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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23:40:53

OB 베어스 항명 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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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경과
2.1. 원인2.2. 전개2.3. 수습&사회적 반향
3. 이후4. 변화5. 증언
5.1. 안경현5.2. 박철순5.3. 장호연5.4. 홍우태
6. 여담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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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4년 9월 4일, 프로 야구단 OB 베어스 선수 17명이 시즌 도중 윤동균 감독의 지도 스타일에 반발해 구단에서 집단으로 항명과 동시에 이탈한 사건이다.[1]

2. 경과

2.1. 원인

당시 OB 감독인 윤동균은 1992년 OB의 제5대 감독으로 취임할 당시 상당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KBO 리그 선수 출신 1호 감독이자 베어스의 원년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의 스타 감독이었고, 팬들은 물론 구단 모기업 경영진에게까지 구단 안팎으로 신망이 매우 두터운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지도자로서의 경험이 다소 부족했던 만큼 당시 중하위권에 머무르던 OB를[2] 부흥시킬 것이라는 기대까지는 받지 못했다.

취임 첫 시즌인 1992년은 5위를 기록했으나 다음 해인 1993년에는 정규시즌 3위에 오르는 돌풍을 일으키며 1987년 이후 6년 만에 가을야구에 진출하는 등 제법 성공적인 출발을 보였다.[3] 문제는 이 젊은 감독(당시 만 45세)이 우승에 도전하겠다던 1994 시즌에는 경기가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원인을 찾자면 1993 시즌에는 선발진과 김경원이라는 특급 마무리의 투수진은 굉장했으나 1994 시즌에는 팀 전력의 핵심인 김경원의 부상과 계투진의 붕괴, 선발진의 약화 등 믿었던 투수진마저 무너졌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1995 시즌에 13년 만의 우승을 거머쥘 수 있었던 것에는 투수진이 정상화되고 거기에다 타선까지 강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물론 감독이 교체되었다는 점도 고려해야 겠지만.

1994 시즌은 구단 순위에 그야말로 지각변동이 일어난 시즌이었다. 만년 하위권이던 쌍방울 레이더스야 늘 그랬듯이 망했지만(...) 같은 잠실 야구장을 쓰던 LG 트윈스는 구단 사상 최고의 성적을 내면서 인기 몰이 중[4]이었고, 과거 동네북 신세였던 태평양 돌핀스까지 정말 잘 나가자[5][6] 윤동균 감독은 초조함에 자주 무리수를 연발했다. 거기에다 원년 멤버이자 팀 프랜차이즈 스타이던 윤동균 감독은 '대선배 출신 감독 - 후배 선수들' 이라는 위계질서 강조로 인해 선수들과 갈등을 빚게 된다.

이처럼 본인의 출신에 기반한 권위주의적 사고를 가졌던 윤 감독과 자율적인 마인드를 갖고 있던 고참 선수들간의 갈등은 심했다. 그렇다고 중견&신인급 선수들과는 잘 지냈느냐 하면 그것 또한 아니었다. 당시 신인급 주전 선수 가운데 항명 파동 당시 자리에 남은 선수는 윤동균 감독이 직접 데려온 김민호장원진 정도였으니...

그러나 두산그룹의 고위층과 친밀했던 윤동균 감독은 1992년과 1993년의 공로를 인정받아 재계약이 사실상 확정된 상황이었고, 여기에 고무된 윤동균 감독은 더욱 더 선수단을 강하게 휘어잡으려고 하였다. 함께 가기 어려웠던 고참 선수들은 대규모로 트레이드 처리 또는 계약 연장을 하지 않을 구상이었고 이런 분위기는 선수들도 슬슬 감지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구상을 했으면 무언가 특별한 방법으로라도 선수들의 신뢰를 얻거나 공감대를 형성했어야 하는데, 시대가 변했음에도 여전히 원년의 군기 잡기를 고수했다는 점. 그렇다고 소통 방면에서도 딱히 잘 한 것은 없었다. 대표적으로 슬럼프였던 김형석의 연속 경기 출장 기록을 두고 중단시킬까 말까를 두고 은근한 압력을 넣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김형석은 선발출장 명단에서 뺐다가 9회 대수비로 넣는 경우가 많았다.

2.2. 전개

이렇듯 아슬아슬한 외줄타기가 이어지던 윤동균 감독과 선수들과의 불안한 관계는 1994년 9월 4일, 군산 월명 야구장에서 열린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경기에서 패배한 후 숙소인 전주 코아호텔 로비에서의 선수단 미팅 중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

사건의 발단은 당시 투타의 리더격이던 박철순김형석이 술을 마시고 새벽녘에 숙소에 들어오다가 윤동균 감독에게 적발된 것이었다. 경기에 패한데다 분위기도 좋지 않은 상황에 고참이 술을 먹고 들어오자 윤동균 감독은 분노했다. 급기야 미팅 자리에서 배트를 들고 "오늘은 매를 들어야겠다." 라고 말하면서 선참부터 차례로 나와서 선수 전원이 빠따를 맞는 소위 줄빠따를 맞을 것을 요구했다.[7] 그러자 당시 주장인 김상호"저희도 최선을 다했지만 경기가 잘 풀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감독님의 지도 방식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맞으면서는 야구 못 합니다." 라며 항변했고, 윤 감독이 "그럼 나와 야구하고 싶지 않은 놈들은 앞으로 나오라!"고 하자 김상호를 비롯하여 박철순, 장호연 등 거의 20명 가까이 되는 선수들이 나왔다.

