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더스크롤 시리즈의 책 |
숫자 | A | B | C | D | E | F | G | H | I | J | K | L | M | N | O | P | Q | R | S | T | U | V | W | X | Y | Z (개별 문서) |
1. 개요
2920, The Last Year of the First Era엘더스크롤 시리즈에 나오는 책. 엘더스크롤 3: 모로윈드에서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총 12권으로 이루어져있는데, 각 권의 부제는 엘더스크롤 세계관의 역법에서 따왔다.
제1시대의 마지막 해, 레만 왕조의 몰락과 제2시대의 시작 그리고 아카비르 수석고문 통치기의 시작을 다루고 있는 역사 소설이다.
2. 1권
원문
2920년, 첫 번째 시대의 마지막 해
제1권: 샛별
칼로박 타운웨이 지음
2920년, 샛별 1일
모로윈드의 모운홀드에서
아말렉시아는 그녀의 모피 침대에 가로누워, 꿈을 꾸고 있었다. 태양의 그녀의 창으로 빛을 쏟아부어 숲과 그녀의 방을 유백색으로 물들인 탓에 눈을 뜨기 전까지는 그랬다. 정적과 고요함은 그녀가 꿈에서 맛보았던 피와 환희와는 너무도 달랐다. 잠시 동안, 그녀는 그저 천정을 응시하며 그녀의 예지를 정리하고자 노력했다.
그녀의 왕궁 궁정에는 겨울날 아침의 추위 가운데에서도 수증기로 가득한 끓는 욕탕이 있었다. 그녀의 손짓 한 번에 수증기가 걷혀나갔고, 북쪽을 마주한 서재에 있는 그녀의 연인 비벡의 얼굴과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황급히 말을 걸고 싶지는 않았다. 검붉은 로브를 걸치고, 매일 아침 그러하듯이 시를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보기 좋았다.
"비벡." 그녀가 말을 건네자, 그는 고개를 들어 미소짓고는 수천 마일 너머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전쟁의 끝을 보았어."
"80년이나 지난 지금, 누구도 마지막을 상상할 수 없을 줄 알았소만." 비벡은 웃는 얼굴로 대답했지만, 진지하게 알마렉시아의 예언을 믿고 있었다. "누가 이겼소? 모로윈드요, 아니면 시로딜의 제국이오?"
"소사 실이 모로윈드에 없다면, 우린 질 거야." 그녀가 대답했다.
"내 지식에 따르면 제국은 초봄에, 늦어도 첫 파종의 달까지는 북상하여 우릴 공격할 것이오. 당신이 아르테움으로 가서 그가 돌아오도록 설득할 수 있겠소?"
"오늘 출발하겠어." 그녀는 짤막히 대답했다.
2920년, 샛별 4일
블랙 마쉬의 기데온에서
황후는 그녀의 감방을 거닐었다. 겨울은 그녀의 활력을 낭비시킬 뿐이었고, 여름에는 그저 창가에 앉아 몸을 식혀주는 퀴퀴한 늪지의 바람결을 고마워하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방 저편에서 그녀가 아직 마무리하지 않은, 황실 궁정에서의 무도회를 묘사한 태피스트리가 그녀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테두리에서부터 그걸 갈갈이 찢었고, 찢겨나간 조각들은 바닥으로 흩날렸다.
이윽고 그녀는 쓸데도 없는 스스로의 반항을 비웃었다. 그녀는 그걸 말끔히 고치고, 또 100장도 더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이 남아 도는 판이었다. 7년 전 황제는 그녀를 지오베세 성에 유폐했고, 그 자신이나 그녀가 죽을 때까지 그대로 내버려 둘 작정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줄을 당겨 그녀의 기사인 주크를 호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 위병에 걸맞은 차림새를 갖춘 그가 문가에 나타났다. 블랙 마쉬의 코스린기[1] 부족 원주민의 대다수는 알몸으로 지내는 것을 선호했지만, 주크는 유행을 따르는 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오직 그의 얼굴과 목, 그리고 손을 통해서만 빛을 반사하는 그의 은빛 피부를 볼 수 있었다.
"폐하." 그가 절하며 말했다.
"주크." 황후 타비아는 뇌까렸다. "지루하기 짝이 없구나. 오늘은 우리 남편을 암살할 방법이 뭐가 있을지 이야기해보자꾸나."
2920년 샛별 14일
시로딜의 임페리얼 시티에서
'남풍의 기도를 알리는 종소리가 임페리얼 시티의 넓다란 큰길과 정원에 울려퍼지며, 모두를 각자의 신전으로 이끌었다. 황제 레만 3세는 언제나 지고신의 신전에서 예배에 참석했지만, 그의 아들이자 황위 계승자인 황자 쥘렉은 각각의 축일마다 서로 다른 신전에 모습을 비추는 것이 정치적으로 더 낫다고 보았다. 올해는 마라의 자비 대성당이었다.
자비 대성당에서의 예배는 다행스럽게도 짧았으나, 황제는 정오가 훨씬 지나서야 황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무렵, 투기장에 모인 투사들은 식전의 시작을 기다리는 데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수석 고문인 베르시듀-셰이가 카짓 곡예단의 공연을 편성한 덕분에, 군중들의 초조함은 저들보다는 덜한 편이었다.
"그대들의 신앙이 우리네 종교보다 훨씬 낫겠군." 황제는 사과의 뜻을 담아 그의 수석에게 말했다. "오늘의 첫 경기는 무엇인가?"
"솜씨 좋은 전사 두 사람의 일대일 결투입니다." 수석 고문이 태양을 머금은 비늘로 반짝이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각자의 문화에 따라 무장했지요."
"훌륭하군." 황제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경기를 시작하라!"
군중들의 함성소리로 가득한 투기장에 발을 들인 두 사람의 전사를 보자마자, 황제 레만 3세는 몇 개월 전 수락하고서는 잊어버렸던 무언가를 떠올렸다. 한 사람은 수석 고문의 아들인 사비리엔-초락으로, 상앗빛으로 반짝이는 장어와도 같았으며, 언뜻 보기에는 나약할 것 같은 늘씬한 팔에 그의 카타나와 와키자시를 꽉 쥐고 있었다. 에보니 갑옷과 야만스러운 오키쉬 투구, 그리고 방패와 장검으로 무장한 그 상대는 황제의 아들, 황자 쥘렉이었다.
"이건 정말 흥미롭겠군요." 수석 고문이 좁다란 얼굴에 넓다란 미소를 가득 띄우며 쉭쉭거렸다. "이런 식으로 시로딜과 아카비르가 대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건 대개 군단과 군단 사이의 전투였으니까요. 드디어 어느 쪽 철학이 더 훌륭한지 알 수 있겠습니다. 검에 맞서기 위해 방어구를 빚어내는 폐하의 백성들의 방식인지, 방어구에 맞서기 위해 검을 뽑아내는 저희네 방식 중에서 말이지요."
드문드문 자리한 아카비르 자문단과 수석 고문 그 자신을 제외하고는 군중들 중 어느 누구도 사비리엔-초락의 승리를 바라지 않았으나, 그의 우아한 움직임이 눈에 들어오자 다들 숨을 죽였다. 그의 검은 마치 몸 뒤로 뻗은 꼬리에 맞춰 팔에서 뻗어나온 다른 꼬리마냥 보였다. 젊은 뱀인간은 균형 있게 똬리를 틀고는, 공세를 취해 경기장 한가운데로 회전하며 들어갔다. 황자는 그보다는 덜 인상적인 전통 방식으로 터벅터벅 나아갔다.
그들이 서로 맞붙자, 군중은 즐겁게 환호했다. 아카비르인은 황자의 주위를 공전하는 달과도 같았고, 손쉽게 그의 어깨를 뛰어넘고는 뒤에서 일격을 가했다. 하지만 황자는 재빨리 방패를 휘둘러 공격을 막아냈다. 황자의 반격은 땅에 엎어진 그의 상대가 다리 사이를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며 다리를 걸었기 때문에 허공을 가르는 데 그쳤다. 황자는 큰 충돌음과 함께 지면에 나동그라졌다.
사비리엔-초락은 황자의 위로 비처럼 공격을 퍼부었으며, 황자는 그의 방패로 쏟아지는 일격들을 하나씩 하나씩 전부 막아냈다. 금속과 공기가 서로 녹아들어 한데 어우러지고 있었다.
"저희 문화에 방패는 없습니다." 베르시듀-셰이는 황제에게 속삭였다. "제 생각에, 아들에게는 방패가 생소하겠지요. 제 고향에서는 맞고 싶지 않다면 피할 따름입니다."
사비리엔-초락이 재차 눈부신 공격들을 퍼부으려 뒷발로 섰을 때, 황자는 그의 꼬리를 걷어차 순간 그를 물러나게 만들었다. 그는 곧장 자세를 갖췄지만, 황자도 두 발을 땅에 딛고 서 있었다. 둘은 서로의 주위를 맴돌았고, 뱀인간이 먼저 카타나를 내밀며 튀어나왔다. 황자는 적의 계획을 눈치채고는, 장검으로 카타나를 받아치고 방패로 와키자시를 막았다. 그 짧다란 꿰뚫는 칼날은 금속 사이에 끼었고, 사비리엔-초락은 균형을 잃었다.
황자의 장검이 아카비르의 가슴팍을 갈랐고, 갑작스레 엄습한 격렬한 고통은 그가 양쪽 무기를 전부 놓치게 만들었다. 그 순간, 전부 끝났다. 흙먼지 속에 나뒹구는 사비리엔-초락의 목을 황자의 장검이 겨누고 있었다.
"경기는 끝났다!" 황제의 외침은 경기장을 가득 메운 갈채에 묻혔다.
황자는 싱긋 웃고는 사비리엔-초락이 일어나 치유사에게 향하는 것을 도왔다. 황제는 안도하면서 그 수석 고문의 등을 두드렸다. 경기가 시작됐을 때, 그는 자신의 아들이 승리했음을 선언할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아드님께서는 훌륭한 전사가 되시겠군요." 베르시듀-셰이가 말했다. "그리고 위대한 황제가 되실 겁니다."
"이것만은 기억하게나." 황제는 웃었다. "그대들 아카비르인들이 현란한 기술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우리가 단 한 번 공격에 성공한다면, 그대들도 그걸로 끝이라네."
"아, 잘 새겨두도록 하겠습니다." 수석 고문이 끄덕였다.
레만은 그 말뜻을 헤아리느라 나머지 경기를 온전히 즐길 수 없었다. 혹시 황후가 그랬던 것처럼, 수석 고문도 또다른 적으로 돌아설 수 있을까? 이 건은 염두에 두고 지켜보아야 했다.
2920년, 샛별 21일
모로윈드의 모운홀드에서
"어째서 내가 내린 녹색 가운을 걸치지 않았느냐?" 모운홀드 공작은 그녀의 옷을 걸친 젊은 아가씨를 보며 물었다.
"맞지 않았거든요." 투랄라는 미소지었다. "그리고 제가 빨강색을 좋아하는 걸 아시잖아요."
"살이 쪘으니 맞지 않는 게지." 공작은 웃으며 그녀를 침대로 끌어내리고는 가슴팍과 배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그녀는 간지러워 깔깔댔지만, 몸을 일으켜 그녀의 붉은 로브로 스스로를 감쌌다.
"여성스럽게 나올 곳이 나오는 것 뿐이랍니다." 투랄라가 말했다. "내일 만날 수 있나요?"
"아니." 공작이 말했다. "내일은 비벡 님을 대접해야 하고, 모레는 에본하트 공작이 찾아올 예정이란다. 알마렉시아 님이 자리를 비우시기 전까지 그분과 그분의 정치 수완에 감사할 줄 몰랐다는 게 믿어지느냐?"
"저랑 같네요." 투랄라가 미소지었다. "제가 없어지고 나서야 제게 고마워하시겠죠."
"그럴 리가 있겠느냐." 공작이 코웃음쳤다. "지금도 네게 감사하고 있단다."
투랄라는 문을 나서기 전 공작이 마지막으로 입맞추도록 허락했다. 그녀는 그가 한 말을 계속 생각했다. 자신이 그의 아이를 뱄기 때문에 살이 쪘음을 알았을 때, 그는 그녀에게 얼마나 고마워할까? 그녀와 결혼할 정도로 고마워할까?
태양의 여명에서 계속.
2920년, 첫 번째 시대의 마지막 해
제1권: 샛별
칼로박 타운웨이 지음
2920년, 샛별 1일
모로윈드의 모운홀드에서
아말렉시아는 그녀의 모피 침대에 가로누워, 꿈을 꾸고 있었다. 태양의 그녀의 창으로 빛을 쏟아부어 숲과 그녀의 방을 유백색으로 물들인 탓에 눈을 뜨기 전까지는 그랬다. 정적과 고요함은 그녀가 꿈에서 맛보았던 피와 환희와는 너무도 달랐다. 잠시 동안, 그녀는 그저 천정을 응시하며 그녀의 예지를 정리하고자 노력했다.
그녀의 왕궁 궁정에는 겨울날 아침의 추위 가운데에서도 수증기로 가득한 끓는 욕탕이 있었다. 그녀의 손짓 한 번에 수증기가 걷혀나갔고, 북쪽을 마주한 서재에 있는 그녀의 연인 비벡의 얼굴과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황급히 말을 걸고 싶지는 않았다. 검붉은 로브를 걸치고, 매일 아침 그러하듯이 시를 짓고 있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보기 좋았다.
"비벡." 그녀가 말을 건네자, 그는 고개를 들어 미소짓고는 수천 마일 너머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전쟁의 끝을 보았어."
"80년이나 지난 지금, 누구도 마지막을 상상할 수 없을 줄 알았소만." 비벡은 웃는 얼굴로 대답했지만, 진지하게 알마렉시아의 예언을 믿고 있었다. "누가 이겼소? 모로윈드요, 아니면 시로딜의 제국이오?"
"소사 실이 모로윈드에 없다면, 우린 질 거야." 그녀가 대답했다.
"내 지식에 따르면 제국은 초봄에, 늦어도 첫 파종의 달까지는 북상하여 우릴 공격할 것이오. 당신이 아르테움으로 가서 그가 돌아오도록 설득할 수 있겠소?"
"오늘 출발하겠어." 그녀는 짤막히 대답했다.
2920년, 샛별 4일
블랙 마쉬의 기데온에서
황후는 그녀의 감방을 거닐었다. 겨울은 그녀의 활력을 낭비시킬 뿐이었고, 여름에는 그저 창가에 앉아 몸을 식혀주는 퀴퀴한 늪지의 바람결을 고마워하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방 저편에서 그녀가 아직 마무리하지 않은, 황실 궁정에서의 무도회를 묘사한 태피스트리가 그녀를 조롱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테두리에서부터 그걸 갈갈이 찢었고, 찢겨나간 조각들은 바닥으로 흩날렸다.
이윽고 그녀는 쓸데도 없는 스스로의 반항을 비웃었다. 그녀는 그걸 말끔히 고치고, 또 100장도 더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이 남아 도는 판이었다. 7년 전 황제는 그녀를 지오베세 성에 유폐했고, 그 자신이나 그녀가 죽을 때까지 그대로 내버려 둘 작정이었다.
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줄을 당겨 그녀의 기사인 주크를 호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국 위병에 걸맞은 차림새를 갖춘 그가 문가에 나타났다. 블랙 마쉬의 코스린기[1] 부족 원주민의 대다수는 알몸으로 지내는 것을 선호했지만, 주크는 유행을 따르는 걸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오직 그의 얼굴과 목, 그리고 손을 통해서만 빛을 반사하는 그의 은빛 피부를 볼 수 있었다.
"폐하." 그가 절하며 말했다.
"주크." 황후 타비아는 뇌까렸다. "지루하기 짝이 없구나. 오늘은 우리 남편을 암살할 방법이 뭐가 있을지 이야기해보자꾸나."
2920년 샛별 14일
시로딜의 임페리얼 시티에서
'남풍의 기도를 알리는 종소리가 임페리얼 시티의 넓다란 큰길과 정원에 울려퍼지며, 모두를 각자의 신전으로 이끌었다. 황제 레만 3세는 언제나 지고신의 신전에서 예배에 참석했지만, 그의 아들이자 황위 계승자인 황자 쥘렉은 각각의 축일마다 서로 다른 신전에 모습을 비추는 것이 정치적으로 더 낫다고 보았다. 올해는 마라의 자비 대성당이었다.
자비 대성당에서의 예배는 다행스럽게도 짧았으나, 황제는 정오가 훨씬 지나서야 황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 무렵, 투기장에 모인 투사들은 식전의 시작을 기다리는 데 인내심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수석 고문인 베르시듀-셰이가 카짓 곡예단의 공연을 편성한 덕분에, 군중들의 초조함은 저들보다는 덜한 편이었다.
"그대들의 신앙이 우리네 종교보다 훨씬 낫겠군." 황제는 사과의 뜻을 담아 그의 수석에게 말했다. "오늘의 첫 경기는 무엇인가?"
"솜씨 좋은 전사 두 사람의 일대일 결투입니다." 수석 고문이 태양을 머금은 비늘로 반짝이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각자의 문화에 따라 무장했지요."
"훌륭하군." 황제는 손뼉을 치며 말했다. "경기를 시작하라!"
군중들의 함성소리로 가득한 투기장에 발을 들인 두 사람의 전사를 보자마자, 황제 레만 3세는 몇 개월 전 수락하고서는 잊어버렸던 무언가를 떠올렸다. 한 사람은 수석 고문의 아들인 사비리엔-초락으로, 상앗빛으로 반짝이는 장어와도 같았으며, 언뜻 보기에는 나약할 것 같은 늘씬한 팔에 그의 카타나와 와키자시를 꽉 쥐고 있었다. 에보니 갑옷과 야만스러운 오키쉬 투구, 그리고 방패와 장검으로 무장한 그 상대는 황제의 아들, 황자 쥘렉이었다.
"이건 정말 흥미롭겠군요." 수석 고문이 좁다란 얼굴에 넓다란 미소를 가득 띄우며 쉭쉭거렸다. "이런 식으로 시로딜과 아카비르가 대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건 대개 군단과 군단 사이의 전투였으니까요. 드디어 어느 쪽 철학이 더 훌륭한지 알 수 있겠습니다. 검에 맞서기 위해 방어구를 빚어내는 폐하의 백성들의 방식인지, 방어구에 맞서기 위해 검을 뽑아내는 저희네 방식 중에서 말이지요."
드문드문 자리한 아카비르 자문단과 수석 고문 그 자신을 제외하고는 군중들 중 어느 누구도 사비리엔-초락의 승리를 바라지 않았으나, 그의 우아한 움직임이 눈에 들어오자 다들 숨을 죽였다. 그의 검은 마치 몸 뒤로 뻗은 꼬리에 맞춰 팔에서 뻗어나온 다른 꼬리마냥 보였다. 젊은 뱀인간은 균형 있게 똬리를 틀고는, 공세를 취해 경기장 한가운데로 회전하며 들어갔다. 황자는 그보다는 덜 인상적인 전통 방식으로 터벅터벅 나아갔다.
그들이 서로 맞붙자, 군중은 즐겁게 환호했다. 아카비르인은 황자의 주위를 공전하는 달과도 같았고, 손쉽게 그의 어깨를 뛰어넘고는 뒤에서 일격을 가했다. 하지만 황자는 재빨리 방패를 휘둘러 공격을 막아냈다. 황자의 반격은 땅에 엎어진 그의 상대가 다리 사이를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며 다리를 걸었기 때문에 허공을 가르는 데 그쳤다. 황자는 큰 충돌음과 함께 지면에 나동그라졌다.
사비리엔-초락은 황자의 위로 비처럼 공격을 퍼부었으며, 황자는 그의 방패로 쏟아지는 일격들을 하나씩 하나씩 전부 막아냈다. 금속과 공기가 서로 녹아들어 한데 어우러지고 있었다.
"저희 문화에 방패는 없습니다." 베르시듀-셰이는 황제에게 속삭였다. "제 생각에, 아들에게는 방패가 생소하겠지요. 제 고향에서는 맞고 싶지 않다면 피할 따름입니다."
사비리엔-초락이 재차 눈부신 공격들을 퍼부으려 뒷발로 섰을 때, 황자는 그의 꼬리를 걷어차 순간 그를 물러나게 만들었다. 그는 곧장 자세를 갖췄지만, 황자도 두 발을 땅에 딛고 서 있었다. 둘은 서로의 주위를 맴돌았고, 뱀인간이 먼저 카타나를 내밀며 튀어나왔다. 황자는 적의 계획을 눈치채고는, 장검으로 카타나를 받아치고 방패로 와키자시를 막았다. 그 짧다란 꿰뚫는 칼날은 금속 사이에 끼었고, 사비리엔-초락은 균형을 잃었다.
황자의 장검이 아카비르의 가슴팍을 갈랐고, 갑작스레 엄습한 격렬한 고통은 그가 양쪽 무기를 전부 놓치게 만들었다. 그 순간, 전부 끝났다. 흙먼지 속에 나뒹구는 사비리엔-초락의 목을 황자의 장검이 겨누고 있었다.
"경기는 끝났다!" 황제의 외침은 경기장을 가득 메운 갈채에 묻혔다.
황자는 싱긋 웃고는 사비리엔-초락이 일어나 치유사에게 향하는 것을 도왔다. 황제는 안도하면서 그 수석 고문의 등을 두드렸다. 경기가 시작됐을 때, 그는 자신의 아들이 승리했음을 선언할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아드님께서는 훌륭한 전사가 되시겠군요." 베르시듀-셰이가 말했다. "그리고 위대한 황제가 되실 겁니다."
"이것만은 기억하게나." 황제는 웃었다. "그대들 아카비르인들이 현란한 기술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우리가 단 한 번 공격에 성공한다면, 그대들도 그걸로 끝이라네."
"아, 잘 새겨두도록 하겠습니다." 수석 고문이 끄덕였다.
레만은 그 말뜻을 헤아리느라 나머지 경기를 온전히 즐길 수 없었다. 혹시 황후가 그랬던 것처럼, 수석 고문도 또다른 적으로 돌아설 수 있을까? 이 건은 염두에 두고 지켜보아야 했다.
2920년, 샛별 21일
모로윈드의 모운홀드에서
"어째서 내가 내린 녹색 가운을 걸치지 않았느냐?" 모운홀드 공작은 그녀의 옷을 걸친 젊은 아가씨를 보며 물었다.
"맞지 않았거든요." 투랄라는 미소지었다. "그리고 제가 빨강색을 좋아하는 걸 아시잖아요."
"살이 쪘으니 맞지 않는 게지." 공작은 웃으며 그녀를 침대로 끌어내리고는 가슴팍과 배에 입맞춤을 퍼부었다. 그녀는 간지러워 깔깔댔지만, 몸을 일으켜 그녀의 붉은 로브로 스스로를 감쌌다.
"여성스럽게 나올 곳이 나오는 것 뿐이랍니다." 투랄라가 말했다. "내일 만날 수 있나요?"
"아니." 공작이 말했다. "내일은 비벡 님을 대접해야 하고, 모레는 에본하트 공작이 찾아올 예정이란다. 알마렉시아 님이 자리를 비우시기 전까지 그분과 그분의 정치 수완에 감사할 줄 몰랐다는 게 믿어지느냐?"
"저랑 같네요." 투랄라가 미소지었다. "제가 없어지고 나서야 제게 고마워하시겠죠."
"그럴 리가 있겠느냐." 공작이 코웃음쳤다. "지금도 네게 감사하고 있단다."
투랄라는 문을 나서기 전 공작이 마지막으로 입맞추도록 허락했다. 그녀는 그가 한 말을 계속 생각했다. 자신이 그의 아이를 뱄기 때문에 살이 쪘음을 알았을 때, 그는 그녀에게 얼마나 고마워할까? 그녀와 결혼할 정도로 고마워할까?
태양의 여명에서 계속.
3. 2권
원문
2920년, 첫 번째 시대의 마지막 해
제2권: 태양의 여명
칼로박 타운웨이 지음
2920년, 태양의 여명 3일
서머셋의 아르테움 섬에서
소사 실은 견습생들이 한 사람씩 오앗솜 나무로 떠올라, 지면으로 떨어지기 전에 각자의 우아한 몸짓으로 높은 가지에서 과실이나 꽃을 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당일의 결과에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먼 옛날 위대한 마법사로 행세했다는 시라바네의 하얀 조각상이 벼랑 끝 절벽에서 만을 조감하며 서 있었다. 엷은 보랏빛의 프로스카토 꽃(Proscato flowers)들은 부드러운 바람결에 앞뒤로 물결쳤다. 그 너머로, 아르테움과 서머셋의 본섬을 나누는 안개 낀 경계선이 대양 위로 펼쳐져 있었다.
"대체로 양호하군." 그는 마지막 견습생에게서 과실을 받으며 선언했다. 그가 손짓하자, 과실과 꽃들은 다시 나무에게로 돌아갔다. 그가 다시 손짓했고, 학생들은 마법사의 주위에 반원으로 모였다. 그는 자신의 하얀 로브에서 대략 1피트 남짓한 섬유질의 작은 구슬을 꺼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학생들은 이 시험을 이해했다. 그들이 수수께끼의 물체를 감정할 수 있는 마법을 시전할 수 있을지를 묻는 것이었다. 수련생들은 각자 눈을 감고, 우주적 진실의 영역에서 공을 상상했다. 그것의 에너지는 모든 물질적 & 정신적 요소가 그러하듯이 부정적 요소, 반사되어 비치는 모습, 상대 경로, 진정한 의미, 우주에서의 울림, 시공 안에서의 질감, 항상 존재했고 앞으로 항상 존재할 존재의 측면 등의 특유한 공명이 있었다.
"구슬입니다." 윌레그라는 젊은 노드가 말을 뗐고, 몇몇 나이 어린 견습생들은 키득거렸지만 소사 실을 포함한 대부분은 싸늘했다.
"굳이 바보가 되겠다면, 최소한 유쾌하기라도 해야지." 마법사는 나직히 으르렁거리고는, 혼란에 빠진 것 같은 검은 머리칼의 젊은 알트머 아가씨를 향했다. "리라사, 무엇인지 알겠느냐?"
"그롬입니다." 리라사는 자신없이 대답했다. "그, 크-크... 크레... 크레비나심 이후 드레그가 메프하는 것입니다."
"정확히는 카르비나심이지만, 좋은 대답이다." 소사 실이 말했다. "자, 말해 보아라. 그건 무슨 의미지?"
"잘 모르겠습니다." 리라사는 인정했다. 나머지 견습생들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물에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각각의 층위가 존재한다." 소사 실은 이야기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이 본 것을 자신의 사고방식에 끼워맞추지. 옛 방식인 시직의 방식에 능통한 이들은 신비주의에 입각하여 대상을 관찰하고 적절한 역할을 밝혀낼 수 있다. 하지만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층위를 더 벗겨내야만 한다. 너희는 대상을 그 역할과 그 진리에 입각하여 밝혀내고, 그 뜻을 해석해야 한다. 이 같은 방법을 적용한다면, 이 구슬은 물론 그롬이 맞고, 대륙의 북부와 서부에 서식하는 수서생물인 드레그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들은 삶에서 단 1년을 카르비나심, 즉 육상에서 생활하는 시기로 진입한다. 이어서 그것들은 물로 돌아와 메프, 또는 그들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했던 거죽과 기관들을 삼켜버린다. 그러고 나서는 그것들을 이렇게 생긴 작은 구체의 형태로 토해내지. 그롬. 드레그 토사물로."
견습생들은 적잖이 메스꺼운 표정으로 구슬을 쳐다보았다. 소사 실은 항상 이런 수업을 사랑했다.
2920년, 태양의 여명 4일
시로딜의 임페리얼 시티에서
"밀정들." 황제는 욕조에 앉아 그의 발에 자리잡은 혹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짐의 주위는 전부 배신자와 밀정들이지."
후궁인 리자(Rijja)는 황제의 허리에 다리를 감은 채로, 그 등을 씻겼다. 오랜 시간에 걸쳐 그녀는 언제 관능적이고 육욕적이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황제가 이런 기분일 때는, 조용하게, 달래듯이, 유혹하듯 관능적으로 있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직접 무언가를 묻지 않는 이상 입을 열지 말아야 했다.
곧바로 그가 물었다. "누군가가 자신이 모시는 황제 폐하의 발을 밟고는, '미안합니다, 황제 폐하.'라고 하는 걸 어찌 생각하느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황제 폐하.'가 더욱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미안합니다.'라고, 그 빌어먹을 아르고니안 놈이 감히, 고작해야 나 같은 인간이 제깟 놈이 모시는 황제씩이나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꼭 놈이 우리가 모로윈드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들렸어."
"어떻게 하시면 기분이 풀리실런지요?" 리자가 물었다. "채찍질을 하시면 어떻겠사옵니까? 황제 폐하의 말씀대로 고작해야 소울레스트의 일개 족장에 불과한 자가 아닙니까. 그자가 감히 어디다 발을 들이댔는지 마땅히 가르치심이 어떨런지요."
"짐의 아버지셨다면 채찍질했겠지. 할아버지께서는 놈을 처형하셨을테고." 황제는 투덜거렸다. "하지만 짐은, 짐에게 경의를 표하기만 한다면 짐의 발에 얼마든지 발을 올려도 상관없노라. 그리고 짐에게 반역을 꾀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폐하께서도 누군가는 믿으셔야지요."
"오직 그대 뿐이도다." 황제는 미소짓고는 가볍게 몸을 돌려 리자에게 입을 맞췄다. "내 아들 쥘렉도 마찬가지지만, 그 아이는 조금 더 신중해졌으면 좋겠구나."
"폐하의 의회와 수석 고문은 어떻사옵니까?" 리자가 물었다.
"밀정의 무리에 뱀 한 마리지." 황제는 웃으며 다시 그의 후궁에게 입맞춤했다. 서로 사랑을 나누기 시작하면서, 그는 속삭였다. "그대만 짐에게 충실하다면, 세상이 어찌 됐든 감당할 수 있노라."
2920년, 태양의 여명 13일
모로윈드의 모운홀드에서
투랄라는 까맣고 보석으로 장식된 도시의 문에 서 있었다. 바람이 그녀 주위에서 울부짖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공작은 그가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정부가 임신했다는 것을 듣고는 격노하여, 그녀를 추방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그를 만나려 노력했지만, 그의 위병들은 그녀를 내버려두고 돌아섰다. 결국 그녀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그들에게 진실을 전했다. 그녀는 가족들에게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고 거짓을 고할 수도 있었다. 병사든, 떠돌이 모험가든, 그 누구든지 간에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에게 아이의 아비되는 이는 공작이라고, 인도릴 가문의 일원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부심 높은 레도란 가문의 일원으로서, 그녀도 자신들이 그리하리라 알고 있었을 일을 행했다.
그녀의 손 위에서 그녀의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직접 낙인찍은 제명의 표식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그녀가 공작의 잔혹한 처사에 입은 상처만 못했다. 그녀는 관문 밖으로 넓게 펼쳐진 겨울날의 평원을 바라보았다. 비틀린 나무들은 잠에 빠져 있었고 하늘에서는 새 한 마리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이제 모로윈드에서는 그 누구도 그녀를 받아줄 리 없었다. 그녀는 멀리 떠나야만 했다.
천천히, 그리고 무거이, 그녀는 여행길에 올랐다.
2920년 태양의 여명 16일
아네퀴나(오늘날의 엘스웨어)의 센찰에서-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나요?" 하사마 여왕은 기분이 좋지 않은 남편을 쳐다보며 물었다. '연인의 날이 저물 무렵이면 그는 기쁜 마음으로 무도회장에서 온갖 내빈들과 춤추며 보냈지만, 오늘밤만큼은 완전히 지친 모습이었다. 그녀가 그를 찾아냈을 때, 그는 침대에서 몸을 말고 얼굴을 찌푸린 채였다.
"그 꺼림칙한 음유시인이 들려준 '폴리도르와 엘로이사의 이야기', 그게 오늘 기분을 망쳤어." 그가 으르렁거렸다. "뭣하러 그렇게 우울한 이야기를 지껄였지?"
"하지만 여보, 그것이야말로 그 이야기의 진실이 아니겠어요? 그들이 세상의 잔인한 측면에 삼켜지고 만 것이잖아요."
"진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저질스런 이야기꾼 주제에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불대다니, 내가 놈을 가만히 놔둘까보냐." 드로'젤 왕은 침상에서 튕겨지듯 몸을 일으켰다. 그 눈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그 음유시인, 어디 출신이라고 했었지?"
"아마 발렌우드 동쪽 끝의 길버데일이었던 것 같아요." 여왕은 동요한 것 같았다. "여보, 어떻게 하시려고요?"
드로'젤은 한달음에 방을 뛰쳐나가, 탑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하사마 여왕은 남편의 심중을 헤아리고 있었지만, 그를 막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요즘 들어 그는 변덕스러운데다가 화가 많아졌고, 이따금씩은 발작적으로 반응했다. 하지만 그녀는 왕의 광기, 그리고 음유시인과 그가 이야기한 필멸자들의 사악함과 잔혹함에 대한 증오가 얼마나 깊이 파고들었는지는 결코 헤아릴 수 없었다.
2920년 태양의 여명 19일
발렌우드의 길버데일에서
"다시 한 번 잘 들어봐." 나이 든 목수가 말했다. "세 번째 방에 쓸모없는 황동이 있다면, 두 번째 방에는 황금 열쇠가 있지. 만약 첫 번째 방에 황금 열쇠가 있다면, 세 번째 방은 쓸모없는 황동이 있단다. 혹 두 번째 방에 가치 없는 황동이 있다면, 첫 번째 방에 황금 열쇠가 있어."
"이해했어요." 부인이 말했다. "당신이 말했죠. 그러니까 첫 번째 방에 황금 열쇠가 있군요, 맞았죠?"
"아니라니까." 목수가 답했다.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해줄게."
"엄마?" 소년이 제 어미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불렀다.
"잠깐만 기다리렴, 얘야. 엄마 이야기하는 중이잖니." 그녀는 아들을 달래고 수수께끼에 집중했다. "당신이 '세 번째 방에 황금 열쇠가 있다면, 두 번째 방에는 쓸모없는 황동이 있다'고 했잖아요. 맞죠?"
"아니야." 목수는 끈기 있게 대답했다. "세 번째 방에는 황동이 있다니까, 만약 두 번째 방에-"
"엄마!" 소년이 울부짖었다. 그의 모친은 그제서야 돌아보았다.
시뻘건 안개가 마을 위로 쏟아지며, 건물을 차례차례 집어삼키고 있었다. 붉은 피부의 거인이 그 앞에서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데이드라, 몰라그 발이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2920년 태양의 여명 29일
발렌우드의 길버데일에서
아말렉시아는 널찍한 수렁에 말을 멈춰 세우고는 강에서 물을 마시도록 했다. 하지만 녀석은 물 마시는 걸 거부한데다가 한술 더 떠서 그 물 자체를 혐오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의구심에 사로잡혔다. 모운홀드에서부터 먼 길을 달려왔으니 목이 탈 것임이 분명한데도. 그녀는 말에서 내려 수행원들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현재 위치는?" 그녀가 물었다.
그녀의 수행원들 중 한 명이 지도를 꺼냈다. "길버데일이라는 마을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알마렉시아는 눈을 감았지만 곧장 다시 눈을 떴다. 그 광경은 참기 어려웠다. 종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는 벽돌과 뼛조각 하나를 주워 가슴에 품었다.
"계속 아르테움으로 가야만 한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첫 파종에서 계속.
2920년, 첫 번째 시대의 마지막 해
제2권: 태양의 여명
칼로박 타운웨이 지음
2920년, 태양의 여명 3일
서머셋의 아르테움 섬에서
소사 실은 견습생들이 한 사람씩 오앗솜 나무로 떠올라, 지면으로 떨어지기 전에 각자의 우아한 몸짓으로 높은 가지에서 과실이나 꽃을 따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당일의 결과에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먼 옛날 위대한 마법사로 행세했다는 시라바네의 하얀 조각상이 벼랑 끝 절벽에서 만을 조감하며 서 있었다. 엷은 보랏빛의 프로스카토 꽃(Proscato flowers)들은 부드러운 바람결에 앞뒤로 물결쳤다. 그 너머로, 아르테움과 서머셋의 본섬을 나누는 안개 낀 경계선이 대양 위로 펼쳐져 있었다.
"대체로 양호하군." 그는 마지막 견습생에게서 과실을 받으며 선언했다. 그가 손짓하자, 과실과 꽃들은 다시 나무에게로 돌아갔다. 그가 다시 손짓했고, 학생들은 마법사의 주위에 반원으로 모였다. 그는 자신의 하얀 로브에서 대략 1피트 남짓한 섬유질의 작은 구슬을 꺼냈다.
"이것은 무엇인가?"
학생들은 이 시험을 이해했다. 그들이 수수께끼의 물체를 감정할 수 있는 마법을 시전할 수 있을지를 묻는 것이었다. 수련생들은 각자 눈을 감고, 우주적 진실의 영역에서 공을 상상했다. 그것의 에너지는 모든 물질적 & 정신적 요소가 그러하듯이 부정적 요소, 반사되어 비치는 모습, 상대 경로, 진정한 의미, 우주에서의 울림, 시공 안에서의 질감, 항상 존재했고 앞으로 항상 존재할 존재의 측면 등의 특유한 공명이 있었다.
"구슬입니다." 윌레그라는 젊은 노드가 말을 뗐고, 몇몇 나이 어린 견습생들은 키득거렸지만 소사 실을 포함한 대부분은 싸늘했다.
"굳이 바보가 되겠다면, 최소한 유쾌하기라도 해야지." 마법사는 나직히 으르렁거리고는, 혼란에 빠진 것 같은 검은 머리칼의 젊은 알트머 아가씨를 향했다. "리라사, 무엇인지 알겠느냐?"
"그롬입니다." 리라사는 자신없이 대답했다. "그, 크-크... 크레... 크레비나심 이후 드레그가 메프하는 것입니다."
"정확히는 카르비나심이지만, 좋은 대답이다." 소사 실이 말했다. "자, 말해 보아라. 그건 무슨 의미지?"
"잘 모르겠습니다." 리라사는 인정했다. 나머지 견습생들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만물에는 그것을 이해하기 위한 각각의 층위가 존재한다." 소사 실은 이야기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자신이 본 것을 자신의 사고방식에 끼워맞추지. 옛 방식인 시직의 방식에 능통한 이들은 신비주의에 입각하여 대상을 관찰하고 적절한 역할을 밝혀낼 수 있다. 하지만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층위를 더 벗겨내야만 한다. 너희는 대상을 그 역할과 그 진리에 입각하여 밝혀내고, 그 뜻을 해석해야 한다. 이 같은 방법을 적용한다면, 이 구슬은 물론 그롬이 맞고, 대륙의 북부와 서부에 서식하는 수서생물인 드레그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들은 삶에서 단 1년을 카르비나심, 즉 육상에서 생활하는 시기로 진입한다. 이어서 그것들은 물로 돌아와 메프, 또는 그들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했던 거죽과 기관들을 삼켜버린다. 그러고 나서는 그것들을 이렇게 생긴 작은 구체의 형태로 토해내지. 그롬. 드레그 토사물로."
