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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중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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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colbgcolor=#e3ba62> 덕수궁 중명전
德壽宮 重眀殿
소재지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41-11 (정동)
수량 / 면적 1동 2층, 대지 2,399㎡, 건축면적 877.8㎡
건축시기 1899년 (창건)
1901년 (중건)
2010년 (복원)
설계자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
(Афанасий Иванович Середин-Сабатин)
파일:1920px-Joongmyungjeon.jpg
<colbgcolor=#e3ba62> 중명전
문화재청에서 제작한 중명전 영상 - 〈중명전, 덕수궁으로 돌아오다〉

1. 개요2. 이름과 현판3. 역사
3.1. 조선 · 대한제국 시기3.2. 일제강점기3.3. 광복 이후 ~ 현재
4. 관람5. 복원 오류 논란

[clearfix]

1. 개요

덕수궁의 별전(別殿). 대지 727평, 규모 236평이며 덕수궁 본궁과는 돌담벽 사이로 떨어져 있다. 대한제국의 멸망을 앞당겼던 을사조약이 체결된 장소이기도 하다.

2. 이름과 현판

파일:중명전 현판.png
<colbgcolor=#e3ba62> 중명전 현판[A]
'중명(重眀)' 뜻은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다' 또는 '거듭하여 밝다'이다. 《주역(周易)》의 이괘(離卦)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러나 상술했듯 이곳에서 망국을 알리는 을사조약을 체결했기에, 실제 역사와는 매우 어긋난 모순적인 이름이다. 발음이 비슷한 준명당과 헷갈려 준명전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특이하게 '명'자를 흔히 '밝을 명' 자로 쓰는 '明'이 아닌 '眀' 자로 썼다. 얼핏 보면 잘 구분이 안가지만 '明'에서 '날 일()'이 아닌 '눈 목()'이 들어가있다. '明'과 모양만 다른 같은 글자이며, '밝게 볼 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를 두고 여러 설이 있다. 그 중 일제가 '明'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眀'을 대신썼다는 주장과, 반대로 일본(本)을 싫어한 대한제국 정부에서 '日'이 들어간 '明'대신 '眀'을 썼다는 이야기가 있다. 결론을 말하면 둘 다 낭설이다. '眀'은 '朙'의 이체자이며 엄연히 대한제국 이전부터 쓰던 한자이다. 진짜로 '明'이 마음에 안 들었다면 창경궁에 있는 명정전은 물론 다른 전각들의 편액에 들어간 '明'을 모조리 갈아치웠을 것이다. 거짓 정보에 속지 말자.

현재 현판은 2010년 8월에 복원했다.

3. 역사

3.1. 조선 · 대한제국 시기

원래 덕수궁 궁역(宮域)이 아니었다. 1884년(고종 21년) 11월에 미국 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뉴턴 알렌이 마련한 곳으로[2], 이 일대는 알렌의 집 말고도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등 선교사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었다. 1886년(고종 23년)부터는 독신 여성 선교사들의 거처로 변모했고# 1887년(고종 24년)에 알렌이 미국으로 돌아간 후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인 애니 앨러스(Annie J. Ellers)가 여성 교육기관인 정동여학당(현재의 정신여자고등학교)을 세웠다.

