈약하니 저 설정은 역사적 상상력의 범위 안이다.문제는 목씨로, 목라근자와 목만치 등 한성기 백제 역사에 중대한 비중을 차지하는 목씨가 지금껏 등장하지 않고 있었지만 4월 10일 방영분에서 드디어 복구검이 목라근자로 개명했다.
더불어 사씨에 대해 일본서기에 사백, 사사노궤, 사지비궤가 잇달아 등장하여 그 계보를 확인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사충선-사어달(사기)로 이어지는 족보를 위작했다는 것이 문제. 나아가 근초고왕이 즉위하면서 사어달에게 '기'라는 이름을 하사하는데, 이 사기가 치양 전투에서 첩자로 활약한 그 사기로 추정되어 주목을 요한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사기가 바로 그 사기라면 드디어 불안하던 근초고왕이 마침내 확연한 사고를 터트린 셈. 첩자 노릇한 사기의 이름은 한자로 斯紀이고, 대성팔족 중 사씨 가문의 성은 모래 사(沙)이다. 보면 알겠지만 글자가 다르다! 이를 의식했는지 4월 23일자 방영분에서 이젠 아예 한자마저 갈아치웠다. 그러면 이제 사씨(沙氏)가 사씨(斯氏)가 되나?[19]
46회에서 반란이 깨지면서 부여화의 아들이 해건의 충복인 을마흘과 부여화의 시녀장이었던 단단이에 의해 외국으로 도망가게 되는데, 그 이름이 구수라고 예고에 뜨고 진홍란의 아이는 근이라는 이름을 받아버렸다.[20] 이것은 현재 근초고왕 드라마의 팬들 자체를 떠나게 할 수 있는 중대한 요소다. 물론 역사 기록에 따르면 근초고왕은 차남이라 하니 이 드라마에서 4남으로 나온 것부터가 왜곡이다. 근구수왕은 엄연히 역사에서 왕후 진씨의 아들로 나와 있는데 부여화의 아들로 하려고 하니 또한 왜곡이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위홍란이 진씨가 양녀로 들어가서 진홍란으로 개명하고 왕후 진씨가 된다는 것부터 더 대단한 왜곡이긴 하다. 왕후 진씨 또한 역사적으로 진족 출신이라 명시되어 있기 때문.[21]제작진은 이러한 왜곡들을 결국 부여구수가 마지막에 진홍란의 양자로 들어가는 것으로 수습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위홍란이 진씨가 양녀가 되어 왕후 진씨가 됐는데 상관없지 않느냐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따지면 구수가 아무리 부여화의 소생이라 할지라도 진홍란의 양자로 들어갔으니 상관없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47화에서는 원작에서만 주인공인 부여광이 드디어 계왕의 적통 손자로 등장했다. 예고편과 뉴스 보도를 통해 공고된 바를 종합하면 # 이로서 진홍란 소생 부여근, 부여화 소생 부여구수, 석라해 소생 부여광으로 한 단계씩 아래로 밀어준 셈인데, 때문에 시청자들 항의는 공식 홈페이지 시청소감 게시판과 DC갤에서 나아가 시청자데스크를 넘어 KBS 오피스로까지 번지고 있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3.5.3. 소금장수
드라마에서는 부여구가 왕이 되기 이전에 소금장수를 했던것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실제로 왕이 되기 전에 소금장수를 했던 인물은 미천왕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미천왕은 드라마의 또 다른 등장인물인 고국원왕의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고국원왕이 부여구를 아버지가 살아남기 위해 했었던 소금장수라는 직업으로 비하한 것은 역사적 사실을 볼 때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다.사극 흥행을 위한 소금장수라는 억지설정이 필요했다면 차라리 실제 기록에 있는 역사적 떡밥이 넘치고 넘치는 미천왕을 소재로 삼았어야 했다.
