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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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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3. 하드웨어4. 비디오 및 오디오5. 운영 체제6. 모델
6.1. Apple II6.2. Apple II Plus6.3. Apple IIe
6.3.1. 오리지날 Apple IIe6.3.2. Apple IIe Enhanced6.3.3. Apple IIe 플래티넘
6.4. Apple IIc6.5. Apple IIc Plus6.6. Apple IIGS6.7. Apple IIe Card
7. 대한민국에서의 Apple II8. 기타9. 현재의 가치10. 함께 보기11. 외부 링크

1. 개요

1977년 Apple에서 만든 세계 최초[1]일체형 개인용 컴퓨터.

2. 역사

가장 초창기의 개인용 컴퓨터 중 하나이자 그 중에서도 가장 성공한 제품으로 1970년대 말부터 80년대 전반에 걸쳐 개인용 컴퓨터 붐을 이끈 주역이었다. 1976년에 만든 Apple I의 후속작이지만 Apple I이 초창기 개인용 컴퓨터들이 그렇듯이 이게 좀 DIY스러운 반제품 상태로 판매됐던 관계로 완제품으로 나온 것은 Apple II가 최초다.

아무래도 초창기에 나온 제품이다 보니 1980년대에 나온 후발 주자인 코모도어 64, MSX 등과 비교하면 하드웨어 성능이 떨어지는 편이었지만 성공한 선발 주자이니만큼 소프트웨어의 양과 질은 압도적이었으며 이를 밑천으로 떨어지는 성능에도 불구하고 경쟁 기종들에 뒤쳐지지 않는 수명을 자랑했다. 일례로 Apple IIe 플래티넘 모델은 1993년에 단종되었다! Apple IIe 카드는 1995년이나 가야 단종. Macintosh LC 475, 5xx가 1995년 단종되었는데 주변기기 제품으로서 그 때까지 Apple IIe 카드 라인업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Apple 내부에서도 Apple II의 뒤처지는 성능을 인지하고 있어 여러 차례 업그레이드 모델을 내놓기도 했지만 1986년에 등장한 최종 테크 Apple IIGS를 마지막으로 1980년대 중반부터는 Macintosh 시리즈로 주력 사업이 바뀌면서 우선 순위가 밀려나게 되었다. 결국 1990년 무렵부터는 그 전까지 높은 연산 성능에 비해 비쌌던 가격과 홈 컴퓨터로는 적절하지 못한 그래픽 성능 등으로 비교적 부진했던 IBM PC 호환기종이 급격하게 부상하면서 Apple은 개인용 컴퓨터의 왕좌를 내주게 되었다.

3. 하드웨어

CPU로는 'MOS 테크놀로지 6502'를 썼으며, ROM의 부트 로더에 기본적으로 Apple BASIC 인터프리터가 내장[2]되어 있어서 CP/M등의 운영체제 없이도 바로 BASIC 프로그램을 할 수 있었다. 이 'Applesoft BASIC' 인터프리터를 개발한 회사는 Microsoft였고, 스티브 워즈니악이 만든 'Interger BASIC' 인터프리터와 다르게 실수 계산도 가능했다. 그래서 정식 명칭도 Apple + Microsoft란 의미의 Applesoft BASIC. 울티마 1이 Applesoft BASIC으로 개발된 것으로 유명하다.

8비트 머신들 중에서는 가장 일찍 나온 편에 속하기 때문에(1977) 하드웨어 자체의 성능은 동급의 머신들 중에서 가장 떨어지는 편이었지만 높은 시장 점유율 덕에 다양하고 품질 좋은 소프트웨어가 많아 하드웨어 열세를 커버할 수 있었다.[3] 일례로 같은 게임이 코모도어 64MSX로 나와있는 경우, Apple II판의 품질이 저 두 기종보다 눈에 띄게 떨어졌다. 하지만 보급률에서 앞섰던 관계로 일단 먼저 Apple II로 나오고 한참 후에 타 기종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IBM PC처럼 아키텍처가 공개되어 있어서 호환 기기가 많이 출시되었지만[12], 호환 기기가 많아봤자 Apple에게 득보다 실이 컸기 때문에 그 이후로 지금까지 Apple은 폐쇄 아키텍처 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당대의 업계 최선두 주자였기에 희한한 주변 기기도 나왔는데, 80자 텍스트 확장 카드(일명 바이덱스 카드)나 모뎀, 네트워크 어댑터 등은 물론이고 별도의 프로세서를 박은 가속 카드나 보조 프로세서 카드, 심지어는 오늘날의 SSD의 조상뻘쯤 되는 램 디스크까지 있었다. 1984년의 카탈로그에서 Solid-State-Disk, 뭐?! Flash Card라는 상품명을 보고 있으면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이런 램 디스크는 몇 종류가 나왔었는데, 악명 높은 버블 메모리를 사용한 물건부터 세 시간짜리 배터리를 내장한 DRAM 램 디스크까지... 시대의 한계를 어떻게든 넘어보려는 노력은 진짜 눈물겨웠다. 단, 저런 카드들 대부분은 국내에 소개되지는 못 했고 국내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카드들은 80자 텍스트 확장 카드와 머킹보드 정도에, CP/M 카드이다.[13] 몇몇 호환 PC 제조사들은 이 CP/M 카드를 본체에 내장하여 듀얼 CPU 기기라고 판매하기도 했다.