뚜껑이 열린 윤 감독은 옆에 있던 수석 코치 최주억에게 "최 코치! 이 새X들 명단 적고 저녁 먹여서 서울로 올려 보내시오. 내가 책임질 테니까. 이런 새X들 하고는 더 이상 같이 야구 못해!" 라고 말하고는 방망이를 들고 김상호에게 다가가려다 코치들이 뜯어 말리는 통에 뒤돌아서서 씩씩거리며 자기 방으로 올라가 버렸고, 주장인 김상호를 비롯해 총 17명은 숙소를 나와 선수단을 이탈해 버렸는데, 이 17명과는 별개로 이명수의 경우 처음엔 항명에 동조했으나 결국 이탈한 17명과 동행하지는 않았다.

전주에서 빠져나와 흩어진 선수들은 저녁에 대전역으로 속속 모여들었고(박철순 제외 전원이 모였다고 본인이 증언) 이 와중에 주장인 김상호를 비롯해 이탈 인원 전원이 최선참인 박철순의 뜻에 따르겠다는 압박 아닌 압박을 가했는데, 심사숙고한 박철순은 결국 대표로 짐을 떠맡게 된다. 다음 열차를 타고 자정 즈음에 서울에 도착하여 잠실 야구장에 주차해 놓은 승용차를 빼고, 9월 5일 경기도 양평군에 있는 플라자 콘도에 집결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9월 6일 기자들에게 자신들이 이탈했음을 통보하고 윤동균 감독의 퇴진을 요구하는 기자 회견을 연다. 리더격인 박철순은 자신의 선수 생활을 여기서 마감해야 겠다는 결심을 하고, "윤 감독이 옷을 벗으면, 나도 같이 벗겠다"고 선언, 프로 원년 동료 선수로 함께 야구한 형님같은 사이인 윤동균 감독이 떠나면 자신도 야구를 할 수 없으니 깔끔하게 둘이 책임지자고 말했다.

사실 OB 베어스의 프런트는 그들의 이탈을 당일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우유부단하게 미적거리다가 사태를 키우고 말았던 것. 이에 대해서는 고위층의 신임을 받고 있던 윤동균 감독을 퇴진시키기 위해 고의로 방관했다는 가설이 있다. 이 가설을 제기한 사람이 스포츠서울이종남 기자. 이 가설이 사실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OB 프런트가 다소 수수방관하고 어정쩡하게 나온 것은 사실이었다. 선수들을 대규모로 방출 또는 임의탈퇴 시키든지 해서 강하게 수습하든지, 아니면 윤동균 감독의 퇴진을 빨리 이끌든지 했어야 했는데 모든 문제가 결정이 된 것은 항명 이후 열흘이 지난 9월 14일이었다. 그 사이 경창호 사장이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다가 반려되고, 윤동균 감독의 신임을 천명하기도 했다.

2.3. 수습&사회적 반향

결국 구단과 선수들 사이에서 일종의 합의가 이뤄진 것이 윤동균 감독의 사임과 항명 선수들의 복귀. 단, 항명을 이끈 선수들 중 5명의 고참인 박철순, 장호연, 강영수, 김형석, 김상호의 경우 원래 방침은 방출이었다. 그러나 새롭게 부임한 김인식 감독이 김형석, 김상호의 잔류를 강력히 요청했기 때문에 이 둘은 잔류하게 되었다.[8] 당시 관련 영상

또한 박철순의 경우, 인간 승리의 살아있는 전설로 등판할 때마다 공 하나에 OB 팬들이 울고 웃는, 팬들의 무한한 존경을 받던 존재였고, OB의 박철순이 아닌 박철순의 OB라는 표현이 맞는 그야말로 프랜차이즈를 넘어 OB 그 자체였다.[9] 이런 박철순을 방출시킬 경우, OB는 스포츠 구단의 존재의의 그 자체인 팬들의 대거 이탈로 구단 운영이 아예 불가능할 것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 정도로, 사태 수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결국 잔류시켰다. 여기에는 당시 처음 등장한 하이텔 PC 통신 불사조 동호회의 장외 서명운동이 큰 역할을 했으며, OB 베어스의 팬 = 박철순 개인 팬이니 만큼, 여론은 절대 구단에게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또한 박철순은 실제로는 떠밀리듯 후배들의 짐을 떠맡아 대표자로 나설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으며, 공개적으로 윤동균에게 양 쪽 모두 책임이 있으니 함께 물러나는 게 가장 좋다는 입장으로 마무리한 후 은퇴를 이미 결심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박철순의 대한 팬들의 존경과 지지가 구단에서 생각한 것과는 상상을 초월한 수준이라, 박철순은 은퇴하려고 마음을 먹었어도 은퇴를 할 수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었는데, 나중에는 급기야 구단에서 박철순에게 은퇴를 철회하고 복귀를 바라는 은근한 호소마저 있었다. 단순한 팬층의 이탈이 아닌, '박철순을 버리면 OB를 버리겠다'라는 여론이 너무 거대해져서 두려워진 구단이 먼저 손을 내민 것. 그 외에도 박용곤 두산그룹 회장과 박철순의 관계는 단순히 구단주와 선수가 아닌, 기적 같은 재기를 이룬 과정에서 끈끈한 인간 관계가 있었기에, 프런트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고...

