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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성방송국, 조선방송협회(JODK; 1927~1945)
경성방송국 개국 당시 조선일보 기사 |
JODK, 여기는 경성방송국입니다.
경성방송국은 일제강점기때 일본 식민지들을 포함하여 네 번째로 만들어진 방송국이었다. 첫 번째는 JOAK 도쿄방송, 두 번째는 JOBK 오사카방송, 세 번째는 JOCK 나고야 방송이었다. JODK의 D는 그냥 네 번째라는 뜻이다. 엄밀히 말해 이 부분은 KBS의 역사라기보다는 한국 방송 초기 역사의 개괄에 가깝다. 그래서 KBS에서도 "방송 70년, KBS 50년"이라는 식으로 표기하며 JODK와는 구분을 두고 있으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조선방송협회 항목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이 때 JODK가 NHK 일본방송협회에서 조선총독부 유관기관으로 이전되며 일본 본토에서 떨어져 나왔고, 나머지 세 방송국(도쿄, 오사카, 나고야)이 그대로 일본방송협회, 즉 NHK를 결성했기 때문에 아직도 NHK 네트워크 내 호출부호 중에는, 디지털로 넘어왔음에도 불구하고[1] 여전히 JODK가 결번이다. 후술하는 조선방송협회 산하 지역국들의 호출부호는 현재 일본 내에서 NHK 지역국들에게 배당되어 있으나 JODK의 경우에는 할당되고 있지 않다.
이후 1935년 기존의 JODK는 경성중앙방송국으로 개칭하고 조선방송협회를 결성, 1936년부터 부산방송국(JBAK)을 시작으로 평양(JBBK), 청진(JBCK), 이리(JBFK), 함흥(JBDK), 대구(JBGK), 광주(JBHK), 대전(JBIK), 원산(JBJK), 해주(JBKK), 신의주(JBLK), 춘천(JBMK), 마산(JBOK), 목포(JBNK), 성진(JBPK), 청주(JBQK), 강릉(JBRK)에 지역방송국 체제를 갖추었다. 개중에는 마산방송국처럼 간이방송소에서 시작한 곳도 있었고, 청진방송국의 경우 본격적으로 만주로 진군해오기 시작한 소련군에게 넘어가기 전에 관동군이 폭파시키고 철수하였다.
합천군 영상테마파크에 JODK 사옥을 재현한 듯한 건물이 있다.
2. 국영방송 시대(HLKA; 1945~1973)
2.1. 광복 후
'자유의소리' 라디오 프로그램이 제작되고 방송되기까지의 과정(1957)(국가기록원, 플러그인 설치 필요)1945년 광복 후에는 미 군정청에 의하여 '중앙방송국'으로 개칭했다. 1947년 9월 3일에는 일본의 'JO'와 식민지 조선의 'JB'대신 고유의 호출부호 'HL'을 받아 HLKA라는 약어를 사용하였다.[2] KBS 창립 전까지는 라디오에서 이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현재도 KBS 1TV(CH 9)와 1라디오(서울 97.3MHz) 계열의 콜사인은 HLKA이다.[3][4]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과 함께 공보처 방송국 산하로 편입되었다.
1950년 6.25 전쟁으로 구 JODK 건물 외에 8개 지국이 파괴되었고, 서울중앙방송국은 천도한 정부를 따라 대전으로 이동하면서 HLKI 대전방송국이 18일동안 대전중앙방송국으로 중앙방송국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전황이 불리해짐에 따라 7월 15일 중앙방송국도 대전을 떠나 대구로 이동하였고 낙동강 방어선도 위태해짐에 따라 8월 중순 중앙방송국은 부산으로 피난갔다.[5] 그럼에도 KBS는 전쟁 초기 대전중앙방송국을 통하여 미국의 소리 방송을 전국에 중계하기도 했으며 유엔군 당국과의 협조 하에 미국의 소리나 유엔군의 소리(VUNF) 방송, 일본 NHK를 통한 한국어 특별방송 및 해상이동방송을 실시해 심리전 활동을 했다. 휴전 후 부산에서 서울로 환도한 이후에는 구 조선방송협회 사무국을 활용하여 방송했지만, 지나치게 시설이 좁아 동화백화점 강당 등을 빌려 사용했다고 한다. 그러다 1956년 서울 남산 자락에 '남산연주소'를 세우고 1976년까지 이 곳에서 방송을 제작/송출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자리가 원래 조선총독부 중앙청이 세워지기 전 일제 통감부가 있던 자리였다는 것. 1972년 KBS중앙방송국 전경
참고로 옛 남산 사옥은 1976년부터 국토통일원 청사로 쓰이다가 1986년부터 국가안전기획부로 주인이 바뀌었고, 1995년 안기부 측의 내곡동 이전으로 서울시에 귀속되어 1999년 서울애니메이션센터로 이용되었다가 2018년 재건축을 위해 철거 중이며, 2023년 '서울창조산업허브'로 착공해서 2027년을 완공 연도로 잡고 있다.
라디오방송국 청사 반대편에 1961년 세워진 TV 방송용 건물(남산빌딩)은 영화진흥공사 건물로 쓰이다가[6] 1995년 영진공이 홍릉으로 옮기면서 한국영화감독협회가 2010년대 초반까지 썼고, 2001년 케이블 방송사 리빙TV 가 옮겨와 2021년경까지 썼다.[7] 그 사이 건물 소유권이 피앤씨랩스 창업주 손철재에게 넘어갔다가 2023년 LG 계열 D&O에게 매각되어 임원용 연수원을 짓기 위해 철거 중.#
그런데 라디오와 달리 텔레비전 방송은 엄밀히 말해 KBS가 국내 최초는 아니다. 1956년 미국 TV수상기 메이커인 RCA가 출자한 'HLKZ-TV'(KORCAD-TV)가 시초이며, 당시로는 세계 최첨단을 달리던 RCA의 영상장비와 미국인 엔지니어까지 갖추어 기술적으로는 일본 못지않은 시스템을 짜놓았다.
그러나 경영난[8][9]으로 인해 1957년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이 경영권을 인수했고, 이름도 DBC 대한방송으로 바꾼다. 한국 언론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고 있는 당시 한국일보 장기영 사장[10]은 TV시대의 개막을 염두에 두고 사업확장을 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DBC는 1959년 방송국 아래층에 있던 가구점에서 원인 모를 불이 나 버려 방송을 중단하고 말았다.[11] 이후로는 AFKN-TV에서 매일 19시 30분부터 20시까지 30분간 한국어 방송을 하여 TV 방송 기능을 대신하였다.[12] 이후 한국일보 측에서 놀고 있던 방송인력과 남은 장비는 당시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사정부가 인수받았다. 그리고 공보처가 있던 남산에 개국한 것이 현재의 KBS 1TV(당시에는 KBS TV)인 것이다. 1960년에 소관업무가 국무원 사무처 공보국, 1961년에 공보부로 각각 이관되었고, 그해 7월에 대공방송을 담당하는 '서울국제방송국'을 개국하였다.
이후 KBS-TV는 개국 이래 <국가재건최고회의 소식>, <혁명의 아침>등 국정홍보성 프로그램을 제작하며 군사정권의 선봉대 노릇을 했고, 1962년 1월 25일에 KBS-TV는 1기 탤런트를 공채하였다. 이는 본격적인 오락매체로서의 TV의 성장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프로그램 형식에 있어서는 제작인력의 대다수가 HLKZ 출신이다보니까 HLKZ 시절을 답습했다고 하며, 의외로 코미디 형식의 프로그램이 많았다는 것이다. 물론 국영방송사이다보니 소재가 교양적이거나 정권 계몽적인 아이디어를 많이 썼다. 당시에는 TV 수상기가 1만 대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는지 군사정부에서는 1962년 2월부터 2만 대의 TV를 미국과 일본에서 긴급 도입해 월부로 판매하였다. 당시 이렇게 수입된 TV 수상기를 가지기 위한 경쟁은 엄청나게 치열했다고 한다. 얼마나 치열했냐면 당시 세종로와 정동 방송국 부근에 엄청난 시민들이 몰려왔고, 그 때문에 교통순경까지 출동하였을 정도라고 한다.
개국 직후엔 세금으로 운영했지만, 당시 전국적인 가뭄으로 경제가 어려워지자,[15] 1963년 1월부터 시청료(수신료) 징수를 시작하고, 동시에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도 개시했다. 물론 당연히 반응이 좋을 리[16]가 없어서 반발이 극심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시청료 수입을 거두고 대다수 프로그램에서 광고를 붙여 편성하는 방식으로 광고 수입도 거두면서 재정은 어느 정도 나아졌지만 이듬해 말에 1964년에 TBC가 개국하며 복병이 찾아왔다. 오락성을 추구했던 TBC 때문에 상대적으로 정책 홍보에 중시했던 KBS는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또한 TBC가 공격적인 확장전략을 짜면서 KBS 인력 상당수를 스카우트해갔으며 TBC에서 신선한 프로그램을 많이 내놓으면서 KBS가 광고방송을 해야 할 이유에 대한 공격이 늘어났다. 물론 아직은 TV가 사치품이었으니 상대적으로 정도는 덜했지만 어쨌거나 KBS에 대한 불만이 점차 커져 나갔던 것은 어쩔 수 없었고, 이에 KBS는 TV 댓수가 어느 정도 늘어나면 폐지하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TV 댓수가 계속 증가해서 시청료 수입이 급증해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을 해야할 명분이 사라지자, 1969년 5월 1일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을 폐지하고 동시에 오전 아침시간대를 이용해 교육방송을 시작한다. (단, 특집 프로그램과 스포츠 중계 프로그램은 1972년까지 광고를 계속했다.) 여담으로 라디오 단막극인 'KBS 무대'는 이 당시부터 지금까지 60년 넘게 방송 중인 프로그램이다. 1968년 7월 25일부로 공보부가 문화공보부로 개편되면서 서울중앙방송국, 서울텔레비전방송국, 서울국제방송국 3개 국이 통합하여 '중앙방송국'으로 개편되었다.