3.6. 사건 왜곡
초반부터 줄곧 묘사된 대방 땅을 두고 비류왕과 고국원왕이 경쟁하는 부분도 업적의 위조이다. 당시 고국원왕은 낙랑과 대방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황으로 중국인 관료를 통해 간접적으로 통치하고 있었으며, 전연의 모용황에게 시달리느라 백제와의 분쟁에 신경을 쏟을 틈이 없었다. 무엇보다 369년 이전까지 삼국사기에 백제와 고구려의 충돌 기사가 전무하다.이의 연장선으로 중반에 들어 고국원왕이 연나라와의 분쟁으로 낙랑과 대방에 신경을 쏟지 못하는 모습이 연출되기도 했으나 이 또한 업적 위조. 342년 전연의 모용황에 의해 환도성이 함락당하는 수모를 겪은 고국원왕은 이듬해 연으로 동생을 보내 신하를 칭하며 조회하였고 이로서 전연과 고구려 사이에는 이미 전연 우위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12년 뒤에는 고국원왕이 전연에 의해 책봉받기도 했다.
근초고왕이 아직 즉위하기 전, 왕위 다툼에서 밀려나 요서에 머무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여기서 요서에 있는 부여 유민들이 고구려를 원수로 알며 치를 떤다. 그런데 정작 대무신왕 대 고구려에게 패배한 그 부여는 망한 지 수백 년이 지난 데다가 그 나라 사람 만여 명이 자발적으로 투항했다는 기록만 있지 완전히 망했다는 기록도 없다. 더불어 그렇게 따진다면 고작 십여 년 전에 부여가 선비족 모용씨에게 크게 격파당한 기록이 있는데, 가까운 모용씨를 두고 먼 고구려를 원망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설정 오류이다.
36화에서는 근초고왕이 6좌평을 설치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고의로 오류를 낸 것이 아닐까 의심될 정도로 심각한 문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조 27년에 뚜렷이 등장하는 6좌평 설치 기사, 28년에 등장하는 6좌평 임명 기사를 송두리째 무시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삼국사기 초기 기사는 믿을 수 없다는 견해도 많다지만,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실로 무시무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59화에서는 백제의 내란 때문에 평양성에서 후퇴한 것이 삼국사기에 '지진'이 일어난 것으로 은유되어 있다면서 거하게 또 다른 드립을 쳤는데, 물론 이 지진 기사가 있기는 있고 지진을 비롯해 이상 기후나 이상 현상을 이런 식으로 은유하는 방법 자체야 많은 연구자들이 활용을 하고 있지만 문제는 평양성 전투는 371년 겨울이고 지진이 일어난 건 372년 가을이다. 군대에서 가장 신속, 정확해야 하는 게 철수 작전인데, 그 동네에서는 그게 1년 걸리는 모양이다. 애초에 은유를 활용한다는 것도 구체적이고 분명한 증거까지는 제시할 수 없지만 앞뒤 정황상 그렇다는 정황 증거 정도는 있는 상황에서 2% 부족한 부분을 메우는 정도로 쓰는 경우지, 백제에서 내란이 일어났다거나 이 시기에 평양에서 철수했다고 볼 수 있는 근거가 전혀 없는데 은유부터 들이대는 것은 곤란하다.
유리왕의 황조가의 마지막 구절을 "뉘와 함께 날아갈꼬(誰其與飛)"로 왜곡했다. 그리고 "큰외숙, 작은외숙, 승이가 없다면 제가 어떻게 날아갈 수 있겠습니까?"라 하면서 놀라운 언변으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하고서도 끝까지 츤츤거리던 진씨 가문을 순식간에 감복시켰다. 참고로 황조가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자웅상의(雌雄相依) 암수 서로 정답구나
염아지독(念我之獨) 외로울사 이내 몸은
수기여귀(誰其與歸) 뉘와 함께 돌아갈꼬
3.7. 지명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괴상하고 괴악한 지명 고증(남평양성, 고모리성, 사오리성, 수탄성, 수양성, 모로성, 버들나루, 모디골, 초성리 기타 등등)은 그나마 당시 자료에 근거한 것이라 말하고 싶었겠지만, 대부분(요서경략 파트의 경우에는 확실히) 믿을 게 못된다.#3.8. 장면 생략
대하사극의 본분을 잊어버린 최악의 행각. 역사왜곡 논란이 있었든간에 이 부분만 잘 묘사하고 넘어갔으면 최소 평작 이상의 평가는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근초고왕의 가장 잘 알려진 업적은 정복사업으로, 무엇보다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파트이다. 심지어 KBS에서도 이 작품과 후속작 2개를 발표하면서 영웅군주 트리오라는 명칭을 야심차게 붙였다. 즉, 다른 장면은 모두 줄이더라도 정복전쟁을 다루는 부분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할애해서 묘사했어야 했다.