견습생들은 적잖이 메스꺼운 표정으로 구슬을 쳐다보았다. 소사 실은 항상 이런 수업을 사랑했다.
2920년, 태양의 여명 4일
시로딜의 임페리얼 시티에서
"밀정들." 황제는 욕조에 앉아 그의 발에 자리잡은 혹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짐의 주위는 전부 배신자와 밀정들이지."
후궁인 리자(Rijja)는 황제의 허리에 다리를 감은 채로, 그 등을 씻겼다. 오랜 시간에 걸쳐 그녀는 언제 관능적이고 육욕적이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황제가 이런 기분일 때는, 조용하게, 달래듯이, 유혹하듯 관능적으로 있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직접 무언가를 묻지 않는 이상 입을 열지 말아야 했다.
곧바로 그가 물었다. "누군가가 자신이 모시는 황제 폐하의 발을 밟고는, '미안합니다, 황제 폐하.'라고 하는 걸 어찌 생각하느냐?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황제 폐하.'가 더욱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미안합니다.'라고, 그 빌어먹을 아르고니안 놈이 감히, 고작해야 나 같은 인간이 제깟 놈이 모시는 황제씩이나 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 같았다. 꼭 놈이 우리가 모로윈드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들렸어."
"어떻게 하시면 기분이 풀리실런지요?" 리자가 물었다. "채찍질을 하시면 어떻겠사옵니까? 황제 폐하의 말씀대로 고작해야 소울레스트의 일개 족장에 불과한 자가 아닙니까. 그자가 감히 어디다 발을 들이댔는지 마땅히 가르치심이 어떨런지요."
"짐의 아버지셨다면 채찍질했겠지. 할아버지께서는 놈을 처형하셨을테고." 황제는 투덜거렸다. "하지만 짐은, 짐에게 경의를 표하기만 한다면 짐의 발에 얼마든지 발을 올려도 상관없노라. 그리고 짐에게 반역을 꾀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폐하께서도 누군가는 믿으셔야지요."
"오직 그대 뿐이도다." 황제는 미소짓고는 가볍게 몸을 돌려 리자에게 입을 맞췄다. "내 아들 쥘렉도 마찬가지지만, 그 아이는 조금 더 신중해졌으면 좋겠구나."
"폐하의 의회와 수석 고문은 어떻사옵니까?" 리자가 물었다.
"밀정의 무리에 뱀 한 마리지." 황제는 웃으며 다시 그의 후궁에게 입맞춤했다. 서로 사랑을 나누기 시작하면서, 그는 속삭였다. "그대만 짐에게 충실하다면, 세상이 어찌 됐든 감당할 수 있노라."
2920년, 태양의 여명 13일
모로윈드의 모운홀드에서
투랄라는 까맣고 보석으로 장식된 도시의 문에 서 있었다. 바람이 그녀 주위에서 울부짖었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공작은 그가 가장 마음에 들어했던 정부가 임신했다는 것을 듣고는 격노하여, 그녀를 추방했다. 그녀는 계속해서 그를 만나려 노력했지만, 그의 위병들은 그녀를 내버려두고 돌아섰다. 결국 그녀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그들에게 진실을 전했다. 그녀는 가족들에게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고 거짓을 고할 수도 있었다. 병사든, 떠돌이 모험가든, 그 누구든지 간에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에게 아이의 아비되는 이는 공작이라고, 인도릴 가문의 일원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부심 높은 레도란 가문의 일원으로서, 그녀도 자신들이 그리하리라 알고 있었을 일을 행했다.
그녀의 손 위에서 그녀의 아버지가 눈물을 흘리며 직접 낙인찍은 제명의 표식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그녀가 공작의 잔혹한 처사에 입은 상처만 못했다. 그녀는 관문 밖으로 넓게 펼쳐진 겨울날의 평원을 바라보았다. 비틀린 나무들은 잠에 빠져 있었고 하늘에서는 새 한 마리조차 찾을 수 없었다. 이제 모로윈드에서는 그 누구도 그녀를 받아줄 리 없었다. 그녀는 멀리 떠나야만 했다.
천천히, 그리고 무거이, 그녀는 여행길에 올랐다.
2920년 태양의 여명 16일
아네퀴나(오늘날의 엘스웨어)의 센찰에서-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나요?" 하사마 여왕은 기분이 좋지 않은 남편을 쳐다보며 물었다. '연인의 날이 저물 무렵이면 그는 기쁜 마음으로 무도회장에서 온갖 내빈들과 춤추며 보냈지만, 오늘밤만큼은 완전히 지친 모습이었다. 그녀가 그를 찾아냈을 때, 그는 침대에서 몸을 말고 얼굴을 찌푸린 채였다.
"그 꺼림칙한 음유시인이 들려준 '폴리도르와 엘로이사의 이야기', 그게 오늘 기분을 망쳤어." 그가 으르렁거렸다. "뭣하러 그렇게 우울한 이야기를 지껄였지?"
"하지만 여보, 그것이야말로 그 이야기의 진실이 아니겠어요? 그들이 세상의 잔인한 측면에 삼켜지고 만 것이잖아요."
"진실인지 아닌지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저질스런 이야기꾼 주제에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불대다니, 내가 놈을 가만히 놔둘까보냐." 드로'젤 왕은 침상에서 튕겨지듯 몸을 일으켰다. 그 눈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그 음유시인, 어디 출신이라고 했었지?"
"아마 발렌우드 동쪽 끝의 길버데일이었던 것 같아요." 여왕은 동요한 것 같았다. "여보, 어떻게 하시려고요?"
드로'젤은 한달음에 방을 뛰쳐나가, 탑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하사마 여왕은 남편의 심중을 헤아리고 있었지만, 그를 막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요즘 들어 그는 변덕스러운데다가 화가 많아졌고, 이따금씩은 발작적으로 반응했다. 하지만 그녀는 왕의 광기, 그리고 음유시인과 그가 이야기한 필멸자들의 사악함과 잔혹함에 대한 증오가 얼마나 깊이 파고들었는지는 결코 헤아릴 수 없었다.
2920년 태양의 여명 19일
발렌우드의 길버데일에서
"다시 한 번 잘 들어봐." 나이 든 목수가 말했다. "세 번째 방에 쓸모없는 황동이 있다면, 두 번째 방에는 황금 열쇠가 있지. 만약 첫 번째 방에 황금 열쇠가 있다면, 세 번째 방은 쓸모없는 황동이 있단다. 혹 두 번째 방에 가치 없는 황동이 있다면, 첫 번째 방에 황금 열쇠가 있어."
"이해했어요." 부인이 말했다. "당신이 말했죠. 그러니까 첫 번째 방에 황금 열쇠가 있군요, 맞았죠?"
"아니라니까." 목수가 답했다. "처음부터 다시 이야기해줄게."
"엄마?" 소년이 제 어미의 소맷자락을 잡아당기며 불렀다.
"잠깐만 기다리렴, 얘야. 엄마 이야기하는 중이잖니." 그녀는 아들을 달래고 수수께끼에 집중했다. "당신이 '세 번째 방에 황금 열쇠가 있다면, 두 번째 방에는 쓸모없는 황동이 있다'고 했잖아요. 맞죠?"
"아니야." 목수는 끈기 있게 대답했다. "세 번째 방에는 황동이 있다니까, 만약 두 번째 방에-"
"엄마!" 소년이 울부짖었다. 그의 모친은 그제서야 돌아보았다.
시뻘건 안개가 마을 위로 쏟아지며, 건물을 차례차례 집어삼키고 있었다. 붉은 피부의 거인이 그 앞에서 성큼성큼 걷고 있었다. 데이드라, 몰라그 발이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2920년 태양의 여명 29일
발렌우드의 길버데일에서
아말렉시아는 널찍한 수렁에 말을 멈춰 세우고는 강에서 물을 마시도록 했다. 하지만 녀석은 물 마시는 걸 거부한데다가 한술 더 떠서 그 물 자체를 혐오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의구심에 사로잡혔다. 모운홀드에서부터 먼 길을 달려왔으니 목이 탈 것임이 분명한데도. 그녀는 말에서 내려 수행원들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현재 위치는?" 그녀가 물었다.
그녀의 수행원들 중 한 명이 지도를 꺼냈다. "길버데일이라는 마을에 가까워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알마렉시아는 눈을 감았지만 곧장 다시 눈을 떴다. 그 광경은 참기 어려웠다. 종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녀는 벽돌과 뼛조각 하나를 주워 가슴에 품었다.
"계속 아르테움으로 가야만 한다."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첫 파종에서 계속.
4. 3권
원문
2920년, 첫 번째 시대의 마지막 해
제3권: 첫 파종
칼로박 타운웨이 지음
2920년, 첫 파종 15일
시로딜의 케어 수비오에서
높이 솟은 언덕 위에서 황제 레만 3세는 여전히 임페리얼 시티의 첨탑들을 볼 수 있었지만, 지금 이곳이 자신의 따스한 보금자리가 아님은 잘 알고 있었다. 글라비우스 경의 빌라는 호화로웠지만, 벽 안쪽으로 군단 전부를 들여놓을 수 있을 정도로 넓지는 않았다. 언덕가를 따라 천막이 죽 늘어섰고, 병사들은 이 영지의 자랑거리인 온천을 즐기려 삼삼오오 무리지었다. 다만 아직도 겨울의 추위가 주변에 감돈다는 점은 조금 의문스러웠다.
"아드님이신 쥘렉 황자님의 용태가 좋지 않습니다."
황제는 수석 고문 베르시듀-셰이의 말소리에 펄쩍 뛰었다. 그는 저 아카비르가 어떻게 소리도 없이 잔디밭을 스쳐지나올 수 있었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중독된 것이다. 틀림없어." 레만은 투덜댔다. "반드시 황자를 치료사에게 데려가도록. 짐이 그러하듯 검식자를 두어 기미를 하도록 그렇게 말했건만, 아들 녀석은 고집이 너무 셌지. 우리 주변에는 밀정들만이 가득해. 짐은 알고 있었어."
"실로 그 말씀대로입니다, 황제 폐하." 베르시듀-셰이가 말했다. "위험한 시기인데다, 이 전쟁에서 저 모로윈드를 꺾어 더는 전장에 나서거나 더 이상의 음모를 꾸밀 수 없도록 확실한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폐하께서 친히 선봉대를 이끌어 전장에 나아가시는 건 그만두시기를 제안합니다. 물론 폐하께서 위대한 선조이신 레만 1세나 브라졸루스 도르, 그리고 레만 2세께서 그러하셨듯 선봉에 나서는 걸 바라심은 알고 있지만, 그게 무모한 일은 아닐지 염려됩니다. 감히 이처럼 가감 없는 말을 폐하께 아뢰는 제 무례를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아니다." 레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짐 또한 그대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선봉은 누구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는가?"
"만약 쥘렉 황자께서 호전되신다면 어떨지요." 아카비르가 대답했다. "그럴 수 없다면 파런의 스토릭을 선봉에 두시고, 리버홀드의 나게아 여왕을 좌익에, 릴모스의 울락스 족장을 우익에 두시지요."
"좌익은 카짓에, 아르고니안이 우익이라."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짐은 도저히 짐승놈들을 믿을 수 없다."
그 말에도 수석 고문의 기분은 전혀 상하지 않았다. 그는 황제가 언급한 '짐승놈들'은 탐리엘의 원주민들이지, 그 자신과 같은 아카비르의 세이치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황제 폐하의 말씀에 일리가 있으나, 폐하께서도 저들이 던머를 증오함을 인정하셨으면 합니다. 울락스는 모운홀드 공작이 제 고향에서 벌인 노예 사냥에 대해 뿌리깊은 원한을 갖고 있지요."
황제는 그걸 인정한 다음 수석 고문을 물러가도록 했다. 놀랍게도 레만은 그 수석 고문이 처음으로 믿음직스럽게 보였다. 그는 누군가의 곁에 두기에 충분한 자였다.
2920년, 첫 파종 18일
모로윈드의 알드 에르포드에서
"제국군과의 거리는 얼마나 되나?" 비벡이 물었다.
"도보로 이틀 거리입니다." 그의 부관이 "우리가 만약 밤새도록 진군한다면, 내일 오전이면 프라이에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정보원의 보고에 따르면 황제는 후미에서 지휘하고, 파런의 스토릭이 선봉, 리버홀드의 나게아가 좌익이고 릴모스의 울락스가 우익이라더군요."
"울락스라." 비벡은 나직히 읊조리며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이 정보원은 믿을 수 있나? 누가 이 정보를 가져왔지?"
"제국군에 잠입시킨 브레튼 밀정입니다." 부관은 대답을 마치고 모랫빛 머리를 한 젊은이를 향해 손짓했다. 그는 앞으로 나와 비벡에게 절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고, 왜 브레튼이 시로딜에 맞서 우리를 돕고 있나?" 비벡은 웃으며 물었다.
"저는 드웨넌의 카시르 위틀리라고 합니다." 사내가 말했다. "저는 아무나 신을 위해 밀정이 되었노라고 말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일이, 그러니까, 돈이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죠."
비벡은 크게 웃었다. "물론 그리 되리라. 그대가 가져온 정보가 정확하다면 말이다."
2920년, 첫 파종 19일
모로윈드의 보드룸즈에서
보드룸의 작은 마을 아래로 프라이 강이 흐르고 있었다. 동쪽으로 물길이 굽이치는 가파른 절벽과 서쪽으로 화려한 야생화 초원이 펼쳐진 작은 숲은 적잖이 목가적이었다. 이 경계에서 모로윈드의 낯선 식물군은 시로딜의 낯선 식물군과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일을 마치면 잠을 잘 수 있다!"
병사들은 아침 내내 저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들은 밤새 행군한 것도 모자라 절벽의 나무를 베어 강물이 넘치도록 댐을 만들고 있었다. 대다수의 병사들은 너무 지쳐 어떤 불평과 불만도 내뱉지 못할 지경이었다.
"성하, 제가 이해한 것이 확실한지 가르쳐 주십시오." 비벡의 부관이 말했다. "우리는 절벽을 차지했고 저들의 머리 위로 불화살과 마법을 퍼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무를 전부 베어낼 필요가 있지요. 댐은 강을 범람시켜 저들을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대게 만들고 기동을 막기 위함이겠군요."
"정확히 반은 맞았네." 비벡은 만족스레 말했다. 그는 근처에서 나무들을 운반하던 병사를 붙잡았다. "잠깐, 나는 그대들이 나무에서 가장 곧고 단단한 가지를 베어 창을 깎을 것을 원한다. 그대가 백 명 남짓한 이들을 모을 수 있다면, 몇 시간 정도면 우리가 필요한 만큼은 만들 수 있을 것이니라."
그 병사는 녹초가 되면서 명령을 따랐다. 남녀들이 나무에서 창을 깎아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감히 무례가 되지 않는다면 여쭙겠습니다마는..." 부관이 말을 꺼냈다. "병사들에게 더 이상의 무기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들은 지쳐서 지금 가지고 있는 무기조차 들고 있기 어려운 지경입니다."
"이 창들은 쥐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말을 마친 비벡은 병사들을 감독하기 전에 다시 속삭였다. "우리가 저들을 오늘 하루 동안 완전히 지치게 한다면, 저들은 밤새도록 푹 잠들 수 있으리라."
그건 당연히 날카로워야 했고, 또한 끝으로 뻗을수록 가늘어지는 몸체는 완벽한 균형을 이루어야 했다. 안정성의 핵심은 랜스나 창의 원뿔 꼭지점이 아니라 피라미드 같은 형태에 있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창을 던져 강도와 예리함, 그리고 균형을 완벽히 갖출 때까지 시험하도록 지시했고, 창이 부러지면 새로 만들어 계속하도록 몰아붙였다. 실패가 누적될수록 병사들은 나가떨어졌으나, 조금씩 완벽한 나무 창을 깎아내는 방법을 배웠다. 그들이 일을 마치자, 비벡은 무엇을 어디에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보여주었다.
그날 밤, 전투 전야의 흥청대는 음주는 없었고, 어떤 신병도 곧 다가올 전투에 시름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숲이 우거진 언덕 너머로 해가 떨어지자마자, 야영지는 파수꾼만 제외하고 휴식에 빠져들었다.
2920년, 첫 파종 20일
모로윈드의 보드룸즈에서
미라모어는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지난 6일 동안, 그는 매일 밤 도박하고 매춘부를 끼고 살았으며 낮에는 온종일 행군했다. 그는 전투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보다도 그 후에 찾아오는 달콤한 휴식을 더욱 기대하고 있었다. 그는 황제가 지휘하는 후방에 있었고, 이는 비명횡사할 가능성이 적다는 점에서 운이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앞서 지나간 군단이 남긴 진창과 쓰레기더미를 헤치고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들은 야생화가 펼쳐진 들판을 건너기 시작했고, 미라모어와 그 주변의 모든 병사들은 발목까지 차오르는 차가운 진흙탕에 빠졌다. 그저 계속해서 발을 떼는 것만으로도 벅찰 지경이었다. 그는 저 멀리 선두에서 스토릭 경이 이끄는 선봉대가 들판을 지나 절벽 밑에 다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바로 그때 일이 터졌다.
마치 데이드라가 소환되는 것처럼 던머 군대가 절벽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선봉대의 머리 위로 화염과 화살의 비를 퍼부었다. 그와 동시에 모운홀드 공작의 깃발을 든 일련의 무리가 말을 몰아 강 주위를 돌더니, 이내 벌목된 협곡으로 떨어지는 강가 변두리를 따라 모습을 감췄다. 우익에 있었던 족장 울락스는 그 광경을 보고는 복수를 외치며 추격을 시작했다. 나게아 여왕은 절벽의 적군을 가로막기 위해 그녀의 병사들을 서쪽 둑으로 보냈다.
황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갈피조차 못 잡고 있었다. 그의 병사들은 진창에 너무 깊게 빠져 신속히 전장으로 합류할 수 없었다. 그는 모운홀드 군대가 숲을 지나 주위를 포위하려 시도할 경우에 대비하여 병사들로 하여금 동쪽 숲을 향하도록 명했다. 그들은 전혀 모습을 비추지 않았고, 그저 서쪽을 향하고 있었던 많은 병사들이 전장에서 완전히 이탈했을 따름이었다. 미라모어는 절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비벡으로 추정되는 키 큰 던머가 신호를 내리자, 전투마법사들이 저들의 마법을 서쪽으로 쏘아보냈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바탕으로, 미라모어는 그게 댐이라고 추론했다. 엄청난 급류가 터져나와 나게아의 좌익을 남아있던 선봉대를 향해 쓸어내렸고, 두 집단은 한데 뭉쳐서 동쪽의 하류로 떠내려갔다.
황제는 몰살당한 그의 군대가 다시 모습을 나타내기를 기다리는 것 마냥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이윽고는 퇴각을 명했다. 미라모어는 재빨리 몸을 숨기고 저들이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이어서 그는 그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절벽을 향해 헤쳐나갔다.
모로윈드 군대도 자신들의 진영으로 회군하는 중이었다. 그는 머리 위에서 모로윈드군이 승리를 자축하는 소리를 들으며 조심스레 강가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동쪽에서 그는 제국군의 모습을 보았다. 물살에 휩쓸렸던 그들은 강가를 가로지르며 그물처럼 촘촘히 박힌 창들의 한가운데로 던져져 있었다. 울락스의 우익 위로 스토릭의 선봉대가, 다시 그 위로 나게아의 좌익이 쌓여 있었다. 수백이 넘는 병사들이 마치 목걸이처럼 꿰여 있었다.
미라모어는 시체들을 뒤져 값나가는 것들을 최대한 챙겨 강 하류로 도망쳤다. 강물이 핏물을 전부 씻어내고 원래의 빛깔을 되찾기 전까지, 그는 최대한 도망쳐야 했다.
2920년, 첫 파종 29일
해머펠의 헤가테에서
"임페리얼 시티에서 네게 편지가 왔구나." 대여사제는 코르다에게 양피지를 건넸다. 모든 젊은 여사제들이 웃으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코르다의 자매인 리자가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은 으레 보내는 편지였을 따름이었다.
코르다는 편지를 받아 정원으로 발길을 돌렸고, 단조로운 모랫빛의 온실과도 같은 세상에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인 오아시스에서 그걸 펼쳐보았다. 편지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었다. 궁정의 뜬소문, 어두운 와인색 벨벳을 선호하는 최신 유행, 그리고 나날이 심해져가는 황제의 편집증에 대한 보고로 가득했다.
"이런 모든 것들에서 자유로운 게 네 행운인 줄 알아." 리자가 이야기했다. "황제는 가장 최근의 전장에서 낭패를 본 건 죄다 황궁의 밀정 탓이라고 확신하고 있어. 심지어 나를 심문하기까지 했다니까. 룹트가께서 지켜주시는 넌 절대로 나 같이 파란만장한 삶을 살 리 없겠지."
코르다는 사막의 소리를 들으며 룹트가께 정확히 반대되는 소원을 빌었다.
비의 손길에서 계속.
2920년, 첫 번째 시대의 마지막 해
제3권: 첫 파종
칼로박 타운웨이 지음
2920년, 첫 파종 15일
시로딜의 케어 수비오에서
높이 솟은 언덕 위에서 황제 레만 3세는 여전히 임페리얼 시티의 첨탑들을 볼 수 있었지만, 지금 이곳이 자신의 따스한 보금자리가 아님은 잘 알고 있었다. 글라비우스 경의 빌라는 호화로웠지만, 벽 안쪽으로 군단 전부를 들여놓을 수 있을 정도로 넓지는 않았다. 언덕가를 따라 천막이 죽 늘어섰고, 병사들은 이 영지의 자랑거리인 온천을 즐기려 삼삼오오 무리지었다. 다만 아직도 겨울의 추위가 주변에 감돈다는 점은 조금 의문스러웠다.
"아드님이신 쥘렉 황자님의 용태가 좋지 않습니다."
황제는 수석 고문 베르시듀-셰이의 말소리에 펄쩍 뛰었다. 그는 저 아카비르가 어떻게 소리도 없이 잔디밭을 스쳐지나올 수 있었는지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중독된 것이다. 틀림없어." 레만은 투덜댔다. "반드시 황자를 치료사에게 데려가도록. 짐이 그러하듯 검식자를 두어 기미를 하도록 그렇게 말했건만, 아들 녀석은 고집이 너무 셌지. 우리 주변에는 밀정들만이 가득해. 짐은 알고 있었어."
"실로 그 말씀대로입니다, 황제 폐하." 베르시듀-셰이가 말했다. "위험한 시기인데다, 이 전쟁에서 저 모로윈드를 꺾어 더는 전장에 나서거나 더 이상의 음모를 꾸밀 수 없도록 확실한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폐하께서 친히 선봉대를 이끌어 전장에 나아가시는 건 그만두시기를 제안합니다. 물론 폐하께서 위대한 선조이신 레만 1세나 브라졸루스 도르, 그리고 레만 2세께서 그러하셨듯 선봉에 나서는 걸 바라심은 알고 있지만, 그게 무모한 일은 아닐지 염려됩니다. 감히 이처럼 가감 없는 말을 폐하께 아뢰는 제 무례를 용서하시길 바랍니다."
"아니다." 레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짐 또한 그대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선봉은 누구에게 맡기는 것이 좋겠는가?"
"만약 쥘렉 황자께서 호전되신다면 어떨지요." 아카비르가 대답했다. "그럴 수 없다면 파런의 스토릭을 선봉에 두시고, 리버홀드의 나게아 여왕을 좌익에, 릴모스의 울락스 족장을 우익에 두시지요."
"좌익은 카짓에, 아르고니안이 우익이라." 황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짐은 도저히 짐승놈들을 믿을 수 없다."
그 말에도 수석 고문의 기분은 전혀 상하지 않았다. 그는 황제가 언급한 '짐승놈들'은 탐리엘의 원주민들이지, 그 자신과 같은 아카비르의 세이치가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황제 폐하의 말씀에 일리가 있으나, 폐하께서도 저들이 던머를 증오함을 인정하셨으면 합니다. 울락스는 모운홀드 공작이 제 고향에서 벌인 노예 사냥에 대해 뿌리깊은 원한을 갖고 있지요."
황제는 그걸 인정한 다음 수석 고문을 물러가도록 했다. 놀랍게도 레만은 그 수석 고문이 처음으로 믿음직스럽게 보였다. 그는 누군가의 곁에 두기에 충분한 자였다.
2920년, 첫 파종 18일
모로윈드의 알드 에르포드에서
"제국군과의 거리는 얼마나 되나?" 비벡이 물었다.
"도보로 이틀 거리입니다." 그의 부관이 "우리가 만약 밤새도록 진군한다면, 내일 오전이면 프라이에서 고지를 선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정보원의 보고에 따르면 황제는 후미에서 지휘하고, 파런의 스토릭이 선봉, 리버홀드의 나게아가 좌익이고 릴모스의 울락스가 우익이라더군요."
"울락스라." 비벡은 나직히 읊조리며 어떤 생각을 떠올렸다. "이 정보원은 믿을 수 있나? 누가 이 정보를 가져왔지?"
"제국군에 잠입시킨 브레튼 밀정입니다." 부관은 대답을 마치고 모랫빛 머리를 한 젊은이를 향해 손짓했다. 그는 앞으로 나와 비벡에게 절했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이고, 왜 브레튼이 시로딜에 맞서 우리를 돕고 있나?" 비벡은 웃으며 물었다.
"저는 드웨넌의 카시르 위틀리라고 합니다." 사내가 말했다. "저는 아무나 신을 위해 밀정이 되었노라고 말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일이, 그러니까, 돈이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죠."
비벡은 크게 웃었다. "물론 그리 되리라. 그대가 가져온 정보가 정확하다면 말이다."
2920년, 첫 파종 19일
모로윈드의 보드룸즈에서
보드룸의 작은 마을 아래로 프라이 강이 흐르고 있었다. 동쪽으로 물길이 굽이치는 가파른 절벽과 서쪽으로 화려한 야생화 초원이 펼쳐진 작은 숲은 적잖이 목가적이었다. 이 경계에서 모로윈드의 낯선 식물군은 시로딜의 낯선 식물군과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하고 있었다.
"일을 마치면 잠을 잘 수 있다!"
병사들은 아침 내내 저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들은 밤새 행군한 것도 모자라 절벽의 나무를 베어 강물이 넘치도록 댐을 만들고 있었다. 대다수의 병사들은 너무 지쳐 어떤 불평과 불만도 내뱉지 못할 지경이었다.
"성하, 제가 이해한 것이 확실한지 가르쳐 주십시오." 비벡의 부관이 말했다. "우리는 절벽을 차지했고 저들의 머리 위로 불화살과 마법을 퍼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무를 전부 베어낼 필요가 있지요. 댐은 강을 범람시켜 저들을 진흙탕 속에서 허우적대게 만들고 기동을 막기 위함이겠군요."
"정확히 반은 맞았네." 비벡은 만족스레 말했다. 그는 근처에서 나무들을 운반하던 병사를 붙잡았다. "잠깐, 나는 그대들이 나무에서 가장 곧고 단단한 가지를 베어 창을 깎을 것을 원한다. 그대가 백 명 남짓한 이들을 모을 수 있다면, 몇 시간 정도면 우리가 필요한 만큼은 만들 수 있을 것이니라."
그 병사는 녹초가 되면서 명령을 따랐다. 남녀들이 나무에서 창을 깎아내는 작업을 시작했다.
"감히 무례가 되지 않는다면 여쭙겠습니다마는..." 부관이 말을 꺼냈다. "병사들에게 더 이상의 무기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들은 지쳐서 지금 가지고 있는 무기조차 들고 있기 어려운 지경입니다."
"이 창들은 쥐기 위한 것이 아니다." 말을 마친 비벡은 병사들을 감독하기 전에 다시 속삭였다. "우리가 저들을 오늘 하루 동안 완전히 지치게 한다면, 저들은 밤새도록 푹 잠들 수 있으리라."
그건 당연히 날카로워야 했고, 또한 끝으로 뻗을수록 가늘어지는 몸체는 완벽한 균형을 이루어야 했다. 안정성의 핵심은 랜스나 창의 원뿔 꼭지점이 아니라 피라미드 같은 형태에 있었다. 그는 병사들에게 창을 던져 강도와 예리함, 그리고 균형을 완벽히 갖출 때까지 시험하도록 지시했고, 창이 부러지면 새로 만들어 계속하도록 몰아붙였다. 실패가 누적될수록 병사들은 나가떨어졌으나, 조금씩 완벽한 나무 창을 깎아내는 방법을 배웠다. 그들이 일을 마치자, 비벡은 무엇을 어디에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보여주었다.
그날 밤, 전투 전야의 흥청대는 음주는 없었고, 어떤 신병도 곧 다가올 전투에 시름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숲이 우거진 언덕 너머로 해가 떨어지자마자, 야영지는 파수꾼만 제외하고 휴식에 빠져들었다.
2920년, 첫 파종 20일
모로윈드의 보드룸즈에서
미라모어는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지난 6일 동안, 그는 매일 밤 도박하고 매춘부를 끼고 살았으며 낮에는 온종일 행군했다. 그는 전투를 기대하고 있었지만, 그보다도 그 후에 찾아오는 달콤한 휴식을 더욱 기대하고 있었다. 그는 황제가 지휘하는 후방에 있었고, 이는 비명횡사할 가능성이 적다는 점에서 운이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앞서 지나간 군단이 남긴 진창과 쓰레기더미를 헤치고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들은 야생화가 펼쳐진 들판을 건너기 시작했고, 미라모어와 그 주변의 모든 병사들은 발목까지 차오르는 차가운 진흙탕에 빠졌다. 그저 계속해서 발을 떼는 것만으로도 벅찰 지경이었다. 그는 저 멀리 선두에서 스토릭 경이 이끄는 선봉대가 들판을 지나 절벽 밑에 다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바로 그때 일이 터졌다.
마치 데이드라가 소환되는 것처럼 던머 군대가 절벽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고, 선봉대의 머리 위로 화염과 화살의 비를 퍼부었다. 그와 동시에 모운홀드 공작의 깃발을 든 일련의 무리가 말을 몰아 강 주위를 돌더니, 이내 벌목된 협곡으로 떨어지는 강가 변두리를 따라 모습을 감췄다. 우익에 있었던 족장 울락스는 그 광경을 보고는 복수를 외치며 추격을 시작했다. 나게아 여왕은 절벽의 적군을 가로막기 위해 그녀의 병사들을 서쪽 둑으로 보냈다.
황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갈피조차 못 잡고 있었다. 그의 병사들은 진창에 너무 깊게 빠져 신속히 전장으로 합류할 수 없었다. 그는 모운홀드 군대가 숲을 지나 주위를 포위하려 시도할 경우에 대비하여 병사들로 하여금 동쪽 숲을 향하도록 명했다. 그들은 전혀 모습을 비추지 않았고, 그저 서쪽을 향하고 있었던 많은 병사들이 전장에서 완전히 이탈했을 따름이었다. 미라모어는 절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비벡으로 추정되는 키 큰 던머가 신호를 내리자, 전투마법사들이 저들의 마법을 서쪽으로 쏘아보냈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바탕으로, 미라모어는 그게 댐이라고 추론했다. 엄청난 급류가 터져나와 나게아의 좌익을 남아있던 선봉대를 향해 쓸어내렸고, 두 집단은 한데 뭉쳐서 동쪽의 하류로 떠내려갔다.
황제는 몰살당한 그의 군대가 다시 모습을 나타내기를 기다리는 것 마냥 그 자리에 얼어붙었고, 이윽고는 퇴각을 명했다. 미라모어는 재빨리 몸을 숨기고 저들이 다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이어서 그는 그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절벽을 향해 헤쳐나갔다.
모로윈드 군대도 자신들의 진영으로 회군하는 중이었다. 그는 머리 위에서 모로윈드군이 승리를 자축하는 소리를 들으며 조심스레 강가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동쪽에서 그는 제국군의 모습을 보았다. 물살에 휩쓸렸던 그들은 강가를 가로지르며 그물처럼 촘촘히 박힌 창들의 한가운데로 던져져 있었다. 울락스의 우익 위로 스토릭의 선봉대가, 다시 그 위로 나게아의 좌익이 쌓여 있었다. 수백이 넘는 병사들이 마치 목걸이처럼 꿰여 있었다.
미라모어는 시체들을 뒤져 값나가는 것들을 최대한 챙겨 강 하류로 도망쳤다. 강물이 핏물을 전부 씻어내고 원래의 빛깔을 되찾기 전까지, 그는 최대한 도망쳐야 했다.
2920년, 첫 파종 29일
해머펠의 헤가테에서
"임페리얼 시티에서 네게 편지가 왔구나." 대여사제는 코르다에게 양피지를 건넸다. 모든 젊은 여사제들이 웃으며 놀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코르다의 자매인 리자가 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은 으레 보내는 편지였을 따름이었다.
코르다는 편지를 받아 정원으로 발길을 돌렸고, 단조로운 모랫빛의 온실과도 같은 세상에서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인 오아시스에서 그걸 펼쳐보았다. 편지는 딱히 특별할 것도 없었다. 궁정의 뜬소문, 어두운 와인색 벨벳을 선호하는 최신 유행, 그리고 나날이 심해져가는 황제의 편집증에 대한 보고로 가득했다.
"이런 모든 것들에서 자유로운 게 네 행운인 줄 알아." 리자가 이야기했다. "황제는 가장 최근의 전장에서 낭패를 본 건 죄다 황궁의 밀정 탓이라고 확신하고 있어. 심지어 나를 심문하기까지 했다니까. 룹트가께서 지켜주시는 넌 절대로 나 같이 파란만장한 삶을 살 리 없겠지."
코르다는 사막의 소리를 들으며 룹트가께 정확히 반대되는 소원을 빌었다.
비의 손길에서 계속.
5. 4권
원문
2920년, 첫 번째 시대의 마지막 해
제4권: 비의 손길
칼로박 타운웨이 지음
2920년, 비의 손길 3일
오블리비언, 콜드하버에서
소사 실은 소금기 있는 물에 반쯤 잠긴 궁전에서, 갈수록 어두워지는 회랑을 그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지나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서는 역겹게 질척대는 생물체가 갈대밭에서 허우적댔고, 꺼지기 직전의 하얀 불빛이 아치 위를 밝히고 있었으며, 한순간은 시체 썩는 내를 풍기더라도 곧 향긋한 꽃내음으로 변화하는 향취가 그의 코를 엄습했다. 그는 몇 번 정도 데이드라들의 군주들을 만나러 각각의 오블리비언에 방문했었지만, 그럴 때마다 그가 마주하는 광경은 항상 달랐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다른 곳에 한눈을 팔지 않았다.
데이드릭 프린스 중에서도 저명한 여덟이 반쯤 녹아내린 돔 형태의 방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땅거미와 새벽의 프린스 아주라, 계략의 프린스 보에디아, 지식의 데이드라인 헤르마-모라, 사냥꾼 허씬, 저주의 신인 말라카스, 재앙의 프린스인 메이룬스 데이건, 강간의 왕 몰라그 발, 그리고 미치광이 쉐오고라스였다.
하늘이 그들의 머리 위에서 만남의 장에 뒤틀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2920년, 비의 손길 5일 -
서머셋의 아르테움 섬에서
소사 실의 목소리가 동굴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려퍼졌다. "바위를 치워라!"
수련생들은 즉각 복종했고 꿈꾸는 동굴 입구를 막고 있던 거대한 돌을 옆으로 굴려 치웠다. 그러자 먼지로 뒤덮이고 핼쑥해진 소사 실의 얼굴이 나타났다. 고작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몇 달이고 몇 해를 넘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리라사는 그가 걸음을 옮기는 것을 돕고자 부축하려 했지만, 그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어 그녀의 도움을 거절했다.
"그... 성공하셨습니까?" 그녀가 물었다.
"내가 만난 데이드라 군주들은 우리 제안에 동의했다." 그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길버데일에 닥쳤던 재앙과 같은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마녀나 마법사 같은 중재자를 거쳐서만 인간과 엘프의 부름에 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대가로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 노드 애송이 윌레그가 물었다.
"데이드라와의 거래는," 소사 실은 시직 결사의 마스터를 만나기 위해 이아케시스의 궁전을 향하며 말했다. "순진한 자와 이야기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2920년, 비의 손길 20일
시로딜의 임페리얼 시티에서
폭풍우가 황자의 침실 창문을 두드리며, 타들어가는 향료와 허브 연기로 가득한 공기 중의 장벽에 축축한 습기를 뒤섞었다.
"어머님 되시는 황후 폐하께서 보내신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전령이 말했다. "황자 전하의 건강을 걱정하고 계십니다."
"참 걱정도 많은 부모님이시라니까!" 쥘렉 황자는 침대에서 웃었다.
"어머니가 아들의 걱정을 하는 건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수석 고문의 아들인 사비리엔-초락이 말했다.
"우리 집안에서는 모든 것이 부자연스럽다네, 아카비르. 유폐되신 어머님께서는, 아버님께서 날 황위를 노리는 반역자로 몰아 독살하시지는 않을까 걱정하시지." 왕자는 신경질적으로 베개에 몸을 던졌다. "황제 폐하께서는 본인께서 하시는 것마냥 나더러 검식자를 두고 음식을 죄다 기미하라시더군."
"많은 음모가 도사리고 있으니까요." 아카비르는 수긍했다. "전하께서는 거의 3주를 침대에 누워 제국에 있는 모든 치료사들과 무도회장에서의 느릿한 춤을 추시는 것처럼 보내셨잖습니까. 적어도 모두가 전하께서 회복하시는 중이라는 건 알았지만요."
"그저 빨리 모로윈드에게 맞설 선봉대를 이끌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하길 바랄 뿐이네." 쥘렉은 대답했다.
2920년, 비의 손길 11일
서머셋의 아르테움 섬에서
견습생들은 한쪽 면이 트여 있는 목조 복도에 늘어서 그들 앞에서 화염을 날름대는 길고도 깊은 대리석 해자를 바라보았다. 타오르는 열기로 공기가 떨릴 지경이었다. 각각의 학생들은 진정한 시직의 일원으로서 감정 없는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들의 공포를 앞에서 타오르는 화염의 열기만큼이나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소사 실은 눈을 감고 화염 저항 마법을 읊조렸다. 천천히, 그는 화염이 넘실대는 해자를 지나 아무런 탈도 없이 반대편으로 올라갔다. 그의 하얀 로브에서는 한 점의 그을음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마법 또한 다른 모든 마법이 그러하듯이, 너희의 능력에 따라 더욱 강한 효력을 발휘한다." 그가 말했다. "너희의 상상력과 의지가 핵심이다. 공기나 꽃에 대한 저항 마법이 필요 없듯이, 너희가 주문을 시전한 후에는 화염에 대한 저항 마법이 필요했는지조차 잊어버려야 한다. 단, 내 말을 착각해서는 아니 된다. 저항 마법은 화염의 존재 그 자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너희는 여전히 화염의 존재와 질감, 그리고 그 갈망과 열기까지 느끼겠지만, 그것이 너희를 다치거나 해치지 못할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한 사람씩 차례로 주문을 시전하고는 불길 속을 지나갔다. 심지어 몇몇은 한술 더 떠 몸을 숙여 한 줌의 불꽃을 쥐어다가 공기 중으로 흩뿌리고는, 그것이 거품처럼 팽창했다가 이내 손가락 사이에서 사그라들게 하였다. 소사 실은 미소지었다. 그들은 훌륭하게 자신의 두려움과 맞서고 있었다.