확장 슬롯은 총 8개 (0~7)가 준비되어 있는데 호환 제품에 따라서는 확장 카드를 마더보드에 내장한 경우가 많아 8개가 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확장 슬롯에 연결된 카드의 기능은 PR# + 확장 슬롯 넘버 명령어 입력으로 활성화시키는데[14] 이유는 모르지만 확장 카드 종류 및 기능에 따라 특정 번호의 슬롯을 사용하는 게 일종의 관행이었다. 스티브 잡스는 확장 슬롯이 8개나 늘어서있는 모습이 보기 싫다고 2개로 줄이자는 의견을 내놓았지만 스티브 워즈니악은 8개를 2개로 줄여서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없다는 이유로 잡스의 의견을 무시했는데 결국 그 확장성이 신의 한 수가 되었다.[15]

확장 슬롯이 8개였다고 하지만 슬롯별로 연결하는 하드웨어는 거의 관용적으로 정해져 있다.

사실상 용도가 고정된 슬롯 [16][17]
위 3종 보다는 덜하지만 관용적으로 따르는 슬롯 배치

4. 비디오 및 오디오

비디오 출력 단자는 RCA 규격 컴포지트 비디오 출력 단자이다. Apple II는 컬러 영상으로 출력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당시 애플 로고의 무지개색 사과가 컬러 기능이 있음을 홍보하는 것이다.

그래픽 모드에서는 280×192 해상도에서 4색[21]으로 출력할 수 있었고, 텍스트 모드에서는 가로 40자, 세로 24줄로 16색을 지원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8비트 PC들이 지원했던 준그래픽 모드(semigraphics mode)에서는 7×4 해상도의 블럭을 40×48 블럭들로 표현할 수 있었고, 여기서 16색을 지원했다.

허나 당시 컬러 모니터는 매우 고가품이라 대부분의 사용자는 단색(모노크롬) 모니터를 이용하였다. 모노크롬 모니터는 단색 계조(Greyscale) 표현조차 지원하지 않는 매우 단순한 물건이었지만, 대부분의 개발자들이 단색 출력을 염두에 두고 프로그램을 만들었기 때문에 사용이 불편하지는 않았다.

사실 Apple II의 컬러는 '컴포지트 아티팩트 컬러'라는 기법으로 표현되었다. 당시 아타리 8비트 컴퓨터 시리즈나 MSX 등의 8비트 컴퓨터들은 저렴한 사양에도 컬러를 표현하거나 더 많은 컬러를 표현하기 위해 상세한 기법은 조금씩 달랐어도 흔하게 사용되었다. 심지어는 CGA에도 사용되었다. 애플 II의 컴포지트 아티팩트 컬러 기법은 스티브 워즈니악이 고안했으며 자세한 내용은 링크를 참고하자.#

컬러 모니터가 매우 비쌌기 때문에, 대용으로 TV를 사용하기도 했다. 당시 컴포지트 비디오를 TV 안테나용 동축 케이블에 연결할 수 있는 변조기가 흔했기 때문이다. 물론 화질은 너무 흐려 텍스트 모드에서 글 읽기가 불편할 정도로 떨어졌다. 허나 이를 VCR에 연결해 컴퓨터 화면을 녹화하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었으며 이는 당시 컴퓨터 화면의 녹화에 이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단 중 하나였기에, 교육용으로 널리 이용되었다.

Apple II는 기본으로 내장 스피커로 오디오를 출력할 수 있었는데, 부팅 또는 오류 발생 시 삑 소리를 내는 기능밖에 없는 단음 스피커였다. 허나 스피커 소리의 피치를 조절해 음성을 출력하는 게임(캐슬 울펜슈타인 등)이 만들어지기도 하였으며, 머킹 보드 같은 확장 슬롯에 장착하는 사운드 카드를 이용해 다채널 PSG 음악을 재생할 수 있다.

5. 운영 체제

하드웨어 목록에서 상술했 듯이 Apple II는 ROM에 BASIC 인터프리터를 집어넣어 별도의 운영 체제 없이도 동작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1978년 Apple에서 디스크 II 출시 이후, Apple 역시 다른 컴퓨터 회사들과 같이 운영 체제를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에 넣어 보급하기 시작했는데 <Apple DOS(Disk Operating System)>라는 이름으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Apple DOS는 버전 3.0을 시작으로 1980년까지 3.3까지 업데이트했다. Apple DOS 최종 버전이었던 3.3에서는 파일 시스템을 개선해 디스크 포맷 용량이 증가했으며(113.75 KB→140 KB) Apple II에 있었던 슬롯 0에 'Apple II 랭귀지 카드'나 '펌웨어 카드'를 꽂으면 Integer BASIC 인터프리터와 Applesoft BASIC 인터프리터를 선택 가능할 수 있게 만들었다.

1983년에 Apple은 Apple DOS를 Apple III에 쓰였던 운영 체제 SOS를 참고해 만든 <ProDOS>로 대체했다. 이후 ProDOS는 Apple에서 오랜 기간 동안 발매했던 Apple II의 주력 운영 체제가 됐다. 다만 ProDOS는 오랫동안 사용되었던 것이 원인이었는지, 버전에 따라 구동 가능한 Apple II 모델에 제한이 있었다.

국내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서브 디렉토리 사용 및 파일 관리 기능 등에서 향상이 있었으나 국내 애플 II 사용 환경에서는 Apple DOS 3.3에 비해 큰 이점이 없기 때문. II+가 대다수고 IIe는 희소했으며, II용 고밀도 디스켓 등이 거의 보급되지 않은채 140KB 단면 FDD만 보급되었기 때문에 향상된 기능이 별로 이점으로 작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리지널 애플 II 외에 국내 생산 호환기종은 별도의 꼼수 없이는 동작이 불가능한 상태이기 때문이다.[22]

6. 모델

6.1. Apple II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Apple_II_tranparent_800.png
1977년 6월 10일 발매. 발매 당시의 가격은 1298 달러였으니 (당시 한화 약 63만원) 당시 물가를 생각하면 꽤 비쌌던 편으로[23] 이 시절에 컴퓨터라는 물건 자체가 아무나 쓰는 물건이 아니라서 더욱 그랬다.[24] 최초의 II 시리즈이며 스티브 워즈니악이 하드웨어 설계, Integer BASIC 인터프리터까지 다 만들었다. 기본 구조는 이 때 다 완성되었다고 봐도 좋다. 부팅할 때 나오는 타이틀에 APPLE ][ 라고 나왔기 때문에 클래식 컴퓨터 매니아들은 지금도 Apple II의 II를 ][로 쓰는 일이 많다. 기본적인 사양은 대략 다음과 같다.

