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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양방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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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소선은 사라진 곳 또는 대부분 복개된 하천, 기울임체는 상당 부분 복개된 하천을 의미한다. }}}}}}}}}

경양방죽
景陽防築
파일:external/www.gwangjuin.com/67634_11940_515.jpg
1946년, 만수위가 된 경양방죽의 풍경.
위치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 일대(지도)
수심 매립 전: 약 10m
1차 매립 후: 1~4m
면적 매립 전: 약 20만㎡
1차 매립 후: 약 6만㎡
1. 개요2. 역사
2.1. 축조2.2. 구조, 운영2.3. 1차 매립2.4. 2차 매립2.5. 현재의 모습
3. 여담
雜樹臨官道 여러 나무 관도(官道)에 늘어서 있고
芳池近驛樓 아름다운 저수지 역루[景陽驛] 가까이 있네
照顔春水遠 얼굴 비출 봄물은 멀고
隨意晩雲浮 마음 가는 대로 저녁 구름 떠가네
竹密妨行馬 대숲 무성해 말 타기는 어렵겠지만
荷開合汎舟 연꽃이 피면 배 띄우기 좋겠구나
弘哉灌漑力 넓도다! 관개의 힘
千畝得油油 일천 이랑 논을 흠뻑 적시리
정약용,「경양지를 지나며(過景陽池)」[2]

1. 개요

경양방죽[防築]은 1960년대까지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계림1동)에 있었던 저수지이다. 이름은 고려·조선시대 역참이었던 경양역[景陽驛] 에서 유래했다. 다른 이름으로는 경양지(池), 경양호(湖), 경호(鏡湖), 금교제(金橋堤), 금교방죽,[防築] 서방지(瑞坊池), 연지(蓮池) 등이 있다.[김희태,2007]

규모로 볼 때 호남 지역 최대의 인공호수였다. 1차 매립 전에는 호수 안에 작은 섬 2개가 있었고 주변으로는 수백 년 된 팽나무, 왕버드나무, 귀목나무 고목이 즐비했다고 한다. 1940년대~50년대까지만 해도 광주시민들에게 사랑받는 명소였는데, 여름에는 피서객들이 모여들어 뱃놀이를 했고 겨울에는 얼어붙은 경양방죽 위에서 썰매스케이트를 탔다고 한다.

2. 역사

파일:경양방죽_1910.png
1910년대, 경양방죽과 광주천 일대. 가운데의 큰 호수가 경양방죽이다. 방죽의 물은 위쪽 경양지천, 아래쪽 동계천을 통해 중흥동과 신안동의 평야를 지나고, 지도 좌상단에서 서방천으로 합류한다. 광주교대와 두암지구 삼거리 인근에서 방죽으로 내려오는 물줄기는 경양지천의 상류 부분이다. 그 아래 산수동의 무등산 자락에서 내려오는 지천이 있다. 그 아래로 동계천이 있고, 광주읍성을 둘러싸는 해자가 보인다(해자는 1910년경부터 매립된다). 조선대 쪽에서 내려와 해자로 들어가는 지천 또한 확인할 수 있다. 광주천에서 해자를 잇는 것은 조탄보 봇도랑이다. 한편 광주역 옆의 초록색 영역은 태봉산이다.

2.1. 축조


2.2. 구조, 운영

파일:조탄보_1920.jpg파일:경양방죽_구조+++.png
1920년대 초반 광주천과 조탄보 물의 흐름
경양방죽은 지금의 중흥동과 신안동 일대의 평야 농경지에 물을 공급했다. 그래서 이 지역을 '방죽밑들'이라고도 불렀다. 경양방죽의 수원으로는 경양지천, 동계천, 여러 지천들, 그리고 대부분의 물을 공급한 광주천이 있었다.