그때 수석 감독관 타르갈리스가 복도 저편에서 달려왔다. "소사 실이시여! 아말렉시아께서 아르테움에 도착하셨습니다. 아이키시스가 제게 성하를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소사 실이 타르갈리스를 향해 몸을 돌린 순간, 갑작스레 비명이 들려왔고 그는 즉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았다. 주문을 정확히 시전하지 못한 노드 애송이 윌레그가 불타고 있었다. 머리카락과 살점이 그슬리는 냄새가 해자를 지나던 다른 학생들까지 공포에 빠뜨렸고, 그들은 윌레그를 끌어내 함께 빠져나오려 했지만 경사가 너무 가팔랐다. 소사 실은 손을 휘저어 불을 껐다.
윌레그와 몇몇 학생들은 화상을 입었지만,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았다. 마법사는 타르갈리스를 향해 다시 돌아서기 전, 학생들에게 치료 마법을 시전했다.
"이들과 조금 더 시간을 보내도록 하지. 아말렉시아도 옷자락에서 길바닥의 흙먼지를 털어낼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나." 소사 실은 다시 학생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공포는 주문을 깨뜨릴 수 없는 법이지. 하지만 의심과 무능이야말로 주문을 사용하는 모든 이들의 가장 큰 적이다. 마스터 윌레그, 돌아가서 짐을 싸도록. 내일 아침 널 본토로 데려갈 배편을 준비해두겠다."
마법사는 서재에서 차를 마시며 웃고 있는 아말렉시아와 아이키시스를 찾아냈다. 그는 그녀가 그렇게 흐트러진 모습으로 담요에 몸을 감싼 채, 흑단 같은 긴 머리에서 습기를 말리기 위해 불 앞에 자리한 모습은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그녀는 그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소사 실이 다가가자, 그녀는 뛰어올라 그를 끌어안았다.
"모로윈드에서 여기까지 헤엄쳐 오기라도 했나?" 그가 미소지었다.
"스카이워치에서 해안으로 내려가는 데 비가 쏟아졌지." 그녀는 그의 미소에 화답했다.
"반 리그 밖에 안 되는 거리지만, 이곳에는 한 번도 비가 온 적이 없지요." 아이키시스가 자랑스레 말을 꺼냈다. "물론, 저도 가끔은 서머셋에서의 즐거운 시간이나, 더러는 본토까지도 그립긴 합니다. 아직도 바깥 세상에서 어떤 의미에서든 이름 높은 이들과 만나면 항상 깊은 인상을 받지요. 지금은 난세니까요. 난세라는 말이 나왔으니, 제가 들었던 전쟁 이야기는 다 뭡니까?"
"지난 80년 동안 대륙을 피로 물들이고 있는 바로 그것 말인가, 마스터?" 소사 실이 즐겁게 물었다.
"제 말이 그 말인 것 같군요." 아이키시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전쟁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질거야. 소사 실께서 아르테움을 떠나시도록 내가 설득할 수 없다면 말이지." 아말렉시아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그녀의 친구에게 개인적으로 이야기할 생각이었지만, 늙은 알트머는 그녀가 계속 이야기하기를 재촉했다. "예지를 봤어. 그렇게 될 게 확실해."
소사 실은 잠시 동안 침묵하고는 아이키시스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모로윈드로 돌아가야만 하겠네."
"당신께서 한다면 하는 분이신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늙은 마스터는 한숨을 내쉬었다. "시직의 길은 산만해서는 안 됩니다. 전쟁은 터지기 마련이고, 제국은 번영하고 또 몰락하는 법이지요. 당신께서는 떠나서야만 하고, 우리 또한 그럴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아이키시스? 그대도 섬을 떠날 작정인가?"
"아니오, 이 섬이 바다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답하는 아이키시스의 목소리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몇 년 안에 안개가 아르테움을 덮을 것이고 우린 사라질 겁니다. 우리는 천성이 조언자입니다만, 지금 탐리엘에는 조언자들이 너무 많지요... 아니, 우린 떠날 겁니다. 그리고 이 땅이 우리를 다시 필요로 할 때 돌아올 것입니다. 아마도 다른 시대의 일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늙은 알트머는 힘겹게 일어나, 마지막으로 따라낸 차 한 모금만을 소사 실과 아말렉시아 앞에 남겨두었다. "마지막 배를 놓치지 마십시오."
두 번째 파종에서 계속.
2920년, 첫 번째 시대의 마지막 해
제4권: 비의 손길
칼로박 타운웨이 지음
2920년, 비의 손길 3일
오블리비언, 콜드하버에서
소사 실은 소금기 있는 물에 반쯤 잠긴 궁전에서, 갈수록 어두워지는 회랑을 그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지나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서는 역겹게 질척대는 생물체가 갈대밭에서 허우적댔고, 꺼지기 직전의 하얀 불빛이 아치 위를 밝히고 있었으며, 한순간은 시체 썩는 내를 풍기더라도 곧 향긋한 꽃내음으로 변화하는 향취가 그의 코를 엄습했다. 그는 몇 번 정도 데이드라들의 군주들을 만나러 각각의 오블리비언에 방문했었지만, 그럴 때마다 그가 마주하는 광경은 항상 달랐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다른 곳에 한눈을 팔지 않았다.
데이드릭 프린스 중에서도 저명한 여덟이 반쯤 녹아내린 돔 형태의 방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땅거미와 새벽의 프린스 아주라, 계략의 프린스 보에디아, 지식의 데이드라인 헤르마-모라, 사냥꾼 허씬, 저주의 신인 말라카스, 재앙의 프린스인 메이룬스 데이건, 강간의 왕 몰라그 발, 그리고 미치광이 쉐오고라스였다.
하늘이 그들의 머리 위에서 만남의 장에 뒤틀린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2920년, 비의 손길 5일 -
서머셋의 아르테움 섬에서
소사 실의 목소리가 동굴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려퍼졌다. "바위를 치워라!"
수련생들은 즉각 복종했고 꿈꾸는 동굴 입구를 막고 있던 거대한 돌을 옆으로 굴려 치웠다. 그러자 먼지로 뒤덮이고 핼쑥해진 소사 실의 얼굴이 나타났다. 고작 며칠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마치 몇 달이고 몇 해를 넘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리라사는 그가 걸음을 옮기는 것을 돕고자 부축하려 했지만, 그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저어 그녀의 도움을 거절했다.
"그... 성공하셨습니까?" 그녀가 물었다.
"내가 만난 데이드라 군주들은 우리 제안에 동의했다." 그는 건조하게 대답했다. "길버데일에 닥쳤던 재앙과 같은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들은 마녀나 마법사 같은 중재자를 거쳐서만 인간과 엘프의 부름에 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대가로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 노드 애송이 윌레그가 물었다.
"데이드라와의 거래는," 소사 실은 시직 결사의 마스터를 만나기 위해 이아케시스의 궁전을 향하며 말했다. "순진한 자와 이야기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2920년, 비의 손길 20일
시로딜의 임페리얼 시티에서
폭풍우가 황자의 침실 창문을 두드리며, 타들어가는 향료와 허브 연기로 가득한 공기 중의 장벽에 축축한 습기를 뒤섞었다.
"어머님 되시는 황후 폐하께서 보내신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전령이 말했다. "황자 전하의 건강을 걱정하고 계십니다."
"참 걱정도 많은 부모님이시라니까!" 쥘렉 황자는 침대에서 웃었다.
"어머니가 아들의 걱정을 하는 건 자연스러운 것이지요." 수석 고문의 아들인 사비리엔-초락이 말했다.
"우리 집안에서는 모든 것이 부자연스럽다네, 아카비르. 유폐되신 어머님께서는, 아버님께서 날 황위를 노리는 반역자로 몰아 독살하시지는 않을까 걱정하시지." 왕자는 신경질적으로 베개에 몸을 던졌다. "황제 폐하께서는 본인께서 하시는 것마냥 나더러 검식자를 두고 음식을 죄다 기미하라시더군."
"많은 음모가 도사리고 있으니까요." 아카비르는 수긍했다. "전하께서는 거의 3주를 침대에 누워 제국에 있는 모든 치료사들과 무도회장에서의 느릿한 춤을 추시는 것처럼 보내셨잖습니까. 적어도 모두가 전하께서 회복하시는 중이라는 건 알았지만요."
"그저 빨리 모로윈드에게 맞설 선봉대를 이끌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하길 바랄 뿐이네." 쥘렉은 대답했다.
2920년, 비의 손길 11일
서머셋의 아르테움 섬에서
견습생들은 한쪽 면이 트여 있는 목조 복도에 늘어서 그들 앞에서 화염을 날름대는 길고도 깊은 대리석 해자를 바라보았다. 타오르는 열기로 공기가 떨릴 지경이었다. 각각의 학생들은 진정한 시직의 일원으로서 감정 없는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들의 공포를 앞에서 타오르는 화염의 열기만큼이나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소사 실은 눈을 감고 화염 저항 마법을 읊조렸다. 천천히, 그는 화염이 넘실대는 해자를 지나 아무런 탈도 없이 반대편으로 올라갔다. 그의 하얀 로브에서는 한 점의 그을음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마법 또한 다른 모든 마법이 그러하듯이, 너희의 능력에 따라 더욱 강한 효력을 발휘한다." 그가 말했다. "너희의 상상력과 의지가 핵심이다. 공기나 꽃에 대한 저항 마법이 필요 없듯이, 너희가 주문을 시전한 후에는 화염에 대한 저항 마법이 필요했는지조차 잊어버려야 한다. 단, 내 말을 착각해서는 아니 된다. 저항 마법은 화염의 존재 그 자체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너희는 여전히 화염의 존재와 질감, 그리고 그 갈망과 열기까지 느끼겠지만, 그것이 너희를 다치거나 해치지 못할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한 사람씩 차례로 주문을 시전하고는 불길 속을 지나갔다. 심지어 몇몇은 한술 더 떠 몸을 숙여 한 줌의 불꽃을 쥐어다가 공기 중으로 흩뿌리고는, 그것이 거품처럼 팽창했다가 이내 손가락 사이에서 사그라들게 하였다. 소사 실은 미소지었다. 그들은 훌륭하게 자신의 두려움과 맞서고 있었다.
그때 수석 감독관 타르갈리스가 복도 저편에서 달려왔다. "소사 실이시여! 아말렉시아께서 아르테움에 도착하셨습니다. 아이키시스가 제게 성하를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소사 실이 타르갈리스를 향해 몸을 돌린 순간, 갑작스레 비명이 들려왔고 그는 즉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았다. 주문을 정확히 시전하지 못한 노드 애송이 윌레그가 불타고 있었다. 머리카락과 살점이 그슬리는 냄새가 해자를 지나던 다른 학생들까지 공포에 빠뜨렸고, 그들은 윌레그를 끌어내 함께 빠져나오려 했지만 경사가 너무 가팔랐다. 소사 실은 손을 휘저어 불을 껐다.
윌레그와 몇몇 학생들은 화상을 입었지만,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았다. 마법사는 타르갈리스를 향해 다시 돌아서기 전, 학생들에게 치료 마법을 시전했다.
"이들과 조금 더 시간을 보내도록 하지. 아말렉시아도 옷자락에서 길바닥의 흙먼지를 털어낼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나." 소사 실은 다시 학생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공포는 주문을 깨뜨릴 수 없는 법이지. 하지만 의심과 무능이야말로 주문을 사용하는 모든 이들의 가장 큰 적이다. 마스터 윌레그, 돌아가서 짐을 싸도록. 내일 아침 널 본토로 데려갈 배편을 준비해두겠다."
마법사는 서재에서 차를 마시며 웃고 있는 아말렉시아와 아이키시스를 찾아냈다. 그는 그녀가 그렇게 흐트러진 모습으로 담요에 몸을 감싼 채, 흑단 같은 긴 머리에서 습기를 말리기 위해 불 앞에 자리한 모습은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그녀는 그가 기억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소사 실이 다가가자, 그녀는 뛰어올라 그를 끌어안았다.
"모로윈드에서 여기까지 헤엄쳐 오기라도 했나?" 그가 미소지었다.
"스카이워치에서 해안으로 내려가는 데 비가 쏟아졌지." 그녀는 그의 미소에 화답했다.
"반 리그 밖에 안 되는 거리지만, 이곳에는 한 번도 비가 온 적이 없지요." 아이키시스가 자랑스레 말을 꺼냈다. "물론, 저도 가끔은 서머셋에서의 즐거운 시간이나, 더러는 본토까지도 그립긴 합니다. 아직도 바깥 세상에서 어떤 의미에서든 이름 높은 이들과 만나면 항상 깊은 인상을 받지요. 지금은 난세니까요. 난세라는 말이 나왔으니, 제가 들었던 전쟁 이야기는 다 뭡니까?"
"지난 80년 동안 대륙을 피로 물들이고 있는 바로 그것 말인가, 마스터?" 소사 실이 즐겁게 물었다.
"제 말이 그 말인 것 같군요." 아이키시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 전쟁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습니까?"
"우리가 질거야. 소사 실께서 아르테움을 떠나시도록 내가 설득할 수 없다면 말이지." 아말렉시아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그녀의 친구에게 개인적으로 이야기할 생각이었지만, 늙은 알트머는 그녀가 계속 이야기하기를 재촉했다. "예지를 봤어. 그렇게 될 게 확실해."
소사 실은 잠시 동안 침묵하고는 아이키시스를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모로윈드로 돌아가야만 하겠네."
"당신께서 한다면 하는 분이신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늙은 마스터는 한숨을 내쉬었다. "시직의 길은 산만해서는 안 됩니다. 전쟁은 터지기 마련이고, 제국은 번영하고 또 몰락하는 법이지요. 당신께서는 떠나서야만 하고, 우리 또한 그럴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아이키시스? 그대도 섬을 떠날 작정인가?"
"아니오, 이 섬이 바다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답하는 아이키시스의 목소리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몇 년 안에 안개가 아르테움을 덮을 것이고 우린 사라질 겁니다. 우리는 천성이 조언자입니다만, 지금 탐리엘에는 조언자들이 너무 많지요... 아니, 우린 떠날 겁니다. 그리고 이 땅이 우리를 다시 필요로 할 때 돌아올 것입니다. 아마도 다른 시대의 일이 될지도 모르겠군요."
늙은 알트머는 힘겹게 일어나, 마지막으로 따라낸 차 한 모금만을 소사 실과 아말렉시아 앞에 남겨두었다. "마지막 배를 놓치지 마십시오."
두 번째 파종에서 계속.
6. 5권
원문
2920년, 첫 번째 시대의 마지막 해
제5권: 두 번째 파종
칼로박 타운웨이 지음
2920년, 두 번째 파종 10일
시로딜의 임페리얼 시티에서
"황제 폐하." 수석 고문인 베르시듀-셰이는 미소지으며 그의 방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요즈음 찾아뵙지 못했군요. 혹 폐하께서... 사랑스러운 리자님 탓에 몸이 편찮으신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녀는 미르 코룹에서 요양 중이다." 황제 레만 3세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이제 짐이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세 사람 뿐인 지경에 이르렀어. 자네, 내 아들인 황자, 그리고 리자 말일세." 부아가 치민 황제가 내뱉었다. "의회 전체가 밀정 소굴이야."
"무엇이 폐하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는지요?" 수석 고문 베르시듀-셰이는 동정어린 목소리로 질문하며 두꺼운 커튼을 쳤다. 그러자 곧바로 대리석 바닥에서 울려퍼지는 발자국 소리부터 봄날의 뜰에서 짹짹대는 새소리에 이르기까지 방 바깥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보드룸 전투 이전 케어 수비오에서 머물 때, 내 아들이 중독됐었지. 바로 그때 블랙 마쉬의 오르마 부족출신이라는 악명높은 독술사 카치카가 짐의 군대에 숨어들었음을 알아냈다. 그년은 감히 짐을 죽일 셈이었겠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던 게 분명해." 황제는 씩씩거렸다. "그런데도 의회 놈들은 처분을 내리기 전에 그년이 개입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더군."
"저들이라면 물론 그렇겠지요." 수석 고문의 목소리는 사려 깊게 느껴졌다. "특히 저들 가운데 한 명 이상이 음모에 가담하고 있었다면 말입니다.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황제 폐하."
"정말인가?" 레만에게서 인내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서 말해보게!"
"폐하께서는 의회에 이 건은 불문에 부치겠다고 말씀하시고, 제가 병사를 보내 이 카치카라는 작자의 소재를 파악하고 뒤를 밟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누가 그 여자와 어울리고 있는지, 그리고 어쩌면 폐하의 옥체를 노리는 이 음모가 어디까지 미치고 있는지 알아낼 수 있겠지요."
"훌륭하군." 레만은 만족스레 얼굴을 모았다. "그것 참 명안이 아닌가. 이 계획을 누가 획책했는지는 몰라도, 그 방법이라면 확실히 밝혀낼 수 있겠어."
"물론입니다, 황제 폐하." 수석 고문은 미소를 띄우며 황제가 나갈 수 있도록 커튼을 젖혔다. 바깥 회랑에는 베르시듀 셰이의 아들인 사비리엔-초락이 있었다. 젊은이는 수석 고문의 방에 들어서기 전 황제를 향해 절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아버지?" 아카비르인 청년이 속삭였다. "황제가 아무개라는 독술사를 찾아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만."
"아들아, 화술의 요체란-" 베르시듀-셰이는 아들을 향해 운을 뗐다. "-네가 저들이 했으면 하는 일을, 저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해 주어 실현해내는 것이란다. 카치카에게 편지를 써서, 만약 지시를 정확히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보다 그년의 목숨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확실히 이해시켜 주도록 하거라."
2920년 두 번째 파종 13일
시로딜의 미르 코룹에서
리자는 거품이 보글대는 온천에 느긋이 잠겨, 무수한 작은 돌들이 피부를 문지르는 것 같은 얼얼함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 자리잡은 바위 선반이 안개비를 가로막으면서, 오직 햇살만이 층층이 겹친 나뭇가지 사이로 흘러들어올 수 있게 만들었다. 목가적인 삶의 목가적인 순간을 보내고, 목욕을 마쳤을 때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이 완전히 회복되었음을 알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한 잔의 물밖에 없었다. 탕은 더할 나위 없이 향긋했지만, 맛만큼은 분필을 씹는 것 같았다.
"물!" 그녀는 시종을 향해 외쳤다. "물을 가져오너라, 어서!"
눈가에 넝마를 두른 비쩍 마른 여자가 그녀 쪽으로 달려오더니 물을 넣는 염소가죽 부대를 떨어뜨렸다. 리자는 그 여자의 꼬락서니에 웃음이 터져나올 지경이었으나 - 그녀 자신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스스로의 알몸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므로 - 구겨진 넝마 사이로 그 늙은 여자의 눈구멍이 텅 비어 있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리자가 말로만 들었지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오르마 부족민처럼 보였다. 눈 없이 태어나지만, 대신 다른 감각들이 매우 뛰어나다는. '미르 코룹 영주는 참 이국적인 하인도 다 부리네.' 그녀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곧바로 여자는 모습을 감췄고 곧 잊혀졌다. 리자는 햇빛과 물 빼고는 그 무엇도 생각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녀는 가죽부대의 마개를 열었지만, 안에 든 액체에서는 수상쩍은 금속 냄새가 느껴졌다. 불현듯 그녀는 이곳에 자기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리자 부인." 제국 경비대 대장이 말했다. "혹시, 그러니까, 카치카와 안면이 있으신 모양이시군요?"
"그런 여자는 들어본 적도 없다." 리자는 분한 마음에 말을 더듬었다. "여기서 무얼 하고 있지? 이 몸은 감히 너희들이 흘끔거려도 되는 게 아니야."
"들어본 적이 없으시다라, 바로 조금 전에 당신께서 그 여자와 함께 계시는 걸 보았습니다만." 경비대장은 가죽부대를 들어올리고는 냄새를 맡았다. "그 여자가 당신께 네이보스 이코르를 넘긴 게 아닙니까? 그걸로 황제 폐하를 중독시키라고?"
"대장님." 헐레벌떡 달려온 경비병들 중 한 명이 말했다. "그 아르고니안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숲으로 모습을 감춘 것 같습니다."
"그래, 그게 놈들의 특기니까." 대장이 답했다. "상관 없다. 놈의 궁정 연락책을 찾아냈거든. 황제 폐하께서 기뻐하시겠어. 이 여자를 잡아라."
경비대가 벌거벗은 여자를 탕에서 끌어냈고, 그녀는 고래고래 소리쳤다. "난 결백해! 난 이게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황제 폐하께서 너희들 모두의 목을 칠 것이야!"
"예, 그러실 수도 있겠지요." 대장이 미소지었다. "황제 폐하께서 당신을 믿으신다면 말입니다."
2920년, 두 번째 파종 21일
블랙 마쉬의 기데온에서
선술집 '암퇘지와 독수리는 주크가 이런 종류의 접선을 할 때 선호하는, 다소 눈에 띄지 않는 가게였다. 그와 그의 동행인을 제외하면, 어둑어둑한 방 안에는 잔뜩 취해서 인사불성인 늙은 뱃사람 몇몇이 전부였다. 더러운 마룻바닥을 들여다보지 않고도 진득한 때가 느껴질 정도였고, 몇 안 되는 잦아드는 햇살 사이로 보이는 케케묵은 먼지들은 움직일 생각조차 없다는 듯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격렬한 전투를 경험해본 적은 있나?" 주크가 물었다. "이 일의 보수는 훌륭하지만, 그만큼 위험이 따르는 것도 알았으면 하는군."
"전투 경험이야 확실하지." 미라모어가 건들대며 대답했다. "바로 두 달 전에 있었던 보드룸 전투에 있었어. 당신이 할 일을 마쳐서 지금 이야기한 날짜와 시간에 황제가 최소한의 호위만 거느리고 도자 가도를 지나기만 하면, 나도 내 할 일을 마치지. 그 양반이 변장하지 않는다는 것만 확실히 해 달라고. 레만 황제가 숨어 있을지 모른답시고 가도를 지나는 캐러밴을 죄다 몰살시킬 생각은 없으니까."
주크는 미소지었고, 미라모어는 코스린기특유의 빛을 반사하는 얼굴에 자기 모습이 비춰지고 있는 걸 보았다. 썩 마음에 드는 모습이었다. 유능한 전문가가 자신에 찬 얼굴로 앉아 있었다.
"좋아." 주크가 대답했다. "잔금은 일이 끝나면 넘겨주지."
주크는 두 사람 사이의 탁상 위에 커다란 상자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몇 분 정도 기다렸다가 자리를 뜨게." 주크가 말을 던졌다. "당신이 날 미행하지는 않았으면 하는군. 그리고 만약 당신이 잡혀서 고문당하더라도, 고용주께서는 익명인 채로 남아 계시기를 바라신다."
"얼마든지." 미라모어는 그로그를 더 시켰다.
주크는 말에 올라 미로처럼 얽힌 기데온의 비좁은 도로를 달렸고, 그와 그의 말 모두 기쁜 마음으로 지방으로 통하는 관문을 지났다. 지오베세 성으로 향하는 큰길은 매년 봄이면 항상 그렇듯 물에 잠겨버렸지만, 주크는 언덕을 넘는 지름길을 알고 있었다. 말을 달려 이끼가 늘어진 나무들과 위험천만하게 미끌대는 바윗길을 지나쳐, 그는 두 시간 만에 성문에 다다랐다. 그리고는 낭비할 시간조차 없다는 듯 가장 높은 탑 꼭대기에 있는 타비아의 감방으로 향했다.
"어떤 놈이었지?" 황후가 물었다.
"어리석은 놈입니다." 주크가 대답했다. "하지만 이런 일에는 그런 자가 적당한 법입니다."
2920년, 두 번째 파종 30일
시로딜의 투르조 요새에서
리자는 소리치고, 소리치고, 그리고 또 소리쳤다. 그녀가 갇혀 있는 방 안에서 그 소리를 듣는 관중은 이끼로 뒤덮인 거대한 회색 석벽이 전부였다. 바깥의 경비병들은 마치 귀머거리라도 된다는 양 그녀는 물론 다른 모든 죄수들에게 무관심했다. 저 멀리 임페리얼 시티에 있는 황제 역시도, 결백을 호소하는 그녀의 울부짖음에 대답 없는 귀머거리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악을 썼다.
2920년, 두 번째 파종 31일
시로딜의 카바스 림 가도에서
투랄라가 시로딜인은 물론 던머에 이르기까지 사람 얼굴을 보지 못한 지 며칠이고 몇 주가 되었다. 발걸음을 옮기면서, 그녀는 속으로 이렇게까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시로딜이 제국의 중심이자 수도가 된 건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보스머들이 사는 발렌우드의 밀림조차도 분명 이 하트랜드의 숲보다는 북적일 것 같았다.
그녀는 회상했다. 그녀가 모로윈드와 시로딜의 국경을 넘은 게 한 달 전, 아니, 두 달 전이었나? 지금보다 훨씬 추웠다는 걸 빼면 그녀가 시간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경비병들은 퉁명스러웠지만, 그녀가 아무런 무기도 지니지 않고 있었으므로 순순히 지나가게 해 주었다. 그 뒤로 그녀는 몇몇 캐러밴을 만났고, 야영하는 모험가들로부터 먹거리를 나눠받기도 했지만, 그녀를 마을까지 태워다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투랄라는 그녀의 숄을 떼어내 뒤로 질질 끌리게 했다. 순간 그녀는 뒤에서 누군가의 소리를 들었고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오직 새 한 마리가 가지에 앉아 비웃는 것마냥 지저귈 뿐이었다.
그녀는 계속 발걸음을 옮기다가 이내 멈춰 섰다. 무언가 일어나고 있었다. 뱃속의 아이가 그녀의 배를 걷어찬 적은 몇 번인가 있었지만, 지금의 경련은 그것과는 분명히 다른 종류였다. 그녀는 신음소리와 함께 휘청대며 길가로 벗어나 풀밭 위에 쓰러졌다. 그녀의 아이가 세상 빛을 보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등을 기대고 누워 힘을 주었지만, 고통과 절망으로 흘러넘친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게 전부였다.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이런 황야에서, 오직 그녀 혼자, 모운홀드 공작의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말인가? 분노와 고뇌가 가득한 그녀의 비명소리가 나무 위의 새들을 놀래켜 흩었다.
방금 전까지 나무 위에서 그녀를 비웃던 바로 그 새가 길가에 내려앉았다. 그녀가 눈짓하자 새는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벌거벗은 엘프 남성이 나타났다. 그는 던머만큼 까무잡잡하지는 않았지만, 알트머만큼 창백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가 바로 에일리드, 와일드 엘프임을 알아챘다. 투랄라는 비명을 질렀지만 남자가 그녀를 내리 눌렀다. 몇 분간 몸부림치고 나서야 그녀는 몸이 풀어지는 느낌을 받으며 정신을 잃었다.
그녀의 정신을 들게 한 것은 갓난아기의 울음소리였다. 아이는 깨끗이 닦여진 채로 그녀의 옆에 누워 있었다. 투랄라는 막 태어난 그녀의 딸을 안아 올리고, 올해 들어 처음으로 기쁨의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나무들에게 "고마워요."라고 속삭이고는 아기을 양 팔로 안아 올리고, 다시 서쪽을 향해 난 길을 따라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중간에서 계속.
2920년, 첫 번째 시대의 마지막 해
제5권: 두 번째 파종
칼로박 타운웨이 지음
2920년, 두 번째 파종 10일
시로딜의 임페리얼 시티에서
"황제 폐하." 수석 고문인 베르시듀-셰이는 미소지으며 그의 방으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요즈음 찾아뵙지 못했군요. 혹 폐하께서... 사랑스러운 리자님 탓에 몸이 편찮으신 게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녀는 미르 코룹에서 요양 중이다." 황제 레만 3세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이제 짐이 믿을 수 있는 건 오직 세 사람 뿐인 지경에 이르렀어. 자네, 내 아들인 황자, 그리고 리자 말일세." 부아가 치민 황제가 내뱉었다. "의회 전체가 밀정 소굴이야."
"무엇이 폐하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는지요?" 수석 고문 베르시듀-셰이는 동정어린 목소리로 질문하며 두꺼운 커튼을 쳤다. 그러자 곧바로 대리석 바닥에서 울려퍼지는 발자국 소리부터 봄날의 뜰에서 짹짹대는 새소리에 이르기까지 방 바깥에서 들려오는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보드룸 전투 이전 케어 수비오에서 머물 때, 내 아들이 중독됐었지. 바로 그때 블랙 마쉬의 오르마 부족출신이라는 악명높은 독술사 카치카가 짐의 군대에 숨어들었음을 알아냈다. 그년은 감히 짐을 죽일 셈이었겠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던 게 분명해." 황제는 씩씩거렸다. "그런데도 의회 놈들은 처분을 내리기 전에 그년이 개입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다더군."
"저들이라면 물론 그렇겠지요." 수석 고문의 목소리는 사려 깊게 느껴졌다. "특히 저들 가운데 한 명 이상이 음모에 가담하고 있었다면 말입니다. 제게 생각이 있습니다, 황제 폐하."
"정말인가?" 레만에게서 인내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어서 말해보게!"
"폐하께서는 의회에 이 건은 불문에 부치겠다고 말씀하시고, 제가 병사를 보내 이 카치카라는 작자의 소재를 파악하고 뒤를 밟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는 누가 그 여자와 어울리고 있는지, 그리고 어쩌면 폐하의 옥체를 노리는 이 음모가 어디까지 미치고 있는지 알아낼 수 있겠지요."
"훌륭하군." 레만은 만족스레 얼굴을 모았다. "그것 참 명안이 아닌가. 이 계획을 누가 획책했는지는 몰라도, 그 방법이라면 확실히 밝혀낼 수 있겠어."
"물론입니다, 황제 폐하." 수석 고문은 미소를 띄우며 황제가 나갈 수 있도록 커튼을 젖혔다. 바깥 회랑에는 베르시듀 셰이의 아들인 사비리엔-초락이 있었다. 젊은이는 수석 고문의 방에 들어서기 전 황제를 향해 절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아버지?" 아카비르인 청년이 속삭였다. "황제가 아무개라는 독술사를 찾아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만."
"아들아, 화술의 요체란-" 베르시듀-셰이는 아들을 향해 운을 뗐다. "-네가 저들이 했으면 하는 일을, 저들이 듣고 싶은 말을 해 주어 실현해내는 것이란다. 카치카에게 편지를 써서, 만약 지시를 정확히 따르지 않는다면 우리보다 그년의 목숨이 더 위험하다는 것을 확실히 이해시켜 주도록 하거라."
2920년 두 번째 파종 13일
시로딜의 미르 코룹에서
리자는 거품이 보글대는 온천에 느긋이 잠겨, 무수한 작은 돌들이 피부를 문지르는 것 같은 얼얼함을 음미하고 있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 자리잡은 바위 선반이 안개비를 가로막으면서, 오직 햇살만이 층층이 겹친 나뭇가지 사이로 흘러들어올 수 있게 만들었다. 목가적인 삶의 목가적인 순간을 보내고, 목욕을 마쳤을 때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이 완전히 회복되었음을 알았다. 지금 이 순간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한 잔의 물밖에 없었다. 탕은 더할 나위 없이 향긋했지만, 맛만큼은 분필을 씹는 것 같았다.
"물!" 그녀는 시종을 향해 외쳤다. "물을 가져오너라, 어서!"
눈가에 넝마를 두른 비쩍 마른 여자가 그녀 쪽으로 달려오더니 물을 넣는 염소가죽 부대를 떨어뜨렸다. 리자는 그 여자의 꼬락서니에 웃음이 터져나올 지경이었으나 - 그녀 자신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스스로의 알몸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므로 - 구겨진 넝마 사이로 그 늙은 여자의 눈구멍이 텅 비어 있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리자가 말로만 들었지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오르마 부족민처럼 보였다. 눈 없이 태어나지만, 대신 다른 감각들이 매우 뛰어나다는. '미르 코룹 영주는 참 이국적인 하인도 다 부리네.' 그녀는 마음 속으로 생각했다.
곧바로 여자는 모습을 감췄고 곧 잊혀졌다. 리자는 햇빛과 물 빼고는 그 무엇도 생각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녀는 가죽부대의 마개를 열었지만, 안에 든 액체에서는 수상쩍은 금속 냄새가 느껴졌다. 불현듯 그녀는 이곳에 자기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리자 부인." 제국 경비대 대장이 말했다. "혹시, 그러니까, 카치카와 안면이 있으신 모양이시군요?"
"그런 여자는 들어본 적도 없다." 리자는 분한 마음에 말을 더듬었다. "여기서 무얼 하고 있지? 이 몸은 감히 너희들이 흘끔거려도 되는 게 아니야."
"들어본 적이 없으시다라, 바로 조금 전에 당신께서 그 여자와 함께 계시는 걸 보았습니다만." 경비대장은 가죽부대를 들어올리고는 냄새를 맡았다. "그 여자가 당신께 네이보스 이코르를 넘긴 게 아닙니까? 그걸로 황제 폐하를 중독시키라고?"
"대장님." 헐레벌떡 달려온 경비병들 중 한 명이 말했다. "그 아르고니안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숲으로 모습을 감춘 것 같습니다."
"그래, 그게 놈들의 특기니까." 대장이 답했다. "상관 없다. 놈의 궁정 연락책을 찾아냈거든. 황제 폐하께서 기뻐하시겠어. 이 여자를 잡아라."
경비대가 벌거벗은 여자를 탕에서 끌어냈고, 그녀는 고래고래 소리쳤다. "난 결백해! 난 이게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황제 폐하께서 너희들 모두의 목을 칠 것이야!"
"예, 그러실 수도 있겠지요." 대장이 미소지었다. "황제 폐하께서 당신을 믿으신다면 말입니다."
2920년, 두 번째 파종 21일
블랙 마쉬의 기데온에서
선술집 '암퇘지와 독수리는 주크가 이런 종류의 접선을 할 때 선호하는, 다소 눈에 띄지 않는 가게였다. 그와 그의 동행인을 제외하면, 어둑어둑한 방 안에는 잔뜩 취해서 인사불성인 늙은 뱃사람 몇몇이 전부였다. 더러운 마룻바닥을 들여다보지 않고도 진득한 때가 느껴질 정도였고, 몇 안 되는 잦아드는 햇살 사이로 보이는 케케묵은 먼지들은 움직일 생각조차 없다는 듯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격렬한 전투를 경험해본 적은 있나?" 주크가 물었다. "이 일의 보수는 훌륭하지만, 그만큼 위험이 따르는 것도 알았으면 하는군."
"전투 경험이야 확실하지." 미라모어가 건들대며 대답했다. "바로 두 달 전에 있었던 보드룸 전투에 있었어. 당신이 할 일을 마쳐서 지금 이야기한 날짜와 시간에 황제가 최소한의 호위만 거느리고 도자 가도를 지나기만 하면, 나도 내 할 일을 마치지. 그 양반이 변장하지 않는다는 것만 확실히 해 달라고. 레만 황제가 숨어 있을지 모른답시고 가도를 지나는 캐러밴을 죄다 몰살시킬 생각은 없으니까."
주크는 미소지었고, 미라모어는 코스린기특유의 빛을 반사하는 얼굴에 자기 모습이 비춰지고 있는 걸 보았다. 썩 마음에 드는 모습이었다. 유능한 전문가가 자신에 찬 얼굴로 앉아 있었다.
"좋아." 주크가 대답했다. "잔금은 일이 끝나면 넘겨주지."
주크는 두 사람 사이의 탁상 위에 커다란 상자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몇 분 정도 기다렸다가 자리를 뜨게." 주크가 말을 던졌다. "당신이 날 미행하지는 않았으면 하는군. 그리고 만약 당신이 잡혀서 고문당하더라도, 고용주께서는 익명인 채로 남아 계시기를 바라신다."
"얼마든지." 미라모어는 그로그를 더 시켰다.
주크는 말에 올라 미로처럼 얽힌 기데온의 비좁은 도로를 달렸고, 그와 그의 말 모두 기쁜 마음으로 지방으로 통하는 관문을 지났다. 지오베세 성으로 향하는 큰길은 매년 봄이면 항상 그렇듯 물에 잠겨버렸지만, 주크는 언덕을 넘는 지름길을 알고 있었다. 말을 달려 이끼가 늘어진 나무들과 위험천만하게 미끌대는 바윗길을 지나쳐, 그는 두 시간 만에 성문에 다다랐다. 그리고는 낭비할 시간조차 없다는 듯 가장 높은 탑 꼭대기에 있는 타비아의 감방으로 향했다.
"어떤 놈이었지?" 황후가 물었다.
"어리석은 놈입니다." 주크가 대답했다. "하지만 이런 일에는 그런 자가 적당한 법입니다."
2920년, 두 번째 파종 30일
시로딜의 투르조 요새에서
리자는 소리치고, 소리치고, 그리고 또 소리쳤다. 그녀가 갇혀 있는 방 안에서 그 소리를 듣는 관중은 이끼로 뒤덮인 거대한 회색 석벽이 전부였다. 바깥의 경비병들은 마치 귀머거리라도 된다는 양 그녀는 물론 다른 모든 죄수들에게 무관심했다. 저 멀리 임페리얼 시티에 있는 황제 역시도, 결백을 호소하는 그녀의 울부짖음에 대답 없는 귀머거리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도 그녀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악을 썼다.
2920년, 두 번째 파종 31일
시로딜의 카바스 림 가도에서
투랄라가 시로딜인은 물론 던머에 이르기까지 사람 얼굴을 보지 못한 지 며칠이고 몇 주가 되었다. 발걸음을 옮기면서, 그녀는 속으로 이렇게까지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시로딜이 제국의 중심이자 수도가 된 건 정말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보스머들이 사는 발렌우드의 밀림조차도 분명 이 하트랜드의 숲보다는 북적일 것 같았다.
그녀는 회상했다. 그녀가 모로윈드와 시로딜의 국경을 넘은 게 한 달 전, 아니, 두 달 전이었나? 지금보다 훨씬 추웠다는 걸 빼면 그녀가 시간의 흐름을 짐작할 수 있는 단서는 아무것도 없었다. 경비병들은 퉁명스러웠지만, 그녀가 아무런 무기도 지니지 않고 있었으므로 순순히 지나가게 해 주었다. 그 뒤로 그녀는 몇몇 캐러밴을 만났고, 야영하는 모험가들로부터 먹거리를 나눠받기도 했지만, 그녀를 마을까지 태워다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투랄라는 그녀의 숄을 떼어내 뒤로 질질 끌리게 했다. 순간 그녀는 뒤에서 누군가의 소리를 들었고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오직 새 한 마리가 가지에 앉아 비웃는 것마냥 지저귈 뿐이었다.
