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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35:16

한국광복군/지휘체계 및 배치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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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기본 정보3. 총사령부4. 제 1지대
4.1. 제 1징모분처4.2. 조선의용대의 제 1지대 편입 배경4.3. 제 1지대 본부 | 舊 조선의용대(잔류파)4.4. 제 1지대 제 1구대 | 舊 조선의용대(잔류파)4.5. 제 1지대 제 2구대 | 이소민(李蘇民) 부대, 舊 조선의용대(잔류파)4.6. 新 제 1지대 제 3구대 | 제 9전구 공작대4.7. 舊 제 1지대 제 3구대, 舊 조선의용대(연안파)4.8. 한국광복군 주인면 공작대(韓國光復軍駐印緬工作隊)
4.8.1. 인면전구공작대 서훈 문제
5. 제 2지대(1942.8.1. ~ 1946.5.16.) | 舊 제 5지대
5.1. 제 2징모분처5.2. 창설배경5.3. 부대인원5.4. 철기 이범석 장군 암살 미수 사건5.5. 편제 및 위치5.6. 초모공작
6. 제 3지대(1942.2. ~ 1946.5.)
6.1. 창설배경6.2. 지대본부6.3. 편제6.4. 초모공작
7. 제 5지대 (1941.1.1. ~ 1942.7.31.) | 舊 한국청년전지공작대
7.1. 나월환(羅月煥) 제 5지대장 암살 사건
8. 제 3징모분처(1941.3.1.)→제 2지대 제 3구대 제 3분대(1942.10.1.)→한교전지공작대(1944~1945.8.15.)9. 그 외의 부대들
9.1. 임시정부 경위대(臨時政府 警衛隊)9.2. 토교대(土橋隊)9.3. 한·중 합동유격대(韓·中合洞遊擊隊)/전시공작대(戰時工作隊)
9.3.1. 한·중 합동유격대(韓·中合洞遊擊隊)9.3.2. 전시공작대(戰時工作隊)
9.4. 한교전지공작대(韓僑戰地工作隊)
10. 한·미 군사특수공작 (韓·美 軍事特種作戰)
10.1. 주중 미국 대사관 한국인 공작반(駐中 美國大使館 韓國人 工作班)10.2. 만주 지구 공작반(滿洲 地區 工作班)10.3. 쿤밍 지구 특파원 공작반 (昆明 地區 特派員 工作班)

[clearfix]

1. 개요

한국광복군의 지휘체계 및 배치상황에 대해 서술한 문서.

2. 기본 정보

파일:FB_IMG_1474737786628.jpg 파일:FB_IMG_1474738078717.jpg
1946년 5월, 한국 광복군 제2지대 대원 기념사진,
한국 광복군의 영어 이니셜 K I A[1]를 집체모양으로 보여주고 있다.
1941년 1월 1일, 한국 광복군 제5지대 창설 기념사진.
1944년 4월 1일 부터 1945년 3월 31일까지의 군무부공작보고서에 있는 것에 따르면 1945년 3월까지의 광복군 병력 수는 총사령부와 그 예하 3개 지대, 그리고 인도전선에 파견된 인원(당시 실제인원 9명)까지 합쳐서 514명에 이르고 있다. 이중 중국군 장교가 65명이니 1945년 말 실제 광복군 인원은 449명인 셈이다.
파일:광복군 배치상황(1944년 말).png
각 지대와 징모분처를 최전선에 두고 일본군을 탈출한 학도병, 일본군 한국인 포로, 중국 내 한인교민 등이 광복군으로 편입되면서 그 숫자는 증가되어 갔다.

파일:임시정부 조직계통표(1944).png
파일:광복군 지휘체계와 광복군 조직체계.png

총사령부, 제3지대(동 제1지대), 제2지대(동 제1지대), 제1지대, 제3구대, 제2구대, 제1구대, 제3분대, 제2분대, 제1분대, 附記:지대 숫자는 정해지지 않았음. 상황에 따라 수시로 증감.
한국광복군 지대부편제표
직별 인수 비고
지대장 1
부지대장 1
부관 1 서무관리
비서 1
사서 2 1명을 지정하여 번역겸임
군의 1
약사 1 간호사무 겸
총무조장 1
총무조원 2 경리사무 주관
총무사서 1 문서 작성
정훈조장 1
정훈조원 3 지도훈련 및 선전사무 담당
정훈사서 1 문서 작성
전달병 2 공문전달 담임
공역 8 지대부 장관들이 함께 부리도록 하되 부관이 지정 파견
취사병 4
합계 : 관 17명, 병 6명, 공역 8명
1. 지대부에는 5와트 무선대 1반을 두되 필요시 군사위원회에서 파견
2. 표 안의 인원은 모두 계급을 표기하지 않았으며 대우는 별도로 정한다.

그런데 한국광복군의 창설 및 조직, 무장활동은 한국임시정부가 독자적으로 진행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활동 무대가 중국이었으므로, 반드시 중국국민정부의 정식 승인을 받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1940년 초반 한국임시정부는 중국국민정부에 한국광복군 창설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 당시 1940년 5월 한국임시정부에서 한국광복군 창설에 대한 세부 계획서를 중국 측에 제출했다. 그것이 바로 「한국광복군편련계획대강(韓國光復軍編練計劃大綱)」(이하 「계획대강(計劃大綱)」)이다.

「계획대강(計劃大綱)」에 담긴 핵심 내용은
“광복군을 편성하여 한 · 중연합군으로 중국군과 연합작전을 전개한다"

이로써 한국임시정부는 중국군과 대등한 관계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계획대강(計劃大綱)」은 먼저 중국국민당 중앙조직부의 심사를 거쳤다. 중국국민당 중앙조직부에서 타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한 부분을 수정했고, 그것을 주쟈화가 1940년 7월 3일 허잉친에게 넘겨 심사 결정을 요청했다. 이것이 결정되면, 한국광복군은 중국국민정부로부터 정식 성립을 승인받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광복군은 정식 성립을 승인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한국광복군의 예속 문제와 관련해서 한국과 중국 측의 의견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한국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韓國光復軍 總司令部)’의 직할로 한다고 했지만, 중국국민당 중앙조직부에서는 한국광복군이 중국국민정부의 ‘군사위원회’에 예속되어야 한다고 「계획대강(計劃大綱)」의 내용을 수정했다.

한국임시정부에 우호적인 중국국민당 중앙조직부에서 조차 한국광복군을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 예속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므로,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를 지원했던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가 어떤 태도를 가졌을 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나중에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 한국광복군을 통제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국임시정부에서는 중국 측과 적극적으로 교섭했다. 1941년 1월 김구와 이청천이 각각 중국국민당 중앙조직부와 중국국민정부 행정원(行政院)에 한국광복군의 활동 방침을 작성한 서신을 보내 한국광복군의 정식 성립을 승인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협조 요청을 받은 중국 측에서는 모두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 관련 사실을 전달했다. 이때 "한국임시정부는 기존의 ‘중국장정(中國壯丁)’을 한국광복군에 함께 편성한다."는 방침을, 중국 측의 ‘참모인원(參謀人員)’을 한국광복군에 파견해 지도와 협조를 바란다는 것으로 변경했다.

