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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고려 거란 전쟁)/작중 행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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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작중 행적
2.1. 1회2.2. 2회2.3. 3회2.4. 4회2.5. 5회2.6. 6회2.7. 7회2.8. 8회2.9. 9회2.10. 10회2.11. 11회2.12. 12회2.13. 13회2.14. 14회2.15. 15회2.16. 16회2.17. 17회2.18. 18회2.19. 19회2.20. 20회2.21. 21회2.22. 22회2.23. 23회2.24. 24회2.25. 25회2.26. 26회2.27. 27회2.28. 28회2.29. 29회2.30. 30회2.31. 31회2.32. 32회(최종회)

1. 개요

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의 등장인물인 현종의 작중 행적 문서.

2. 작중 행적

2.1. 1회

천추태후에 의해 억지로 소군이 되어 신혈사로 쫓겨났다. 승려 행색에도 개의치 않고 저잣거리 술집에서 술을 마시면서 법공에게 자기야말로 다음 황제가 될 사람이라고 떠벌리다가 불량배들과 시비가 붙어 말다툼을 벌이게 된다. 그러다 조부인 태조대왕을 모욕하는 말이 나오자 분노해 뺨까지 때리고, 이에 격분한 불량배들이 단검을 뽑아 죽이려들자 도망친다. 그런데 이 불량배들은 사실 시비를 빌미로 그를 제거하기 위해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보낸 자객들이었고, 산 속에서 궁지에 몰렸다가 신혈사 주지 진관과 무장한 승려들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이를 진관이 질책을 하자 절에 갇혀서 살고 있는 자신의 처지는 대웅전 뜰에 사는 고양이만도 못하다며 한탄한다.[1] 강제로 출가시킨 것도 모자라 이제는 틈만 나면 자신을 해치려 하는 이모 천추태후를 원망하며 혼자 눈물을 쏟는다.

자기를 말렸음에도 억지로 따라 나섰다가 억울하게 대신 회초리를 맞은 동자승 법공에게 자신은 용손이라 어쩔 수 없으니 서운하게 생각 말라며 뻗대다 결국 멋쩍게 사과하고 간식도 쥐여준다. 동자승의 상처를 돌봐주면서 어렸을 때 출가하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천추태후에게 매를 맞은 때를 떠올린다. 울고 있는 어린 왕순을 목종이 달래주며 ‘널 잊지 않고 꼭 다시 개경으로 불러주겠다’고 했었는데, 세월이 지나 결국 자신을 잊은 것 같다고 좌절한다. 암살에 실패한 천추태후와 김치양이 다시 한번 대량원군을 죽이기 위해 독이 든 음식을 든 상궁과 궁녀들에 무장병들을 보낸다. 처음에 진관이 만약을 대비해 신혈사 전각 바닥에 파놓은 비좁은 밀실을 보여줬을때는 자신을 모욕한다며 화를 냈지만, 결국 상궁 무리를 피해 거기에 숨는다. 하지만 기다려도 대량원군이 나타나지 않자 식은 음식을 데우겠다며 화로를 들여 방바닥에 놓다가 바닥이 너무 울리는 것에 위화감을 느낀 상궁에 의해 밀실이 발각된다.

2.2. 2회

상궁과 마주하여 독이 든 음식을 먹고 스스로 죽지 않으면 신혈사의 승려들을 다 죽일 수밖에 없다는 회유 겸 협박을 듣는다. 하지만 자기가 죽는 방식에 상관없이 결국 뒤탈을 없애기 위해 승려들을 다 죽일 것이니 자신이 살아야만 모두 산다고 반박하면서, 반드시 살아남아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이라고 일갈한 뒤 도망친다. 독살이 실패하자 상궁과 나인들은 결국 그 음식들을 다 맨땅에 버리고, 잠시 후 전날 사찰에서 뒹굴던 고양이가 그 음식들을 먹고는 죽게 된다. 최 상궁이 외곽에 이중으로 깔아놓은 군사들에게 쫓기지만, 과거 거란의 1차 침공 당시 승려들이 마련한 피신처였던 산중 바위 틈의 공간으로 우연히 피신하여 간신히 따돌리는데 성공한다. 그곳에 놓인 작은 석불을 바라보고 빌면서 제발 살아만 남게 해달라고 오열한다. 이후 수색대 중 용손인 왕족을 해친다는 것에 큰 부담을 느끼던 한 명이 산불을 일으키기 직전 쏟아진 뇌우에 역시나 용이 노했다며 극도로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확인하고, 그를 설득해 수색대로 변장하여 인근 삼천사로 가 목종에게 상황을 알리는 서신을 보낸다. 다시 원래의 승복을 입고 신혈사로 돌아와서 승려들을 해치려 하는 최 상궁에게, 목종에게 지금의 상황을 알렸고 만약 자신이 죽은 뒤 목종이 이 상황을 알게되면 태후는 당신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 씌울 것이라 경고한다. 다 같이 죽든지 다 같이 살든지 선택하라며 으름장을 놓고 승려들과 법당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2.3. 3회

스님들과 함께 대웅전에서 농성하다가 최 상궁김치양파 군사들에 의해 끌려나가 죽을 뻔한다. 때맞춰 삼천사에서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쓴 서신을 받은 목종의 명으로 온 황보유의의 군사들 덕분에 살아남고, 잔당을 추격하려는 황보유의를 말린 뒤 그를 정식으로 태자로 삼겠다는 목종의 서신을 받는다. 자신을 배웅 나온 진관 스님과 동자승 법공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신혈사를 떠나 개경으로 향한다. 도중에 이현운을 만나 태자가 아닌 황제가 될 예정이라는 소식을 듣는다. 개경에 도착한 뒤 그저 목종의 명을 따라 보위를 잇는 줄로만 알고 명을 거두어달라며 알현을 요구하나, 백관들과 함께 그를 맞이한 강조가 반란을 일으켜 목종을 시해했다는 사실을 밝힌다. 결국 두려움에 떨면서 즉위식을 치르게 되고, 면류관을 벗고[2] 침전으로 들어가 혼자 주저앉아 목종을 부르며 오열하는 모습으로 마무리되었다.

2.4. 4회

본인의 즉위를 축하하는 연회가 열리지만 심신이 피로하다는 이유를 걸고 불참한다. 말 그대로 '얼떨결에' 황위에 오른데다 오랫동안 태자와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아왔고, 또한 사찰에서만 지내와서 바깥 세상 구경을 덜 했던 탓에 정치라는 것을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고, 지지 기반도 마땅찮은 터라 많이 부족한 모습을 보인다. 당연한게 실제 역사 속 현종이 즉위할 당시 나이가 고작 열 여덟 살이었다. 고등학교 2~3학년에 해당하는 나이이다. 후계자 교육을 제대로 받았더라도 왕위에 오르자마자 자연스레 국정운영을 잘 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다. 국왕의 직속 비서기관인 은대와 중추원의 이름과 직무조차 파악하지 못했으며, 조정의 신하들은 강조의 눈치를 살피기 급급해 현종이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지도 제대로 힘이 되어주지도 않는다. 일반적인 사안이 아니라 강조가 권력을 독점하고자 행한 조직개편이었기에 함부로 사실을 말했다간 강조에게 찍힐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이때 침묵하던 조정 신료들 사이에서 임금의 측근 역할인 은대와 중추원의 기능을 설명하며 황제의 명을 전함과 동시에 황제를 지키는 곳이니 폐지되면 안 된다며 홀로 나아와 반대하면는 강감찬과 공식적으로 최초의 대면을 한다. 이를 혁파한 뒤 중대성을 설치해 권력을 독점하려는 강조의 주장에 반대하여 현종에게 힘을 실어주지만, 다른 대신들이 강조를 두려워해 통 따라주지 않는데다 강감찬 본인도 인맥이 재앙 수준이다보니 무위에 그친다.

자신을 계속 꼭두각시 취급하는 강조에게 분노하여 "대의를 위해 거병했다더니 결국 권력이 탐났던 거요? 이럴 바에야 날 내세우지 말고 차라리 그대가 직접 용상에 앉으시오!"라고 일갈하지만, 되려 강조에게 이미 한 번 임금을 시해했는데 두 번은 못할 것 같냐는 말과 함께 되도 않는 짓 하지 말고 황후 들여서 후사나 보라는 말로 묵살당한다. 결국 권신의 허수아비에 불과한 씁쓸한 현실에 절망하여 거란에 보낼 표문을 읽어보지도 않는 등 잠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나, 아내 원정왕후의 격려로[3] 다시 의욕을 되찾아 본격적으로 국왕으로서 제례도 손수 주관하고 백성들 사이로 행차하여 눈도장을 찍는 등 비록 권력을 찾아오지는 못하나 새 국왕으로서의 권위만큼은 차근차근 쌓아 나간다.[4] 또한 원정왕후와 밤을 함께 보낸 뒤 황후가 곧 임신을 하는데, 오랜만에 황실에 후사가 생긴다는 소식에 백성들은 "용손이 태어나신다!"라며 크게 기뻐한다.

그나마 강조 앞에서 직언을 하던 예부시랑 강감찬을 통해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며 나라 밖 상황까지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고, 거란이 정변의 실상을 알게 되면 언제고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현종은 강감찬의 조언에 따라 정변을 비밀에 부치고 외교적인 해법을 모색하여 전쟁을 막고자 하지만[5], 이미 전쟁을 기정사실로 여기는 강조와 재차 충돌한다. 강조는 현종에게 "그리 전쟁이 두려우십니까?"라는 말로 압박을 가하는 것과 동시에 동원령을 내려 전쟁을 준비하겠다고 하는데, 현종은 이에 지지 않고 강조에게 그의 반역을 감추려고 압록강을 넘어가며 날마다 전전긍긍하는 신하들을 보면서도 감히 전쟁을 입에 올리냐고 맹비난하며 강조가 입을 다물게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처음으로 군주다운 위엄을 내보인 것이 무색하게도, 이내 거란이 보낸 사신들로부터 강조의 정변을 명분으로 한 선전포고를 듣게 된다.[6]

2.5. 5회

거란의 사신이 강조의 정변을 빌미로 전쟁을 선포하자 강조를 노려보며 "경 때문에 이리 되는구려..."라고 분노에 차서 되뇌인다.[7] 전쟁을 막기 위해 강감찬 앞에서 '강조를 제거할 것'이라 선포하고 강감찬의 만류에도 내관들을 무장시킨 뒤 강조를 불러 궁궐에서 참살하려 했지만, 강조는 이미 눈치채고 이현운과 휘하 군사들을 동원해 반대로 제압한다. 물론 강조는 "고려를 위해 죽기야 하겠지만 전장에서 죽겠습니다."라는 한 마디로 이 일을 묵과하고 넘어간다.[8] 강조 암살에 실패하고 역신을 처단하지도 그렇다고 백성을 위해 죽지도 못했다고 좌절한다. 한편, 거란 사신 한기의 귀국하기 전 알현에서 강조가 사신을 멈춰 세우고 자신을 지금 당장 죽이고 그 수급을 가져가거나 아니면 순순히 따라갈 터이니 자신을 압송해 가라면서 뻗대자 한기가 당황하여 그를 당장 물리라고 요구하는데, 이에 현종은 강조의 물음에 답하는 게 먼저라면서 재차 한기를 압박하고, 한기가 대답을 거부하고 돌아가자 거란의 목적이 애초부터 전쟁이었음을 확신하게 된다.# 결국 강조를 도통사로 삼음과 동시에 전쟁 준비를 시작한다. 재상들과 같이 강조와 함께 싸울 장수를 임명하거나[9] 전쟁 준비 중 각 부서를 돌면서 격려한다. 이와중에 강감찬에게 자신의 고뇌를 털어놓고 그의 위로를 받는다. 이후 자신을 알현한 양규에게 "흥화진을 반드시 지켜달라."고 부탁을 하다가 '군주는 명령을 하는 존재'라고 양규가 일깨워 주자 다시 "흥화진을 지켜내라."는 명령을 하고, 이후 양규의 부탁에 따라, 출전을 앞둔 강조에게 부월을 하사하면서 "승리로써 온 백성을 지켜낸다면, 한 명의 임금을 시해한 죄는 용서할 터이니 반드시 승리하시오."라고 격려한다.[10]

2.6. 6회

6회에서는 대부분의 초점이 양규가 분전한 흥화진에 집중되었기 때문에 큰 역할 없이 유진, 채충순, 최항, 강감찬과 함께 전황을 보고받거나 강감찬의 조언에 따라 민간인들을 위무하기 위해 사찰의 불공에 참석하거나 백성들의 목소리를 듣는 장면이 나온다. 강감찬의 조언을 듣고 사찰에서 열린 불공에 참석한 자리에서 양규의 처와 아들, 강조의 처를 처음으로 만났으며, 이후 자신감을 얻었는지 저자거리의 백성들을 만나 어려움을 직접 듣고 위무한다. 하지만 환궁한 이후에 원정왕후에게 "군주의 위엄을 위해서라도 백성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마십시오."라는 고언을 듣는다.