그녀는 계속 발걸음을 옮기다가 이내 멈춰 섰다. 무언가 일어나고 있었다. 뱃속의 아이가 그녀의 배를 걷어찬 적은 몇 번인가 있었지만, 지금의 경련은 그것과는 분명히 다른 종류였다. 그녀는 신음소리와 함께 휘청대며 길가로 벗어나 풀밭 위에 쓰러졌다. 그녀의 아이가 세상 빛을 보려 하고 있었다.
그녀는 등을 기대고 누워 힘을 주었지만, 고통과 절망으로 흘러넘친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게 전부였다. 어떻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이런 황야에서, 오직 그녀 혼자, 모운홀드 공작의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말인가? 분노와 고뇌가 가득한 그녀의 비명소리가 나무 위의 새들을 놀래켜 흩었다.
방금 전까지 나무 위에서 그녀를 비웃던 바로 그 새가 길가에 내려앉았다. 그녀가 눈짓하자 새는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벌거벗은 엘프 남성이 나타났다. 그는 던머만큼 까무잡잡하지는 않았지만, 알트머만큼 창백하지도 않았다. 그녀는 그가 바로 에일리드, 와일드 엘프임을 알아챘다. 투랄라는 비명을 질렀지만 남자가 그녀를 내리 눌렀다. 몇 분간 몸부림치고 나서야 그녀는 몸이 풀어지는 느낌을 받으며 정신을 잃었다.
그녀의 정신을 들게 한 것은 갓난아기의 울음소리였다. 아이는 깨끗이 닦여진 채로 그녀의 옆에 누워 있었다. 투랄라는 막 태어난 그녀의 딸을 안아 올리고, 올해 들어 처음으로 기쁨의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나무들에게 "고마워요."라고 속삭이고는 아기을 양 팔로 안아 올리고, 다시 서쪽을 향해 난 길을 따라 발길을 옮기기 시작했다.
중간에서 계속.
7. 6권
원문
2920년, 첫 번째 시대의 마지막 해
제6권: 중간
칼로박 타운웨이 지음
2920년, 중간 2일
모로윈드의 발모라에서
"제국군이 남쪽에 모였습니다." 카시르가 말했다. "저들은 중장을 갖췄고, 알드 이유발과 코로나티 호수에서 출발해 2주간 행군한다고 합니다."
비벡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드 이유발과, 알드 마락 호수 건너편에 있는 그 자매 도시들은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요새들이었다. 그는 도시들에서 제국군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일어나 얼마 동안은 시간을 벌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의 지휘관은 활짝 열린 창 밖에서 불어오는 여름날의 부드러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벽에서 모로윈드 남서부 지도를 떼어 펼쳤다.
"그들이 중장을 갖췄다고 했나?" 지휘관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카시르가 대답했다. "하트랜드의 베살 그레이 근처에서 야영했었는데, 전부 에보니, 드워븐, 그리고 데이드릭 갑옷에 훌륭한 무기를 걸치고 공성 장비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법사나 선박은 어떻던가?" 비벡이 물었다.
"한 무리의 전투마법사들은 있었습니다만," 카시르가 즉각 대답했다. "선박은 한 척도 없었습니다."
"중무장을 갖추고 있는 만큼, 그대가 말한대로 베살 그레이에서 코로나티 호수까지 이동하려면 최소한 2주가 걸리겠군." 비벡은 지도를 찬찬히 살폈다. "북쪽에서부터 알드 마락을 돌아오려면 늪지대에서 발이 묶일 테지. 그러니 저들은 이 지점에서 물을 건너 알드 이유발을 차지할 계획일 것이다. 그리고 호수 동쪽으로 나아가 남쪽에서부터 알드 마락을 공략하겠지."
"놈들은 협만을 따라서 약점을 드러내겠군요." 지휘관이 말했다. "저들이 반쯤 건넜을 때 공격하면 다시는 하트랜드로 돌아갈 수 없을 겁니다."
"이번에도 그대의 지식이 많은 도움이 되는군." 비벡은 카시르를 향해 미소지었다. "우리는 다시 제국의 침략자들을 쓰러뜨릴 걸세."
2920년, 중간 3일
시로딜의 베살 그레이에서
"승리를 거두신 후에 다시 이 길로 돌아오실 생각이십니까?" 베살 경이 물었다.
쥘렉 황자는 그에게 별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숙영지를 정리하는 군대를 주시했다. 우거진 숲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선선했지만, 하늘에서는 구름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오후의 행군은 열기와의 싸움이 될 것이고, 특히 중갑을 걸친 상태라면 불 보듯 뻔했다.
"우리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다면, 패배했다는 뜻이겠지." 황자는 말했다. 평원 아래로 수석 고문 베르시듀-셰이가 사람을 풀어 마을에서 징발한 음식과 와인, 그리고 매춘부들에 대한 값을 치르게 하고 있었다. 확실히 군대란 돈깨나 집어삼키는 집단이었다.
"황자 전하." 베셀 경이 근심어린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군대를 동쪽으로 향하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리 하시면 단지 코로나티 호수가 나타날 뿐입니다. 협만을 건너시려면 남동쪽으로 가셔야 합니다."
"그대는 상인들에게 우리가 지불한 금화를 정확히 분배하기나 하도록." 황자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내 군대가 가야할 방향을 정하는 건 내가 할 일이다."
2920년, 중간 16일
모로윈드의 코로나티 호수에서
비벡은 광활한 푸른 호수의 청아한 수면에 비친 자신과 자기 군단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디에서도 제국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쯤이면 그들은 아무런 문제도 없이 숲을 지나 협만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키 크고 여리여리한 호숫가의 나무들이 협만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적잖이 가리고 있었지만, 군단들, 특히나 느릿한 움직임의 중장을 갖춘 부대는 절대로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움직일 수 없는 법이었다.
"지도를 다시 확인해야겠군." 그는 지휘관을 호출했다. "저들이 접근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정녕 없는 게 확실한가?"
"혹여 저들이 어리석게도 북쪽의 늪지대에 발을 들이고 헤맬 경우를 대비해서 북쪽에 정찰병들을 배치시켜 두었습니다." 지휘관이 답했다. "하다못해 그랬다는 소식을 들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 협만을 제외하면 호수를 건널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비벡은 물결에 반사되어 마치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양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그는 지도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밀정이여." 비벡은 카시르를 불렀다. "그대가 한 무리의 전투마법사가 있다고 했었지. 어떻게 그들이 전투마법사라고 확신할 수 있었나?"
"그들은 신비한 휘장이 새겨진 회색 로브를 걸치고 있었습니다." 카시르가 해명했다. "그래서 그들이 마법사라는 걸 알았습니다. 별달리 그렇게나 많은 이들이 군단과 함께 이동할 이유가 없잖습니까? 그것들이 죄다 치료사일 리는 없습니다."
"어리석은!" 비벡이 소리쳤다. "그자들은 변화마법을 수련한 자들이다. 저들은 군단 전체에 수중호흡 마법을 걸었어."
비벡은 북쪽을 바라볼 수 있는 다른 고지로 달려갔다. 호수 저편에서, 수평선 위의 작은 그림자에 불과했지만 알드 마락에서 솟아오르는 화염을 볼 수 있었다. 분노에 찬 비벡은 고함치며 그의 지휘관으로 하여금 즉시 군대를 이끌고 호수를 돌아 성을 지키도록 명령했다.
"드웨넌으로 돌아가라." 비벡은 전장에 뛰어들기 전 카시르를 향해 단호히 말했다. "더 이상 그대의 도움은 필요하지도 않고, 필요하게 될 일도 없노라."
모로윈드군이 알드 마락 근처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제국군이 이미 그곳을 점령하고 있었다.
2920년 중간 19일
시로딜의 임페리얼 시티에서
우레와 같은 팡파르와 함께 수석 고문은 임페리얼 시티에 입성했고, 거리에 늘어선 남녀들은 그가 알드 마락 점령의 상징인 양 환호했다. 사실 황자가 돌아왔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모습을 비췄을 것이고, 베르시듀-셰이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이들은 그를 한없이 기쁘게 만들었다. 여지껏 그 어떤 아카비르도 이 땅에 발을 들인 것에 대하여 지금과 같은 탐리엘 시민들의 환호를 받은 적은 없었다.
황제 레만 3세는 따뜻한 포옹과 함께 그를 맞이했고, 황자로부터의 편지를 받아 뜯어보았다.
"짐은 아직도 잘 이해가 안 되는군." 마침내 입을 연 황제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한편으로 혼란스러워 보였다. "자네들이 호수 밑바닥을 지나갔단 말이지?"
"알드 마락은 아주 잘 방비된 요새입니다." 수석 고문이 설명했다.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모로윈드군이 요새 밖에서 다시 모습을 나타냈지요. 그곳을 함락하기 위해서 우리는 가장 튼튼한 방어구를 갖춘 병사들로 기습해야만 했습니다. 수중호흡 마법을 사용해서 우리는 비벡의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고, 물속에서 갑옷은 평소보다 훨씬 가벼워지죠. 그리고 우리가 공격해 들어간 요새 서쪽은 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저들 방어선의 맹점이었습니다."
"훌륭해!" 황제는 탄성을 내질렀다. "자네는 정말이지 대단한 책략가일세, 베르시듀-셰이! 만약 자네의 아버지가 자네만큼 뛰어났더라면, 탐리엘은 틀림없이 아카비르의 영토가 되었을 게야!"
수석 고문은 황자 쥘렉이 세운 작전의 공을 차지할 생각은 없었지만, 황제가 200년 하고도 16년 전에 있었던 침공으로 자기네 백성들이 입었던 재난을 입에 담자 마음을 바꿨다. 그는 단정한 미소를 띠며 황제의 치하를 수용했다.
2920년, 중간 21일
모로윈드의 알드 마락에서
사비리엔-초락은 스르륵거리며 성벽으로 나아가 화살들이 늪지대와 성벽 사이에 놓인 삼림으로 퇴각하는 모로윈드군에게 바람구멍을 내는 것을 지켜보았다. 공격에 나설 절호의 기회처럼 보였다. 아마도 숲을 그 안으로 도망친 군대와 함께 불태워버릴 수도 있으리라. 혹 비벡이 그의 적들 수중에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저들의 군대는 자신들로 하여금 알드 이유발까지 차지할 수 있도록 허락하리라. 그는 황자에게 자신이 떠올린 계획들을 제안했다.
"그대는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는 모양인데." 황자 쥘렉은 웃었다. "휴전 협상 중에는 저들의 군대나 지휘관들에게 해를 입히지 말라고 내가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자네에게 전투 중인 아카비르로서의 명예는 정녕 없다는 말인가?"
"황자 전하, 저는 탐리엘에서 태어났고 제 종족의 고향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뱀인간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전하의 방식은 제게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다섯 달 전 제국 투기장에서 저와 대결하셨을 때 전하께서는 자비를 기대하지 않으셨고 저 또한 그랬습니다."
"그건 경기일 뿐이었네." 황자는 대답하고는 행정관에게 고갯짓하여 던머 지휘관을 들여보내게 했다.
쥘렉은 지금까지 한 번도 비벡을 직접 본 적은 없었으나, 그가 살아 있는 신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 나타난 이는 그저 사내였다. 잘 다져진 체격에 잘생기고 지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그는 보통의 사내에 불과했다. 황자는 그가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신이 아니라 보통의 사내라는 점에 기뻐했다.
"반갑구려, 상대할 만한 가치가 있는 나의 호적수여." 비벡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교착 상태에 놓여 있는 것 같구려."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소만." 황자가 답했다. "그대는 우리에게 모로윈드를 넘길 생각이 없고, 그 점에 대해서 내가 그대를 비난할 수는 없지. 하지만 나는 제국을 바다 저편으로부터의 위협에서 보호하고, 전략적 경계의 요충지들을 확실히 하기 위해 그대들의 해안선을 확보해야 하오. 이곳과 알드 움베일, 텔 아룬, 알드 람바시, 그리고 텔 모스리브라 같은 곳들 말이오."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은?" 비벡이 물었다.
"보상이라고?" 사비리엔-초락은 코웃음쳤다. "넌 여기서 우리가 이겼다는 걸 잊어버린 것 같군. 너희가 아니라."
"그에 대한 보상으로는," 황자 쥘렉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대들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 이상, 제국은 더 이상 모로윈드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오. 그대들은 침략자들로부터 제국 해군의 보호를 받게 될 것이오. 그리고 블랙 마쉬에서 제국이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몇몇 지역들 중 그대들이 선택하는 곳으로 영토를 넓힐 수 있도록 하겠소."
"합리적인 제안이로군." 비벡은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날 용서하시오. 자신들이 얻은 것에 대한 대가를 제시하는 시로딜인을 대하는 일에는 익숙지 않았소. 결정을 내릴 때까지 며칠 간의 유예를 줄 수 있겠소이까?"
"그러면 일주일 뒤에 다시 만나도록 합시다." 황자가 웃으며 답했다. "그 동안, 그대의 군대가 우리 군대를 공격하여 도발하지만 않는다면, 우린 평화를 유지할 것이오."
비벡은 황자의 방을 떠나면서 아말렉시아가 옳았음을 느꼈다. 전쟁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 황자는 훌륭한 황제가 될 수 있으리라.
한낮에서 계속.
2920년, 첫 번째 시대의 마지막 해
제6권: 중간
칼로박 타운웨이 지음
2920년, 중간 2일
모로윈드의 발모라에서
"제국군이 남쪽에 모였습니다." 카시르가 말했다. "저들은 중장을 갖췄고, 알드 이유발과 코로나티 호수에서 출발해 2주간 행군한다고 합니다."
비벡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드 이유발과, 알드 마락 호수 건너편에 있는 그 자매 도시들은 전략적으로 아주 중요한 요새들이었다. 그는 도시들에서 제국군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일어나 얼마 동안은 시간을 벌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의 지휘관은 활짝 열린 창 밖에서 불어오는 여름날의 부드러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벽에서 모로윈드 남서부 지도를 떼어 펼쳤다.
"그들이 중장을 갖췄다고 했나?" 지휘관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카시르가 대답했다. "하트랜드의 베살 그레이 근처에서 야영했었는데, 전부 에보니, 드워븐, 그리고 데이드릭 갑옷에 훌륭한 무기를 걸치고 공성 장비까지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법사나 선박은 어떻던가?" 비벡이 물었다.
"한 무리의 전투마법사들은 있었습니다만," 카시르가 즉각 대답했다. "선박은 한 척도 없었습니다."
"중무장을 갖추고 있는 만큼, 그대가 말한대로 베살 그레이에서 코로나티 호수까지 이동하려면 최소한 2주가 걸리겠군." 비벡은 지도를 찬찬히 살폈다. "북쪽에서부터 알드 마락을 돌아오려면 늪지대에서 발이 묶일 테지. 그러니 저들은 이 지점에서 물을 건너 알드 이유발을 차지할 계획일 것이다. 그리고 호수 동쪽으로 나아가 남쪽에서부터 알드 마락을 공략하겠지."
"놈들은 협만을 따라서 약점을 드러내겠군요." 지휘관이 말했다. "저들이 반쯤 건넜을 때 공격하면 다시는 하트랜드로 돌아갈 수 없을 겁니다."
"이번에도 그대의 지식이 많은 도움이 되는군." 비벡은 카시르를 향해 미소지었다. "우리는 다시 제국의 침략자들을 쓰러뜨릴 걸세."
2920년, 중간 3일
시로딜의 베살 그레이에서
"승리를 거두신 후에 다시 이 길로 돌아오실 생각이십니까?" 베살 경이 물었다.
쥘렉 황자는 그에게 별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숙영지를 정리하는 군대를 주시했다. 우거진 숲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선선했지만, 하늘에서는 구름 한 점 찾아볼 수 없었다. 오후의 행군은 열기와의 싸움이 될 것이고, 특히 중갑을 걸친 상태라면 불 보듯 뻔했다.
"우리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다면, 패배했다는 뜻이겠지." 황자는 말했다. 평원 아래로 수석 고문 베르시듀-셰이가 사람을 풀어 마을에서 징발한 음식과 와인, 그리고 매춘부들에 대한 값을 치르게 하고 있었다. 확실히 군대란 돈깨나 집어삼키는 집단이었다.
"황자 전하." 베셀 경이 근심어린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군대를 동쪽으로 향하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리 하시면 단지 코로나티 호수가 나타날 뿐입니다. 협만을 건너시려면 남동쪽으로 가셔야 합니다."
"그대는 상인들에게 우리가 지불한 금화를 정확히 분배하기나 하도록." 황자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내 군대가 가야할 방향을 정하는 건 내가 할 일이다."
2920년, 중간 16일
모로윈드의 코로나티 호수에서
비벡은 광활한 푸른 호수의 청아한 수면에 비친 자신과 자기 군단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디에서도 제국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지금쯤이면 그들은 아무런 문제도 없이 숲을 지나 협만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키 크고 여리여리한 호숫가의 나무들이 협만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적잖이 가리고 있었지만, 군단들, 특히나 느릿한 움직임의 중장을 갖춘 부대는 절대로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움직일 수 없는 법이었다.
"지도를 다시 확인해야겠군." 그는 지휘관을 호출했다. "저들이 접근할 수 있는 다른 길은 정녕 없는 게 확실한가?"
"혹여 저들이 어리석게도 북쪽의 늪지대에 발을 들이고 헤맬 경우를 대비해서 북쪽에 정찰병들을 배치시켜 두었습니다." 지휘관이 답했다. "하다못해 그랬다는 소식을 들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이 협만을 제외하면 호수를 건널 수 있는 다른 길은 없습니다."
비벡은 물결에 반사되어 마치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양 일그러진 자신의 모습을 다시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그는 지도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밀정이여." 비벡은 카시르를 불렀다. "그대가 한 무리의 전투마법사가 있다고 했었지. 어떻게 그들이 전투마법사라고 확신할 수 있었나?"
"그들은 신비한 휘장이 새겨진 회색 로브를 걸치고 있었습니다." 카시르가 해명했다. "그래서 그들이 마법사라는 걸 알았습니다. 별달리 그렇게나 많은 이들이 군단과 함께 이동할 이유가 없잖습니까? 그것들이 죄다 치료사일 리는 없습니다."
"어리석은!" 비벡이 소리쳤다. "그자들은 변화마법을 수련한 자들이다. 저들은 군단 전체에 수중호흡 마법을 걸었어."
비벡은 북쪽을 바라볼 수 있는 다른 고지로 달려갔다. 호수 저편에서, 수평선 위의 작은 그림자에 불과했지만 알드 마락에서 솟아오르는 화염을 볼 수 있었다. 분노에 찬 비벡은 고함치며 그의 지휘관으로 하여금 즉시 군대를 이끌고 호수를 돌아 성을 지키도록 명령했다.
"드웨넌으로 돌아가라." 비벡은 전장에 뛰어들기 전 카시르를 향해 단호히 말했다. "더 이상 그대의 도움은 필요하지도 않고, 필요하게 될 일도 없노라."
모로윈드군이 알드 마락 근처에 이르렀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 제국군이 이미 그곳을 점령하고 있었다.
2920년 중간 19일
시로딜의 임페리얼 시티에서
우레와 같은 팡파르와 함께 수석 고문은 임페리얼 시티에 입성했고, 거리에 늘어선 남녀들은 그가 알드 마락 점령의 상징인 양 환호했다. 사실 황자가 돌아왔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모습을 비췄을 것이고, 베르시듀-셰이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도 여전히 이들은 그를 한없이 기쁘게 만들었다. 여지껏 그 어떤 아카비르도 이 땅에 발을 들인 것에 대하여 지금과 같은 탐리엘 시민들의 환호를 받은 적은 없었다.
황제 레만 3세는 따뜻한 포옹과 함께 그를 맞이했고, 황자로부터의 편지를 받아 뜯어보았다.
"짐은 아직도 잘 이해가 안 되는군." 마침내 입을 연 황제는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한편으로 혼란스러워 보였다. "자네들이 호수 밑바닥을 지나갔단 말이지?"
"알드 마락은 아주 잘 방비된 요새입니다." 수석 고문이 설명했다. "덧붙여 말씀드리자면, 모로윈드군이 요새 밖에서 다시 모습을 나타냈지요. 그곳을 함락하기 위해서 우리는 가장 튼튼한 방어구를 갖춘 병사들로 기습해야만 했습니다. 수중호흡 마법을 사용해서 우리는 비벡의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고, 물속에서 갑옷은 평소보다 훨씬 가벼워지죠. 그리고 우리가 공격해 들어간 요새 서쪽은 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저들 방어선의 맹점이었습니다."
"훌륭해!" 황제는 탄성을 내질렀다. "자네는 정말이지 대단한 책략가일세, 베르시듀-셰이! 만약 자네의 아버지가 자네만큼 뛰어났더라면, 탐리엘은 틀림없이 아카비르의 영토가 되었을 게야!"
수석 고문은 황자 쥘렉이 세운 작전의 공을 차지할 생각은 없었지만, 황제가 200년 하고도 16년 전에 있었던 침공으로 자기네 백성들이 입었던 재난을 입에 담자 마음을 바꿨다. 그는 단정한 미소를 띠며 황제의 치하를 수용했다.
2920년, 중간 21일
모로윈드의 알드 마락에서
사비리엔-초락은 스르륵거리며 성벽으로 나아가 화살들이 늪지대와 성벽 사이에 놓인 삼림으로 퇴각하는 모로윈드군에게 바람구멍을 내는 것을 지켜보았다. 공격에 나설 절호의 기회처럼 보였다. 아마도 숲을 그 안으로 도망친 군대와 함께 불태워버릴 수도 있으리라. 혹 비벡이 그의 적들 수중에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저들의 군대는 자신들로 하여금 알드 이유발까지 차지할 수 있도록 허락하리라. 그는 황자에게 자신이 떠올린 계획들을 제안했다.
"그대는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는 모양인데." 황자 쥘렉은 웃었다. "휴전 협상 중에는 저들의 군대나 지휘관들에게 해를 입히지 말라고 내가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자네에게 전투 중인 아카비르로서의 명예는 정녕 없다는 말인가?"
"황자 전하, 저는 탐리엘에서 태어났고 제 종족의 고향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뱀인간이 대답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전하의 방식은 제게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다섯 달 전 제국 투기장에서 저와 대결하셨을 때 전하께서는 자비를 기대하지 않으셨고 저 또한 그랬습니다."
"그건 경기일 뿐이었네." 황자는 대답하고는 행정관에게 고갯짓하여 던머 지휘관을 들여보내게 했다.
쥘렉은 지금까지 한 번도 비벡을 직접 본 적은 없었으나, 그가 살아 있는 신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앞에 나타난 이는 그저 사내였다. 잘 다져진 체격에 잘생기고 지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렇더라도 그는 보통의 사내에 불과했다. 황자는 그가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신이 아니라 보통의 사내라는 점에 기뻐했다.
"반갑구려, 상대할 만한 가치가 있는 나의 호적수여." 비벡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교착 상태에 놓여 있는 것 같구려."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소만." 황자가 답했다. "그대는 우리에게 모로윈드를 넘길 생각이 없고, 그 점에 대해서 내가 그대를 비난할 수는 없지. 하지만 나는 제국을 바다 저편으로부터의 위협에서 보호하고, 전략적 경계의 요충지들을 확실히 하기 위해 그대들의 해안선을 확보해야 하오. 이곳과 알드 움베일, 텔 아룬, 알드 람바시, 그리고 텔 모스리브라 같은 곳들 말이오."
"그리고 그에 대한 보상은?" 비벡이 물었다.
"보상이라고?" 사비리엔-초락은 코웃음쳤다. "넌 여기서 우리가 이겼다는 걸 잊어버린 것 같군. 너희가 아니라."
"그에 대한 보상으로는," 황자 쥘렉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그대들이 우리를 공격하지 않는 이상, 제국은 더 이상 모로윈드를 공격하지 않을 것이오. 그대들은 침략자들로부터 제국 해군의 보호를 받게 될 것이오. 그리고 블랙 마쉬에서 제국이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 몇몇 지역들 중 그대들이 선택하는 곳으로 영토를 넓힐 수 있도록 하겠소."
"합리적인 제안이로군." 비벡은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날 용서하시오. 자신들이 얻은 것에 대한 대가를 제시하는 시로딜인을 대하는 일에는 익숙지 않았소. 결정을 내릴 때까지 며칠 간의 유예를 줄 수 있겠소이까?"
"그러면 일주일 뒤에 다시 만나도록 합시다." 황자가 웃으며 답했다. "그 동안, 그대의 군대가 우리 군대를 공격하여 도발하지만 않는다면, 우린 평화를 유지할 것이오."
비벡은 황자의 방을 떠나면서 아말렉시아가 옳았음을 느꼈다. 전쟁은 막바지에 이르렀다. 이 황자는 훌륭한 황제가 될 수 있으리라.
한낮에서 계속.
8. 7권
원문
2920년, 첫 번째 시대의 마지막 해
제7권: 한낮
칼로박 타운웨이 지음
2920년, 한낮 4일
시로딜의 임페리얼 시티에서
황제 레만 3세와 그의 수석 고문인 베르시듀-셰이는 임페리얼 가든을 산책하고 있었다. 곳곳에 조각상과 분수가 늘어선 북쪽 정원은 황제의 마음에 쏙 들었고, 여름날 도시 안에서 가장 시원한 공간이었다. 걷고 있는 그들 주위로 청회색과 녹색의 꾸밈 없는 화단이 죽 늘어서 있었다.
"비벡이 황자의 평화 협정에 동의했다는군." 레만이 말했다. "짐의 아들은 2주 안에 돌아올 걸세."
"아주 좋은 소식이군요." 수석 고문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던머들이 협정을 존중하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저들에게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할 수도 있었겠지요. 예를 들자면 블랙 게이트에 있는 요새라든지 말입니다. 하지만 황자 전하께서는 사리에 합당한 게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전하께서는 평화를 위한답시고 제국을 불구로 만드실 분은 아니시지요."
"요즘 들어 무엇이 리자를 짐의 목숨을 노리는 음모로 몰아넣었는지 생각하고 있다네." 황제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노예 여왕 알레시아에게 경의를 표하고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짐이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그녀가 짐의 아들을 숭배하다시피 여겼다는 점이야. 그녀는 내 권력과 인격을 사랑했을지 모르나, 어쨌든 말일세, 녀석은 젊고 잘생긴데다가, 언젠가는 짐의 옥좌를 계승할 게 아닌가. 그녀는 분명 짐이 죽더라도, 젊고 힘 있는 황제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게야."
"황자 전하께서... 이 음모에 가담하셨다는 말씀이신지요?" 베르시듀-셰이가 물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황제의 편집증이 어디로 향할지 예측하는 건 너무나도 어려운 게임이었다.
"이런, 짐의 말뜻은 그런 게 아니다." 레만은 웃고 있었다. "그럴 리 없지. 짐의 아들은 짐을 무척 사랑하고 있다네."
"헤가테의 모르와 예술학교에 있다는 리자의 자매인 코르다를 기억하시는지요?" 수석 고문이 물었다.
"모르와?" 황제가 되물었다. "잊어버린 것 같군. 어떤 신인가?"
"요쿠다의 다산의 여신입니다." 수석 고문이 답했다. "하지만 디벨라처럼 너무 정열적이지는 않습니다. 기품 있지만, 한편으로는 분명히 관능적이지요."
"짐은 정열적인 여자들을 많이 겪었지. 황후도, 리자도, 다들 너무 정열적이었어. 사랑에 대한 욕망은 곧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이어지지." 황제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어떤 건강한 욕구를 가진 수련 중의 여사제라, 이상적인 소리구먼. 그래서 자네가 블랙 게이트에 대해서 뭐라고 했더라?"
2920년, 한낮 6일
시로딜의 투르조 요새에서
리자는 황제가 말하는 동안 차가운 돌바닥을 바라보며 조용히 서 있었다. 황제는 지금까지 그토록 창백하고 음울한 그녀의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자유의 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기쁠텐데. 어째서일까. 지금 당장 떠난다면 상인들의 축제까지는 해머펠에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가 무슨 말을 꺼내더라도 그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투르조 요새에서 머물렀던 한 달 반의 나날이 그녀의 영혼을 죽여버린 것 같았다.
"짐이 생각해 보았는데..." 마침내 황제는 입을 열었다. "그대의 여동생인 코르다를 한 번 황궁에 불러볼까 하노라. 생각건대 그 아이도 내내 헤가테의 예술학교에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는 좋아할 것 같은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하냐?"
드디어, 반응이 있었다. 리자는 야수와도 같은 증오와 함께 황제를 쏘아보고는, 분노에 차서 그를 향해 몸을 내던졌다. 그녀는 갇혀 있었던 동안 길게 자란 손톱으로 그의 얼굴을 할퀴고는 눈에 박아 넣었다. 그는 고통으로 울부짖었고, 그의 친위대가 그녀를 끌어내려 의식을 잃고 쓰러질 때까지 칼등으로 계속해서 후려쳤다.
치료사가 한달음에 달려왔지만, 황제 레만 3세는 결국 오른쪽 눈을 잃고 말았다.
2920년 한낮 23일
모로윈드의 발모라에서
비벡은 물에서 나와 한낮의 열기가 그의 피부에서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시종들 중 한 사람이 올리는 수건을 받았다. 소사 실이 발코니에서 그의 오랜 친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자네를 봤을 때보다 상처가 꽤 늘어난 것 같군." 마법사가 말했다.
"아주라가 당분간은 그럴 일이 없을 것이라 보증했네." 비벡이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 도착했나?"
"한 시간이 조금 넘었네." 물가를 향해 계단을 내려오며 소사 실이 답했다. "내가 전쟁을 끝내러 온 줄 알았는데, 자네가 나 없이도 일을 마친 모양이군."
"그래, 끝도 없는 전투는 80년이면 충분하지." 비벡은 소사 실을 포옹하며 대답했다. "우리가 양보했지만 저들도 마찬가지였다네. 늙은 황제가 죽으면 우리 모두 황금기를 맞이하게 될 걸세. 쥘렉 황자는 그 나이대 치고는 굉장히 현명하더군. 아말렉시아는 어디에 있나?"
"모운홀드 공작을 데리러 갔네. 내일 오후면 여기 도착하겠지."
그들은 궁전 한 구석에서 보이는 광경에 신경을 빼앗겼다. 기수가 마을을 가로질러 대현관의 계단을 향하고 있었다. 여자는 얼마 동안을 거칠게 달려왔음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거친 숨을 내쉬며 서재로 들이닥쳤고 그들과 만났다.
"우리는 배신당했어." 그녀가 헐떡였다. "제국군이 블랙 게이트를 점령했어."
2920년 한낮 24일
모로윈드의 발모라에서
소사 실이 아르테움으로 떠난 이래로, 모로윈드 트라이뷰널의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17년 만에 처음이었다. 세 명 모두 그들이 다시 모이게 된 이유가 다른 것이었기를 바랐다.
"우리가 알기로는 황자가 시로딜을 향해 남쪽으로 돌아가는 동안, 두 번째 제국군이 북쪽에서 내려왔다네." 비벡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동료들에게 이야기했다. "쥘렉은 이번 공격에 대해 몰랐다고 보는 게 타당하겠지."
"하지만 황제가 블랙 게이트에 공격을 감행하는 동안, 그가 우리를 기만할 계획이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어." 소사 실이 말했다. "이건 휴전 협정을 폐기하겠다는 뜻으로 보아야 해."
"모운홀드 공작은 어디에 있나?" 비벡이 물었다. "이 문제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듣고 싶군."
"그는 텔 아룬에서 나이트 마더를 만나는 중이야." 아말렉시아가 조용히 답했다. "그에게 먼저 당신과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기다리라고 했지만, 이미 기다릴만큼 기다렸다더군."
"모락 통을 끌어들이겠다고? 바깥과 관련된 일에?" 비벡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고 소사 실을 바라보았다. "제발,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해 보게. 암살은 우리 모두를 후퇴시킬 뿐이야. 이 문제는 외교나 전쟁을 통해서 해결을 보아야 하네."
2920년 한낮 25일
모로윈드의 텔 아룬에서
나이트 마더는 오직 달빛만이 비추는 그녀의 살롱에서 소사 실을 만났다. 몹시도 아름다운 그녀는 단순한 검은색의 비단 로브를 걸치고 그녀의 긴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녀는 간단한 손짓으로 붉은 옷을 걸친 그녀의 호위들을 물리치고는 마법사에게 와인을 권했다.
"간발의 차이로 성하의 친구 되시는 분을 놓치셨군요. 공작 말이에요." 그녀가 속삭였다.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였지만, 우리가 그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더군요."
"그자가 황제를 암살하라고 모락 통을 고용했나?" 소사 실이 물었다.
"성하께서는 단도직입적이시군요. 아닌가요? 아주 훌륭해요. 나는 꾸밈없이 말하는 이들을 좋아한답니다.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내가 공작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성하와 속닥댈 수는 없답니다." 그녀가 미소지었다. "사업상 악영향을 끼칠 테니까요."
"내가 황제를 암살하지 말라고 같은 액수의 금을 제시한다면 어쩔텐가?"
"모락 통은 메팔라의 영광과 이익을 위해 살인을 하지요." 그녀는 와인이 찰랑이는 그녀의 잔을 향해 읊조렸다. "우리는 그저 누군가를 죽이지는 않아요. 그건 신성 모독이니까. 사흘 안에 공작이 보낸 금이 도착하기만 하면, 우리는 우리들의 사업 계획을 끝마치게 되겠지요. 그리고 우린 꿈에서라도 역제안을 즐기지 않는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분명 종교적이면서도 경제적이지만, 우리는 수요와 공급의 원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소사 실이시여."
2920년 한낮 27일
모로윈드 내해에서
소사 실은 이틀 동안이나 어떤 배를 기다리며 물가를 쳐다보고 있었고, 바로 지금 그걸 보았다. 모운홀드의 깃발을 달고 있는 커다란 배였다. 마법사는 그게 항구에 닫기도 전에 공중을 가로질러 그 앞을 막았다. 한 겹 불꽃이 그의 형체를 뒤덮었고, 그의 목소리와 모습을 데이드라의 그것으로 바꾸었다.
"배를 버려라!" 그가 포효했다. "함께 가라앉을 셈이 아니라면 당장!"
사실 소사 실은 화염구 한 발로도 배를 날려버릴 수 있었지만, 선원들이 따뜻한 물 속으로 뛰어들 시간을 주기로 했다. 배 안에 살아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남지 않았음을 확신하고는, 그는 힘을 모아서 대기와 물을 진동시킬 정도로 파괴적인 파동을 내뿜었다. 함선과 모락 통에게 보내는 공작의 대금은 내해 바닥을 향해 가라앉았다.
"나이트 마더." 소사 실은 항만 관리인에게 구조가 필요한 선원들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 나아가며 생각했다. "어느 누구도 수요와 공급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다."
마지막 파종에서 계속.
2920년, 첫 번째 시대의 마지막 해
제7권: 한낮
칼로박 타운웨이 지음
2920년, 한낮 4일
시로딜의 임페리얼 시티에서
황제 레만 3세와 그의 수석 고문인 베르시듀-셰이는 임페리얼 가든을 산책하고 있었다. 곳곳에 조각상과 분수가 늘어선 북쪽 정원은 황제의 마음에 쏙 들었고, 여름날 도시 안에서 가장 시원한 공간이었다. 걷고 있는 그들 주위로 청회색과 녹색의 꾸밈 없는 화단이 죽 늘어서 있었다.
"비벡이 황자의 평화 협정에 동의했다는군." 레만이 말했다. "짐의 아들은 2주 안에 돌아올 걸세."
"아주 좋은 소식이군요." 수석 고문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던머들이 협정을 존중하기를 바랍니다. 어쩌면 저들에게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할 수도 있었겠지요. 예를 들자면 블랙 게이트에 있는 요새라든지 말입니다. 하지만 황자 전하께서는 사리에 합당한 게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십니다. 전하께서는 평화를 위한답시고 제국을 불구로 만드실 분은 아니시지요."
"요즘 들어 무엇이 리자를 짐의 목숨을 노리는 음모로 몰아넣었는지 생각하고 있다네." 황제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노예 여왕 알레시아에게 경의를 표하고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짐이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그녀가 짐의 아들을 숭배하다시피 여겼다는 점이야. 그녀는 내 권력과 인격을 사랑했을지 모르나, 어쨌든 말일세, 녀석은 젊고 잘생긴데다가, 언젠가는 짐의 옥좌를 계승할 게 아닌가. 그녀는 분명 짐이 죽더라도, 젊고 힘 있는 황제를 차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게야."
"황자 전하께서... 이 음모에 가담하셨다는 말씀이신지요?" 베르시듀-셰이가 물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황제의 편집증이 어디로 향할지 예측하는 건 너무나도 어려운 게임이었다.
"이런, 짐의 말뜻은 그런 게 아니다." 레만은 웃고 있었다. "그럴 리 없지. 짐의 아들은 짐을 무척 사랑하고 있다네."
"헤가테의 모르와 예술학교에 있다는 리자의 자매인 코르다를 기억하시는지요?" 수석 고문이 물었다.
"모르와?" 황제가 되물었다. "잊어버린 것 같군. 어떤 신인가?"
"요쿠다의 다산의 여신입니다." 수석 고문이 답했다. "하지만 디벨라처럼 너무 정열적이지는 않습니다. 기품 있지만, 한편으로는 분명히 관능적이지요."
"짐은 정열적인 여자들을 많이 겪었지. 황후도, 리자도, 다들 너무 정열적이었어. 사랑에 대한 욕망은 곧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이어지지." 황제는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어떤 건강한 욕구를 가진 수련 중의 여사제라, 이상적인 소리구먼. 그래서 자네가 블랙 게이트에 대해서 뭐라고 했더라?"
2920년, 한낮 6일
시로딜의 투르조 요새에서
리자는 황제가 말하는 동안 차가운 돌바닥을 바라보며 조용히 서 있었다. 황제는 지금까지 그토록 창백하고 음울한 그녀의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자유의 몸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기쁠텐데. 어째서일까. 지금 당장 떠난다면 상인들의 축제까지는 해머펠에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가 무슨 말을 꺼내더라도 그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투르조 요새에서 머물렀던 한 달 반의 나날이 그녀의 영혼을 죽여버린 것 같았다.
"짐이 생각해 보았는데..." 마침내 황제는 입을 열었다. "그대의 여동생인 코르다를 한 번 황궁에 불러볼까 하노라. 생각건대 그 아이도 내내 헤가테의 예술학교에 틀어박혀 있는 것보다는 좋아할 것 같은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하냐?"
드디어, 반응이 있었다. 리자는 야수와도 같은 증오와 함께 황제를 쏘아보고는, 분노에 차서 그를 향해 몸을 내던졌다. 그녀는 갇혀 있었던 동안 길게 자란 손톱으로 그의 얼굴을 할퀴고는 눈에 박아 넣었다. 그는 고통으로 울부짖었고, 그의 친위대가 그녀를 끌어내려 의식을 잃고 쓰러질 때까지 칼등으로 계속해서 후려쳤다.