1969년부터 일일연속극 <신부일년생>을 편성하기 시작했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각 방송사별로 일일연속극 편성을 두고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KBS가 광고를 더 이상 안 하게 되었다지만 시청률이 신경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어서 윗선의 눈치를 보면서도 시청률 경쟁을 이해 일일연속극을 편성했던 것이었다. 1972년 서울 불광동에 국내 최초로 TV 무인중계소를 개설했다.
공사화 이전에는 문화공보부 산하 기관이었다. 그러니까 당시 임직원들은 국가공무원으로,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KBS 간부로 입사ㆍ전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정순일(1934~2009, 전 본사 보도본부장), 손영호(전 본사 부사장), 신정휴(전 MBC 전무이사) 등이 있다.
2.2. 공영방송사로 출범하다(1973)
한국방송공사 발족(국가기록원, 플러그인 설치 필요), e-영상역사관 버전[17]국영방송이었던 KBS는 1972년 12월 30일 '한국방송공사법' 제정 후 이듬해인 1973년 3월 3일 문공부로부터 독립하여 공사화를 꾀하며 본격적인 공영방송 체제를 기획하게 된다. 공사 창립이 이뤄졌으나 그해 말에 벌어진 오일 쇼크 때문에 MBC, 동양방송과 함께 평일 TV 아침방송을 전면 폐지해버려서 교육방송도 동시에 종영시켜버렸고, 지금의 여의도 사옥 건설에 들어가 1976년에 여의도 시대를 개막했다. 당시 온통 모래사장으로 근처에 비행장밖에 없었던 여의도를 정부에서는 동부이촌동 백사장과 함께 공유수면 매립을 하여 새로운 택지로 조성하려는 계획을 세웠고[18] 이 기회에 당시로서는 최신식 구조를 갖춘 현대적 방송시설을 마련하려 했던 것이다.
새로운 방송센터 사업에는 한국과 일본의 기술진들이 의욕적으로 참여했다. NHK는 요요기 방송센터를 설계한 기술진들이 그 문제점을 보완하여 진일보한 방송센터의 장을 만들려고 설계안부터 빡세게 참여했고, 특히 TBS에서 근무하던 한국계 안 모 이사의 도움은 절대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하필이면 KBS 새 사옥이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근처에 위치하여 고도제한이 적용되는 바람에 원래 계획만큼 최첨단의 방송센터까지는 달성하지 못하게 된다. 계획대로라면 27층 규모(!)의 초거대 방송센터 빌딩 속에서 TV 스튜디오-라디오 스튜디오-공개홀 등이 입체적으로 짜여져서 무거운 방송장비나 대도구 등이 한 번에 이동 가능한 시스템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스튜디오가 6개나 병렬형으로 지어질 수 있었다고 한다.[19] 지금은 상암동 CJ E&M 센터나 MBC의 일산제작센터 등이 이런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어쨌거나 1976년 당시로서는 국내 최첨단. 이후 KBS는 1988년 IBC(현 KBS 신관)를 준공하며 원래 계획했던 방송센터 모습을 뒤늦게나마 불완전하게 이루었다.
또한 이 시기 들어서 KBS 종합뉴스를 신설하면서 리포팅 형식의 뉴스 프로그램을 도입해나갔고, 전국방송도 사실상 이 시기부터 시작했다. 1974년 31개 중 29개 중계소에서 라디오 자체방송을 개시했고, 1976년 표준FM, 1977년 스테레오FM, 1979년 음악FM 방송을 각각 개시했다.
그러나 프로그램 면에서는 정권 홍보적인 색채가 팍팍 났던데다가 시청률을 올리기 위해서 타 방송사와 일일연속극을 두고 경쟁을 벌여서 신문사로부터 질타를 많이 받았다. 다만 드라마나 예능은 경쟁사인 TBC와 MBC에 비해선 히트작이나 참신한 작품은 많지 않았다. 일일연속극이야 어느정도 시청률이 나온 작품이 있었다지만, 그래봐야 3위 방송사 정도의 위상이었다. 굳이 꼽으라면 1975~1978년까지 했던 <전우>, 1977년부터 방영된 <전설의 고향>, 1979~1980년에 방영된 <토지> 등이 있었다. 당시 활약하던 간판 전속 탤런트로는 신구, 문오장, 김진해, 최길호, 김성겸, 최정훈, 이종만, 이치우, 이일웅, 강민호, 민욱, 나시찬, 주현, 김흥기, 서인석, 태현실, 반효정, 김난영, 박혜숙, 정영숙, 박주아, 강효실, 황정아, 한혜숙, 정애리 등이 있었고, 김자옥, 이효춘, 서미경, 이경진 등 타 방송사 탤런트들도 간간이 이곳에 이적하기도 했다. 이 중 한진희처럼 언론통폐합에 의해 KBS로 어쩔 수 없이 이적해 온 케이스도 있고[20] 이영하는 영화판에서 먼저 스타가 된 후 KBS 전속으로 들어온 특이 케이스다.
3. 언론통폐합(1980)으로부터 현재
3.1. 언론통폐합
언론통폐합 직전 방송망 (서울 기준 채널·주파수) | 언론통폐합 직후 방송망 (서울 기준 채널·주파수) | ||
지상파 TV | 채널 9 | 지상파 TV | 1TV : 채널 9 2TV: 채널 7[21] |
라디오 | 제1방송 : AM 711 kHz 제2방송 : AM 603 kHz FM : FM 93.1 MHz | 라디오 | 제1방송 : AM 711 kHz 제2방송 : AM 603 kHz 제3방송 : AM 639 kHz[22] 라디오서울 : AM 792 kHz[23] 제1FM : FM 93.1 MHz 제2FM : FM 89.1 MHz[24] |
1979년 12.12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은 1980년 권력 강화 및 언론의 자발적 충성유도를 위한 목적으로 3월부터 'K-공작계획'을 실시해 언론탄압 기반을 다졌고, 7~9월까지 언론사들로 하여금 '자율정화'란 명칭으로 언론인 933명을 해고시킨 뒤 11월 12일 45개 언론사주들을 보안사로 끌고 가 언론사 소유권 포기각서에 서명케 만들었고, 이틀 뒤 신문협과 방송협으로 하여금 신문사의 방송국 소유 금지, 방송 공영화 등을 담은 <건전언론 육성과 창달을 위한 결의문>을 발표케 하고 '언론통폐합'을 개시했다.
그 결과 라디오 방송 중 DBS(동아일보 계열)와 동양라디오(TBC, 중앙일보와 같은 삼성그룹 계열), TV 방송으로는 TBC-TV를 KBS가 흡수했다. 또한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이던 CBS의 보도 부문[25]도 KBS로 흡수되었다.[26] 이 흔적은 지금도 TV 채널의 KBS2를 비롯, KBS의 각 라디오 주파수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기존의 채널/주파수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그것이다.[27][28] 더불어 KBS 성우극회, 탤런트실, 예술단, 희극인실, 어린이합창단 등 전속단체, 보도본부, 아나운서실, 직능별 협회 등의 규모가 비대해진 것도 언론통폐합의 흔적이다.
합병 외에도 다른 언론사의 지분 역시 많이 차지하게 됐다. 전두환 세력은 MBC 주식의 70%, 서울신문 지분 일부, 연합통신 주식의 30%를 KBS에 넘겼고, 1981년 2월 교육 전문채널 KBS 3TV 및 교육라디오를 개국시켜 TV 교육 프로그램 제작을 한국교육개발원에 위임했다. 8월에는 국립교향악단을 다시 인수하여 'KBS교향악단'으로 출범시키고 11월 첫 자회사 '한국방송사업단'을 세웠으며, 1982년 서울올림픽방송본부를 발족시키고 1983년엔 기존 재미 한인 방송사인 SBC(구 로스앤젤레스 TBC), TV코리아, KTB(한국일보 계열) 등 3사를 통폐합해 미주 현지법인 '미주한국방송(KTE)'을 세웠다. 1985년에는 음성다중 방송을 수도권 지역에서 시범 개시했다.
다른 한편 1984년 5월부터 '정부투자기관관리기본법'에 따라 이사회를 도입시켰고, 7월 16일 조직개편을 단행하며 국내 방송사로서 최초로 본부제를 도입한 후 보도, 제작 등 일부 부서의 국/부 단위를 없애고 종전의 국장-부국장-부장-차장 체계를 주간-부주간-담당 체계로 개편했다가 1986년 12월부터 본부 산하 조직을 국/부 단위로 환원시켰다.
1984년 12월 KBS의 송/중계소 466개를 한국전기통신공사에 위탁 운영시켰고, 1987년 1월 753개 시설을 KTA로 이관시켰으나 1988년 6월 KBS에 환원되기도 했다.