2.7. 7회

야밤에 거란군의 남하 소식과, 흥화진이 함락된 것으로 보인다는 보고에 크게 낙심하고, 그 와중에 조정 대신들이 가족들을 몰래 개경 이남으로 피신시키고 있다는 소식에 진노하여 바로 단속에 나선다. 상서좌복야 유진이 가족들을 피신시키려고 할 때 그의 집에 들이닥친 뒤 당장 신료들을 소집하라고 명령한 뒤, "조정 대신들도 고려군을 믿지 못하는 데 백성들은 믿을 수 있겠느냐, 자신은 전쟁을 경험해본 적도, 군사에 대해서도 잘 모르지만, 싸워보지도 않고 뒷걸음질 칠 생각을 한다면 절대 승리할 수 없다는 것만큼은 안다"며 일갈한다. 그러나 유진이 엎드리면서 "가족들은 피신시킬 지언정 자신들은 폐하를 지킬 것이며, 김치양이 변란을 일으켰을 때에도 그랬듯 우린 폐하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라며 항변 섞은 호소를 하자 달리 더 꾸짖지는 못한다. 이후 원정왕후에게 이 일을 말하며 외톨이가 된 것 같다고 토로하자 "신하들을 너무 믿지 말라"는 충고를 받는데, 이에 현종은 "지난 번엔 백성들을 믿지 말라더니 이젠 신하들까지 믿지 말라고 하면 누구를 믿어야 하냐"고 되묻자, "스스로를 믿어야 한다"는 답을 받는다. 이후 다시 무장들의 일가가 불공을 드리는 사찰을 찾아가며, 양규의 아들 양대춘에게 흥화진은 아직 버텨내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으니 가서 어머니 안심 시켜 드리라고 위로해주고, 이후 강조가 검차진을 통해 거란의 철갑 기병을 격퇴하고, 흥화진의 봉화 소식을 듣고는 기뻐하며 백성들에게 친히 나서서 희소식을 선포하는 모습을 보인다.

2.8. 8회

고려군이 거란군에게 대패하고 강조가 거란군에게 사로잡혔다는 패전 소식을 듣자 충격에 빠지고, 성 밖에서는 백성들이 또 승전보를 들고 온 줄 알고 있었기에 백성들에게 이를 어찌 전해야하나 고민한다.[11] 이후 재상들과의 조정 회의에서 유진과 강감찬이 강조의 전술을 두고 서로 격한 논쟁을 벌이자 둘을 중재한 뒤, 강감찬으로부터 통군사가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전열을 정비할 것이라는 말을 듣자 통군사에게 전령을 보내 전열을 가다듬고 필요한 것이 있다면 개경의 조정에 요청하라는 왕명을 내린다. 조정 회의 후 궐 밖의 백성들에겐 어떻게 소식을 전해야 할지에 대해 강감찬의 의견을 묻는데, 강감찬은 개경의 백성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함구할 것을 조언한다. 그러나 현종은 며칠 전만해도 백성들과 함께하라 해놓고선 왜 이번엔 백성들을 속이라는 거냐며 반문하나, 강감찬은 그것들은 전부 전쟁의 승리를 위해서라고 답한다.

현종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백성들과의 신의를 저버릴 수는 없다고 반대하지만, 강감찬은 "그건 폐하의 욕심일 뿐이옵니다"라고 직언을 날린다. 이에 화가 난 현종은 신의를 지키면서도 승리할 수 있고, 설령 패배해도 신의만 있다면 얼마든지 다시 극복할 수 있다며 뜻을 굽히지 않으나, 강감찬이 현종의 전쟁에 대한 무지를 지적하며 신의를 지키려다가 도리어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릴지도 모른다며 언성을 높이자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한다.[12] 강감찬의 뜻에 따라 양협으로 하여금 고려군이 잘 싸우고 있다고 달래며 성 앞에 모인 백성들을 해산시키게 하고, 유일하게 강조의 부인에겐 진실을 전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종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강조의 휘하 장수였던 이현운이 거란 쪽으로 배신해 정보를 팔아넘김으로써 곽주성과 영주성이 순식간에 함락되고, 여기서 도망친 사람들이 개경으로 피난하면서 결국 개경 백성들의 귀에도 패전 소식이 전해지게 된다. 결국 직접 행차하여 백성들에게 말리진 않겠지만 부디 자신과 함께 개경에 남아달라는 부탁을 하고, 이후 열린 조정회의에서 재상들로부터 항복을 청하는 친조를 올리라는 간언에 대노한다. 하지만 재상들은 송나라가 거란과 맺었던 전연의 맹을 언급하며 친조를 올릴 것을 청하고, 믿었던 강감찬마저 재상들의 뜻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자 실망하는 기색을 내비친다.

이후 강감찬을 따로 불러 분노에 찬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말해보라고 명하고, 강감찬이 계속해서 친조를 주청하자 점점 그에게 다가가 분노와 실망의 기색을 역력히 표출한다. 그러나 현종이 어느 정도 가까이 왔을 즈음에 강감찬이 다시 친조 찬성을 밝히면서 "그래야만 이길 수 있사옵니다"라는 말을 덧붙이더니, 친조를 청하는 척하며 거란을 속인 뒤, 그 사이에 동북면 병사들을 서경으로 보내 재정비를 하자는 본래 목적을 밝히자 크게 감탄한다. 현종과 다른 재상들은 친조를 올리는 건 곧 항복하겠다는 의사로 알고 있었지만, 강감찬은 애초에 친조와 항복을 별개로 보고 있어서 '친조를 올리겠다고 했지, 항복하겠다고는 안했다'는 논지로 타파하였고, 친조의 날짜도 딱히 명시해두지 않았다. 이에 현종은 그래도 국가 간 외교엔 신의가 필요하지 않냐고 물었지만, 강감찬은 먼저 거란이 신의를 저버렸는데, 우리라고 구태여 신의를 지킬 필요는 없다고 답했다. 문제는 이제 그 일을 맡을 사람이 필요했는데, 강감찬이 스스로 그 일을 맡겠다고 하자 그를 거란의 사신으로 보내며 그의 지략과 승리에 대한 집착에 놀라워한다.[13]

2.9. 9회

강감찬을 거란 진영으로 보낸 뒤, 잠을 이루지 못하는 가운데 원정왕후가 찾아오자, 어떤 신하는 끝까지 싸우기 위해 목숨을 걸고 거란 진영으로 들어갔는데, 어떤 신하들은 벌써 항복을 논하고 있다며 그 괴리감에 고뇌를 표한다. 원정왕후로부터 충신과 역신도 지나가는 신하에 불과하니 황실의 안위만 생각해야 한다는 말과, 싸워 이길 수 없다면 땅을 떼어주고 항복하더라도 황실을 지켜야 한다는 말을 듣자 왜 자신이 가려는 길을 이해해주지 못하냐고 역정을 내며 돌려보낸다. 이후 개경으로 돌아온 최사위에게 남도에서 더 군사들을 모아올 것을 명하며, 왜 다른 신하들 냅두고 자신에게 맡기냐는 최사위에게 다른 신하들은 벌써 항복을 논하고 있으니 본인에게 맡기는 것이라며 그를 내려보낸다.

2.10. 10회

강감찬이 계획대로 거짓 친조로 시간을 벌어 서경성의 항전 대비를 마치고 돌아오자 그를 반겨주며 항전의 의지를 조정대신들에게 선포한다. "항복을 대가를 내놓아야 하는 땅은 후손들이 터를 잡고 싸워야 하는 땅이고, 그들에게 바쳐야 할 세폐 또한 후손들에게 남기는 우리들의 빚이다. 우린 후손들을 대리하여 이 전쟁에 임하고 있으며, 항복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며 조정 대신들에게 다시는 항복을 입에 올리지 말라고 선언한다. 당연히 항복과 친조를 할 줄 알았던 조정 대신들은 경악하고, 이로 인한 후폭풍으로 상서좌복야 유진이 사직을 청한다. 현종은 상의 없이 일을 진행한 것에 대해 사과하지만, 유진은 "폐하께서 굳은 항전의 의지를 보이시니 대신들도 의견이 맞는 사람들로 채워야 일사불란하게 조정이 움직일 수 있다"며 물러날 의지를 표명하고, 현종은 달리 붙잡을 말이 없어 그의 사직을 윤허한 뒤, 그 감상을 강감찬에게 이야기하며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후 서경성에서 지채문과 대도수가 번갈아 거란군을 격퇴하고 있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조정 대신들에게 "하면 되지 않냐"며 기쁨을 표하고, 사직했던 유진을 찾아가 조정으로 복귀할 것을 요청하여 그를 복귀시킨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지채문이 패퇴하고 대도수가 포로로 잡혔으며 탁사정의 도주로 인해 서경성에서 전투를 지휘할 지휘관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저앉아 좌절하면서 회차가 종료된다.[14]

2.11. 11회

서경성이 '지휘부의 부재'라는 대위기에 놓이자 망연자실하며 하늘이 침략자의 편에 서고 있다며 탄식한다. 이에 채충순, 최항 등 조정 대신들은 '항복'해야 한다고 하고, 강감찬은 '항복'은 불가하며 황제가 몽진을 떠나서라도 시간을 벌어 항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몽진'이라는 말에 현종은 경악하며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 밖에 없다는 강감찬에게 "미쳤다"고까지 비난하는데, 강감찬이 거짓 항복으로 적을 속여 시간을 끌자는 전략을 제안했을 때 현종은 승리에 미친 광인같다고 감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어조다. 항전을 주장하는 강감찬과 항복을 주장하는 재상들의 입장 차가 극한으로 치닿는 가운데, 현종은 '항복'도, '몽진'도 없다며 '개경에서 항전을 불사할 것'을 선포한다.[15] 이후 원정왕후가 다시 그에게 항복을 하든지 몽진을 떠나든지 해서 왕실을 보존할 것을 간청하지만, 현종은 듣지 않고, 그럼 혼자서 떠나겠다는 왕후에게 그럼 그렇게 하라고 말한다. 강감찬 역시 개경에서 피신할 것을 다시 권하며, 임금이 떠나지 않으니 떠나지 못하는 백성들이 있다는 말에 당황한다. 이후 거란이 서경을 포기하고 개경으로 직공을 감행했다는 소식에, 항복을 주장하던 신하들조차 다시는 항복을 언급하지 않을 테니 현종에게 일단 제발 몽진할 것을 일제히 청한다.[16] 현종은 이를 듣지 않는데 이윽고 절령이 뚫리게 된다. 이런 긴급한 상황이 닥치자, 현종은 모든 백성들과 대소신료들을 피신시킨 뒤 옥새와 마지막 조서를 양협한테 내려서 보내고, 자신은 정전에 홀로 남아 문을 잠근 채 자결을 시도한다.

백성들을 보내고 대신, 수행원들과 함께 몽진을 출발하려고 하는데, 현종이 나타나지 않자, 신하들은 불안해하고, 원정왕후는 이에 급히 "오지 않으시겠다면 무례를 범하고서라도 반드시 성상을 모셔와라"고 명을 내린다. 거기에 응해 급히 강감찬이 황보유의를 대동하고 정전으로 뛰어 들어가다 양협과 마주쳐 조서의 내용을 듣는다. 조서의 내용은 '짐은 남쪽으로 도망쳐 전쟁의 참화를 확산시키고 싶지도, 인질로 잡혀 고려를 무너뜨리는 데 이용당하고 싶지도 않으니 차라리 고려를 위해 자결할 것이며, 승리한 뒤 용손에게 자리를 잇게 하라.'는 것이었다. 애타게 달려간 강감찬은 정전의 문을 치며 울부짖고, 재빨리 도끼를 찾아온 황보유의가 정전 문을 부수고 들어와보니 현종은 결심대로 자결하지 못하고, 강감찬에게 왕의 자리가 너무 버겁고 두려웠다며 그동안의 심적 부담[17]을 호소한다. 이후 강감찬에게 "소신은 언제나 폐하가 자랑스러웠사옵니다."라고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결국 강감찬의 말대로 몽진 길에 오른다.[18] 그러나 몽진 행렬에서 강감찬이 없다는 것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는데, 강감찬이 홀로 정전에 서 있는 채 몰려오는 거란군의 함성을 듣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회차가 종료된다.

