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 align=center><tablewidth=100%><table bordercolor=#fefe01> | 한신 타이거스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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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lbgcolor=#000000,#fefe01><colcolor=#fefe01,#000000> 모기업 관련 정보 | 한신 전기철도 · 한큐한신토호그룹 | |
| 연고지 관련 정보 | 간사이 효고현 니시노미야시 고시엔 일대 · 오사카부 오사카시 | |
| 일본시리즈 우승 ★★ | 1985 · 2023 | |
| 리그 우승 (11회) | 1937 추계 · 1938 춘계 · 1944 · 1947 · 1962 · 1964 · 1985 · 2003 · 2005 · 2023 · 2025 | |
| 클라이맥스 시리즈 | 2007 · 2008 · 2010 · 2013 · 2014 · 2015 · 2017 · 2019 · 2021 · 2022 · 2023 · 2024 · 2025 | |
| 시즌별 요약 | 2014 · 2015 · 2016 · 2017 · 2018 · 2019 ·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2025 · 2026 | |
| 구단 상세 정보 | 역사 · 선수단 · 역대 등번호 · 역대 선수 · 유니폼 · 응원가 · 사건사고 · 한신아재 · 커널 샌더스의 저주 · JFK · 암흑기 | |
| 주요 인물 | 감독 후지카와 큐지 · 선수회장 무라카미 쇼키 | |
| 현역선수 경력 | 모리시타 쇼타/선수 경력 · 사토 테루아키/선수 경력 · 오오야마 유스케/선수 경력 · 치카모토 코지/선수 경력 | |
| 주요 명장면 | 백스크린 3연발 · 일본프로야구 최장시간 소요 경기 · 2014년 클라이맥스 시리즈 · 고의사구 끝내기 안타 2022년 센트럴 리그 3위 | |
| 경기장 | 1군 한신 고시엔 구장 · 고시엔 기간 교세라 돔 오사카 · 2군 닛테츠코한 SGL스타디움 아마가사키 · 과거 2군 한신나루오하마 구장 · 지방구장 머스캣 스타디움 · 춘계 캠프 기노자촌 야구장 · 추계 캠프 아키 시영구장 | |
| 홈 중계 채널 | ||
| 기타 정보 | 한신 본선 · 전통의 일전 · 간사이 더비 · 도쿄온도 · 죽음의 원정 | |
| 틀 문서 | ||
| 코칭스태프 | 투수 | 포수 | 내야수 | 외야수 | 육성 선수 | 역대 감독 | 영구 결번 | 역대 1라운드 지명 선수 | ||
1. 개요2. 상세
2.1. 1986년 : 3위 - 암흑기의 전조
3. 암흑기3.1. 요시다 요시오 감독 체제(1차)
4. 암흑기 종결 후5. 암흑기 성적6. 둘러보기3.1.1. 1987년 : 6위
3.2. 무라야마 미노루 감독 체제3.3. 나카무라 카츠히로 감독 체제3.3.1. 1990년 : 6위3.3.2. 1991년 : 6위3.3.3. 1992년 : 2위 - 암흑기의 유일한 빛3.3.4. 1993년 : 4위3.3.5. 1994년 : 4위3.3.6. 1995년 : 6위
3.4. 후지타 타이라 감독 체제3.4.1. 1996년 : 6위
3.5. 요시다 요시오 감독 체제(2차)3.6. 노무라 카츠야 감독 체제3.7. 호시노 센이치 감독 체제1. 개요
한신 타이거스가 1987년부터 2002년까지 겪은 암흑기에 대해 서술한 문서.2. 상세
한신 타이거스는 2023년 일본시리즈 이전까지 일본시리즈 제패 경력이 1985년 딱 1번뿐이었던 데다[1], 무엇보다 같은 센트럴 리그에 일본프로야구를 대표하는 강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존재감에 가려져서 그렇지 기본적으로 가끔씩 부침을 겪긴 해도 리그에서 상위권을 꾸준히 유지하는 강팀이지만 이 항목에서 서술할 1987년부터 2002년까진 1992년을 제외하곤 전부 B클래스, 그 중 무려 10시즌이 최하위(6위)라는 최악의 암흑기를 겪었다. 지금의 주니치 드래곤즈가 겪는 암흑기의 원조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2.1. 1986년 : 3위 - 암흑기의 전조
대망의 첫 일본시리즈 제패를 뒤로 하고 맞이한 1986년은 개막 4연패로 시즌을 시작하는 것도 모자라 시즌 초반부터 4번 타자 카케후 마사유키가 손가락 골절로 전열에서 이탈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다. 그런 악재 속에서도 2년 연속 타격 삼관왕을 수상하는 랜디 바스와 마유미 아키노부, 오카다 아키노부 등 다른 주축 타자들의 분발 속에서 한때 전반전 막판에 9연승을 기록하는 등 1위 히로시마 토요 카프와의 승차를 3게임차까지 좁히며 우승 경쟁을 향해 달려갔으나, 후반전부터 점차 힘이 빠지더니 8월에 6연패를 당하며 우승 경쟁에서 미끄러졌고 결국 반등의 기회를 잡지 못하고 승패마진을 계속 까먹은 끝에 정확히 5할 승률을 기록(60승 60패 10무)하며 3위로 시즌을 마감했다.타선에선 상술했듯 바스와 마유미, 오카다 등의 활약으로 작년과 같은 압도적인 모습은 아니어도 팀 타율 1위(.271), 득점 2위(574점)를 기록했으나, 반대로 투수진은 리그에서 유일하게 선발 10승 투수를 배출하지 못한 것은 물론[2] 주축 선발이었던 리치 게일이 5승 10패, 나카다 코지가 7승 12패에 그칠 만큼 허약한 모습을 보여줬다. 사실 우승을 했던 지난 해에도 선발진 전원이 평균자책점 4점대에 그쳤던 것을 맹타선과 계투들의 활약으로 메꾼 덕에 우승까지 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당시 한신의 선발 투수진 자체가 튼튼하진 않았지만 이 해엔 그 단점이 더 심화된 셈. 그나마 팀 평균자책점 자체는 지난 해보다 낮은 3.69로 리그 3위를 차지했지만 그렇다고 크게 개선되었다고 보긴 힘들었다.
3. 암흑기
3.1. 요시다 요시오 감독 체제(1차)[A]
3.1.1. 1987년 : 6위
작년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맞이했던 1987년에도 한신을 우승 후보로 손꼽는 여론이 있었으나, 시범경기가 한창이던 3월 22일에 지난 해 손가락 골절로 아쉬운 성적에 그친 카케후 마사유키가 음주운전으로 경찰에 체포되는 대형 사고를 친 것도 모자라 5일 후인 3월 27일엔 랜디 바스가 속도 위반으로 검거되며 주포 2명이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되는 추태로 팀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그렇게 뒤숭숭한 상태에서 맞이한 시즌 초반부터 팀은 2번이나 8연패를 당하며 초반부터 일찌감찌 최하위로 처지더니 그대로 추락을 거듭하며 시즌 도중 타격코치 보좌를 맡은 타케노우치 마사시가 요시다 요시오 감독과 불화를 빚어 중도 퇴단하기까지 했고, 올스타전 직전엔 승패마진이 무려 -35, 5위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와도 10게임차의 압도적인 최하위라는 끔찍한 상황에 이르렀다. 결국 한신은 전반전을 말아먹은 그대로 후반전에서도 반등하지 못한 채 최종적으로 41승 83패 6무, 승률 .331에 우승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와는 무려 37.5게임차의 압도적인 최하위로 시즌을 마감했으며, 당해 기록한 승률 .331은 현재까지도 구단 역사상 최악의 승률로 남아있다.
타선에선 랜디 바스가 타율 .320/OPS 1.011 35홈런 79타점으로 맹활약했지만 지난 2년 간의 압도적인 활약과는 거리가 있었던 데다 음주운전으로 구설수에 휘말린 건 물론 부상 후유증까지 겹치며 타격 부진에 허덕인 카케후 마사유키를 비롯한 다른 타자들의 타격 성적이 크게 하락하면서 팀 홈런(140개)은 리그 5위, 팀 타율(.242)과 득점(437점)은 리그 최하위에 그쳤고, 투수진은 11승을 거둔 새 외국인 투수 맷 키오와 나카다 코지가 선발진에서 분투했으나 나머지 투수들이 무너져내리면서 팀 평균자책점도 다시 4점대로 올라가는 등(4.36, 리그 5위) 투타의 전반적인 성적 하락이 팀의 처절한 몰락을 부르고 말았다.