정동여학당은 1895년(고종 32년)에 연지동으로 옮겨갔고 1897년(광무 원년) 대한제국 정부에서 부지를 사서 덕수궁 영역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기존 건물을 없애고 그 자리에 서양식 도서관인 수옥헌(漱玉軒)을 지었다. 이 때 미국인 건축기사 다이가 설계감리를 했다. 정확한 완공일자는 모르나 1898년(광무 2년) 1월 말에 준공을 앞두고 있었다는 주한일본공사관의 기록을 보아 그 무렵에 완공한 듯하다.[B]
파일:수옥헌과 미국공사관.png
<colbgcolor=#e3ba62> {{{#683235 1899년에}}} [[아펜젤러|{{{#683235 아펜젤러}}}]]{{{#683235 가 촬영한 수옥헌(맨 왼쪽)과}}} [[주한미국공사관|{{{#683235 미국공사관(맨 오른쪽).}}}]]
{{{#683235
맨 왼쪽의 흰 탑이}}} [[주한러시아공사관|{{{#683235 러시아공사관}}}]]{{{#683235 이다.}}}
수옥헌 건립 이유를 고종의 미국 의존성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고종은 을미사변 이후 일본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러시아의 세력이 세지면서 친러파와 러시아 외교관들이 도리어 고종을 압박하는 형세가 되었다. 서울역사편찬원의 전임연구원 장경호에 따르면, 러시아에 부담을 느낀 고종은 덕수궁 환궁 전후로 해서 더욱 미국 의존도를 높였고[4] 여러 번 미국공사관으로 망명할 의도를 비공식적으로 내비쳤다. 그런데 당시 미국에서는 한국에 대한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고, 그러자 고종이 차선책으로 미국공사관 바로 옆에 임시 피난처 개념으로 왕립도서관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런 정황은 1897년(광무 원년) 10월 경에 주한 미국 공사였던 호러스 뉴턴 알렌미국 국무부 장관에게 보낸 문서에 자세히 나와있다.[5]
(전략) 특히 황제우리 공사관으로 오고 싶어합니다. 저는 황제가 다른 열강들을 불신한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러시아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가 보호처를 말해줄 수 없다는 점을 기회가 있을 때 언급했습니다. (중략) 황제는 지금 그가 여기로 영구히 파천해 온다는 것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소위 "왕립도서관"이라는 것을 우리 공사관 옆문에 설치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곳은 미국인들로 둘러싸인 곳입니다. 제가 그린 "왕립도서관"을 참조하십시오. 저는 황제가 위험이 닥치면 이 도서관으로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후략)
1897년 10월 13일에 알렌 공사가 미국 국무부 장관에게 보낸 문서[B]
어쨌든 수옥헌은 완공 이후 도서관으로서 수많은 황실의 서책들과 보물들을 보관하는 장소가 되었으며, 그 외에도 독일알베르트 빌헬름 하인리히 친왕 접견 등 외국의 주요인사들을 맞이하는 공간으로도 쓰였다.

1901년(광무 5년) 11월 16일에 수옥헌 일곽의 건물 한 채에서 불이 났다. 불은 삽시간에 수옥헌으로 번져 수옥헌은 소실되고 말았다. 호머 헐버트가 발간한 《더 코리아 리뷰》 - 1901년 11월 호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이달(11월) 16일 새벽 2시경, 미국공사관 바로 서쪽에 붙어 있는 제실도서관(수옥헌) 후면의 외곽 건물 한 채에서 이유모를 화재가 발생했다. 만약 거기에 어떠한 응급조치가 있었다면, 본 건물로 번지기 전에 불길은 쉽게 꺼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장소는 방치된 듯 했으며, 물동이 서 너개가 없었던 탓에 정부는 매우 귀중한 건물을 잃고 말았다. 도서관에는 숱한 귀한 서책들이 있었는데 이것들은 피아노 한 대를 포함한 가구 일체와 함께 모두 불타 사라졌다."
호머 헐버트, 《더 코리아 리뷰》 - 1901년 11월 호#
화재 이후 러시아 제국 건축기사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의 설계 감리 하에 재건했다. 이 때 지금의 2층 벽돌 건물로 바꾸었다.

1904년(광무 8년) 4월에 덕수궁 본궁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고종이 이곳에 기거하면서 편전 겸 침전으로 활용했다. 이후 1907년(광무 11년)에 고종이 강제퇴위당하고 순종이 즉위할 때까지의 약 3년 동안 사실상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황궁 기능을 담당했다.

1905년(광무 9년) 11월에 이토 히로부미을사오적을사조약을 여기에서 강제체결했다.[7]

수옥헌에서 중명전으로 이름을 바꾼 시기가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중명전 이름이 공식 기록에서 처음 등장하는 시기가 1906년(광무 10년) 11월(음력 9월) 이후인 것을 보아 그 무렵에 바꾼 듯 하다.#[8]

3.2. 일제강점기

파일:htm_201408091112730103011.jpg
<colbgcolor=#e3ba62> 오다 쇼고가 지은 《덕수궁사》에 실린 중명전 모습
1910년 한일병합 이후에는 덕수궁 궁역이 줄어들며 궁역에서 분리당했다. 경성구락부가 인수하여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으로 썼다. 1925년에는 조리실 화재사고로 외벽을 빼고 전부 불탔으며 이후 재건했다.