2.12. 12회

몽진을 떠나면서 상서좌복야 유진을 통해 강감찬이 자청에서 개경에 남은 이유를 알게 되었고, 혹시나 재상과 국왕이 동시에 붙잡히면 실낱같은 희망마저 사라지기[19]에 유진과 최항을 비롯한 재상단들과 헤어진 채 지채문, 채충순, 장연우, 황보유의 등과 함께 계속해서 남쪽으로 몽진을 떠난다. 그리고 적성현[20]의 어느 마을에 도착했지만, 관리는 물론 호족, 백성들까지 도망치고 노비 몇몇만 남은 유령마을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kPpZCd6Mixc그 곳에서 겨우 밥과 뭇국 이 차려진 상을 받는데, 정말로 딱 무만 들어가서 수라상 이라기엔 매우 열악한 밥상이라 궁녀가 송구하다고 고개를 숙이며 몸둘바를 몰라하자, 자신은 백성을 지키지 못한 왕이라며 죄책감에 식사를 하지 못한다. 그래도 원정왕후가 "힘을 내야 백성들에게 사죄할 수 있다"면서 위로하자 놀랐는데, 원정왕후도 백성을 생객했던 현종을 언급하면서 다시는 "혼자 두고 떠나지 말아달라." 라고 당부[21]하자 그제서야 밥을 먹게 되었다.

하지만, 거란군이 추격대를 편성해 뒤쫓는다고 하자 따르던 일부 신료들과 궁인들은 흩어지고, 맞서 싸우던 지채문, 장연우, 황보유의와도 헤어지면서 채충순과 양협, 상궁 1명과 호위병 4명만 대동하고 만삭의 원정왕후를 부축하면서 힘들게 계곡을 건넌다. 현종이 어느 계곡에서 임신을 하던 중임에도 몽진길에 동행한 원정왕후의 발을 직접 만져주면서 애틋함을 보이자 원정왕후가 "황후가 아니라 태후가 된 듯 하군요. 천추전에 계시던 태후께서도 이런 대접은 못 받아 보셨을 겁니다." 라고 말하면서 감사를 표하자 현종은 "그 분은 한번도 이런 고난을 겪어보지 않으셨겠지요."[22]라고 답했다. 다행히 쉴 만한 장소에서 지친 왕후의 발을 손수 주무르면서 한시름 더는가 했지만, 이번엔 이 전쟁으로 남은 아들마저 잃고 모든 게 국왕 때문이라고 생각한 충주의 호장 박진이 휘하의 무리들을 변복한 채 이끌고 기습하게 되었다. 지키던 병사들도 화살에 맞아 사살되고 다른 이들과 함께 포위된 상황에서 박진은 증오어린 눈으로 현종을 바라보며 칼을 빼들고, 현종 또한 이 모습을 단호히 바라보면서 회차가 마무리된다.

2.13. 13회

이전 회차에 이어서 충주지역 호족의 우두머리박진에게 살해 위협을 받다가 다행히 뒤쪽에서 거란군을 막았던 지채문, 장연우, 황보유의 등이 도착해서 이들을 제압[23]하고 다시 몽진길에 나서면서 채충순에게 '호족'에 대해 듣는다. 이후 충주에서 올라오던 통군사 최사위와 충주사록 김종현을 만나 그들에게서 충주가 위험하다는 얘기를 듣는다.[24] 이후 어느 빈 관아에 도착해 채충순, 최사위, 장연우 등과 앞으로의 일정 등을 의논하다가 원정왕후의 조언을 듣고 충주 대신 공주를 거쳐 나주로 목적지를 정하고 몽진을 계획한다. 그러다가 그 주변의 백성들에게 음식들을 대접받고, 이 중 어느 부부를 안으로 불러서 "사는 것이 어떻냐?"고 물으면서 원정왕후와 함께 이들의 대답을 들었는데, 이들 부부가 전한 마을을 다스리던 관리의 인면수심적인 횡포에 대한 이야기와 이후 채충순이 전한 이야기 등 당시 호족들의 횡포에 대해 알게 되면서, "자신은 그동안 아무것도 모른 반쪽짜리 왕이었다."면서 분노했다.

2.14. 14회


다시 몽진길에 나서던 중 지채문과 장연우의 활쏨씨를 구경하다가 주변의 호장들의 공격을 받는다. 창화현의 향리는 "폐하는 제 이름이 뭔지 압니까"라고 대놓고 비웃으며 조롱하자 분노하여 지채문에게 저들을 모두 말에서 끌어내리라고 명한다. 향리들은 백성들을 동원해 현종을 공격하려 하지만 지채문이 순식간에 십수 명을 제압하자 도주해버린다]]. 이후 제압한 백성들에게서 "호장들이 지금 폐하를 잡아 거란군 진영에 넘기려고 계략을 꾸미고 있습니다!"라는 비극적 소식을 듣는다. 결국 백성들이 알려준 말대로 창화현(현재의 의정부시양주시 일대)에서 박진과 그 일대 호장들이 동원한 백성들로부터 위협을 받았다. 고려인들끼리 살육하는 광경을 참지 못한 현종은 근처에 있던 북을 두들기며 이목을 끌어 교전을 중지시킨 뒤, 직접 백성들에게 호장들이 이 임금보다 더 두려운 것이냐며 일갈하려는 듯 하다가, 그들의 현실을 알고 있다는 듯 위로와 사과로 호소하자 백성들은 무장을 내려놓고 엎드려 상황이 진정되려는 찰나, 다시 호장들이 나타나 백성들에게 왕을 잡으라고 위압적으로 명령하자, 그들에게 다가가 일침을 놓으려 하지만 되려 "개경의 백성들을 버린 임금은 우리에게 뭐라할 자격이 없다"라는 비웃음만 듣는다. 그 찰나에 일부 잔여 병사들을 이끌고 온 하공진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다. 그에게서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가 곽주성을 탈환했고, 뒤이어 양규와 예부시랑 강감찬이 계획한 일을 듣고 다시 표문을 지어 친조를 청한다는 약속을 받아낸다. 그러나 표문을 들고 간 하공진이 이틀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자[25], 다시 몽진길에 나선다.

2.15. 15회

몽진을 가던 도중, '자신과 같이 가면 더 위험해진다.'면서 원정왕후를 최사위, 김종현을 붙어 외가가 있는 쪽으로 돌려 보내고, 자신은 지채문, 채충순, 장연우, 황보유의, 양협 등과 함께 다시 몽진길에 나선다. 이때 백성들이나 일부 호족들이 알아보기 쉽지 않게 평복으로 갈아입고 험준한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등 힘들게 이동[26]하다가 공주 절도사 김은부의 환대를 받는다.# 그날 밤 여독을 풀고 침소로 들어서는데, 김은부의 큰딸[27]을 만나는데, 처음엔 옷을 지어 올린다 하여 글자 그대로 받아들였지만 그것이 곧 시침(侍寢)을[28] 의미하는 걸 알게 된 후에[29] 김은부가 딸을 바쳐서 출세하려는 의미인지 알고 분노하다가[30] 김은부의 큰 딸로부터 "아버지의 강요가 아닌 스스로 자청해서 들어왔다" 고 해명을 하는 이야기를 들었고, 다음날 김은부의 글을 받고 나주로 내려갔다.

2.16. 16회


나주에서 전날 김은부가 쓴 글을 읽다[31]가 개경에서 예부시랑 강감찬의 부탁을 받고 내려온 강민첨에게서 거란군이 물러간 소식과 김은부의 딸이 제작한 어의를 입고 개경으로 돌아왔지만[32], 불타버린 개경 거리[33]와 파괴된 만월대를 바라보며 울부짓는다. 그러다 힘든 몸을 끌고 온 강감찬을 안고 운다.[34] 이후 수창궁에서 죽은 양규와 김숙흥, 법언을 추증하고 여러 신료들의 벼슬을 임명하는데, 개성을 버리고 도망쳤단 죄책감 때문인지 성을 버리고 달아났던 탁사정과 박섬에게도 관용을 베푼다. 심지어 자신을 죽이려 했던 호족들에게도 관용을 베푸는 탓에 여러 신료들과 장수들의 반발을 샀다.[35] 현종은 자신도 백성과 나라를 버렸으니 그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며, 그 대신 더 이상의 기회는 없으니 반드시 자신의 잘못을 갚아야 한다고 못을 박는다.[36][37] 이후 아이를 사산하고 나서 감정을 추스리지 못하는 원정왕후를 위로하면서 회차가 마무리되었는데, 이때 입고 있는 어의는 김은부의 맏딸이자 훗날의 원성왕후가 지어준 옷이다.

2.17. 17회


원정왕후와 함께 나들이를 돌면서, 자신 때문에 불편한 행차를 한다고 걱정하는 원정왕후에게, 불편하지만 백성들의 원망스런 시선을 마주하면서 그들에게 속죄하겠다는 각오를 새겨야 한다는 식으로 대답한다. 행차 도중 개경에 상경한 김은부와 그의 장녀를 맞이하지만, 이후 지채문이 탁사정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지채문을 일단 돌려보낸 뒤에 강감찬과 함께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만 강감찬 또한 탁사정을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다.[38][39] 김은부를 형부시랑으로 삼아 고려 전체의 호족의 세력을 억누르고 중앙 집권을 강화하기 위한 개혁에 착수한다.[40] 조정 관료들은 지방 호족 출신이 많아 대부분 반대하는데, 심지어 강감찬까지도 거란의 재침에 대비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대놓고 "불가하옵니다. 절대 따를 수 없사옵니다"라고 항명 발언까지 한다. 이에 강감찬만 따로 불러내어 반대의 이유를 묻는다. 강감찬은 고려를 강성하게 하기 위해 호족들을 제압해야 한다는 대의에는 찬동하지만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니라는 이유로 반대한다. 그러나 현종은 지금 이 일을 하지 않으면 2차 침공 때와 똑같이 힘을 모을 것이며, 방어만으로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을 것이라며 자신의 노선을 계속 밀어붙이려 한다.[41][42]

그러나 이후로도 현종은 수난은 계속 되는데 전사자들의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열린 법회에서 현종과 대도수의 아내를 비롯한 전사자 유족들과 함께 불공을 드린다. 그러나 책임감을 느끼게 하고 싶었는지 아니면 다른 연유인지 몰라도 탁사정을 대도수의 부인과 같은 곳에 데려가는 실책을 저질렀고 이후 전사자와 유족들을 위해 불공을 드리겠다는 현종의 말에 양규의 처가 탁사정의 도주로 대도수가 포로로 잡혀서 죽음을 맞이한 일을 거론하며, "어찌하여 탁사정의 손을 잡고 대도수 장군의 명복을 비시옵니까!"라며 현종의 진실성이 없는 위선에 분노하며 비판한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명복을 빈다는 현종의 뜻이 진심이라면, 부처도 용서할 것이니 탁사정을 참수할 것을 진심으로 간청한다. 현종도 본인의 백성을 버리고 몽진을 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사면했고 대신들 앞에서는 큰 소리를 쳤지만 전사자들의 가족, 특히 양규와 대도수의 처 앞에서는 한 마디도 말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서 갈등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후 법회가 끝나고 나서 힘없이 걸어가다 원성왕후를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데,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는 계속 나아가 길의 끝에 가봐야 아는 법이라는 그녀의 말에 위로와 동시에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이후에도 계속되는 대신들과의 갈등에 현종은 자신의 뜻에 동의하는 채충순[43], 장연우, 최사위 등을 비롯한 자신의 세력을 모으며 갈등은 점점 커져가고 그 와중에도 자신을 설득하려던 강감찬마저 쏘아붙이며 조금씩 무리한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김은부가 강감찬과의 대화 이후 그는 자신들의 편이 되지 않을 것이란 걸 확신하게 된 이후 현종에게 강감찬도 쳐내야한다고 말하면서[44] 이에 대해 갈등하는 모습이 나온다. 일단 강감찬의 문제를 뒤로 미룬 채 호족 체제 개혁에 협력할만한 신하들을 하나둘 설득해나가지만, 결국 자신의 길을 끝까지 반대하는 강감찬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이에 대호족 출신이라 반대한다는 의심이 강하게 들어버린 현종[45]은 작중 최초로 신하를 파직시켜 버리고 만다.