치료사가 한달음에 달려왔지만, 황제 레만 3세는 결국 오른쪽 눈을 잃고 말았다.
2920년 한낮 23일
모로윈드의 발모라에서
비벡은 물에서 나와 한낮의 열기가 그의 피부에서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시종들 중 한 사람이 올리는 수건을 받았다. 소사 실이 발코니에서 그의 오랜 친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마지막으로 자네를 봤을 때보다 상처가 꽤 늘어난 것 같군." 마법사가 말했다.
"아주라가 당분간은 그럴 일이 없을 것이라 보증했네." 비벡이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 도착했나?"
"한 시간이 조금 넘었네." 물가를 향해 계단을 내려오며 소사 실이 답했다. "내가 전쟁을 끝내러 온 줄 알았는데, 자네가 나 없이도 일을 마친 모양이군."
"그래, 끝도 없는 전투는 80년이면 충분하지." 비벡은 소사 실을 포옹하며 대답했다. "우리가 양보했지만 저들도 마찬가지였다네. 늙은 황제가 죽으면 우리 모두 황금기를 맞이하게 될 걸세. 쥘렉 황자는 그 나이대 치고는 굉장히 현명하더군. 아말렉시아는 어디에 있나?"
"모운홀드 공작을 데리러 갔네. 내일 오후면 여기 도착하겠지."
그들은 궁전 한 구석에서 보이는 광경에 신경을 빼앗겼다. 기수가 마을을 가로질러 대현관의 계단을 향하고 있었다. 여자는 얼마 동안을 거칠게 달려왔음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거친 숨을 내쉬며 서재로 들이닥쳤고 그들과 만났다.
"우리는 배신당했어." 그녀가 헐떡였다. "제국군이 블랙 게이트를 점령했어."
2920년 한낮 24일
모로윈드의 발모라에서
소사 실이 아르테움으로 떠난 이래로, 모로윈드 트라이뷰널의 세 사람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17년 만에 처음이었다. 세 명 모두 그들이 다시 모이게 된 이유가 다른 것이었기를 바랐다.
"우리가 알기로는 황자가 시로딜을 향해 남쪽으로 돌아가는 동안, 두 번째 제국군이 북쪽에서 내려왔다네." 비벡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동료들에게 이야기했다. "쥘렉은 이번 공격에 대해 몰랐다고 보는 게 타당하겠지."
"하지만 황제가 블랙 게이트에 공격을 감행하는 동안, 그가 우리를 기만할 계획이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어." 소사 실이 말했다. "이건 휴전 협정을 폐기하겠다는 뜻으로 보아야 해."
"모운홀드 공작은 어디에 있나?" 비벡이 물었다. "이 문제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듣고 싶군."
"그는 텔 아룬에서 나이트 마더를 만나는 중이야." 아말렉시아가 조용히 답했다. "그에게 먼저 당신과 이야기하기 전까지는 기다리라고 했지만, 이미 기다릴만큼 기다렸다더군."
"모락 통을 끌어들이겠다고? 바깥과 관련된 일에?" 비벡은 세차게 머리를 흔들고 소사 실을 바라보았다. "제발,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해 보게. 암살은 우리 모두를 후퇴시킬 뿐이야. 이 문제는 외교나 전쟁을 통해서 해결을 보아야 하네."
2920년 한낮 25일
모로윈드의 텔 아룬에서
나이트 마더는 오직 달빛만이 비추는 그녀의 살롱에서 소사 실을 만났다. 몹시도 아름다운 그녀는 단순한 검은색의 비단 로브를 걸치고 그녀의 긴 의자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그녀는 간단한 손짓으로 붉은 옷을 걸친 그녀의 호위들을 물리치고는 마법사에게 와인을 권했다.
"간발의 차이로 성하의 친구 되시는 분을 놓치셨군요. 공작 말이에요." 그녀가 속삭였다. "기분이 별로 안 좋아 보였지만, 우리가 그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더군요."
"그자가 황제를 암살하라고 모락 통을 고용했나?" 소사 실이 물었다.
"성하께서는 단도직입적이시군요. 아닌가요? 아주 훌륭해요. 나는 꾸밈없이 말하는 이들을 좋아한답니다.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으니까요. 물론, 내가 공작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성하와 속닥댈 수는 없답니다." 그녀가 미소지었다. "사업상 악영향을 끼칠 테니까요."
"내가 황제를 암살하지 말라고 같은 액수의 금을 제시한다면 어쩔텐가?"
"모락 통은 메팔라의 영광과 이익을 위해 살인을 하지요." 그녀는 와인이 찰랑이는 그녀의 잔을 향해 읊조렸다. "우리는 그저 누군가를 죽이지는 않아요. 그건 신성 모독이니까. 사흘 안에 공작이 보낸 금이 도착하기만 하면, 우리는 우리들의 사업 계획을 끝마치게 되겠지요. 그리고 우린 꿈에서라도 역제안을 즐기지 않는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분명 종교적이면서도 경제적이지만, 우리는 수요와 공급의 원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소사 실이시여."
2920년 한낮 27일
모로윈드 내해에서
소사 실은 이틀 동안이나 어떤 배를 기다리며 물가를 쳐다보고 있었고, 바로 지금 그걸 보았다. 모운홀드의 깃발을 달고 있는 커다란 배였다. 마법사는 그게 항구에 닫기도 전에 공중을 가로질러 그 앞을 막았다. 한 겹 불꽃이 그의 형체를 뒤덮었고, 그의 목소리와 모습을 데이드라의 그것으로 바꾸었다.
"배를 버려라!" 그가 포효했다. "함께 가라앉을 셈이 아니라면 당장!"
사실 소사 실은 화염구 한 발로도 배를 날려버릴 수 있었지만, 선원들이 따뜻한 물 속으로 뛰어들 시간을 주기로 했다. 배 안에 살아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남지 않았음을 확신하고는, 그는 힘을 모아서 대기와 물을 진동시킬 정도로 파괴적인 파동을 내뿜었다. 함선과 모락 통에게 보내는 공작의 대금은 내해 바닥을 향해 가라앉았다.
"나이트 마더." 소사 실은 항만 관리인에게 구조가 필요한 선원들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 나아가며 생각했다. "어느 누구도 수요와 공급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다."
마지막 파종에서 계속.
9. 8권
원문
2920년, 첫 번째 시대의 마지막 해
제8권: 마지막 파종
칼로박 타운웨이 지음
2920년, 마지막 파종 1일
모로윈드의 모운홀드에서
그들은 땅거미가 내릴 무렵 공작의 궁정에 모여, 마른 가지와 비터그린 잎이 타들어가는 불꽃의 향과 온기를 음미하고 있었다. 조그만 불씨들이 공중에 흩날려 이내 사그라들기 전까지 얼마 간을 맴돌았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수긍하는 공작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하지만 로칸이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다 괜찮은 법이겠죠. 모락 통은 황제를 암살하지 않을 것이고 제가 그들에게 지불한 대금은 이제 내해 바닥에 있군요. 저는 성하께서 데이드라 군주들과 어떤 협정을 체결하신 줄로 알았습니다만."
"네 선원들이 데이드라라고 이야기한 게 데이드라가 아닐 수도 있겠지." 소사 실이 답했다. "어쩌면 위험한 전투마법사였거나, 아니면 배에 낙뢰가 꽂힌 게 전부였을지도 모르고."
"황자와 황제는 우리가 맺었던 협정대로 알드 람바시를 차지하러 길을 떠났다는군." 비벡은 지도를 꺼냈다. "여기, 알드 람바시 북서쪽에 있는 페르빈실이라는 마을에서 그들과 만날 수 있겠네."
"하지만 우리가 저들을 만나는 건 대화를 위해서인가?" 아말렉시아가 물었다. "아니면 전쟁을 선포하기 위해서?"
이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920년, 마지막 파종 15일
모로윈드의 페르빈실에서
늦여름 폭우가 작은 마을에 불어닥쳐 하늘을 검게 물들였고, 오직 번갯불만이 곡예사마냥 구름과 구름 사이를 뛰놀고 있었다. 좁은 길목으로 넘친 물은 발목까지 차올랐고, 황자는 고작 몇 피트 떨어진 그의 지휘관들을 부르기 위해 크게 소리쳐야만 했다.
"저기 여관이 보인다! 알드 람바시로 서두르기 전 저기서 폭풍이 멎기를 기다리겠다!"
따뜻하니 포근한 여관 안은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여종업원들은 앞뒤로 바쁘게 움직이며, 그리프와 와인을 아마도 굉장히 중요한 손님이 자리하고 있을 안쪽 방으로 가져갔다. 아마도 탐리엘 제국의 차기 계승자보다도 훨씬 이목을 끄는 손님임이 틀림없었다. 쥘렉은 그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비벡'이라는 이름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비벡 공." 그는 안쪽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부디 믿어주시오. 난 블랙 게이트에 대한 공격은 전혀 모르고 있었고, 그 일이 터지고 난 다음에야 알게 되었소. 물론 그대의 염려에 대한 보상이 당장 뒤따를 것이오. 그것에 대한 편지를 발모라에 있는 그대의 궁전으로 보냈으나, 그대는 분명 그 자리를 비우고 있었-" 그는 말을 멈추고는 방 안에서 그를 둘러싼 이런저런 새로운 얼굴들을 마주했다. "자기소개가 늦은 점에 대해 사과하겠소. 나는 쥘렉 시로딜이오."
"아말렉시아야." 황자가 여태까지 본 여성들 중 가장 아름다운 이가 입을 열었다. "합석하지 않겠나?"
"소사 실이오." 하얀 망토를 두른 진지한 얼굴의 던머는 황자와 악수하며 자리를 권했다.
"인도릴 브린디시 도롬, 모운홀드 대공이외다." 황자가 자리에 앉자 그 옆에 있었던 다부진 체격의 남성이 말했다.
"기껏해야 지난 달에 있었던 일이지만, 당시 제국군은 내 지휘 하에 있지 않았소." 와인을 주문한 황자는 말을 시작했다. "정말이오. 그 군대는 아버님의 것이었소."
"황제도 그대와 함께 알드 람바시를 향하는 중이었겠지." 아말렉시아가 말했다.
"공식적으로는, 그렇게 되어 있소." 황자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비공식적으로는, 황제 폐하께서는 아직 임페리얼 시티에 계신다오. 불운한 사고가 있었지."
비벡은 황자에게 시선을 향하기 전 빠르게 공작을 향해 눈을 흘겼다. "사고라니?"
"폐하께서는 무사하시오." 황자가 즉각 답했다. "생명에 지장은 없으시지만 한쪽 눈을 실명하시게 될 것 같소. 이 전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실랑이였지. 단 한 가지 좋은 소식은, 황제 폐하께서 요양을 하시는 동안 내게 폐하의 인장을 사용하는 것이 허락되었다는 점이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체결하는 모든 합의는 내 아버님의 치세는 물론 나의 치세에서도 계속해서 효력을 발휘할 것이오."
"그렇다면 합의를 시작하도록 하실까." 아말렉시아가 미소지었다.
2920년 마지막 파종 16일
시로딜의 로스 나가에서
로스가리안 산맥의 평야지대와 그 너머의 하이 락을 내려다보는 곶에서, 형형색색의 자태를 빛내는 집들로 가득한 로스 나가의 작은 마을이 카시르를 반겼다. 숨이 멎을 듯한 광경에 그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현실적으로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그와 그의 말 모두 형편없는 식사를 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말을 타고 중앙 광장으로 내려오자, '독수리 울음소리라는 여관이 있었다. 마구간의 소년에게 그의 말을 잘 매어두고 먹이를 주도록 지시한 뒤 카시르는 여관으로 향했고 북적이는 모습에 놀랐다. 그가 길더데일에서 공연을 들었던 적이 있는 시인이 박수치는 산촌 사람들을 향해 경쾌한 옛날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 당시 카시르는 그런 짓눌릴 것 같은 떠들썩한 분위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 소란에서 멀리 떨어진 유일한 테이블에 침울해보이는 던머 여성이 앉아있는 게 눈에 들어왔고, 그는 마실 것을 챙겨 소개도 없이 그 자리에 앉았다. 그제서야 그는 여자가 갓난아기를 끌어안고 있음을 눈치챘다.
"지금 막 모로윈드에서 도착한 참인데." 낮게 깔린 목소리에서 어색함이 느껴졌다. "비벡과 모운홀드 공작을 위해 제국과 맞섰지. 어쩌면 당신이 날 동족의 배신자라고 부를지도 모르겠군."
"나도 동족의 배신자에요." 어떤 상징이 낙인된 손을 감싸며 여자가 말했다. "내가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죠."
"글쎄, 여기 머물 생각은 아닌 것 같군. 혹시라도 그럴 작정이었나?" 카시르가 웃었다. "여긴 확실히 괜찮은 곳이지만, 겨울이 되면 눈이 당신 눈썹 위까지 쌓일걸. 막 태어난 아기에게 적절한 장소는 아니지. 딸아이의 이름은 어떻게 되나?"
"보스리엘이에요. '숲의 아름다움'이라는 뜻이죠. 당신은 어디로 갈 생각인가요?"
"하이 락 만에 있는 드웨넌으로. 함께 가도 좋소이다. 나도 친구가 필요할지 모르니." 그는 손을 내밀었다. "카시르 휘틀리요."
"투랄라에요." 잠깐 뜸을 들이던 여자가 대답했다. 그녀는 전통에 따라 가문의 이름을 먼저 대려 했지만, 이내 더 이상 그건 그녀의 이름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도 함께 갔으면 좋겠군요. 고마워요."
2920년 마지막 파종 19일
모로윈드의 알드 람바시에서
다섯 명의 남성과 두 명의 여성이 서 있는 성의 거대한 방에서, 오직 깃펜이 양피지 위를 사각대는 소리와 빗물이 커다란 전망창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울리고 있었다. 황자가 문서 위에 시로딜의 인장을 날인한 순간, 공식적으로 평화가 찾아왔다. 모운홀드 공작은 기쁨에 차 포효하며, 80년에 걸친 전쟁이 끝났음을 기념하기 위해 와인을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소사 실만이 사람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만이, 그가 시작이나 끝이라는 개념을 믿지 않고, 계속되는 순환의 일부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자 전하." 성의 집사는 축전의 분위기를 깨뜨린 것에 송구스럽다는 듯 말했다. "어머님 되시는 황후 폐하께서 보내신 전령이 있습니다. 아버님을 뵙고자 하셨으나, 이 자리에 도착하지 않으셔서-"
쥘렉은 주변에 양해를 구하고 전령과 이야기하러 발길을 옮겼다.
"황후는 임페리얼 시티에 있는 게 아니었나?" 비벡이 물었다.
"아냐." 아말렉시아가 가엾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편이 그녀가 반역을 꾸몄다고 의삼해서 블랙 마쉬에 유폐했지. 그녀는 굉장히 부유한데다가 콜로비아 서부에 강력한 우군을 두고 있어서, 황제는 다른 사람과 결혼하거나 그녀를 처형할 수 없어. 쥘렉이 아직 어렸던 지난 17년 전부터 서로 갈라섰다더군."
얼마 지나지 않아 황자가 돌아왔다. 그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려 했지만, 그의 얼굴은 스스로의 의도를 저버리고 있었다.
"어머님께서 날 부르신다고 하는군." 그는 간결하게 이야기했다. "대단히 미안하지만 지금 당장 떠나야겠소. 괜찮다면 이 조약의 복사본을 가져가 황후 폐하께 우리들 사이의 앙금을 털어냈음을 보여드리고, 다시 임페리얼 시티로 가져가 공인하고자 하오."
쥘렉 황자는 모로윈드의 세 사람과 정중한 작별 인사를 나누고 떠났다. 블랙 마쉬가 있는 남쪽을 향해 폭우 속으로 달려나가는 그를 보며, 비벡이 말했다. "그가 즉위하면 탐리엘도 훨씬 나아지겠군."
2920년, 마지막 파종 31일
블랙 마쉬의 도르사 가도에서
달이 적막한 채석장 위로 떠올랐고, 말을 달려 숲을 빠져나온 황자와 두 명의 호위 주위로 유난히 더운 여름날의 늪지에서 가스가 피어올랐다. 먼 옛날 멸종한 블랙 마쉬의 몇몇 원시 부족들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악당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흙과 거름을 높이 쌓아올렸다. 듣기로 악당들은 도르자 가도를 뚫고 지나갔고, 슬프게도 거대한 금이 쩍 갈라진 외로운 성벽이 몇 마일에 걸쳐 죽 이어져 있었다.
보루 위에 자라난 비틀린 검은 나무가 배배 꼬인 그물과도 같은 기묘한 그림자를 아래로 드리웠다. 황자의 마음은 습격을 암시하는, 어머니의 아리송한 편지로 가득했다. 당연하게도 그는 던머들과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최소한 그가 좀 더 자세히 알아내고 그의 아버지에게 알리기 전까지는. 어찌 되었든 편지는 그를 위한 것이었고, 다급한 어조는 그로 하여금 곧장 기데온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황후는 그에게 도르사 가도를 지나는 캐러밴을 습격한다는 한 무리의 과거 노예였던 자들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그녀는 황가의 방패를 분명히 보이게끔 함으로써, 저들이 그가 증오스러운 던머 노예주들 중 하나가 아님을 알 수 있게끔 할 것을 조언했다. 길게 자라난 잡초가 위험천만한 강처럼 길을 뒤덮은 지점을 지나며, 황자는 그의 방패를 확실히 드러낼 것을 지시했다.
"노예들이 왜 이런 곳을 이용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황자의 호위대장이 말했다. "몸을 숨기기에 정말 완벽한 장소입니다."
쥘렉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생각은 다른 곳에 있었다. 황후가 밝혀냈다는 습격의 위험이란 대체 무엇일까? 아카비르가 다시 바다 위에 모습을 드러냈나? 만약 그렇다라도, 지오베세 성의 감방에 있을 어머니가 어떻게 그걸 알 수 있었을까? 풀숲 사이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그의 뒤에서 울려퍼진 외마디 비명이 그의 사색을 중지시켰다.
주위를 둘러보며 황자는 자신이 혼자가 되었음을 알았다. 그의 호위는 전부 사라져 있었다.
황자는 길을 따라 불어오는 밤바람에 실려온 밀물과 썰물인 양 물결치는, 달빛이 넓게 드리운 풀숲의 바다를 응시했다. 이 흔들림 아래에서 병사들이 뒤섞이고 말이 줄줄이 죽어나가고 있다 해도 모를 지경이었다. 기습에 당한 희생자들이 내는 그 어떤 소리도 찢어지는 바람에 삼켜지리라.
검을 뽑아든 쥘렉은 무엇을 해야할지 생각했고, 그의 이성이 자칫 혼란에 빠질지 모를 감성을 다잡았다. 그는 길 입구보다도 출구에 가까웠다. 무엇이 그의 호위를 죽였든 분명 그의 뒤에 있었다. 충분한 속력을 낼 수만 있다면 놈을 따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말에 박차를 가하며 그는 먼지로 된 거대한 검은 기둥 형상의 언덕배기를 향했다.
갑작스럽게 그의 몸이 공중으로 던져졌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식하기도 전에 앞으로 나동그라졌다. 그는 말이 있었던 자리에서 몇 야드 떨어진 곳에 떨어졌고 그 충격으로 어깨와 등뼈가 부러졌다. 온몸을 엄습하는 저릿한 통증을 느끼며 그가 자신의 준마를 돌아봤을 때, 가엾은 녀석은 바로 아래의 풀밭에서 튀어나온 여러 자루의 창들 중 하나에 배가 죽 갈라진 채로 죽어가고 있었다.
쥘렉 황자는 풀숲에서 튀어나온 형체를 향해 돌아서거나 얼굴을 마주할 수도, 그리고 스스로를 보호할 수도 없었다. 그의 목이 그어지는 순간에는 그 어떤 격식도 찾아볼 수 없었다.
미라모어는 달빛에 그의 사냥감을 비추어 얼굴을 확인하고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는 보드룸 전투에서 존귀하신 황제 폐하의 지휘를 받으며 그 용안을 본 적이 있었고, 이 작자는 분명히 황제가 아니었다. 시체를 뒤져 그는 편지와 함께 모로윈드를 대표하여 비벡과 아말렉시아, 소사 실, 그리고 모운홀드 공작이, 시로딜 제국을 대표하여 황자 쥘렉 시로딜이 서명한 조약 문서를 찾아냈다.
"재수도 없지." 미라모어는 스스로와 수근대는 풀숲을 향해 툴툴거렸다. "끽해야 황자를 따는 걸로 끝이라니. 어딜 가서 보상을 받으셔야 하려나?"
미라모어는 주크가 지시했던 대로 편지를 없애고는 조약문을 주머니에 챙겼다. 최소한 이런 진귀한 물건에는 값을 매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이 다음에 어디로 향할지 생각하며 덫을 해제했다. 기데온으로 돌아가 고용주에게 황위 계승자를 사냥한 약간의 보상을 청구해야 할까? 다른 땅으로 내뺴야 할까? 그의 생각에 적어도 보드룸 전투에서 두 가지 유용한 기술을 몸에 익혔음은 분명했다. 던머로부터는 끝내주는 창 함정을 배웠다. 그리고 제국군을 저버리면서는 어떻게 풀숲 사이로 몸을 숨겨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난롯불에서 계속.
2920년, 첫 번째 시대의 마지막 해
제8권: 마지막 파종
칼로박 타운웨이 지음
2920년, 마지막 파종 1일
모로윈드의 모운홀드에서
그들은 땅거미가 내릴 무렵 공작의 궁정에 모여, 마른 가지와 비터그린 잎이 타들어가는 불꽃의 향과 온기를 음미하고 있었다. 조그만 불씨들이 공중에 흩날려 이내 사그라들기 전까지 얼마 간을 맴돌았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수긍하는 공작의 목소리는 침착했다. "하지만 로칸이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다 괜찮은 법이겠죠. 모락 통은 황제를 암살하지 않을 것이고 제가 그들에게 지불한 대금은 이제 내해 바닥에 있군요. 저는 성하께서 데이드라 군주들과 어떤 협정을 체결하신 줄로 알았습니다만."
"네 선원들이 데이드라라고 이야기한 게 데이드라가 아닐 수도 있겠지." 소사 실이 답했다. "어쩌면 위험한 전투마법사였거나, 아니면 배에 낙뢰가 꽂힌 게 전부였을지도 모르고."
"황자와 황제는 우리가 맺었던 협정대로 알드 람바시를 차지하러 길을 떠났다는군." 비벡은 지도를 꺼냈다. "여기, 알드 람바시 북서쪽에 있는 페르빈실이라는 마을에서 그들과 만날 수 있겠네."
"하지만 우리가 저들을 만나는 건 대화를 위해서인가?" 아말렉시아가 물었다. "아니면 전쟁을 선포하기 위해서?"
이 말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2920년, 마지막 파종 15일
모로윈드의 페르빈실에서
늦여름 폭우가 작은 마을에 불어닥쳐 하늘을 검게 물들였고, 오직 번갯불만이 곡예사마냥 구름과 구름 사이를 뛰놀고 있었다. 좁은 길목으로 넘친 물은 발목까지 차올랐고, 황자는 고작 몇 피트 떨어진 그의 지휘관들을 부르기 위해 크게 소리쳐야만 했다.
"저기 여관이 보인다! 알드 람바시로 서두르기 전 저기서 폭풍이 멎기를 기다리겠다!"
따뜻하니 포근한 여관 안은 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여종업원들은 앞뒤로 바쁘게 움직이며, 그리프와 와인을 아마도 굉장히 중요한 손님이 자리하고 있을 안쪽 방으로 가져갔다. 아마도 탐리엘 제국의 차기 계승자보다도 훨씬 이목을 끄는 손님임이 틀림없었다. 쥘렉은 그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비벡'이라는 이름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비벡 공." 그는 안쪽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부디 믿어주시오. 난 블랙 게이트에 대한 공격은 전혀 모르고 있었고, 그 일이 터지고 난 다음에야 알게 되었소. 물론 그대의 염려에 대한 보상이 당장 뒤따를 것이오. 그것에 대한 편지를 발모라에 있는 그대의 궁전으로 보냈으나, 그대는 분명 그 자리를 비우고 있었-" 그는 말을 멈추고는 방 안에서 그를 둘러싼 이런저런 새로운 얼굴들을 마주했다. "자기소개가 늦은 점에 대해 사과하겠소. 나는 쥘렉 시로딜이오."
"아말렉시아야." 황자가 여태까지 본 여성들 중 가장 아름다운 이가 입을 열었다. "합석하지 않겠나?"
"소사 실이오." 하얀 망토를 두른 진지한 얼굴의 던머는 황자와 악수하며 자리를 권했다.
"인도릴 브린디시 도롬, 모운홀드 대공이외다." 황자가 자리에 앉자 그 옆에 있었던 다부진 체격의 남성이 말했다.
"기껏해야 지난 달에 있었던 일이지만, 당시 제국군은 내 지휘 하에 있지 않았소." 와인을 주문한 황자는 말을 시작했다. "정말이오. 그 군대는 아버님의 것이었소."
"황제도 그대와 함께 알드 람바시를 향하는 중이었겠지." 아말렉시아가 말했다.
"공식적으로는, 그렇게 되어 있소." 황자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비공식적으로는, 황제 폐하께서는 아직 임페리얼 시티에 계신다오. 불운한 사고가 있었지."
비벡은 황자에게 시선을 향하기 전 빠르게 공작을 향해 눈을 흘겼다. "사고라니?"
"폐하께서는 무사하시오." 황자가 즉각 답했다. "생명에 지장은 없으시지만 한쪽 눈을 실명하시게 될 것 같소. 이 전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실랑이였지. 단 한 가지 좋은 소식은, 황제 폐하께서 요양을 하시는 동안 내게 폐하의 인장을 사용하는 것이 허락되었다는 점이오. 우리가 지금 여기서 체결하는 모든 합의는 내 아버님의 치세는 물론 나의 치세에서도 계속해서 효력을 발휘할 것이오."
"그렇다면 합의를 시작하도록 하실까." 아말렉시아가 미소지었다.
2920년 마지막 파종 16일
시로딜의 로스 나가에서
로스가리안 산맥의 평야지대와 그 너머의 하이 락을 내려다보는 곶에서, 형형색색의 자태를 빛내는 집들로 가득한 로스 나가의 작은 마을이 카시르를 반겼다. 숨이 멎을 듯한 광경에 그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현실적으로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그와 그의 말 모두 형편없는 식사를 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말을 타고 중앙 광장으로 내려오자, '독수리 울음소리라는 여관이 있었다. 마구간의 소년에게 그의 말을 잘 매어두고 먹이를 주도록 지시한 뒤 카시르는 여관으로 향했고 북적이는 모습에 놀랐다. 그가 길더데일에서 공연을 들었던 적이 있는 시인이 박수치는 산촌 사람들을 향해 경쾌한 옛날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 당시 카시르는 그런 짓눌릴 것 같은 떠들썩한 분위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 소란에서 멀리 떨어진 유일한 테이블에 침울해보이는 던머 여성이 앉아있는 게 눈에 들어왔고, 그는 마실 것을 챙겨 소개도 없이 그 자리에 앉았다. 그제서야 그는 여자가 갓난아기를 끌어안고 있음을 눈치챘다.
"지금 막 모로윈드에서 도착한 참인데." 낮게 깔린 목소리에서 어색함이 느껴졌다. "비벡과 모운홀드 공작을 위해 제국과 맞섰지. 어쩌면 당신이 날 동족의 배신자라고 부를지도 모르겠군."
"나도 동족의 배신자에요." 어떤 상징이 낙인된 손을 감싸며 여자가 말했다. "내가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뜻이죠."
"글쎄, 여기 머물 생각은 아닌 것 같군. 혹시라도 그럴 작정이었나?" 카시르가 웃었다. "여긴 확실히 괜찮은 곳이지만, 겨울이 되면 눈이 당신 눈썹 위까지 쌓일걸. 막 태어난 아기에게 적절한 장소는 아니지. 딸아이의 이름은 어떻게 되나?"
"보스리엘이에요. '숲의 아름다움'이라는 뜻이죠. 당신은 어디로 갈 생각인가요?"
"하이 락 만에 있는 드웨넌으로. 함께 가도 좋소이다. 나도 친구가 필요할지 모르니." 그는 손을 내밀었다. "카시르 휘틀리요."
"투랄라에요." 잠깐 뜸을 들이던 여자가 대답했다. 그녀는 전통에 따라 가문의 이름을 먼저 대려 했지만, 이내 더 이상 그건 그녀의 이름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도 함께 갔으면 좋겠군요. 고마워요."
2920년 마지막 파종 19일
모로윈드의 알드 람바시에서
다섯 명의 남성과 두 명의 여성이 서 있는 성의 거대한 방에서, 오직 깃펜이 양피지 위를 사각대는 소리와 빗물이 커다란 전망창을 두드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울리고 있었다. 황자가 문서 위에 시로딜의 인장을 날인한 순간, 공식적으로 평화가 찾아왔다. 모운홀드 공작은 기쁨에 차 포효하며, 80년에 걸친 전쟁이 끝났음을 기념하기 위해 와인을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소사 실만이 사람들로부터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그의 얼굴에서는 어떤 감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만이, 그가 시작이나 끝이라는 개념을 믿지 않고, 계속되는 순환의 일부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황자 전하." 성의 집사는 축전의 분위기를 깨뜨린 것에 송구스럽다는 듯 말했다. "어머님 되시는 황후 폐하께서 보내신 전령이 있습니다. 아버님을 뵙고자 하셨으나, 이 자리에 도착하지 않으셔서-"
쥘렉은 주변에 양해를 구하고 전령과 이야기하러 발길을 옮겼다.
"황후는 임페리얼 시티에 있는 게 아니었나?" 비벡이 물었다.
"아냐." 아말렉시아가 가엾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남편이 그녀가 반역을 꾸몄다고 의삼해서 블랙 마쉬에 유폐했지. 그녀는 굉장히 부유한데다가 콜로비아 서부에 강력한 우군을 두고 있어서, 황제는 다른 사람과 결혼하거나 그녀를 처형할 수 없어. 쥘렉이 아직 어렸던 지난 17년 전부터 서로 갈라섰다더군."
얼마 지나지 않아 황자가 돌아왔다. 그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려 했지만, 그의 얼굴은 스스로의 의도를 저버리고 있었다.
"어머님께서 날 부르신다고 하는군." 그는 간결하게 이야기했다. "대단히 미안하지만 지금 당장 떠나야겠소. 괜찮다면 이 조약의 복사본을 가져가 황후 폐하께 우리들 사이의 앙금을 털어냈음을 보여드리고, 다시 임페리얼 시티로 가져가 공인하고자 하오."
쥘렉 황자는 모로윈드의 세 사람과 정중한 작별 인사를 나누고 떠났다. 블랙 마쉬가 있는 남쪽을 향해 폭우 속으로 달려나가는 그를 보며, 비벡이 말했다. "그가 즉위하면 탐리엘도 훨씬 나아지겠군."
2920년, 마지막 파종 31일
블랙 마쉬의 도르사 가도에서
달이 적막한 채석장 위로 떠올랐고, 말을 달려 숲을 빠져나온 황자와 두 명의 호위 주위로 유난히 더운 여름날의 늪지에서 가스가 피어올랐다. 먼 옛날 멸종한 블랙 마쉬의 몇몇 원시 부족들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악당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흙과 거름을 높이 쌓아올렸다. 듣기로 악당들은 도르자 가도를 뚫고 지나갔고, 슬프게도 거대한 금이 쩍 갈라진 외로운 성벽이 몇 마일에 걸쳐 죽 이어져 있었다.
보루 위에 자라난 비틀린 검은 나무가 배배 꼬인 그물과도 같은 기묘한 그림자를 아래로 드리웠다. 황자의 마음은 습격을 암시하는, 어머니의 아리송한 편지로 가득했다. 당연하게도 그는 던머들과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최소한 그가 좀 더 자세히 알아내고 그의 아버지에게 알리기 전까지는. 어찌 되었든 편지는 그를 위한 것이었고, 다급한 어조는 그로 하여금 곧장 기데온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황후는 그에게 도르사 가도를 지나는 캐러밴을 습격한다는 한 무리의 과거 노예였던 자들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그녀는 황가의 방패를 분명히 보이게끔 함으로써, 저들이 그가 증오스러운 던머 노예주들 중 하나가 아님을 알 수 있게끔 할 것을 조언했다. 길게 자라난 잡초가 위험천만한 강처럼 길을 뒤덮은 지점을 지나며, 황자는 그의 방패를 확실히 드러낼 것을 지시했다.
"노예들이 왜 이런 곳을 이용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황자의 호위대장이 말했다. "몸을 숨기기에 정말 완벽한 장소입니다."
쥘렉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의 생각은 다른 곳에 있었다. 황후가 밝혀냈다는 습격의 위험이란 대체 무엇일까? 아카비르가 다시 바다 위에 모습을 드러냈나? 만약 그렇다라도, 지오베세 성의 감방에 있을 어머니가 어떻게 그걸 알 수 있었을까? 풀숲 사이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그의 뒤에서 울려퍼진 외마디 비명이 그의 사색을 중지시켰다.
주위를 둘러보며 황자는 자신이 혼자가 되었음을 알았다. 그의 호위는 전부 사라져 있었다.
황자는 길을 따라 불어오는 밤바람에 실려온 밀물과 썰물인 양 물결치는, 달빛이 넓게 드리운 풀숲의 바다를 응시했다. 이 흔들림 아래에서 병사들이 뒤섞이고 말이 줄줄이 죽어나가고 있다 해도 모를 지경이었다. 기습에 당한 희생자들이 내는 그 어떤 소리도 찢어지는 바람에 삼켜지리라.
검을 뽑아든 쥘렉은 무엇을 해야할지 생각했고, 그의 이성이 자칫 혼란에 빠질지 모를 감성을 다잡았다. 그는 길 입구보다도 출구에 가까웠다. 무엇이 그의 호위를 죽였든 분명 그의 뒤에 있었다. 충분한 속력을 낼 수만 있다면 놈을 따돌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말에 박차를 가하며 그는 먼지로 된 거대한 검은 기둥 형상의 언덕배기를 향했다.
갑작스럽게 그의 몸이 공중으로 던져졌고,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인식하기도 전에 앞으로 나동그라졌다. 그는 말이 있었던 자리에서 몇 야드 떨어진 곳에 떨어졌고 그 충격으로 어깨와 등뼈가 부러졌다. 온몸을 엄습하는 저릿한 통증을 느끼며 그가 자신의 준마를 돌아봤을 때, 가엾은 녀석은 바로 아래의 풀밭에서 튀어나온 여러 자루의 창들 중 하나에 배가 죽 갈라진 채로 죽어가고 있었다.
쥘렉 황자는 풀숲에서 튀어나온 형체를 향해 돌아서거나 얼굴을 마주할 수도, 그리고 스스로를 보호할 수도 없었다. 그의 목이 그어지는 순간에는 그 어떤 격식도 찾아볼 수 없었다.
미라모어는 달빛에 그의 사냥감을 비추어 얼굴을 확인하고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는 보드룸 전투에서 존귀하신 황제 폐하의 지휘를 받으며 그 용안을 본 적이 있었고, 이 작자는 분명히 황제가 아니었다. 시체를 뒤져 그는 편지와 함께 모로윈드를 대표하여 비벡과 아말렉시아, 소사 실, 그리고 모운홀드 공작이, 시로딜 제국을 대표하여 황자 쥘렉 시로딜이 서명한 조약 문서를 찾아냈다.
"재수도 없지." 미라모어는 스스로와 수근대는 풀숲을 향해 툴툴거렸다. "끽해야 황자를 따는 걸로 끝이라니. 어딜 가서 보상을 받으셔야 하려나?"
미라모어는 주크가 지시했던 대로 편지를 없애고는 조약문을 주머니에 챙겼다. 최소한 이런 진귀한 물건에는 값을 매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이 다음에 어디로 향할지 생각하며 덫을 해제했다. 기데온으로 돌아가 고용주에게 황위 계승자를 사냥한 약간의 보상을 청구해야 할까? 다른 땅으로 내뺴야 할까? 그의 생각에 적어도 보드룸 전투에서 두 가지 유용한 기술을 몸에 익혔음은 분명했다. 던머로부터는 끝내주는 창 함정을 배웠다. 그리고 제국군을 저버리면서는 어떻게 풀숲 사이로 몸을 숨겨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었다.
난롯불에서 계속.
10. 9권
원문
2920년, 첫 번째 시대의 마지막 해
제9권: 난롯불
칼로박 타운웨이 지음
2920년, 난롯불 2일
블랙 마쉬의 기데온에서
타비아 황후는 그녀의 침대에 비스듬히 누웠지만, 그녀의 감방과 창살들을 두드리는 늦여름의 뜨거운 바람을 느낄 수 없었다. 그녀의 목은 불 위에서 타들어가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억누를 수 없는 통곡을 짜내며 손으로 마지막 태피스트리를 비틀었다. 그녀의 울부짖음이 성의 텅 빈 회랑에 메아리치며, 청소하는 시녀들과 수군대는 위병들을 멈춰 세웠다. 시종들 중 한 사람이 가파른 계단을 올라와 그녀의 주인을 살피고자 했지만, 문 앞에 버티고 선 경비대장 주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막 아드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셨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2920년, 난롯불 5일
시로딜의 임페리얼 시티에서
"황제 폐하." 수석 고문 베르시듀-셰이가 문 너머에서 말했다. "문을 열어주셔도 괜찮습니다. 폐하께서는 지극히 안전하십니다.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아무도 폐하를 죽일 생각이 없습니다."
"마라시여!" 광기서린 황제 레만 3세의 발작적인 목소리는 죽이다 못해 거의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웬놈이 황자를 암살했어. 그 아이는 내 방패를 들고 있었고! 놈들은 그 아이가 짐이라고 생각한 게 틀림없어!"
"황제 폐하의 말씀이 다 맞습니다." 경멸스럽다는 양 검게 찢어진 동공을 굴리며 대답하는 수석 고문의 목소리에서는 조롱기가 묻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아드님을 시해한 무뢰배를 찾아내 그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황제 폐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제국을 위해 용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적어도 잠시 모습을 비추시어 리자 부인의 사형 집행 명령서에 서명이라도 해 주시지요." 수석 고문이 요청했다. "저희가 반역자이자 암살자의 무리 중 하나를 처분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얼마 간의 정적이 흐르더니 가구들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만은 아주 살짝 문을 열었고, 수석 고문은 벌어진 틈 사이로 분노와 공포로 얼룩진 그의 얼굴과 오른쪽 눈이 있었던 자리에서 끔찍하게 부어오른 찢어진 상처를 볼 수 있었다.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치료사조차도 고개를 떨구게 만든, 리자 부인이 투르조 요새에서 벌였던 소동의 섬뜩한 기념품이었다.
"명령서를 이리 넘기게." 황제가 으르렁댔다. "얼마든지 서명해주지."