결국 요시다 요시오 감독은 팀의 추락에 책임을 지고 3년 만에 퇴임했으며, 이 시즌부터 본격적인 암흑기가 막을 열었다.
3.2. 무라야마 미노루 감독 체제
3.2.1. 1988년 : 6위
1960년대 한신을 대표하는 에이스 투수로써 요시다와 함께 영구 결번된 팀의 원조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1970~1972년에 선수 겸 감독을 맡았던 무라야마 미노루가 16년 만에 감독으로 복귀했다.무라야마 감독은 취임과 함께 와다 유타카, 오노 히사시, 나카노 사토루 등 일명 소년대[4]라 불리는 젊은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기용하며 리빌딩을 천명했고, 젊은 선수들의 기용이 나름 효과가 있었는지 시즌 초반엔 2위 경쟁을 벌였으나 5월 말부터의 8연패를 시작으로 또 다시 팀 성적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다 시즌 도중인 6월 27일에 랜디 바스가 아들의 치료비 문제를 두고 구단과 불화를 일으켜 중도 퇴단하면서 주포를 잃어버린 타선이 문자 그대로 물방망이로 변해버린 데 이어 한 달 뒤인 7월 19일엔 당시 막 구단 대표로 취임했던 후루야 신고가 바스의 계약 문제로 심한 마음고생을 겪다가 출장지였던 도쿄도 내 호텔에서 투신 자살하는 사건까지 터지는 등 구단의 분위기가 걷잡을 수 없이 최악으로 흘러가고 말았다.
결국 성적과 분위기 모두 최악으로 흘러간 한신은 끝내 51승 77패 2무, 승률 .398의 성적으로 우승팀 주니치 드래곤즈와 29.5게임차의 압도적인 2년 연속 최하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바스의 중도 퇴단의 여파로 팀 홈런이 82개로 폭락하며 리그 최하위는 물론 1966년 이래 처음으로 100개 미만에 그쳤고 팀 득점 역시 리그 최하위(444점)를 기록했다.
3.2.2. 1989년 : 5위
새 외국인 선수로 프린스 필더의 아버지 세실 필더를 영입하며 시작한 1989년 역시 시작부터 요미우리 자이언츠, 히로시마 토요 카프가 우승 경쟁을 할 동안 나머지 4팀과 하위권에서 치고받는 진흙탕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리고 역시나 오래 버티지 못한 채 6월부터 다시 추락해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와 꼴찌 다툼을 벌이는 신세가 되었고, 그나마 9월 이후엔 17승 15패로 그럭저럭 선등하며 다시 반등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결국 54승 75패 1무 승률 .419, 최종성적 5위로 시즌을 마쳤다.새 외국인 세실 필더가 타율 .302/OPS 1.031 38홈런 81타점으로 바스의 공백을 어느 정도 메꿔줬고, 여기에 야기 히로시가 대두하며 16홈런을 치는 등 팀 홈런은 135홈런(3위)로 바스 없는 아이들 수준이었던 지난 해보다 크게 늘어났으나 타선의 흐름이 계속 끊기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팀 타율은 리그 4위, 팀 득점은 리그 5위에 그쳤고, 투수진도 여전히 심각하게 부족해서 15승을 거둔 맷 키오와 시즌 도중 선발 투수로 전향해 10승을 거둔 나카니시 키요오키 외엔 믿을 만한 투수가 없었던 것이[5] 팀의 발목을 잡았다.
시즌 종료 후 무라야마 미노루 감독이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2년 만에 사임했으며, 여기에 세실 필더가 구단과의 계약 문제를 두고 의견차를 좁히지 못해 1년 만에 퇴단하며 한신은 기껏 얻은 새 주포를 고작 한 시즌만에 잃게 되고 말았다.
3.3. 나카무라 카츠히로 감독 체제
3.3.1. 1990년 : 6위
1988년까지 코치를 맡다가 퇴단 후 해설가를 맡고 있던 나카무라 카츠히로를 신임 감독으로 초빙한 데 이어 세실 필더의 대체제로 지난 해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홈런왕을 수상한 래리 패리쉬를 영입했다.시즌 초반엔 5할 승률을 유지하며 나름대로 선방했으나 5월부터 또 다시 추락해 최하위에 안착하더니 급기야 8월에 6승 20패[6]로 무너져내리며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채 52승 78패 승률 .400의 최종 성적으로 2년 만의 최하위를 기록했다. 시즌 도중인 8월 27일엔 래리 패리쉬가 무릎 부상을 이유로 갑작스럽게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퇴단하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작년과 똑같이 래리 패리쉬[7]와 야기 히로시가 28홈런, 베테랑 오카다 아키노부가 20홈런으로 주포 역할을 나름대로 수행해주면서 팀 홈런은 작년과 똑같은 성적(135개, 리그 3위)이었으나 팀 타율은 리그 최하위(.252), 득점은 리그 4위(550점)에 그칠 만큼 여전히 타격 효율이 좋지 못했다. 특히 투수진은 맷 키오와 나카니시 키요오키가 버텨주던 선발진마저 완전히 붕괴되면서[8] 작년보다 더 떨어진 팀 평균자책점(4.58)으로 2년 연속 최하위를 차지했다.
3.3.2. 1991년 : 6위
새 외국인 선수로 토마스 오말리, 마벨 윈을 영입했으나 당시 구단 최악인 개막 5연패[9]로 시즌을 시작하더니 매 달마다 연패를 무지막지하게 적립하면서[10] 빠르게 최하위로 안착했다. 그나마 8, 9월엔 월간 승률 5할로 선방했지만 결국 시즌 막판에 또 연패를 적립하며 최종적으로 48승 82패 승률 .369로 5위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와도 16게임차나 벌어진 압도적인 2년 연속 최하위로 마감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팀 타율(.237), 팀 득점(454점), 팀 평균자책점(4.37)[11] 역시 리그 최하위를 기록한 건 덤.그나마 유이했던 위안은 토마스 오말리가 3할 타율에 20홈런을 쳐주며 중장거리포 역할을 톡톡히 해줬고[12], 시즌 막판인 9월 22일부터 26일까지 5시합 연속으로 드래프트 1순위 투수 5인방이 연속 완투승을 거두는 진기록을 쓴 것. 어찌보면 이 5인방들의 활약이 후술할 1992년의 약진의 예고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래는 해당 투수들이 기록한 완투승의 목록.
| <rowcolor=#ffffff> 일자 | 투수(지명연도) | 상대팀 | 개최 구장 | 스코어 | 비고 |
| 9월 22일 | 나카고미 신(1988년) |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 한신 코시엔 구장 | 5:2 | 데뷔 첫 승리투수 |
| 9월 23일 | 유후네 토시로(1990년) | 5:0 | 완봉 | ||
| 9월 24일 | 노다 코지(1987년) | 야쿠르트 스왈로즈 | 4:3 | ||
| 9월 25일 | 이노마타 타카시(1986년) | 6:1 | 무자책점 완투 | ||
| 9월 26일 | 카사이 미노루(1989년) | 4:1 |
3.3.3. 1992년 : 2위 - 암흑기의 유일한 빛
이 해부터 한신 고시엔 구장의 럭키존을 철거하면서 그라운드가 넓어졌고, 때마침 작년 시즌 막판 선발 5인방의 연속 완투승에서 힌트를 얻은 나카무라 카츠히로 감독이 넓어진 그라운드에 맞춰 투수진을 필두로 한 지키는 야구로 팀의 운용 방침을 바꿨다. 지금의 한신의 팀컬러인 투수진 위주의 야구는 이 시즌부터 본격적으로 정착했다.그리고 시즌이 개막하자 팀의 방향성을 바꾼 것이 제대로 빛을 발하게 되는데, 에이스 나카다 코지(14승 12패 217.1이닝 194탈삼진 ERA 2.53)를 필두로 한 선발진 4명이 평균자책점 2점대를 기록하고, 여기에 외국인 타자 듀오 짐 파쵸렉[13]-토마스 오말리의 맹활약과 노쇠한 베테랑들을 대신해 새롭게 떠오른 쿠지 테루요시, 신죠 츠요시, 카메야마 츠토무 등 신예들의 약진에 힘입어 한신은 지키는 야구로 이전 시즌과는 다르게 상위권 다툼을 끈질기게 이어가며 1위부터 4위까지 2.5게임차 이내에서[14] 물고 늘어지는 초접전 속에서 1.5게임차 2위로 전반전을 마쳤다. 그리고 8월 죽음의 원정에서도 10승 6패로 10년 만에 위닝을 기록한 데 이어 9월에 야쿠르트 스왈로즈가 9연패에 빠진 틈을 타[15] 1위로 올라서며 7년 만의 센트럴 리그 우승이 눈 앞에 보이는 듯 했지만, 시즌 막판에 잡힌 원정 13연전에서 3승 10패[16]로 폭싹 무너지는 바람에 야쿠르트에게 다시 역전을 허용했고 결국 10월 11일 야쿠르트와의 코시엔 홈경기에서 패퇴하며[17] 홈에서 야쿠르트가 14년 만의 센트럴리그 우승 헹가래를 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시즌 최종 성적은 67승 63패 2무, 승률 .515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공동 2위였는데, 시즌 마지막까지 우승 경쟁을 했던 2위였음에도 승률이 낮았던 이유는 상술했듯 1위부터 4위까지 근소차로 순위 경쟁을 벌이는 초접전이 펼쳐졌고, 여기에 일찌감찌 하위권으로 처졌던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와 주니치 드래곤즈까지 시즌 막판에 반등하면서 순위 경쟁이 더욱 난장판이 된 것이 컸다. 당해 센트럴 리그는 전구단 60승대라는 초유의 결말로 끝을 맺었고 우승팀인 야쿠르트(69승 61패)와 최하위 주니치(60승 70패)의 승차는 불과 9게임차에 불과했다. 시즌 최종 순위표는 이 항목에서 볼 수 있다.