2.18. 18회

파직선고 후 강감찬에게 "경은 이제부터 나의 신하가 아니오!"라고 폭언까지 하지만 막상 나가는 강감찬을 보지 못하고 주먹쥔 채 손을 부르르 떤다. 그날 저녁 쓰린 속을 술로 달랜 뒤 일어나 원정왕후의 침소로 가서 약간의 술주정 후 함께 잠든다. 그 다음날 현종을 향해 원정왕후가 태조 시절처럼 가려서 호족을 솎아내면 안되냐 하지만 현종은 확고하다. 이에 원정왕후가 왕실의 안녕을 생각하지 않냐고 따져묻게 되고 현종은 그에 대해서 반박하지 못한다. 이후 김은부의 의견으로 자신이 용서했던 신하들[46]을 불러들여 6부의 일을 시켜 다른 신하들을 복귀하게 한다. 그러던 중 김은부의 잘못[47]을 강감찬이 말하며 그를 파직시키라 하지만, 강감찬에게 경은 나의 신하가 아니다. 이 일은 불문에 부칠 것이다[48]는 의견을 보인다.[49] 결국 강감찬이 그 일을 고발하는 상소를 올리자 분노하며 강감찬의 집에 찾아간 뒤 그를 보자마자 다짜고짜 목을 조르려 한다. 그러나 차마 그렇게 하지는 못하고, 그에게 개경을 떠나 다시는 얼굴을 보이지 말라고 명령한다. 그 후 눈물을 흘리며 미친듯이 말을 몰며 저잣거리를 달리다 꺾인 길에서 건너오는 수레와 부딪히는 바람에 낙마하는 모습으로 18회가 끝난다.[50]

2.19. 19회

앞서 지난 18회에서 말을 타다가 낙마하여 심각한 부상을 입고 급히 왕궁을 옮겨 치료를 받았으나 부상이 심해 피를 토하는 등 위중했다. 다행히 고비는 넘겼으나 그 사이 지방 개혁에 참여햇던 재상인 채충순과 최사위는 각각 남쪽과 북쪽으로 떠났고, 형부시랑 김은부는 붙잡혀 원정왕후와 유진 등에 의해 재판을 받고 있었다. 다행히 깨어나 소식을 듣고 아픈 몸을 붙잡고 정전으로 가 김은부 부녀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자신도 전쟁 와중에 벌인 죄를 속죄하고 있으니 형부시랑의 죄도 용서하라고 말하지만, 재상들과 중진들은 물론[51] 하급 관리들과 황궁을 지키는 무관들까지 반대를 올렸다.# 며칠동안 이어진 상소와 원정왕후의 요청에도 응답하지 않다가 고향 금주로 내려갔던 강감찬이 올린 서한을 보고[52], 이후 김은부의 큰딸 김씨를 자신의 세 번째 아내이자 제3왕후로 맞이하여 정복을 하사한 뒤 입궁을 명한다.[53]

2.20. 20회

강감찬이 올렸던 서한을 근거로 형부시랑 김은부의 죄를 사면하고, 그의 큰 딸을 아내로 맞이하면서 내사시랑평장사 유진과 예부로 하여금 책봉식을 준비하라고 했다.# 그리고 퇴궐하려던 유진을 따로 불러 이유를 들은 후에 "계속 그렇게 질책하여 날 성군으로 만들어주시오. 단, 앞으로는 정도를 걸으시오."라면서 그를 계속 신임하는 모습도 보였다.[54] 이후 김은부의 큰딸의 책봉과 처소로 발걸음을 옮긴 것을 두고 같은 '용손' 출신인 원정왕후와 원화왕후와 대립각을 세운 채 김씨의 처소로 가서 하룻밤을 보내는데, 왕비로 책봉해달라는 것을 거두는 김씨의 청에 대해 당혹함을 드러냈지만 "왕후 전하를 상처주지 말아달라."는 그녀의 청에 나름 갈등하는 모습을 보인다.[55] 그리고 김은부에게 강감찬이 보낸 서한을 보여주면서 "한 발 물러서 강감찬과 함께 생각해보자."고 말하면서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한다. 이후 다시 형부시랑의 죄를 논하던 우간의대부 탁사정을 멀리 유배를 보내면서 지방에 안무사를 파견하기로 했는데, 일부 안무사들이 지방 호족들의 명령을 받은 백성들의 반발로 돌아온 것을 김은부에게 듣고 놀라면서 강감찬의 행방을 알아보다가 마침내 친종장군 지채문과 기병 10여기를 이끌고 금주로 내려와 그 지역 호족들의 반역 시도에 반대하다가 목이 베일 위기에 놓인 강감찬과 으스대는 호족들을 분노의 눈빛으로 보았다.

2.21. 21회

이전 회차에 이어서 목숨에 위협을 받은 강감찬을 구하면서 그 자리에 모인 호족 대표들에게 나름 경고를 표시했다. 특히 '대모'로 나온 호족 대표(여수장)에게 강감찬과 친종장군 지채문의 우려에도 "자신의 목을 베라."면서 호기롭게 나서 결국 호족들이 자신의 뜻을 관철하기에 이르렀다. 개경에 돌아가는 길에 강감찬에게 "다시는 내 곁에 떠나지 마라. 난 경이 필요하다."라는 말을 한다. 한편 자신이 기병 10여기로만 이끌고 금주로 내려간 소식에 걱정이 된 원정왕후가 개경 궁궐 밖에서 직접 마중했고, 이후 그녀와 대화하면서 미리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차갑게 대했다. 그리고 그날 밤 이들 호족 대표의 연서를 들고 온 금주의 호족 대표인 강감찬의 집안 어른에게서 "자신들은 폐하의 뜻에 끝까지 따르겠다. 학사승지(강감찬)을 보살펴달라."는 말을 듣고 나서 다음 날 지방에 안무사를 다시 파견한다. 이후 자신의 친조를 요구하는 거란의 사신을 상대하면서 친조에 갈등을 보이다가, 자신의 장인이자 형부시랑인 김은부가 자신이 자청하여 가겠다고 하자 눈물을 지으면서 김은부를 보냈고, 이를 김은부의 큰딸인 김씨 부인에게 알렸다.

2.22. 22회

"거란의 사신은 들으시오. 흥화진은 절대로 내어줄 수 없소."
"흥화진은 단지 하나의 성이 아니오. 우리 고려에게 흥화진은 거란의 40만 대군을 물리친 항전의 표상이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는 우리 고려인의 기상이오! 흥화진을 내어달란 말은 이 고려를 내어달라는 말이오."
"하니 돌아가서 귀국의 황제께 분명히 전하시오. 고려라는 나라가 존재하는 한, 흥화진은 절대로 거란의 땅이 되지 않을 거요."

(거란 사신: 전하! 지금 거란의 대군이 몰려오고 있사옵니다. 그들이 곧 압록강을 넘어 진격해올 것이옵니다. 정녕 그것이 두렵지 않으시옵니까?)

"두렵소. 이 고려의 군사들이 죽어가고 백성들이 죽어가야 하는데 어찌 두렵지 않겠소? 군주가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건 군주의 자격이 없는 거요. 하나 그 두려움에 짓눌려 싸우기도 전에 굴복하진 않을 것이오."
"하니 어서 가서 전하시오. 흥화진을 갖고 싶으면, 이 고려를 굴복시키라 하시오!"

강동 6주의 할양을 요구하는 거란 사신의 요구에 대해 대응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내사시랑평장사 유진, 병부상서 유방, 한림학사 승지 강감찬을 비롯한 여러 신료들의 의견을 듣는다. 이후 신료들이 거란 사신에게 주연을 베푸는 자리에서 거란의 실제 목적이 강동 6주 전체가 아니라 흥화진에 있음이 드러나자 고심하게 된다. 한편 그 과정에서 김훈과 최질을 비롯한 무신 세력의 반발도 있었는데 이를 강경하게 물리친다. 결국 고심 끝에 흥화진을 내놓으라는 거란 사신의 요구에 대해 위의 대화로 최종적으로 거부 의사를 밝히고 항전의 의지를 다진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거란에서 목숨이 위태로워진 김은부가 염려가 되었는지 최후반 그의 큰 딸인 김씨 부인을 찾아가 위로한다.

2.23. 23회

지난 회차에 이어 김은부의 큰 딸이자 자신의 세 번째 부인인 김씨 부인을 위로하긴 했지만, 이내 우는 그녀의 모습에 난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내 강감찬의 조언에 마음을 다잡고 참지정사가 된 유방을 서북면 행영도병마사로 임명해 보내고, 문하시랑이 된 유진에게 지방의 관리들에게 병력을 모집하라 지시한다. 그리고 아직 머물고 있던 거란 사신을 돌려보냈다.[56] 이후 지난 전투를 복기하던 강감찬을 찾아가 "경은 정말 한결같다."면서 그의 전략을 듣다가 거란에 사신으로 갔다가 탈출하기 직전 붙잡힌 형부시랑 김은부의 서찰[57]을 보고, 이를 재상들과 의논했으며 자청해서 흥화진으로 간 한림학사 승지 강감찬을 보냈고, 이미 눈치를 챈 거란 사신이 먼저 앞질러 가면서 흥화진까지 이르다가 그 곳에 머물던 유방과 정성에 의해 잡히게 되었다.[58]

이 소식을 전전승지 양협에게서 들은 후 김씨 부인을 만나 위로했고, 흥화진에서 돌아온 강감찬의 보고를 들은 후 그에게 동북면행영병마사로 임명해 군사 경험을 쌓으면서 김은부를 보살펴달라고 지시한다. 다만 이 일로 인해 안 그래도 그간 불만이 쌓인 상장군 김훈과 장군 최질, 그리고 이를 이용해 현종을 제거하려는 장작주부 박진의 충동질까지 더해지면서 이들 장수들이 올린 상주문(군사들을 모두 관리해야하는 직책인 행영병마사에 문관인 강감찬을 임명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받게 된다. 전부 무장을 하고 한꺼번에 몰려와서 위협을 가하려는 이들에게 처음엔 "무엇을 우려하는지 나도 안다. 하지만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것이다. 나중에 이유를 알려주겠다.", "행영병마사는 군사뿐만 아니라 백성들까지 관리해야하는 직책이다."이라며 나름 온건하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최질이 "무관도 백성들을 관리할 수 있다."며 끝까지 강하게 나오자 "문관을 임명한 건 무관들이 오로지 전쟁 대비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그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내린 조치인데, 그것도 몰라서 내가 직접 얘기해야겠나? 서찰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답할 수 있는 사안인데 왜 군사들을 끌고 왔나?"라고 일갈하면서 항의하려 온 무장들을 역으로 털었다. 이때문에 김훈도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갔고, 최질은 분을 삭히지 못해 집무실에 돌아와 박진의 질문에 투구를 패대기 치는 것으로 답했다.