2920년, 난롯불 6일
시로딜의 기데온에서
타비아가 듣기로 윌 오 더 위스프의 기묘한 푸른 빛은 늪지대의 가스와 영적인 에너지의 혼합물이었지만, 그녀가 창밖을 내다볼 때마다 그건 항상 그녀를 놀래키곤 했다. 지금은 그 빛이 이상하게도 안락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안개 너머로 기데온의 도시 정경이 나타났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웃기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17년이 다 되어가도록 매일같이 그곳을 바라보았으면서 단 한 번도 그 거리에 발을 들인 적이 없었다.
"혹 내가 망각한 게 있을지 짐작가는 구석이 있느냐?" 그녀는 뒤로 돌아 충직한 코스린기 주크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가 짤막히 대답했다. 그는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황후는 이내 그 모습은 그의 은빛 피부에 반사된 스스로의 얼굴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자신조차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미행당하지 않도록 확실히 하라." 그녀가 경고했다. "이만큼의 세월 동안 내 재산이 어디 숨겨져 있었는지 남편이 알아채서는 안 돼. 그리고 그대의 몫을 챙기도록 해라. 그대는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어."
타비아 황후는 걸음을 옮겼고 안개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주크는 탑의 창살을 바꿔 달았고, 그녀의 침대 위에 있던 약간의 베개를 담요로 덮었다. 행운이 따른다면 저들은 아침까지 잔디밭에서 황후의 시체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고, 그가 모로윈드를 향해 반쯤 달려갈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줄 것이다.
2920년, 난롯불 9일
하이 락의 피리기아스에서
주위에 그득한 낯선 나무들은 적색과 황색, 그리고 주황색 폭발과 함께 타오르는 곤충 둥지가 얹힌 우둘투둘한 기둥과도 닮은 것 같았다. 로스가리안 산맥은 오후의 안개 속으로 사라져갔다. 투랄라는 광활한 초원으로 말을 몰고 갈수록 펼쳐지는 이질적이며 모로윈드와는 너무나도 다른 광경에 감탄했다. 그녀의 뒤에서 카시르는 보스리엘을 부드럽게 안은 채로 머리를 꾸벅이며 졸고 있었다. 잠깐 동안 투랄라는 들판을 가로지르는 칠이 된 낮은 울타리를 뛰어넘어보면 어떨까 생각했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주도권을 주기 전, 몇 시간 정도 카시르가 자도록 두기로 했다.
말이 들판을 지나고 있을 때, 투랄라는 다음 언덕에서 숲에 반쯤 가려진 녹색의 조그만 집을 보았다. 너무나 그림같은 풍경에 투랄라는 기분 좋게 반쯤 잠에 녹아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 터져나온 뿔피리 소리가 그녀를 전율과 함께 현실로 돌려 놓았다. 카시르가 눈을 떴다.
"여긴 어디요?" 그가 쉿 하는 소리를 냈다.
"나야 모르죠." 눈이 휘둥그레진 투랄라가 더듬거렸다. "저 소리는 뭐죠?"
"오크군." 그가 속삭였다. "사냥을 나온 무리야. 서둘러 덤불 속으로 숨읍시다."
투랄라는 말을 약간이나마 나무가 우거진 곳으로 몰았다. 카시르는 그녀에게 아이를 건네고 말에서 내렸다. 그는 자신들의 짐을 끌어내리고는 덤불 속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멀리서 울리던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이서 들려오고 있었다. 투랄라는 조심스레 올라가 카시르가 말을 풀어주는 것을 도왔다. 그러는 동안 눈을 뜬 보스리엘이 지켜보고 있었다. 투랄라는 때때로 그녀의 아기가 절대로 울지 않아 걱정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게 너무나 고마웠다. 마지막으로 남은 짐을 끌어내리고 카시르는 말의 엉덩이를 후려쳐 들판을 향해 달려나가도록 했다. 투랄라의 손을 잡으며 그는 덤불 속으로 몸을 숙였다.
"운이 좋다면," 그가 소곤거렸다. "저들은 녀석들이 야생마거나 어떤 농장 소유인 줄로 알고 기수를 찾지는 않겠지."
그가 말하고 있을 때 한 무리의 오크들이 뿔나팔을 울리며 들판에 들이닥쳤다. 투랄라는 전에도 오크를 본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숫자가 짐승 같은 확신에 찬 모습은 보지 못했었다. 혼란에 빠진 말들을 보고는 기쁨에 찬 함성을 지르며, 그들은 카시르와 투랄라, 그리고 보스리엘이 숨어 있는 덤불을 지나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의 발길질에 흩날린 야생화가 씨앗을 뿌려 공중을 간질였다. 투랄라는 재채기가 새어나오는 것을 참으려 했고, 성공한 줄로만 알았다. 오크들 중 한 녀석이 어떤 소리를 듣고는 다른 녀석을 데려와 뒤지기 시작했다.
카시르는 조용히 검을 뽑고는 최대한 자신을 그러모았다. 그가 예전에 몸에 익혔던 기술들은 염탐을 위한 것이었지 싸움을 위한 게 아니었지만,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한은 투랄라와 그녀의 아기를 보호하기로 맹세했다. 그의 생각에 어쩌면 저 둘을 죽일 수도 있겠지만, 놈들이 소리쳐 다른 무리들을 끌어모으기 전에 그러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갑자기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바람처럼 덤불을 스쳐 지나갔다. 오크들은 뒤로 날아갔고 숨이 멎은 채 쓰러졌다. 투랄라가 돌아서자 빛나는 붉은 머리의 주름진 노파가 가까운 덤불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네들이 놈들을 내 쪽으로 데려오는 줄로만 알았지." 그녀가 웃으며 속삭였다. "날 따라오는 게 좋겠구랴."
셋은 늙은 여인을 따라 가시덤불 사이의 깊은 틈 사이로 들판을 지나 언덕 위의 집으로 향했다. 그들이 반대편으로 빠져나왔을 때, 여인은 돌아서서 오크들이 뿔나팔들을 불어제끼며 남은 말들로 피비린내나는 향연을 벌이는 것을 보았다.
"저 말은 자네들 건가?" 그녀가 물었다. 카시르가 끄덕이자 그녀는 폭소를 터뜨렸다. "그것 참 포식하겠구만. 저 괴물들은 아침이면 배가 아파 속이 부글거리겠어. 대접 한 번 잘 받았으니."
"우리 계속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요?" 여인의 웃음소리에 불안해진 투랄라가 속삭였다.
"놈들은 여기까진 못 올라온다우." 노파는 뒤에서 미소짓는 보스리엘을 향해 씩 웃어보였다. "놈들은 우리를 아주 무서워하거든."
투랄라가 카시르를 향해 돌아섰을 때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마녀들이야. 내가 알고 있는 게 맞다면 여기는 늙은 바빈의 농장이겠지? 스케핑턴 집회의 소굴이라는?"
"잘 알고 있구나, 얘야." 악명이 적잖이 흡족하다는 양 늙은 여인은 천진난만하게 낄낄댔다. "난 미니스타 스케핑턴이란다."
"저 오크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죠?" 투랄라가 물었다. "덤불 속에 있었을 때 말이에요."
"오른쪽 대갈통에 영적인 주먹을 날려줬지." 언덕을 계속 오르며 미니스타가 말했다. 그들 앞으로 농장 마당과 우물, 닭장과 연못, 허드렛일을 하는 아낙네들과 놀이에 한창 열중하고 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파는 돌아서서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랄라를 보았다. "아가야, 네 고향에는 마녀가 없든?"
"내가 아는 한은 없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탐리엘에서 마법을 휘두르는 이들의 부류는 무궁무진하지." 노파가 설명했다. "시직은 마치 고통스러운 의무라도 되는 양 마법을 연구한단다. 반대로 군단의 전투마법사들은 화살을 쏴제끼듯이 주문을 던져대고. 우리 마녀들은 교감하고 부리며 그리고 축하하지. 저 오크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말이야, 난 그저 아마로, 피나, 탈라사, 키나레스의 손가락들, 그리고 세상의 호흡같은 나와 조금 아는 사이인 대기의 정령들에게 속삭여서 저 개자식들이 죽어버리도록 후려친 게 전부란다. 네가 본 것처럼, 소환마법은 힘이라든가, 수수께끼를 푼다거나, 퀴퀴한 낡은 두루마리를 두고서 머리를 싸쥐는 게 아니란다. 관계를 다지는 것이지. 서로 친해지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
"그, 당신이 우리에게 베푼 친절은 정말로 고맙소." 카시르가 이야기했다.
"당연히 그러시겠지." 미니스타가 콜록거렸다. "자네 종족이 2천 년 전에 오크들의 고향을 파괴했어. 그 전만 해도 녀석들은 여기까지 와서 우리들을 귀찮게 하는 법이 없었는데. 그럼 이제 정리를 좀 하고 뭔가 먹는 게 좋겠어."
그러고는 미니스타는 그들을 농장으로 데려갔고, 투랄라는 스케핑턴 집회의 가족들을 만났다.
2920년, 난롯불 11일
시로딜의 임페리얼 시티에서
리자는 전날 밤 잠에 들려는 시도조차도 하지 않았으나, 그녀의 사형 집행 중 연주되고 있는 음울한 음악이 최면 효과가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건 마치 도끼를 내려치기 전 그녀를 몽롱한 상태에 빠뜨리기 위한 것 같았다. 눈이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옛 애인이자 지금 그녀의 앞에 앉아 멀쩡한 한쪽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황제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수석 고문인 베르시듀-셰이의 모습과 아래로 그를 단정히 감싸고 있는 고리들, 그리고 그의 금빛 얼굴에 떠오른 의기양양한 표정도 볼 수 없었다. 멍한 기분으로 그녀는 사형 집행인이 그녀를 고정시키기 위해 그녀의 등을 누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마치 꿈에서 깨어나려는 듯 움찔거렸다.
첫 번째 타격이 그녀의 뒤통수를 후려쳤고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다음으로 그녀의 목이 잘려 나갔고, 그녀는 죽었다.
황제는 싫증이 났다는 양 수석 고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제 다 끝났군. 저년이 해머펠에 코르다라는 예쁘장한 여동생이 있다고 자네가 그랬었지?"
2920년, 난롯불 18일
하이 락의 드웨넌에서
카시르의 생각에 마녀들이 그에게 팔았던 말은 그가 예전에 부리던 녀석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영혼 신앙이나 희생, 그리고 자매단 따위는 아마도 다 괜찮을 것이고 영혼을 사역하는 데에도 좋겠지만, 그건 짐승들을 망쳐 놓는 경향이 있었다. 그럼에도 딱히 불만은 없었다. 던머 여자와 그녀의 아이가 떠나면서, 그 역시 끝내주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으니까. 앞에서는 성벽이 그의 고향을 둘러싸고 있었다. 순식간에 그의 주위로 그의 오랜 친구들과 가족들이 모여들었다.
"전쟁은 어떻게 됐어?" 길을 달려오며 그의 사촌이 외쳤다. "비벡이 황자와 평화 협정을 맺었지만, 황제가 그걸 거부했다는 게 사실이야?"
"그건 아니지, 그렇지?" 그의 친구가 끼어들며 물었다. "내가 듣기로는 던머가 황자를 살해하고 협정 이야기를 꾸며냈다던데, 다만 아무런 증거가 없다더군."
"여긴 뭐 재미있는 일도 없었나?" 카시르는 웃었다. "난 전쟁이나 비벡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엔 눈꼽만큼도 관심 없다니까."
"너 코르다 부인의 행렬을 놓친 모양인데." 그의 친구가 말했다. "으리번쩍한 수행단과 함께 만을 건너와서는 동쪽으로 임페리얼 시티를 향했는데."
"그게 어쨌다고. 비벡은 어땠어?" 그의 사촌이 끈질기게 물었다. "그는 살아있는 신이라면서."
"쉐오고라스가 자기 자리를 내팽겨치는 바람에 다른 미치광이 신이 필요하게 된다면야, 그가 되겠지." 카시르는 거만하게 대답했다.
"여자들은 어땠는데?"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던머 여성들을 어쩌다 본 적이 있는 애송이가 물었다.
카시르는 그저 미소지었다. 투랄라 스케핑턴이 잠시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곧 사라졌다. 그녀는 마녀 집회에서 행복할 것이고, 그녀의 아이도 좋은 보살핌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들도 그가 영원히 잊고 싶은 나날과 전쟁의, 그러니까 과거의 일부였다. 말에서 내리며, 그는 일리악 만의 사소한 소문들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시내로 걸어갔다.
서리내림에서 계속
2920년, 첫 번째 시대의 마지막 해
제9권: 난롯불
칼로박 타운웨이 지음
2920년, 난롯불 2일
블랙 마쉬의 기데온에서
타비아 황후는 그녀의 침대에 비스듬히 누웠지만, 그녀의 감방과 창살들을 두드리는 늦여름의 뜨거운 바람을 느낄 수 없었다. 그녀의 목은 불 위에서 타들어가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억누를 수 없는 통곡을 짜내며 손으로 마지막 태피스트리를 비틀었다. 그녀의 울부짖음이 성의 텅 빈 회랑에 메아리치며, 청소하는 시녀들과 수군대는 위병들을 멈춰 세웠다. 시종들 중 한 사람이 가파른 계단을 올라와 그녀의 주인을 살피고자 했지만, 문 앞에 버티고 선 경비대장 주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막 아드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접하셨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2920년, 난롯불 5일
시로딜의 임페리얼 시티에서
"황제 폐하." 수석 고문 베르시듀-셰이가 문 너머에서 말했다. "문을 열어주셔도 괜찮습니다. 폐하께서는 지극히 안전하십니다.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아무도 폐하를 죽일 생각이 없습니다."
"마라시여!" 광기서린 황제 레만 3세의 발작적인 목소리는 죽이다 못해 거의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웬놈이 황자를 암살했어. 그 아이는 내 방패를 들고 있었고! 놈들은 그 아이가 짐이라고 생각한 게 틀림없어!"
"황제 폐하의 말씀이 다 맞습니다." 경멸스럽다는 양 검게 찢어진 동공을 굴리며 대답하는 수석 고문의 목소리에서는 조롱기가 묻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반드시 아드님을 시해한 무뢰배를 찾아내 그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하지만 저희는 황제 폐하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제국을 위해 용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적어도 잠시 모습을 비추시어 리자 부인의 사형 집행 명령서에 서명이라도 해 주시지요." 수석 고문이 요청했다. "저희가 반역자이자 암살자의 무리 중 하나를 처분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얼마 간의 정적이 흐르더니 가구들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레만은 아주 살짝 문을 열었고, 수석 고문은 벌어진 틈 사이로 분노와 공포로 얼룩진 그의 얼굴과 오른쪽 눈이 있었던 자리에서 끔찍하게 부어오른 찢어진 상처를 볼 수 있었다.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치료사조차도 고개를 떨구게 만든, 리자 부인이 투르조 요새에서 벌였던 소동의 섬뜩한 기념품이었다.
"명령서를 이리 넘기게." 황제가 으르렁댔다. "얼마든지 서명해주지."
2920년, 난롯불 6일
시로딜의 기데온에서
타비아가 듣기로 윌 오 더 위스프의 기묘한 푸른 빛은 늪지대의 가스와 영적인 에너지의 혼합물이었지만, 그녀가 창밖을 내다볼 때마다 그건 항상 그녀를 놀래키곤 했다. 지금은 그 빛이 이상하게도 안락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안개 너머로 기데온의 도시 정경이 나타났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웃기는 일이었지만, 그녀는 17년이 다 되어가도록 매일같이 그곳을 바라보았으면서 단 한 번도 그 거리에 발을 들인 적이 없었다.
"혹 내가 망각한 게 있을지 짐작가는 구석이 있느냐?" 그녀는 뒤로 돌아 충직한 코스린기 주크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가 짤막히 대답했다. 그는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황후는 이내 그 모습은 그의 은빛 피부에 반사된 스스로의 얼굴이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웃고 있었지만 자신조차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미행당하지 않도록 확실히 하라." 그녀가 경고했다. "이만큼의 세월 동안 내 재산이 어디 숨겨져 있었는지 남편이 알아채서는 안 돼. 그리고 그대의 몫을 챙기도록 해라. 그대는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어."
타비아 황후는 걸음을 옮겼고 안개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주크는 탑의 창살을 바꿔 달았고, 그녀의 침대 위에 있던 약간의 베개를 담요로 덮었다. 행운이 따른다면 저들은 아침까지 잔디밭에서 황후의 시체를 발견할 수 없을 것이고, 그가 모로윈드를 향해 반쯤 달려갈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줄 것이다.
2920년, 난롯불 9일
하이 락의 피리기아스에서
주위에 그득한 낯선 나무들은 적색과 황색, 그리고 주황색 폭발과 함께 타오르는 곤충 둥지가 얹힌 우둘투둘한 기둥과도 닮은 것 같았다. 로스가리안 산맥은 오후의 안개 속으로 사라져갔다. 투랄라는 광활한 초원으로 말을 몰고 갈수록 펼쳐지는 이질적이며 모로윈드와는 너무나도 다른 광경에 감탄했다. 그녀의 뒤에서 카시르는 보스리엘을 부드럽게 안은 채로 머리를 꾸벅이며 졸고 있었다. 잠깐 동안 투랄라는 들판을 가로지르는 칠이 된 낮은 울타리를 뛰어넘어보면 어떨까 생각했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주도권을 주기 전, 몇 시간 정도 카시르가 자도록 두기로 했다.
말이 들판을 지나고 있을 때, 투랄라는 다음 언덕에서 숲에 반쯤 가려진 녹색의 조그만 집을 보았다. 너무나 그림같은 풍경에 투랄라는 기분 좋게 반쯤 잠에 녹아든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 터져나온 뿔피리 소리가 그녀를 전율과 함께 현실로 돌려 놓았다. 카시르가 눈을 떴다.
"여긴 어디요?" 그가 쉿 하는 소리를 냈다.
"나야 모르죠." 눈이 휘둥그레진 투랄라가 더듬거렸다. "저 소리는 뭐죠?"
"오크군." 그가 속삭였다. "사냥을 나온 무리야. 서둘러 덤불 속으로 숨읍시다."
투랄라는 말을 약간이나마 나무가 우거진 곳으로 몰았다. 카시르는 그녀에게 아이를 건네고 말에서 내렸다. 그는 자신들의 짐을 끌어내리고는 덤불 속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멀리서 울리던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이서 들려오고 있었다. 투랄라는 조심스레 올라가 카시르가 말을 풀어주는 것을 도왔다. 그러는 동안 눈을 뜬 보스리엘이 지켜보고 있었다. 투랄라는 때때로 그녀의 아기가 절대로 울지 않아 걱정했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게 너무나 고마웠다. 마지막으로 남은 짐을 끌어내리고 카시르는 말의 엉덩이를 후려쳐 들판을 향해 달려나가도록 했다. 투랄라의 손을 잡으며 그는 덤불 속으로 몸을 숙였다.
"운이 좋다면," 그가 소곤거렸다. "저들은 녀석들이 야생마거나 어떤 농장 소유인 줄로 알고 기수를 찾지는 않겠지."
그가 말하고 있을 때 한 무리의 오크들이 뿔나팔을 울리며 들판에 들이닥쳤다. 투랄라는 전에도 오크를 본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많은 숫자가 짐승 같은 확신에 찬 모습은 보지 못했었다. 혼란에 빠진 말들을 보고는 기쁨에 찬 함성을 지르며, 그들은 카시르와 투랄라, 그리고 보스리엘이 숨어 있는 덤불을 지나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들의 발길질에 흩날린 야생화가 씨앗을 뿌려 공중을 간질였다. 투랄라는 재채기가 새어나오는 것을 참으려 했고, 성공한 줄로만 알았다. 오크들 중 한 녀석이 어떤 소리를 듣고는 다른 녀석을 데려와 뒤지기 시작했다.
카시르는 조용히 검을 뽑고는 최대한 자신을 그러모았다. 그가 예전에 몸에 익혔던 기술들은 염탐을 위한 것이었지 싸움을 위한 게 아니었지만,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한은 투랄라와 그녀의 아기를 보호하기로 맹세했다. 그의 생각에 어쩌면 저 둘을 죽일 수도 있겠지만, 놈들이 소리쳐 다른 무리들을 끌어모으기 전에 그러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갑자기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바람처럼 덤불을 스쳐 지나갔다. 오크들은 뒤로 날아갔고 숨이 멎은 채 쓰러졌다. 투랄라가 돌아서자 빛나는 붉은 머리의 주름진 노파가 가까운 덤불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자네들이 놈들을 내 쪽으로 데려오는 줄로만 알았지." 그녀가 웃으며 속삭였다. "날 따라오는 게 좋겠구랴."
셋은 늙은 여인을 따라 가시덤불 사이의 깊은 틈 사이로 들판을 지나 언덕 위의 집으로 향했다. 그들이 반대편으로 빠져나왔을 때, 여인은 돌아서서 오크들이 뿔나팔들을 불어제끼며 남은 말들로 피비린내나는 향연을 벌이는 것을 보았다.
"저 말은 자네들 건가?" 그녀가 물었다. 카시르가 끄덕이자 그녀는 폭소를 터뜨렸다. "그것 참 포식하겠구만. 저 괴물들은 아침이면 배가 아파 속이 부글거리겠어. 대접 한 번 잘 받았으니."
"우리 계속 움직여야 하지 않을까요?" 여인의 웃음소리에 불안해진 투랄라가 속삭였다.
"놈들은 여기까진 못 올라온다우." 노파는 뒤에서 미소짓는 보스리엘을 향해 씩 웃어보였다. "놈들은 우리를 아주 무서워하거든."
투랄라가 카시르를 향해 돌아섰을 때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마녀들이야. 내가 알고 있는 게 맞다면 여기는 늙은 바빈의 농장이겠지? 스케핑턴 집회의 소굴이라는?"
"잘 알고 있구나, 얘야." 악명이 적잖이 흡족하다는 양 늙은 여인은 천진난만하게 낄낄댔다. "난 미니스타 스케핑턴이란다."
"저 오크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죠?" 투랄라가 물었다. "덤불 속에 있었을 때 말이에요."
"오른쪽 대갈통에 영적인 주먹을 날려줬지." 언덕을 계속 오르며 미니스타가 말했다. 그들 앞으로 농장 마당과 우물, 닭장과 연못, 허드렛일을 하는 아낙네들과 놀이에 한창 열중하고 있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파는 돌아서서 아직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랄라를 보았다. "아가야, 네 고향에는 마녀가 없든?"
"내가 아는 한은 없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탐리엘에서 마법을 휘두르는 이들의 부류는 무궁무진하지." 노파가 설명했다. "시직은 마치 고통스러운 의무라도 되는 양 마법을 연구한단다. 반대로 군단의 전투마법사들은 화살을 쏴제끼듯이 주문을 던져대고. 우리 마녀들은 교감하고 부리며 그리고 축하하지. 저 오크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말이야, 난 그저 아마로, 피나, 탈라사, 키나레스의 손가락들, 그리고 세상의 호흡같은 나와 조금 아는 사이인 대기의 정령들에게 속삭여서 저 개자식들이 죽어버리도록 후려친 게 전부란다. 네가 본 것처럼, 소환마법은 힘이라든가, 수수께끼를 푼다거나, 퀴퀴한 낡은 두루마리를 두고서 머리를 싸쥐는 게 아니란다. 관계를 다지는 것이지. 서로 친해지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
"그, 당신이 우리에게 베푼 친절은 정말로 고맙소." 카시르가 이야기했다.
"당연히 그러시겠지." 미니스타가 콜록거렸다. "자네 종족이 2천 년 전에 오크들의 고향을 파괴했어. 그 전만 해도 녀석들은 여기까지 와서 우리들을 귀찮게 하는 법이 없었는데. 그럼 이제 정리를 좀 하고 뭔가 먹는 게 좋겠어."
그러고는 미니스타는 그들을 농장으로 데려갔고, 투랄라는 스케핑턴 집회의 가족들을 만났다.
2920년, 난롯불 11일
시로딜의 임페리얼 시티에서
리자는 전날 밤 잠에 들려는 시도조차도 하지 않았으나, 그녀의 사형 집행 중 연주되고 있는 음울한 음악이 최면 효과가 있다는 걸 발견했다. 그건 마치 도끼를 내려치기 전 그녀를 몽롱한 상태에 빠뜨리기 위한 것 같았다. 눈이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옛 애인이자 지금 그녀의 앞에 앉아 멀쩡한 한쪽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황제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수석 고문인 베르시듀-셰이의 모습과 아래로 그를 단정히 감싸고 있는 고리들, 그리고 그의 금빛 얼굴에 떠오른 의기양양한 표정도 볼 수 없었다. 멍한 기분으로 그녀는 사형 집행인이 그녀를 고정시키기 위해 그녀의 등을 누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마치 꿈에서 깨어나려는 듯 움찔거렸다.
첫 번째 타격이 그녀의 뒤통수를 후려쳤고 그녀는 비명을 질렀다. 다음으로 그녀의 목이 잘려 나갔고, 그녀는 죽었다.
황제는 싫증이 났다는 양 수석 고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이제 다 끝났군. 저년이 해머펠에 코르다라는 예쁘장한 여동생이 있다고 자네가 그랬었지?"
2920년, 난롯불 18일
하이 락의 드웨넌에서
카시르의 생각에 마녀들이 그에게 팔았던 말은 그가 예전에 부리던 녀석에게는 미치지 못했다. 영혼 신앙이나 희생, 그리고 자매단 따위는 아마도 다 괜찮을 것이고 영혼을 사역하는 데에도 좋겠지만, 그건 짐승들을 망쳐 놓는 경향이 있었다. 그럼에도 딱히 불만은 없었다. 던머 여자와 그녀의 아이가 떠나면서, 그 역시 끝내주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으니까. 앞에서는 성벽이 그의 고향을 둘러싸고 있었다. 순식간에 그의 주위로 그의 오랜 친구들과 가족들이 모여들었다.
"전쟁은 어떻게 됐어?" 길을 달려오며 그의 사촌이 외쳤다. "비벡이 황자와 평화 협정을 맺었지만, 황제가 그걸 거부했다는 게 사실이야?"
"그건 아니지, 그렇지?" 그의 친구가 끼어들며 물었다. "내가 듣기로는 던머가 황자를 살해하고 협정 이야기를 꾸며냈다던데, 다만 아무런 증거가 없다더군."
"여긴 뭐 재미있는 일도 없었나?" 카시르는 웃었다. "난 전쟁이나 비벡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엔 눈꼽만큼도 관심 없다니까."
"너 코르다 부인의 행렬을 놓친 모양인데." 그의 친구가 말했다. "으리번쩍한 수행단과 함께 만을 건너와서는 동쪽으로 임페리얼 시티를 향했는데."
"그게 어쨌다고. 비벡은 어땠어?" 그의 사촌이 끈질기게 물었다. "그는 살아있는 신이라면서."
"쉐오고라스가 자기 자리를 내팽겨치는 바람에 다른 미치광이 신이 필요하게 된다면야, 그가 되겠지." 카시르는 거만하게 대답했다.
"여자들은 어땠는데?"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던머 여성들을 어쩌다 본 적이 있는 애송이가 물었다.
카시르는 그저 미소지었다. 투랄라 스케핑턴이 잠시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곧 사라졌다. 그녀는 마녀 집회에서 행복할 것이고, 그녀의 아이도 좋은 보살핌을 받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들도 그가 영원히 잊고 싶은 나날과 전쟁의, 그러니까 과거의 일부였다. 말에서 내리며, 그는 일리악 만의 사소한 소문들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시내로 걸어갔다.
서리내림에서 계속
11. 10권
원문
2920년, 첫 번째 시대의 마지막 해
제10권: 서리내림
칼로박 타운웨이 지음
2920년, 서리내림 10일
하이 락의 피리기아스에서
그들 앞에 버티고 선 생물은 의식이 없는 듯 멍한 눈을 깜빡였고, 그 아가리는 제 기능을 하는지 확인하기라도 하는 양 열고 닫히기를 반복했다. 길게 늘어진 침방울이 송곳니 사이에 매달려 있었다. 투랄라는 여지껏 이렇게 거대하고 사람처럼 뒷다리로 걸터앉을 수 있는 종류의 파충류를 본 적이 없었다. 미니스테라가 열광적으로 박수를 쳤다.
"얘야." 그녀가 꺅꺅댔다. "짦은 시간에 이토록 많이 성장했구나. 이 데이드로쓰를 소환할 때 무슨 생각을 했니?"
투랄라는 그녀가 무엇을 생각했었는지 떠올리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자신이 현실의 구조를 넘어 오블리비언으로 들어가, 그녀의 정신적 힘으로 이 혐오스러운 생물체를 끌어내 이 세상에 소환해냈다는 사실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붉은색을 생각했어요." 집중한 투랄라가 대답했다. "그 단순성과 명료성을요. 그리고는- 강하게 소망했고 주문을 외웠어요. 그랬더니 내가 이걸 소환해냈어요."
"소망은 젊은 마녀에게 강한 힘이 된단다." 미니스테라가 말했다. "그리고 이 순간 훌륭하게 조화되었구나. 영혼의 단순한 힘이 없더라면 이 데이드로스는 아무것도 아닐 게야. 네 소망을 쉽게 지울 수 있으려나?"
투랄라는 눈을 감고 소환 해제 주문을 외웠다. 괴물은 여전히 멍한 듯 눈을 껌뻑이면서 햇빛에 삼켜지듯 사라져갔다. 미니스테라는 환호하며 그의 다크 엘프 제자를 끌어안았다.
"아직도 믿기 어렵지만, 넌 이 집회에 온지 한 달하고도 하루밖에 안 됐는데도 다른 여자들보다 훨씬 앞서 나가고 있단다. 투랄라야, 네게는 아주 강력한 피가 흐르는구나. 영혼들을 마치 연인을 어루만지듯 다루고 있어. 언젠가는 네가 이 집회를 이끌게 될 게야. 난 봤어!"
투랄라는 웃었다. 칭찬은 언제나 기쁜 일이었다. 모운홀드 공작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칭찬했었다.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가 자신들의 명예를 더럽히기 전 그녀의 예의범절을 칭찬했다. 카시르는 그저 동행인에 불과했으므로, 그의 칭찬에는 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미니스테라와 함께 있으면 그녀는 마치 고향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큰언니께서 오래오래 집회를 이끄셔야죠." 투랄라가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단다. 하지만 영혼들은 훌륭한 동료이고 흠잡을 데 없는 이야기꾼들이지만, 시간과 방식에 대해서는 때때로 혼란스러워 하지. 네가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단다. 시간과 방식은 그들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으니까." 미니스테라는 오두막 문을 열어 상쾌한 가을 바람이 데이드로스의 고약하기 짝이 없는 악취를 흩도록 했다. "이제, 네가 웨이레스트로 가서 심부름을 좀 해 줬으면 하는구나. 가는 데 일주일, 오는데 일주일이면 충분하단다. 도랴사와 셀레피나를 데려가렴. 우리는 자급자족하려 노력하지만 여기서 기를 수 없는 허브들도 있고, 어느새 그 많던 보석을 다 써버린 것 같구나. 도회지 녀석들이 네가 스케핑턴 집회의 현명한 여성들 중 한 사람이라는 걸 똑똑히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겠고. 너도 악명을 높이는 게 불편보다 이득을 많이 가져온다는 걸 알게 될 거란다."
투랄라는 그녀의 말을 따랐다. 그녀와 그녀의 자매들은 각자의 말에 올랐고, 미니스테라가 다섯 달 된 그녀의 아이 보스리엘을 데려와 그녀의 어머니와 작별의 입맞춤을 하도록 했다. 마녀들은 못된 공작을 아비로 둔 탓에 제국 중심부의 밀림에서 에일리드의 도움으로 태어나게 된 이 작은 던머 젖먹이와 사랑에 빠졌다. 투랄라는 보모들이 목숨을 걸고 그녀의 아이를 지켜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수많은 입맞춤과 작별의 손인사를 나눈 끝에 세 명의 젊은 마녀들은 적색과 황색, 그리고 주황색 빛으로 뒤덮인 숲으로 달려나갔다.
2920년 서리내림 12일
하이 락의 드웨넌에서
수요일저녁, '정나미 떨어진 고슴도치' 선술집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중앙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어찌나 맹렬한지, 아크투리안 이단의 처벌을 묘사한 태피스트리의 시체들 같은 불길한 빛을 단골들에게 비추고 있었다. 카시르는 그가 늘 앉던 장소에 사촌과 함께 앉고는 에일 한 병을 주문했다.
"남작을 만나러 갔었어?" 팔리스가 물었다.
"그래. 우르바이우스 궁전에 내 일자리를 마련해 줄 수도 있겠더군." 카시르는 자랑스레 대답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말할 수 없어. 너도 알잖냐, 나라의 비밀이라든지 그런 것들 말이야. 그런데 오늘 밤은 왜 이리 빌어먹을 인간들로 미어 터지는거야?"
"항구에 다크 엘프들이 탄 배 한 척이 들어왔어. 전쟁터에서 왔다더군. 너만큼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을 소개시켜 주려고 기다렸지."
카시르는 얼굴이 빨개졌지만 어찌저찌 평정을 유지한 채로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그 자식들이 여기는 무슨 일이야? 설마 휴전했다던가?"
"나도 전모는 파악하지 못 했어." 팔리스가 대답했다. "하지만 아마 황제와 비벡이 협상을 재개한 것 같아. 이 친구들은 자기네 투자 상황이 어떻게 굴러갔는지, 그리고 만의 상황이 충분히 안정됐는지 확인하고 싶다더군. 하지만 이야기를 다 들어보려면 그 친구들과 몇 마디 나눌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나서 팔리스는 갑작스럽게 사촌의 팔을 붙잡고는 바의 반대편으로 끌고 갔다. 카시르는 저항하기 위해서 거칠게 몸부림쳐야만 했다. 그 던머 여행자들은 네 개의 테이블에 나눠 앉아 토박이들과 웃고 떠들고 있었다. 퍽이나 쾌활한 젊은이들은 상인에 걸맞게 잘 차려입었고, 술이 들어간 탓인지 꽤 과장된 몸짓을 보이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팔리스가 그들의 대화를 끊으며 말했다. "여기 있는 내 부끄럼쟁이 사촌 카시르도 전쟁에서 살아있는 신 비벡을 위해 싸웠지요."
"내가 들어본 유일한 '카시르'는," 술에 잔뜩 취한 던머 중 한 명이 귀에 걸릴 것 같은 친근한 미소를 띤 채 카시르의 빈손을 잡아 흔들었다. "카시르 휘틀리인데, 비벡께서 역사상 최악의 밀정이라고 하셨지. 그 친구의 덜떨어진 첩보 활동 덕분에 우리는 알드 마락을 잃었다고. 자네 몸을 위해서 하는 말인데, 친구, 부디 자네와 그 친구 둘이 서로 혼동되지 않기를 바라네."
카시르는 웃으며 그 망나니가 테이블을 웃음바다로 만들기 위해 그의 실패를 과장 섞어 풀어내는 걸 듣고만 있었다. 몇몇이 그에게 눈길을 주었지만, 토박이들 중 그 누구도 이야기 속의 멍청이가 여기 서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가장 날카롭게 꽂힌 눈초리는, 그가 위대한 영웅이 되어 드웨넌으로 돌아왔다고 굳게 믿었던 젊은 사촌의 것이었다. 언젠가는 남작의 귀에도 여기저기서 살이 붙어 부풀려진 그의 어리석음이 들어갈 게 뻔했다.
그의 온 영혼을 다해서, 카시르는 '살아있는 신' 비벡을 저주했다.
2920년, 서리내림 21일
시로딜의 임페리얼 시티에서
헤가테 모르와 예술학교에서 여사제들이 걸치는 눈부신 하얀 로브를 입은 코르다는 이번 겨울의 첫 번째 폭풍이 지나갈 때 임페리얼 시티에 도착했다. 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과 함께 대로에 모습을 드러낸 아름다운 10대 레드가드 소녀는 호위를 받으며 말을 타고 궁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늘씬하고 마른데다가 거만해 보였던 그녀의 자매와는 달리, 코르다는 작은 키에 넓은 갈색 눈동자를 한 둥근 얼굴의 아가씨였다. 도시 사람들은 약삭빠르게 두 사람을 비교하며 수군덕댔다.
"리자 부인이 처형당한지 한 달도 안 지났는데." 어떤 하녀가 창밖을 엿보며 그녀의 이웃에게 눈짓하고는 투덜댔다.
"그리고 수녀원에서 나온 지 한 달도 안 됐다지." 수긍하는 다른 여자는 스캔들이 퍽 즐거운 모양이었다. "이번 물건은 얼마나 가시려나. 제 언니도 죄가 있던 건 아니었지만, 어떻게 끝장났는지 좀 보라지."
2920년, 서리내림 24일
하이 락의 드웨넌에서
카시르는 항구에 우두커니 서서 때 이른 진눈깨비가 물 위로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배멀미에 약한 자신이 불쌍했다. 이제 탐리엘에서는 동쪽이든 서쪽이든 그를 위한 장소는 없었다. 그의 꼴사나운 밀정 노릇에 대한 비벡의 이야기는 온 여관에 다 퍼지고 말았다. 드웨넌의 남작은 그와의 계약을 해지했다. 대거폴은 물론이고 던스타, 릴모스, 리멘, 그린하트 그리고 어쩌면 아카비르와 요쿠다에서까지 그 일로 그를 비웃을 게 뻔했다. 어쩌면 파도에 콱 뛰어들어 그대로 가라앉아 버리는 게 최선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를 괴롭히는 건 절망이 아닌 분노였다.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무력한 분노였다.
"선생님, 실례합니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는 펄쩍 뛰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혹시 오늘 밤을 보내기에 충분한 값싼 여관을 추천해주실 수 없을까 해서요."
어깨 너머로 봇짐을 짊어진 젊은 노드가 있었다. 배들 중 한 척에서 방금 내렸음이 분명했다. 몇 주만에 처음으로, 엄청나게 유명한 바보가 아닌 다른 이유로 누군가가 카시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기분만큼이나 시커먼 이 남성은 도움이 되지는 않았으나, 친절했다.
"스카이림에서 방금 도착했나?" 카시르가 물었다.
"아니오. 지금 그곳으로 향하는 중입니다." 젊은이가 말했다. "저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죠. 저는 센티넬에서 왔고, 그 전에는 스트로스 므'카이, 그 전에는 발렌우드의 우드허스, 그리고 그 전에는 서머셋의 아르테움에 있었습니다. 제 이름은 윌레그입니다."
카시르는 자기소개를 마치고 윌레그와 악수했다. "아르테움에서 왔다고? 혹시 시직인가?"
"아닙니다, 선생님. 더 이상은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전 제적되었거든요."
"혹시 데이드라를 소환하는 방법을 아나? 그러니까, 누군가는 살아있는 신이라고까지 칭송하는 어떤 퍽이나 잘나신 양반한테 저주를 걸고 싶은데, 영 재수가 없더군. 남작은 내가 제 눈에 들어오는 것조차도 허락하지 않았지만, 남작부인께서 날 가엾게 여기셔서 소환실을 사용하게 해 주셨지." 카시르는 열변을 토했다. "의식이란 의식은 다 해봤고, 제물까지 바쳤는데 아무것도 튀어나오는 게 없더군."