다만, 상황이 이렇다보니 화살은 다른 선수들에게 돌아갔는데, 바로 장호연강영수였다. 강영수는 자유계약으로 OB에서 방출되자마자 곧바로 태평양 돌핀스가 영입하였는데, 사실 항명 주동자 중 강영수의 혐의가 가장 가벼웠음에도 그를 방출하는 것에 대해 찜찜해 하던 OB는 태평양에서 강영수의 영입 의사를 밝히자[10] "아이고 어서 데려가십시오"라는 심정으로 강영수를 웨이버로 풀었다고 한다. 그렇게 태평양 유니폼을 입은 강영수는 이듬해인 1995년 중심 타선을 꿰차고 21개의 아치를 날리며 홈런 랭킹 4위에 오르는 활약을 보였다. 타율은 0.243로 영 좋지 않았지만, 원래부터 타율보다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공갈포 기질이 강했던 선수였고, 태평양 입장에선 팀 타선이 전통적으로 그런 공갈포의 장타마저 소중하던 물빠따라서(...) 이 정도면 제법 만족스러운 성적이었다.[11]

그러나 가장 많은 문제를 일으킨 장호연이 남아있었다. 이전에도 팀의 에이스라는 것을 배짱삼아, 구단과의 연봉 협상 과정에서 매 해 심각한 마찰을 일으킨 장호연을 구단에서 내보내기 위해 OB 프런트는 온갖 수를 썼다. 하지만 그룹 고위층에서 강영수 방출에 대해 구단을 강하게 질책하며 "장호연을 (강영수처럼)공짜로 내보낼 생각 말라"는 엄명을 내리면서, 무상 트레이드나 웨이버 공시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급기야 장호연을 대만프로야구 준궈 베어스로 트레이드 시키려는 꼼수도 쓰려 했지만, 당시 대만미국이나 일본과는 달리 한국과 선수계약 협정이 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트레이드 자체가 위법이었던 지라 OB는 여론의 뭇매만 실컷 맞았다(...).[12][13] 애초에 구단과도 감정이 좋지 않았던 장호연 또한 "내가 유니폼을 벗으면 벗었지 OB에서는 죽어도 못 뛴다" 라고 강하게 나오며 구단과 장호연의 사이는 더 악화되었다. 결국 당시 스포츠서울 야구부장 이던 이종남 기자가 장호연을 설득하고, 언론계 선배인 경창호 사장[14]과 장호연 사이를 직접 중재하면서 장호연은 다시 OB와의 인연을 유지하기에 이르렀다. 대신 그 대가로 연봉 삭감 최대치인 25%를 깎아버렸다[15](...).

덧붙이자면 장호연은 팀을 이탈해 있던 기간에 모교인 충암고에서 개인 훈련을 하면서 후배들을 지도해 줬는데, 이 때 그에게 지도받은 투수 중 한 명이 바로 박명환이었다. 야구를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후 박명환OB 베어스에 입단해 1996~2006년까지 베어스의 선발 투수로 활약했다.

더불어 이 사건의 총 책임자라 할 수 있는 경창호 사장은 뚜렷한 대응을 보이지 못하고 미적대다가 이종남 기자로부터 "선수들 살리는 셈 치고 희생하시라"며 구단 사장에서 내려올 것을 권유 받았지만, 그렇지 않아도 OB 구단에 대해 계속 부정적인 기사를 내던 이종남에게 다소 불편한 감정을 갖고있던 경 사장은 "내가 사장된 지 3년 만에 당신이 처음 해주는 충고가 물러나라는 소리인가? 난 그렇게 못하겠다. 앞으로 3년은 더 해먹을거야" 라고 그 자리에서는 묵살해 버렸다.[16] 하지만 경 사장은 그 다음 날 아침 구단 고문이던 박용민 전 사장과 함께 구단주인 박용곤 회장을 찾아가 사표를 제출했는데, 박 회장은 그 자리에서 사표를 박박 찢어버리며 "뭐하는 짓이야! 허튼생각 말고 사건이나 잘 수습해!" 라며 반려해 버렸다고 한다.

이 스토리는 며칠 후 박용민이 이종남을 만난 자리에서 오프 더 레코드를 전제로 털어 놓았는데, 이종남은 "이거 (기사로)써야 한다. 선수들을 위해 사장이 희생한 건데 오히려 외부에 알려져야 경 사장 입장이 산다. 나중에 반려되었다고 후속 기사 내겠다" 라고 박용민을 설득하여 결국 다음 날 지면에 경창호 사장이 살신성인 했다는 요지로 사표 제출 건을 기사화했다. OB 구단의 일처리에 관하여 강도 높게 비판하던 이종남이었지만 경창호에 대해 어지간히 미안했던지 굳이 기사를 써서 그의 체면을 살려주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즌 잔여 경기는 선수 17명이 한 번에 빠져나가 꾸려나가기 어려웠지만, 2군에서 급히 선수를 끌어다가 간신히 메웠다.[17] 한 때, 잔여 경기 몰수패 이야기도 나왔지만, 이것만은 막아내는데 성공.

윤동균이 경질된 후에 남은 일정은 최주억 수석코치[18]가 감독대행으로 메우다가, 시즌 종료 후 후임 감독으로 김인식이 취임했는데[19], 이 사람이 9년이나 OB-두산의 지휘봉을 잡게 될 줄은 당시로선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거기다 두 번의 우승까지도. 김인식 감독은 이 막장으로 간 팀을 다음 시즌인 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면서 일약 명장의 반열에 오른다.