우승에 실패한 원인으로는 지난 해에 이은 타선의 부진이 컸는데, 넓어진 코시엔의 그라운드에 맞춰 지키는 야구를 표방한 것 자체는 팀 평균자책점(2.90), 최소 실책(69실책) 1위로 좋은 결과를 냈으나 반대로 그라운드가 넓어진 반작용으로 팀 타격이 반등하지 못하며 팀 타율(.250)은 리그 5위, 홈런(86개)과 득점(475점)은 리그 최하위로 여전히 득점 능력이 저하된 모습을 보여줬고 이 때문에 투수진이 상대 타선을 잘 막아내도 접전에서 제대로 점수를 내지 못해 지는 경우가 많아졌다. 실제로 당해 한신은 1점차 승부에서 22승 29패로 부진했고 특히 승부의 중요한 고지였던 9, 10월엔 1점차 승부에서 3승 8패로 무너지며 결국 야쿠르트에게 밀려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리고 팀이 다시 암흑기에 빠지면서 이 시즌은 한신이 20세기에서 마지막으로 A클래스를 기록한 시즌이자 우승에 가까웠던 시즌이 되었다.
3.3.4. 1993년 : 4위
작년에 우승에 실패한 원인인 부진한 타선을 강화하기 위해 선발 로테이션의 일원이었던 노다 코지를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주축 타자 마츠나가 히로미와 맞바꾸는 트레이드를 단행했고, 노다의 공백은 지난 해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대만 야구 국가대표팀의 에이스로 활약한 궈리첸후를 영입하는 것으로 메꿨다.그러나 막상 시즌이 시작되자 마츠나가가 개막 초반부터 2번이나 부상을 당하면서 전열에서 이탈해 버린 데다[18] 지난 해 타선의 주축이었던 야기 히로시와 카메야마 츠토무, 짐 파쵸렉[19]도 부진에 빠지면서 팀 타선은 홈런 86개(리그 최하위), 478득점(리그 4위)에 그치며 지난 해와 별 다를 바 없었고, 여기에 에이스 나카타 코지가 6점대 평균자책점에 3승 12패로 무너지는 등 지난 해 우승 경쟁에 큰 역할을 해줬던 투수진까지 팀 평균자책점이 3.88(리그 5위)로 지난 해보다 1점 가까이 폭등하며 투타 모두 아귀가 맞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나마 유일한 위안으로 토마스 오말리(수위타자, 최고출루율, OPS 1위), 와다 유타카(최다안타), 신죠 츠요시가 지난 해와 변하지 않은 활약으로 팀을 지탱해줬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럼에도 한신은 5월까지 5할 승부를 이어가며 A클래스를 버텼지만 결국 투타의 집단 부진을 견디지 못하고 추락해 전반전 종료 시점에서 1위 야쿠르트와 6게임차 최하위를 기록했고, 후반전 이후엔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와 히로시마 토요 카프의 대형 연패에 힘입어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3위 경쟁을 벌였으나 결국 10월에 요미우리에게 밀려나며 4위(63승 67패 2무, 승률 .485)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시즌 종료 후 FA 제도가 도입되었고, 상술한 마츠나가가 곧바로 FA를 선언해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이적하면서 한신은 주축 선발을 방출하면서까지 데려왔던 마츠나가를 불과 1년 만에 떠나보내게 되고 말았다.
3.3.5. 1994년 : 4위
마츠나가의 공백을 메꾸기 위해 이번엔 마츠나가와 함께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주축 타자로 활약했던 이시미네 카즈히코를 FA로 영입했고, 여기에 외국인 선수로 메이저리그 통산 230홈런을 쳤던 강타자 롭 디어를 영입했다.그러나 시즌이 시작되자 4월 첫 한 달을 6승 12패로 망친 데 이어 연승과 연패를 반복하는 오락가락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전반전을 5위로 마쳤고, 그나마 7월에 15승 8패로 좋은 성적을 거두면서 한 때 2위로 올라서기도 했으나 또 다시 전반전과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다 결국 막판에 7연패로 무너지며 야쿠르트 스왈로즈와 공동 4위(62승 68패 승률 .477)로 시즌을 마쳤다. 참고로 당해 최하위였던 요코하마 베이스타즈(61승 69패 승률 .469)[20]와는 고작 1게임차.
와다 유타카와 토마스 오말리가 여전히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팀 타선의 부진은 여전히 해결되지 못해서 20홈런을 넘긴 타자가 단 1명도 없었고, 여기에 새 전력이었던 이시미네 카즈히코가 OPS .677로 노쇠화를 보이고 롭 디어는 타율 .151로 선풍기질만 일삼는 등 기대를 저버리며 팀 홈런 4년 연속 최하위, 득점 5위에 그쳤다. 투수진은 지난 해 드래프트 1순위로 지명한 야부 케이이치가 곧바로 에이스 투수로 정착하며 신인왕을 수상하는 등 팀 평균자책점 2위(3.43)로 지난 해에 비해 개선되긴 했지만 10승 투수를 1명도 배출하지 못하며 그다지 무게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데 시즌 종료 후 한신 프런트가 바보 같은 결정을 내려 버렸으니, 바로 팀 타선의 핵심이었던 토마스 오말리를 장타력과 수비력 부족을 이유로 방출한 것. 사실 오말리가 좋은 성적과는 별개로 감독의 3루수 기용에 반발하거나 그라운드 안팎에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등 팀 케미스트리를 해칠 만한 모습을 보여준 탓에 한신 프런트도 나름 할 말은 있었지만, 타선 부진이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팀의 핵심 타자를 내보낸 한신은 다음 시즌에 그 댓가를 제대로 치르게 되었다.
3.3.6. 1995년 : 6위
오말리를 대신할 외국인 타자로 스캇 쿨바와 글렌 데이비스를, 투수진 보강을 위해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베테랑 선발 투수 야마오키 유키히코를 FA로 영입했으나 시즌이 개막하자마자 5연패를 당하며 바로 최하위로 가라앉았다. 그나마 같은 시기에 주니치 드래곤즈가 한신보다 더 부진했던 탓에[21] 5월 후반에 최하위를 탈출했지만 5위에서 반등하지 못하다가 7월에 4승 15패로 무너지면서 끝내 전반전이 끝난 7월 23일부로 나카무라 카츠히로 감독이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중도 사임했다. 이후 후지타 타이라 2군 감독이 대행을 맡게 되었으나 후지타 체제에서도 8월에 8승 18패를 기록하는 등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는 팀의 상태를 수습하지 못한 채 결국 마지막에 다시 주니치에게 밀려나 최하위로 시즌을 마쳤으며, 시즌 성적은 46승 84패, 승률 .354로 우승팀 야쿠르트와의 승차가 무려 36게임차나 되는 처참한 성적이었다.팀의 발목을 잡은 건 역시나 타선 부진이었는데, 새로 영입한 쿨바와 데이비스는 20홈런 이상을 기록하며 중심타선에서 제 역할을 해줬지만 그동안 3할 내외를 쳐주던 와다 유타카의 타율이 .267로 떨어지고 신죠 츠요시는 발목 부상으로 인한 타격 부진에 허덕이며 규정타석도 못 채우는 등 나머지 타자들이 이 둘의 활약에 못 미치는 모습만 보여준 탓에 팀 타율과 홈런, 득점 모두 리그 최하위에 그쳤다. 그나마 세키카와 코이치가 주전 포수로 정착하고 히야마 신지로가 1군에 새 전력으로 자리잡았지만 그것만으로는 타선의 부진을 메꿀 수가 없었다. 정반대로 한신에서 방출되어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이적한 토마스 오말리가 이 해 개인 최다인 31홈런 87타점에 4년 연속 최고출루율 타이틀을 석권하며 야쿠르트의 우승을 이끈 공로로 리그 MVP+일본시리즈 MVP를 한꺼번에 석권한 것을 생각하면 한신 입장에선 땅을 칠 수밖에 없던 셈.