그러나 본 작품은 정작 이 중요한 장면들을 모조리 CG로 몇 초만에 스킵해버리는 위엄을 선보였다. 근초고왕의 15년간 남방경략은 지도와 허접한 CG, 그리고 성우 처리로 스킵하고 침미다례로 직행. 이마저도 48화, 49화만 할애함으로서 말 그대로 날로 먹었다! 이건 말 그대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근초고왕의 남방경략에 대해서는 근초고왕 항목 참조.
이 장면에서 백제는 남쪽으로 침미다례까지 정복했는데, 그 전후로 고구려의 비중이 갑자기 줄어들었다. 기껏해야 고구려의 원로이자 국상으로 활동해오던 조불이 사망한 정도. 그리고 조불이 굴리던 호두는 소수림왕이 이어받았다. 근데 기록상 백제가 본격적인 남방경략을 시작한 것은 369년 3월(일본서기), 고구려가 치양으로 치고 내려온 것은 바로 그해 9월(삼국사기). 말하자면 침미다례가 격파되기 무섭게 고구려가 치고내려오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 이 마당에 고구려 비중을 급 줄이고 다시 집안싸움으로 가면...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닐텐데?
남방경략에서 드러난 것처럼, 이어지는 고구려 전쟁에서도 일반인은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독창적인 전쟁 묘사 감각이 돋보였는데, 이 형언하기 어려운 독특한 감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역시나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아니나다를까 치양 전투에서 2년 스킵하고 곧바로 평양성으로 진격해서 또 날로 먹었다!
한 마디로 정복군주를 표현하겠다는 초기 기획 의도는 내팽개치고 궁궐 내부의 막장드라마와 역사서에 기록된 적도 없고 상식적으로도 말도 안 되는 내부 반란 시나리오나 4번을 때려박는 주제에 가장 중요한 정복전쟁 파트는 모조리 날로 먹어버리는 미친 짓을 저지르면서 대하사극의 기본조차 날려버린 최악의 작품으로 등극하고 말았다. 기록이 부족하다거나 하는 등의 핑계도 댈 수 없는 것이, 애초에 역사서에 존재한 적도 없는 막장 드라마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엄청난 비중을 할애하면서 정작 중요한 부분은 창작으로조차 메우는 시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9. 근초고왕의 말년
마지막화에서 근초고왕의 말년이 태평성대로 묘사된다. 하지만 당시 근초고왕의 말년과 백제의 상황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었다.백제 독산성(禿山城) 성주가 300명을 이끌고 와서 항복하였으므로 왕이 그들을 받아들여 6부에 나누어 살게 하니, 백제 왕이 글을 보내 말하였다. "두 나라가 화친을 맺어 형제가 되기를 약속했었는데, 지금 대왕께서 우리의 도망한 백성을 받아들이니 화친한 뜻에 크게 어긋납니다. 이는 대왕이 바라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바라건대 그들을 돌려 보내십시오."
(왕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백성은 일정한 마음이 없다. 그러므로 생각나면 오고 싫어지면 가버리는 것은 진실로 그렇기 때문이다. 대왕께서는 백성이 편치 않음은 걱정하지 않고 도리어 과인을 나무라는 것이 어찌 이렇게 심한가?" 백제에서 그 말을 듣고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내물 마립간 본기 18년
(왕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백성은 일정한 마음이 없다. 그러므로 생각나면 오고 싫어지면 가버리는 것은 진실로 그렇기 때문이다. 대왕께서는 백성이 편치 않음은 걱정하지 않고 도리어 과인을 나무라는 것이 어찌 이렇게 심한가?" 백제에서 그 말을 듣고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내물 마립간 본기 18년
373년 신라 내물 마립간 본기의 독산성 관련 기록이 있다. 당시 백제의 독산성 성주가 300여 명을 이끌고 신라에 투항했는데, 이에 근초고왕은 내물 마립간에게 돌려주기를 요청했으나 디스를 당한 이후 아무 말도 못하는 등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또 근초고왕이 마지막에 고구려 정벌을 준비하다가 승하하는 장면이 있는데, 당시 백제는 고구려 정벌을 준비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三十年 秋七月 高句麗來攻北鄙水谷城。 陷之 王遣將拒之 不克。 王又將大擧兵報之 以年荒不果。
30년 가을 7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임금이 장수를 보내 방어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임금이 다시 병사를 크게 동원하여 보복하려 했으나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30년
30년 가을 7월, 고구려가 북쪽 변경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임금이 장수를 보내 방어하게 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했다. 임금이 다시 병사를 크게 동원하여 보복하려 했으나 흉년이 들었기 때문에 실행하지 못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근초고왕 30년
실제로는 오히려 고구려에게 수곡성을 빼앗겼지만, 흉년이 들어 보복도 하지 못했을 정도로 상황이 나빴고, 고구려 정벌 준비는커녕 같은 해 11월에 근초고왕은 승하했을 뿐이다.