당시 이 사건은 스포츠계에 만연한 폭력 문화의 한 사례로 지목되어 상당한 이슈가 되었고 윤동균 감독은 졸지에 프로 선수에게 매질을 한 폭력 감독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사실 윤동균 감독이 종종 흥분을 못 이겨 선수의 따귀를 때리거나 한 일이 몇 차례 있긴 했지만, 당시 스포츠계의 문화라는 것이 거기서 거기였고, 프로야구에서도 알려지지 않은 구타나 기합 문화가 공공연하게 남아있던 것이 사실이었다. 윤동균 감독이 유난히 심한 케이스라고 보기도 어려웠던 것이다.[20] 물론 그랬다고 윤동균 감독에게 문제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남들 다 하니까 나도 해도 된다' 같은 건 어린아이들에게나 통하는 변명이고 팀을 잘 관리했어야 하는 감독이 선수들의 일탈에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애초에 윤동균을 표현하는 문장은 '강할 때 너무 강하고, 약할 때 너무 약하다' 였다. 즉, 다혈질에 불같은 성격으로 보여주기용 쇼맨십을 곁들여 너무 오버해서 치고 나가지만, 인정에 끌리거나 마음이 약해지면 안되는 상황에서 결단을 못내리고 우유부단한 면이 강했다는 뜻이다. 무엇보다 OB 베어스 원년 스타라는 점도 있지만, 구단에 정치적인 스탠스로 이전부터 많은 구설수에 올랐으며, 결국 감독 자리에 낙점되었을 때도 팬들의 비아냥이 있었다. 게다가 사건이 터진 이후에도 구단을 기웃거리며 코치, 프런트로 복귀를 끊임없이 시도했다는 점에서 좋은 소리를 듣고 있지 못하다.

어쨌든 이 사건이 선수들에 대한 동정론으로 흘러간 데에는 '체육계의 폭력 문화'라는 매스컴의 이슈화 덕이 컸고, 애초에 비난 여론이 많던 윤동균 감독을 끝까지 감싸려던 구단도 여론에 밀리면서 결국 윤동균 감독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 일 때문일 가능성이 크겠지만, 이후 윤동균은 2001~2002년 이광환 감독 휘하에서[21] 한화 이글스 수석 코치를 잠시 지낸 것 이외에는 현장과의 인연은 거의 없는 상태이다. 다만 한동안 KBO의 운영 위원으로 재직하며 야구계와의 인연은 완전히 끊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또한 윤동균의 현역 시절 등번호 10번KBO 영구결번 지정이 해제되었다.

3. 이후

복귀한 주축 선수들은 대부분 연봉을 백지 위임하거나 장호연처럼 대폭 낮춘 액수로 계약하면서 몸을 낮추었다. 아무래도 '감독을 짜르고 살아남은 하극상의 주역들'이라는 선배 야구인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을 테니... 다만 장호연 못지 않은 막가파 스타일이었던 김상호만은 "그동안 제대로 대우 받지 못한 만큼 이번만큼은 올려 받아야겠다. 안 올려주면 은퇴하겠다."는 폭탄 선언으로 다시 한 번 프런트의 속을 뒤집어 놨다(...). 그나마 OB니까 이 정도로 끝났지 여기였으면 바로 트레이드나 방출행 결국 신임 감독의 '원만한 처리'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던 프런트는 부글거리는 속을 다스리며 김상호의 연봉을 조금 올려주는 선에서 재계약했다. 사실 김상호를 꼭 막무가내라고만 할 수는 없었던 것이, 당시 OB 구단의 연봉협상은 더 가난했던 해태 타이거즈보다도 짜기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김상호가 "지금 받는 연봉보다 더 깎이느니 그냥 지금 벌여놓은 개인사업에 전념하는게 낫겠다."고 했을까.[22]

그 이듬해인 1995년, 항명 파동의 주축 선수들은 대부분 기대 이상의 활약을 펼쳤고, 13년만의 우승으로 체면을 살렸지만, 베어스 프런트는 이 때 가담한 선수들을 끝까지 잊지 않았다(...). 정말로.

보면 알겠지만, 두산에서 대접 받으면서 은퇴한 선수도 거의 없고, 심지어 2000년대까지 두산에서 잠시라도 코치를 맡았던 사람은 박철순, 권명철 단 두 명. 박철순은 위의 사건을 계기로 아예 염증을 느껴 야구계를 떠났고 권명철은 한 번 두산을 떠난 적도 있었다. 두산 프런트는 이 때의 일을 정말 끝까지 잊지 않고, 제대로 보복했다. 그런데 사실 항명 파동에 가담한 선수들의 그 후 이력을 보면 다른 사고를 친 전력이 있는 선수도 꽤 보인다는 점에서 오히려 다른 사고 때문에 예우를 못 받는 경우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종민이라거나 이종민이라거나 이종민이라거나 당시의 두산 프런트들이 지금도 구단의 중역에 포진하고 있어서[38] 한동안 이들이 예우받지 못했다.

4. 변화

하지만 사건 당시 선수들과 갈등을 빚은 프런트들이 대부분 팀을 떠나고, 2011년 이후 각 구단들이 과거의 프랜차이즈 선수들을 우대해주는 바람이 불면서 두산에서도 프로야구 창설 30주년을 맞아 2011년 프로야구 개막전에서 우승 반지가 없었던 시절인 1982년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들을 초청해 우승 반지를 수여하거나, 2011년 8월 21일 김상호를 시구자로 초청했다. 더군다나 김상호는 항명 파동 멤버 중에서도 가장 구단 속을 썩이던 선수였다.

그리고 2011년 시즌 후, 두산 베어스의 신임 김진욱 감독이 코칭스태프를 개편하면서 LG 트윈스의 코치로 뛰던 권명철을 투수 코치로 다시 영입했다. 특히 이전에도 두산 코치로 재직했었고 항명 파동에 연루된 인물이던 그를 두산이 다시 영입한다는 것은 항명 파동 멤버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겠다는 의미가 있다는 분석이다. 베어스 팬들은 반색하는 중. 그런데 2015년 현재 권명철 코치는 이해할 수 없는 투수운용으로 겁나게 까이고 있다. 권멍청(...)이라고. 이후 이광우도 2014년에 두산 코치로 복귀했다. 김상진도 2020년에 두산 코치로 무려 22년만에 복귀했다.