3.2. 유럽식 공영체제로의 개편
언론통폐합의 실질적 이유는 군부독재의 언론통제 강화 강화, 소유구조 제한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외형은 의외로 유럽식 모델을 따르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면 특이한 점.- 특히 1981년부터 1994년까지의 KBS-1TV의 광고는 전형적인 유럽식 블록광고였다.[29][30]관련기사 그 당시 KBS-1TV 블록 광고 자료는 여기를 참조하자. 대체적으로 그 당시 유럽지역의 공영방송에서 이런 방식으로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을 했고[31], KBS1에서도 비슷한 방식의 광고 방송을 했었다. 당시 TV와 라디오 광고 판매 업무도 각 방송사에서 자체적으로 판매하는 식으로 이루어지다가 한국방송광고공사라는 기관이 따로 설립되어 업무가 이관되었는데 이것도 네덜란드 방송광고협회(STER)나 프랑스방송광고공사(RFP)의 형태를 그대로 본뜬 것이다.
이런 유럽식 모델로의 변화는, 역설적으로 전두환이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전두환 자신도 신군부 정권이 정통성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소위 전문가란 직함을 가진 사람들은 가리지 않고 정권에 다 끌어다들인 것.[32] 당연하게도 이들 외부세력(?)은 정권의 입맛대로만 움직여준 것은 아니었고[33] 따라서 명목상으로나마 이런 유럽식 공영체제 개념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셈.
방송학상으로 미국식 방송서비스 개념은 "방송국 = 수익을 창출하기 위해 방송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라는 정의에서 출발한다.[34] 반면 유럽식 모델은 "공공재인 전파는 누구의 것도 아니며 따라서 사회적으로 공영성 있는 기관이 방송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개념에 뿌리를 둔 것이다. 사회주의의 발상지가 유럽임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은 아니다. 영국[35], 독일[36], 프랑스[37], 중국[38] 등의 국가에서는 각각 1개의 공영과 1~2개의 반(半)공영체제 방송을 두고 있는 것이다.
3.3. 한계
어쨌든 이러한 유럽식 공영방송서비스로의 외형적 개편은 필연적으로 KBS의 몸집을 불리게 되었는데, 1980년대 당시 KBS는 한때나마 세계 최대의 단일 방송 네트워크라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명목상의, 양적인 면이었을 뿐으로 현실은 시궁창이었다.그 증거로 먼저 인적 구성을 예로 들면 1990년 4월 기준 KBS 총 사원 수가 정규직만 6,340명인데, 거기에 일용/계약직 780명, 수신료 징수원 1,200명을 합하면 8천여 명이 넘었다. 1981년부터 8년 간의 KBS 인원증가 추이를 보면 4,770명에서 6,340명으로 32.9%로 증가했는데, 이는 지상파 공영방송만의 독과점 경영과 1986 서울 아시안게임 및 1988 서울올림픽에 따른 일시적인 업무량 증가에 기인한 것이며 특히 상위 직급의 비대화도 심화되어 1988년 481명밖에 없던 3갑급(차장급) 직원 수는 1,180명으로 늘었다. 이는 인적 구성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쳐 28개 직종 중 기자, PD, 아나운서 수는 각각 492, 860, 257명으로 다 합해봤자 전체의 25%에 지나지 않으며 청원경찰들의 수가 본사/지역국 통틀어 631명이나 된 탓에 '기자보다 경비원이 많은' 기현상이 일어났다.
또한 언론통폐합 이후 본사 진골과 피합병 방송사 출신, 본부, 직능별로 파벌이 형성되고 1981년부터 청와대, 군, 국가안전기획부, 민주정의당, 국군보안사령부, 대학 학도호국단 등지를 통해 특채까지 감행하는 바람에 1989년 기준 특채자는 1,160명이 되었고, 이들 중 차장 이상 간부진은 69명이었으며 이 사실은 1989년 1월 16일 KBS 노동조합(1노조) 측이 노보를 통해 책임보직 특채자 50명의 명단을 처음 공개하면서 알려졌다. 예산 면에서 1990년 지출예산 중 4,211억 5,800만원 중 방송제작비는 20%, 인건비는 38%로 인건비가 제작비의 2배 가까이인 기현상을 보였다.(시사저널 기사)
보도의 경우 땡전뉴스라는 표현이 있을 만큼 정권 찬양 일색이고, 편파보도까지 일삼았다. 심지어는 '전두환 대통령께서 청진동 뒷골목을 방문해 청소 상태를 점검하셨습니다'가 큐시트 탑에 올라오는건 기본 중의 기본이었고, 심지어는 대한항공 민항기가 소련 공군기에 격추당해 추락했을 때 톱 뉴스가 전두환 대통령 찬양이었다.[39] 심지어 간첩 조작사건이나 학생시위 등 공안사건이 벌어지면 '보도특집'을 긴급 편성해 민주화운동을 '좌경 폭력혁명'이니, '사회 불안'으로 왜곡 보도해왔다.
이러한 역사적 이유에 따라서 대한민국의 방송환경은 "1공영+다민영"의 미국 체제, "2공영+알파"의 유럽식, 그리고 신방겸영의 일본식 구조이다.[40][41][42] 삼선짬뽕인 형태가 되어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KBS는 어떤 의미로든 '대표 공영방송' 위치를 갖고 있는 것이다.
3.4. 시청료 거부운동[43]
- 관련 자료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자료
- 경향신문 <실록 민주화운동> 66회
- 김세진이재호기억저장소 자료
- 한국 현대사 산책 1980년대편: 광주학살과 서울올림픽 3권 - 강준만 저. 인물과사상사. 2003.
이렇게 고액의 시청료(현 수신료)[44]를 걷고도 친정부/친자본 편파보도에 만화영화는 거의 외제로 채우고,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들의 비참한 현실을 무시한 채 허구적 성공사례만 내보내며 반민중적 방송을 했고, 상업광고도 "돌려 먹을래"나 "빨아 먹을래" 같은 선정적 멘트까지 여과 없이 내보냈다.
이런 와중에 1982년 전라북도 완주군 등 농촌 지역에서 시청료 납부거부 운동이 시작되었다.[45] 이 당시에 문제가 되었던 난시청 문제와 편파보도 문제로 불만이 커져 시청료 미납가구가 점차 증가했다. 그러다가 1985년 2.12 총선을 앞두고 KBS와 MBC에서 아예 대놓고 편파 드라마[46]를 방영 하면서 시청료 거부운동에 불을 질렀다. 이 선거 편파드라마의 여파로 분노한 시청자들에 의해 시청료 거부운동이 급속히 확산되기 시작되자, 1985년 5월 1일 KBS-1TV의 술, 유흥업광고가 폐지되고, 동시에 저녁 블록광고량을 20%(10건→8건) 감축시켰다. 하지만 당시상황으로 봐서 편파보도 문제가 해결될리는 없고, 결국 85년 중반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되기 시작되었다.
그리고 1986년 1월 20일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의 주관하에 'KBS TV 시청료 거부 국민운동본부'가 발족했으며, 당시 제 1야당이던 신한민주당도 이에 동참하여 KBS 뉴스 안보기 운동을 전개했다. 이에 따라 시청료 징수율이 급속히 낮아지자 다급해진 정부와 민정당은 1986년 5월 14일 'KBS 운영개선안'을 마련해 1가구 당 1대분 징수, 1년분 선납 시 1개월분 공제, 영세민 납부 면제, 징수원 축소 및 납부고지서를 통한 시청자의 은행 등 납부제 도입, 1989년 이후 1TV 평일 오후 블록광고 폐지 등을 마련했고 7월에는 한국방송공사법 시행령을 전면 개정해 시청료의 체납가산율을 15%에서 5%로 내리는 유화책을 냈으나 당연히 미봉책에 불과했다.
이미 1985년 12월 한국방송공사법 개정 시부터 시청료 체납자에 대해 관할 세무서가 강제징수하도록 하던 걸 KBS가 문공부장관의 승인을 받아 강제징수하는 쪽으로 개정했고, 1986년 11월에는 내무부가 대도시 일부 지역에 전기/수도세까지 통합한 '통합공과금' 제도[47]를 시행해 시청료 거부운동을 막고자 했으며 경찰 역시 운동본부 측의 스티커 배포 가두캠페인을 물리력으로 단속하는가 하면 문공부 홍보조정실은 KBS 시청료 거부운동 보도금지를 요청하는 '보도지침'을 내보냈다.
1986년 9월 6일 범국민운동본부와 한국천주교평신도사도직협의회 사회정의위원회 대표 11명이 공정보도를 촉구하는 성명을 냈고, 그 일환으로 동월 29일 범국본, 신민당, 민추협,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KBS 시청료 폐지운동 여성단체연합 등 재야 5개 단체들이 'KBS 시청료 거부 및 언론자유공동대책위원회' 발족을 선언했다.