한국임시정부가 방침을 바꾸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가 “1940년 겨울 각지의 군사장관들에게 통령(通令)을 내려 광복군의 활동을 엄밀히 취체(取締)[2]하도록”했기 때문이었다. 한국임시정부에서는 한국광복군이 활동하는 데 큰 장애를 받게 되자, 중국 측의 일정한 통제를 받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한국광복군의 활동을 활성화하려고 했다.

한국임시정부가 방침을 바꿈에 따라 중국국민정부도 한국광복군의 정식 성립 승인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1941년 2월부터 5월까지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는 한국광복군의 정식 성립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거쳐 승인 방안을 마련했다. 마침내 5월 30일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 판공청(辦公廳)의 상전(商震) 주임이 주쟈화에게 한국광복군의 정식 성립 문제를 장제스로부터 승인받았다고 전달했다.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의 군령부(軍令部)·정치부(政治部)·조사통계국(調査統計局)과 중국국민당 중앙당부의 조사통계국(調査統計局)에서 참모와 정훈인원(政訓人員)을 선발해 파견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승인 받은 내용은 곧바로 시행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 때문이었다.
1)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의 정식 성립 승인을 반대하는 방해 공작을 펼쳤다.
2) 중국 측이 한국광복군을 국제법상 동맹군으로 인정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한국광복군의 정식 성립 문제는 또다시 난관에 부닥쳤다.

한국광복군의 정식 성립 문제는 1941년 말 장제스의 최종 지시로 일단락됐다. 그해 10월 30일 장제스가 허잉친에게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를 동시에 중국군 군사위원회에 예속케 하고, 참모총장이 직접 통일 장악하여 운용하도록’ 하라고 지시를 내린 것이다.” 장제스가 이런 지시를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1941년 3월에서 7월 사이에 조선의용대 대원 대부분이 중국공산당의 관할 지역인 화베이(華北)로 무단이탈했기 때문이었다.[3]

장제스의 지시를 받은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는 1941년 11월 13일 「한국광복군행동9개준승(韓國光復軍行動九個準繩)」(이하 「9개준승(九個準繩)」)을 작성했고, 그것을 11월 15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로 보냈다. 「9개준승(九個準繩)」은 중국국민정부에서 한국광복군의 정식 성립을 승인한다고 명문화한 것이다. 한국임시정부는 11월 19일 열린 국무회의에서 「九個準繩」을 받아들이기로 결의했다. 이로써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창설된 지 1년 2개월 만에 한국광복군은 중국국민정부로부터 정식 성립을 승인받게 됐다.[4]

3. 총사령부

총사령부 잠행편제표(總司令部 暫行編制表)
직별 원액[5] 계급 직원성명 연령 국적
총사령 1 중장 이청천(李靑天) 55 한국
부사령 1 소장 김약산(金若山)[6] 45 한국
참모장 1 소장 자오더슈(趙德樹) 35 중국
부참모장 1 소장
고급참모 4 소장 채원개(蔡元凱)[7] 48 한국
고문 약간
참의 약간
부원 5
비서 2 중교 1명 조시원(趙時元)[8] 36 한국
비서 소교 1명 저우준정(周均正) 27 중국

참모처
직별 원액[9] 계급 직원성명 연령 국적
처장 1 소장 위안쩌(袁喆) 52 중국
서기 1 상위(중위) 핑주룬(平祖潤) 27 중국
사서 3 소위(준위) 장카이간(張開乾) 22 중국
사서 3 소위(준위) 리우롱푸(劉榮富) 29 중국
사서 3 소위(준위) 양쳉(楊誠) 24 중국

참모 제 1과
직별 원액[10] 계급 직원성명 연령 국적
과장 1 상교
참모 6 상교
참모 6 중교 각 2명 이석화(李錫華)[11] 32 한국
참모 6 소교

참모 제 2과
직별 원액[12] 계급 직원성명 연령 국적
과장 1 상교 왕롱성(汪榮生) 31 중국
참모 4 상교 1명
참모 4 중교 2명 리우한딩(劉漢鼎) 32 중국
참모 4 소교 1명

참모 제 3과
직별 원액[13] 계급 직원성명 연령 국적
과장 1 상교
참모 4 상교 1명
참모 4 중교 2명
참모 4 소교 1명 린민시안(林敏賢) 29 중국

총무처
직별 원액[14] 계급 직원성명 연령 국적
처장 1 소장 최창석(崔滄石)[15] 39 한국
서기 1 대위(중위)
사서 3 소위(준위) 구이쩌정(桂則徵) 25 중국
사서 3 소위(준위) 쉬춘무(許春木) 24 중국
사서 3 소위(준위) 린화(林驊) 24 중국

서무과
직별 원액[16] 계급 직원성명 연령 국적
과장 1 상교 김자동(金紫東)[17] 47 한국
과원 6 송욱동(宋旭東)[18] 43 한국
과원 6 펑센(馮森) 35 중국
과원 6 소 2 조인제(趙仁濟)[19] 26 한국
과원 6 상위 2 박영준(朴英俊)[20] 24 한국
과원 6 왕린(汪霖) 24 중국

경리과
직별 원액[21] 계급 직원성명 연령 국적
과장 1 상교 마치펑(馬起鵬) 34 중국
과원 6 중 2 천자수(千自虽) 34 한국
과원 6 루오저룬(羅澤潤) 29 중국
과원 6 소 2 진우양(靳午陽) 31 중국
과원 6 상위 2 저우페이란(周斐然) 27 중국

의무실
직별 원액[22] 계급 직원성명 연령 국적
주임 1 상교 유광파(劉光波)[23] 36 한국
군의 1 중교(소교)
사약 1 중교(소교)
간호병 2 중사(하사)

정훈처
직별 원액[24] 계급 직원성명 연령 국적
처장 1 소장 황샤오메이(黃紹美) 42 중국
필서 1 중교 야오징가오(姚景高) 27 중국
서기 1 대위(중위)
서사 2 소위(준위) 지안지옹(簡烱) 28 중국
서사 2 소위(준위) 당타이한(唐泰韓) 26 중국

선전과
직별 원액[25] 계급 직원성명 연령 국적
과장 1 상교 양하이롱(楊海龍) 30 중국
과원 4 중교(소교) 홍챵샹(洪長祥) 31 중국
과원 4 중교(소교) 타오한칭(陶漢淸) 28 중국
과원 4 중교(소교) 원다펑(文大鵬) 31 중국

조훈과
직별 원액[26] 계급 직원성명 연령 국적
과장 1 상교 천딩지우(陳鼎九) 26 중국
과원 4 중교(소교) 황샤오치(黃紹琦) 29 중국
과원 4 중교(소교) 렌쩡귀이(任正貴)
과원 4 중교(소교) 쉬페이페이(徐佩飛) 22 중국
과원 4 중교(소교) 슈진신(舒金鑫) 26 중국
위사 7 중(6) 하(1)

4. 제 1지대

4.1. 제 1징모분처

초대 제 1지대장은 이준식(李俊植)으로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이 임시정부 아래 창설되자 광복군 제 1지대장 겸 제1징모분처(第一徵募分處) 주임위원으로 산시(山西)·다퉁(大同)에 주둔하게 되었다.
파일:징모제1분처 위치.png

1941년 산시성으로 지대를 이끌고 출발해 노태준(盧泰俊)·안춘생(安椿生)·노복선(盧福善)·조인제(趙仁濟)·이건우(李健宇)[27]·김자동(金紫東)·이석화(李錫華) 등 제1지대 간부들은 산서성 주석이며 중국군 제 2전구 사령장관인 옌시산(閻錫山)에게 광복군 전방공작에 대한 협조를 요청하는 총사령부 공문을 전달하여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싼시성(山西省) 북부 따퉁(大同)을 중심으로 하여 적 점령 하에 있는 타이위안(太原), 스좌좡(石家莊), 린펀(臨汾) 등의 주요 도시에 거주하는 한국 교포를 대상으로 초모, 선전, 첩보공작을 전개하는 한편 중국 유격대와 협조하여 유격전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1942년 약산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제 1지대로 편입되면서 이준식(李俊植)은 임시정부의정원의 비서장이 된다.