경양방죽으로 광주천 물을 끌어오기 위해 광주천에 조탄(棗灘洑)[17]를 세워 수위를 높이고, 광주천-광주읍성 해자-동계천-경양방죽을 잇는 수로를 팠다. 광주천 부근이 가장 높이가 높고, 경양방죽에 이르기까지 점점 낮아지도록 설계되었다. 이를 통해 광주천 물을 경양방죽에 공급할 수 있었다.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철에는 홍수를 방지하기 위해 보를 허물었다(폭우가 내리면 보를 쌓지 않아도 수위가 높아져 수로로 물이 유입될 수 있다).[18] 가을이 되면 다시 광주천에 보를 쌓았다.[조광철,2006][조광철,2007]

경양방죽의 기능이 약화된 것은 1920년대 후반부터이다. 이 당시 광주천 직강화 공사와 함께 하수도가 정비된다. 그런데 경양방죽에 물을 대던 수로를 이용해서 하수도를 만드는 바람에 더 이상 광주천 물을 유입시킬 수 없게 되었다. 경양방죽의 수심이 점점 얕아졌고, 농업용 저수지로서 기능하기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방죽을 유원지로 만들자는 여론이 생겨나기도 했다.[조광철,2017(3)]

2.3. 1차 매립

1935년, 당시 전라남도지사였던 야지마 스기조(矢島杉造)가 '일본건국기념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택지 조성 계획을 수립하였다. 계림초등학교 뒤에 있던 언덕인 경호대(景湖臺)의 일부를 헐고 그 흙으로 방죽을 메워 일본인들의 택지를 만드는 계획이었다. 당시 급격히 증가하던 인구를 수용하고, 공유수면매립을 통해 땅을 팔아 재원을 충당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1936년, 광주부는 공유수면 4만여 평의 매립을 허가한다.
장차 광주가 대도시로 발전할 때를 대비해 경관이 수려한 풍치지구로 아름답게 보전할 필요가 있다.
— 경양방죽 매립반대 투쟁위원회의 매립 반대 이유 중에서.[박선홍,2015]
광주부민들은 이에 반대해 저명한 인사였던 최흥종 목사를 위원장으로 하여 '경양방죽 매립반대 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조선총독부에 청원을 하는 등 반대운동을 벌였지만 결국 1938년부터 매립공사가 시작되었다. 다만 여론을 의식했는지 몰라도 본래의 전면 매립에서 계획이 변경되어 1/3은 호수로 남게 되었다. 1940년부터 2년간 매각이 진행되었고, 1941년에는 매립지에 부영주택을 건설하기도 했다.

2.4. 2차 매립

파일:gybj.jpg
{{{#!wiki 1930년대, 1차 매립된 부분.
1930-1960년대의 경양방죽, 2차 매립된 부분.
}}}||
8.15 광복 이후 광주의 인구는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23] 이런 가운데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수질이 점점 악화되었다.

1966년, 광주시는 방죽을 모두 매립하기로 결정했다. 도시 확장으로 주변 경작지가 사라져서 저수지 기능이 상실되었을뿐더러 오염과 악취가 심하므로, 도심과 가까워 개발 잠재력이 높은 위치를 택지로 조성하는 것이 낫기 때문이라고 하였다.[윤현석,2012][박선홍,2015] 1차 매립 때보다는 시민들의 반대 여론이 적었는데, 이유는 오염과 악취 또는 산업화의 분위기[26] 때문으로 추정된다.

1967-1968년, 태봉산을 헐어 그 토사로 경양방죽을 매립했다. 1968-1969년, 매립한 토지에 택지가 조성되었고 분양한 돈은 금남로를 왕복 6차로로 확장하는 데 쓰였다. 계림동 505-900번지에는 새 광주시청 청사를 지어 이전했다.[27] 2004년에 광주광역시청이 다시 상무지구로 이전해 건물은 빈 상태가 되었다가 철거되었고, 2007년부터 2024년까지 홈플러스 광주계림점이 영업했다.

2.5. 현재의 모습

경양방죽은 사라졌지만 도로 구획으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동계천로6번길-무등로306번길-무등로307번길이 경양방죽 제방이었으며, 경양로217번길과 중흥로209번길 동쪽의 반달 모양 골목길이 1960년대 매립 전 동쪽 경계였다. 2011년에 광주시에서 '경양방죽 둘레길'이라는 이름으로 노면에 색칠을 해 두었으므로 찾기 쉽다.