이 투쟁에서 특이할 만한 점은 여성들의 정치적 결속인데, 범국본에 고발된 내용 대다수가 징수원의 고압적 횡포와 관련된 것이며 이들이 주로 집에 혼자 있는 부녀자를 상대로 폭언, 협박, 공갈을 자행한 면이 포착되었다.(당시 항의문, 사례집, 진정사항 통보) 이를 토대로 여성들은 정치적 무권리 상태를 인식하고 조직/세력화의 의미를 확인하는 한 계기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시청료 거부 운동은 국민들의 공감을 얻어 들불처럼 번져갔고, 이 운동은 KBS와의 싸움을 넘어 반독재/시민불복종 투쟁으로 이어졌으며 동년 6월을 전후해 CBS 뉴스 부활투쟁, 나아가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 증거로 범국본 집계 기준 TV 수상기 보유 가구 중 52%가 이 운동에 가담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결국 1988년 시청료 징수액이 790억원으로 당시 최고점을 기록했던 1984년의 1255억원보다 465억원이나 줄어들고 징수율도 44.3%에 그치는 대 굴욕을 맛봐야 했다. 그 동안 컬러 TV가 널리 보급되었던걸 생각해보면 폭탄거하게 맞은 셈. 이는 이후에도 지속되어 1994년 10월 수신료 합산징수가 이루어질 때까지 수신료 징수율은 50%대에 머물게 되었다.[48]
다만 3저 호황과 1988 서울 올림픽의 영향으로 광고수요가 급속히 늘어 적자는 보지는 않았다.[49] 하지만 KBS 재정에서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늘어 재원상으로 극도로 상업화된 공영방송이라는 딱지가 붙어졌다. 이 당시 KBS 매출에서 수신료가 차지하는 비율은 20%대 중후반이었고, 광고가 70%를 넘었다.[50] 어쨌거나 이 시청료 거부운동이 미친 영향은 커서 1987년 6월 항쟁 발생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51], 6.29 선언 이후 KBS 노조 설립, 사회고발 프로그램 신설(뉴스비전 동서남북, 논픽션 드라마, 생방송 심야토론, 르포60 등), 보도 프로그램의 공정성 제고 등 방송민주화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1987년 11월에는 정부투자기관관리기본법 적용기관에서 제외되고 한국방송공사법이 개정되어 이사회 이사 추천권을 방송위원회가 갖도록 하고, 이를 거쳐 사장을 대통령이 임명제청하는 쪽으로 바꾸어 1988년 5월부터 새로 이사회를 구성했다.
이러한 방송민주화 운동은 1987년 말에 KBS 경영진과 보도국 간부들이 대선보도를 편파적으로 진행하면서 초기에는 무의미한 결과로 남는듯 싶었지만 노태우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로 국회가 여소야대가 되고 5공 청산 움직임과 함께 탄력을 받은데다가 6.29 선언 이후로도 시청료 거부운동이 여전한 세를 발휘하며 시청료 징수율이 40%대로 낮아지는 악재까지 쌓이면서 KBS 경영진의 힘이 약화되어 버렸고, 서울 올림픽이 끝난 직후에 정구호 사장이 중도 퇴진하고 서영훈 사장이 부임하면서 실현되는듯 했지만 1990년 3당 합당으로 큰 변수가 생겨버렸다.
다른 한편 경영합리화와 업무 전문화를 추진코자 1989년에는 방송제작사업단(현 한국방송제작단)과 방송시설관리사업단을 먼저 세운 후, 1991년에는 KBS 아트비전과 KBS 영상사업단을 각각 세워 기능을 분산시켰다.
3.5. KBS 사태(1990년 4~5월)
자세한 내용은 1990년 KBS 사태 문서 참고하십시오.3.6. KBS 1TV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 폐지와 그 이후
1993년 서기원 사장이 퇴임하고 TBC 마지막 사장이었던 홍두표 사장이 금의환향을 하듯이 부임했고, 그해 가을개편부터 '그린정신'을 제창해 채널별 로고나 세트장 등을 초록빛을 띠게 바꾸었다. 당시 수신료 거부 운동은 이미 진정되었지만 여전히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었던터라 수신료 징수율이 50%대에 그쳤고 광고 수입이 수신료 수입의 두 배를 넘었던 상황이었던 KBS는 재정확충을 위해 2500원에서 5000원으로 수신료를 올리려고 했으나 당연히 시청자들의 냉소적인 반응과 정치권에서의 비판으로 인해 수신료 인상이 여의치 않자 수신료와 전기세 합산징수로 방향을 전환하여 1994년 10월 1일부터 KBS 2TV와의 차별성과 수신료 수입 증대를 위해 그 동안 1TV에서 방영하였던 광고방송(상업광고방송)을 폐지하게 되었다.[52] 다만 공익광고는 그대로 나가게 되었다. (사실 이웃 섬나라 공영방송에서도 공익광고방송은 내보내긴 하지만) 그해 11월부터 본사는 아시아태평양방송연맹(ABU) 이사기관으로 선임되어 아시아 방송계에 이름을 떨쳤고, 1995년 10월 국내 방송사로서 최초로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한 후 12월 20일 서강대학교와 협업해서 장애인 라디오 방송 '사랑의 소리'를 개국했다. 1996년 7월 1일부터 위성TV 시험방송을 개시하고 1997년 ABU 서울총회까지 여는 데 공헌했다.1994년부터 징수원이 집에 방문해서 직접 징수했던걸 한국전력에서 징수하게 하였다.[53][54] 그리고 정부에서 1TV 광고 폐지로 인해 2TV, MBC, SBS TV의 광고 편성 가능시간을 확대했고.(프로그램 8%→10%, 토막 회당 3건→4건) TV 방송시간이 확대되어 광고시간도 늘면서(거기에 경기가 초 호황세였다는 것에 더해서) KBS 매출액은 급신장세 를 보였다. 근데 이런 상황임에도 어린이 시간대 애니메이션은 미제/일제로 때웠고, 국산은 생색내기 식으로 마지못해 편성했다.
그리고 이 시기 KBS 보도국에 대대적인 쇄신을 가하여 보도의 공정성을 이전보다 개선시키면서 덩달아 KBS의 이미지도 급 반전시키는데 성공,[55] 광고가 없는 1TV의 특성에 따라 시청률도 급상승하면서 1995년부터 KBS 뉴스 9의 시청률이 MBC 뉴스데스크의 시청률을 추월하게 되었다. 하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가 닥쳐오면서 1984년 이후 최초로 수신료 징수액수가 광고매출을 넘어서게 되었다.(하지만 다음해인 1999년부터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다.) 이때 홍두표 사장은 퇴직서를 내고 한국관광공사로 자리를 옮겼고[56], 새 사장으로 시사저널 주필 출신 박권상이 재임했다.
박권상이 부임하던 첫 해, 당시 KBS 여타 인사와 같이 BBC와 NHK를 KBS의 롤 모델로 제시한것도 있고, 더군다나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었던 KBS 측은 2TV의 광고를 줄여고 그 대신 수신료를 올리겠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경제위기에도 수신료를 인상하려 든다며 폭풍같이 까였고. 1999년부터 2003년까지 KBS가 매년 흑자를 내면서 수신료 인상안은 흐지부지 되었다. 박권상 사장은 기본적으로 홍두표 사장과 1TV에 보도-교양 프로그램 2TV에 오락 프로그램을 중점적으로 편성하는 노선을 이어받았지만 2TV에 대형 메인 뉴스 프로그램[57]과 일일 시사 프로그램[58]을 신설한 정도의 공적이 있었다. 그렇지만 내부 구성원들의 증언에 의하면 생각보다 보수적인 인사였다고 여하튼 그 후 박권상 사장이 2003년에 사퇴하고 서동구 사장이 내정되었지만 낙하산 논란과 노조측과 시민단체들이 반발하고, KBS 이사회와 노무현 대통령도 이에 굴복해서 결국 9일만에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땜빵용[59]으로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이자 한겨레 신문 논설위원을 지낸 정연주가 사장으로 부임했으며, 2004년 조직개편에 따라 팀제를 도입했다.
정연주 사장 시절에는 탐사보도팀이 성립되고, 2TV의 공익성을 높일려고 하는 노력을 했고[60], 공주, 군산, 남원, 속초, 여수, 영월, 태백방송국을 정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오락 프로그램의 대중성이 떨어지다보니, 경영 성적이 들쑥 날쑥한데다가[61] 거기에다가 이러한 경영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구조조정을 실행한 일로 인해 노조와도 사이가 나빠졌다.[62] 이 때문에 2007년 즈음에 수신료를 올리겠다고 했다가 당시 여당도 딱히 KBS 수신료 인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않았고, 한나라당이나 보수신문간 각을 세운것도 있었기 때문에 클레임만 당했다.[63]
그리고 정권이 교체되고 2008년 촛불집회가 있고나서부터 정연주가 배임했다는 이유[64]로 불법적으로 해임되고 이병순이 취임했으며, 그 해 가을개편을 기점으로 탐사보도팀 해체 등의 개편을 하면서 성향도 다시 보수적이 되었다.[65] 이후 2009년에 이병순이 물러나고 김인규 사장이 취임했으며, 2012년에 파업을 겪은 후 김인규 사장이 연임하지 않겠다고 밝히면서 길환영이 KBS 사장으로 등극했다.