4.2. 조선의용대의 제 1지대 편입 배경

조선의용대 창설 배경
1938년 6월, 일본군은 제 2군, 제 11군 등 도합 9개 사단, 3개 여단과 해공군 각 1개 부대씩 모두 약 35만명을 동원하여, 중국 파견군 사령관 하타 슌로쿠(畑 俊六, 1879.7.26. ~ 1962.5.10.)의 지휘 하에, 허난성(豫), 안후이성(晥), 장쑤성(蘇), 황판취(黃泛區)를 포위하고, 다시 허페이(合肥), 우후(蕪湖), 난징(南京) 일대에 집결, 우한을 협공하고자 하였다.

우한삼진(武漢三鎭)[28]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곳은 중남과 서남의 문호로서, 일단 함락이 되면 그 결과는 엄청난 비극으로 이어질 형편이었다. 따라서 국민당은 우한 일대에 대부대를 집결시켜, 일본과의 결전을 준비하였다. 우한의 광범한 민중들도 침략자에 맞서려고 궐기하여, 「우한보위」의 열기는 고조되었다.
파일:FOREIGN201409081105000048951225927.jpg
우한을 지키자고 시위하는 우한 시민들

세계적으로 정의를 수호하려는 국가들도 속속 지원대를 파견하였다. 예를 들면, 소련의 항공지원대, 인도의 구호대 등이 우한보위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러한 격동 속에서, 1938년 10월 10일 국민당 정부 군사위원회의 지지하에 조선민족진선연맹은 우한에서 「조선의용대」성립대회를 거행하였다.

일본 공산주의자 아오야마 카즈오 靑山和夫(본명 : 구로다 젠지黑田善次)[29] 건의로 국제의용군 건립안 중국군 당국자 왕펑성(王芃生)에게 올렸고 장제스가 이를 승인하였으며 이후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가 주관하여 조선의용대가 건립되었다.
<국제의용군 제 1대 조직 계획방안>

① 본 의용군은 반드시 중국 군사 최고 통수의 지휘 아래 통제받고 활동해야 한다.
② 본 의용군의 지도는 동맹 중앙집행위원회가 집행한다.
③ 본 의용군 제 1대의 조직은 다음과 같다.
- 첫째 : 대본부 조직
- 대장 1명, 정치공작담당 3명, 참모 3명
- 본부는 3개의 분대로 나누며, 1개 분대는 3개의 소대로 나누고, 1개의 소대는 3명으로 함. 1개 분대는 27명이다.
- 복장 : 군사 행동의 편리를 위하여 반드시 일정한 복장을 한다. 임시로 1대를 100명으로 예상하여 아래와 같은 복장을 준비한다.
군복 100벌
군모 100개
각반 100쌍
식량주머니 및 물병 100개
혁대, 군화, 모포 각100개
병기 (간편을 원칙으로 하고 전원 무장) 자신들이 가져온 소총 100정에 탄환 3만발과 피탄피(皮彈皮)[30] 100개를 배부, 체코제 ZB vz.26 경기관총 4대에 탄환 2만 발과 수류탄 1천 발을 배부

<의용군 조직의 설명>
① 의용군의 이용 : 의용군은 일개 부대가 단독으로 활동하지 못하며 1개 소대 혹은 1개 반을 단위로 하여 중국 군대 중에 참가시킨다.
② 1개 소대 혹은 1개 반이 교대로 각지에서 활동하게 한다. 나머지 미참가자에게는 정치 훈련을 실시한다.
③ 1개 소대 혹은 1개 반 단위의 의용군은 중국 각 전시단체와 함께 활동하도록 한다.
④ 상술한 전투 및 기타 실제 활동에 의해 각자의 능력을 시험하여 ②항을 처리한다.

왕펑성 王芃生, 아오야마 카즈오 靑山和夫, 김원봉은 모두 조선인 군사대오 건립에 적극적이었고 협조관계를 유지하였으며 국제의용군 건립안은 사실상 공동으로 만든 안이었다. 그러니 이해관계는 상호 완전 일치된 것은 아니었는데 왕펑성 王芃生, 아오야마 카즈오 靑山和夫은 이 군사대오를 자신들이 주관하는 극동반파시스트동맹 지휘 하에 두려고 했으며, 김원봉 등 조선인들의 자주성을 보장받기 위해 극동반파시스트동맹의 지도하에 두는 것에 반대하였다.

조선의용대가 국제의용군의 성격을 띄는 것은 중국인 대원도 있었지만, ‘권혁’(權赫)이라는 한국식 이름을 가진 일본 여성대원이 있었다. 이 일본인은 조선의용대의 취지에 공감하고 1938~39년경 조선의용대에 자발적으로 가입한 특이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1941년 6월 28일 화북지방의 전선에서 활동하다가 다른 조선의용대원들과 함께 중국공산당의 근거지인 延安으로 왔다. 이에 화북조선청년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 섬감녕변구분회(陝甘寧邊區分會)는 조선의용대원들의 연안 이동을 환영하는 집회를 가졌다.

이때 그녀는 조선의용대에 참가한 감상과 연안에 온 후의 감상을 이야기하여 조선의용대원은 물론 다수의 중국인들까지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31]

「조선의용대」 산하에는 3개의 지대(支隊)가 편성되고, 김약산을 대장, 박효삼을 부대장에 취임하여,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의 직접 지휘를 받게 되었다. 「조선의용대」는 그 성립 선언에서
우리들은 식민지 노예를 원치 않는 수천 수백만 한국 동포의 궐기를 촉구하기 위하여, 조선의용대의 깃발 아래 모였다. 나아가 파시스트의 압박 하에 있는 모든 군중을 결집하여, 우리들의 진정한 적인 일본 파시스트 군벌을 타도함으로써, 동아시아의 진정하고 영구적인 평화를 달성하고자 한다. [32]

조선의용대가 성립되었을 때, 우한전선은 매우 긴박하였다. 그 때문에 조선의용대는 즉시, 우한회전(武漢會戰)의 전방 진지에 배속되어, 중국 군대와 함께 대일 전투에 임하였다. 조선의용대의 전사들은 대부분 유창한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담당한 주요 임무는 대적 선전 공작이었다.[33]

우한이 함락된 뒤에도, 조선의용대의 일부 대원은 제 1, 제 3, 제 5, 제 9전구에서 중국군에 배속되어 전투를 계속하였다. 그 밖의 대원들은 대장 김약산의 지휘 하에 중국의 관련 부서를 따라 1938년 12월, 광시성(廣西省) 꾸이린(桂林) 뚱먼(東門) 밖 뚱링가(東靈街) 1호로 이동하였다. 여기를 근거지로 하여 광시성(廣西省) 일대에서 항일 선전공작을 수행하였다.