김형석은 2012년 2월, 두산 베어스의 전지훈련장을 방문해 선수들을 격려하고 두산의 선전을 기원했으며, 2015 시즌 두산이 14년 만의 우승을 차지하자, 박철순[39]김상호가 축하 인사를 남기는 등, 상당히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후 2022년 김형석은 박철순, 홍성흔, 더스틴 니퍼트와 함께 개막전 시구자로 나섰다.

그리고 감독직에서 사퇴한 윤동균은 사건 이후 세차장에서 박철순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고, 그 날 같이 소주 한잔 기울이며 박철순이 "형님, 죄송합니다" 라며 고개숙여 사과하자 윤동균 자신도 "좀 더 빨리 보고 싶었는데 왜 이제야 만나게 되었느냐. 나도 미안하고 내 잘못도 컸다. 더 이상 우리 얼굴 붉히지 말고 살자" 고 흔쾌히 받아들이며 눈물 어린 화해가 이루어졌고, 박철순의 은퇴식에도 참여하여 자리를 더욱 감동적으로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 외 다른 사건 주동자들과도 화해하며 지금까지 별 탈 없이 야구 선후배로서 잘 지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두산 베어스의 역대 감독 소개에서도 윤동균에 대해서 악의적인 멘트는 없고, "베어스 간판 선수 출신으로서 코치 수업을 받고 있던 윤동균 제 5대 감독은 부임 후 무명 선수 발굴 등 부족한 환경 속에서 팀의 경쟁력을 키워내며 베어스의 팀 재건과 상위권 도약의 기틀을 마련했다" 라고 긍정적으로 기재되어 있다.[40] 두산의 역대 감독들에 대해서는 공홈에 대부분 좋은 업적을 추려 소갯말을 적었지만, 단 1명은 대놓고 깐다(...).

즉, 어떻게든 항명 파동에 관계된 인물들 대부분은 화해가 이루어진 셈이다. 사실 항명 파동의 주동자들 상당수가 베어스 프랜차이즈 영광의 순간인 1995년 한국시리즈에서의 팀 창단 이후 2번째 우승의 공신들이기도 하고, 2020년 현 시점에서 20년이 훨씬 넘게 더 지난 일인데 계속 껄끄러운 관계를 유지할 필요도 없기는 하다.

5. 증언

5.1. 안경현

당시 3년차였고, 그 사건이 참 재밌었다. 나는 자의적이었는데, 감독한테 못 맞겠다고 얘기했다. 윤 감독님이 "서울 갈 사람 일어나라", "안 맞은 사람 일어나라" 라고 하니 일어났다. 아마까진 맞았는데 프로에서까지 맞고 싶지는 않았었다. 그리고 우리가 버스를 한 대 대절했는데, 코칭스태프 중 한 명이 막았다. 이어서 "전주 톨게이트에서 탈출하자" 라고 하고 16명이 다 탈출했다. 16명이 대전발 0시 50분 기차를 탔고, 나만 못 탔다. '어차피 내일 서울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굳이?' 라는 생각이 들었고, 다음 날 잠실 롯데월드 지하 분수대로 갔는데 다들 식당 칸을 전세내며 놀고 있었다. 지금이었으면 얘기해서 차를 타고 구단으로 들어갔을 텐데, 철없는 짓이었다.

5.2. 박철순

그게 진짜 한숨쉬는 이야기지만은 우리같은 야구선수들 입장에서는 프로야구판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은 치욕적인 일이다. 그때가 94년 윤동균 감독님이셨다. 지금도 감독님과 만나서 소주잔을 기울이는데, 사전에 후배들을 막지 못했던 내 책임이다. 지금도 나는 항명 당사자였으니 이런 이야기 나오면 창피하다. 윤감독님과의 관계는 영향이 없었지만 지금 시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상상 못할 일이다.

5.3. 장호연

윤동균 감독은 보기보다 그렇게 강한 사람은 아니다. 94년이면 조금 안 좋았을 때고, 성적에 대해서도 감독이니까 목소리가 커질테고, 박선배가 고참이다 보니까 야구보다도 팀에 힘이 되어주길 바랐다. 숙소에 늦게 들어오고 그러니까 감독 입장에서는 야단을 쳤는데, 여기서 좋게 하던 사람이 갑자기 목소리가 커지고, 선수들도 목소리가 커졌다. 나는 그 때 성적이 좋지 않아 2군에 가 있었는데, 1군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감독님이 "나하고 야구하기 싫은 사람 다 일어서" 라고 얘기했더니, 특히 나 포함 투수들이 많이 일어섰다. 구단에서도 처신을 잘 한건 아니었다. 그것을 빨리 수습하고 해결했어야 했는데, 선수들이 단체로 우리 집에도 갔다가, 양평에 콘도 빌려서 갔고, 후반기 다 못뛰고 남은 2군 선수들을 콜업시켜서 올렸으니까 파동이 오래 갔다. 선수들의 마음가집을 다잡고 중재하는 역할도 구단이 해야되는건데, 동균 감독도 피해자고, 생각이 다 짧았던 거다. 나쁜 일은 충동적인 거라서 이득이 될 게 별로 없다.