투수진은 신인 카와지리 테츠로가 곧바로 선발 로테이션을 꿰차는 등 지난 해에 이어 팀 평균자책점 3.83(리그 4위)로 무게감이 부족하긴 했어도 나름대로 분전해줬지만 타선이 워낙 시궁창이라 승리와 거리가 멀었고, 그 결과 10패 투수가 4명에 야부 케이이치와 유후네 토시로가 13패로 공동 다패왕을 차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22] 유일한 위안은 선발과 계투를 오가던 타케우치 마사야가 규정이닝 10승을 채우며 2년 연속 10승 투수가 없는 굴욕만 면했다는 것뿐이었다.
시즌 종료 후엔 감독 대행을 맡은 후지타 타이라가 정식 감독으로 취임하게 되었으나, 스토브리그 기간인 11월 19일에 신죠 츠요시가 "자신에겐 야구 센스가 없다"는 이유를 들며 갑작스럽게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가 이틀 만에 아버지의 병환을 이유로 은퇴 선언을 철회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후일 밝혀진 바에 의하면 후지타와 이전부터 갈등을 빚던 와중에[23] 평소 스승처럼 따르던 카시와바라 쥰이치 타격코치까지 퇴단하게 되자 구단에 불신감을 가져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트레이드시켜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마저도 거절당한 것이 원인이었다고 한다.
3.4. 후지타 타이라 감독 체제
3.4.1. 1996년 : 6위
지난 해 감독대행을 맡은 후지타를 정식 감독에 앉히며 야심차게 시즌을 시작했지만 4~5월 내내 승률이 .333에 그치는 궤멸적인 성적으로 빠르게 최하위로 내려앉았으며, 이후에도 최하위를 도통 벗어나지 못하다가[24] 9월 12일 자로 후지타 타이라 감독이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을 지고 감독에서 해임되어[25] 시바타 타케시 수석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게 되었다. 그나마 시즌 초반에 1위를 달렸던 요코하마 베이스타즈가 5월부터 가빠르게 추락한 덕분에 후반전부터 요코하마와 최하위 경쟁을 벌이면서 막판에 5위로 올라가기도 했으나, 결국 시즌 마지막 요코하마와의 2번의 맞대결에서 전패하며 2년 연속 최하위로 시즌을 마쳤다. 최종 성적은 54승 76패 승률 .415.타선은 와다 유타카가 다시 타율을 3할에 가깝게 끌어올린 데 이어(.298) 지난 해 주전으로 도약한 히야마 신지로가 22홈런을 치며 중추 역할을 해줬지만 나머지 타자들의 성적이 그다지 좋지 못했던 데다 외국인 선수들이 대실패로 끝난 탓[26]에 지난 해에 이어 팀 타율(.245), 득점(482점)은 리그 최하위, 팀 홈런은 리그 5위(89홈런)에 그쳤다. 여기에 팀 평균자책점이 4점대(4.12, 리그 5위)로 치솟고 야부 케이이치와 유후네 토시로가 2년 연속 최다패에 오르는 등 그 동안 나름 분전했던 투수진까지 무너지는 바람에 결국 2년 연속 최하위로 추락하며 투타 전력의 부족함이 여실히 드러난 시즌이 되고 말았다.
결국 구단에서도 보강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서 오프시즌에 세이부 라이온즈의 강타자 키요하라 카즈히로의 FA 영입에 나섰으나 키요하라 본인이 어릴 적부터 오매불망하던 요미우리 자이언츠 이적을 선택하며 이마저도 실패로 돌아갔다.
3.5. 요시다 요시오 감독 체제(2차)[A]
3.5.1. 1997년 : 5위
1985년 일본시리즈 제패를 이끌었던 요시다 요시오를 다시 감독으로 초빙하고, 보스턴 레드삭스의 주축 타자로 활약했던 마이크 그린웰과 필 하이엇을 영입하며 다시 우승에 도전할 뜻을 내비췄다.시즌 개막 후엔 6월까지 5할 전후의 승률로 지난 2년 간에 비해 나름대로 선전하며 A클래스 경쟁을 벌였으나, 올스타전 직전에 6연패를 당하며 삐걱거리더니 8월부터 연전연패를 거듭하면서 A클래스 경쟁에서 멀어졌고 한때는 다시 최하위로 추락할 뻔했으나 다행히 시즌 막판에 6연승을 거둔 덕분에 5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최종 성적은 62승 73패 1무, 승률 .459로 역시나 아쉬운 성적이었지만 만약 이 시즌에도 최하위를 피하지 못했다면 8888577의 롯데 자이언츠나 암흑기 시절 베이스타즈도 차마 해보지 못한[28] 7년 연속 최하위를 겪을 뻔했다.
타선은 히야마 신지로와 신죠 츠요시가 타선의 중추를 맡았지만 둘 모두 공갈포 기질이 심각한 모습을 보여줬고 무엇보다 외국인 선수가 또 실패로 끝나버렸다. 마이크 그린웰은 해당 항목에도 나오듯 '스프링캠프 도중 귀국 → 5월 복귀 후 몇 경기 못 뛰고 발뼈 골절 → "이 부상은 야구를 그만두라는 신의 계시다"라는 말을 남기고 은퇴 선언 및 귀국'이라는 전설 같은 행적으로 일본프로야구 최악의 먹튀로 역사에 남게 되었고, 그린웰의 갑작스러운 은퇴에 황급히 영입한 다넬 콜스[29]도 부상으로 제대로 된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데 이어 그린웰과 함께 영입한 필 하이엇도 타율 .204 11홈런으로 완벽한 공갈포의 모습을 보여주며 둘 모두 1년 만에 방출되었다. 그나마 와다 유타카가 개막 24시합 연속 안타로 일본 신기록을 쓴 데 이어[30] 지난 해 오릭스 블루웨이브에서 이적해 온 히라츠카 카츠히로가 타율 .293, OPS .805 17홈런 68타점의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며 중심타선에서 공갈포 노릇을 하던 신죠와 히야마의 부진을 메꿔줬지만 결국 팀은 또 다시 득점 최하위를 기록하고 말았다.
투수진은 팀 평균자책점 3.70(리그 3위)으로 지난 시즌보다 개선되었고 야부 케이이치와 유후네 토시로가 3점대 중반의 평균자책점과 10승을 기록하면서 그럭저럭 활약했으나 카와지리 테츠로가 5승 14패로 무너져 다패왕이 되면서 이 시즌에도 다패왕 배출은 피하지 못했다.
3.5.2. 1998년 : 6위
시즌 개막 전 팀의 주전 포수 및 유격수인 세키카와 코이치와 쿠지 테루요시를 주니치 드래곤즈의 야노 아키히로, 타이호 야스아키와 맞바꾸는 트레이드를 단행했고, 여기에 새 외국인 선수로 주니치에서 1994년부터 1996년까지 3년 연속 수위타자를 수상했던 알론조 파웰과 데이브 한센을 영입해 타선 강화를 노렸다.그러나 막상 개막 3연패로 불안한 출발을 보이면서 시작부터 하위권에 가라앉았고, 5월 중순까진 4~5위 이내에서 어떻게든 버텼으나 6월 중순부터 6연패를 당하면서 다시 최하위로 추락하더니 7월엔 7연패, 8월엔 무려 12연패로 침몰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며 결국 반등의 여지 없이 52승 83패, 승률 .385의 성적으로 우승팀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와 27게임차나 되는 압도적 승차를 기록하며 최하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투타 전력의 부족함이 또 다시 여지 없이 드러난 해로, 트레이드로 데려온 타이호 야스아키가 규정타석에 미달했음에도 21홈런을 쳤지만 와다 유타카가 노쇠화의 기미를 보여준 데 이어 신죠 츠요시-히야마 신지로의 중심타선은 여전한 선풍기질로 일관했으며[31] 외국인 선수 영입도 또 다시 실패해서 알론조 파웰은 주니치 시절부터 우려되던 안 좋은 무릎 상태가 더 나빠진 탓에 부진한 모습을 보이다 시즌 도중 방출됐고 함께 영입한 데이브 한센도 역시 타율 .255 11홈런의 부족한 성적에 불안한 수비까지 합쳐져 결국 1년 만에 방출됐다. 투수진에선 야부 케이이치와 카와지리 테츠로가 꾸준히 선발 로테이션을 돌며 10승을 기록했고 벤 리베라가 마무리 투수로 27세이브를 기록했으나 역시나 다른 투수들이 부진한 탓에 팀 평균자책점이 3.95(리그 5위)로 좋지 못했다.