1939년 9월 중순, 일본군 약 10만 명이 해군, 공군의 협조 하에 창사(長沙)를 공격하였다. 중국 수비군은 용감하게 저항하여 제 1차 창사회전(長沙會戰)이 시작되었다. 제 9전구에 남아 있던 조선의용대는 명령을 받고 중국 군대에 배속되어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강인한 전투정신을 발휘하였다. 그들은 포화를 무릅쓰고 적 진지에 접근하여 확성기로 선전하였다. 어떤 때에는 적군과 육박전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마침내 중국 수비군과 함께 창사를 사수할 수 있었다.

제 1차 창사회전 뒤, 조선의용대 본부는 각기 다른 지역, 다른 상황을 고려하여 「조선의용대 공작 계획」을 수립하였다.
1. 전구 사령부 공작에 대한 협조
① 적정(敵情) 정보를 수집하고, 적의 방송을 청취하고, 적의 문건을 번역 정리하고, 포로를 심문한다.
② 대적 공작원을 훈련시킨다. 예컨대, 단기 일본어 훈련반을 설치하여, 부대 장변들에게 일본어 학습을 도와주고, 대적 선전의 기술과 방법을 일러준다.
③ 포로를 교육시킨다. 여기에는 일본군 포로와 한국 국적 포로가 포함된다.

2. 전선공작
① 전선에 배치된 우군 부대를 대상으로, 전체 장병에게 대적 선전 훈련을 한다.
② 대적 선전공작은 「전투지 선전대」를 조직하여, 참호에서 직접 대적 선전을 하고, 적군의 와해를 도모한다. 또한 유격 선전대를 조직, 적 후방에 침입하여 대적 무장선전을 전개한다.

3. 일반 군민에 대한 선전공작
① 일반 민중에 대한 선전을 통하여, 광범한 민중의 항전 의식을 고취시키는 동시에, 한.중 민족간의 우의를 증진한다.
② 병사의 위로 공작으로 위문단을 조직하여, 장병에 대한 수시 이동 위로 공작을 한다.

4. 윤함구 공작
유격지역에서 대적 선전을 진행하는 동시에, 적 후방에 깊이 침투하여, 적 전구 내의 한국 동포들이 중국 항전에 참가하도록 유도한다.

그 뒤부터 조선의용대는 이 계획에 근거하여, 각 전구에서 공작을 전개하였다. 당시 조선의용대 대원은 6개 전구 13개 성에 분산되어, 거의 모든 국민당 군대 내에서 선전공작에 협조하였다. 또한 조선의용대는 총부의 배치 계획에 따라, 선전대를 적 후방에 파견, 광범한 민중에게 항일 구국의 당위성을 선전하였다. 한국 주권 상실의 생생한 예를 들어, 적 후방 민중에게 오직 철저한 항전과 일본 파시스트 군벌의 타도 만이, 우리들 자신을 해방하는 길이라고 역설하였다. 그들의 선전은 좋은 효과를 가져와, 적 후방의 백성들은 많은 감동을 받았다.

1940년 3월, 김약산은 본부 대원을 이끌고 충칭에 도착하였다. 그 후 조선의용대는 본부를 충칭시(重慶市) 어꿍바오(鹅公堡)에 설치하고, 계속 각지 의용대의 항일 투쟁을 이끌었다.

한국광복군 창설 및 조선의용대 통합시도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이 충칭에서 성립된 뒤, 중국 내에서는 두 개의 한국 혁명 무장세력이 출현하게 되었다. 항전의 형세가 갈수록 심각해짐에 따라, 이 두 무장 세력의 지도자들은 피차간의 연합하여 지도를 강화하고, 통일된 지휘 체계를 갖추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다.

이와 동시에, 국민정부 군사위원회도 이 두 부대가 통합되기를 희망하였다. 여러 차례의 토론과 협상을 거쳐, 최종적으로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는 1941년 5월 15일 명령을 내려, 「조선의용대」를 「한국광복군」에 편입시키고, 이청천을 광복군 총사령으로, 김약산을 부사령 겸 제 1지대[34] 대장에 임명하였다.

김약산을 대장으로 하는 조선민족진선연맹의 지도 하에 있는 무장세력으로, 그들은 한국광복군의 성립에 대하여 계속 반대 태도를 취하였다.
"한국광복군은 각 당파 합작의 기초 위에 건립된 것이 아니다."

라고 하거나
"진정하고 명실상부한 국군이 될 수 없다."
고 하였다. 더욱이
"한국광복군이라는 명칭은 복고적인 색채가 농후하여, 적극적인 혁명 의지가 나타나있지 않다."
[35]
고 주장하였다. 그 결과 쌍방간에는 때때로 상호비방과 상호쟁탈전이 벌어졌다.[36]


우한보위 이후
1938년 우한이 일본군에게 포위 공격당하여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조선의용대는 국민당과 함께 퇴각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포위를 뚫고 퇴각하는 과정에서 조선의용대 4개 지대(구대)는 각기 분산되어 사실상 각 지대 지휘관들이 독자적으로 지휘권을 행사하면서 부대를 전개하게 되었다.

약산 김원봉은 우한에서 퇴각한 후 자신이 이끌던 조선의용대 본대 90여명 병력과 함께 국민당의 수도 충칭에서 머물고 있었다. 나머지 3개 지대는 국민당의 수도인 충칭으로 퇴각하지 않고 중간지대에 머물렀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서 김원봉 자신이 직접 이끄는 본대를 제외한 나머지 3개 지대에 대한 통제권이 크게 약화되었다.

잔존파 조선의용대는 편제상으로 충칭(重慶)의 지대본부, 후베이성(湖北省) 라오허커우(老河口)에 제 1구대와 저장성(浙江省) 진화(金華) 제 2구대를 갖추고 있었고 각 구대에는 3개 분대를 편제한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대원수는 지대본부에 42명, 제 1구대에 27명, 제 2구대에 23명 등 모두 92명 정도로 추정된다.

최창익과 대립
민족혁명당 내에 조소앙, 지청천 등이 떠난 뒤에도 최창익운 김원봉과 수시로 마찰을 빚었다. 그 후에도 "민족혁명당을 계급정당으로 만들어야 된다."고 주장하는 최창익 세력과 "중국 안에서는 우리 민족의 계급적 토대가 없어서 계급을 대표하는 정당은 있을 수 없으므로 민족혁명당은 일본 제국주의 타도와 민족해방과 함께 민주공화국의 건설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김원봉 세력 사이에 대립이 있었다. 그는 김원봉이 이념이 선명하지 못 하다고 보고 불만을 품게 된다.[37]

중국과의 연합전선을 수립하는 문제에서도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 국민당과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김원봉은 국민혁명군과의 연합전선을 바랬는데 반해, 민족혁명당을 계급 정당으로 만들려 했던 최창익은 중국 공산군인 신쓰준(新四軍)과 연합을 바랐다.

1939년 조선의용대 제 2지대가 허베이성(河北省) 제 5전구에서 활동한 것을 계기로 조선청년전위동맹을 필두로 한 제 2지대안에 신쓰준(新四軍)의 지하조직이 세워진 뒤부터 일부 대원들이 중국공산당원이 되었고,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 내에서 약산 김원봉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던 조선청년전위동맹의 위원장 최창익은 중국공산당과 결탁하여 김원봉과 국민당의 허가없이 병력을 이끌고 무단으로 이탈하여 중국공산당의 본거지인 화북의 옌안(延安)으로 가서 중국공산당과 그 휘하의 팔로군과 연계했다.