3.7. 2012년 3월 총파업
자세한 내용은 2012년 공영방송 총파업 문서 참고하십시오.KBS 새 노조(제2노조)인 전국언론노조 KBS본부가 김인규 사장 퇴진과 부당 징계 철회를 요구하며 6일 총파업에 돌입했다. YTN과 MBC 노조[66]에 이어 이들과 연대한 만큼 파장도 만만치 않았고, 사태를 관망하던 제1노조[67]까지 가세하였다. 하지만 4월 총선에서 야당이 여당에게 의석수에서 밀린것으로 나타나자 기세가 꺾여버렸고, 무엇보다도 김인규 사장의 임기가 많이 남지 않았던 상태라 6월에 종료되었고 이후 길환영이 KBS 사장에 등극하였다. 아래 제작거부 사태 문단 참조.
3.8. 2014년 5월 제작거부
발단은 김시곤 전 보도국장의 발언 논란에서 시작되었다. 김시곤 국장이 "세월호 희생자 수가 많은 것 같지만 한 달에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들보다는 적다."[68][69]라는 발언을 해서 세월호 희생자를 비하했다는 막말 논란에 휘말렸고 이것이 KBS 새노조를 통해 알려지자 유가족들은 거세게 항의했다. KBS는 임창건 당시 보도본부장과 간부들이 안산 정부종합분향소를 찾아갔지만 거센 항의를 받고 쫓겨났고 결국 유가족들은 KBS로 가서 김시곤 국장의 해임과 길환영 사장의 사과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청와대로 가서 대통령을 면담하려고 밤새 대치한 끝에 결국 김시곤 국장이 막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보도중립성을 위해 사임한다고 발표했고 길환영 사장이 직접 유가족에게 사과하면서 사태는 일단락 되는 듯 했다.그러나 김시곤 국장은 사임하면서 길환영 사장이 보도본부에 사사건건 개입했다. 길사장도 사퇴해야 한다라는 폭탄발언을 하면서 KBS는 격랑이 휘몰아치게 된다. 김시곤 전 국장에 의하면 길환영 사장은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을 메인 뉴스로 다루지 말것등을 지시해 보도본부에 간섭하고 정권의 눈치를 봤다는 것.
이 일이 알려진 후, KBS 뉴스 9에서 세월호 침몰 사고에 대한 언론보도 문제를 보도하면서 자사 뉴스에 대한 비판도 함께 내보내고 김시곤 전 국장의 길환영 사장 발언까지 그대로 내보내기에 이르렀다. 이후 보도본부의 보직간부들이 길 사장 사퇴를 주장하며 일괄 사퇴했다. 게다가 김시곤 전 국장의 후임 국장 선임에 청와대가 관여했다는 논란까지 제기되며 논란인 일파만파로 번졌다.
결국 5월 19일, KBS 기자협회는 길환영 사장과 임창건 보도본부장의 사퇴를 촉구하며 제작거부에 돌입했다. 이로 인해 KBS 뉴스 9은 20분 정도로 단축방송되었고, 지역 방송국의 뉴스 송출이 전면 중단됐다. KBS PD협회도 제작거부에 동참하며 PD출신인 길사장을 제명하기에 이르렀다. 드라마국과 예능국도 제작거부에 동참할 뜻을 내비치면서 사실상 총파업 수순을 밟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5월 29일, KBS 양대노조가 공동으로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이전의 총파업과는 달리 양대노조에 노조원도 아닌 사퇴한 보직간부들까지 동참했다는 점에서 초유의 사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KBS 이사회는 길환영 사장 해임제청안을가결시켰다.
길환영 사장은 해임됐다. 길환영 사장은 해임무효 소송을 제기했지만 여기서도 패소했다.
3.9. 2016년 총파업
2016년 12월 8일부터 KBS 양대 노조가 공동으로 무기한 총파업에 돌입했다.# 파업 찬성률 85.8%로 가결 되었고 양대 노조는 불신임 절반 이상 높은 김인영 보도본부장 외 6명을 해임하라고 발표했다.# 28일에는 200여명의 PD들이 고대영 사장 사퇴하라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틀후에는 기자 300여명이 사퇴하라고 성명서를 발표했다.# 31일에 김인영 보도본부장이 해임되었다.# 해를 넘겨 1월 3일에는 고대영 사장 사퇴를 촉구하는 KBS 구성원 700명이 넘었다.#3.10. 2017년 총파업
자세한 내용은 2017년 공영방송 총파업 문서 참고하십시오.8월 28일에 양대 노조가 총파업 돌입 시점을 발표하게 되면서 MBC와 동시 총파업했다. 출처
3.11. 2023년 윤석열 정부의 수신료 분리징수 시행
자세한 내용은 수신료 문서 참고하십시오.4. 역사의 순간들
4.1. 이산가족을 찾습니다(1983)
자세한 내용은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문서 참고하십시오.4.2. 선거 개표방송(1987~)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6.29 선언과 민주화가 이루어지며, 대통령도 직선제로 선출하게 되었다. KBS는 이 헌법 개정 국민투표 및 대통령 선거에 대한 개표방송을 실시간으로 진행했으며, 대한민국 국민은 처음으로 영국,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 국가들처럼 "방송을 통한 실시간 개표 중계"를 접하게 되었다.KBS의 경우는 박성범 앵커(사진[70]/당시 보도본부 부본부장, 前 한나라당 국회의원)가 진행했으며 다음날 낮 12시까지도 개표방송이 진행되었다. 본관 내에 특설 스튜디오까지 차려가며 실시간으로 개표를 중계했다.(당시 영상)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에는 1번 노태우부터 8번 백기완 후보까지 총 8명의 후보가 있었지만, 전광판에는 5번 이하 군소후보는 의미없다 생각해서였는지[71] 1번 노태우, 2번 김영삼, 3번 김대중, 4번 김종필까지밖에 안 나왔다.[72]
참고로 이 개표방송은 '전파낭비 방지' 명목으로 MBC와 동시방송을 했다.
그리고 이 1987년 대선 개표중계 방송은 컴퓨터 조작설이 나오기도 했는데, 이유인즉 타 후보는 정상적으로 표가 늘어났는데 유독 특정후보의 표가 늘었다 줄었다 하는 현상 때문이었다고. 덕분에 13대 국회에서 조사하기도 했지만 결국 실수였다는 결론만 난 채 흐지부지되었다.
이후 1992년 총선과 대선에서 KBS1은 무광고로 개표방송을 진행했고[73], 15대 총선 개표방송에선 (당시로서는)나름대로 파격적으로 6시가 딱 되자마자 바로 지역구 당선자 예측보도를 했다. 하지만 KBS는 그 예측조사가 빗나가면서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1997년 15대 대선개표방송때는 NHK BS-1이 KBS의 개표중계를 생방송으로 받아 내보냈다. 당시 붙었던 후보는 이회창-김대중-이인제 후보. 이 방송에서 KBS는 전 보도국 기자들에게 PDA단말기를 들려 현장으로 보내고[74] 그래픽실에서는 소위 '주유소 미터기' CG를 선보여 타 방송사 싸대기를 때렸다.
하지만 MBC에서 6시 시보 직후 발표한 예측조사[75]를 발표한 게 맞아떨어져 KBS에서 아쉬워했다는 후문이 있다. 선거운동 기간중에 (여론조사 상으로)김대중 후보와 이회창 후보간의 접전이 계속 이어지자 15대 총선 예측조사의 악몽을 기억하던 당시 방송3사에서 협의를 해서[76] 예측조사를 보도하지 말자라는 결의를 냈는데, 선거날 당일 MBC에서 이 결의를 어기고 예측조사를 발표했고 그대로 적중하고 만 것이었다. 이에 KBS와 SBS는 노발대발하면서 MBC를 까는 보도를 하고 이득렬 당시 MBC 사장이 사과하면서 이 사건은 흐지부지 마무리된다.
2000년대 들어 KBS1의 선거방송은 타사 대비 유의미하게 높은 시청률을 계속 기록하고 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광고 없이 이어서 중계한다는 점이 매우 큰 것으로 여겨진다. 이외에도 KBS는 타사보다 좀 차분하게 방송하기도 하고, BBC의 선거방송인 Election Night를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하는 등[77] 선거방송기획단을 빡세게 꾸려서 대응한다. 다만 MBC, SBS 등 후발주자들이 화려한 볼거리 많은 선거방송을 기획하고 시청자들에게 "약 빤 방송'이라며 반향을 크게 얻자, KBS도 대선주자 마라톤 같은 풍자형 징글을 도입하는 추세이기도 하다.
4.3. 86 서울아시안게임/88 서울올림픽 주관방송사
KBS는 1986 서울 아시안 게임과 2년 후 1988 서울 올림픽 주관방송사를 맡으며 중계 기술이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축구 같은 주요 종목조차도 제대로 된 코멘테이터가 없이 아나운서가 대충 했을 정도.현재 인터넷에서 구할 수 있는 KBS의 서울 올림픽 개막식 자료를 보면, 1TV와 2TV가 모두 개막식 중계를 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도 2TV에서 1TV를 수중계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중계진이 다르다. 당연히 경쟁사인 MBC도 개막식을 중계했으니 사실상 전 채널이 개막식을 중계한 셈.[78]
요즘은 그렇지는 않고 개막식이나 폐막식은 1TV로만 중계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1TV 서울올림픽 개막식 영상. 당시 중계 캐스터는 서기원 아나운서이다. 식전행사 앞 뱃놀이 같은 부분이 좀 잘렸지만 화질이 대단히 선명하다. 88년 당시 영상인데 주사선 노이즈 하나 없이 쨍한 화면에 풀 스테레오.[79] KBS의 기술수준이 대단히 향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당시로부터 불과 5년 지난 시점이다.(!) 해당 항목의 영상 화질과 중계기법을 비교해보면 이러한 수준향상이 더욱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2TV 중계에선 캐스터는 이창호[80] 아나운서와 정미홍 아나운서.[81] 이창호는 아침 인기 프로그램인 '전국일주'[82]를 수 년간 중계하던 중견 아나운서였다.