2.24. 24회

재상단을 다시 불러모은 자리에서 중앙군인 6위의 군사 충원 및 훈련, 지방군의 상비군화 등 거란 재침에 대비해 만반을 다하여야 한다고 명령한다. 한편 김씨 부인이 이 자리에 음식을 마련해오자 기뻐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편, 판어사대사 장연우가 대소신료가 모인 자리에서 지난 회차에서 장군들을 모아 군주를 겁박한 김훈과 최질을 탄핵하고, 이에 유진, 채충순을 비롯한 관료들이 처벌을 요청하자 두 장군이 지난 전란 때 큰 공이 있었던 점을 거론하며 재론하지 말라고 명을 낸다. 이후 김씨 부인이 자신의 처소에 꽃을 놓은 것을 양협에게 듣고 따로 찾아가려고 했는데, 김씨 부인이 침방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 곳에 들어갔다. 그리고 원정황후와 원화황후, 김씨 부인 간의 대립. 즉, 처첩 간의 알력 다툼을 눈치채고 김씨 부인을 위로하면서 잠시나마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59] 그리고 시간이 1014년으로 넘어가면서 지난 전란 때 소실된 정전이 재건되자 왕실 및 대소신료를 모두 대동한 상태로 다시 이궁(離宮)해 신료들 앞에서 지난 전란 이후 고려가 겪은 어려움들을 거론한 뒤, 거란이 재침할 경우 이번에는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2.25. 25회

김씨 부인의 처소에서 상주문을 다 본 후 쉬러고 자신의 처소로 가려는데, 김씨 부인을 두고 고뇌에 빠지기도 했다. 이후 군인들의 영업전을 회수해 관리들의 녹봉으로 사용하자는 중추사 장연우의 상소에 안그래도 문관 위주의 국정 운영에 불만을 품었던 상장군 김훈과 최질이 반발해 나갔고, 이어 전사한 무관들의 가족들의 생계를 우려하자 중추사 강감찬과 참지정사 최항 등이 내논 대책에 자신도 보태서 궁궐의 씀씀이를 줄이자고 제시한다. 그러나 조회에서 나간 김훈과 최질, 그리고 평소 현종에게 불만이 많았던 장작주부 박진이 군사들을 모아 반란을 일으켰다는 어사중승 노전과 감찰어사 김종현의 보고가 올라오자, 친종장군 지채문의 간청에 우선 응양군과 용호군을 모아 방비를 강화하려고 했지만, 지채문은 이내 반란군에 의해 제압당했고, 그가 오지 않자 강감찬이 직접 서북면과 동북면의 군사들을 데리고 오겠다고 하자, 강감찬과 노전, 김종현에게 명령서를 받고 즉시 보냈다. 그러나 때를 맞추어 김훈과 최질이 군사들을 이끌고 정전을 포위해 자신들의 자존심을 짓밟은 장연우와 중추사 일직 황보유의를 내놓아 유배를 보내고 자신들에게도 국정에 참여해달라고 요구하자[60] 이에 반발해 저항하지만, 끝내 장연우와 황보유의가 자청해서 나갔고, 이들이 군사들에 의해 폭행당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복수를 다짐한다.

2.26. 26회


서북면의 군사들이 오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자 두려워하고 동북면의 군사들을 기다린다. 그런데 김훈과 최질의 군사들이 황궁 앞을 지키고 있던 군사들을 물리치고 조정에 쳐들어오자 자신있으면 베어보라고 소리치면서 분노한다. 하지만 김훈과 최질이 굴복을 안하면 신하들을 한 명씩 없애버릴 것이라고 협박하자 결국 굴복하고야 만다. 이후 본인을 구원하러 온 강감찬 등의 동북면의 군사들에게 동북면으로 돌아가라고 지시한다. 양협에게 원성황후가 군사들에 의해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자 그녀의 처소로 찾아갔다. 그리고 처소의 상궁에게서 원성황후의 마지막 옷과 편지를 받으며 "난 떠나간다" 라는 내용의 편지를 읽고 잠깐 외출을 하는 사이에 신하들의 회담을 듣게 되는데 그것의 내용은 원정황후가 서북면의 군사들을 회군하라고, 조정을 침범하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었다. 분노하여 원정황후를 찾아가서 화를 내는데 원정황후는 자신은 이용당했다고 오열한다. 후에 원성황후를 내쫒을 수 있다는 말에 흔들렸다는 원정의 말에 매우 실망한다.[61]

2.27. 27회

검교태사 수문하시중 유진과 문하시랑평장사 최사위에 의해 과거 몽진 당시 자신을 노렸던 자객이 개성부윤 박진이라는 걸 알고 정전에서 그에 대한 국문을 벌이려고 했지만, 실권자인 상장군 최질에 의해 흐지부지되었다. 이에 그와 대립하고 있던 상장군 김훈을 따로 불러 제압하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오히려 박진의 협박을 당하게 된다. 한편, 그 와중에 거란의 사신이 다시 찾아와 친조를 요구하면서 한때 동원령을 내릴 준비를 진행했지만, 자칫 자신들의 권력을 잃을까 우려하던 박진과 최질 등이 오히려 친조를 요구하면서 대신들과 싸움이 났고, 이에 현종은 재상들과 중, 하급 신료들 그리고 자신이 잘못했음을 안 원정황후와 원화황후를 비롯한 황실과 궁인들, 그리고 개경의 백성들의 통곡을 뒤로 하고 직접 친조를 하기 위해 최질, 박진 부자를 비롯한 반란군 수뇌부들과 함께 길을 떠난다. 그러나 친조를 하러 떠나기 전 중추사 강감찬에게서 친종장군 지채문과 김씨 부인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이후 유진과 강감찬에게 사직한 관리들을 채우라면서 언급된 前 화주 방어사 이자림을 불러 서경판관으로 삼으면서 김씨 부인에게 전하는 편지와 서북면행영도병마사 유방에게 "서경에서 준비하고 기다리다가 나를 대동한 반란군들이 서경에 다다르는 즉시 공격하여 한 명도 살려두지 말고 모조리 처단하라"는 밀지를 전했기 때문에 현종이 친조를 하러 개경을 떠난 것은 최질을 비롯한 반란군 수뇌부와 배후인 박진 부자를 자신을 미끼삼아 서경으로 끌고 가 거기서 모두 처단하기 위한 일종의 '고육지책'이라 할 수 있다.

2.28. 28회

개경 백성들의 통곡을 들으면서 서경으로 향하던 중 함께 가던 상장군 최질에게 개경에 남아있던 반란군 수뇌부[62]는 물론 병부낭중 최구까지 반란에 가담한 인사들을 모두 서경으로 부르도록 했다. 그러나 이를 어느정도 눈치챈 개성부윤 박진의 계략으로 인해[63] 서경에서 반란군 토벌을 준비하던 서북면행영도병마사 유방과 그를 따르는 서북면 장수들과 군사들은 모두 통주성으로 가게 되었고[64], 어사중승 노전과 서경판관 조원, 감찰어사 김종현과 자신의 명으로 서경으로 와 반란군 수뇌부 암살을 계획한 권서경판관 이자림만 남아 자신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고 난감해한다. 한편, 서경에 당도하기 전 잠깐 쉬는 와중에 자신에게 다가선 박진과 대치하면서 "그대의 아들들을 죽인 건 거란이오! 그대가 날 거란으로 보낸다면, 그대는 그대의 아들들을 또 죽인 것이오!"라면서 소리친다.

이렇게 난감한 사이 흥륜사에서 현종의 편지[65]를 읽고 단신으로 서경으로 간 김씨 부인과 동북면에서 중랑장 도용수와 일부 군사들을 이끌고 잠입한 친종장군 지채문이 이자림, 노전, 조원, 김종현과 합세했고, 서경에서 머문 다음 날 근처 사찰에 불공을 드리다가 사찰의 신도로 변장한 김씨 부인을 보고 놀란다. 하지만 김씨 부인의 눈짓을 보고 눈치껏 아는 체하지 않으면서 근처에 사는 사람이냐고 말문을 열어 대화를 나누고, 부인에게서 넌지시 한번 연회라도 즐기시라는 말을 듣는다. 그리고 그 계획에 따라 상장군 최질에게 연회를 베풀면서 무희들의 춤과 검무를 진지하게 보다가, 최질에게 술을 따라주며 이쯤에서 역적짓을 그만하고 그 옛날 거란으로부터 통주성을 지켰던 용장으로 다시 돌아오라 설득하지만, 최질은 그런 현종을 비웃으며 연회장에 꿇어앉은 김훈의 머리 위로 술을 부으며 현종과 김훈 둘 다 모욕하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 현종은 결심을 굳힌 듯, 최후반 자신이 앉던 곳에서 양협과 함께 반대편 무대석으로 가서 검무를 추던 무희 중 1명과 술을 마신다. 그리고 그 무희가 건네준 술을 들고 돌아서서 반란군 수뇌부들을 돌아보면서 "다들 잔을 채우라."고 말하고 나서[66] 다음과 같이 말한다.
"경들도 알겠지만, 태후께서 날 낳으시다 숨을 거두셨소. 나는 태어나면서 한 생명을 빼앗았소. 그것이 나에게는 일생을 짊어야 할 멍에였소. 그래서 난 보위에 오르면서 다짐했소. 절대로 한 사람의 목숨도 빼앗지 않겠다고 말이오. 그 어떤 죄인에게도 참형을 내리지 않고 이 나라를 다스려 가겠다고 말이오.[67] 허나 이제 그 생각을 버리기로 했소. 세상에는 절대로 자비를 베풀어서는 안되는 죄인들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소. 내 안의 연민에만 갇혀 있어서는 황제의 책무를 완성할 수 없소. 나는 이제 이 고려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칼을 드는 강인한 군주가 될 것이오."
그리고 눈을 감으면서 무희가 따라준 술을 마시고, 이어 움켜쥐고 있던 잔을 눈을 뜨면서 패대기쳐 깨부수고, 놀라는 반란군 수뇌부를 향해 아래와 같이 외쳤다.
"황제의 군사들은 들으라! 저 역도들을 모두 처단하라!!!"
그러자 자신에게 술을 따라준 무희 양 옆에 서 있던 지채문과 도용수를 비롯한 군사들이 쓰고 있던 가면을 벗고 등장해 반란군 수뇌부들을 죽이고, 자신과 양협은 노전, 조원, 김종현 등이 호위하는 와중에 현종은 결연한 표정으로 아비규환이 된 연회장을 바라보면서 회차가 마무리되었다.

2.29. 29회


지난 회차에서 호위부대에게 명령을 내리고, 역도들이 하나 둘 죽어나가는 시점에서 이어진다. 최질은 김훈까지 자신을 막아서자 결국 김훈을 죽이지만, 어느 순간 주변에는 다른 무장들이 다 죽고 최질 혼자서만 남게 된다.[68] 최질도 마침내 지채문의 칼날에 목이 베어지며 죽게되고, 최질을 뒤에서 조종하던 박진마저 지채문의 칼에 사망한다. 김훈 최질의 난으로 정권을 잡았던 무장들은 그렇게 허무하게 권력을 잃고 전멸한다. 역도들의 가족은 어떻게 하냐는 김종현의 물음에 그들은 벌하지 않겠다 하고, 오히려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도와주라 명한다.[69][70] 이후 궁궐에 갇혀있던 신하들에게 전갈을 보내 자신이 역도를 제거하는데 성공했다고 전한다. 서경에 머물던 도중 거란의 사신이 또 다시 찾아와 친조를 독촉하자 이번에는 어물쩡 넘기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맞서면서 친조는 절대 없을 것이라면서 갑론을박을 벌이다가 사신이 '전하께서 그렇게 충신과 역적을 구분 못하시니 고려에 정변과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난다'라고 선 넘은 막말을 지껄이자 역린이 발동되어 결국 거란 사신들을 모두 개경으로 압송하라고 명한다. 이를 구실로 또 다시 거란군은 압록강을 넘어 고려를 침공하지만, 현종은 갑옷을 입고 병사들 앞에 나서 김훈, 최질의 난으로 인해 분단될 뻔한 고려군을 다시 하나로 통합시키면서 거란군이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는 한편, 내치에도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

시간이 1018년으로 바뀌면서 압록강 인근에서 거란군이 다시 침입해오자 70대의 노신 강감찬에게 부월을 하사하면서 출전하게 한다.[71] 시간이 많이 흘러 이 시점부터 선황제인 목종처럼 수염을 기른 모습[72]으로 등장했다. 이 와중에 아끼던 중신 장연우와 장인 김은부[73], 그리고 원정황후를 떠나보냈지만, 원정황후가 죽고 나서 출전해 영주 안북대도호부에 주둔하던 강감찬을 비롯한 일선의 장수들에게 상복을 입지 말고 전쟁에 집중하라고 명을 내린다.