"그건 제 옛 스승인 소사 실 때문입니다." 윌레그의 대답에서는 약간의 씁쓸함이 느껴졌다. "데이드라의 군주들은 최소한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자격이 모자란 자들에게 소환되지 않을 것임을 약속했습니다. 오직 시직만이 그들과 접촉할 수 있고, 그 밖에 몇몇 떠돌이 마법사나 마녀들이나 그럴 수 있죠."
"자네, 방금 마녀라고 했나?"
2920년, 서리내림 29일
하이 락의 피리기아스에서
안개 너머에서 엺은 햇살이 투랄라, 도랴사, 그리고 셀레피나가 말을 몰고 있는 숲을 비추었다. 땅은 얊은 얼음층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짐을 싣고 있었기 때문에 포장이 되지 않은 언덕길은 더 미끄러지기 쉬운 상태였다. 투랄라는 집회로 돌아가는 것에서 오는 즐거움을 억누르려 노력했다. 웨이레스트는 하나의 모험이었고, 그녀는 도회지 사람들이 그녀에게 보내는 두려움과 존경의 시선이 썩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 그녀는 오직 자매들과 그녀의 아이에게 돌아가는 것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돌풍이 그녀의 머리를 앞으로 흩었고 그녀는 앞에 놓인 길을 빼고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어떤 기수가 그녀의 바로 옆으로 말을 몰고서 모습을 나타내기 전까지 아무런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녀가 돌아서서 카시르를 보았을 때, 그녀의 입에서는 오랜 친구를 만난 놀라움과 기쁨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녀가 보기에 그의 안색은 창백했고 퍽 핼쑥했지만, 단지 여정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로 피리기아스에 돌아왔나요?" 그녀가 미소지었다. "드웨넌에서 썩 좋은 대우를 못 받은 모양이죠?"
"그런 셈이지." 카시르가 대답했다. "스케핑턴 집회의 도움이 필요하오."
"우리랑 같이 가요." 투랄라가 말했다. "미니스테라에게 데려다 줄게요."
넷은 길을 재촉했고, 마녀들은 웨이레스트에서의 이야기로 카시르를 즐겁게 해 주었다. 도랴사와 셀레피나에게도 늙은 바빈의 농장을 떠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음이 분명했다. 그녀들은 그곳에서 스케핑턴 마녀들의 딸이나 손녀로 태어났으니까. 일반적인 하이 락 도시에서의 삶은 투랄라에게만큼이나 그들에게도 이국적이었다. 카시르는 말을 아꼈지만, 미소짓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충분히 격려가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들의 이야기에서는 그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편린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녀들이 일부러 그에게 말을 하지 않았거나.
그들이 익숙한 언덕을 지나고 있을 때 도랴사는 여관에서 들었던, 밤새도록 전당포에 갇히고 말았던 도둑의 이야기에 한창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이야기를 멈췄다. 분명 그 자리에 있어야 할 헛간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셋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안개 속을 응시하다가, 별안간 그들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스케핑턴 집회가 있던 장소를 향했다.
불은 이미 꺼져버린 지 오래였다. 오직 잿더미와 해골들, 그리고 부서진 무기들만이 남아 있었다. 카시르는 한눈에 오크들의 소행임을 알아차렸다.
마녀들은 각자의 말에서 굴러떨어지듯 잔해들을 향했고 울부짖었다. 셀레피나는 피에 물든 낡은 옷조각을 찾아냈고 곧 미니스테라의 망토에서 떨어진 것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것에 재투성이 얼굴을 묻고는 흐느꼈다. 투랄라는 보스리엘을 소리쳐 불렀지만 잿더미 사이로 들려오는 대답은 찢어지는 바람소리가 전부였다.
"누가 이랬지?" 통곡하는 그녀의 얼굴로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맹세코 오블리비언의 불길을 쏟아내주겠어! 내 아기에게 무슨 짓을 한거야!"
"누구 소행인지 알겠어." 말에서 내린 카시르가 그녀에게 다가오며 조용히 말했다. "이 무기들을 본 적이 있소. 이 악마 같은 종자들이 드웨넌에 무슨 일로 왔나 했는데, 설마하니 놈들이 당신을 찾으러 왔을 줄은 꿈에도 몰랐소. 이건 모운홀드 공작이 고용한 암살자들의 짓이요."
그는 멈춰섰다. 거짓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임기응변에 불과했지만 그녀는 그가 그 자리에서 지어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옛적 공작이 그녀에게 베풀었던 가혹한 처사에 대한 비분은 잠잠해졌지만, 결코 사라진 적은 없었다. 그녀의 불타오르는 눈빛은 척 보기에도 데이드라를 소환하여 모운홀드에 그와 그녀의 복수를 내릴 것임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한술 더 떠서 그는 그들이 들어줄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은 들어주었다. 분노는 소망보다도 더욱 강력한 힘이었다. 그 분노가 잘못된 대상을 향하더라도 말이다.
태양의 황혼에서 계속.
2920년, 첫 번째 시대의 마지막 해
제10권: 서리내림
칼로박 타운웨이 지음
2920년, 서리내림 10일
하이 락의 피리기아스에서
그들 앞에 버티고 선 생물은 의식이 없는 듯 멍한 눈을 깜빡였고, 그 아가리는 제 기능을 하는지 확인하기라도 하는 양 열고 닫히기를 반복했다. 길게 늘어진 침방울이 송곳니 사이에 매달려 있었다. 투랄라는 여지껏 이렇게 거대하고 사람처럼 뒷다리로 걸터앉을 수 있는 종류의 파충류를 본 적이 없었다. 미니스테라가 열광적으로 박수를 쳤다.
"얘야." 그녀가 꺅꺅댔다. "짦은 시간에 이토록 많이 성장했구나. 이 데이드로쓰를 소환할 때 무슨 생각을 했니?"
투랄라는 그녀가 무엇을 생각했었는지 떠올리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자신이 현실의 구조를 넘어 오블리비언으로 들어가, 그녀의 정신적 힘으로 이 혐오스러운 생물체를 끌어내 이 세상에 소환해냈다는 사실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붉은색을 생각했어요." 집중한 투랄라가 대답했다. "그 단순성과 명료성을요. 그리고는- 강하게 소망했고 주문을 외웠어요. 그랬더니 내가 이걸 소환해냈어요."
"소망은 젊은 마녀에게 강한 힘이 된단다." 미니스테라가 말했다. "그리고 이 순간 훌륭하게 조화되었구나. 영혼의 단순한 힘이 없더라면 이 데이드로스는 아무것도 아닐 게야. 네 소망을 쉽게 지울 수 있으려나?"
투랄라는 눈을 감고 소환 해제 주문을 외웠다. 괴물은 여전히 멍한 듯 눈을 껌뻑이면서 햇빛에 삼켜지듯 사라져갔다. 미니스테라는 환호하며 그의 다크 엘프 제자를 끌어안았다.
"아직도 믿기 어렵지만, 넌 이 집회에 온지 한 달하고도 하루밖에 안 됐는데도 다른 여자들보다 훨씬 앞서 나가고 있단다. 투랄라야, 네게는 아주 강력한 피가 흐르는구나. 영혼들을 마치 연인을 어루만지듯 다루고 있어. 언젠가는 네가 이 집회를 이끌게 될 게야. 난 봤어!"
투랄라는 웃었다. 칭찬은 언제나 기쁜 일이었다. 모운홀드 공작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칭찬했었다. 그녀의 가족들은 그녀가 자신들의 명예를 더럽히기 전 그녀의 예의범절을 칭찬했다. 카시르는 그저 동행인에 불과했으므로, 그의 칭찬에는 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미니스테라와 함께 있으면 그녀는 마치 고향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큰언니께서 오래오래 집회를 이끄셔야죠." 투랄라가 말했다.
"나도 그러고 싶단다. 하지만 영혼들은 훌륭한 동료이고 흠잡을 데 없는 이야기꾼들이지만, 시간과 방식에 대해서는 때때로 혼란스러워 하지. 네가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단다. 시간과 방식은 그들에게 별다른 의미가 없으니까." 미니스테라는 오두막 문을 열어 상쾌한 가을 바람이 데이드로스의 고약하기 짝이 없는 악취를 흩도록 했다. "이제, 네가 웨이레스트로 가서 심부름을 좀 해 줬으면 하는구나. 가는 데 일주일, 오는데 일주일이면 충분하단다. 도랴사와 셀레피나를 데려가렴. 우리는 자급자족하려 노력하지만 여기서 기를 수 없는 허브들도 있고, 어느새 그 많던 보석을 다 써버린 것 같구나. 도회지 녀석들이 네가 스케핑턴 집회의 현명한 여성들 중 한 사람이라는 걸 똑똑히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겠고. 너도 악명을 높이는 게 불편보다 이득을 많이 가져온다는 걸 알게 될 거란다."
투랄라는 그녀의 말을 따랐다. 그녀와 그녀의 자매들은 각자의 말에 올랐고, 미니스테라가 다섯 달 된 그녀의 아이 보스리엘을 데려와 그녀의 어머니와 작별의 입맞춤을 하도록 했다. 마녀들은 못된 공작을 아비로 둔 탓에 제국 중심부의 밀림에서 에일리드의 도움으로 태어나게 된 이 작은 던머 젖먹이와 사랑에 빠졌다. 투랄라는 보모들이 목숨을 걸고 그녀의 아이를 지켜줄 것임을 알고 있었다. 수많은 입맞춤과 작별의 손인사를 나눈 끝에 세 명의 젊은 마녀들은 적색과 황색, 그리고 주황색 빛으로 뒤덮인 숲으로 달려나갔다.
2920년 서리내림 12일
하이 락의 드웨넌에서
수요일저녁, '정나미 떨어진 고슴도치' 선술집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중앙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어찌나 맹렬한지, 아크투리안 이단의 처벌을 묘사한 태피스트리의 시체들 같은 불길한 빛을 단골들에게 비추고 있었다. 카시르는 그가 늘 앉던 장소에 사촌과 함께 앉고는 에일 한 병을 주문했다.
"남작을 만나러 갔었어?" 팔리스가 물었다.
"그래. 우르바이우스 궁전에 내 일자리를 마련해 줄 수도 있겠더군." 카시르는 자랑스레 대답했다. "하지만 더 이상은 말할 수 없어. 너도 알잖냐, 나라의 비밀이라든지 그런 것들 말이야. 그런데 오늘 밤은 왜 이리 빌어먹을 인간들로 미어 터지는거야?"
"항구에 다크 엘프들이 탄 배 한 척이 들어왔어. 전쟁터에서 왔다더군. 너만큼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을 소개시켜 주려고 기다렸지."
카시르는 얼굴이 빨개졌지만 어찌저찌 평정을 유지한 채로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그 자식들이 여기는 무슨 일이야? 설마 휴전했다던가?"
"나도 전모는 파악하지 못 했어." 팔리스가 대답했다. "하지만 아마 황제와 비벡이 협상을 재개한 것 같아. 이 친구들은 자기네 투자 상황이 어떻게 굴러갔는지, 그리고 만의 상황이 충분히 안정됐는지 확인하고 싶다더군. 하지만 이야기를 다 들어보려면 그 친구들과 몇 마디 나눌 수밖에 없겠지."
그리고 나서 팔리스는 갑작스럽게 사촌의 팔을 붙잡고는 바의 반대편으로 끌고 갔다. 카시르는 저항하기 위해서 거칠게 몸부림쳐야만 했다. 그 던머 여행자들은 네 개의 테이블에 나눠 앉아 토박이들과 웃고 떠들고 있었다. 퍽이나 쾌활한 젊은이들은 상인에 걸맞게 잘 차려입었고, 술이 들어간 탓인지 꽤 과장된 몸짓을 보이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팔리스가 그들의 대화를 끊으며 말했다. "여기 있는 내 부끄럼쟁이 사촌 카시르도 전쟁에서 살아있는 신 비벡을 위해 싸웠지요."
"내가 들어본 유일한 '카시르'는," 술에 잔뜩 취한 던머 중 한 명이 귀에 걸릴 것 같은 친근한 미소를 띤 채 카시르의 빈손을 잡아 흔들었다. "카시르 휘틀리인데, 비벡께서 역사상 최악의 밀정이라고 하셨지. 그 친구의 덜떨어진 첩보 활동 덕분에 우리는 알드 마락을 잃었다고. 자네 몸을 위해서 하는 말인데, 친구, 부디 자네와 그 친구 둘이 서로 혼동되지 않기를 바라네."
카시르는 웃으며 그 망나니가 테이블을 웃음바다로 만들기 위해 그의 실패를 과장 섞어 풀어내는 걸 듣고만 있었다. 몇몇이 그에게 눈길을 주었지만, 토박이들 중 그 누구도 이야기 속의 멍청이가 여기 서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가장 날카롭게 꽂힌 눈초리는, 그가 위대한 영웅이 되어 드웨넌으로 돌아왔다고 굳게 믿었던 젊은 사촌의 것이었다. 언젠가는 남작의 귀에도 여기저기서 살이 붙어 부풀려진 그의 어리석음이 들어갈 게 뻔했다.
그의 온 영혼을 다해서, 카시르는 '살아있는 신' 비벡을 저주했다.
2920년, 서리내림 21일
시로딜의 임페리얼 시티에서
헤가테 모르와 예술학교에서 여사제들이 걸치는 눈부신 하얀 로브를 입은 코르다는 이번 겨울의 첫 번째 폭풍이 지나갈 때 임페리얼 시티에 도착했다. 구름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과 함께 대로에 모습을 드러낸 아름다운 10대 레드가드 소녀는 호위를 받으며 말을 타고 궁전으로 향하고 있었다. 늘씬하고 마른데다가 거만해 보였던 그녀의 자매와는 달리, 코르다는 작은 키에 넓은 갈색 눈동자를 한 둥근 얼굴의 아가씨였다. 도시 사람들은 약삭빠르게 두 사람을 비교하며 수군덕댔다.
"리자 부인이 처형당한지 한 달도 안 지났는데." 어떤 하녀가 창밖을 엿보며 그녀의 이웃에게 눈짓하고는 투덜댔다.
"그리고 수녀원에서 나온 지 한 달도 안 됐다지." 수긍하는 다른 여자는 스캔들이 퍽 즐거운 모양이었다. "이번 물건은 얼마나 가시려나. 제 언니도 죄가 있던 건 아니었지만, 어떻게 끝장났는지 좀 보라지."
2920년, 서리내림 24일
하이 락의 드웨넌에서
카시르는 항구에 우두커니 서서 때 이른 진눈깨비가 물 위로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배멀미에 약한 자신이 불쌍했다. 이제 탐리엘에서는 동쪽이든 서쪽이든 그를 위한 장소는 없었다. 그의 꼴사나운 밀정 노릇에 대한 비벡의 이야기는 온 여관에 다 퍼지고 말았다. 드웨넌의 남작은 그와의 계약을 해지했다. 대거폴은 물론이고 던스타, 릴모스, 리멘, 그린하트 그리고 어쩌면 아카비르와 요쿠다에서까지 그 일로 그를 비웃을 게 뻔했다. 어쩌면 파도에 콱 뛰어들어 그대로 가라앉아 버리는 게 최선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를 괴롭히는 건 절망이 아닌 분노였다.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무력한 분노였다.
"선생님, 실례합니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는 펄쩍 뛰었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만, 혹시 오늘 밤을 보내기에 충분한 값싼 여관을 추천해주실 수 없을까 해서요."
어깨 너머로 봇짐을 짊어진 젊은 노드가 있었다. 배들 중 한 척에서 방금 내렸음이 분명했다. 몇 주만에 처음으로, 엄청나게 유명한 바보가 아닌 다른 이유로 누군가가 카시르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기분만큼이나 시커먼 이 남성은 도움이 되지는 않았으나, 친절했다.
"스카이림에서 방금 도착했나?" 카시르가 물었다.
"아니오. 지금 그곳으로 향하는 중입니다." 젊은이가 말했다. "저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죠. 저는 센티넬에서 왔고, 그 전에는 스트로스 므'카이, 그 전에는 발렌우드의 우드허스, 그리고 그 전에는 서머셋의 아르테움에 있었습니다. 제 이름은 윌레그입니다."
카시르는 자기소개를 마치고 윌레그와 악수했다. "아르테움에서 왔다고? 혹시 시직인가?"
"아닙니다, 선생님. 더 이상은요."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전 제적되었거든요."
"혹시 데이드라를 소환하는 방법을 아나? 그러니까, 누군가는 살아있는 신이라고까지 칭송하는 어떤 퍽이나 잘나신 양반한테 저주를 걸고 싶은데, 영 재수가 없더군. 남작은 내가 제 눈에 들어오는 것조차도 허락하지 않았지만, 남작부인께서 날 가엾게 여기셔서 소환실을 사용하게 해 주셨지." 카시르는 열변을 토했다. "의식이란 의식은 다 해봤고, 제물까지 바쳤는데 아무것도 튀어나오는 게 없더군."
"그건 제 옛 스승인 소사 실 때문입니다." 윌레그의 대답에서는 약간의 씁쓸함이 느껴졌다. "데이드라의 군주들은 최소한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는 자격이 모자란 자들에게 소환되지 않을 것임을 약속했습니다. 오직 시직만이 그들과 접촉할 수 있고, 그 밖에 몇몇 떠돌이 마법사나 마녀들이나 그럴 수 있죠."
"자네, 방금 마녀라고 했나?"
2920년, 서리내림 29일
하이 락의 피리기아스에서
안개 너머에서 엺은 햇살이 투랄라, 도랴사, 그리고 셀레피나가 말을 몰고 있는 숲을 비추었다. 땅은 얊은 얼음층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짐을 싣고 있었기 때문에 포장이 되지 않은 언덕길은 더 미끄러지기 쉬운 상태였다. 투랄라는 집회로 돌아가는 것에서 오는 즐거움을 억누르려 노력했다. 웨이레스트는 하나의 모험이었고, 그녀는 도회지 사람들이 그녀에게 보내는 두려움과 존경의 시선이 썩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 그녀는 오직 자매들과 그녀의 아이에게 돌아가는 것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돌풍이 그녀의 머리를 앞으로 흩었고 그녀는 앞에 놓인 길을 빼고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어떤 기수가 그녀의 바로 옆으로 말을 몰고서 모습을 나타내기 전까지 아무런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녀가 돌아서서 카시르를 보았을 때, 그녀의 입에서는 오랜 친구를 만난 놀라움과 기쁨의 탄성이 터져나왔다. 그녀가 보기에 그의 안색은 창백했고 퍽 핼쑥했지만, 단지 여정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로 피리기아스에 돌아왔나요?" 그녀가 미소지었다. "드웨넌에서 썩 좋은 대우를 못 받은 모양이죠?"
"그런 셈이지." 카시르가 대답했다. "스케핑턴 집회의 도움이 필요하오."
"우리랑 같이 가요." 투랄라가 말했다. "미니스테라에게 데려다 줄게요."
넷은 길을 재촉했고, 마녀들은 웨이레스트에서의 이야기로 카시르를 즐겁게 해 주었다. 도랴사와 셀레피나에게도 늙은 바빈의 농장을 떠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음이 분명했다. 그녀들은 그곳에서 스케핑턴 마녀들의 딸이나 손녀로 태어났으니까. 일반적인 하이 락 도시에서의 삶은 투랄라에게만큼이나 그들에게도 이국적이었다. 카시르는 말을 아꼈지만, 미소짓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충분히 격려가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들의 이야기에서는 그 자신의 어리석음에 대한 편린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어쩌면 그녀들이 일부러 그에게 말을 하지 않았거나.
그들이 익숙한 언덕을 지나고 있을 때 도랴사는 여관에서 들었던, 밤새도록 전당포에 갇히고 말았던 도둑의 이야기에 한창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이야기를 멈췄다. 분명 그 자리에 있어야 할 헛간이 보이지 않았다. 다른 셋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안개 속을 응시하다가, 별안간 그들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스케핑턴 집회가 있던 장소를 향했다.
불은 이미 꺼져버린 지 오래였다. 오직 잿더미와 해골들, 그리고 부서진 무기들만이 남아 있었다. 카시르는 한눈에 오크들의 소행임을 알아차렸다.
마녀들은 각자의 말에서 굴러떨어지듯 잔해들을 향했고 울부짖었다. 셀레피나는 피에 물든 낡은 옷조각을 찾아냈고 곧 미니스테라의 망토에서 떨어진 것임을 깨달았다. 그녀는 그것에 재투성이 얼굴을 묻고는 흐느꼈다. 투랄라는 보스리엘을 소리쳐 불렀지만 잿더미 사이로 들려오는 대답은 찢어지는 바람소리가 전부였다.
"누가 이랬지?" 통곡하는 그녀의 얼굴로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맹세코 오블리비언의 불길을 쏟아내주겠어! 내 아기에게 무슨 짓을 한거야!"
"누구 소행인지 알겠어." 말에서 내린 카시르가 그녀에게 다가오며 조용히 말했다. "이 무기들을 본 적이 있소. 이 악마 같은 종자들이 드웨넌에 무슨 일로 왔나 했는데, 설마하니 놈들이 당신을 찾으러 왔을 줄은 꿈에도 몰랐소. 이건 모운홀드 공작이 고용한 암살자들의 짓이요."
그는 멈춰섰다. 거짓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임기응변에 불과했지만 그녀는 그가 그 자리에서 지어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옛적 공작이 그녀에게 베풀었던 가혹한 처사에 대한 비분은 잠잠해졌지만, 결코 사라진 적은 없었다. 그녀의 불타오르는 눈빛은 척 보기에도 데이드라를 소환하여 모운홀드에 그와 그녀의 복수를 내릴 것임을 말해주었다. 그리고 한술 더 떠서 그는 그들이 들어줄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은 들어주었다. 분노는 소망보다도 더욱 강력한 힘이었다. 그 분노가 잘못된 대상을 향하더라도 말이다.
태양의 황혼에서 계속.
12. 11권
원문
2920년, 첫 번째 시대의 마지막 해
제11권: 태양의 황혼
칼로박 타운웨이 지음
2920년, 태양의 황혼 2일
모로윈드의 텔 아룬에서
"나이트 마더시여, 누군가가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경비병이 말했다. "코스린기 부족민인데, 기데온의 제국 주둔군 소속인 블랙 마쉬의 주크 경이라더군요."
"내가 그런 인간에게 손톱만큼이라도 관심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이유가 뭐지?" 나이트 마더의 목소리에서는 독과도 같은 달콤함이 묻어났다.
"그자가 시로딜 제국 황후의 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오늘은 꽤 바쁘겠군." 그녀는 미소와 함께 기쁨에 찬 손뼉으로 지시했다. "그를 들여보내라."
주크는 방 안에 들어섰다. 오직 얼굴과 손만 노출된 그의 금속빛 피부는 난롯불과 창 밖에서 번쩍이는 한밤중 폭풍의 번갯불을 받아 번쩍였다. 나이트 마더는 반사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지 알 수 있었다. 고요하고, 아름다우며, 공포의 냄새가 났다.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황후가 보냈다는 편지를 그녀에게 건넸다. 와인을 홀짝이며 그녀는 편지를 열어보았다.
"올해는 지금보다 조금 일찍 모운홀드 공작이 황제를 암살하라고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하더니만," 나이트 마더는 편지를 접었다. "그의 대금은 물속으로 가라앉았고 절대로 도착할 수 없는 신세가 됐지. 어지간히 귀찮게 됐다니까, 특히나 난 이미 내 요원들 중 한 명을 이미 황궁 안에 배치시켰는데 말이야. 내가 왜 죽은 여자한테서 어마어마한 보수를 받을 수 있다고 믿어야 하지?"
"함께 가져왔소." 주크가 짤막히 답했다. "바깥의 마차 안에 있지."
"그러면 이리 가지고 오는 걸로 우리 거래는 끝이야." 나이트 마더가 미소지었다. "황제는 올해가 가기 전에 죽을 거야. 아팔라디스에게 금을 건네주도록 해. 아니면 같이 와인이라도 하겠어?"
주크는 제안을 거절하고는 자리를 떴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미라모어는 검은 태피스트리 뒤에서 소리도 없이 미끄러지듯 모습을 드러냈다. 나이트 마더는 그에게 와인을 한 잔 권했고, 그는 술잔을 받았다.
"저 주크란 놈을 압니다." 미라모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놈이 늙은 황후를 위해서 일한다는 건 몰랐지만요."
"달리 신경 쓸 게 없다면, 네 이야기를 좀 더 하지." 그녀는 그가 신경 쓰는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제 능력을 보여드릴 수 있게 해주십쇼." 미라모어가 말했다. "황제 껀수에 절 넣어주셨으면 합니다. 전 이미 놈의 아들 녀석을 죽였고, 당신께서도 제가 얼마나 몸을 잘 숨길 수 있는지 보셨잖습니까. 어디 저 태피스트리에 주름이 하나라도 생겼다면 말씀해 보십쇼."
나이트 마더는 웃었다. 상황은 제자리를 잘 찾아가고 있었다.
"네가 단검깨나 다룰 줄 안다면야, 그는 보드룸에서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녀는 그에게 해야 할 일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2920년, 태양의 황혼 3일
모로윈드의 모운홀드에서
공작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른 아침이었고, 벌서 나흘째 붉은 안개가 번개를 흩뿌리며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거리를 휩쓴 기괴한 바람이 성의 흉벽에서 그의 깃발을 뜯어냈으며, 그의 백성들을 끊임없이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끔찍한 무언가가 그의 땅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학문에 조예가 깊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징조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의 백성들 또한 그랬다.
"도대체 내 전령들은 언제쯤 세 분께 소식을 전할 수 있느냐?" 그는 성주를 향해 돌아서며 으르렁댔다.
"비벡께서는 멀리 북쪽에서 황제와 휴전 협상을 하고 계십니다." 그의 얼굴과 목소리는 공포로 떨리고 있었다. "아말렉시아, 그리고 소사 실께서는 네크롬에 계십니다. 아마 며칠만 있으면 소식을 접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전령들은 빨랐지만, 오블리비언의 손길 또한 그러했다.
2920년, 태양의 황혼 6일
모로윈드의 보드룸에서
흩날리는 눈 속에서 타오르는 횃불은 마치 다른 세계 같은 느낌을 주었다. 양쪽 진영에서 모여든 병사들은 가장 큰 모닥불 주위에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겨울이 80년 동안을 서로에게 맞섰던 적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있었다. 몇몇 던머 호위병들이 시로딜어를 할 수 있었던 덕분에, 그들은 함께 몸을 녹일 수 있었다. 아름다운 레드가드 처녀가 한창 조약을 협상 중인 천막으로 돌아가기 전 몸을 녹이려 그들 사이를 지나갔을 때, 양 진영을 불문하고 셀 수 없는 눈길이 그녀를 향했다.
황제 레만 3세는 그들이 협상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자리를 뜰 생각밖에 없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이 비벡의 군대에게 패한 곳을 회담 장소로 선정하면 좋은 인상을 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 장소는 그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나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였다. 이 강의 바위는 원래 붉은 빛이라는 수석 고문 베르시듀-셰이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병사들이 흩뿌린 피를 보았다고 확신했다.
"세부적인 협상도 다 끝낸 것 같군." 그의 후궁인 코르다가 따르는 따뜻한 유엘레 한 잔을 들며 그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과 이 장소는 조약을 체결하기에 적절치 못한 것 같소. 이런 역사적인 순간은 제국 황궁에서 장엄하게 이루어져야만 하지. 그대와 함께 아말렉시아도 데려오도록 하시오. 그리고 그 마법사 친구도 함께."
"소사 실입니다." 수석 고문이 속삭였다.
"언제가 좋겠소?" 비벡이 무한한 인내심과 함께 물었다.
"정확히 한 달 뒤가 좋겠군." 아낌없는 웃음과 함께 대답하는 황제의 발은 꼴사납게 질질 끌리고 있었다. "이걸 기념하기 위해 큰 무도회를 열어야겠어. 이제 좀 걷는 게 좋겠군. 이놈의 날씨 때문에 다리가 다 뭉쳤으니. 사랑스러운 나의 코르다, 짐과 함께 걸어주련?"
"물론이지요, 황제 폐하." 그녀는 황제가 천막 입구로 향하는 것을 도왔다.
"황제 폐하, 혹 제가 동행하시는 걸 원하시는지요?" 베르시듀-셰이가 물었다.
"아니면 제가?" 새로이 궁정의 조언자로 위촉된 센첼의 드로'젤 왕이 물었다.
"그럴 필요 없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레만이 답했다.
미라모어는 한 여덟 달 전에 그가 몸을 숨겼던 덤불에 몸을 엎드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땅이 딱딱히 굳은 데다가 눈으로 덮였고, 덤불은 얼음으로 반질거렸다. 그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곧장 오도독거리는 소리가 났다. 모로윈드와 제국 군대가 모닥불 주위로 한데 뭉쳐서 부르는 시끌벅적한 노래가 아니었다면, 그는 절대로 황제와 그 애첩 가까이로 살금살금 다가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절벽 아래 얼어붙은 강물이 꺾이는 곳에서, 얼음으로 반짝이는 나무들 사이에 서 있었다.
미라모어는 조심스럽게 칼집에서 단검을 빼들었다. 그는 나이트 마더에게 자신의 단검 솜씨에 대해서 약간의 과장을 섞었다. 그가 쥘렉 황자의 목을 자를 때 단검을 썼던 건 사실이었지만, 어쨌든 그때 그 애송이는 도저히 반격할 수 없는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쪽 눈이 맛탱이가 가 버린 노친네 하나를 쑤시는 게 무슨 대수라고? 이렇게 쉬운 암살 건수에 무슨 놈의 검술이 필요하겠나?
그가 바라던 순간이 곧 눈앞에 펼쳐졌다. 숲속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 본 여자는 이상하게 생긴 고드름이 있다며 그걸 가지려 뛰어갔고, 황제는 웃음과 함께 뒤에 남았다. 그는 돌아서서 절벽 위를 향했고, 그의 병사들이 노래의 후렴을 부르는 것을 보며 암살자에게 등을 노출했다. 미라모어는 바로 그 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얼어붙은 땅을 딛는 발소리에 주의하며, 그는 앞으로 나서서 일격을 가했다. 거의 끝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일격을 내지르던 팔을 뒤로 잡아당기는 강력한 팔과 함께 목을 파고드는 단검을 느꼈다. 그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황제는 여전히 그의 병사들을 지켜보고 있었고, 덤불 속으로 끌려들어간 미라모어가 그보다 훨씬 솜씨 좋은 손길에 등이 죽 갈라져 움직이지 못 하게 된 것은 절대로 볼 수 없었다.
뿜어져나온 그의 피는 이미 얼어붙은 땅 위에서 굳어가고 있었다. 미라모어는 죽어가며 황제가 그의 애첩과 함께 절벽 위의 야영지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2920년, 태양의 황혼 12일
모로윈드의 모운홀드에서
부글대며 끓어오르는 구름을 향해 솟구치는 영원히 불타오르는 화염만이 모로윈드 성 중앙 안뜰에 남아있는 전부였다. 끈적한 타르질의 연기가 거리를 메웠고 나무나 종이로 된 모든 것들이 타올랐다. 박쥐와 닮은 날개달린 생물들이, 진짜 군대를 만날 수 있을 줄 알고 숨었던 곳에서 탁 트인 곳으로 나온 시민들을 괴롭혔다. 불타오르는 모운홀드 전역에서 그 꼴을 면한 것은 그 주민들의 몸에서 터져나와 땅을 적시고 있는 핏물 뿐이었다.
메이룬스 데이건은 성이 부서지는 것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내가 여기 오지 않을 뻔 했다니." 혼돈 가운데 그의 굉음 같은 목소리가 울려펴졌다. "이 모든 재미를 놓쳤다는 상상만 해도."
하늘에 드리운 그의 검붉은 형상을 꿰뚫은 얇은 바늘과도 같은 빛이 그의 관심을 끌었다. 그 원인을 찾는 데이건의 시선에, 마을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서 있는 한 남자와 여자의 형상이 보였다. 하얀 로브를 걸친 남성이 눈에 들어온 순간, 그는 즉시 놈이 모든 오블리비언의 군주들을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 휴전으로 끌어들인 마법사 소사 실임을 알아보았다.
"네놈이 모운홀드 공작을 찾아왔다면, 놈은 여기에 없다." 메이룬스 데이건이 웃었다. "하지만 다음에 비가 내리면 놈의 육편쯤은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데이드라, 우리라고 해서 널 죽여버릴 수는 없겠지." 아말렉시아의 얼굴은 굳고 단호했다. "하지만 네놈은 곧 그걸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윽고 두 살아있는 신과 오블리비언의 군주는 모운홀드의 폐허에서 맞붙었다.
2920년, 태양의 황혼 17일
모로윈드의 텔 아룬에서
"나이트 마더시여." 경비병이 말했다. "제국 황궁의 요원으로부터 서신이 왔습니다."
나이트 마더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읽어나갔다. 시험은 성공이었다. 미라모어는 훌륭히 탐지되었고 제거되었다. 황제는 완전히 노출되었다. 나이트 마더는 곧바로 응답했다.
2920년, 태양의 황혼 18일
모로윈드의 발모라에서
소사 실의 엄숙하고 속을 읽어내기 어려운 얼굴이 그의 궁전 앞 대광장에서 비벡을 맞이했다. 비벡은 보드룸의 천막에서 그 싸움 소식을 듣자마자,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위험천만한 다고스-우르 사이에 길을 뚫고는 밤낮으로 수 마일을 달려왔다. 남쪽으로 향하는 그의 여정 내내, 비벡은 소용돌이치는 붉은 구름을 볼 수 있었고 전투가 날마다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니시스에서 그는 발모라에서 만나자는 소식을 가져온 소사 실의 전령과 만났다.
"아말렉시아는 어디에 있나?"
"안에." 소사 실의 목소리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길게 죽 찢어진 흉터가 그의 턱을 지나고 있었다. "그녀는 심하게 다쳤지만, 메이룬스 데이건도 몇 달은 오블리비언에서 돌아올 수 없겠지."
아말렉시아는 비단 침대에 누워 있었고, 비벡의 개인 치료사들이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입술에 이르기까지 돌처럼 회색빛이었고, 그녀의 몸을 감싼 붕대는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비벡은 그녀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알마렉시아의 입이 말없이 움직였다. 그녀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녀는 폭풍치는 화염 안에서 다시 메이룬스 데이건과 싸우고 있었다. 그녀의 주위는 온통 부서진 성의 시커먼 잔해들이었고, 밤하늘에서는 섬광이 번쩍였다. 데이드라의 발톱이 그녀의 배를 파고들었고, 알마렉시아가 놈의 목을 조르는 동안 그녀의 혈관 속으로 독을 퍼뜨렸다. 그녀가 쓰러진 그녀의 적 옆으로 떨어져 내렸을 때, 그녀는 화염에 삼켜지고 있는 성이 모운홀드 성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곳은 제국의 황궁이었다.
2920년, 태양의 황혼 24일
시로딜의 임페리얼 시티에서
겨울바람이 불어와 제국 황궁의 창문과 유리 돔들을 두들겼다. 떨리는 빛이 다채로운 모양으로 조각상들을 비추었다.
황제는 그의 막료들에게 축전을 위해 연회와 무도회를 준비할 것을 명했다. 이것들이 그가 전쟁보다도 훨씬 즐기던 것들이었다. 드로'젤 왕이 접대를 감독했고, 그는 이 일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황제 자신은 저녁 만찬의 세부 내용을 조정하고 있었다. 잘 구운 네브피쉬, 야채 호박, 크림 수프, 버터를 바른 헬레락, 코드스크룸, 아스픽에 넣은 혀 요리...
수석 고문 베르시듀-셰이도 몇 가지 제안을 했지만, 아카비르인의 입맛은 매우 독특했다.
밤이 내렸고, 코르다 부인이 황제의 방으로 들어가 황제의 수청을 들었다.
저녁별에서 완결.
2920년, 첫 번째 시대의 마지막 해
제11권: 태양의 황혼
칼로박 타운웨이 지음
2920년, 태양의 황혼 2일
모로윈드의 텔 아룬에서
"나이트 마더시여, 누군가가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경비병이 말했다. "코스린기 부족민인데, 기데온의 제국 주둔군 소속인 블랙 마쉬의 주크 경이라더군요."
"내가 그런 인간에게 손톱만큼이라도 관심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이유가 뭐지?" 나이트 마더의 목소리에서는 독과도 같은 달콤함이 묻어났다.
"그자가 시로딜 제국 황후의 편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오늘은 꽤 바쁘겠군." 그녀는 미소와 함께 기쁨에 찬 손뼉으로 지시했다. "그를 들여보내라."
주크는 방 안에 들어섰다. 오직 얼굴과 손만 노출된 그의 금속빛 피부는 난롯불과 창 밖에서 번쩍이는 한밤중 폭풍의 번갯불을 받아 번쩍였다. 나이트 마더는 반사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그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지 알 수 있었다. 고요하고, 아름다우며, 공포의 냄새가 났다.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황후가 보냈다는 편지를 그녀에게 건넸다. 와인을 홀짝이며 그녀는 편지를 열어보았다.
"올해는 지금보다 조금 일찍 모운홀드 공작이 황제를 암살하라고 구미가 당기는 제안을 하더니만," 나이트 마더는 편지를 접었다. "그의 대금은 물속으로 가라앉았고 절대로 도착할 수 없는 신세가 됐지. 어지간히 귀찮게 됐다니까, 특히나 난 이미 내 요원들 중 한 명을 이미 황궁 안에 배치시켰는데 말이야. 내가 왜 죽은 여자한테서 어마어마한 보수를 받을 수 있다고 믿어야 하지?"
"함께 가져왔소." 주크가 짤막히 답했다. "바깥의 마차 안에 있지."
"그러면 이리 가지고 오는 걸로 우리 거래는 끝이야." 나이트 마더가 미소지었다. "황제는 올해가 가기 전에 죽을 거야. 아팔라디스에게 금을 건네주도록 해. 아니면 같이 와인이라도 하겠어?"
주크는 제안을 거절하고는 자리를 떴다.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마자, 미라모어는 검은 태피스트리 뒤에서 소리도 없이 미끄러지듯 모습을 드러냈다. 나이트 마더는 그에게 와인을 한 잔 권했고, 그는 술잔을 받았다.
"저 주크란 놈을 압니다." 미라모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놈이 늙은 황후를 위해서 일한다는 건 몰랐지만요."
"달리 신경 쓸 게 없다면, 네 이야기를 좀 더 하지." 그녀는 그가 신경 쓰는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제 능력을 보여드릴 수 있게 해주십쇼." 미라모어가 말했다. "황제 껀수에 절 넣어주셨으면 합니다. 전 이미 놈의 아들 녀석을 죽였고, 당신께서도 제가 얼마나 몸을 잘 숨길 수 있는지 보셨잖습니까. 어디 저 태피스트리에 주름이 하나라도 생겼다면 말씀해 보십쇼."
나이트 마더는 웃었다. 상황은 제자리를 잘 찾아가고 있었다.