6.2. Apple II Plus

파일:external/tanrunomad.com/1iiplus.jpg
1979년 출시. Microsoft가 개발한 Applesoft BASIC 인터프리터를 ROM에 내장했다.Microsoft와의 악연이 시작된다 CPU는 동일한 MOS 테크놀로지 6502 1MHz지만 그간에 RAM 가격이 많이 떨어져서(...) 16 KB 메모리를 기본으로 장착하고 나올 수 있었다. 가격도 1195 달러로 조금 인하. 또한 RAM 가격이 떨어지면서 메모리 32 KB 추가하는 가격도 저렴해졌고, 이때쯤 되면 48 KB 버전도 한 200 달러 정도 추가하면 살 수 있었다.[30] 이후로도 메모리 가격이 계속 떨어진 덕에 얼마안가 48 KB 버전 가격이 1100~1200 달러 전후에 팔리게 되면서 사실 상 48 KB가 기본 사양이 되었다. 그 밖의 기본적인 스펙이나 성능은 Apple II와 거의 동일하다.

6.3. Apple IIe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50px-Apple_iie.jpg
1983년 출시된 II Plus의 업그레이드 모델. e는 enhanced의 e다. Apple IIe야 말로 Apple II 시리즈의 스펙의 완성형이라 할 수 있다. 최종 테크인 Apple IIGS는 하위 호환이 가능할 뿐 새로 추가된 기능들은 기존의 Apple 시리즈와 많이 이질적이었기 때문. 한국에서는 Apple II Plus 계열 클론이 압도적이었고 뒤늦은 1988년께에 와서야 MR-128을 비롯한 Apple IIe 호환 기종이 들어와서 그다지 보급률이 높지 않았지만, 미국에서는 가장 많이 보급된 모델이 IIe였기 때문에 미국에서 Apple II 하면 떠올리는 기종은 한국과 달리 대개 Apple IIe다. Apple III의 기록적인 폭망(...)으로 맛이 간 Apple을 구원한 것이 바로 Apple IIe였다고 한다. 여전히 동시대의 경쟁기들에 비하면 비교적 떨어지는 성능을 지니고 있었지만 기존의 넓은 Apple II 인프라를 그대로 이용할 수 있으면서 Apple IIe 전용 소프트웨어는 이전보다 크게 나은 성능을 제공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10년간 판매된 기종이라 버전이 나뉘지만 스펙 상 크게 2가지로 나눈다. 상세 스펙은 Enhanced 모델을 기준으로 기록한다.

6.3.1. 오리지날 Apple IIe

기존 50핀 Apple II 버스 슬롯 외에 60핀 보조 슬롯 등장. 여기에 메모리 확장 카드나 80자 텍스트 카드를 장착했다. 초기 모델은 고해상도 그래픽도 안됐다. Apple IIe임에도 불구하고 컴퓨터를 켜면 APPLE ][라고 떴다고. 초기형 IIe 스펙을 보면 소문자 입력 가능한 Apple II Plus와 차이가 없긴 하다 다만 내부적으로는 크게 변화가 있었는데, 오리지널부터 내려온 수십개의 TTL과 2KB 메모리로 이루어진그래서 아무나 다 베낄 수 있던 보드에서 드디어 탈피해, 입출력 관련 전용칩과 8KB 메모리로 재설계하여 훨씬 깔끔한 레이아웃을 갖게 되었다. 물론 재설계를 통해서 64KB 이상의 메모리를 탑재할 수 있게 되었고, 이때 얻은 확장성이 향후 수년간 II 시리즈의 명맥을 이어주었으니 그 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향상된 기종이기는 하다. 그리고 구성 부품이 적어져 컴팩트해진 내부 구조를 바탕으로 다음해 IIc가 등장했으니 여러가지로 의미가 큰 버전이 아닐 수 없다. 칩이 대폭 줄어든 점을 감안하면 아마 소비 전력도 줄었겠지만, 이 당시는 그런거 신경쓰던 시절이 아니라......

6.3.2. Apple IIe Enhanced

1985년 출시된 Apple IIe의 발전형. 보통 Apple IIe라고 하면 이 인핸스드 사양을 가리킨다. Enhanced가 두 번 나오는 건 무시하자 Apple IIc의 스펙을 일부 적용하여 CPU가 CMOS 버전인 65C02로 교체되는 등 비교적 변경점이 적었던 Apple IIe에 비해 사양 변경이 제법 있었다. 오리지널 Apple IIe를 Apple IIe Enhanced 버전으로 업그레이드해 주는 키트도 발매했다.

6.3.3. Apple IIe 플래티넘

파일:768px-Apple_Platinum_IIe.jpg

1987년 1월에 출시된 Apple IIe의 마지막 버전. 키보드에 키패드를 추가하고 Frog 디자인의 스노우 화이트 디자인 언어를 적용해 Macintosh처럼 바뀌었다.[35] 또한 Apple IIe 보조 카드의 기능이었던 80자 텍스트와 RGB 카드를 이미 내장했다. 참고로 1993년 11월 15일까지 생산해, 가장 마지막까지 생산된 Apple II 시리즈이다.