3.3. 광복 이후 ~ 현재

파일:왕궁사 중명전.png
파일:external/www.cha.go.kr/1636200.jpg
<colbgcolor=#e3ba62> 1954년 이철원이 편찬한 《왕궁사》에 실린 중명전 모습 <colbgcolor=#e3ba62> 복원 이전 일반 회사 건물로 쓰이던 시절의 중명전 모습
1945년 8.15 광복 이후에는 국가가 소유 및 관리했다. 1950년 6.25 전쟁 당시에는 서울을 함락한 북한군공산당이 썼다가 수복 이후 다시 대한민국 정부에서 소유했다. 1963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영구 귀국한 영친왕이방자 부부에게 중명전 사용권을 이양하여 영친왕 부부가 소유했다가 영친왕이 사망한 이후 다시 민간에게 위탁, 매각했다. 그러면서 역사성을 잃고 일반 점포로 전락했다.

1983년에 서울특별시청에서 시장령에 따라 중명전을 인수하여 서울시 유형문화재 53호로 지정했고[9] 2003년에 정동극장이 인수했지만, 앞뜰이 주차장으로 쓰이고 건물 지하는 폐건물마냥 방치된 모습이 2006년 MBC 〈느낌표 - 위대한 유산 74434〉에서 방영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이후 2006년에 문화재청에서 소유했고 2007년 2월에 사적 124호 지정으로 덕수궁 궁역으로 재편입했다. 이후 고증을 통해 대한제국 시기의 모습대로 복원해 2010년 8월에 일반에 개방했다. 2016년 8월부터 오래 된 시설을 보수하고 20세기 초 권역의 평면도를 검토해 당시 지반 높이를 반영시키고 석축과 계단을 복원하여 11개월의 공사 끝에 2017년 7월에 민간에 재공개했다.

4. 관람

현재는 을사조약대한제국 국권회복을 위한 전시관으로 사용한다.

1층에 제1실 ‘'덕수궁과 중명전', 제2실 '을사조약의 현장', 제3실 '을사조약 전후의 대한제국', 제4실 '대한제국의 특사들' 등 총 4개 실로 전시실을 구성했다.
파일:중명전 1전시실.png
<colbgcolor=#e3ba62> 중명전 1전시실[C]
1전시실에서는 덕수궁과 정동 일대를 축소 모형으로 제작하고 그 위에 영상을 투사하여 개항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명전과 덕수궁 권역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파일:중명전 2전시실.png
<colbgcolor=#e3ba62> 중명전 2전시실[C]
2전시실에서는 당시 의복을 고증해 입힌 극사실 인물모형들을 사용해 을사조약 체결 장면을 재현함으로써 체결 현장을 눈으로 보듯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게 했다. 이근택의 복장에 고증 오류가 있는데, 부장 상복의 카라에는 별이 2개가 아닌 3개가 있어야 한다.
파일:중명전 3전시실.png
<colbgcolor=#e3ba62> 중명전 3전시실[C]
3전시실에서는 을사조약 체결 전후로 숨가쁘게 돌아가던 국제정세와 국내외 조약 체결 반대의 움직임을 구현했다.
파일:중명전 4전시실.png
<colbgcolor=#e3ba62> 중명전 4전시실[C]
4전시실에서는 주권 회복을 위해 1907년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대한제국 헤이그 특사들의 활동을 각종 영상으로 재구성했다.
파일:중명전 알현실.png
<colbgcolor=#e3ba62> 중명전 알현실[A]
2층에는 고종이 외국 사신들을 맞았다는 알현실이 있다. 같은 층에 문화유산 국민신탁 사무실도 같이 위치해있어 개방을 안했지만, 2017년 말부터 알현실에서 특별전을 열어 개방한다.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관람이 가능하며, 관람과 관련한 더 자세한 내용은 덕수궁관리소로 문의하면 안내받을 수 있다. 안내실 전화는 02-751-0734.출처.