2.30. 30회

20만 대군을 이끌고 출정한 상원수 강감찬에게서 아무 소식도 들리지 않자 조정 대신들과 함께 초조해하다가, 곧이어 전령이 도착해 흥화진 삼교천에서의 승전보를 전하자 기뻐한다. 하지만 이후 거란군이 흥화진에 있는 고려군과의 전면전이 아닌, 개경으로 진군한다는 강감찬의 서신을 받은 후 대신들과 대책을 논의한다. 강감찬의 진언대로 또 한번의 몽진과 관련한 논의가 나왔으나, 현종은 모두의 반대를 무릅쓰고 개경에서의 수성전을 명한다. 그 이유는 첫째, 개경은 이미 나성을 포함한 방어시설이 충분히 정비되어있는데 이를 포기하고 개경을 떠나면 사실상 거란군에게 방어요새를 공짜로 내어주는 것이며, 거란군이 개경나성을 거점삼아 고려의 공격을 쉽게 방어할 수 있다는 것. 둘째는 개경을 얻은 거란군은 언제라도 성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경기 일대의 평야를 약탈하며 식량을 취하게 되기 때문. 셋째는 공성전에서는 공격 측이 절대적으로 불리하며 강감찬이 거란군을 추격하고 있으니, 강감찬의 고려 주력부대가 거란을 따라잡을 때까지 며칠이라도 버틸 수 있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것.[74] 마지막으로 역도들에 의해 친조를 하러 가는 길에 수많은 백성들이 길거리로 나와 친조 행렬을 막았던 것은 '전쟁을 막는 것'과 '목숨을 보전하는 것'을 원했기 때문이 아니라 '고려의 승리'를 원했기 때문이었고, 그러니 "백성들의 '두려움' 속에 있는 '거란을 향한 분노'를 직접 풀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자"라며 수성전 체제로 전환한다.

하지만 강감찬에게 정예병을 포함한 고려 주력을 전부 맡겼기에 개경에 남은 군사는 500여명이 전부였고, 이 병력으로는 절대로 방어할 수 없다는 지채문의 의견이 나오자, '개경 백성들과 함께 싸우겠다'라는 말을 한다. 이에 성 밖 백성들에게 청야를 명하고 개경 나성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과 함께 '모두 함께 싸우자. 싸울 사람은 병부로 와서 병장기를 지급받으라. 황제가 엎드려 부탁한다.'고 호소한다. 처음에는 백성들이 청야전술에 반발하면서 병부에 무기를 받으러 온 사람이 상원수 강감찬의 처와 공부상서로 추증된 前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의 처, 그리고 자신을 옹립했던 前 도통사 강조의 처까지 단 3명이라는 것을 최사위에게 보고받고 절망했으나, 곧바로 최사위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고, 개경 주변의 백성들이 청야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와 함께 직접 궁궐 밖으로 나가, 눈물을 흘리면서 "고맙다."는 말을 전했고, 이를 개경으로 내려가던 강감찬에게 전했다.#

2.31. 31회

개경의 성문에서 병사들을 격려한 뒤 참지정사 유방을 비롯한 장수들[75]과 재상들과 함께 개경으로 다가오고 있는 거란군의 대처법을 논의했다. 그 결과 적들의 진격을 하루라도 늦추기 위해서는 선행 척후부대를 섬멸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다음날 거란의 선발대 300기가 개경 근방에 나타나자 유방에게 남아있는 기병 100기를 이끌고 적의 척후를 섬멸하도록 지시했다. 거란은 300기의 척후부대를 여러 갈래로 나눠 동시에 개경의 전력을 파악하고자 했고, 유방과 지채문 등이 이끄는 개경의 고려군은 그것을 역이용하여 100기의 기병으로 신속한 기동과 매복전을 통해 분산된 거란군을 각개격파했다. 하지만, 소배압은 척후부대를 다시 보내는 대신 본군을 이끌고 개경으로 계속 진격하기로 했고, 대책 회의를 여는 도중 백성들의 피해가 1만에 이른다는 유방의 보고를 들었다.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을 고민하다가 '대군이 나타난다면서 속인다.'는 생각에 문하시랑평장사 최항과 참지정사 채충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재상들과 장수들, 전전승지 양협을 비롯한 궁인들[76]까지 대동하고 성 밖에 나가 소배압의 대군과 대치하던 중 원화황후와 연경궁주[77](후에 원성황후) 자매를 필두로 상원수 강감찬의 처와 前 서북면 도순검사 양규의 처, 前 도통사 강조의 처를 필두로 많은 백성들이 횃불을 들고 합류하면서 놀랐고, 이에 놀란 소배압은 퇴각을 명령한다.[78] 때맞춰 김종현이 중갑기병 1만 기를 이끌고 개경으로 늦지 않게 달려왔다. 자신을 알현한 김종현에게 목을 축이게 하면서 위로하고 상원수 강감찬이 있는 곳으로 복귀하라고 다시 명을 내린다.[79] 그리고 "이제 전투가 시작될 것."이라는 검교태사 수문하시중 유진의 발언에 옥좌에서 정면을 응시한다.

2.32. 32회(최종회)


초반 내내 이어졌던 귀주 대첩에서 상원수 강감찬이 이끈 고려군이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급사중 황보유의에게 듣고 놀라서 뒤로 넘어질 뻔 했고, 이후 여러 신료들과 함께 기쁨과 환희의 눈물을 흘린다. 이후 개선하고 온 강감찬을 비롯한 장수들을 황실 가족들, 신료들과 백성들과 함께 격려하고, 강감찬에게는 특별히 금으로 만든 꽃 가지 2개를 직접 머리에 꽂아주면서 승리를 자축했다. 그러면서 강감찬에게 먼저 개경으로 가서 개선하라고 명한다.

이후 정전에서 신료들과 조회를 가지면서 전공이 있는 이들 및 전사자에 대해 유공자로 예우할 것을 명하고 여진 부족, 송 상인, 탐라 부족, 헤이안 시대 일본, 아라비아 상인 등 여러 국가에서 조공을 받고 공물을 하사한다. 그날 밤 아들 왕흠을 태자로 책봉하겠다면서 다짐하다가 밤 늦게 찾아온 강감찬이 사직을 요청하자 거절하면서 송의 상인에게서 받은 송 황제의 협공 제의에 대해 강감찬과 의논하다가, 결국 지난 번 억류한 거란 사신을 돌려보내면서 사신을 보내 거란 성종 야율융서에게 화해와 자신의 책봉을 요청했고, 이에 야율융서가 승인하면서 본격적으로 고려는 항구적인 평화를 맞이하게 되었고, 현종은 정전에 모인 신료들에게 '고려가 주도하는 외교정책'을 당부한다.