6.4. Apple IIc


파일:Apple_IIc_with_monitor.jpg

1984년 4월 24일에 발매했다. c는 Compact의 약자로 본체 크기가 지금의 13인치 노트북 정도의 크기로 작아지고 여러 인터페이스 카드를 내장 시킨 휴대용 올인원 컴퓨터 모델이었다. 모니터 별도에 전원 어댑터가 벽돌만 하고 배터리도 없다. 들고 다닐 수 있다는 데 의의(들고 다니라고 핸들도 달려 있다!!)를 뒀다. Macintosh 출시 몇 달 후 Apple II Forever 행사에서 발표했다. 의도된 것이었다고는 하지만 Apple II를 쓰는 이유라 할 수 있는 확장 슬롯이 아예 없어서 실패작 취급을 받았다.[37] 1986년에 Vtech에서 발매한 복제품 Laser 128은 Apple II와 같은 규격의 확장 슬롯 하나를 외부에 설치했으며, 여기에 연결해서 두 개의 슬롯을 제공하는 확장 슬롯 유닛도 발매되었는데, 이 슬롯들은 5, 7번으로 인식되어서 머킹 보드등을 사용할 수 있었다. 당시 Vtech는 Laser 128 광고에 '확장 슬롯이 없는 컴퓨터는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뒤쳐지는 막다른 골목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은 알고 계셨습니다.'[38]라고 했다.
영화 2010: 우주여행에 미래형 컴퓨터로 등장한다. 박사가 Apple빠

6.5. Apple IIc Plus


파일:Apple_IIc_Plus.jpg

1988년 출시된 Apple IIc의 업그레이드 모델. 대만 Vtec의 Laser 128시리즈[42]와 경쟁하기 위한 모델이라는 얘기가 지배적이었다. Apple이 신발매한 최후의 Apple II 모델이다. 1990년 11월 단종.

지금 시점으로 보면 뜬금포 같은 기종이다. 이미 Apple은 Macintosh에 집중하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Vtec은 Apple IIc Plus에 대항하기 위해 Laser 128EX, Laser 128EX/2 모델을 출시하였다.

6.6. Apple IIGS

파일:external/oldcomputers.net/appleiigs.jpg

1986년 9월 15일 출시. 발매 초 가격은 999 달러. 오히려 싸졌다?! 전술했듯이 Apple II 시리즈 중에서는 좀 이질적인 라인업이다. 외형부터가 기존의 Apple II보다는 Macintosh II 등을 연상하게 하는 디자인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ADB(Apple Desktop Bus)가 가장 먼저 도입된 컴퓨터다.

6.7. Apple IIe Card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20px-Apple_IIe_Card.jpg

1991년 3월에 출시. Macintosh LC 시리즈용 하드웨어 에뮬레이터 확장 카드. 이것을 Macintosh LC PDS(Processor Direct Slot)에 장착하고 IIe 아이콘을 실행하면 Apple IIe Enhanced로 부팅된다. 교육용 Apple II 소프트웨어를 다수 갖고 있어서 Macintosh 도입을 망설이는 교육 기관에 Macintosh를 팔기 위해 개발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7. 대한민국에서의 Apple II

한국에서 가장 많이 보편화 된 기종은 Apple II Plus이다.[51] Apple II 클론 모델들은 1983년을 기점으로 세운상가의 컴퓨터 매장에서 만들어 많이 보급했다. 물론 그 이전인 1980~1982년에 세운상가에서 Apple II 클론을 만들기는 했으나 이쪽은 대부분 구형 II. 1983년이 기점이 된 이유는 그 해 전두환 정부에서 '정보산업의 해'로 선언하고 8비트 컴퓨터 5종을 교육용 컴퓨터로 지정하여 학교에 보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해당하는 5종의 컴퓨터에는 Apple II Plus 호환기종인 삼보 트라이젬 20이 포함되어 있었고 차후의 사업에서도 Apple II 호환기는 교육용 컴퓨터로 지정되어 학교에 보급했다.[52]

1980년대 초중반부터 업무용/교육용/게임용으로 많이 팔린 기종 중 하나로서, 1980년대 컴퓨터 학원이 생기고 개인용 컴퓨터 붐이 일어나면서 세운상가제 Apple II Plus 클론의 보급이 늘어났다. 한국에 팔린 Apple II는 99.9999% 한국에서 제조된 클론이거나 혹은 대만산 호환 기종이었으며 오리지널 Apple II는 그 당시 거의 볼 수 없었다.[53] 역설적으로 오리지널 Apple II 시리즈는 근래 들어 한국에 더 많아졌는데 아래에 소개된 동호회에서 이베이 등을 통해 중고품을 낙찰받아 수입하기 때문. 참고로 스티브 잡스 사후 오리지날 Apple II는 이베이 시세는 이전보다 비싸진 것은 물론이고 매물 자체가 씨가 마른 상황이다.