- 개막식(1/3) 식전행사 및 개회선언, 선수단 입장
- 개막식(2/3) 선수단 입장 및 올림픽기 게양, 성화 점화. 1시간 9분경 손기정 옹이 주자로 들어오는 것이 보인다. 대단히 역사적인 장면이지만 어째 현 세대들은 이 직후 있었던 비둘기 통구이만 떠올린다...
- 개막식(3/3) 식후행사. 스카이다이빙, 태권도, 굴렁쇠, 고싸움(고놀이), 손에 손잡고 등 현재 중장년층들이 올림픽 하면 기억하는 장면들은 다 이 부분에 담겨 있다. 또한 이 세 번째 영상에서 보면 스카이다이빙 장면에서 "KBS는 특수 카메라 2대를 동원해 이 장면을 시청자 여러분께 생생히 전달해드리고 있습니다"란 멘트를 하는 것에서 KBS 중계임이 확인사살된다. 그리고 영상 베댓에는 당시 점프했던 외국 카메라맨이 댓글을 달아놓았다.
이 시기를 전후해 KBS의 스포츠중계는 야구의 하일성 해설위원을 비롯하여 표영준, 육상의 서기원[83] 등 전설적인 캐스터들의 시대를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서울올림픽의 전세계 중계권은 미국의 NBC에 있었고, NBC가 상당히 편향적 보도를 했기 때문에 대학가에서 이에 반발하는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84]
이 당시 지은 국제방송센터(IBC) 건물은 현재 KBS 신관으로 쓰고 있으며, 보도본부가 이 건물 3층에 입주[85]해 있다.
4.4. 남북 방송교류 시도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본사는 북한 조선중앙텔레비죤과 공동으로 백두산-서울-한라산 3원 생방송 <백두에서 한라까지>를 제작해 9월 12일 정오부터 4시간 10분 동안 남과 북의 생활환경을 브라운관에 내보낸 적이 있었다.[86] 2001년과 2002년에는 조선중앙TV 스튜디오에서 9시 뉴스를 제작하기도 했고 2003년에 <평양 노래자랑>을 공동제작했다.[87] 2002년 KBS 대하드라마 제국의 아침 1회 도입부에서 김상중 등 연기자가 눈 덮인 백두산 천지에 올라가서 찍었으며, 2007년 사극 <사육신>도 조선중앙텔레비죤과 공동제작했다.2008년 이후 남북 관계 악화로 인해 남북 방송 교류는 한동안 중단되었다가 2018년 8월 평양 국제 유소년축구대회 취재차 방송단이 파견되었고 뉴스 9와 생방송 아침이 좋다에서 총 3번 평양 생중계가 이루어졌다. 걸어서 세계속으로 평양편도 2018년 9월 제작되어 평양 남북정상회담 직후에 방영되었다.
5. 관련 문헌
- 한국방송 육십년사 (한국방송공사, 1987)
- KBS와 권력 (강동순 저. 서교출판사. 2006)
- 방송과 나: 영원한 PD 최창봉의 방송인생 다큐멘터리 (최창봉 저. 동아일보사. 2010)
- 그때 그 시절 KBS 이야기 (KBS사우회 편. 커뮤니케이션북스. 2011.)
[1] 기존 아날로그 TV는 도쿄 요요기 방송센터의 경우 JOAK-TV를 사용하다가 디지털이 되면서 JOAK-DTV를 사용하는 식으로 변화가 있었다. 여담으로 디지털이 되면서 같은 요요기 방송센터 권역이라도 군마(JOTP-DTV), 도치기(JOBP-DTV), 이바라키(JOEP-DTV)는 별도 호출부호를 부여받았다.[2] 방송의 날이 매년 9월 3일인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3] 현재도 KBS 제1채널에 부여된 호출부호는 각각 제1라디오 소래송신소 HLKA, 1FM은 HLKA-FM, 관악송신소에서 송출하는 표준FM은 HLKA-SFM, 1TV는 HLKA-DTV(아날로그 시절에는 HLKA-TV)이다. 이는 NHK도 마찬가지어서 NHK 도쿄 요요기 방송센터는 전부 일본 최초의 호출부호인 JOAK로 묶여있다.[4] 다만 1997년 이전까지는 그렇게까지 빡빡하지 않았는지 1라디오 AM(표준방송)은 HLKA, 1라디오 표준FM과 1TV는 HLCK, 1FM은 HLQK를 사용했다. 최소 1997년 중반부터 전부 표준방송 호출부호를 기준으로 묶인 것으로 추정.[5] 전쟁 시 가장 먼저 접수되는 곳 중 하나가 방송시설이었음을 생각하면 파괴 또는 소실되는 것은 당연하다 할 수 있다. 전쟁 초기 서울 철수 당시 피난가면서 연희송신소를 파괴하지 않는 실수가 일어나 북한군이 몇 주 동안 프로파간다 방송에 써먹기도 했다.[6] 이미 한국필름보관소(현 한국영상자료원)가 1974년부터 1990년까지 같이 입주했고, 공연윤리위원회는 1976년부터 1986년까지 같이 입주하기도 했다.[7] 한국영화교육원(현 한국예술원)은 2006~2010년, 서울신문STV(현 서울STV)는 2010~2020년, 광고기획사 더크림유니언은 2012~2020년까지 각각 같이 입주.[8] 당시 6.25 전쟁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아 경제 상황이 위낙 개판이었던데다가 송출지역도 좁고 TV 가격도 비싸 방송 광고시장이 제대로 형성되기 어려웠으니, 당연히 흑자를 보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참고로 당시에 한국보다 훨씬 잘 먹고 잘 살았던 프랑스나 소련에서도 아직 TV가 일반화되기 이전이었으니 한국에 TV가 보급되는 것은 요원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9] 그래도 당시 HLKZ 회장을 맡았던 황태영은 직원 인건비라도 보태볼려고 노력을 했었지만 얄짤없이(당연히 국내에서 TV를 생산하던 시절이 아니라 당시 TV는 죄다 외제품이었다.) 고액의 소비세가 붙는 바람에 안 그래도 비싼 TV가격이 더 비싸져서 고위급 공무원이나 재벌급 부자들이 아니면 가질 수 없는 물건이 되었다.[10] 그는 생전에 자기 자신을 항상 '장 기자'라고 불렀다.[11] 전기누전보다는 난방상 실화로 추정.[12] 이 방송은 KBS TV가 개국할 즈음인 1961년 10월 15일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13] 한국 초창기 방송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최창봉 전 MBC 사장의 회고록 '방송과 나'에서 KBS 개국 당시 이야기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14] 실제로 국영TV방송국의 인원을 모으는 과정에서 방송 관계자들을 반강제적으로 끌어들였다고 한다.[15]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1960년대까지만 해도 1차 산업의 비중이 높았다.[16] 거기에 당시로서는 시청료가 엄청 비싼 것도 한몫 했다. (월 100원)[17] 출범식 생방송 자료는 KBS 영상자료실에 남아 있으며, 2020년 9월 3일 KBS1 《다큐인사이트》 '모던코리아: 정성을 다하는 국민의 방송' 편에서 자료화면으로 썼다.[18] 소위 '광주대단지사업'(현재의 성남 구시가지)의 원래 계획이 좌초되며, 아예 속편하게 한강 공유수면 매립을 선택한 것. 당시 종로-을지로1가 일대를 재개발하며 이주민들을 수용할 곳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후 목동대단지 등 서울시가 추진한 대규모 택지사업 중에 잡음 없었던 것이 없었다.[19] 현재 KBS 본관 중앙에 어정쩡하게 남아 있는 중앙홀이 그 설계상의 흔적이라고 한다.[20] 특히 한진희는 1980년대는 KBS의 간판 스타였다.[21] 옛 TBC-TV[22] 옛 동양라디오[23] 옛 동아방송. 훗날 이 주파수는 SBS로 넘어간다.[24] 옛 동양FM[25] 6.29 선언 이후 보도 기능이 부활했다.[26] 당시 정권의 시각을 그대로 반영하는 대목. 4.19 혁명 당시 HLKA(KBS)가 침묵하는 가운데 CBS는 서울 시내 상황을 속보로 전하고 있었고, DBS는 한일회담반대 데모(6.3 항쟁)를 15분마다 생중계했던 전력이 있었다. 참고로 DBS의 뉴스는 한국에서는 아나운서의 원고낭독이 아닌 기자가 직접 리포팅하는 방식으로서는 최초였다. TV에서는 MBC 뉴스데스크가 최초.[27] 다만 현 KBS 제3라디오는 구 KBS 제3라디오(동양라디오)와의 연관성은 거의 없으며 주파수도 2010년 1134kHz로 변경하면서 더욱 멀어졌다. 한편 KBS 라디오서울(구 DBS 동아방송)의 주파수는 1991년에 SBS로 넘어가서 SBS 러브FM이 되었다.[28] 참고로 신문-방송 겸영문제는 민주화 이후 언론계와 정관계에 갈등을 낳아 2009년 '미디어법 개정 사태'를 불러왔고, 통폐합 피해 언론사들은 미디어법 개정 덕에 종편으로 부활했는데 특히 JTBC는 KBS2가 된 과거 TBC-TV의 부활을 케치프라이즈로 했으며 또한 채널A는 예전 동아방송이 하고자 한 TV 채널 개국의 꿈을 2011년이 돼서야 이뤘다.