거기다가 1940년 저명한 독립운동가이자 한글학자였던 김두봉이 자신의 첩이 다른 아나키스트 김진익과 불륜, 임신한 사실과, 상하이 임시정부내 보수주의자들과의 갈등으로 임정 참여를 거부하고 옌안으로 떠나자 최창익은 우리도 떠날 때라며 전시복무단원은 물론 조선의용대내 사회주의자들에게도 함께 화북으로 가자고 연락하였고, 각 소대 내 사회주의자들이 이탈하여 그를 따랐다.

최창익은 김두봉, 김무정, 한빈 등 연안에 있던 한인 공산-사회주의들과 규합한 후, 이들과 함께 다른 조선의용대 지대도 중국공산당의 근거지인 연안으로 합류할 것을 설득, 종용했다. 이에 다른 병력도 동요, 이탈하여 화북으로 합류하기 시작했다. 옌안(延安) 합류 여부를 놓고 1940년 11월 조선의용대 확대간부회의가 열렸고 여기서 김원봉의 의견에 반(反)하여 조선의용대의 옌안(延安) 합류가 의결되었다. 김원봉의 본대 병력 90여 명은 충칭에 잔류하였으나, 나머지 지대는 모두 화북으로 떠나 1941년초까지 옌안(延安) 합류를 완료했다.[38]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황허(黃河)를 건너 중공 측에 가담하게 된 경과

한국광복군총사령부

1941년

조선의용대는 원래 중국군사위원회 정치부에 직속되어 대적 선전활동을 전개하던 한적 청년단체로 중화민국 27년(1938) 10월 10일 우한(武漢)에서 성립되었습니다. 총대장 김원봉(金元鳳)(일명 김약산金若山, 별명 진국빈陳國斌) 휘하의 조선의용대는 3개 지대에 1백 명 전후의 대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원들은 모두 적색청년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의는 국가와 민족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때문에 그들의 행동과 이론은 완전히 소련 및 중공의 의사에 따라 바뀌었습니다. 시국에 대한 저들의 관점도 우리와는 전혀 딴판입니다(이 부분은 조선의용대의 간행물인『전고(戰鼓)』제 1호(第 1號)를 참고하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중국의 항전건국 이론에 대한 조선의용대의 입장은 중공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중공을 동정하고 지지하는 조선의용대는 과분할 정도로 중공을 중시하였습니다. 조선의용대의 주된 활동무대는 비록 黃河 이남이었지만 저들의 마음은 河北(중공 활동구)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저들의 숙원은 하루속히 ‘중공천당(中共天堂)’에 들어가 활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들은 지난 3~4년간 오직 도하할 기회만 엿보고 있다가 마침내 금년 3월 하순부터 6월 하순에 걸쳐 3개 지대원 1백여 명이 모조리 ‘화북 적후공작 전개’라는 명분으로 황하를 건너고 말았습니다.

조선의용대 제1 · 제2 두 지대는 한커우(漢口)에 있을 때부터 이미 도하의 뜻을 품고 있었습니다. 저들이 지난 3년간 뤄양(洛陽) · 라오하커우(老河口) 일대로 주재지를 옮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저들은 그간 부단히 옌안(延安)과 연락을 취해왔습니다. 민국 28년(1939)에는 조선의용대원 수십 명이 연안의 항일대학에서 훈련을 받기도 하는 등 오래전부터 도하의 준비를 하였으나 조건들이 맞지 않아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습니다. 특히 낙양의 군사당국은 조선의용대의 동태에 대해 엄밀한 감시를 진행하고 도하증명서를 발급하지 않아 조선의용대는 숙원을 이루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금년 3월 상순, 조선의용대 제3지대는 충칭 重慶에서 뤄양으로 주재지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이때 총대장 김원봉과 박효삼 朴孝三(이 두 사람은 모두 중앙군관학교 제4기 졸업생인 관계로 중국인 친구들이 매우 많습니다) 등은 충칭과 뤄양에서 도하증명서를 얻어내기 위해 운동을 진행하였고 마침내 금년 3월경 낙양에서 제 3지대의 도하허가증을 발급받게 되었습니다.

조선의용대는 3월 하순, 박효삼(朴孝三) · 양민산(楊民山) · 김세일(金世日) · 이춘남(李春南) 등의 영도 하에 우선 제 3지대원 전부를 린현(林縣)의 중국군 제 40군 주방지로 이동시키는데 성공하였습니다(이곳은 중공군 주둔지와 50華里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입니다). 이로부터 채 한 달이 못되어 조선의용대 제 3지대는 40군의 주방지를 벗어나 중공군 활동구역으로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뒤를 이어 낙양과 노하구에 주재하고 있던 조선의용대 제 1 · 제 2지대도 정치부의 명령을 어기고 김학무(金學武) · 왕자인(王子仁) · 호철명(胡哲明) 등의 인도 하에 6월 하순 남몰래 황하를 건너 중공의 품에 안기고 말았습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조선의용대는 황하를 건너기 오래전부터 두 가지 수속을 준비하였다고 합니다. 첫 번째 수속은 ‘화북 적후공작 전개’라는 명분으로 군사위원회 정치부에 요구하여 화북의 각 전구사령부에 정치부 명의로 조선의용대의 활동에 협조를 제공하라는 통령을 내리도록 한 것입니다. 두 번째 수속은 제18집단군 당국과 사전에 결탁을 모의한 것입니다.

현재 대원 전부가 중공 활동구역 내로 들어간 조선의용군은 이미 중공 및 재화조선청년연합회(在華朝鮮靑年聯合會) - 이 단체는 마오쩌둥(毛澤東)의 영도 하에 한적 공산분자 이건우(李健宇) · 허정숙(許貞淑, 여성) · 무정(武丁, 한적 공산당원으로 현재 18집단군 모 사단의 포병연대장을 맡고 있음) 등이 주도하고 있습니다)에 참가하여 화북의 한교들을 적화시키는 공작을 개시하였다 합니다.

조선의용대는 계속하여 중국당국을 속이기 위해 총대장인 김원봉은 여전히 중경에 머물며 껍데기뿐인 조선의용대 대본부를 지키고 있습니다. 아울러 낙양과 노하구 등지에는 3-5명의 노쇠하고 병든 대원들을 남겨 판사처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당국을 속이기 위한 연막전술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상의 사실들은 모두 믿을만한 것들입니다. 조선의용대 대원 가운데 공산당이 되기를 거부한 대원 몇 명이 이미 한국광복군에 귀순하였는데 이들의 진술 또한 이와 같았습니다.

아마도 위 문서는 이청천 총사령관이 쓴 글로 보이는데, 실제로 조선의용대가 편입되고 나서도 김약산 제 1지대장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문서이다.

백산 지청천 장군과 약산 김원봉과의 악연의 시작은 1935년 민족혁명당 내부의 권력 투쟁 결과 김원봉, 김두봉 등 사회주의 계열이 당권을 장악하자 지청천, 조소앙, 김규식, 신익희 등 우파 민족주의자들은 집단 탈당하게 된다. 민족혁명당 탈당 후 지청천은 조선혁명당을 창당하고 조소앙은 한국 독립당을 재창당, 김구는 한국 국민당을 창당하였는데 이 3당을 중심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돌아가게 되었다. 이후 1940년 3당을 합당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통합 정당인 한국독립당이 탄생된다.