5.4. 홍우태

94년 OB에서 항명파동이 있었다. 전주 쌍방울전을 졌는데, 윤동균 감독님은 다혈질적인 분이었다. 잘하면 칭찬을 많이 해주시고, 못하면 선수들한테 나무라기도 하고, 호텔에서 집합을 하는데 나는 맨 앞에 앉았다. 옆에 김형석, 김상호 선배님이 계셨고, "너희들은 안되겠다. 맞으면서 해야겠다. 주장 나와라!" 라고 얘기했고, 김형석 선배가 "저는 못 맞겠습니다." 라고 하자, "김상호 나와라." 라고 재차 말하자 "저도 못 맞겠습니다." 라고 답했다. 거기에 감독님이 "못 맞겠는 사람 다 일어서!" 라고 외치니, 나와 어린 선수들은 앞에서 눈치보고 있다가 못 일어났다. 그 뒤 감독님이 "일어난 사람 2군 보내" 라고 했는데, 속뜻은 겁을 한번 줬었다. 1군 선수들이 평소 감정이 쌓여있었고 단체행동을 하다가 결국 2군 애들이 올라와서 열 몇게임을 했었다. 게임이 안되니까 거의 질 수밖에 없었다. 시즌 끝나고 감독님이 바뀌셨다.

6. 여담

7. 관련 문서



[1] 이후 27년이 지난 2021년에 배구계에서 선수와 코치가 동시에 구단을 이탈하는 사태가 일어났다.[2] 김성근이 물러난 이후인 1989년부터 윤동균의 집권기인 1992년까지의 OB는 5위-7위-8위-5위에 머무를 정도로 성적이 나빴다. 이 기간 중 2년 연속 꼴찌의 수모를 당하기도 했는데, 베어스 역사상 3번의 꼴찌 중 2번을 이 때 당했던 것이다.(나머지 1번은 팀의 두번째 우승 바로 다음해였던 1996 시즌.)베어스 구단 역사상 단연 최악의 암흑기이기도 하다.[3] 다만 경험 부족 때문인지 하필이면 옆집에 패퇴하며 탈락하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당시 상대 감독은 OB를 부진의 나락에 빠뜨리며 OB 팬들로부터 결코 좋은 감정을 얻지 못한 이광환이었다.[4] 훗날 2023년 LG의 29년 만의 우승을 경험한 LG 팬들마저도 트윈스 역사상 최고의 해는 1994년이라 꼽을 정도로 이 해 LG의 위세는 대단했다.[5] 태평양은 직전 시즌인 1993년 박정현, 정명원, 정민태의 부상으로 마운드가 붕괴되면서 5년 만에 정규시즌 최하위라는 수모를 겪었다. 때문에 정동진 감독은 계약기간이 1년 남아있음에도 해임될 수도 있었지만 의외로 구단 수뇌부는 삼미-청보 시절까지 통틀어서 계약기간을 꽉 채운 감독이 단 한명도 없었던 점을 감안하여 정 감독을 유임시켰고, 이는 결국 탁월한 선택으로 남았다.[6] 반면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시리즈 단골손님이던 해태 타이거즈한화 이글스는 준플레이오프에 턱걸이했고, 1983년을 제외하고 매 시즌마다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던 삼성 라이온즈는 10년 만에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다. 1992 시즌 우승팀 롯데 자이언츠는 전년도 박정태의 부상 공백을 메우지 못해 중하위권을 전전했다.[7] 그러나 당시 OB 베어스 선수였던 안경현은 훗날 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줄빠따는 와전된 이야기이고 윤 감독이 단순히 얼차려를 시키고 겁을 줬던 것일 뿐이라고 말했다.[8] 김인식이 프런트에 "김상호 빼고 뭘 어쩌란 말이냐" 라고 일갈했다는 후문이 있다.[9] 1995년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9회가 되자 팬들은 OB가 아닌 박철순을 계속 연호했으며, 우승이 결정된 후에도 박철순! 박철순!을 목이 터져라 연호했으니... 실로 팀 이상의 존재였다.[10] 당시 태평양 감독 정동진은 강영수의 대구상고 선배이자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사제지간이었고, 그 인연으로 태평양 프런트에 강영수 영입을 요청한 것이었다.[11] 당시 태평양 타선에서 강영수 급의 홈런을 생산할 만한 장타자는 그나마 김경기 정도를 제외하면 없다고 할 정도였다. 게다가 강영수는 저 낮은 타율에 장타를 많이 뽑아내며 OPS 0.800 가까이 찍을 정도로 공격 생산성도 좋았다. 그리고 강영수가 들어오기 전까지 태평양의 주포였던 김동기는 노쇠화가 시작되며 뒷전으로 밀려나갔다.[12] 이 때 이종남 기자는 "OB가 이제는 악수도 모자라 꼼수까지 쓰려 든다. 만약 팀의 에이스 급 투수가 대만 구단과 결탁하여 소속을 옮기려 든다면 가만히 놔둘 셈인가?" 라면서 OB를 다소 몰아붙이는 투의 기사를 소속사인 스포츠 서울 지면에 올린 바 있다. 나중에 이 기자는 자신의 저서 이중노출에서 기자로서의 위치를 망각하고 마치 장호연의 대리인인 양 나섰던 점은 경솔했다고 경창호 사장을 비롯한 OB 구단 측에 대하여 사과의 언급을 남겼지만...[13] 삼성 라이온즈의 경우, 준궈 베어스와 자매 구단이었던지라 한희민을 팀에서 방출한 이후 외국인 선수로 영입하는 형태로 준궈 베어스로 트레이드 시킨 전력은 있다. 다만 항명사건 당시에는 OB 또한 베어스라는 같은 팀명을 쓰는 점에서 준궈와 자매 결연을 맺은 상태였다. 