"네가 단검깨나 다룰 줄 안다면야, 그는 보드룸에서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녀는 그에게 해야 할 일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2920년, 태양의 황혼 3일
모로윈드의 모운홀드에서
공작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른 아침이었고, 벌서 나흘째 붉은 안개가 번개를 흩뿌리며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거리를 휩쓴 기괴한 바람이 성의 흉벽에서 그의 깃발을 뜯어냈으며, 그의 백성들을 끊임없이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끔찍한 무언가가 그의 땅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학문에 조예가 깊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징조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의 백성들 또한 그랬다.
"도대체 내 전령들은 언제쯤 세 분께 소식을 전할 수 있느냐?" 그는 성주를 향해 돌아서며 으르렁댔다.
"비벡께서는 멀리 북쪽에서 황제와 휴전 협상을 하고 계십니다." 그의 얼굴과 목소리는 공포로 떨리고 있었다. "아말렉시아, 그리고 소사 실께서는 네크롬에 계십니다. 아마 며칠만 있으면 소식을 접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전령들은 빨랐지만, 오블리비언의 손길 또한 그러했다.
2920년, 태양의 황혼 6일
모로윈드의 보드룸에서
흩날리는 눈 속에서 타오르는 횃불은 마치 다른 세계 같은 느낌을 주었다. 양쪽 진영에서 모여든 병사들은 가장 큰 모닥불 주위에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겨울이 80년 동안을 서로에게 맞섰던 적들을 한자리에 모으고 있었다. 몇몇 던머 호위병들이 시로딜어를 할 수 있었던 덕분에, 그들은 함께 몸을 녹일 수 있었다. 아름다운 레드가드 처녀가 한창 조약을 협상 중인 천막으로 돌아가기 전 몸을 녹이려 그들 사이를 지나갔을 때, 양 진영을 불문하고 셀 수 없는 눈길이 그녀를 향했다.
황제 레만 3세는 그들이 협상을 시작하기도 전부터 자리를 뜰 생각밖에 없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그는 자신이 비벡의 군대에게 패한 곳을 회담 장소로 선정하면 좋은 인상을 줄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이 장소는 그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나쁜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였다. 이 강의 바위는 원래 붉은 빛이라는 수석 고문 베르시듀-셰이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의 병사들이 흩뿌린 피를 보았다고 확신했다.
"세부적인 협상도 다 끝낸 것 같군." 그의 후궁인 코르다가 따르는 따뜻한 유엘레 한 잔을 들며 그가 말했다. "하지만 지금 이 시간과 이 장소는 조약을 체결하기에 적절치 못한 것 같소. 이런 역사적인 순간은 제국 황궁에서 장엄하게 이루어져야만 하지. 그대와 함께 아말렉시아도 데려오도록 하시오. 그리고 그 마법사 친구도 함께."
"소사 실입니다." 수석 고문이 속삭였다.
"언제가 좋겠소?" 비벡이 무한한 인내심과 함께 물었다.
"정확히 한 달 뒤가 좋겠군." 아낌없는 웃음과 함께 대답하는 황제의 발은 꼴사납게 질질 끌리고 있었다. "이걸 기념하기 위해 큰 무도회를 열어야겠어. 이제 좀 걷는 게 좋겠군. 이놈의 날씨 때문에 다리가 다 뭉쳤으니. 사랑스러운 나의 코르다, 짐과 함께 걸어주련?"
"물론이지요, 황제 폐하." 그녀는 황제가 천막 입구로 향하는 것을 도왔다.
"황제 폐하, 혹 제가 동행하시는 걸 원하시는지요?" 베르시듀-셰이가 물었다.
"아니면 제가?" 새로이 궁정의 조언자로 위촉된 센첼의 드로'젤 왕이 물었다.
"그럴 필요 없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레만이 답했다.
미라모어는 한 여덟 달 전에 그가 몸을 숨겼던 덤불에 몸을 엎드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땅이 딱딱히 굳은 데다가 눈으로 덮였고, 덤불은 얼음으로 반질거렸다. 그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곧장 오도독거리는 소리가 났다. 모로윈드와 제국 군대가 모닥불 주위로 한데 뭉쳐서 부르는 시끌벅적한 노래가 아니었다면, 그는 절대로 황제와 그 애첩 가까이로 살금살금 다가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절벽 아래 얼어붙은 강물이 꺾이는 곳에서, 얼음으로 반짝이는 나무들 사이에 서 있었다.
미라모어는 조심스럽게 칼집에서 단검을 빼들었다. 그는 나이트 마더에게 자신의 단검 솜씨에 대해서 약간의 과장을 섞었다. 그가 쥘렉 황자의 목을 자를 때 단검을 썼던 건 사실이었지만, 어쨌든 그때 그 애송이는 도저히 반격할 수 없는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쪽 눈이 맛탱이가 가 버린 노친네 하나를 쑤시는 게 무슨 대수라고? 이렇게 쉬운 암살 건수에 무슨 놈의 검술이 필요하겠나?
그가 바라던 순간이 곧 눈앞에 펼쳐졌다. 숲속 깊은 곳에서 무엇인가 본 여자는 이상하게 생긴 고드름이 있다며 그걸 가지려 뛰어갔고, 황제는 웃음과 함께 뒤에 남았다. 그는 돌아서서 절벽 위를 향했고, 그의 병사들이 노래의 후렴을 부르는 것을 보며 암살자에게 등을 노출했다. 미라모어는 바로 그 순간이 왔음을 직감했다. 얼어붙은 땅을 딛는 발소리에 주의하며, 그는 앞으로 나서서 일격을 가했다. 거의 끝이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일격을 내지르던 팔을 뒤로 잡아당기는 강력한 팔과 함께 목을 파고드는 단검을 느꼈다. 그는 비명조차 지를 수 없었다. 황제는 여전히 그의 병사들을 지켜보고 있었고, 덤불 속으로 끌려들어간 미라모어가 그보다 훨씬 솜씨 좋은 손길에 등이 죽 갈라져 움직이지 못 하게 된 것은 절대로 볼 수 없었다.
뿜어져나온 그의 피는 이미 얼어붙은 땅 위에서 굳어가고 있었다. 미라모어는 죽어가며 황제가 그의 애첩과 함께 절벽 위의 야영지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2920년, 태양의 황혼 12일
모로윈드의 모운홀드에서
부글대며 끓어오르는 구름을 향해 솟구치는 영원히 불타오르는 화염만이 모로윈드 성 중앙 안뜰에 남아있는 전부였다. 끈적한 타르질의 연기가 거리를 메웠고 나무나 종이로 된 모든 것들이 타올랐다. 박쥐와 닮은 날개달린 생물들이, 진짜 군대를 만날 수 있을 줄 알고 숨었던 곳에서 탁 트인 곳으로 나온 시민들을 괴롭혔다. 불타오르는 모운홀드 전역에서 그 꼴을 면한 것은 그 주민들의 몸에서 터져나와 땅을 적시고 있는 핏물 뿐이었다.
메이룬스 데이건은 성이 부서지는 것을 바라보며 미소지었다.
"내가 여기 오지 않을 뻔 했다니." 혼돈 가운데 그의 굉음 같은 목소리가 울려펴졌다. "이 모든 재미를 놓쳤다는 상상만 해도."
하늘에 드리운 그의 검붉은 형상을 꿰뚫은 얇은 바늘과도 같은 빛이 그의 관심을 끌었다. 그 원인을 찾는 데이건의 시선에, 마을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서 있는 한 남자와 여자의 형상이 보였다. 하얀 로브를 걸친 남성이 눈에 들어온 순간, 그는 즉시 놈이 모든 오블리비언의 군주들을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 휴전으로 끌어들인 마법사 소사 실임을 알아보았다.
"네놈이 모운홀드 공작을 찾아왔다면, 놈은 여기에 없다." 메이룬스 데이건이 웃었다. "하지만 다음에 비가 내리면 놈의 육편쯤은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데이드라, 우리라고 해서 널 죽여버릴 수는 없겠지." 아말렉시아의 얼굴은 굳고 단호했다. "하지만 네놈은 곧 그걸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이윽고 두 살아있는 신과 오블리비언의 군주는 모운홀드의 폐허에서 맞붙었다.
2920년, 태양의 황혼 17일
모로윈드의 텔 아룬에서
"나이트 마더시여." 경비병이 말했다. "제국 황궁의 요원으로부터 서신이 왔습니다."
나이트 마더는 조심스럽게 편지를 읽어나갔다. 시험은 성공이었다. 미라모어는 훌륭히 탐지되었고 제거되었다. 황제는 완전히 노출되었다. 나이트 마더는 곧바로 응답했다.
2920년, 태양의 황혼 18일
모로윈드의 발모라에서
소사 실의 엄숙하고 속을 읽어내기 어려운 얼굴이 그의 궁전 앞 대광장에서 비벡을 맞이했다. 비벡은 보드룸의 천막에서 그 싸움 소식을 듣자마자, 눈에 보이지도 않을 속도로, 위험천만한 다고스-우르 사이에 길을 뚫고는 밤낮으로 수 마일을 달려왔다. 남쪽으로 향하는 그의 여정 내내, 비벡은 소용돌이치는 붉은 구름을 볼 수 있었고 전투가 날마다 계속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니시스에서 그는 발모라에서 만나자는 소식을 가져온 소사 실의 전령과 만났다.
"아말렉시아는 어디에 있나?"
"안에." 소사 실의 목소리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길게 죽 찢어진 흉터가 그의 턱을 지나고 있었다. "그녀는 심하게 다쳤지만, 메이룬스 데이건도 몇 달은 오블리비언에서 돌아올 수 없겠지."
아말렉시아는 비단 침대에 누워 있었고, 비벡의 개인 치료사들이 그녀를 살피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입술에 이르기까지 돌처럼 회색빛이었고, 그녀의 몸을 감싼 붕대는 온통 피로 물들어 있었다. 비벡은 그녀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알마렉시아의 입이 말없이 움직였다. 그녀는 꿈을 꾸고 있었다.
그녀는 폭풍치는 화염 안에서 다시 메이룬스 데이건과 싸우고 있었다. 그녀의 주위는 온통 부서진 성의 시커먼 잔해들이었고, 밤하늘에서는 섬광이 번쩍였다. 데이드라의 발톱이 그녀의 배를 파고들었고, 알마렉시아가 놈의 목을 조르는 동안 그녀의 혈관 속으로 독을 퍼뜨렸다. 그녀가 쓰러진 그녀의 적 옆으로 떨어져 내렸을 때, 그녀는 화염에 삼켜지고 있는 성이 모운홀드 성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그곳은 제국의 황궁이었다.
2920년, 태양의 황혼 24일
시로딜의 임페리얼 시티에서
겨울바람이 불어와 제국 황궁의 창문과 유리 돔들을 두들겼다. 떨리는 빛이 다채로운 모양으로 조각상들을 비추었다.
황제는 그의 막료들에게 축전을 위해 연회와 무도회를 준비할 것을 명했다. 이것들이 그가 전쟁보다도 훨씬 즐기던 것들이었다. 드로'젤 왕이 접대를 감독했고, 그는 이 일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황제 자신은 저녁 만찬의 세부 내용을 조정하고 있었다. 잘 구운 네브피쉬, 야채 호박, 크림 수프, 버터를 바른 헬레락, 코드스크룸, 아스픽에 넣은 혀 요리...
수석 고문 베르시듀-셰이도 몇 가지 제안을 했지만, 아카비르인의 입맛은 매우 독특했다.
밤이 내렸고, 코르다 부인이 황제의 방으로 들어가 황제의 수청을 들었다.
저녁별에서 완결.
13. 12권
원문
2920년, 첫 번째 시대의 마지막 해
제12권: 저녁별
칼로박 타운웨이 지음
2920년, 저녁별 1일
모로윈드의 발모라에서
겨울 아침의 태양이 거미줄 같은 얼음이 낀 창문 너머에서 반짝였고, 아말렉시아는 눈을 떴다. 가장 나이 든 치료사가 그녀의 머리에서 젖은 수건을 훔쳤고,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침대 옆에서는 비벡이 잠들어 있었다. 치료사가 옆에 있던 찬장으로 서둘러 달려가 물병을 들고 돌아왔다.
"여신이시여, 기분은 어떠신지요?" 치료사가 물었다.
"아주 오랜 시간을 잠들어 있던 것 같구나." 아말렉시아가 답했다.
"그러셨습니다. 15일이 지났지요." 치료사는 비벡의 팔을 흔들었다. "성하, 일어나시지요. 여신님께서 말문을 트셨습니다."
흠칫 놀라 깨어난 비벡은 아말렉시아가 살아서 깨어난 것을 보고는 활짝 웃었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손을 잡았다. 마침내 그녀의 살결에 온기가 다시 돌아와 있었다.
아말렉시아는 평화롭게 숨을 내쉬는 듯 하다가 별안간 손을 잡아챘다. "소사 실은-"
"그는 멀쩡히 잘 살아 있어." 비벡이 대답했다. "어딘가에서 또다시 그 친구의 기계장치 중 하나에 매달려 있겠지. 그도 여기 머무를 생각이었지만, 그의 신비한 마법으로 당신을 위해 그것 이상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
그때 성주가 문가에 모습을 나타냈다. "성하,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마는 어젯밤 늦게 가장 빠른 전령이 임페리얼 시티로 떠났음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전령?" 아말렉시아가 물었다. "비벡, 무슨 일이 있었지?"
"내가 그곳으로 가서 6일에 황제와 함께 조약에 서명을 할 계획이었지만, 그걸 연기하자는 소식을 전했어."
"당신이 여기서 날 위해 할 수 있는 더 좋은 일은 없어." 아말렉시아는 온전히 자기 힘으로 몸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당신이 그 조약에 서명하지 않는다면, 모로윈드는 다시 전쟁에 휘말리게 될 거야. 어쩌면 80년을 더 끌게 될지도 모르지. 오늘 당장 호위를 거느리고 서두른다면, 아마 하루나 이틀이면 임페리얼 시티에 도착할 수 있어."
"내가 정말 여기에 없어도 괜찮겠어?" 비벡이 물었다.
"모로윈드가 당신을 더 필요로 하고 있으니까."
2920년, 저녁별 6일
시로딜의 임페리얼 시티에서
황제 레만 3세는 옥좌에 앉아 알현실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은으로 된 리본이 서까래 사이로 매달려 있었고, 각 모퉁이마다 달콤한 허브들이 끓어오르는 향로가 타올랐으며, 공중에서는 피안도네아 호랑나비가 저들끼리 노래하며 춤추고 있었다. 횃불에 불이 붙고 하인들이 부채질을 시작하자, 방 전체가 일렁이는 환상의 세계로 변한 것 같았다. 그는 벌써부터 주방에서 풍겨오는 향신료와 구이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머리장식과 세이치의 보석으로 몸단장한 수석 고문 베르시듀-셰이와 그의 아들인 사비리엔-초락이 방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그들의 금빛 얼굴에서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는데 이는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럼에도 황제는 그의 믿음직한 조언가를 열의에 찬 모습으로 환대했다.
"이거면 저 미개한 다크 엘프들도 깊은 인상을 받겠지." 그가 웃었다. "저들이 언제쯤 도착할 것 같나?"
"지금 막 비벡으로부터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수석 고문이 사뭇 엄숙히 대답했다. "제 생각에는 황제 폐하께서 혼자 만나보심이 적절할 듯 합니다."
황제는 웃음을 멈췄지만 그의 시종들을 향해 고갯짓하여 물러가도록 했다. 그때 문이 열렸고 다름아닌 코르다 부인이 손에 양피지를 쥐고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뒤편의 문을 닫았으나, 고개를 들어 황제의 얼굴을 쳐다보지는 않았다.
"전령이 짐의 후궁에게 서신을 맡겼다고?" 편지를 받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레만이 못 믿겠다는 투로 말했다. "서신을 상신하는 방식 치고는 상당히 정통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서신 자체는 상당히 정통에 따른 것이었는걸요." 코르다는 황제의 멀쩡한 한쪽 눈을 올려다보았다. 눈으로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짤막한 동작으로, 그녀는 편지를 황제의 턱 바로 아래로 가져갔다. 그의 눈은 휘둥그레졌고 피가 텅 빈 양피지 아래로 뿜어져 나왔다. 작은 검은 표식만이, 모락 통의 표식만이 남아 있는 백지가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지자 그 뒤에 감춰져 있었던 단검이 드러났다. 그녀는 단검을 비틀어 황제의 목을 뼛속 깊이 도려냈다. 그는 소리 없는 헐떡임과 함께 바닥으로 무너져내렸다.
"얼마나 필요하지?" 사비리엔-초락이 물었다.
"5분." 코르다는 그녀의 손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만약 10분을 벌어줄 수 있다면 두 배로 고맙겠어."
"아주 좋아." 알현실에서 달려나가는 코르다의 뒤를 향해 수석 고문이 말했다. "아카비르였다면 참 좋았을 것을. 여자애 치고는 칼 다루는 솜씨가 참으로 인상적이야."
"저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자리를 옮기겠습니다." 사비리엔-초락이 오직 황제가 가장 신뢰하는 이들만이 알 수 있는 비밀 통로로 모습을 감추며 말했다.
"친애하는 황제 폐하, 한 1년 전을 기억하시는지요." 수석 고문은 죽어가는 사람을 향해 미소를 보냈다. "언젠가 제게 '그대들 아카비르인들이 현란한 기술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우리가 단 한 번 공격에 성공한다면, 그대들도 그걸로 끝'임을 기억하라고 하셨지요. 보시다시피, 저는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황제는 피를 토하며 어떻게든 한 마디를 내뱉었다. "뱀..."
"황제 폐하, 저는 뱀입니다. 안에서든 밖에서든 말이지요. 하지만 저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답니다. 비벡이 전령을 보냈다는 건 정말이었으니까요. 그가 도착하는 게 조금 늦을 것 같다고 하더이다." 수석 고문은 비밀 통로 뒤로 사라지기 전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음식은 절대로 상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탐리엘의 황제는 장엄한 무도회를 위해 장식된 그의 텅 빈 알현실에서, 그 스스로의 피가 고여 만들어진 웅덩이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15분 뒤 그의 호위병들에게 발견되었다. 코르다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2920년, 저녁별 8일
시로딜의 케어 수비오에서
비벡과 그의 수행원들을 첫 번째로 맞이한 이는, 숲을 지나는 도로 사정에 대해 아낌없는 사과를 건네는 글라비우스 경이었다. 빌라를 둘러싼 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은 불타오르는 방울 장식이 매달린 끈으로 치장되었고, 부드럽지만 차가운 밤바람에 일렁였다. 비벡은 안에서 흘러나오는 간단한 만찬과 구슬픈 곡조를 느낄 수 있었다. 전통적인 아카비르식 겨울 축가였다.
베르시듀-셰이가 정문에서 비벡을 맞이했다.
"그대가 임페리얼 시티로 들어서기 전 소식을 전할 수 있어 다행이군요." 수석 고문이 그의 손님을 넓고 따뜻한 응접실로 안내하며 말했다. "상황이 어렵게 바뀌었는지라, 의회에서 우리 일을 마무리짓기에는 적절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계승자는 아무도 없단 말이오?" 비벡이 물었다.
"황위를 놓고 다투는 먼 사촌들을 제외하면, 공식적으로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처리하는 동안에는, 일시적으로나마 귀족들이 내가 선왕의 지위를 대신할 것을 결정했지요." 베르시듀-셰이는 시종들에게 편안한 의자 두 개를 난로 앞으로 가져올 것을 지시했다. "지금 당장 조약에 서명하고 공표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먼저 요기를 하는 게 좋겠습니까?"
"그대가 황제의 조약을 추진하겠다고?"
"난 황제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추진할 생각입니다." 수석 고문이 대답했다.
2920년 저녁별 14일
모로윈드의 텔 아룬에서
길에서 잔뜩 먼지를 뒤집어쓴 코르다가 나이트 마더의 팔로 날아들었다. 잠시 동안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았고, 나이트 마더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이마에 입맞춤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소맷자락에서 편지를 꺼내 코르다에게 주었다.
"이게 뭔가요?" 코르다가 물었다.
"네 전문성에 수석 고문이 기쁨을 표하는 편지란다." 나이트 마더가 대답했다. "그는 반드시 우리에게 대가를 치르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미 답신을 돌려 보냈단다. 황후가 남편의 죽음에 대해 충분히 대금을 치렀다고 했지. 메팔라께서는 우리가 필요 이상의 욕심을 품는 걸 바라지 않으신단다. 같은 살인에 두 번의 대가를 받을 수 없는 법이라고, 그렇게 써서 보냈지."
"그가 리자를 죽였어요. 내 자매를." 코르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칼을 꽂는 건 네가 되어야 했지."
"이제 저는 어디로 가게 되나요?"
"우리의 거룩한 일꾼들이 성전을 계속하기에는 너무 눈에 띄게 되었다면 언제든, 우리는 그들을 보우노라라는 섬으로 보낸단다. 배를 타고 채 한 달이 안 되는 거리고, 기쁜 마음으로 네게 꼭 알맞는 성역을 예비해 두었단다." 나이트 마더는 그녀의 눈물에 입을 맞췄다. "나의 아이야, 그곳에서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 거란다. 그리고 네가 최후의 순간에 평안과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임을 안단다."
2920년, 저녁별 19일
모로윈드의 모운홀드에서
알마렉시아는 마을의 재건을 감독하고 있었다. 검게 물든 옛 건물들의 흩어진 잔해에 새로이 자리잡은 건물들의 골조 사이를 걸으며, 그녀는 주민들의 정신이 참으로 고무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식물조차도 놀라운 회복력을 보이고 있었다. 한때 중심가에 줄지어 있던 컴베리와 루브러시 관목들의 잔해들 사이에서는 벌써부터 생명이 움트고 있었다. 그녀는 그 고동을 느낄 수 있었다. 봄날이 오면 암흑을 뚫고 녹음이 피어날 것이다.
북쪽에서 내려와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한 공작의 후계자는 괄목할 지성과 던머 특유의 불굴의 용기를 가진 젊은이였다. 이 땅은 그저 살아남는 것 이상으로, 더욱 강해지고 더욱 넓어질 것이다.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현실보다 다가올 미래가 훨씬 굳셀 것임을 느꼈다.
그중에서도 그녀가 가장 확신하는 것은, 모운홀드는 한 여신에게 있어서 영원한 고향이라는 것이었다.
2920년, 저녁별 22일
시로딜의 임페리얼 시티에서
"시로딜의 혈통은 끊기고 말았다." 황궁 발코니의 연단에서 수석 고문은 모여든 관중들을 향해 공표했다. "하지만 제국은 살아있다. 친애하는 황제 폐하께서 폐하의 길고도 빛나는 치세 동안 가장 믿고 의지하셨던 귀족들은, 황제 폐하의 먼 친척들이 제위에 오르기에는 자질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레만 3세의 공정하고도 믿음직한 동지로서, 내가 황제 폐하의 성명을 이어갈 책임을 지게 되었음이 결정되었다."
아카비르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자신의 말이 대중들의 귓가에 확실히 울려퍼지게끔 하였다. 그들은 그저 침묵을 유지한 채로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빗물이 도로를 따라 흘러내렸고, 태양은 겨울의 폭풍 사이로 아주 잠깐 고개를 내미는 데 그쳤다.
"내가 '황제'의 지위에 오를 생각이 없음을 확실히 밝혀두겠다." 그가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여태까지 그대들의 해안에서 친절한 환영을 받았던 수석 고문 베르시듀-셰이였고, 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남을 것이다. 나를 받아준 고향을 지키는 것이 나의 의무가 될 것이며, 나 이상으로 이 의무를 짊어지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는 누군가가 나타나기 전까지, 이 일에 몸과 마음을 다할 것임을 맹세하겠다. 나의 첫 번째 행보는, 이 역사적인 순간을 기념하여 다음 샛별 1일을 기점으로 우리가 '제2시대' 원년에 진입하였음을 선언하는 바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우리에게서 황가가 떠나갔음을 애도하고, 앞으로의 나날을 생각할 것이다."
단 한 사람만이 이 모든 말에 박수를 치고 있었다. 센첼의 드로'젤 왕은 이 모든 일들이 탐리엘에서 역사상 가장 좋은 일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이, 그는 단단히 미친 작자였다.
2920년 저녁별 31일
모로윈드의 에본하트에서
도시 아래에서 소사 실이 그의 비전 시계 장치와 함께 미래를 단조하고 있는 매캐한 카타콤에서는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오랜 시간 믿음직스럽던 기어에서 기름 방울이 새어나오더니 곧 튀어올랐다. 곧바로 마법사의 주의가 그것과 어떤 동작을 일으킨 체인을 향해 쏠렸다. 파이프가 왼쪽으로 0.5인치 움직였다. 접지면이 튀어올랐다. 코일이 제 스스로 감기더니 반대 방향으로 돌기 시작했다. 천 년 동안을 좌-우로 째깍이던 피스톤은 급작스레 우-좌로 반전되었다. 부서진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모든 게 바뀌었다.
"지금 당장 고치긴 힘들겠군." 마술사가 조용히 읊조렸다.
그는 천정의 균열을 통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밤중이었다. 제2시대가, 혼돈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2920년, 첫 번째 시대의 마지막 해
제12권: 저녁별
칼로박 타운웨이 지음
2920년, 저녁별 1일
모로윈드의 발모라에서
겨울 아침의 태양이 거미줄 같은 얼음이 낀 창문 너머에서 반짝였고, 아말렉시아는 눈을 떴다. 가장 나이 든 치료사가 그녀의 머리에서 젖은 수건을 훔쳤고,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침대 옆에서는 비벡이 잠들어 있었다. 치료사가 옆에 있던 찬장으로 서둘러 달려가 물병을 들고 돌아왔다.
"여신이시여, 기분은 어떠신지요?" 치료사가 물었다.
"아주 오랜 시간을 잠들어 있던 것 같구나." 아말렉시아가 답했다.
"그러셨습니다. 15일이 지났지요." 치료사는 비벡의 팔을 흔들었다. "성하, 일어나시지요. 여신님께서 말문을 트셨습니다."
흠칫 놀라 깨어난 비벡은 아말렉시아가 살아서 깨어난 것을 보고는 활짝 웃었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손을 잡았다. 마침내 그녀의 살결에 온기가 다시 돌아와 있었다.
아말렉시아는 평화롭게 숨을 내쉬는 듯 하다가 별안간 손을 잡아챘다. "소사 실은-"
"그는 멀쩡히 잘 살아 있어." 비벡이 대답했다. "어딘가에서 또다시 그 친구의 기계장치 중 하나에 매달려 있겠지. 그도 여기 머무를 생각이었지만, 그의 신비한 마법으로 당신을 위해 그것 이상의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어."
그때 성주가 문가에 모습을 나타냈다. "성하,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마는 어젯밤 늦게 가장 빠른 전령이 임페리얼 시티로 떠났음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전령?" 아말렉시아가 물었다. "비벡, 무슨 일이 있었지?"
"내가 그곳으로 가서 6일에 황제와 함께 조약에 서명을 할 계획이었지만, 그걸 연기하자는 소식을 전했어."
"당신이 여기서 날 위해 할 수 있는 더 좋은 일은 없어." 아말렉시아는 온전히 자기 힘으로 몸을 끌어당겼다. "하지만 당신이 그 조약에 서명하지 않는다면, 모로윈드는 다시 전쟁에 휘말리게 될 거야. 어쩌면 80년을 더 끌게 될지도 모르지. 오늘 당장 호위를 거느리고 서두른다면, 아마 하루나 이틀이면 임페리얼 시티에 도착할 수 있어."
"내가 정말 여기에 없어도 괜찮겠어?" 비벡이 물었다.
"모로윈드가 당신을 더 필요로 하고 있으니까."
2920년, 저녁별 6일
시로딜의 임페리얼 시티에서
황제 레만 3세는 옥좌에 앉아 알현실을 살펴보고 있었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은으로 된 리본이 서까래 사이로 매달려 있었고, 각 모퉁이마다 달콤한 허브들이 끓어오르는 향로가 타올랐으며, 공중에서는 피안도네아 호랑나비가 저들끼리 노래하며 춤추고 있었다. 횃불에 불이 붙고 하인들이 부채질을 시작하자, 방 전체가 일렁이는 환상의 세계로 변한 것 같았다. 그는 벌써부터 주방에서 풍겨오는 향신료와 구이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머리장식과 세이치의 보석으로 몸단장한 수석 고문 베르시듀-셰이와 그의 아들인 사비리엔-초락이 방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왔다. 그들의 금빛 얼굴에서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는데 이는 정말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럼에도 황제는 그의 믿음직한 조언가를 열의에 찬 모습으로 환대했다.
"이거면 저 미개한 다크 엘프들도 깊은 인상을 받겠지." 그가 웃었다. "저들이 언제쯤 도착할 것 같나?"
"지금 막 비벡으로부터 전령이 도착했습니다." 수석 고문이 사뭇 엄숙히 대답했다. "제 생각에는 황제 폐하께서 혼자 만나보심이 적절할 듯 합니다."
황제는 웃음을 멈췄지만 그의 시종들을 향해 고갯짓하여 물러가도록 했다. 그때 문이 열렸고 다름아닌 코르다 부인이 손에 양피지를 쥐고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뒤편의 문을 닫았으나, 고개를 들어 황제의 얼굴을 쳐다보지는 않았다.
"전령이 짐의 후궁에게 서신을 맡겼다고?" 편지를 받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레만이 못 믿겠다는 투로 말했다. "서신을 상신하는 방식 치고는 상당히 정통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서신 자체는 상당히 정통에 따른 것이었는걸요." 코르다는 황제의 멀쩡한 한쪽 눈을 올려다보았다. 눈으로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짤막한 동작으로, 그녀는 편지를 황제의 턱 바로 아래로 가져갔다. 그의 눈은 휘둥그레졌고 피가 텅 빈 양피지 아래로 뿜어져 나왔다. 작은 검은 표식만이, 모락 통의 표식만이 남아 있는 백지가 완전히 바닥으로 떨어지자 그 뒤에 감춰져 있었던 단검이 드러났다. 그녀는 단검을 비틀어 황제의 목을 뼛속 깊이 도려냈다. 그는 소리 없는 헐떡임과 함께 바닥으로 무너져내렸다.
"얼마나 필요하지?" 사비리엔-초락이 물었다.
"5분." 코르다는 그녀의 손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 "만약 10분을 벌어줄 수 있다면 두 배로 고맙겠어."
"아주 좋아." 알현실에서 달려나가는 코르다의 뒤를 향해 수석 고문이 말했다. "아카비르였다면 참 좋았을 것을. 여자애 치고는 칼 다루는 솜씨가 참으로 인상적이야."
"저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자리를 옮기겠습니다." 사비리엔-초락이 오직 황제가 가장 신뢰하는 이들만이 알 수 있는 비밀 통로로 모습을 감추며 말했다.
"친애하는 황제 폐하, 한 1년 전을 기억하시는지요." 수석 고문은 죽어가는 사람을 향해 미소를 보냈다. "언젠가 제게 '그대들 아카비르인들이 현란한 기술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우리가 단 한 번 공격에 성공한다면, 그대들도 그걸로 끝'임을 기억하라고 하셨지요. 보시다시피, 저는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황제는 피를 토하며 어떻게든 한 마디를 내뱉었다. "뱀..."
"황제 폐하, 저는 뱀입니다. 안에서든 밖에서든 말이지요. 하지만 저는 거짓말은 하지 않았답니다. 비벡이 전령을 보냈다는 건 정말이었으니까요. 그가 도착하는 게 조금 늦을 것 같다고 하더이다." 수석 고문은 비밀 통로 뒤로 사라지기 전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음식은 절대로 상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탐리엘의 황제는 장엄한 무도회를 위해 장식된 그의 텅 빈 알현실에서, 그 스스로의 피가 고여 만들어진 웅덩이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15분 뒤 그의 호위병들에게 발견되었다. 코르다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2920년, 저녁별 8일
시로딜의 케어 수비오에서
비벡과 그의 수행원들을 첫 번째로 맞이한 이는, 숲을 지나는 도로 사정에 대해 아낌없는 사과를 건네는 글라비우스 경이었다. 빌라를 둘러싼 잎이 다 떨어진 나무들은 불타오르는 방울 장식이 매달린 끈으로 치장되었고, 부드럽지만 차가운 밤바람에 일렁였다. 비벡은 안에서 흘러나오는 간단한 만찬과 구슬픈 곡조를 느낄 수 있었다. 전통적인 아카비르식 겨울 축가였다.
베르시듀-셰이가 정문에서 비벡을 맞이했다.
"그대가 임페리얼 시티로 들어서기 전 소식을 전할 수 있어 다행이군요." 수석 고문이 그의 손님을 넓고 따뜻한 응접실로 안내하며 말했다. "상황이 어렵게 바뀌었는지라, 의회에서 우리 일을 마무리짓기에는 적절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계승자는 아무도 없단 말이오?" 비벡이 물었다.
"황위를 놓고 다투는 먼 사촌들을 제외하면, 공식적으로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 일을 처리하는 동안에는, 일시적으로나마 귀족들이 내가 선왕의 지위를 대신할 것을 결정했지요." 베르시듀-셰이는 시종들에게 편안한 의자 두 개를 난로 앞으로 가져올 것을 지시했다. "지금 당장 조약에 서명하고 공표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먼저 요기를 하는 게 좋겠습니까?"
"그대가 황제의 조약을 추진하겠다고?"
"난 황제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걸 추진할 생각입니다." 수석 고문이 대답했다.
2920년 저녁별 14일
모로윈드의 텔 아룬에서
길에서 잔뜩 먼지를 뒤집어쓴 코르다가 나이트 마더의 팔로 날아들었다. 잠시 동안 그들은 서로를 쳐다보았고, 나이트 마더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이마에 입맞춤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소맷자락에서 편지를 꺼내 코르다에게 주었다.
"이게 뭔가요?" 코르다가 물었다.
"네 전문성에 수석 고문이 기쁨을 표하는 편지란다." 나이트 마더가 대답했다. "그는 반드시 우리에게 대가를 치르겠다고 약속했지만, 이미 답신을 돌려 보냈단다. 황후가 남편의 죽음에 대해 충분히 대금을 치렀다고 했지. 메팔라께서는 우리가 필요 이상의 욕심을 품는 걸 바라지 않으신단다. 같은 살인에 두 번의 대가를 받을 수 없는 법이라고, 그렇게 써서 보냈지."
"그가 리자를 죽였어요. 내 자매를." 코르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칼을 꽂는 건 네가 되어야 했지."
"이제 저는 어디로 가게 되나요?"
"우리의 거룩한 일꾼들이 성전을 계속하기에는 너무 눈에 띄게 되었다면 언제든, 우리는 그들을 보우노라라는 섬으로 보낸단다. 배를 타고 채 한 달이 안 되는 거리고, 기쁜 마음으로 네게 꼭 알맞는 성역을 예비해 두었단다." 나이트 마더는 그녀의 눈물에 입을 맞췄다. "나의 아이야, 그곳에서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을 거란다. 그리고 네가 최후의 순간에 평안과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임을 안단다."
2920년, 저녁별 19일
모로윈드의 모운홀드에서
알마렉시아는 마을의 재건을 감독하고 있었다. 검게 물든 옛 건물들의 흩어진 잔해에 새로이 자리잡은 건물들의 골조 사이를 걸으며, 그녀는 주민들의 정신이 참으로 고무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식물조차도 놀라운 회복력을 보이고 있었다. 한때 중심가에 줄지어 있던 컴베리와 루브러시 관목들의 잔해들 사이에서는 벌써부터 생명이 움트고 있었다. 그녀는 그 고동을 느낄 수 있었다. 봄날이 오면 암흑을 뚫고 녹음이 피어날 것이다.
북쪽에서 내려와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한 공작의 후계자는 괄목할 지성과 던머 특유의 불굴의 용기를 가진 젊은이였다. 이 땅은 그저 살아남는 것 이상으로, 더욱 강해지고 더욱 넓어질 것이다. 그녀는 눈앞에 펼쳐진 현실보다 다가올 미래가 훨씬 굳셀 것임을 느꼈다.
그중에서도 그녀가 가장 확신하는 것은, 모운홀드는 한 여신에게 있어서 영원한 고향이라는 것이었다.
2920년, 저녁별 22일
시로딜의 임페리얼 시티에서
"시로딜의 혈통은 끊기고 말았다." 황궁 발코니의 연단에서 수석 고문은 모여든 관중들을 향해 공표했다. "하지만 제국은 살아있다. 친애하는 황제 폐하께서 폐하의 길고도 빛나는 치세 동안 가장 믿고 의지하셨던 귀족들은, 황제 폐하의 먼 친척들이 제위에 오르기에는 자질이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레만 3세의 공정하고도 믿음직한 동지로서, 내가 황제 폐하의 성명을 이어갈 책임을 지게 되었음이 결정되었다."
아카비르인은 잠시 말을 멈추고, 자신의 말이 대중들의 귓가에 확실히 울려퍼지게끔 하였다. 그들은 그저 침묵을 유지한 채로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빗물이 도로를 따라 흘러내렸고, 태양은 겨울의 폭풍 사이로 아주 잠깐 고개를 내미는 데 그쳤다.
"내가 '황제'의 지위에 오를 생각이 없음을 확실히 밝혀두겠다." 그가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여태까지 그대들의 해안에서 친절한 환영을 받았던 수석 고문 베르시듀-셰이였고, 또한 앞으로도 그렇게 남을 것이다. 나를 받아준 고향을 지키는 것이 나의 의무가 될 것이며, 나 이상으로 이 의무를 짊어지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는 누군가가 나타나기 전까지, 이 일에 몸과 마음을 다할 것임을 맹세하겠다. 나의 첫 번째 행보는, 이 역사적인 순간을 기념하여 다음 샛별 1일을 기점으로 우리가 '제2시대' 원년에 진입하였음을 선언하는 바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우리에게서 황가가 떠나갔음을 애도하고, 앞으로의 나날을 생각할 것이다."
단 한 사람만이 이 모든 말에 박수를 치고 있었다. 센첼의 드로'젤 왕은 이 모든 일들이 탐리엘에서 역사상 가장 좋은 일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이, 그는 단단히 미친 작자였다.
2920년 저녁별 31일
모로윈드의 에본하트에서
도시 아래에서 소사 실이 그의 비전 시계 장치와 함께 미래를 단조하고 있는 매캐한 카타콤에서는 뜻밖의 사태가 벌어졌다. 오랜 시간 믿음직스럽던 기어에서 기름 방울이 새어나오더니 곧 튀어올랐다. 곧바로 마법사의 주의가 그것과 어떤 동작을 일으킨 체인을 향해 쏠렸다. 파이프가 왼쪽으로 0.5인치 움직였다. 접지면이 튀어올랐다. 코일이 제 스스로 감기더니 반대 방향으로 돌기 시작했다. 천 년 동안을 좌-우로 째깍이던 피스톤은 급작스레 우-좌로 반전되었다. 부서진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모든 게 바뀌었다.
"지금 당장 고치긴 힘들겠군." 마술사가 조용히 읊조렸다.
그는 천정의 균열을 통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한밤중이었다. 제2시대가, 혼돈의 시대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