그리고 다시 사직을 요청한 강감찬을 끝내 윤허하고 그의 손을 잡으며 서로 잊지 않겠다는 말을 하면서 눈물로 그를 배웅한다.[80] 그리고 석양이 비치는 정전 밖을 보다가 다시 옥좌로 당당하게 향하는데, 그 사이에 놓인 선대 황제이자 사촌 형인 목종과 이모였지만 자신을 죽이려고 했던 천추태후[81], 자신을 옹립한 강조와 자신을 위협한 김훈과 최질, 그리고 장인 김은부와 믿음직했던 충신 장연우, 먼저 떠난 첫 부인 원정황후의 환영을 보다가 옥좌에 오른 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빈 정전을 바라보는 장면을 끝으로 드라마는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1] 앞선 대사와 연계해 보면 마이웨이를 즐기면서 몸도 마음대로 자유롭게 움직이는 고양이와 절 안에 갇혀서 꼼짝도 못하는 대량원군의 답답함을 대비해서 보여주는 미장센의 장면으로 해석된다는 글이 있다. 그리고, 2화에서 이 고양이는 독이 든 천추태후의 음식을 먹고 죽는 역할로 재등장했다.[2] 승려였던 상태에서 바로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옷은 화려하지만, 머리는 빡빡 밀어서 시원해보이는 언밸런스한 모습이 연출되었다.[3] 이때 빡빡이던 머리가 시간이 지난 걸 반영해 더벅머리로 자란 디테일을 보여준다.[4]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백성들을 위무하는 건 전제군주제 국가에서는 오로지 군주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에 그 자체가 군주의 권위와 위상을 과시하는 일이 된다.[5] 현종부터 시작해 정변을 주도한 강조 휘하 세력, 조정의 중신 세력 모두가 합심하며 아직 동원령이 내려지지 않은 민간사회를 제외한 모든 부처에서 군수물자를 비축하는 등 전쟁을 대비함과 동시에 외교적으로 동분서주하는 장면이 연출된다. 최전방인 흥화진에 있던 양규가 꼬리를 무는 사신단의 왕복을 바라보며 "임금이 이제 국경을 바라보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만으로도 중요한 것 아니겠느냐는 평을 한다.[6] 이 장면은 현종 - 강감찬 - 양규, 이 세 주인공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자리에서 다 모인 의미 있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7] 아직까지는 현종의 정치 내공이 부족하여 강조의 정변은 거란에게 있어 전쟁 명분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을 보여준다.[8] 이 시점에서 현종을 향한 강조의 인식도 어느 정도 변한 듯 하다. 현종이 "고려를 위해 죽으시오."라고 말할 때 강조는 한시도 현종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데 현종에게서 황제로서의 가능성을 본 듯 하다. 강조가 정변을 일으킨 가장 큰 이유가 목종이 나라에 해가 되는 인물인 김치양과 유행간 등을 제 때 처리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현종은 전쟁의 원인이 된 인물인 강조를 과감하게 제거하려는 시도를 했고 강조가 이 결단력을 높이 산 것이다.[9] 처음에 현종은 도통사(강조)가 원하는 인물로 임명하라 했지만 재상들이 반대하며 전쟁 이후의 상황도 생각해야 된다 간언하자 그 의견을 받아들인다. 그러면서도 도통사가 알면 반대할까 걱정하지만 도통사도 용인했다는 말을 들었고, 이후 양규에게서도 강조가 현종과 같이 전쟁을 치르고 싶다는 말을 듣게 된다.[10] 이 장면으로 현종과 강조 두 사람의 캐릭터성이 더욱 일신했다는 평을 받는다. 군주로서 역적을 향한 일차원적인 적대감을 버리고, 양규의 고언을 듣고 자신의 적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드는 용인술을 보여주는 현종의 성장과 잠재력을 알려주는 장면이다. 참고로 김빠지는 소리지만 연개소문의 사례를 참고하자면 강조가 승리한다 해도 이 말은 지켜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강감찬 이상의 무명을 떨친 동시에 군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음에도 역적의 오명을 벗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다.[11] 드라마상에서의 각색일 뿐이기는 하지만, 어찌보면 백성들을 너무 가까이 하지 말라던 원정왕후의 간언을 무시한 댓가인데, 아랫 사람을 시켜도 충분할 일을 국왕 신분인 자신이 직접 나서서 승전보를 전하고 거기에 더해 무턱대고 전쟁이 곧 끝날 것이라는 희망적인 발언까지 해버렸기 때문이다. 현대에서도 국가원수의 발언이 불러오는 파장을 생각하면 상당히 경솔한 행동이었던 셈이다.[12] 즉, 어떠한 잡생각 없이 전쟁을 이기는데만 신경써야 한다는 논리이다. 군주로서의 책임감이나 인성에 확연한 차이가 있지만 조선 시대의 선조가 이러한 사례에 속하는데, 선조는 임진왜란 도중에나 휴전 중에도 왕권 강화에 집착하다 결국 전쟁을 재확전시킬 수준의 삽질을 저질렀다.[13] 이때 현종이 그에게 감탄하면서 하는 말이 나름 명대사다: '대체... 경은 어떤 사람이오? 처음에는 아버지처럼 자상한 늙은 신하였소... 그 다음에는, 바른 말하기 좋아하는 고집쟁이 신하였소. 한데, 이제 보니 승리에만 미쳐있는, 광인 같소...'[14] 그러나 실제로는 서경성은 조원과 강민첨이 잔류해 있었으며 묘사상 일부 병력이 여전히 주재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앞선 회차에서도 흥화진이 함락되었을 것이라는 거짓정보가 받아들여지는 등 당대의 미비한 정보전달체계로 인해 개경 수뇌부가 종종 오판을 저지르는 경우가 생기고 있다. 다만 '지휘관'이라는 측면에서는 어느정도 맞는 말인데, 서경 지휘부가 사실상 증발한 상황에서 우왕좌왕하다가 굉장히 낮은 품계였던 통군녹사 조원을 병마사로 추대하였기 때문이며 전령의 입장에서는 그 전에 파견된 것이면 지휘부가 증발했다는 내용은 딱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15] 참고로 원작과는 반대되는 행보인데, 원작에서 강감찬은 몽진을 주장하기는 했으나 결정은 성상께서 하셔야 한다고 말하고 현종은 몽진이 항전의 수단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지하여 강단 있게 몽진을 결심하며, 이에 조정 신료들이 너무 위험하다고 반대하지만 강감찬이 성상이 결정하셨으니 우리가 더 이상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고 하자 모두 수긍한다.[16] 항복하자는 주장도 결국 나라를 보존하기 위한 또 하나의 방책이다. 하지만 거란이 서경을 포기하고 개경으로 온다는 것은 고려를 멸망시키겠다.는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에 전부 항복이라는 주장 대신 몽진할 것을 청한 것이다.[17] 제2차 여요전쟁 당시 현종의 나이는 18살에 불과했다. 비록 시대가 다르고 10대에 왕에 오른 사례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수많은 사건을 감당하고 책임지기엔 어린 나이이다. 갑작스럽게 국왕 자리에 올라 처음에는 강조 일파에 의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눌려 있으면서 휘둘리다가, 즉위 1년 반 만에 전쟁이 터졌다. 강조가 조정을 비우면서 본인 스스로가 뭔가를 하기 위해 직접 백성들의 민심을 살피고 흥화진이 건재하다는 소식도 본인이 직접 전해주면서, 어떻게든 본인이 해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상황은 악화되기만 했다. 그리하여 '과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과 '지금의 아무것도 해낸 것이 없는 자신'을 비춰 보니 서럽게 우는 것이 당연하다.[18] 천운인지 거란이 개경으로 가려는 순간, 돌풍이 불어 귀중한 시간을 벌었고 거란의 보급 지점에 운석이 떨어지는 등 마치 고려가 망할 때가 아니라는 듯 기록이 되어 있다. 다만 운석의 경우 곽주에 떨어진 것이지 곽주'성'에 떨어졌다는 기록은 없었고, 작중에서도 양규의 공성전에서 묘사되지 않았다.[19] 국왕이 붙잡히면 차라리 아직 태중에 있지만, 자신의 자손이 있기에 그를 세우면 되었고, 재상이 붙잡히면 국왕이 다시금 인재를 찾아서 초빙할 수 있다. 그런데 동시에 붙잡히면 나라의 중심인 국왕과 그를 보좌하는 재상들이 다 사라지기 때문이 그야말로 재건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원작 소설에서 현종이 양협을 시켜 도망치는 자신을 불만스럽게 바라보는 역장과 역리들에게 "지금은 적의 기세가 대단하니 모두 피신하여 살 길을 도모하라"고 명한 부분을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20] 현재의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양주시 남면, 연천군 일부 지역을 관할했던 옛 고을이다.[21] 그런데 현종보다 원정왕후가 먼저 1018년 4월에 사망한다. 뿐만 아니라 몰년을 알 수 없는 원화왕후를 제외하고, 지금까지 드라마에 등장한 현종의 후비인 김은부의 세 딸(원성왕후(1028년 7월 사망)와 원혜왕후(1022년 7월 사망), 원평왕후(1028년 10월 사망))도 현종보다 먼저 사망했다.[22] 이를 두고 시청자들 사이에서는 KBS가 사극 천추태후를 가지고 자학 개그를 친 것 같다는 농담까지 나왔다. 실제로 천추태후는 전쟁터에서 장수로 활약한 인물이 전혀 아니었으며, 사극 천추태후에서의 내용은 무슨 여전사처럼 묘사했으니 사실이 아닌 왜곡된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분은 이런 고생을 안 했다"고 이야기하는게 고증에 맞는 것이다.[23] 물론 박진은 부상당한 채 도망쳤다. 지채문과 황보유의가 뒤쫓았지만 실패했다.[24] 직후 장면에서 현종이 충주로 향할 것이라는 고려 관리의 말을 듣고 내려가던 거란 추격대가 속았다는 것을 알고 그 관리를 죽이고 다시 돌아가는 모습을 담았다.[25] 표문을 전하긴 했지만, 그 내막을 안 거란 성종이 하공진을 감금하고 다시 남진을 선포했다. 다만, 이 당시 개경에 주둔한 거란군 역시 일부가 이탈하는 등 군기가 많이 흐트러진 상황이었다.[26] 이 때 브금으로 김장훈의 '폭풍'이 흘러나왔고, 이동하면서 현종은 '꼭 개경으로 돌아가 나라를 개혁하겠다.'는 다짐을 수없이 한다.[27] 훗날 원성왕후가 되는 여인으로 현종의 뒤를 이은 덕종과 정종을 낳았다.[28] 여인이 임금을 모시고 잠자리에 든다는 뜻이다.[29] 현종과의 대화에서 그녀가 "폐하, 어떤 여인이 (왕이 입는 어의를) 옷을 지어 바치겠다는 것은 몸과 마음도 바치겠다는 뜻이옵니다." 라고 말한 것을 고려하면, "(내가 현종에게) 옷을 마저 짓겠습니다. 약속한 일이니 해드리고 싶습니다."는 이미 본인의 마음이 현종에게 향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녀가 현종에게 만드는 어의(왕의 옷)는 왕을 향한 충성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며, "당신은 나의 왕이 될 사람이다." 처럼 자신의 지아비가 되어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현종이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이게 되면, 왕비의 신분으로 입어야 할 새로운 옷을 직접 하사해줄 것이다. 이처럼 왕이 여인에게 새로운 옷을 하사해주게 되면 그동안 입고 있던 옷을 침소에서 벗은 뒤에 하사받은 옷으로 갈아입게 되는 과정으로 '왕의 승은을 입는다.'의 중의적인 의미도 숨어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을 하자면, 이현운이 고려를 떠나 거란의 관복을 입는다는 것은 고려를 배신했다는 강력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왕이 신하들에게 관직을 하사하면, 신하들은 충성스런 왕의 관료가 되어 제복을 입고 일을 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드라마에서 의복은 '신분을 나타내는 복선' 으로 쓰이는 것이다.[30] 안 그래도, 호족들의 횡포로 인해 억울하게 딸을 빼앗긴 백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분노하고 있었는데,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공주 절도사 김은부가 부패한 호족들처럼 똑같이 딸을 바치면서 출세하려는 행동을 하고 있으니 배신감으로 인해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31] 17화부터 본격화되는 호족 척결을 주청하는 글이다.[32] 원래 몽진 과정에서 공주절도사 김은부의 환대를 받은 이후에도 전주절도사 조용겸에 의해 한 번 더 수난을 당했고, 귀경 길에 다시 공주를 들르는 등 여정이 많았지만, 원작에서는 해당 일화들이 나온 것과는 달리 드라마에서는 이야기가 너무 늘어지는 것을 우려해 생략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원작의 현종은 돌아오는 길에 자신을 지키려는 젊은 군사들의 투지를 보고 자신감이 생겼는지 채충순 등의 신료들의 만류에도 그들과 같이 노령에 머물기로 하는 모습도 보이는데, 덕분에 군사들의 사기가 오르기도 하였다.[33] 드라마 초반부에 묘사된, 외국 상인들이 활동할 정도로 번화했던 개경 시가지의 모습과 크게 대비된다. 뿐만 아니라 길에 주저 앉아 현종에게까지 구걸하는 노인, 굶주림 때문인지 마당에 멍하니 앉아있는 아낙과 그 뒤에서 울부짖는 아기, 먹을 것을 훔쳐 도망가며 현종을 스쳐 지나가는 어린이 등 비참한 모습들이 묘사된다.[34] 다른 사람도 있는데 굳이 강감찬인 이유는 강감찬이 작중 현종의 몽진 이후 사실상 개경에 남았던 '고려 저항군의 수장' 역할을 맡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최수종이 태조 왕건왕건 역을 맡았던 점을 생각하면 단순히 배우 개그만으로는 볼 수 없는 씁쓸함을 보여주는데 왕건이 고려를 세운지 갓 100년이 되던 해에 자신의 증손이라 볼 수 있는 후대 왕인 현종이 전란에 의해 개경이 불탄 것과 개경을 지키지 못하고 도망친 자괴감에 절망하여 우는 것을 창업자인 자신이 그저 곁에서 지켜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참담함을 보여주는 듯한 연출로도 보여지는 만큼 보는 시청자들이 먹먹함을 느끼게 만든다.[35] 하지만, 탁사정은 이러한 뜻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용서했다는 것에만 초점을 두어 대신들에게 '폐하께서 나를 용서하셨는데 니들이 뭘 어쩌라고?' 식으로 뻔뻔하게 나오면서 자신에 대해 비판했던 대신들의 속을 더 긁어놓았다. 이후의 역사에서 유배를 당했다는 기록을 보면, 그는 마지막까지 현종이 자신을 용서한 의미를 깨우치지 못하고 오만방자하게 굴 것으로 보인다. 