당시 문교부(현재의 대한민국 교육부문화부)가 선정한 교육용 8비트 컴퓨터 중 하나이기도 했으나 대기업에서는 대우전자 IQ-1000/2000을 필두로 하는 MSX 계열, 삼성전자의 SPC-1000/SPC-1500, 금성 패미콤 시리즈 등 일본산 컴퓨터의 클론 제품을 중심으로 생산하였고 Apple II 계열은 거의 생산하지 않았다. 효성컴퓨터[54] PC-8000 같은 대기업제 Apple II 클론이 아주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드물었고 기본적으로 Apple II는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한 중소기업 진영의 메인 기종이었다. 오늘날의 삼보컴퓨터를 있게 한 히트작 '트라이젬' 시리즈도 Apple II 호환 기종이다.[55]

그럼에도 불구하고 Apple II의 보급률은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대기업 제품에 뒤지지 않았는데, MSX와 SPC-1000는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가 본체(대략 30만 원 대)와 맞먹는 충공깽의 가격을 형성하여 본체만 구입하고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구입하지 못하는 사용자가 매우 많았지만 Apple II 클론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는 가격이 매우 저렴하여(대략 10만 원 대 초중반) Apple II의 본체+모니터+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의 가격이 MSX/SPC의 본체+모니터의 가격과 비슷했다. 이는 MSX 등이 플로피 디스크의 양면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도록 2개의 헤더를 채용한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쓰는데 반해, Apple II의 디스크 II는 헤더를 하나만 채용한 단면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라 가격이 저렴했던 것이 이유였다.[56] 타 기종 소유자들이 테이프로 힘겹게 쓰고 있을 때 Apple 사용자들은 플로피 디스크로 쾌적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Apple 사용자 중에도 테이프를 쓰는 상대적으로 덜 부유한 사용자도 있었고, MSX2와 컬러 모니터,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모두 소유한 아주 부유한 사람도 있었다.
1985년 당시 MSX 본체는 30만 원, 14인치 컬러 모니터 역시 40만 원 가량이었다. 게다가 대우전자에서 MSX용으로 내놓은 싱글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가 49만 9천 원 더블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가 79만 9천 원이었으니 가격이 실로 후덜덜해진다. Apple II 본체와 단색 모니터(Apple II의 형편없는 고해상도 컬러 기능 때문에 컬러 모니터가 사실 상 필요없었고 오히려 단색 화면이 깔끔했다.)와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갖추는 데 드는 비용은 당시 40~45만 원 정도. 참고로 1985년 당시의 물가를 살펴보자면 짜장면이 500원, 서울 지역 국공립대 등록금이 24만 원, 삼성전자 대졸 초봉이 55만 원, 독방 하숙비가 7만 원 정도, 사립대학 평균 한 학기 등록금이 50~60만 원 정도, 개포동 주공 아파트 11평형이 1200만 원 정도였다. 지금 물가로 보면 당시 PC를 갖추는 비용이 얼마나 거금인지를 알 수 있다.[57]

Apple IIe/IIc/IIGS 같은 후기 모델들은 Apple II+와 달리 한국에서 그다지 흥하지 못했다. 이 기종들은 1988~1989년을 기점으로 소개되기 시작했는데 Apple IIe 호환 기종은 1987년 말~1988년 초쯤 등장한 미래교역의 MR-128이 거의 유일한 모델이었고 Apple IIc 계열도 비슷한 시기에 수입된 대만제 LASER128이 있기는 했으나 양쪽 다 보급률은 그다지. Apple IIGS는 폐쇄 아키텍처라 호환 기종도 없어 소량 수입된 것 외엔 아예 정식으로 들어온 적이 없다. 현재 한국에 있는 Apple IIGS 물량 대부분은 한참 지나서 애호가들이 이베이 등에서 들여온 것. 그리고 1989년엔 8비트 시장 전체에 재앙이 다가오고... [58]

MSX를 사주면 게임만 한다고 학부모들은 교육용으로 Apple II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MSX를 가진 소년들은 재믹스를 가진 친구들과 팩을 서로 빌려가면서 신나게 게임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Apple II라고 게임을 못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교과 학습용 프로그램은 Apple II가 더 빈약했다. MSX2나 SPC 시리즈 쪽은 제조사가 대우, 삼성이라는 당시 대기업이었고 한글이나 그래픽 지원이 좀더 원활한 덕에 제조사의 지원 하에 초중고교 교과 학습용 프로그램이 상당수 개발되어 학년·과목별 소프트웨어가 제법 갖춰졌지만 Apple은 그런 지원을 받기 어려웠기 때문. 물론 그 교과 학습용 프로그램은 비싸서 가정용으로 보급이 거의 되지 않았다는 것이 함정 Apple에도 카멘 샌디에고 시리즈같은 오히려 타기종보다 더 질이 좋은 교육용 소프트웨어[59]가 있기는 했지만 해외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당시의 국민학생이 넘기 힘든 영어의 장벽이 있었다.

여담으로 1980년대 초중반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의 군북초등학교는 총 학급수 12학급의 면소재지 학교 주제에 효성 PC-8000 40대(!)로 무장한 컴퓨터실이 있었는데, 군북면 신창리가 고향인 효성그룹 조홍제 회장이 작정하고 밀어준 것이었다.[60] 이 학교는 심지어 이 문서에 나와 있는 애플2 플러스 원본 기종에, 일부 MSX까지 구비하고 있었다. 이러다보니 군북초는 88올림픽 하던 시절에 전산 발매 성적표를 찍어내는 용자짓을 하기도 했다. 당연히 도시 학교들도 죄다 선생님이 수기로 성적표에 행동발달상황 등을 기재하던 시기. 그러나 도시 인구집중 가속화로 인해 이 학교의 컴퓨터 특화사업은 8비트 시대와 함께 끝나고 말았다. 교육용 PC 사업이 IBM으로 넘어갔는데 조홍제 회장 타계와 함께 효성그룹 지원이 끊기면서, 16비트 IBM PC는 열악한 군 교육청 재정으로 충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덕택에 시골 학생들이지만 당시 해외기술의 총아(...)이던 컴퓨터란 물건을 만져 볼 기회를 가질 수 있는 학생들이 있었고, 일부는 서울대학교 등을 거쳐 출연연이나 IT바닥에서 근무하고 있다.