더 올라가서 서일 총재를 대표로 한 대한독립군단 시절 지청천 장군은 자유시 참변(1921)을 겪었었다. 이는 독립운동계에 끼친 영향은 엄청났는데, 바로 매카시즘이 일어나기에 앞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극도의 반공주의를 확산시키는 데에 기여했다. "소련 적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니까 우리편" 으로 생각했는데, 배신을 겪었다는 감정과 함께 "공산당은 상종할 놈들이 아니다", "공산당은 결국 분열을 일삼는다" 라는 인식을 깊이 심어준 사건이었다.
총사령 이청천에 대한 불만에 관한 정보(1942. 6. 11)

문서번호 侍泰第4640號

발신자 : 군사위원회 시종실(軍事委員會 侍從室)
수신자 : 우티에청(吳鐵城)

民國 31(1942)년 6월 11일
한국광복군 겸임 제 1지대장 김약산(金若山) 등의 한국광복군총사령 이청천에 대한 불만에 관한 상황 정보

한국광복군 제1지대는 본시 조선민족혁명당 분자들에 의해 조종되었습니다. 최근 한국광복군의 개조(改組)로 김약산이 지대장직을 사임하고 김약산 계열의 송수창(宋壽昌)이 제 1지대장직을 계임하기로 발표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국광복군총사령 이청천이 돌연 한국독립당의 조시원(趙時元:한국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趙素昻의 동생)을 제 1지대 정치지도원에 임명한다고 발표하여 김약산과 송수창 등의 불만을 자아내게 되었습니다. 김과 송은 이청천이 사전에 자신들의 의견을 물어보지 않은데다 통수부에 청시(請示)[39]하지도 않고 임의로 발표한 인사명령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불만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이에 송수창은 사의를 표명하였고 김약산은 “‘한국독립당’ 분자들은 이런 방법으로 ‘조선민족혁멱당’ 당원을 흡수하려는 책동을 버려야 한다”고 김구 등을 힐난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약산 김원봉과 대동청년단 지청천, 조선민족청년단 이범석과의 악연은 광복 이후 미군정 시절에도 계속 이어지게 된다.

약산 김원봉이 옌안(延安)에 있는 중국 공산당과의 합작을 거부한 것은 난창 폭동 때 중국공산당에 토사구팽당한 후, 중국이나 소련 공산당과 절대 연계하지 않고, 좌우 독립운동가들과 합작하며 독자적인 조직을 유지하겠다는 그의 강한 신조 때문이었다. 또한 누구에게도 지시받는 것을 싫어하고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어 스스로 명령할 수 있어야 직성이 풀리는 김원봉의 성격 때문이기도 했다. 장제스는 돈만 대줄 뿐 크게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않았고, 장제스와는 뜻이 맞지 않으면 서로 헤어질 수 있었지만, 공산당은 전혀 다른 차원의 조직이었다.

1940년대 당시 전세계 공산당 조직은 모두 각지의 독립혁명을 위해 코민테른에 종속되어 그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것이 원칙이었다. 때문에 코민테른 그 자체나 다름없는 소련 공산당이나 그에 못지 않은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중국공산당과 연계한다면 공산당 조직의 특성상 철저하게 종속될 것이 뻔했다.[40] 김원봉은 이러한 상황은 원치 않았던 것이다.

한편 최창익이 옌안(延安)으로 이탈한데 이어 다른 지대도 최창익을 따라 옌안(延安)으로 이탈하자 다급해진 김원봉은 이탈한 조선의용대의 통제권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 직접 옌안(延安)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통제권을 장악한 최창익과 김두봉, 김무정 등이 이를 필사적으로 반대했고, 난창 폭동 이래 김원봉과 관계가 틀어진 중국공산당 역시 김원봉의 합류를 반대했다. 결국 신변 안전 및 지휘권 회복이 어렵다고 판단한 김원봉은 연안 방문을 포기했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에 대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아래에 나와 있는 김원봉의 유명한 영상물은 조선의용대의 주력이 그를 배신하고 화북으로 이탈하고 있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촬영된 것이었다.
파일:attachment/Yaksan03.jpg
1940년에 촬영된 조선의용대 선무공작 영상조선의용대장 김원봉

1941년 4월, 윤세주와 박효삼이 끝내 김원봉과 결별하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떠났다. 윤세주와 박효삼은 김원봉의 최측근이었다. 윤세주는 김원봉과 같은 밀양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동네에서 함께 자랐고, 이후 의열단, 황포군관학교, 난창 폭동, 조선혁명간부학교, 조선의용대에 이르기까지 이때까지 평생에 걸쳐 김원봉과 생사를 함께 해왔던 아우이자 동지였다. 황포군관학교 시절 알게 된 박효삼은 김원봉의 최측근이 되었고, 김원봉은 그에게 조선의용대 제1지대(본대)의 지대장을 맡겼었다. 이 둘의 이탈은 김원봉에게 커다란 충격과 상처를 주기에 충분했다.

김승곤 지사의 인터뷰에서는 조선의용대 제 2차 챵샤회전(第二次 長沙會戰 | 1941년 9월 6일 ~ 10월 8일)이 끝나고 조선의용대가 독자적인 활동노선과 영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화북진출을 결정하면서 제 9전구에 배속되어있던 조선의용대 제 1구대 1940년 3월 뤄양(洛陽)으로 북상할때까지 진행되면서 1구대 조직체를 조선의용군에게 뺏기게 된다.
Q : 죽었다구요? 구대원[41] 중에서 한 30명이 죽었습니까?
김승곤 : 아니 지금은 없어요. 지금.

Q : 아, 지금은 안 계신다구요. 그 당시는 1개 구대가 몇 명 쯤 되었습니까?
김승곤 : 제한이 없죠.

Q : 예, 그냥. 보통 한 30-40명 되었습니까?
김승곤 : 네. 한 30명 되었어요. 그리고 산서성 염석산부대, 염석산부대. 거기 가서, 광복군 2지대 사람들이 거기 있었거든. 그걸 알았어요. 알고, 그래 북쪽으로 가자. 그래서 신악 선생을 구대장으로 하고, 이대호라고, 여기 와서 대구대학 교수했습니다. 거기서 중산대학 영어과를 나와서 교수하다가 현장에 나와서 우리와 행동을 같이 했는데, 그래갖고 일행이 같이 가 갔고는, 중국에는 자동차 한 대가 없어요. 교통편이 없으니까 호남성 의용대 대부분이 계림에서 출발해 가지고 하남성 낙양까지 도보행군을 했어요.

Q : 아, 걸어가셨습니까?
김승곤 : 걸어가지 어떡해요. 걸어갈 수 밖에. 도보 행진을 할 수 밖에. 광복군 2구대가 호북성 … 호북성 노하구, 늙을 노(老)자, 물 하(河)자, 입 구(口)자. 그 지명이라요. 거기 있었어요. 지금 거기서 우리를 잡을려고 그래요.