[29] 참고로 KBS-2TV에서도 블록광고를 했으나, 광고가 잘 안팔린다는 이유로 1982년 1월 25일부터 프로그램에 직접 광고를 하는 방식으로 변경했다. 관련기사 블록광고 시절의 1981년 KBS 2TV 방송자료를 보면 엔딩 제공 크레딧 없이 프로그램 끝났고 바로 방송사 ID로 넘어갔다.[30] 컬러TV 시청료를 결정할 때 경제기획원에서 1100원안을 제시했고, KBS 측에서는 2,500원안을 제시했는데 KBS 측의 로비로 인해 KBS안이 승인되었다.[31] 물론 민영방송도 이런 방식의 광고를 안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32] 조선일보 출신의 허문도 씨를 끌어들여 정권 나팔수를 시킨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의외로 TBC석간의 봉두완 씨를 국회의원으로 끌어들이는 등의 이야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물론 반쯤은 강제였겠지만 말이다.[33] 게다가 전두환 전 대통령은 불행 중 다행으로 자신이 이런 쪽으로 잘 모른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던 듯하다. 정권과 충돌하지만 않으면 의외로 풀어줬던 듯. 초기 KIST나 경제기획원이 자유도를 가질 수 있었던 이유.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때 순국한 고 김재익 수석이나 서석준 부총리 등이 이에 해당된다. 물론 인구정책도 이들 전문가들의 말을 따르는 바람에 나중에 우환을 제공하게 되었다는 것은 안 비밀[34] 대형 4대 네트워크(NBC, CBS, ABC, FOX)가 모두 민영이며, 수백 개의 지역단위 방송사나 케이블로 엮여 있다. 공공서비스는 PBS나 NPR같은 별도의 독립채널에서 제공한다.[35] 대표적으로 BBC는 원래 영국 본토 및 식민지(National and the Empire Service)에 뉴스와 각종 콘텐츠를 '공급하는' 개념이었다. 이후 ITV가 나타날 때까지는 독점적 위치에 있었고, 지금도 BBC는 영국 내각 산하의 '방송위원회'가 운영을 맡고 있다.[36] 독일도 마찬가지로 전쟁 후 라디오국을 통폐합해 만든 ARD가 있고, 독점을 막기 위해 제2공영으로 TV만 있는 ZDF를 두고 있다. 연방국가인 독일에서 '단일 뉴스네트워크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주로 외신들은 ZDF를 인용한다. ARD의 TV 채널인 "Das Erste"(영어로 The First라는 뜻 쯤 되시겠다)에서 방송되는 Tagesschau와 경쟁을 하지만, ARD와 ZDF는 공영방송으로서 협력 사업도 많다.[37] 제4공화국하에서 여러 TV(라고 해봐야 당시엔 채널이 하나뿐이었지만)-라디오 방송국들이 RDF로 통합되었고 1949년에 RTF(라디오 텔레비전 프랑스)라는 공영방송사로 명칭을 변경, 드골정부하에서 ORTF(프랑스 텔레비전 라디오 공사)로 재편되었다가 1975년 방송개편으로 ORTF를 해제하면서 방송국들이 산산조각이 났다. (TF1, A2, FR3, 라디오 프랑스, RFI 등) 그러다 1980년대 L5, M6이라는 민영방송이 개국하고 TF1이 민영화되자 광고판매율 저하와 과도한 경쟁으로 위기에 내몰린 프랑스 공영방송들이 1992년 헤쳐모여를 한 게 지금의 France 2, 3, 5, 라디오 프랑스 (국내), 프랑스 메디아 몽드 (국제방송) 등이다. 그리고 텔레비전 방송국 들은 2000년 프랑스 텔레비지옹으로 정식 재통합. 참고로 France 5는 한국의 경인방송처럼 민영방송(라쌩크)이었다 폐국하고 한동안 비어있던 자리에 새로 만든 것.[38] 전국적으로 CCTV 계열의 채널과 지역 방송 그룹(베이징의 경우 BTV 계열)의 채널들이 경쟁하는 형상을 보이고, 그 외에도 여러 지방 군소채널이 등장하고 있지만 봉황 TV나 스타 계열 (둘 다 홍콩에 본사가 있는 미국의 뉴스 코프 계열) 등을 제외하면 중국 매체는 사실상 관영이다.[39] 당시 편집회의에서 담당자가 "대한항공은 민항기잖아?"라며 전통의 청진동 뒷골목 순행을 탑으로 올린건 매우 유명한 비화다.[40]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이 민영방송 소유 관련 규제를 해제하면서 이렇게 되었다. 그래서 일본 MBS가 나오지 않는 일본 지방도시에서는 한국 웹에 건담 시드의 최신 방영정보가 올라오는 것을 보고 분통을 터뜨렸대나 어쨌대나... (물론 그 이전에도 신문사가 방송에 관여한 일은 많았으나, 지금처럼 1신문사 1방송국 1채널 체제는 아니었다고.)[41] 단, 일본식은 케이블 종합편성채널이 아니라 지상파 민영방송국이므로 굳이 따지자면 미국과 유사한 1공영+다민영으로, 신문사가 소유 주체로 관여한다는 것만 조금 다르다. 각종 종편이 난무한다는 것은 '대만식' 구조에 더욱 적절한 표현일 듯.[42] 삼성그룹 계열 TBC, 동아일보사 산하 동아방송국(DBS, 이쪽은 라디오만)가 생기면서 한동안은 진짜로 일본식 구조가 섞여 있었다. 종편채널들이 진출한 지금과는 좀 다르지만.[43] 1989년 이후 현행법상 명칭은 '수신료'이나, 당대 문헌에서 '시청료'란 표기를 많이 썼다.[44] 지금이야 2500원이 짜장면 한 그릇값에도 못미치지만, 1인당 국민소득이 2000$대에 불과했던 시절임을 고려하면 당시 기준으로 3~4만원 정도의 가치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45] 다만 그 이전에도 시청료 납부를 안하던 가정수가 그리 적은 편은 아니었다. (수신료를 아낄려고 TV 없는 척하는 가정이 꽤나 많았다고.) 하지만 "사회운동"으로 본격적으로 조직화 되었던건 이 시기.[46] KBS와 권력(강동순 저) 참조.[47] 제도 자체는 1983년에 서울 일부 지역, 경북 경주에서 시범 실시했다.[48] 그나마 이것도 통합공과금제로 끌어올린 것으로 그 제도가 시행되지 않는 지역의 시청료 징수율은 20~30%대에 불과했다고 한다.[49] 정확하게는 1986년에 아시안 게임 효과에도 1TV 광고축소로 상당히 손해를 봤지만(광고액수자체는 늘었지만 MBC에 비하면...) 1987년도에는 서머타임 실시(방송종료 시간이 1시간 늦쳐졌다. 물론 도표상으로만 그렇고 정확하게 말하자면 방송 시작 시간이 1시간이 앞당겨지고 오전방송도 1시간이 앞당겨진셈이 되었지만)와 10월 토요일 낮방송 실시로 2TV의 광고수입이 증가하고 1988년도에는 올림픽 특집 프로그램과 중계 프로그램이 대거 편성되면서 2TV는 물론 1TV의 광고수입이 급속히 늘었고, 그 이후에는 1990년대 초반까지 방송시간의 연장이 이루어지지 않음에 따라 사실상 100% 판매시대에 접어들게 되면서 적자를 보지 않을수 있었던 것.[50] 재미있는건 그럼에도 옆 방송사보다 광고수입이 적었는데, 이는 1TV의 광고량이 적은데다가, 2TV의 광고료가 MBC보다 싼 영향이 컸다.[51] 참고로 6월 항쟁당시 KBS의 편파보도에 분노한 시민에 의해 KBS부산, KBS대전, KBS순천 등 일부 지역국 건물이 불에 타거나 유리창이 깨지는 등의 피해를 봤다고 한다.[52] 2TV와는 달리 풀버젼 광고 10편씩 나왔으면(이런 광고방식을 블록광고라고 한다.) 또, 타 채널과 달리 방송 오프닝이나 엔딩이 나가지 전에는 방영하지 않았다. (단, 스포츠 중계 프로그램과 특집 프로그램은 제외.)[53] 수신료 징수율이 시청료 납부거부운동의 후유증으로 인해 50%대에 머물렀고 무엇보다도 인건비가 급속하게 상승하면서 징수 비용이 급증하면서 재정상으로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 이 때문에 징수율을 크게 높이고 동시에 인건비도 절약하고 KBS-1TV의 공익적이미지를 심어서 일석삼조의 효과를 노렸던 것이었다.[54] 다만 그 덕분에 1TV의 시청률이 높은데 2TV의 시청률이 낮을경우엔 경영상으로 큰 손해를 보게 된다는 문제점이 발생했다. 정확하게는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2TV의 광고판매율이 90%대를 기록해서 1TV 광고가 폐지되었다 해도 방송시간 확대로 메꾸면 되니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그 이후에 케이블TV와 인터넷의 대대적인 보급과 낮방송 시행 등 방송환경 변화로 인해 2TV의 광고판매율이 크게 낮아지면서 큰 문제가 되었던 것. 