그나마 유일한 위안은 쿠지를 대신해 새 주전 유격수가 된 이마오카 마코토(타율 .293 7홈런 44타점)와 신인 우익수 츠보이 토모치카(타율 .327 2홈런 21타점)가 나름대로 준수한 성적을 보여주고, 야노 아키히로가 주전 포수를 꿰차며[32] 팀의 새 주축이 될 만한 신예들을 발굴했다는 점 뿐이었다.
시즌 종료 후 요시다 요시오 감독이 사임을 선언하며 2년 만에 물러나게 되었는데, 그 동안 계속되어 왔던 구단 OB 출신 감독들로는 더 이상 팀의 체질 개선을 꾀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구단 프런트는 무려 같은 해까지 야쿠르트 스왈로즈 감독을 맡으며 팀의 최전성기를 구축했다가 막 사임한 노무라 카츠야를 차기 감독으로 초빙하는 강수를 두었다.
3.6. 노무라 카츠야 감독 체제
3.6.1. 1999년 : 6위
야쿠르트의 황금기를 구축한 명장 노무라 카츠야의 취임과 함께 맞이한 1999년엔 시즌 초반부터 7연패를 당했다가 다시 6연승을 하던 우여곡절 속에서도 5할 승률을 유지한 채 4월을 A클래스로 마감했고, 5월에 13승 9패로 선전하며 다른 팀들을 제치고 2위로 부상하더니 6월 9일엔 개막 11연승 이후로 주춤하던 주니치 드래곤즈를 따라잡으며 7년 만에 1위를 기록하는 쾌거를 발휘했다. 그렇게 올해는 다르다를 보여주나 싶던 한신이었으나 6월 중순부터 5연패에 빠지며 서서히 하락세를 타더니 7월부터 9연패를 포함한 4번의 4연패를 당하면서 A클래스와 멀어지고 말았고, 그나마 히로시마 토요 카프가 한신보다 더한 하락세를 보여준 덕에 5위로 시즌을 마감하나 싶었지만 6월에 무너진 기세가 시즌 최후반에 더더욱 가파르게 내려앉으면서 결국 9~10월에 12연패를 포함한 5승 20패로 완전히 박살난 채 2년 연속 최하위로 시즌을 마쳤다. 최종 성적은 55승 80패 승률 .407, 우승팀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승차는 26게임차였다.전력 부실은 여전히 팀의 발목을 잡아서 토종 타자들 중에선 3할 타율을 기록한 츠보이 토모치카와 야노 아키히로 외엔 팀에 마땅히 믿을 만한 타자가 없었고, 외국인 타자도 새로 영입한 마이크 존슨이 전반전에 19홈런을 치며 '바스의 재래' 소리를 들었으나 후반전엔 다른 팀 투수들에게 약점을 간파당해 불과 1홈런에 그치며 1년 만에 퇴단한 데 이어 함께 영입한 마이크 브로워스도 성적 부진과 구단과의 불화까지 겹쳐 중도 퇴단하며 또 다시 실패로 끝났다. 이렇다 보니 팀 홈런은 센트럴리그 최하위(97개), 득점은 양대리그 유일의 400점대(490점)로 당당히 최하위를 차지. 투수진도 팀 평균자책점은 리그 3위였지만 4.04로 안정감이 있다고 하긴 힘들었는데, 선발진이 무너져서 100이닝을 채운 선수가 야부 케이이치(173.1이닝), 대럴 메이(112.1이닝, 규정이닝 미달) 단 2명에 불과했고 이 둘조차 승수는 고작 6승에 불과했다.[33] 후쿠하라 시노부가 벤 리베라의 부상 이탈로 중간계투와 마무리를 오가며 10승 9세이브를 기록한 게 사실상 유일한 위안이었을 지경.
3.6.2. 2000년 : 6위
FA로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에이스 투수였던 호시노 노부유키를 영입했고, 새 외국인 선수로 외야수 토니 타라스코, 3루수 제이슨 하트키 등의 타자들을 비롯해 퇴단한 벤 리베라를 대신할 새 마무리 투수 후보로 그렉 한셀 등을 영입했다.시즌 개막을 3연패로 맞이하며 좋지 못한 시작을 보이나 했지만 직후인 4월 중순부터 9연승을 달리며 작년에 이어 시즌 초반부터 A클래스 경쟁에서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4월 말부터 6연패를 2번이나 당하며 5월 중순에 다시 최하위로 떨어졌고, 이후로는 내내 최하위를 지키며 간간히 최하위권으로 떨어지는 다른 팀들과 탈꼴찌 경쟁을 벌이는 신세가 되었다. 그나마 후반전 초반에 10승 3패의 호성적을 거두며 반등의 여지를 보이나 했지만 곧바로 9연패를 당하면서 희망의 싹조차 사라져 버렸고, 결국 9월 이후 7승 17패로 추락하며 그대로 3년 연속 최하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최종 성적은 57승 78패 1무 승률 .422.
신죠 츠요시가 타율 .278/OPS .812 28홈런 85타점으로 커리어하이를 기록한 데 이어 타이호 야스아키도 출장 기회가 적은 가운데 23홈런을 쳐내며 주포 역할을 해준 덕분에 팀 홈런은 114개로 4위를 기록해 럭키존을 철거한 1992년 이후 처음으로 최하위 탈출에 성공했으나, 타선의 연결 능력 부족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아서 팀 타율(.244), 득점(473점)은 계속해서 리그 최하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새로 영입한 토니 타라스코(102시합 타율 .239/OPS .735 19홈런 57타점, 홈런은 팀 3위)와 제이슨 하트키(76시합 타율 .272/OPS .687 4홈런 27타점)은 스캇 쿨바&글렌 데이비스 콤비 이후로 부진만 일삼던 한신의 외국인 타자들 가운데선 각각 준수한 외야 수비와 나쁘지 않은 교타력으로 나름 제 역할을 해줬지만 반대로 각각 낮은 타율과 불안한 수비가 원인이 되어 이들도 1년 만에 방출되었다.
투수진은 카와지리 테츠로가 10승을 기록하고 선발 투수 5명이 100이닝 이상을 소화한 데 이어[34] 본래 마무리 투수 후보였던 그렉 한셀이 의외로 선발로서의 재능을 보여준 덕에 바로 로테이션에 들어가[35] 7승 8패로 선전하며 팀 평균자책점 3위(3.91)를 기록했으나 여전한 전력 부족으로 큰 도움이 되진 못했다.
시즌 종료 후 신죠 츠요시가 FA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진출하고 타이호 야스아키와 토니 타라스코가 퇴단해 팀 홈런 1~3위가 한꺼번에 팀을 떠나는 상황이 발생하며 팀 전력에 비상이 걸리게 되었다.
3.6.3. 2001년 : 6위
주포들이 3명이나 떠난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기동력을 중심으로 한 야구를 펼칠 것을 천명했다. 대표적으로 스프링캠프에서 지난 해 드래프트 4순위, 7순위로 지명한 아카호시 노리히로, 후지모토 아츠시를 위시한 빠른 발을 가진 7명의 선수들[36]에게 일명 'F1 세븐'이란 명칭을 붙여 마케팅에 나선 것이 그 예시.개막 초반엔 지난 해처럼 5할 승률을 유지하며 A클래스 경쟁에 참가했으나 4월 말부터 7연패를 당하며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와 탈꼴찌 싸움을 벌이는 신세가 되었고, 결국 6월부턴 요코하마에게도 밀려 잠깐씩 연승을 타 5위와 근소차로 좁히는 것 외엔 이렇다 할 반등 없이 꼴찌를 유지하며 그대로 4년 연속 최하위로 시즌을 마쳤다. 최종 성적은 57승 80패 3무 승률 .416, 우승팀 야쿠르트 스왈로즈와는 20.5게임차.