Q : 일본군들이요?
김승곤 : 아니 한국 사람. 조선의용대 2구대가. 거기서 우리를 잡을려고 그래요. 우리는 산서성으로 간다. 거기서 다시 낙양을 향해서 행군을 해가지고…

Q : 잡을려고 한 이유는 같이 행동을 하자 그런 뜻으로 그랬습니까?
김승곤 : 그렇지요. 그런데 2구대는 허정숙이 알지, 허정숙이, 허헌이 딸, 최창익이 고려공산당 한빈, 이런 사람들이 거기 있어요. 거기서 우리를 완전히 공산주의자 만들려고 …

Q : 그때 그러면 그 2구대가 공산주의 계통인 줄 … 왜 활동을 같이 안 하겠다고 하셨습니까? 이유가 있었습니까?
김승곤 : 김원봉이가 독립운동 최초에 일본놈 개새끼하고 친일파만 오지 말라 그러고, 그러고 친일파를 제외한 좌파를 끌어들였어요. 아, 자유주의하고 민족주의하고 좌파를 끌어 들였어요. 그래가지고 그해 가을에 들어왔을 거에요. 남경을. 그러고 얼마 있었는데, 이 놈들이 전부 빨갱이로 만들어논거여. 허정숙이가 유명하지 않습니까? 허헌이 딸로서. 공산주의자로. 그래가지고, 그걸 거역하니까, 우리를 붙잡을려고 해서 뿌리치고 우리는 낙양으로 간다. 낙양성에는, 거기 조선의용대가 좀 있어요. 거기서 일이 생겼어요.

Q : 일이 생겼다구요?
김승곤 : 거기서 우리가 폭행을 당했어.

Q : 일본놈의 폭격을 당했다구요?
김승곤 : 아니 폭행을, 김창만이 아세요? 이북 운수상까지 했던, 사람이 똑똑해요, 김창만이, 그놈들한테 우리가 테러를, 테러를 맞았어. 저희들하고 같이 안 했다고. 그래서 우리 사이에 비밀이 새서 여기 같이 못 있겠다고, 호북군 광복군 있는데, 그때는 이미 광복군이 생겼어요. 서안으로 가자. 비밀리에 회의해 갖고 깜쪽같이 결정해 놨는데 그 비밀이 깜쪽같이 샜어. 비밀이 새 갖고, 불리한 입장에서 우리가 수가 부족하니까. 테러를 당했는데 …

Q : 그쪽에 수가 많았던 모양이지요?
김승곤 : 숫자가 많았지요. 그래서 우리를 산산히 분산시키는거야. 그들의 목적은 연안으로 가는거야, 연안. 그런데 그자들은 우리 파를 하나 둘씩 해서 보내. 분산시키려는 거야. 그런데 나는 왜 안 갔느냐? 조선의용대 제1구대 앨범을 못 보셨지요? 조선의용대 제1구대 앨범을 만들었는데, 그 …

Q : 앨범을요? 아, 사진도 그 때 찍었습니까?
김승곤 : (사진 촬영하기가) 불편하죠. 사진 찍기가. 내 한 부 드리죠. 광복군, 아니 조선의용대 1구대가 그거 없어졌어요. 김창만이 그걸 가져 가 버렸거든요. 우리가 뺐겼지요. 우리를 산산히 분산시키는데 …

Q : 빼앗아 갔다는 것은 병력을 빼앗아 갔다는 말입니까?
김승곤 : 아니요. 그 조직체를…조선의용대 1구대. 김창만이가 가져 갔어요. 그냥 우리를 산산히 분산시키는데, 둘씩 셋씩 방향없이 보내는 거에요. 그냥 연안으로 보내는 거에요. 그 조선의용대 앨범으로 보면 바로 알아요. 1938년 중국 한구에서 창립할 때 200여명인데, 그 중에서 나 하나만 안 넘어가고, 연안으로 안 넘어 가고 다 넘어갔어요.

Q : 아 그렇습니까?
김승곤 : 조선의용군이 그랬어요. 그 사진첩이 있으니까, 보면 금방 알 수가 있어요. 그래서 …

Q : 그런데 지사님께서 안 넘어가신 뚜렷한 이유라도 있었습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넘어갔는데 …
김승곤 : 있죠. 공산주의는 싫다 이거야. 나는. 그러면 끌려간 그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좋아서 그랬냐. 아니야. 할 수 없이 끌려간 사람이 많아요. 나같이 공산주의를 싫어한 사람들이 많았어요. 나야 그때 저 사람들이 탐을 내지요. 중국말 잘 하지. 아, 체격 좋지. 활동력 있지. 그렇지만 내가 말을 듣지 않으니, 결국 우리한테 테러를 시켰는데, 일주일동안, 일주일간 연금 당했어.
일주일만에 풀어주더구먼. 김창만이, 여보, 여보 오늘 저녁 같이 떠날 준비하라. 난 못가겠다 그러니까, 준비하라고 그래. 연안에 가서 무슨 체크가 있어요? 그래서 알았다고 하고는, 마음 놓게 하고는, 거기서 한 60명이 집단생활을 하데요. 점호시간을 틈타서 그렇게 마음 놓게 하고는 대낮에 뛰었어요.[42]

이런 사정을 체험한 김승곤 전광복회장이 생생하게 증언하는데, 조선의용대 안에서도 공산주의자, 좌익 독립운동 계열이 있다보니 장제스 총통이 이끄는 국민혁명군이 아닌 마오쩌둥이 이끄는 팔로군과 신사군에 편입하려는 움직임이 1941년 조선의용대 상황이었다고 볼 수 있다.
주지아화(朱家驊)[43]가 장제스(蔣介石)에게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인원을 광복군(光復軍)으로 편입시켜주도록 요청한 첨정(簽呈)

주지아화(朱家驊)
장총재(장제스)蔣總裁(蔣介石)

31년(1942) 2월 11일
첨정(簽呈)[44]:총재께서 전칙(轉飭)하여 빨리 광복군을 편성하여 훈련시켜주고 무기를 발급해 주고 급양(給養)을 원조해주라고 청하였습니다. 일전에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장 김구(金九)를 만나고서 보내온, 중국정부가 한국독립에 원조하는 문제에 관하여 종종 준쭈오(鈞座)[45]께 절략을 올렸는데 문건에는 일컫기를

(1)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는 1ㆍ2ㆍ3각 구대 대원 전부가 자동으로 도하하여 북상한 후에 남은 소수 간부 10여인은 본래 한국광복군에 귀속되어야 할 것이고 혼합 조직하여 무장 통일을 꾀한다. 일전에 듣건대 군사를 주관하는 기관이 조선의용군을 새로 조직하여 한국광복군과 길을 나누어 아울러 진행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통일에 장애가 있을 뿐만 아니라 마찰이 있을 우려가 있으니, 살펴서 소관 기관에 신칙하여 별도로 명의를 세우지 말아 군령의 통일을 기해야 한다. 아울러 김구 등이 책임을 지고 조선의용대의 잔여 간부인원을 접수하여 매우 공평한 방법으로 분별하여 광복군 대오 중의 상당한 지위에 편입시킨다.