8. 기타

9. 현재의 가치

10. 함께 보기

11. 외부 링크



[1] 세계 최초의 완제품 PC는 TRS-80.[2] Apple II 첫 모델에는 'Integer BASIC' 인터프리터(워즈니악이 만든 정수 계산만 가능한 BASIC 인터프리터. 실수 계산은 안되지만 대신 속도는 엄청 빨랐다.)이 있었으나, Apple II Plus부터 'Applesoft BASIC' 인터프리터를 내장했다.[3] 사실 이렇게 된 데에는 워즈니악의 공이 컸다. 애플 II가 나올 바로 그 시기에는 동 시대의 타 기종과 비슷한 수준의 하드웨어였으나 워즈니악의 천재적인 설계로 인해 확장성이 훌륭하여 원 기기의 뒤지는 성능을 보완한 많은 주변기기가 출시되어 퍼포먼스는 더 뛰어났다. 그런 고로 초기부터 소프트웨어를 많이 확보할 수 있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타사의 더 우월한 하드웨어가 나와도 어느 정도 열세를 커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언급한 코모도어나 MSX 모두 애플 II보다 5년은 더 뒤에 나온 기종이다.[4] 8색이지만 흑백이 중복되어 있으므로 실질적으로는 6색[5] 다만 저런 기능으로 만든 컬러이기 때문에 고해상도 컬러 화면에 텍스트가 합해진 경우는 텍스트의 색이 제멋대로가 되어 가독성이 크게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그런데 이 또한 꼼수로 해결한 게, 한 화면을 280x160의 고해상도 화면과 아래 4줄의 텍스트 모드를 섞어서 보여줄 수 있다. 그림은 고해상도 화면에 넣고 텍스트는 아래 4줄을 이용하는 것. 비욘드 캐슬 울펜슈타인 등 많은 게임이 이를 활용했다.[6] 2개의 화면에 각각 그림을 그려 넣고 필요한 화면을 보여줄 수 있다. 이 전환은 빨라서 많은 게임 소프트웨어에서 응용되었다.[7] 사실 1977년 당시의 PC라면 이 저해상도 모드 정도의 그래픽만 가능한 경우가 대다수였다.[8] 1비트 비프음[9] 모델에 따라 세부 사양은 조금씩 다르지만 제너럴 인스트루먼트 AY-3-8910 계열의 PSG음성지원을 위한 스피치 칩을 장착하고 있다.[10] 파일:disk_notchers.jpg 이런 전용 도구도 있었다.[11] 전용 도구가 없는 경우 보통 문구용 칼 혹은 구멍 뚫는 펀치를 주로 사용하는데 구멍의 위치가 디스크 바로 바깥쪽 아슬아슬한 곳에 위치해서 펀치를 잘못 쓰다가 디스크를 뚫어버리는 눈물 나는 사연도 드물지 않았다. 참고로 1980년대 중반 당시 5.25인치 디스크 가격은 1장에 2~4천 원 정도.[12] 사실 공개한 것은 아니다. 구조가 간단했기 때문에 역설계(리버스 엔지니어링)가 쉬웠을 뿐. 오죽하면 당시 컴돌이들은 "스티브 워즈니악이 조금 빨리 태어났을 뿐이지 내가 만들었다면..." 라고 생각했을까. 물론 언급한 대로 몇몇 설계는 만들어진 것을 보면 쉽지 아이디어 자체는 쉽지 않았다.[13] CP/M 카드란 1970년대 후반 유행한 표준 운영체제인 CP/M을 돌릴 수 있는 카드로, 해당 운영체제가 Z80 CPU를 사용하는 관계로 사실상 Z80 CPU 카드다. 메인 프로세서를 보조하는 것이 아닌 별도의 프로세서라 본체에 박혀 있는 6502와 동시사용은 불가능하고 이 카드를 동작시키면 아예 Z80 CPU가 장착된 별도의 PC가 부팅되는 것으로 생각하면 된다. 물론 디스크 드라이브에 CP/M 운영체제가 있어야 한다.[14] 도스 부팅은 PR#6 이런 식으로. 단, 0번 슬롯은 이런 방식으로 활성화 시킬 수 없고 다른 방법을 써야 한다. PR#0 하면 0번 슬롯 활성화가 아니라 활성화 된 다른 슬롯을 비활성화 시킨다. 이를테면 PR#3으로 확장 비디오 카드를 활성화시킨 후 다시 원래의 비디오 모드로 되돌릴 때 사용하는 것.[15] 정확히는 잡스가 계속 2개를 밀어붙이자 평소에는 그냥 수긍하던 워즈니악이 참지 못하고 ”그럼 너가 만들어라“라고 협박해서 잡스의 고집을 꺾었다. 이후 잡스는 매킨토시를 제작할 때 확장 슬롯을 넣지 않음으로서 자신의 이상을 실현했다(..).[16] 원칙적으로 용도가 고정된 슬롯은 없으므로 사실상이라는 말을 붙인다. 실제로는 꼭 저 위치에 장착할 필요는 없으나 관용적으로 따름과 동시에, 적지 않은 소프트웨어는 저 슬롯에 있다는 전제 하에 개발되어서 위치를 바꾸면 동작하지 않는다.[17] Apple IIc 는 슬롯 1, 2, 3, 6에 하드웨어가 장착된 것으로 인식됨[18] 애플 IIc 확장 메모리 카드는 4번으로 인식된다[19] 애플 IIc Plus는 내장 3.5인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가 5번 슬롯에 고정 할당[20] 애플 II는 한개 인터페이스에 2개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장착할 수 있다. 2개를 초과하여 드라이브가 필요할 때 주로 여기에 인터페이스 카드를 장착한다.[21] 후기 모델의 경우 6색.[22] ProDOS가 작동하려면 부팅 롬 바이너리가 오리지널 애플 II와 같아야 하므로 약간이라도 개조가 들어간 국내 호환기종은 작동이 안되었다.[23] 한국으로 치면 중고 차값.[24] 단 그걸 감안해도 Apple 의 컴퓨터는 그냥 항상 동시대의 컴퓨터보다 비싼 편이었다. 초기에는 약간의 기술적 우위가 있었고 TTL 칩을 다량 사용하는 특성 때문에 비쌀 수도 있었으나 이후 기술적 우위가 없어지고 원칩으로 대량생산하게 되는 시절에도 계속 고가였던 것은 순전히 스티브 잡스 등 Apple 경영진의 고가 마케팅으로 인한 것이었다.