앞서 서술한 F1 세븐의 주축인 아카호시 노리히로가 곧바로 신죠 츠요시의 메이저리그 도전으로 빈 자리가 된 주전 중견수에 안착해 39도루로 도루왕에 오른 건 물론 골든글러브와 신인왕까지 수상하며 대박을 터뜨렸지만 나머지 F1 세븐의 멤버들이 준주전으로 나오던 카미사카 타이치로, 오키하라 요시노리를 빼면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며[37] 시즌 전 천명한 기동력 야구는 팀 도루 3위(78개)를 빼면 그다지 성공했다고 보기 힘들었다. 타격에선 히야마 신지로가 중거리 교타자로 부활에 성공해 데뷔 첫 3할 타율과 12홈런을 기록했고 여기에 거포 유망주 하마나카 오사무가 13홈런, 야쿠르트 스왈로즈 출신의 베테랑 히로사와 카츠미가 12홈런을 기록하며 중추 역할을 해줬지만 그다지 무게감이 있다고 보긴 힘든 모습으로 팀 타율, 홈런, 득점 모두 최하위에 머물렀다. 그 와중에 시즌 초반의 호성적으로 '바스의 재래' 소리를 듣던 이반 크루즈가 팀 최다인 14홈런을 쳤지만 점차 타격이 하락하다 어깨 부상으로 중도 귀국한 뒤 그대로 방출되며 외국인 선수 잔혹사를 또 다시 이어간 건 덤.
투수진 역시 전력 부족으로 고생한 건 마찬가지라서 10승 투수가 전무했던 데다 팀 평균자책점은 리그 4위(3.75)에 그쳤고 팀에서 다패왕이 2명이나 나왔다. 그나마 그 중 1명이자 막 주축 선발로 도약한 이가와 케이가 다패왕(9승 13패)을 수상했을지언정 2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팀의 에이스로 안착한 것이 유일한 위안.
이렇게 노무라 카츠야 감독 체제에서도 3년 연속 최하위라는 굴욕을 맛보긴 했지만 구단에서는 재임 기간 동안 팀의 리빌딩에 공을 들인 점을 인정해 2002년에도 노무라와 재계약을 맺을 것을 결정했으나, 오프시즌인 12월 5일에 노무라의 부인이 2억엔 가량의 탈세 혐의로 체포되는 바람에 같은 날 노무라가 감독직 사임을 발표하며 3년 동안 이어진 노무라 체제는 허무하게 끝을 맺게 되었다.
그리고 노무라는 퇴임 전 어떤 인물을 후임 감독으로 추천했는데, 그 인물은 다름 아닌 같은 해까지 주니치 드래곤즈의 감독을 역임했던 호시노 센이치였다. 내심 자신의 재임 기간 중에 팀을 재건하는 건 불가능하겠다고 느낀 노무라가 "패배주의가 만연한 지금의 한신을 재건하기 위해선 호시노와 같은 열혈파 감독이 아니면 안 된다"란 생각으로 호시노를 추천한 것이었는데, 이 추천을 받아들여 한신은 그동안 주니치의 상징이나 다름없던 호시노[38]를 차기 감독으로 초청하면서 또 한 번의 파격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3.7. 호시노 센이치 감독 체제
3.7.1. 2002년 : 4위
시즌 전 상술한 호시노의 선임과 함께 코치진을 일신하는 한편 적극적인 보강에 나서서 닛폰햄 파이터즈의 중장거리 교타자 카타오카 아츠시를 FA로, 지난 해 오릭스 블루웨이브에서 38홈런을 기록했으나 연봉 문제로 계약이 결렬된 조지 아리아스를 영입했다.그렇게 적극적인 보강을 한 결과 한신은 시범경기에서 1위를 차지한 데 이어 정규시즌에서도 개막 7연승을 달리는 등 4월까지 17승 8패를 기록해 단독 1위로 독주하고 5월에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추격을 허용하긴 했지만 12승 10패로 준수한 성적을 기록하며 A클래스, 더 나아가 우승도 노려보는 듯 했다. 그러나 아카호시 노리히로 등 주전 선수들이 연달아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6월에 4승 13패로 무너지면서 삐걱거리기 시작했고, 전반기가 끝날 때까지 5할대 승률에서 버티면서 A클래스 경쟁을 이어갔지만 결국 8월부터 버티지 못한 채 다시 하락세를 타면서 4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최종 성적은 66승 70패 4무, 승률 .485.
연달은 부상자의 속출로 이 시즌에도 아쉽게 B클래스로 시즌을 마쳤지만 그래도 시즌 초반에 1위로 선전하는 등 지난 10년 동안 부진만 거듭하던 과거와는 한결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는데, 무엇보다 그동안 약점으로 지적된 선수단의 전력이 한층 강화되어서 조지 아리아스는 32홈런으로 거포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고 여기에 2루수로 전향한 이마오카 마코토가 타율 .317(5위)에 15홈런을 기록하면서 타격에서 한층 성장한 모습을 보여줬으며, 히야마 신지로는 2년 연속 타율 3할엔 실패했지만 타율 .293 13홈런으로 준수한 활약을 이어가며 지난 시즌의 반등이 결코 플루크가 아니었음을 증명했다. 카타오카 아츠시는 부상 여파로 타격 부진에 시달리며 기대 이하의 성적(타율 .228/OPS .663 11홈런)에 그쳤으나 하마나카 오사무(타율 .301 18홈런)와 아카호시 노리히로(26도루, 2년 연속 도루왕)는 부상으로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했음에도 나름의 활약을 보여주며 최선을 다했다. 투수진도 패전만 적립하던 모습에서 벗어나 3명의 10승 투수를 배출한 데 이어 이가와 케이가 209.2이닝(1위) 14승 9패 평균자책점 2.49(3위)에 206탈삼진으로 최다탈삼진 타이틀을 수상하며 팀의 에이스 투수로 확실히 자리잡았다.
이렇게 성적과는 별개로 서서히 팀을 재건한 성과가 어느 정도 나오면서 다음 시즌을 기대하게 만든 한 해가 되었다.
3.7.2. 2003년 : 우승 - 암흑기를 끝내다
2002년 시즌 종료 후 선수단의 1/3 가량이나 되는 26명의 선수들을 방출하는 등 대대적인 체질 개선에 나선 데 이어 FA로 히로시마 토요 카프의 강타자 카네모토 토모아키를, 메이저 리그 생활을 마무리지은 이라부 히데키를 영입하며 제대로 칼을 간 한신은 이 시즌에 드디어 무너졌던 명성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교타와 장타를 두루 갖춘 수위타자 이마오카 마코토(타율 .340/OPS .864 12홈런 72타점)-빠른 발의 도루왕 아카호시 노리히로(타율 .312/출루율 .378 61도루)가 득점권을 양산하는 테이블 세터와 팀의 새로운 리더인 3번 카네모토 토모아키(타율 .289/OPS .848 19홈런 77타점)-해결사 5번 조지 아리아스(타율 .265/OPS .899 38홈런 107타점)의 강타자 클린업[39], 주전 포수이자 하위타선의 복병 역할을 맡은 야노 아키히로(타율 .328/OPS .897 14홈런 79타점) 등 어느 타순에서도 쉴 틈이 없는 강타선을 구축하고 여기에 다승왕 및 평균자책점 1위를 수성한 에이스 이가와 케이(206이닝 20승 5패, 2.80)를 주축으로 한 준수한 선발진까지 완성시킨 한신은 1시합당 평균 5.2점(총합 728득점)이란 무지막지한 득점력과 팀 평균자책점 1위(3.53)의 철벽 투수력을 앞세워 시즌 초부터 연승을 거듭하면서 4월 말에 1위에 오른 뒤 단 1번도 2위로 미끄러지는 일 없이 시즌 내내 독주 체제를 이어갔고[40], 결국 9월 15일 히로시마 토요 카프와의 한신 코시엔 구장 홈경기에서 끝내기로 승리한 뒤 같은 날 2위 야쿠르트 스왈로즈가 패배해 매직넘버를 완전히 지우면서 18년 만의 센트럴 리그 제패와 함께 암흑기를 완전히 청산해냈다. 최종 성적은 87승 51패 2무, 승률 .630으로 2위 주니치 드래곤즈와 14.5게임차까지 벌리며 센트럴 리그를 압도한 최고의 시즌이 되었다.