이 장면은 자신의 죄를 느끼면서 그 행위들을 용납한 것처럼 묘사되지만, 어떻게 보자면 제대로 된 정치교육을 배우지 못해 아직까지 인과 연에 얽매이며 냉정하게 처리를 하지 못하여 완전히 개화되지 못한 그의 정치적 능력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 겨우 설득한 문신들 중에서도 최항을 제외하면 어찌 용서를 하는 것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왜 현종을 죽이려 한 호족들과 성을 버리고 달아난 장수들을 처벌해야 하냐?'고 하면 이유는 간단하다. 죄를 지은 사람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않으면, 그 뒤로 어느 누구도 강감찬이나 양규처럼 열심히 일하거나 목숨을 바쳐가면서 고려를 위해 희생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도 논공행상일벌백계를 엄중히 해야 하는 이유다.[36] 훗날 탁사정은 현종에 의해 귀양을 가게 되는데 반성도 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는 탁사정이 나중에 현종에게 버림받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장면이다.[37] 사실 원작에서도 현종이 신하들에게 몽진 중에 어가에 불 붙이는 등의 불충한 행동을 한 자들의 처벌을 불문에 부칠 것이라고 말할 때 이 전쟁에서 자신도 역할을 제대로 못했으니 죄도 먼저 받아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공이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에 걸맞은 상을 주라는 것을 명시하며, 적재적소에 쓰일만한 사람이 많이 모여야하는 상황이기에 되도록 관대하게 처리하는 것이라고 먼저 개경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에 말한다.[38] 여기서 강감찬이 밝힌 일벌백계의 필요성은 지난 화에 대한 설명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이들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도 현종은 자신도 백성을 버렸고 호족도 백성을 버렸으니 그 책임감을 느끼고 있으며 자신이 실수한 것처럼 다른 이들도 실수한 것이고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하는데, 아직까지도 이상에 휘둘려 제대로 된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현종의 정치력에 대한 한계점을 보여준다.[39] 또한 현종이 군주가 몽진을 하는 것과 장수가 전장에서 도망치는 것은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왕조 국가에서 군주의 역할은 사직을 보존하는 것이며 당장 적군이 코 앞에 있는 상황에서 이를 피해 달아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지만, 적군에 맞서 싸워 나라를 지켜야 하는 장수가 자기 한 목숨 챙기고자 무단으로 전장에서 이탈하는 것은 엄연히 자신의 본분을 저버린 이적 행위이다. 더군다나 서경을 반드시 사수하라는 현종의 어명을 받고 출정한 장수로서 제대로 싸움 한 번 해보지도 않고 달아난 것은 단순히 도망을 친 것을 넘어 어명을 거역한 것으로, 탁사정의 죄를 묻지 않는 것은 현종 자신의 권위를 스스로 바닥에 떨어뜨리는 것과 다름없는 자해 행위이다.[40] 현종의 입장은 자신이 경험했던 호족으로 인한 살해 위협까지 생각하며 호족의 흉악성과 절도사였던 김은부의 조언을 토대로 시작하는 것이지만, 안타깝게도 현종은 군사와 나라의 정비를 우선하기 보다 군사력과 시스템으로도 불안한 상태에서 내부를 점검한다고 절도사를 대신해 호족들을 감시하고 그 세력을 약화시킬 과거 시험을 먼저 준비하기로 결정한 것. 정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저런다는 것은 당연히 위험한 일이다.[41] 둘의 주고받는 문답을 8회 당시 전쟁의 참상을 말하며 일방적으로 현종에게 강감찬이 일갈하고, 이에 현종이 반박하지 못했던 장면과 비교하면, 현종은 이제 국가의 정책을 두고 강감찬과 찬반을 토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현종이 주장하는 것은 안타깝게도 눈 앞에 닥친 현실에 대해 앞선 다른 일들도 원하는 결과를 도출해낼 수 없는 상태에서 바라고 있는 이상이라는 점이었다.[42] 작중 현종의 대사를 가져오면 현종은, "집의 바닥이 무너지고 기둥이 썩어가고 있는데 집을 수선하기 위해 대문만 고치고 있으란 말이오?"라면서, 이 일을 지금 안 하면 그 사이 또 죽어갈 백성들은 어찌 하는지에 대해 강감찬에게 말했지만, 강감찬의 말대로 정말 그때는 그것을 시행할 적기가 아니었고, 현종의 행동은 집의 기둥을 고치기 위해 쉽게 고치기도, 갈기도 어려운 기둥을 잡고 늘어지는 것이나 다름없었다.[43] 여기서 채충순이 처음으로 자신이 송에서 귀부했다는 정보가 나온다.[44] 호족이라기엔 노비 하나 없이 어려운 모습만 극 중에서 나왔지만 사실이다. 심지어 그의 아버지는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강궁진(姜弓珍)으로 목종을 시해한 강조나 재상인 유진이나 최항도 함부로 못할 만큼 권세가 강한 호족 가문 출신이다. 현종도 거란과의 전쟁은 명분일 뿐이고 강감찬 자신이 호족이라 반대하는 게 아니냐고 압박한다.[45] 참고로 현종은 강감찬의 집 사정은 아무것도 모른다.[46] 탁사정이나 박섬같이 전쟁중에 도망치거나 잘못한 신하들이다. 그들을 불러들여 일을 하지 않는다면 너희를 모두 처벌한다는 협박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덕분에 비리를 저지르고 배신을 저지른 이들이 나라의 중책을 맡게 된 셈이 되어버렸고, 강감찬 또한 죄인들로 나라를 이끌어 가려는 건 잘못된 짓이라고 지적한다.[47] 호장들의 가족을 병역에서 빼주었던 일이다. 30명 정도 병역을 뺐다는 것이 조정에서 밝혀진다.[48] 이 때 강감찬을 설득할 수 없어 힘들고, 미워할 수 없어 힘들다 한다.[49] 이 때도 강감찬을 보지 않는다.[50] 거란의 친조요청에 왕이 병을 핑계로 가지 못한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각색한 것으로 보이나 이 장면은 지나치게 무리수적인 장면이란 비판을 받고 있으며 시청자 게시판 역시 이에 대한 항의가 빗발치며 극본을 맡은 이정우 작가에 대한 지탄을 내고 있으며 한문철의 블랙박스 리뷰, 성상발사대, 검차를 위한 빌드업이냐는 등 수많은 비판과 조롱이 쏟아지고 있으며 진지하고 무게감이 있었던 사극이 아침드라마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았다.[51] 장연우, 강민첨, 황보유의를 제외한 정전에 모였던 대신들 대부분이 무릎을 꿇고 반대했다.[52] 그간 쌓인 감정 때문인지 읽지 않겠다고 했지만, '형부시랑(김은부)을 살릴 방법이 있다.'는 예부낭중 강민첨의 말에 즉시 읽었다.[53] 15회의 각주에서 설명한대로, 김은부의 큰딸 김씨가 현종에게 어의를 바친 답례로 왕후의 정복을 하사해주면서 왕의 승은을 입게 된다는 의미가 된다. 이처럼 의복은 '신분을 상징하는 복선'이 담겨있다. 현종이 몽진을 갔을 때 곤경에 처한 상황에서 김은부 일가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고, 현종이 김은부 일가에게 은혜를 갚는다는 이야기를 설명한 듯 하다.[54] 다만, 유진의 입을 통해 그 발언을 무마시킬만한 강력한 신권이 없다면 왕이 어떠한 정치적 행보를 보여도 그걸 막기 어렵다는 점이 유진과 신하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으로 나왔다.[55] 하지만 이후 원정왕후와 원화왕후 앞에서 김씨의 발언으로 보아 책봉식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 김은부의 큰딸이 최종적으로 왕후가 된 것은 원정왕후 사후인 1022년이다.[56] 이때 지난 번처럼 개경의 백성들에게 달할 걸 염려해서 판어사대사 장연우를 개경 밖까지 따라 보냈다.[57] 거란 서북방의 반란으로 인해 본군이 그 쪽으로 갔다고 적혀있다. 김은부는 타국의 사신들과 하공진의 정보로 얻은 그 내용을 서찰에 적어 보내려다가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 거란군에 붙잡혔지만, 그 전에 화살로 해당 서신을 흥화진사 정성에게 전했다.[58] 이후 내원성에 머물던 난릉군왕 소배압이 김은부를 처치하려고 하다가 이 소식을 듣고 강까지 건너와 강감찬과 두 차례 담판을 지은 후 거란 사신을 돌려보내고 김은부를 여진 쪽으로 보내는 쪽으로 일단락지었다.[59] 여담으로 지난 회차에 이어 이번에도 자신과 김씨 부인이 가깝게 지내는 모습을 원정황후가 질투를 내는 모습으로 보거나 듣는 장면이 나왔고, 이번 회차에서는 양협이 침방 앞에서 원정황후를 보면서 눈치를 보는 모습을 연출했다. 사실 17회 이후 현종과 원정황후&원화황후, 그리고 훗날 원성황후가 되는 김씨 부인 사이의 갈등이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채 이어지면서 안 그래도 '역사왜곡 논란'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는 드라마에 더 논란을 더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60] 그 와중에 박진은 김씨 부인을 인질로 잡으면서 원정황후를 협박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말이 참여지 작중 무관들이 원하는 것은 사실상 150년 뒤 무신정권에 준하는 권한 행사이다.[61] 17회 이후부터 현종과 원정황후 두 사람의 관계가 이렇게 꼬인 건 역사 왜곡을 일삼는 메인 작가가 쓴 극본 때문이다. 현종이 원정황후의 초상화를 현화사에 걸 정도로 사랑했으며 원정황후도 질투심에 눈이 멀어 반란에 가담한 적도 없다.[62] 최질과 대립하던 상장군 김훈도 포함되었다.[63] 이와중에 옥새를 품고 있던 전전승지 양협은 반란군을 피해 도주하다가 붙잡혀 옥새마저 빼앗겼다. 빼앗긴 옥새는 박진이 작성한 조서에 찍혀 서북면행영도병마사 유방에게 보내졌다.[64] 유방은 그래도 "황제를 지켜야 한다."면서 일부 장수들과 군사들을 남기긴 했지만, 그들마저 강제로 통주로 보내게 되었다.[65] 편지에는 김씨 부인에 대한 연정이 있었지만, 어릴적부터 의지해 온 원정황후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고 밝혔다.[66] 이 때 반란군 수뇌부들이 술잔을 채울 때 술이 흐르는 모습이나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즉, 아래의 현종의 발언 당시 이들 대부분은 빈 잔이었던 셈.[67] 실제로 작중 현종은 이 시점까지 누구에게도 사형을 선고한 장면이 없다.[68] 다만 황실 호위부대도 지채문과 도용수, 그리고 다른 한 장수만 남으면서 꽤 피해가 컸다. 어찌보면 당연한게 일게 병사들도 아니고 모두 관직에 임명되어 거란, 여진 등 고려를 위협하는 적과 싸워봤던 장수들이니 개인 무력은 뛰어났을 것이다.[69]고려사》 기록에 의하면 현종은 반란을 주도한 이들의 자식들이 다시는 벼슬에 오르지 못하도록 모두 등용문을 막았다. 즉 드라마에서는 실제보다 순화된 것이다.[70] 그러나 드라마 내에서 최질은 난을 일으킨것 정도가 아니라 아예 황제와 고려땅 전체를 통채로 거란땅에 갖다 바치려 하는 데 앞장선 실제 역사에서 보다 몇천배는 더 천하의 개쌍놈 으로 묘사되어 나왔으니 그러한 캐릭터로 나온 이상 드라마 내에서 만큼은 그냥 기록에서 처럼 자식들이 벼슬에 오르지 못하도록 하는 정도가 아니라 제아무리 어진 현종이라도 충분히 일가 몰살 까지는 명하는 것이 옳은 처분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작자에게 일가 몰살은 커녕 장례까지 치르게 해줬다는건 현종을 석가모니나 예수가 보인 관대함과 자비 너그러움은 우스워질 정도로 지나쳐도 너무 지나치게 보살 신선으로 묘사한 것이니 본 작품의 수많은 역사 왜곡 논란 중에서도 가장 최악이라는 평가도 존재한다. 더욱이 최질은 실제역사에선 일가를 모두 처벌한 기록이 없으니 그렇다 쳐도 가상 인물인 박진의 일가들도 그냥 놔뒀다면 실제 한국 역사에서 3대 멸족이라는 건 전혀 단 한번도 시행된 적이 없어야 한다.[71] 5회에서 강조에게 부월을 하사하던 과거의 2차 침공 시점과 비교하면 훨씬 묵직하고 진중해진 태도로 바뀌었다.[72] 정확히는 시점이 1015년 3월(김훈, 최질 등의 반란군 수뇌부 진압)에서 1018년으로 넘어가던 중반부터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이때까지 지채문이 친종장군으로 있던 점으로 보아 1016년부터 수염을 기른 것으로 보인다. 여담으로 당시 실제 현종의 나이가 22 ~ 23세 무렵이었다.[73] 두 사람의 경우, 각각 급사중 황보유의와 '연경원주'로서 현종의 아들을 본 김씨 부인(후에 원성황후)의 회상에서 각각 등장했다. 김은부가 죽기 전 병문안을 와 김은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나머지 두 딸을 아내로 삼아달라고 부탁한다.[74] 그리고 강감찬이 제 때에 도착한다면, 개경까지 쉬지않고 달려 지칠대로 지친 거란군은 자신들을 지킬 어떠한 장애물도 없는 허허벌판에서, 자신들보다 2배나 많은 고려군을 상대해야하며, 그리되면 강감찬의 말대로 거란군을 전멸시킬 기회를 직접 만들어 주는 게 된다는 설명도 덧붙인다.[75] 우상시 지채문과 중추원부사 노전, 상서중승 이자림과 급사중 황보유의.[76] 양협을 제외한 일부 내관들은 물지게에 횃불을 놓았다.[77] 연경원주에서 명칭이 다시 변경되었다. 역사에서는 원성왕후가 둘째 아들 정종을 낳고 연경궁(延慶宮)으로 승격됐었지만, 드라마에서는 '연경궁주' 로 바로 변경되었다.[78] 여러모로 고려, 그리고 현종에게 운이 따라준 상황으로 백성들이 합류하기 직전까지 소배압은 부관들의 퇴각 권고에도 기만전술을 간파하고 전진하려고 했다. 사실상 결정적 승리의 기회를 눈 앞에서 놓치고 만 것으로 이후 고려 기병대가 합류한 뒤에야 이를 알게 되자 격노한다.[79] 김종현은 "상원수께서 개경을 지키라고 하셨다."라고 말했지만, 현종은 "여긴 괜찮다. 오히려 상원수를 도와 거란군을 전멸시켜야 한다."라면서 보냈다.[80] 이때 흘러나온 음악은 고려 거란 전쟁 1부의 마지막회인 16회에서 현종이 폐허가 된 개경 정전 앞에서 통곡하고 있을때 강감찬이 몸도 편치 않은 상태여도 현종과 재회하고 껴안으면서 위로하면서 둘 다 비를 맞으면서 슬픔을 나눌 때 나왔던 그 음악이다. 이렇게 폐허가 된 황궁 정전 앞에서 현종과 강감찬이 재회해 비를 맞으며 서로 슬픔을 나눈 장면에서 나온 음악이 이번에는 같은 장소에서 강감찬이 이별하는 음악을 흘러나와서 고려 거란 전쟁을 끝까지 봐온 시청자들에겐 매우 서글픈 장면일 것이다.[81] 이 시점에 유일하게 생존해있는 사람이다. 또한, 실제 역사에서는 숭덕궁에서 남은 여생을 살 수 있게 배려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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