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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20 12:56:54

공회빈 윤씨

공회빈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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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순회세자의 세자빈
공회덕빈 윤씨 | 恭懷德嬪 尹氏
파일:순창원.jpg
순창원 전경
출생 1553년 7월 21일(음력 6월 1일)
조선 한성부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일대)
사망 1592년 4월 4일(음력 3월 3일)
(향년 38세)
조선 한성부 창경궁 통명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능묘 순창원(順昌園)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빈(빈궁)
1561년 ~ 1563년 10월 16일
조선 왕세자빈 | 덕빈
1563년 10월 16일 ~ 1592년 4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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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b0e64><colcolor=#ffd400> 본관 무송 윤씨
부모 부친 부원군 윤옥
(府院君 尹玉, 1511 ~ 1584)
모친 부부인 파평 윤씨
(府夫人 坡平 尹氏, ? ~ 1572)
배우자 순회세자
종교 불교
봉작 왕세자빈(王世子嬪) → 덕빈(德嬪)
시호 공회빈(恭懷嬪)
}}}}}}}}} ||
1. 생애2. 사후3. 가계4. 참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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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조선 순회세자의 세자빈. 명종의 며느리이다.

공조판서를 지낸 윤사익(尹思翼)의 손녀이자 윤옥(尹玉)의 딸로 1553년(명종 8년) 6월 1일에 태어났다. 9살이 되던, 1561년(명종 16년), 순회세자가례를 올리고 세자빈이 되었으나 2년 뒤인 1563년(명종 18년)에 남편 순회세자가 사망하자 11살의 어린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어 덕빈(德嬪)이라 불렸다.[1] 순회세자 사후, 선조 즉위 후에도 에서 계속 생활하다가 임진왜란 발발 직전인 1592년(선조 25년) 음력 3월 3일, 창경궁 통명전에서 사망하였다. 사후 공회빈(恭懷嬪)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순회세자빈 윤씨의 졸기
3일에 순회세자빈(順懷世子嬪) 윤씨(尹氏)가 (卒)하였다.
윤씨는 참판 윤옥(尹玉)의 딸로서 10세에 간택되어 덕빈(德嬪)에 책봉되었는데,
이듬해에 세자(世子)가 졸하였다.
그러나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유명으로 궁궐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上)이 또 왕세자를 세우지 않았으므로 빈이 그대로 동궁(東宮)에 거처하였다.
이 정성을 다해 그를 대우하였으며 여러 비빈(妃嬪)들도 모두 따르며 수학(受學)하였다.
빈의 성품이 지극히 정결하였는데
세자상사를 당한 뒤로부터 종신토록 언제나 상중에 있는 것처럼 하였으며
친척들의 궁궐 출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세자의 영혼을 기원하는 뜻에서 불공을 자주 드렸으나
상이 가엾게 여겨 금지시키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卒)한 것이다.
시호를 공회(恭懷)라 하고 장차 세자원(世子園)에 부장하려고 공사를 크게 일으켰는데,
갑자기 왜변(倭變)을 만나 미처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상이 피난을 가게 되었다.
이에 빈소를 모시고 있던 관리 몇 사람이 후원(後苑)에 임시로 매장하려 하였으나
재실(梓室)이 무거워 옮길 수 없었는데, 조금 있다가 궁전에 불이 나는 바람에
관리들도 모두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이에 궁인들이 그를 추모하고 비통해 하면서 말하기를,
‘빈이 살았을 적에 불교를 숭상하였는데, 우연히 화장(火葬)하게 되었으니 그것도 생전의 뜻에 부합된다.’ 하였다.
- 선조수정실록》 26권, 선조 25년(1592, 명 만력(萬曆) 20년) 3월 3일 갑자 2번째기사

2. 사후

창경궁 통명전 부근에 빈소를 설치하고 시신을 안치하여 상례(喪禮) 절차를 진행하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선조와 신하들이 의주로 급히 피난을 가면서 어가가 벽제에 이르렀을 때에야 덕빈의 시신을 후원에 임시로 가매장하라는 전갈을 보냈으나, 1593년(선조 26년)에 피난 갔던 선조가 다시 한양으로 돌아와 그녀의 시신을 수습하려 하였을 때 찾지 못하였다. 당시 사평(司評) 이충(李忠)이 시신을 함춘원(含春苑)[2]에 묻었다고 했으나 그가 이미 죽은 뒤라 덕빈의 남동생 윤백상에게 찾아보게 했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다.
덕빈은 곧 순회세자으로 임진년 2월 창경궁동궁에서 (卒)하였는데 미처 장사지내지 못했었다.
변란(變亂)이 일어나 (上)이 서쪽으로 파천하여 벽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후원(後園)에 가매장할 것을 명하였다.
윤백상은 곧 덕빈의 동생이다.
후에 대가(大家)가 환도하니, 이충은 이미 죽었는데 이충과 함께 묻은 자가 스스로 상소하여 아뢰었다.
(上)이 여러 관원으로 하여금 아는 자를 데리고 함께 가서 찾게 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
- 《선조실록》 37권, 선조 26년(1593, 명 만력(萬曆) 21년) 4월 18일 임인 1번째기사
선조는 이처럼 시신이라도 찾는 심정으로 강령술까지 고려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가 커서 무산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1603년(선조 36년), 결국 선조는 신주(神主)만 봉안하여 순회세자와 공회빈을 순회묘(順懷墓)[3]에 합장하였으나 이마저도 병자호란 때 분실되었고 순창원(順昌園)에는 순회세자의 재궁(梓宮, 관)과 공회빈의 빈 재궁만 안장되게 되었다.
비망기로 전교하였다.
공회빈(恭懷嬪)의 일은 차마 말할 수조차 없다.
사변(事變) 때문에 국가가 황급하여 지금까지도 신주(神主)를 모시지 못하였으니
이는 참통한 중에서도 참통한 일이다.
순회세자도 신주가 없으니, 이 양위(兩位,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의 신주를 세워
전례대로 유사가 치제하고 조처하는 일이 있어야 할 듯하다.
내 우연히 생각하니 말보다 눈물이 앞선다.
의논하여 처리할 것을 예조에 말하라.
【임진년(1592년) 4월에 빈의 상이 빈소에 있었는데, 왜적이 갑자기 쳐들어왔다.
대가서쪽으로 행행하여 시사가 창황하게 되자 그대로 버려두고 떠났다.
그 뒤에 빈의 족인들이 겨우 (殿)의 뜰에다 매장하였는데, 왜적이 파내어 불태웠다.
그러니 당시 국사를 도모한 대신과 도감의 여러 신하들이
기일을 앞당겨 잘 조처하지 못한 죄를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환도한 지 10년에 간혹 이 사실을 말하는 사람은 오열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이 때에 이르러 비로소 이러한 전교가 있었다.】
《선조실록》136권, 선조 34년(1601, 명 만력(萬曆) 29년) 4월 25일 임진 1번째기사
순창원은 지난 2006년 문화재청에 의해 '순창원 도굴 미수 사건' 현장이 발견돼 각종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3. 가계

4. 참고 문서


[1] 효장세자가 일찍 죽어 14살에 과부가 된 효순왕후보다도 더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되었다.[2] 현재의 서울대학교병원 위치이다. 병원 입구에 있는 함춘회관이 당시 지명을 계승하고 있다.[3] 1870년(고종 7년) 이후 순창원으로 명명.[4] 어머니는 파평 윤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