비록 같은 해 일본시리즈에서는 마찬가지로 준수한 강타선을 자랑하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게 격전 끝에 3승 4패로 아쉽게 우승을 내줬지만, 일본시리즈에서도 매 경기마다 명승부를 펼치면서 그 동안의 암울했던 암흑기를 청산하고 다시금 강팀으로 성장했음을 유감 없이 보여줬다.
4. 암흑기 종결 후
2003년 시즌 종료 후 호시노 센이치 감독이 건강 문제로 사임을 선언하면서 1985년 일본시리즈 우승의 주역이었던 오카다 아키노부가 감독으로 취임했다. 2004년엔 지난 해 압도적인 전력을 보여줬던 투타가 정체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4위에 그쳤지만, 2005년엔 타선에서 대폭발한 카네모토 토모아키와 이마오카 마코토의 맹활약 속에 다시 센트럴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다만 당해 일본시리즈에선 치바 롯데 마린즈에게 33-4로 비참하게 패퇴했다.그래도 암흑기가 끝난 이후엔 몇 차례 B클래스에 그친 시즌도 있어도 매 시즌마다 꾸준히 클라이맥스 시리즈 진출권을 확보하고 우승 경쟁을 벌이는 강팀으로 재도약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문제는 번번이 경쟁에서 패배하며 우승을 못했다는 것인데, 특히 2008년엔 전반전에 매직넘버를 점타시키고 한때 2위와 13게임차까지 벌릴 정도로 압도적인 1위를 달렸으나 2008 베이징 올림픽 시기 전후로 침체된 모습을 보이다 후반전에 압도적인 기세로 쫓아온 요미우리에게 시즌 막판에 밀려나 역전 우승을 허용하는 굴욕을 당했다. 그래도 2014년엔 2위로 진출한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4연승으로 꺾으며 9년 만의 일본시리즈 진출이란 쾌거를 이뤄냈으나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에게 1승 4패로 무기력하게 패퇴한 데 이어 시리즈 패퇴가 결정된 5차전에선 니시오카 츠요시의 끝내기 수비방해가 나오며 또 다시 일본시리즈 잔혹사를 쓰고 말았다.
그렇게 우승과 멀어진 채 시간이 흐르던 중 2018년에 17년 만의 최하위로 추락한 뒤 새로 취임한 야노 아키히로 감독의 지휘 아래 노쇠화된 선수단의 대대적인 리빌딩에 나섰고, 그 결과 치카모토 코지, 나카노 타쿠무, 오오야마 유스케, 사토 테루아키 등 팀의 새로운 주축들이 등장함과 동시에 4년 연속 A클래스에 들어가면서 성과를 내는 데 성공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여러모로 험난한 시즌을 보내면서[41] 우승엔 끝내 도달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리빌딩을 성공적으로 진행하며 우승의 희망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고, 결국 오카다 아키노부 감독이 취임한 2023년에 안정된 투타 전력을 바탕으로 꾸준히 1위를 사수하며 18년 만의 센트럴리그 우승에 성공한 뒤 일본시리즈에서도 오릭스 버팔로즈를 꺾고 38년 만의 일본 제일을 달성하면서 마침내 오랜 한을 풀었다.
5. 암흑기 성적
| <rowcolor=#fefe01> 연도 | 감독 | 순위 | 경기수 | 승 | 패 | 무 | 승률 | 비고 |
| 1987 | 요시다 요시오 | 6위 | 130 | 41 | 83 | 6 | .331 | 구단 역사상 최저 승률 |
| 1988 | 무라야마 미노루 | 6위 | 130 | 51 | 77 | 2 | .398 | |
| 1989 | 5위 | 130 | 54 | 75 | 1 | .419 | ||
| 1990 | 나카무라 카츠히로 | 6위 | 130[42] | 52 | 78 | 0 | .400 | |
| 1991 | 6위 | 130 | 48 | 82 | 0 | .369 | ||
| 1992 | 2위 | 132 | 67 | 63 | 2 | .515 | 암흑기 유일의 A클래스 | |
| 1993 | 4위 | 130 | 63 | 67 | 0 | .485 | ||
| 1994 | 4위[43] | 130 | 62 | 68 | 0 | .477 | ||
| 1995 | 6위 | 130 | 46 | 84 | 0 | .369 | 7월 23일 나카무라 카츠히로 감독 중도 사임[44] | |
| 1996 | 후지타 타이라 | 6위 | 130 | 54 | 76 | 0 | .415 | 9월 12일 후지타 타이라 감독 해임[45] |
| 1997 | 요시다 요시오 | 5위 | 136 | 62 | 73 | 1 | .459 | |
| 1998 | 6위 | 135 | 52 | 83 | 0 | .385 | ||
| 1999 | 노무라 카츠야 | 6위 | 135 | 55 | 80 | 0 | .407 | |
| 2000 | 6위 | 136 | 57 | 78 | 1 | .422 | ||
| 2001 | 6위 | 140 | 57 | 80 | 3 | .416 | ||
| 2002 | 호시노 센이치 | 4위 | 140 | 66 | 70 | 4 | .485 | |
| <rowcolor=#373a3c> 1987~2002 (총 16시즌) | 1986 | 821 | 1147 | 18 | .417 | 2위 1회, 4위 2회, 5위 2회, 6위 10회 | ||
6. 둘러보기
| |
| 구단 |
| 한신 타이거스/암흑기 |
|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암흑기 |
| 주니치 드래곤즈/암흑기 |
| 비밀번호에 대한 정보는 비밀번호(스포츠)를 참고 |
[1] 이것도 양대리그 이후의 얘기지, 단일리그 시절엔 4번의 우승을 차지하며 난카이 호크스와 함께 자이언츠의 독주를 유이하게 저지하던 팀이었다.[2] 그나마 10승 투수는 딱 1명을 배출했는데 이마저도 베테랑 마무리 투수였던 야마모토 카즈유키가 팀내 최다승+최다세이브(11승 15세이브)을 기록한 것이었다. 여담으로 지난 해인 1985년에도 팀내 10승 투수 중 한 명이 마무리 투수를 맡았던 나카니시 키요오키(11승 19세이브)였다.[A] 정확히는 이전인 1975~1977시즌에도 감독을 맡은 적이 있어서 각각 2, 3차지만 1975~1977시즌은 암흑기에 포함되지 않는 관계로 이 항목에선 임기를 1, 2차로 정리한다.[4] 항목에 있는 1980년대 쟈니즈의 유명 아이돌 그룹에 빗댄 별명이다.[5] 그 와중에 마무리 투수를 맡던 나카니시를 시즌 도중 선발 투수로 전향시킨 게 반대로 마무리 투수가 없어서 졸지에 집단 마무리 체제로 시즌을 치르는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6] 2014년 8월 주니치 드래곤즈가 월간 20패 기록을 한번 더 만들었다.[7] 패리쉬의 경우는 아예 퇴단 시점에서 센트럴리그 홈런 1위를 차지했었다. 결국 당해 센트럴리그 홈런왕은 패리쉬의 은퇴 선언을 틈타 치고 올라온 오치아이 히로미츠(34홈런)가 차지했다.[8] 그나마 선발과 롱 릴리프를 오가며 전천후를 안 가리고 던진 노다 코지, 나카타 요시히로가 10승을 올려줬다.[9] 이 기록은 31년 후인 2022년에 9연패로 경신했다. 다만 해당 시즌 한신은 교류전에서 12승 6패로 선전하는 등 6월부터 서서히 무너졌던 기세를 추스르면서 최종적으로 3위를 기록하고 기적적인 클라이맥스 시리즈 막차 탑승에 성공했다.[10] 특히 6월엔 시작부터 10연패, 1승 후 다시 7연패라는 처참한 기록과 함께 4승 18패로 완전히 나락에 떨어졌다. 만약 저 1승을 했던 경기마저 졌다면 1998년 치바 롯데 마린즈가 수립한 프로야구 연패 기록인 18연패를 7년 먼저 수립할 뻔했다.[11] 특히 당해 팀 타율 및 팀 특점은 12구단 전체 최하위를 차지했고(여기다 팀 타율은 12구단 중 유일하게 .250 미만을 기록했다.), 팀 평균자책점은 센트럴리그에서 유일하게 4점대를 기록했다.[12] 반대로 오말리와 함께 영입했던 마벨 윈은 타율 .230/OPS .638 13홈런 44타점의 부진한 성적으로 바스의 재래 소리를 듣게 되면서 1년 만에 방출됐다.