[25] 당시는 4096 bit DRAM, 1024 bit SRAM 같은 게 있던 시절이다.[26] VAX 같은 유닉스 터미널을 써본 사람들은 그 쪽이 비슷하다고 느낄 수 있다.[27] 숫자 2 위에 @가 아니라 "가 있다. [69]참고로 현재 우리가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키보드 배열은 IBM PC AT 발매 후에 나온 IBM 모델 M 키보드(101키)에서 유래한 것이다. 다양한 컴퓨터기종이 시장에 난립하던 1980년대에는 각 회사마다 키보드 배열 상태가 조금씩 달랐다.[28] 이런 특징으로 인해 제3자가 기판을 복제하여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부품을 이용, Apple II 호환기종을 만드는 것이 매우 쉬웠다. 동아시아에서 8비트 컴퓨터 문화가 일찍 발현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 개발도상국의 기술력으로도 얼마든지 쉽게 복제품을 만들 수 있었고 가격도 무척 저렴하여 위에 언급한 모자란 성능에도 불구하고 가성비로 시장을 장악할수 있었다. 풍부한 소프트웨어는 덤. 어차피 동아시아의 개발도상국에서는 소프트웨어는 불법복제였으니. (취소선을 친 이유는 저작권법 미비로 불법이 아닐수도 있기 때문)[29] 패드가 아니다 패들이 맞다. 마치 아날로그 오디오의 볼륨 조절과 같이 돌리는 다이얼 2개가 한 세트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등 초창기 컴퓨터 및 게임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치이다.[30] 2년전 오리지널의 발매 당시에는 메모리 32KB 추가하는데 천달러가 넘게 들었고, 보드상의 최대 실장 용량인 48KB를 채우면 메모리 가격만으로 본체를 넘어섰다. 그 당시 기본인 4KB 버전은 위에 서술된대로 1298 달러였으나, 48KB 버전은 2638 달러(...)였다. '메모리 4KB'라는, 진짜 아무 것도 할 수 없어뵈는 물건이 기본형으로 발매된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31] 당시에는 용던 용산 전자상가는 없었다. 용산 전자상가는 세운상가의 전자 상가들을 이전할 목적으로 1987년에 조성되었다. 여담으로 그전에는 용던 자리에 청과물 시장이 있었고 이 시장이 이전한 것이 가락동 농수산물 도매 시장.[32] 정수 연산은 일단 실수로 변환해서 연산한 다음 다시 정수로 변환해서 되돌려주는 삽질을 했다고 한다(...)[33] 소비 전력이 이런 수준이었으므로 당연 당시의 Apple II는 CPU는 물론 파워 서플라이에도 팬이 없었다. 필요가 없으니.[34] 트랜지스터 수십억개가 집적된 현대의 CPU, GPU의 전력 소모가 100W 남짓인 것을 감안하면 겨우 트랜지스터 3천개짜리 칩이 0.5W씩이나 먹었다는 것은 현대와의 기술 차이를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35] 모델명 폰트, 키보드 레이아웃도 Macintosh 키보드와 동일[36] Apple IIe Platinum은 우측에 숫자 키패드가 추가되었는데 PC키보드에 보는 4열 키패드인데 MR-128의 우측 키패드는 3열 키패드이고 사칙연산은 +, -만 있었다.#[37] Apple의 예상보다는 적게 팔렸다는 의미. Apple III 같은 망작은 아니었다. Apple IIc에 도입된 기능은 일부 Apple IIe Enhanced에 추가되기도 했다.[38] You knew that a computer without expansion slots is a dead-end that stays behind as technology advances.[39] 스노우 화이트 디자인에 대해서는 프로그 디자인 창립자 하르트무트 에슬링거의 도서 Keep It Simple (한국어판명 킵 잇 심플 : 애플 디자인의 시작) 에 자세히 나와 있다[40] 키감은 최악.[41] 모델넘버도 A2S4000에서 A2S4100으로 변경[42] 당시 한국 PC 잡지에도 광고를 많이 했다.[43] 하지만 대부분 소프트웨어는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로 나왔으므로 디스크 II 추가 장착은 필수였다.[44] 내장 클럭이 없기 때문에 게임이 비정상적인 속도로 진행된다[45] 내장 전원부와 3.5인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는 소니가 만들었다.[46] 파일:Apple_IIc_Plus_power_supply.jpg[47] 삑삑 소리를 헤드폰 통해 들을 이유가 있었을지. 하지만 당시 세운상가에서도 Apple II에 헤드폰 잭 추가 개조 서비스가 실제로 있었다.[48] 40/80자 스위치 상태를 인식해서 화면을 띄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으나 대부분의 소프트웨어가 80자에 맞춰 나왔기 때문에 별 쓸모 없는 기능이었다.[49] 기존 볼륨 조절은 하단의 다이얼 방식이었다[50] IIGS키보드와 동일한 알프스 키보드 사용[51] 컴퓨터 잡지에서는 BASIC 소스 리스트를 게재하며 지원 컴퓨터로 Apple 컴패티블이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했기에 컴패티블의 뜻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게 Apple의 특정 모델 이름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세운상가 가서 아저씨 Apple 컴패티블 하나 주세요- 하는 식. 