정연주 사장이 쫓겨날때 정권과 당시 KBS 이사회에서 정연주 사장을 내쫒은 사유로 KBS 재정을 방만하게 운영하서라는 드립을 날릴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2007~2008년 상반기에 1TV의 시청률은 괜찮은데 2TV의 시청률이 저조해져서 광고 수입도 같이 줄었기 때문이었다.[55] 다만 홍두표 사장 부임 후반기 들면서 점차 보수화되었다. 1995년 상반기의 대구 지하철 공사장 가스폭발 참사때의 일이나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당시 출구조사(엄밀히 말하자면 전화조사로 진행되었으니 "출구조사"는 아니긴 했지만) 발표를 진행시킬 계획을 세우다가 정작 선거당일에 출구조사 발표를 안한일을 예로 들수 있다.[56] 하지만 홍두표 사장은 KBS 사장 시절에 신동아그룹으로부터 청탁을 받은 것으로 드러나 1년만에 관광공사 사장직에서 불명예 퇴진하고 콩밥을 먹게 된다. 참고로 이 때 KBS에선 그래도 재임 후반기 시절의 보도 프로그램에 대한 태도를 제외하면 그리 큰 악평을 받거나 하진 않았기에 이 사건에 대해서 소극적으로 보도를 했다나 뭐라나... 이후 JIBS 회장으로 방송가에 복귀.[57] 홍두표 사장 시기 때도 2TV 저녁 시간대에 뉴스 프로그램(KBS 뉴스비전 - KBS 뉴스파노라마(8시 뉴스파노라마) - KBS 뉴스 8)을 편성했지만 분량은 고작 15분 정도로 축소될 때도 있었다.[58] 사실 서기원 사장 시기에도 2TV에 기동취재 현장이라는 일일 시사 프로그램을 편성한 적이 있지만 신설 1년 만에 1TV 일요일 밤 시간대로 이동했고, 그 해 가을 개편 때 일요일 KBS 9와 통합되는 방식(KBS 9 일요현장)으로 폐지되었다.[59] 낙하산이라는 말도 있지만 애초에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서동구 사장 내정건으로 한 번 데였던지라 굳이 KBS 사장 인선과정에 개입할 의사가 없었고(그리고 일단 당시 KBS 이사진도 구성상으로 볼 때 당시 국회 다수당이 한나라당이었던 상황이기는 한데, 일단 김대중 정부 때 임명된 인사는 인사였기에 당시에는 여당성향이 조금 더 많아서 중도보수라면 모를까, 한나라당 성향의 사장을 임명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정연주는 노조에서 추천한 인사중 3명의 인사 중 한 명이었다.(나머지 두명은 이형모, 성유보) 서동구 사장이 인선되었을 당시에 떨어졌다가 서동구 사장이 낙마하면서 사내출신이기는 하지만 순응적이고 개혁적이지 않은 (정확하게는 김대중계 성향) 인사와 방송에 대해 일단 공부도 하고, 비평도 해서 자기성향은 뚜렷하지만, 사내의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개혁적인사가 경합하는 양상이었는데 노조나 사내의 목소리도 강했기 때문에 굳이 노조와 마찰을 빚기는 그랬던 이사회에서 노조 추천 인사를 사장으로 선임했는데 그 중에서 박탈된 것.[60] 다만 2008년 봄 개편에서 오락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수신료 인상이 무산된데다가 2007년 KBS 2TV 프로그램의 시청률 부진으로 적자를 기록했기 때문. 하지만 이 개편안은 오히려 시청률 더 하락하는 악영향를 끼쳤고 결국 이 해에 KBS 영업이익는 전년도(영업이익 310억원 적자) 보다 3배 더 높은 무려 935억원 적자를 기록했다. 이는 현재 창사 이래 역대 최고 적자이다.[61] 아무래도 2004년도에 공익적인 프로그램을 늘려났다가 드라마와 오락 프로그램 모두 폭망하는 바람에 대차게 적자를 봤고, 2005~2006년에는 상상플러스나 스펀지 등 예능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괜찮았고, 드라마 시청률도 그런대로 괜찮았기에 흑자를 봤지만 2006년 하반기부터 예능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점차 떨어지고, 신규 프로그램이나 드라마의 시청률도 폭망했다.[62] 2008년 정연주 사장이 해임당했을 때 KBS 노조측에서 방관했던 것도 이 때문.[63] 2003년, 2005, 2006년에 흑자를 봤지만 2004년, 2007년에 적자를 봤다.[64] 참고로 이 건은 무죄 판결받았다. 이유는 간단한데 검찰 측에서 정연주가 개인적으로 회사 자금을 운용했다는 이유를 내세운 것도 아니고 그냥 세금을 많이 냈다고 배임!을 때렸기 때문, 당연히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지 않을래야 받을수가 없었다.[65] 다만 후에 세월호 참사 당시 폭언으로 사퇴하고 나서 물귀신(?)발언으로 길환영 사장까지 물러나게 한 김시곤 전 보도국장의 증언에 따르면 의외로 이병순 사장은 전임인 정연주 사장과 함께 뉴스 프로그램 편집 과정에 그리 손을 대지는 않았다고 한다.[66] 김재철 MBC 사장 퇴진을 요구하며 파업에 돌입했다.[67] 제1노조는 보도국 위주/언론노조 산하의 제2노조와 달리 일선 제작스태프나 송출/음향/영상담당 엔지니어 등 현장인력들이 많이 가입되어 있다.[68] 2013년 한국 10대들의 사망 원인 1위는 자살(308명)이었으나, 2014년에는 운수사고(291명)가 1위 자리를 차지했다. 왜일까?[69] 게다가 교통사고 사망자는 월 500명이고, 세월호 참사는 단 몇 시간을 놓쳐서 304명이 사망했다. 즉, 몇시간 동안에 약 20일동안의 교통사고 사망자와 같은 수가 나온 것...[70] 해당 캡처사진은 대선 하루 전 보도 영상이다.[71] 그마저도 5번 홍숙자 후보는 등록무효, 6번 김선적과 8번 백기완은 도중에 사퇴했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군소후보는 7번 신정일 밖에 없었다.[72] 실제로 1백만 표가 넘는 득표를 한 후보들은 이 4명밖에 없었다.[73] KBS1의 상업광고는 1994년 폐지되었으니 이 때는 광고가 편성되던 시절이다.[74] 2010년에는 전 직원에게 갤럭시 스마트폰을 뿌렸다. 덕분에 KBS 보도국에서 트위터를 하는 사람들이 대폭 증가했고, KBS는 2010년대 초반에는 트위터 제보가 가장 활발한 방송사였고 KBS 뉴스라인 등에서는 시청자 의견을 모아 방송도 해 줬다. 심지어 시민기자상이라고 해서 상도 줬다! 지금은 다 지나간 얘기지만.[75] 당시 한국갤럽에서 조사했고, 그 내용을 보면 김대중 39.9% 이회창 38.9% 이인제 19.6%로 나왔다.[76] 말이 협의지 사실상 KBS와 SBS에서 MBC한테 예측조사를 보도하지말라고 요구한 식이었다.[77] 심지어 2012년 대선에서는 한국 실정에 별로 안 맞는 Swing-O-Meter도 도입한 적 있다. 이건 대선보다는 양당제 비스무레하게 갈라진 지형의 총선에 더 어울리는 지표다.[78] KBS 3TV는 평일 낮에는 정파.[79] 1988 서울 올림픽과 NHK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 개막식은 아날로그 HD 시험방송으로 제작되었다.[80] 바둑계의 그 분과는 관계없는 동명이인이다. 스포츠 중계와 생활프로그램 진행자로 활동해왔으며 왕종근 아나운서가 프리선언을 하며 KBS를 떠난 동안 TV쇼 진품명품을 진행하기도 했다. 2018년 타계.[81] 1988 서울 올림픽 문서 참조.[82] 현재의 인간극장 시간대에 편성되었던 전국 기행프로로, KBS 아침뉴스의 바로 뒷 시간대. 성격은 현재의 '6시 내고향'과 비슷하다. 이 프로가 폐지되던 시기 즈음에 맞물려 6시 내고향이 오후 6시대에 새로이 편성되었다.[83] 1990년부터 3년 동안 KBS 사장으로 임명된 서기원과는 동명이인이다. 아나운서 서기원은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 대형 스포츠행사의 메인 진행자로 활동했다.[84] 홍정욱의 자서전인 '7막7장'에 보면 당시 NBC 주재원 보조 알바를 했던 대목이 있다. 당시 NBC는 단시간 있었던 시위를 마치 며칠째 치안불안인 듯 과장보도를 했고 이것이 외려 대학가에 불을 붙였다.[85] 이유는 간단. "사건 일어나면 빨리 출동해야 하잖아? 본관 6층 사무실에서 언제 내려가고 앉았냐?" 라는 게 현직 KBS기자의 증언.[86] 이 방송은 <KBS 뉴스 9>, <6시 내고향>에서도 코너 형식으로 추가 편성되었다.[87] 사회자 송해는 이 방송을 통해 6.25 이후 처음으로 북한 땅을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