[13] 직전 시즌까지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에서 4년 간 뛰면서 매 시즌 3할 타율에 더해 1991년엔 리그 수위타자까지 수상하는 맹활약을 펼치다가 홈런이 적다는 이유로 타이요가 재계약을 포기하자 한신이 곧바로 영입했다. 당해 시즌엔 커리어하이인 22홈런을 치며 한신의 약진에 기여한 공로로 1루수 베스트나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14] 후반전에서도 이 기조가 이어지면서 최종적으로 1위 야쿠르트, 4위 히로시마의 승차는 불과 3게임차에 불과했다.[15] 9연패 도중인 9월 11일의 맞대결에선 무려 6시간 26분이나 질질 끄는 접전 끝에 날짜가 지나고 나서야 무승부로 경기를 마치며 프로야구 역대 최장 경기시간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고.[16] 이 기간 중 야쿠르트와의 맞대결에서 1승 4패로 제대로 압살당하면서 재차 1위를 빼앗기는 큰 원인이 되고 말았다.[17] 당시 상술한 최장시간 경기의 재경기를 포함한 2연전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이 시점에서 한신은 단독 1위 가능성이 완전히 소멸하여 우승을 위해선 야쿠르트와의 2연전을 전승해 공동 1위를 차지하고 플레이오프로 끌고 가는 것밖에 없었다.[18] 정반대로 오릭스로 이적한 노다 코지는 당해 선발진의 일원으로 꾸준히 뛰면서 17승으로 최다승 타이틀을 수상했고, 이후에도 5년 간 선발진의 일원으로 활약하며 오릭스의 리그 2연패와 1996년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했다.[19] 파쵸렉은 부진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시즌 도중 은퇴를 선언했다.[20] 2022년 주니치 이전까지 승패마진 -10 미만으로 최하위를 기록한 마지막 사례였다. 2년 전처럼 이 시즌에도 1위(70승 60패)와 최하위간의 격차는 9게임차에 불과했다.[21] 결국 주니치도 타카기 모리미치 감독이 6월 2일에 중도 사임했고, 그 뒤 토쿠타케 사다유키 수석 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았으나 토쿠타케도 성적 부진을 막지 못한 채 7월 23일자로 대행에서 물러나 시마노 이쿠오 2군 감독이 시즌이 끝날 때까지 대행의 대행으로 팀을 지휘하는 혼란을 겪었다.[22] 덤으로 FA로 영입한 야마오키 유키히코는 오른쪽 어깨 위화감으로 1년 내내 2군에만 있다가 시즌 종료 후 방출되면서 완벽한 먹튀가 되고 말았다.[23] 2군에서 발목 부상으로 트레이너와 개별적으로 연습 메뉴를 소화하다 후지타 타이라 감독에게 연습장에 지각한 것으로 간주당해 땡볕에서 정좌로 앉아있는 벌칙을 받았고, 여기에 부상이 낫지 않았음에도 개인 노크를 시키는 것은 물론 시즌 종료 후엔 신인들이 참가하는 교육 리그에까지 참가할 것을 명령하는 등 부상을 회복시킬 틈을 안 준 탓에 사이가 벌어졌다고 한다.[24] 특히 야쿠르트 스왈로즈에겐 7승 19패로 압살당한 것도 모자라 4월 18일부터 7월 31일까지 3달이 넘는 기간 동안 무려 15연패를 당하는 흑역사를 만들어냈다.[25] 이 과정에서 해임에 불복한 후지타 감독이 구단 사무실에서 프런트와 무려 9시간 반 동안 농성 회담을 벌였고, 회담 도중 날짜가 지났음에도 결론을 맺지 못한 채 귀가했다가 오후에 다시 회담을 가지고 나서야 겨우 해임 결정에 합의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26] 지난 시즌에 활약해줬던 스캇 쿨바와 글렌 데이비스가 성적 부진으로 중도 방출된 데 이어 쿨바와 데이비스를 대신해서 영입한 케빈 마스와 크레이그 워싱턴도 그다지 만족스러운 성적을 내지 못하며 역시 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다. 사실상 1년 만에 외국인 선수를 4명이나 해고한 것.[A] [28] 참고로 베이스타즈는 전신인 타이요 훼일즈 시절인 1954년부터 1959년까지 6년 연속 리그 최하위를 기록한 적이 있다.[29] 지난 해인 1996년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주전 3루수로서 타율 .302 29홈런 79타점이란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으나 발이 느리고 수비력이 너무 나빴던 탓에 구단 수뇌부가 나고야 돔으로 옮길 예정이었던 다음 시즌부터는 기용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1년 만에 방출되었다.[30] 그러나 와다조차 7월에 손가락 골절상으로 두 달 가량 팀을 이탈하는 바람에 후반전 이후 팀의 붕괴에 적잖은 영향을 미치고 말았다.[31] 특히 신죠는 타율 .222 6홈런 27타점, OPS .602로 개인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며 팀의 혈막으로 전락해 버렸다.[32] 다만 야노도 타격 성적에선 타율 .211 3홈런 20타점, OPS .593으로 부진을 면하지 못했다.[33] 특히 야부는 6승 16패로 다패왕을 차지하며 5년 연속으로 다패왕을 배출하는 굴욕을 겪었다.[34] 다만 FA로 영입했던 호시노 노부유키는 5승 10패, 평균자책점 4.04로 부진한 성적에 그쳤다.[35] 본래 맡을 예정이었던 마무리 투수 자리엔 1992년 2위를 기록할 당시의 선발진의 일원인 베테랑 카사이 미노루가 들어가 17세이브를 기록했다.[36] 앞서 서술한 2명 외의 F1 세븐의 나머지 멤버 5명은 오키하라 요시노리, 카미사카 타이치로, 히라시타 코지, 마츠다 마사시, 타카나미 후미카즈가 있으며 여기에 객원 멤버로 타나카 슈타를 포함해 총 8명이 되었다.[37] 그리고 상술한 F1 세븐 멤버들은 아카호시와 2000년대 초중반에 팀의 주전 센터라인 내야수를 맡은 후지모토 아츠시를 제외하면 대다수가 잘해야 한두 시즌 준주전으로 반짝하거나 빠른 발을 살린 대주자 정도에 머무르면서 프로에서 성공하지 못했다.[38] 처음엔 호시노도 주니치의 상징이나 다름 없던 자신의 입지 때문에 한신의 감독 제안을 고민했으나, 평소 존경하던 나가시마 시게오가 "한신을 부활시켜서 전통의 일전을 다시 부흥시키자"라고 제안하면서 마음을 굳히고 한신 감독으로 취임할 것을 결정했다.[39] 4번을 맡았던 히야마 신지로는 개막 전 하마나카 오사무에게 주전 우익수 자리를 내줬다가 하마나카의 이탈로 다시 돌아온 영향도 있어서 다소 아쉬운 성적(타율 .278/OPS .797 16홈런 63타점)에 그치긴 했지만 그래도 카네모토와 아리아스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나름대로 충실히 수행했다.[40] 전반전 종료 전인 7월 8일에 매직넘버 49를 점등시키며 당시 센트럴리그 최단 기록을 수립했다. 죽음의 원정 기간엔 4승 11패로 부진하긴 했으나 이것도 코시엔에 돌아온 뒤 재차 연승을 이어간 덕에 팀의 독주에 악영향을 주진 않았다.[41] 2019년엔 후반전 내내 4위에 머물다 시즌 막판에 5위로까지 추락할 위기에 놓였으나 마지막 6경기를 전승하며 히로시마를 반 게임차로 제치고 극적인 3위 사수에 성공했고, 2021년엔 시즌 내내 1위를 달리다 9월 이후 맹렬한 기세로 추격해온 야쿠르트에게 따라잡혀 2008년과 비슷한 전개로 우승에 실패하고 말았다. 2022년엔 지난 해의 충격 탓인지 시즌 초 개막 9연패를 포함한 1승 15패로 처참히 무너지며 일찍 시즌을 접는 듯 했지만 교류전에서 12승 6패로 반등에 성공해 한때 2위까지 올라선 뒤 히로시마, 요미우리와의 각축전 끝에 최종 3위로 4년 연속 A클래스를 달성했다.[42] 이 시즌부터 2000년까지 센트럴 리그에서 무승부가 나온 경기의 재시합을 진행했다.[43] 야쿠르트 스왈로즈와 공동.[44] 후반전이 시작된 7월 29일부터 2군 감독이었던 후지타 타이라가 감독대행을 맡아 팀을 지휘했고 시즌 종료 후 정식 감독으로 취임했다.[45] 다음 날인 9월 13일부터 시바타 타케시 수석 겸 배터리코치가 감독대행을 맡아 시즌이 끝날 때까지 팀을 지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