5. 복원 오류 논란

파일:146944186909_20160726.jpg
<colbgcolor=#e3ba62>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이 공개한 러일전쟁 당시 중명전 사진
중명전을 복원하면서 고증을 잘못했다는 논란이 있다. 근대사료 연구자인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2016년 7월 25일 한겨레에 1905년 당시 미국에서 출간한 러일전쟁 사진집에 실린, 당시 미국공사관 마당에 도열한 경비병들의 모습과 그 뒤로 보이는 중명전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공개했다. 사진을 보면 중명전 건물 정면 가운데 부분에 1층 현관과 2층 베란다까지 함께 튀어나온 포치[15]가 있다.[16] 그러나 현재 복원한 중명전은 1층 현관만 튀어나와 있고, 2층 부분은 다른 면의 테라스와 같이 돌출하지 않은 구조라 복원을 잘못했다는 것이다.

2010년 문화재청이 대한제국 때 사료들을 토대로 복원했으나 2층과 벽면 부위 등의 고증이 불명확하다는 지적을 계속 받아왔는데 이 사진 자료 공개로 확실히 밝혀졌다. 당시 복원공사 자문을 맡았던 김정동 목원대 명예교수는 “구한말 건물 정면을 근접해 찍은 사진은 처음 본다. 복원 당시 건물 정면 원형에 대한 자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아 벽체의 원형을 추정하면서 복원한 만큼 이번에 발굴된 사진은 앞으로 건물 지붕과 정면 등을 재복원할 때 중요한 근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문화재청 측은 "당장 재복원 방침을 정하기는 어려우며 앞으로 전문가 자문회의를 통해 원형 사진을 검토해 재복원 여부 등을 논의하겠다”고 밝혔다.출처. 그러나 현재까지 원형 복원을 하지 않았고 관련 계획도 알려진 게 없다.(...)

또한 현재 원형 복원을 한 것도 아닌데, 본래는 벽돌 구조에 목조 바닥으로 이루어진 구조였다. 그러나 현대에 철근콘크리트가 추가되었고 문화재청이 복원 공사를 할 때 이것을 그대로 유지했다. 따라서 내부에 화장실이 있고, 전기공사가 이루어져 사무실과 현대 전자제품들이 잘 돌아가고 있다.#

거의 외관만 바꾼 수준.

[A] 사진 출처 - 카카오맵.[2] 저 당시 덕수궁은 제대로 된 궁역 자체를 갖추지 못했다. 선조, 인조가 사용했던 즉조당, 석어당 정도만 남아있었으며 정식 궁궐로서의 모습을 갖춘 것은 이로부터 10여 년 뒤 고종이 덕수궁에 머물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B] 장경호 著, 〈대한제국 선포 직후 고종의 미관파천 시도〉,《한국학》 제42권 제2호, 2019, p.182.[4] 고종이 미국을 의지한 것 자체는 꽤 오래되었다. 애초 러시아공사관 이전에 피신처로 삼으려고 했던 곳이 미국공사관이었다.[5] 장경호 著, 〈대한제국 선포 직후 고종의 미관파천 시도〉, 《한국학》 제42권 제2호, 2019, p.181 ~ 182.[B] 장경호 著, 〈대한제국 선포 직후 고종의 미관파천 시도〉, 《한국학》 제42권 제2호, 2019, p.182.[7] 따라서 을사조약을 체결하는 공간을 한옥으로 묘사한 영화나 드라마는 모두 고증오류이다. 주동진 감독의 1972년 영화 의사 안중근은 한옥(유리창과 커텐, 전등이 있는 모습을 봐서는 창덕궁 인정전을 참고로 한 듯하지만, 창덕궁 인정전이 이런 모습이 된 것은 순종이 즉위한 1907년 이후이다.)으로, 북한 영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는 양옥으로 묘사했다.[8]비서감일기》와 《일성록》에서는 1906년(광무 10년) 11월 14일(음력 9월 28일) 자 기사에, 《고종실록》에서는 같은해 12월 31일 자 기사에 처음 등장한다.#[9] 2007년 국가 문화재 승격에 따라 해제되었다.[C] 사진 출처 - 문화재청 덕수궁 이야기.[C] [C] [C] [A] [15] Porch. 비를 피하기 위해 돌출된 구조.[16] 윗 사진에서 빨간 원으로 표시되어 있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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