물론 한국-대만간 선수협정이 체결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14] 경창호는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하고 ROTC 장교로 복무한 뒤 1967년 동화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입문하였다. 1974년 두산그룹 계열의 합동통신(1980년 언론통폐합연합통신에 흡수통합 되었다)으로 이적하여 연합통신 사회부 차장으로 근무하던 중 합동통신 선배인 박용민 OB 베어스 단장의 제의를 받고 1983년 10월, OB 운영부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야구와 연을 맺었다.[15] 물론 94년 장호연의 성적 자체가 좀 부족한 감도 없지는 않다. 15경기에 나와 100이닝도 던지지 않고 4점대 평균자책점을 올렸으니....[16] 이때 경 사장은 앞으로 3년은 더 해먹겠다고 했는데, 이후 구단 대표이사직에 재신임되어 1998년 8월까지 약 4년을 더 재임하였다. 이후 두산그룹 내 계열사 대표를 거쳐 다시 2003년 4월에 구단 대표이사 사장으로 복귀하여 2005년 8월까지 역임했다. 이후 두산그룹 부회장까지 영전한 후 2008년을 끝으로 퇴사하면서 완전히 두산그룹을 떠났다.[17] 이 때문에 1994년 OB는 1군에서 뛴 기록이 있는 선수가 유난히 많았다. 타자만 해도 33명이 1군 기록이 있으며 이는 다음 해인 1995년보다 10명이나 많은 수치다. 당시 급하게 투입됐던 멤버는 다음과 같다. 강규성, 공유선, 김명호, 김인철, 김정규, 길랑균, 나영철, 마원성, 박종무, 소상영, 송명철, 윤기수, 이전진, 조연제, 최영술, 하창우, 함석원. 그야말로 이름도 생소한 선수들로 한 달을 치러야 했다.[18] 사실 김성근이 감독을 하던 시절에 수석코치가 최주억이었다. 이후 김성근을 따라 태평양 돌핀스로 넘어갔다가 김성근이 삼성으로 갈 때 다시 OB로 복귀한 것. 결과적으로 그는 김인식으로 감독이 바뀔 때 재계약에 실패하고 LG 트윈스 프런트로 자리를 옮겼다.[19] 처음엔 선수 장악에 있어서 강성 타입인 백인천이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최종적으로 인화력이 있는 김인식이 낙점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베어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 중 하나가 되었다.[20] 대표적으로 김응용 감독은 그의 해태 감독 시절을 기억하는 팬은 다 알 정도로 종종 폭력을 쓰던 편이었고, 김성근 감독도 쌍방울 시절까지 간혹 구타를 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한 술 더 떠서 21세기에도 인사 안 했다고 이진영을 때리는 등 폭력을 사용했다.(김 감독의 수제자인 외야수 심성보가 자신을 격려하기 위한 "사랑의 매"라고 표현하기는 했다). 또 김성한 전 감독의 경우, 2004년에 선수 구타 때문에[43] 감독 자리를 내놓아야 했다. 사실 지금도 '체육계 폭력 심각' 운운하는 기사가 나오는데 당시에는 오죽했을까.[21] 윤동균이광환은 OB 원년에 고참 선수와 타격코치의 관계였으며, 나이 차도 적었기에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 외에도 80년대 후반에 은퇴한 윤동균이 이광환 밑에서 타격 코치를 하기도 했었고. 아이러니한 것은 94년 당시에는 두 사람이 정 반대의 위치에 있었고, 한 명은 폭력감독으로 낙인찍히면서 현장을 떠났고, 한 명은 신바람야구를 통해 우승을 이끈 감독으로 남았다는 것.[22] 아주 근거 없는 말도 아닌 것이 김상호는 당시부터 외식업에 투자하고 일선까지는 아니더라도 경영에 꽤나 발을 들여 놓은 상태였고, 벌이가 제법 쏠쏠했던지 선수생활을 조금 더 지속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꽃같은 임팩트만 남긴 채 은퇴했으며 이후로도 야구계와는 거리를 두고 외식사업에 종사하며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 저 말로 미루어 볼 때 진짜로 외식사업으로 버는 돈이 야구생활로 버는 돈 이상으로 많았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누구도 생명의 위협을 느껴가며 부업보다 더 짜게 받는 주업을 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야구선수는 실제로 생명에 위협이 갈 때도 있고 몸을 굉장히 혹사시키는 직업이다.[23] 이외에도 박철순은 구타관련해서 내로남불이 심한데 대학생 시절에는 후배였던 최동원을 구타하다 전치 3주의 중상해를 입히기도 했다[24] 당시 이종남 기자가 집필하여 1995년 출판되었던 '이중노출 : 프로야구의 특종, 낙종... 그 뒤의 진실'이라는 저서의 진실성을 믿는다면 후배들의 항명파동 참여여부를 두고서도 박철순 본인이 본인 의사에 반하여 항명 참여 여부를 결정한 후배들의 뺨을 때린 전적이 있는데다 '2군 고참의 사적 심부름 및 후배 구타를 옹호한 사건'으로 미루어 당시의 항명파동의 본질은 '코칭스태프의 선수에 대한 폭행'이 아니었고 '코칭스태프의 고참선수에 대한 처우'였던 정황이 존재한다. 장호연은 젊은 선수들끼리 그랬다면 일이 저렇게까지 흘러가지 않았을 거라며 박철순의 영향력을 선수들이 무시못했을 것이라는 발언을 했다.