4. 기타
이미 근초고왕 공식 홈페이지 시청자 게시판과 DC갤 근초고왕 갤러리에서는 시청 중단 및 퇴갤 선언이 잇따라 이어졌으며, 이러한 기세를 업어 다음 아고라에 근초고왕 역사왜곡 반대 서명이 개시되었고,# 드라마 공식 홈페이지에 연재하던 모 블로거도 이러한 상황과 제작진 측의 무대응에 대한 비판을 적극적으로 제기했다.# 그리고 본격 드라마 까는 책이 출간되었다. 본격 드라마 까는 책그리고 비난을 잠재워보려는 의도였는지 티아라 멤버 함은정이 근구수왕의 아내 진아이로, 큐리가 근초고왕의 딸 부여진으로 투입되었다. 그러나 현대 아이돌은 대체로 사극과는 맞지 않는 현대적인 비주얼과 연기력으로 인해 사극에서 좋은 점수를 받기 힘들다.[22] 덕분에 오히려 구부역을 맡은 배우 정인우가 이와 대비되는 모습으로 호평을 받았다. 덕분에 어째서인지 주인공이 속한 백제보다 적국인 고구려가 더 인기가 많은 상황이라, 작가는 고도의 고구려빠에 백제까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 외에 문경 세트장에서는 찻사발축제가 진행중인데도 버젓이 그곳에서 촬영을 강행하는 바람에 축제 관계자들과 관람객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세트장 관리를 맡고 있는 김영년 문경새재도립공원관리사무소장의 증언에 따르면 그 이유가 대본이 5일 전에 나오는 등 제작진 측의 일정이 빡빡해서라고. 막장 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특성인 쪽대본이 이미 진행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1] 한창 광개토대왕에게 시달리던 백제가 요서까지 진출할 여력이 있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우니까. 그리고 요서까지 진출한 국력이 있었다면 오히려 가야, 신라 더 나아가 고구려를 침공하는 쪽이 이득일 것 이다.[2] 백제와 산동과 관련된 산동경략설로 추정되어보이는 기록조차 백제 후기인 위덕왕과 관련된 기록이다. 더군다나 이시기에는 북제가 있었거나 북부 왕조들을 통합한 북주, 그리고 중화를 재통일한 수나라가 있었다.[3] 육지로는 고구려에 막혔으니 육지로는 통과 못한다.[4] 심지어 연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무주공산이 된 것이 아니라 전진-서연-후연-남연 식으로 계속 소유자가 바뀌어 갔다. 무주공산에 혼란한 처지라면야 틈을 노려볼만 하다만 지배자만 바뀔 뿐 계속해서 명백한 주인이 있는 땅을 공략한다는 건 난감한 일[5] 정인보가 백제의 산동 진출을 주장하며 산동에 '백지래왕'의 사묘가 있다고 운운한 데에서 착안한 기록으로 보이는데, 이 백지래왕의 사묘라는 건 이미 기원전부터 있던 거다.[6] 이미 왜국은 그 이전부터 중국문물을 받아들여 나름대로 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 절대 미개하지 않았다. 물론 문화 수준 자체는 중국이나 한반도보다 낮았던건 사실, 그렇다고 야만족 따위로 우습게 생각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이 당시 일본이 원시인 수준이었다면 백년도 안 된 아신왕때 일본과 손잡고 신라를 공격할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7] 매회 엔딩에 이를 알리는 자막이 올라간다.[8] 아무리 왕이 보살이라고 해도 반란을 일으킨 세력은 멸문지화할 수 밖에 없는게 현실이며 용서한다는 건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고 불가능하다.[9] 본 드라마에서 근초고왕의 이름이 '부여구'로 설정되어 있다 보니, 시청자들은 이런 그에게 '부여호구'라는 존칭을 헌사하였다(...).[10] 한국사에서 가장 위대한 정복군주라는 광개토대왕조차 이정도는 못했다.