참고로 컴패티블의 영어는 compatible로, '호환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Apple 호환기종이라는 뜻으로, 이때는 호환기종이라는 단어가 정착되기 이전이라서 그랬다. 호환기종이라는 단어가 정착된건 IBM PC 호환기종이 보급된 1990년 무렵이다.[52] 하지만 이후 1989년도에 정부에서 교육용 컴퓨터를 8비트가 아닌 16비트 IBM PC 호환기종으로 공식 재지정하면서 Apple 클론 및 MSX 호환 기종은 크게 쇠퇴하게 된다.[53] 당시 유명했던 브랜드로는 삼보 트라이젬, 이행 사이보그, 효성 PC-8000, 그리고 정원 하트 등이 있었는데 그런 브랜드보다는 세운상가제 노브랜드 제품이 더 많이 팔렸다. 품질차이가 없으면서 가격도 더 싸고 무엇보다 저작권은 개나 주다보니 호환성이 더 좋았다. 브랜드 제품은 자사 브랜드를 어필하기 위해 Apple II Plus의 롬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약간 변형했기에 드물지만 기종에 따라 특정 게임이나 프로그램이 안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분위기상 굳이 저작권에 신경쓸 필요는 없었다. Apple사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으니. IBM PC의 경우 IBM이 저작권 압박을 하긴 했다. 이유인즉 Apple II 호환기종의 경우 세운상가 중소 공방이 주로 만들어 대부분 개인이나 소규모 단체에서 소비했기 때문에 압박을 해 봐야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IBM PC의 경우 대기업이 주로 생산하여 수요층도 기업체가 많았기 때문에 생산이던 소비던 개별 기업의 규모가 커서 압박이 가능했다. 당시는 베른협약 이전이라 저작권 압박을 해 봐야 얻는 것은 없었으나 IBM PC를 생산하던가 소비하는 기업체들은 수출을 주로 하는 기업도 많아서 해외 사업에 태클을 걸 수 있어 저작권 압박이 통했다.)[54] 당시는 개인용 컴퓨터 사업도 했으나 이후 철수하여 B2B 사업에 집중했다. 최근에는 ATM기 만드는 효성티엔에스(구 노틸러스효성)로 잘 알려져 있다.[55] 삼보컴퓨터의 최초 기종은 일본 샤프사의 MZ-80K/C 복제품이다.[56] 문제는 당시 유통된 대부분의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가 38트랙까지만 읽어들일 수 있었다는 점이었다. Apple II의 디스크 II는 40트랙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에 드물게 용량을 꽉 채워 기록된 플로피 디스크는 읽지 못하고 헤더가 구석에서 딱딱 큰 소음만 내다가 오류가 났다. 그래서 나중에 40트랙을 전부 읽어들일 수 있는 조금 더 비싼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판매하기도 했다. Chinon 브랜드가 대표적.[57] 그리고 당시 많은 국민학교에서는 학부모, 특히 육성회 임원들에게 컴퓨터실 비용을 얻어냈다. 육성회장이 큰 소리 칠 수 있었던 게 이런 이유였다.[58] 앞에서 언급했지만 Apple II와 II+는 일반적인 IC를 채용하여 복제가 무척 쉬웠다. 하지만 IIe의 경우 커스텀 칩셋을 제법 사용하여 일정 규모이상 판매되지 않는 한 칩셋을 주문제작하는 게 채산성이 맞지 않았다. 대부분 중소기업, 아니 중소기업 수준도 안되는 세운상가 개별 점포에서 Apple II를 복제해서 만드는 분위기상 그런 칩셋을 만들기는 가성비가 안맞았다. 여기서 한국과 대만의 차이가 나오는데 삼성, 금성(LG) 같은 대기업 위주인 한국 분위기상 MSX 등을 밀었던 대기업이 있어 Apple II는 완전 중소기업만이 만들어 커스텀 칩셋 제조 의지가 없었지만 대만은 중견기업 위주라서 복제품 Apple II가 PC산업을 주도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IIe용 커스텀 칩셋 제조까지 손대게 되었다. 이 대만제 칩셋이 외부 판매되어 이를 수입, 1988년 한국에서도 IIe를 만들게 되는데 이 때는 이미 16비트 IBM PC 호환기종이 유행하고 있었으며 MSX의 위세도 높아서 시장성이 매우 약했다. 한 2~3년만 먼저 들어왔어도 이야기는 달랐을것.[59] 진짜 교육용은 아니고 상식퀴즈 게임이라고 보면 된다.[60] 지금도 함안 조씨 문중(효성가) 재실과 고택이 이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대략 지금의 군북역 바로 앞.[61] 빈티지가 된 이상 어느 정도 시세 유지는 될 것이다.[62] Integer BASIC 인터프리터 모델.[63] 울티마 같은 명작은 다 잘 돌아가긴 하지만, 이미 빈티지가 된 컴퓨터에 게임 하기에는 좀 아깝지 않을지...[64] 하지만 HDMI만 입력 가능한 TV가 점점 많아지는 추세라 LCD 디스플레이도 구형 모델을 찾아야 한다.[65] 5.25인치 FDD가 반드시 필요하므로 뉴비용 아이템은 아님[66] 자작품을 파는 사례는 있다.[67] 현재 이 가격의 물건은 매물도 없다.[68] 2024년 기준, 매물도 거의 없고. 박스셋이 00달러 이상 가격으로 올라온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