사라진 것이 상당히 아쉬운 명소로, 오늘날까지 남아있었다면 시내 중심부에 거대한 호수가 있는 도시로 널리 유명해졌을 테지만 이제 와서 복구하는 것도 무리라서 결국 추억의 명소로만 남게 되었다. 대신 1956년에 축조된 풍암저수지와 기존의 운천저수지가 광주 도심 속 호수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3. 여담



[景陽驛] 경양역은 경양도(景陽道)의 중심 역참이었다. 2022년 완공된 무등산자이&어울림 부지가 역참마을이 있던 곳이다. 경양방죽 제방은 광주읍성에서 경양역을 오가는 도로(官道)이기도 했다.[2] 여유당전서 수록. 정약용이 18세가 되던 1779년 2월, 화순에서 공부하다가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중 쓴 시이다. 한편, 6연의 '荷開', 8연의 '得油油'를 '연꽃이 피어서', '물이 넘치네' 처럼 번역한 경우가 많은데, 이 시가 2월에 쓰였음을 감안하면 봄 또는 여름에 그런 모습이 되리라고 가정하는 상황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防築] 防築은 그대로 읽으면 방이지만, 순우리말 방죽이 되었다. 방죽은 저수지가 아닌 둑·제방을 뜻하지만, 둑을 막아서 만들어진 인공호라서 그냥 둑 이름이 호수 이름으로 굳어졌다.[景陽驛] [防築] [김희태,2007] 김희태. (2007). 조선시대 기록을 통해 본 광주 경양지(景陽池). 향토문화, 27, pp. 41-64.[景陽驛] [조광철,2017(1)] 조광철. (2017.02.07). 여러 갈래 경양방죽 탄생기. 광주드림.[9] "(……) 我邦 陂池之 最大者ᄂᆞᆫ 有 金堤之 碧骨堤와 古阜之 訥堤와 益山全州之間 黃登堤와 咸昌之 恭檢池와 堤川之 義林池와 德山之 合德池와 光州之 慶陽池와 永柔之 德池와 延安之 南大池 等이 皆 陂池之 巨者 而 有大利於 一方ᄒᆞ야 此皆 自羅濟之代ᄅᆞ 極一國之力而 成築ᄒᆞ고 高麗 以來로 至國朝히 屢加修築ᄒᆞ야 永世 蒙利也러니 (……)"[변동명,2018] 변동명. (2018). 조선시기 광주 경양방죽의 수축과 운영. 국학연구론총, 21, pp. 307-335.[이옥희,2018] 이옥희. (2018). 경양방죽 설화의 전승 담론과 서사 전략. 호남문화연구, 64, pp.121-149.[변동명,2018] [이옥희,2018] [조광철,2017(1)] [조광철,2017(2)] 조광철. (2017.02.07). 경양방죽을 표현한 다양한 묘사들. 광주드림.[변동명,2018] [17] 조탄은 광주천의 옛 이름 중 하나로, 대추여울이라는 뜻이다.[18] 현대의 가동보 기능을 수동으로 했다고 보면 된다. 가동보는 날씨에 맞게 구조물을 올렸다 내렸다 함으로써 홍수 위험을 완화한다. 참고로, 보가 없던 곳에 가동보를 짓는다고 홍수 위험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보는 물의 흐름을 가로막는 시설물이기 때문에 어떤 형태이든 홍수 위험을 높인다. 그렇더라도 물을 활용하려면 보를 지을 수밖에 없으므로 최대한 홍수를 방지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그 중에 하나가 고정보를 가동보로 업그레이드하는 것인데, 이 과정에서 홍수 위험이 줄어들게 된다.[조광철,2006] 조광철. (2006.03). 광주천 '조탄보'를 기억하십니까? 광주드림.[조광철,2007] 조광철. (2007.02). 농사 짓기에 커다란 밑천이자 생명수. 광주드림.[조광철,2017(3)] 조광철. (2017.03.21). 사라진 경양방죽, 예고된 조짐들. 광주드림.[박선홍,2015] 박선홍. (2015). 광주 1백년: 개화기 이후 광주의 삶과 풍속 (3). 광주: 광주문화재단.[23] 불과 5년 사이 8만(1944년)에서 14만(1949년) 가까이 증가하여 남한 5대 도시가 되었다.[윤현석,2012] 윤현석. (2012.05.16). 1930년대 물길 덮어 도로·주거지로 … 개발에 묻힌 ‘물의 도시’ 광주일보.[박선홍,2015] [26] 참고로 이 당시에는 청계천처럼, 광주천을 전면 복개하고 그 위에 고가차도를 만들겠다는 계획도 있었다. 양동복개상가가 그 흔적이다.[27] 최초의 시청은 전라남도청 근처 광산동(서남동)에 있었다. 흔히 '구시청'이라 불리는 곳.[28] 현 금호타운아파트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