[11] 실제로 역사상 근초고왕은 적절한 외교활동을 통해 가야와 신라에 일정한 영향력을 확보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12] 농담이 아니고 반란이 계속 일어나는데 정복활동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정도 가능하려면 자국의 병력을 거의 다 외국에 꼬라박해야 한다는건데 반란이 일어나면 그 때는 어찌 할 것인가? 자국군을 회군시킨다? 그것도 한계가 있다. 가까운 곳이면 모를까 지도상에 나타난대로 양자강 이남에서 백제에 오려면 몇 달은 걸린다.[13] 요서는 '요하의 서쪽 땅'을 지칭하는 말로 요동지방 바로 옆에 붙어있어야지 산동반도에 있는 것은 말이 안된다. 지도에 표시된 지역보다 더 북쪽이며, 고구려의 바로 서쪽이다.[14] 차라리 이런 캐릭터성은 근초고왕이 아니라 광개토대왕에 더 가깝다.[15] 이때 신라의 사신으로 등장한 이찬(!) 실성(김하균 분)이 너무 늙었다. 실성은 392년에 고구려에 인질로 갔다가 402년에 즉위했으니, 즉위 당시 50대였다 쳐도 극중 시점인 369년에 실성의 나이는 아무리 잘 봐줘도 어린아이 수준이다. 급기야 막방에서는 실성을 훗날의 내물 마립간이라고 표기하는 짓을 벌이고 종방.(...)[16] 헌데 이 진구라는 이름은 사실 시호다. 제갈량을 생전에 충무후라고 부르고, 김시민을 생전에 충무공이라 부르고, 이순신을 생전에 충무공이라 부르는 꼴이다. 전설 속에서는 신라와 삼한을 정벌했다고 서술되어 악명 높은 임나일본부설의 근거가 되었는데, 여기서는 오히려 역으로 능욕당한 셈이나 이것도 그닥 바람직한 접근이라고 하기는 어렵다.[17] 애초에 중국에 자력으로 사신을 보낼 정도라면 그만한 국력이 있다는 말이 된다. 일본은 중국 옆나라가 아닌 만큼 배타고 몇달 가야 하는데 거기에 드는 재원이 있어야 보내든 말든 할 것 아닌가?[18] 진구황후는 창작의 인물에 가까울 것이고 당시의 천황은 다른 사람일 수 있다.[19] 다만 실제로 한국어식으로 음이 똑같은 한자로 된 고유 명사가 서로 다른 한자로 기록되는 사례는 종종 찾아볼 수가 있다. 당장 여기 나오는 사씨도, 沙氏가 아니라 砂氏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단순히 '한자가 다르다!' 라는 건 눈을 감기로 하면 감아줄 수도 있는 문제다. 다만 문제는 沙와 砂로 기록이 되지 斯 자는 어딜 찾아봐도 없다는 것.[20] 아것 때문에 공홈에서 근구수왕은 구수다, 근이다 논란이 상당했는데, 역사 기록에 따르면 근구수왕은 수, 휘수, 귀수, 구수라고도 불렸다. 역사를 알고 있었으면 근구수왕이 누가 될지는 금방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근구수왕의 '근'은 구수왕의 뒤를 잇는 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이지 사실 큰 의미는 없다.[21] 삼국사기 제24권 백제본기 제2에 2년(서기 376) 임금의 외삼촌 진고도(眞高道)를 내신좌평으로 삼아 정사를 맡겼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근구수왕의 어머니는 분명히 진족 출신이다.[22] 사실 단순히 아이돌을 캐스팅해서 문제였다고만 보기는 힘든 게, 함은정 및 큐리와 같은 티아라 멤버인 효민은 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똑같이 백제인들이 주역으로 나오는 계백에서 초영 역을 맡아 훌륭한 연기로 호평을 받았기 때문에 더더욱 비교되는 점도 있다.(특히 함은정은 티아라 데뷔 전 아역 배우 경력이 있다.) 아이돌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해당 배역을 소화할 수 없는 배우를 캐스팅해서 문제였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