[25] 다만 전반기 이후 경기를 뛰지 않고 사실상 선수생활을 접은 상태였다고 한다. 그나마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는 들었지만.[26] 다만 여기서도 감안해야 할 점이 있다면 홈 구장의 변화다. 강영수는 트레이드 이전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잠실 야구장을 홈으로 썼다. 그러나 트레이드를 통해 당시 홈 구장이 가장 작았던 숭의야구장으로 바뀌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숭의야구장은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과 비교할 때 홈에서 좌우측 펜스까지의 거리는 9m 짧고 중월 펜스까지의 거리는 무려 15m가 짧았다. 쉽게 말해 잠실에서 펜스 근처 깊숙한 플라이 볼로 잡힐 공이 인천에서는 홈런이 되는 셈이다. 숭의야구장은 이러한 약점을 메우기 위해 기존 1.5m 펜스 위에 높은 철망을 덧대는 방식으로 펜스를 운용했다.[27] 삼성은 그 전 해에도 해태 타이거즈에서 조계현을 현금트레이드 하기도 했다. 물론 조계현은 코칭스태프와의 불화도 있던 것을 감안해야겠지만.[28] 그리고 삼성은 그 때 김상진 외에도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김기태김현욱양용모 + 이계성 + 20억원에 트레이드하여 전력보강을 했으며, 해태 타이거즈양준혁 + 황두성 + 곽채진 + 30억원을 내주고 임창용을 영입한다. 우승을 위해서 한 해에만 공식적으로 56.5억원을 들여서 S급 선수들을 대량으로 영입한 셈이다.[29] 2000 시즌이 끝나고 FA 계약을 했으나 하락세를 타면서 FA 먹튀로 전락하는 기미가 보였다. 그래서 SK로 트레이드 된 것.[30] 하필 입대를 결정할 무렵에 방위병 제도가 없어지는 바람에 공익근무요원으로 병역을 완료한다.[31] 당시 OB는 왼손 강타자와 쓸만한 좌완 원포인트 투수를 구하기 위해 최훈재와 이재만을 영입했다. 반면 해태는 이강철과 이대진의 부상, 김상진(77년생)의 이탈로 인해 투수가 부족하자 선발투수로 쓸 수 있는 권명철을 데려간다. 정작 권명철은 시범경기에서 발목을 다치느라 99년 내내 1경기도 못 나왔다.[32] 당시 LG 감독인 박종훈이 성영재를 대신할 투수코치로 2군 감독 시절에 함께했던 권명철을 데려갔다.[33] 그런데 이듬해 이광환 감독을 따라 윤동균이 한화 수석코치 겸 타격코치로 부임해 2002년까지 재임했다. 그러나 이 시기에 과거의 앙금을 풀고 의기투합해 과거의 원만한 관계로 돌아간 것으로 알려졌고, 윤동균의 지도를 받은 김종석은 2001시즌에 타율 0.315, 16홈런, OPS 0.894로 커리어하이 성적을 내며, 로마이어의 공백을 훌륭히 메웠다.[34] 그리고 자양중 야구부에서 훗날 두산의 핵심 유망주로 성장하는 곽빈을 지도한다.[35] 한 술 더 떠서 이 팀은 강간한 선수를 복귀시키려는 시도도 했다.[36] 당시 삼성 라이온즈 코치였다. 하지만 간통 루머가 터지면서 김성근이 싸 놓은 빅똥과 시너지를 일으켜 삼성의 1차 암흑기에 단단히 기여하고 만다.[37] 전지훈련 배제는 기본이요, 공개적으로 은퇴를 종용하기도 했다. 안경현은 이를 거부하고 이렇게 할 바엔 차라리 다른 팀으로 보내달라고 했고, 구단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안경현은 SK로 이적했다. 이 덕분인지 당시 SK의 전성기를 이끌던 김성근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된 듯. 사실 안경현은 김성근의 아들 김정준과 친구 사이기도 하고...[38] 대표적인 인물이 김태룡 단장과 김승영 전 사장.[39] 다만 박철순은 시구 또는 행사로 초청을 꾸준히 하긴 했다.[40] 사실 맞는 평가인 것이, 당시 윤동균 감독이 중용하기 시작했던 김민호, 김상진, 안경현, 장원진 등의 신예들은 이후 베어스의 코어로 성장해 이듬해 우승에 큰 공을 세운 것은 물론, 전반적으로 좋은 모습을 보였다. 또한 재임 도중 박노준을 대가로 영입한 이광우는 윤 감독의 재임 기간 동안 맹활약했고, 사퇴 이후에도 투수진의 마당쇠 역할을 하며 베어스의 투수진을 지탱했다.[41] 더구나 윤동균 감독은 (선수들의 증언이 맞다는 가정 하에) 방망이로 선수를 실제로 때리지는 않았고 단순 얼차려까지만 갔지만 김성한 감독은 실제로 선수에게 폭행을 가했다는 점에서 더욱 비교된다. 물론 얼차려나 배트 폭행이나 선수의 인권을 무시하는 행위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지만.[42] OB 베어스 항명파동과 다른 점은 이 사건은 주축 선수들이 집단항명을 일으켰고 김성한 사건은 선수들이 감독을 두둔했다는 것이다. KIA 타이거즈해태 시절의 똥군기 악습이 KIA로 간판이 바뀐 후인 2002년에도 강하게 남아 있었다는 빼도박도 못할 증거다. 괜히 과거 한대화, 양준혁, 손혁 같은 선수들이, 그리고 이듬해인 2003년 최용호가 KIA로의 트레이드를 거부한 것이 아니고 2003년 초에 KIA로 트레이드된 박재홍진필중이 부진에 빠진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