(2) 한국광복군이 공포된 법령을 따라 정식으로 편입된 이후로 지금까지 수개월 동안 사령부에 편제되거나 사병으로 편입되어 훈련을 실시하는 것을 받지 못하였다. 이 태평양 전쟁을 만나서 일이 긴급한 전환점에 항전에 참가할 것이 아득히 기약이 없으니, 애타는 것을 어찌 견디겠는가! 살펴서 소관 기관에 신칙하여 빨리 편제하여 훈련시켜 주고, 무기를 발급하고(이미 훈련을 받은 자) 항전대오에 편입시켜서 활동을 시작하는 데에 편하게 한다. 아울러 간청하니 다달이 광복군 현재 인원의 급양을 접제(接濟)[46]하여 얼어 죽거나 굶어 죽는 것을 면하게 한다.

(3) 한국광복군이 항전에 참가하며 전후에 우리나라가 독립하며 신동아시아를 안정시키는 등의 큰 문제에 대하여

준쭈오(鈞座)를 직접 만나서 진정을 말하고 지시를 청하며 따름이 있게 하시고 중국의 최고 영수이며 동아시아 맹주의 위대한 계책을 국내외의 한국 전체 민중에게 포고하여 지향할 줄을 알게 하고, 총동원하여 항왜전선(抗倭戰線)에 참가하게 하며, 이로써 민주전선의 승리와 우리나라 독립 자주의 최종 목적의 달성을 기대 합니다. 저의 마음을 생각하시어 속히 뵙게 할 기회를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등의 말이 있어, 조선의용대 인원들의 복잡한 것을 조사하였는데 다수 대원들이 마침내 공산당 대오에 들어간 것이 사실입니다. 연래에 한국 동지들 사이의 뜻이 집중되지 못하며 그 단결과 통일을 촉진하지 못하는 것은 실로 좌경분자에게 이용을 당한 소치입니다. 김군(金君)[47]이 청구한 의용대(義勇隊)의 소수 인원을 광복군(光復軍)으로 돌려 넣어 정리한다는 것은 필요한 듯합니다. 광복군이 일찍이 승인을 받아서 성립된 것이 이미 1년 반 남짓하여 한국 인민들의 기대가 매우 크고, 미국에 타향살이하는 한국 교포들은 이에 대하여 더욱 중시할 것이거늘, 더구나 태평양 전쟁이 긴급하고 한국 혁명이 발동되는 것은 실로 부디 필요한 계획입니다. 그 일을 적극적으로 진행하여 청한 것을 도와줄 필요가 있을 듯합니다. 바라건대 군사위원회에 맡겨 이전의 명령을 따라 신속히 절실하게 처리해 주십시오. 또 김군(金君)은 혁명 사업에 분주하게 애쓴 지 30여년에 충성으로 나라를 위한 것은 그 마음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요청한 면담 한 가지 일은 만나주시는 것이 가장 좋을 듯하니, 시간이 있을 때에 가부를 전해 보이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총재 장(蔣)께 삼가 올립니다.

직(職) 주지아화(朱家驊) 삼가 올림, 31(1942)년 2월 11일 보냄(發)

당시 잔류파 조선의용대의 심각한 사정을 볼 수 있는데, 만약 한국광복군으로 편입되지 않는다면 굶어죽는 형편에 있었을 것이고 백범 김구또한 1940년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면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조선의용대 편입을 마다하지 않았다.

한 편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 :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은..

1941년 6월 화북(華北)에서 「조선청년연합회(朝鮮靑年聯合會 : 1941년 1월 1일 빠루쥔총사령부八路軍總司令部 소재지인 산시성 山西省 동남쪽에서 성립)」의 영도 하, 3개 지대의 대원을 합병하여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 :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을 편성하고, 박효삼을 사령으로 선임하였다.

(조선의용대 제 3지대 대장 : 1941년 6월, 양민산, 이춘암 등과 같이 충칭으로부터 화북에 왔다. 1942년 9월 덩샤오핑鄧小平, 리따장李大章의 제의로 晋冀魯豫 邊區산시 · 허베이 · 산둥 · 허난 국경 지역 임시참의회 의원이 되었다.)

사령부는 산시성 라오현(遼縣) 샹위진(上峪鎭) 상우(上武)에 설치하였다. (현 산시성山西省 진중晉中市 쭤취안현左权县) 부사령은 이익세, 정치지도원은 김학무로 결정되었다. 그 아래 유수대(留守隊), 3개 지대와 일본군 점령지구 공작원을 두었다.

조선의용군 또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1941년 6월에 성립되었으나, 그 뒤 한두 해 동안 몇몇 간행물은 여전히 화북지구의 한국 대원들은 조선의용대라고 불렀다. 조선의용대의 대원들은 화북 지구 중국공산당 및 그 소속 항일 부대에서 항일 선전을 전개하거나, 일본 포로를 전향시키거나, 심지어는 직접 전투에 참가하여 중국 항일 전쟁 승리를 위해 공헌하였다.

1941년 10월 7일자 <해방일보(解放日報)>의 보도 내용을 보면, 그 한 단면을 알 수 있다.
「조선의용대 아군과 함께 전투하다(朝鮮義勇隊配合我軍作戰)」
조선의용대 무장선전대는 일전에 빠루쥔(八路軍) 모 부대와 함께 안양(安陽) 관타이(觀台)의 적을 습격하여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전투가 끝난 뒤에는 적 근거지 일대에 중 · 한 · 일 3국 문자로 된 반일 파시스트 표어를 부착하고, 동시에 「조선의용대가 민중에게 고하는 글(朝鮮義勇隊告民衆書)」이라고 보도하였다.

1942년 5월, 조선의용대는 중국 국민당 정부 군사위원회로부터 한국광복군과 합병하라는 정식 명령을 받았다. 그 직후 화북에 있던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이에 대한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충칭의 의용대 본부와의 종속관계를 단절하였다. 그 후 1947년 7월, 그들은 「조선독립동맹(朝鮮獨立同盟) 」 소속부대로 개편되었다.

4.3. 제 1지대 본부 | 舊 조선의용대(잔류파)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합편 결의(1942. 4. 20)
국무회의 중요기사(國務會議 重要紀事)
조선의용대 합편안(朝鮮義勇隊合編案)

대한민국(大韓民國) 24년(二十四年) 4월(四月) 20일(二十日) 국무회의(國務會議)에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으로 합편(合編)하기로 결의(決議)하다.[48]
조선의용대 개편선언 제 1호

금차 중국군사위원회 5월 15일 명령 『奉諭韓國光復軍總司令部增設副司令一員幷派金若山爲該軍副司令其原有朝鮮義勇隊着改編爲該軍 第1支隊(한국광복군 총사령부는 부사령관을 증설하여 부사령관에 김약산을 임명하라는 명령을 받고, 원래의 조선의용대를 해군該軍[49] 제 1지대 군대로 개편하라.)』에 의하여 조선의용대는 한국광복군으로 개편하게 되었다. 이 명령이 발표되기 전에 벌써부터 우리들은 군사통일보다도 먼저 정치통일을 주장하였으며 또 정치통일이 못되는 한에 있어서 군사통일에대한 구체적 의견으로 조선의용대와 한국 광복군을 합병하여 조선민족혁명군으로 편성하자는 방안을 제출하였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원유(原有)[50]의 한국 광복군은 각당파의 합작 기초 위에서 성립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각종 기조건을 보더라도 정말 명실상부한 국군이 될 수도 없고 심지어 한국광복군이라는 군명까지도 복고적 색채를 농후히 띠었고 혁명적 의미를 내포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전민족의 공동단결하에서 진정한 조선혁명 무장대오를 건립하기 위해서 이상과 같이 주장하였으며 또 이 주장을 실현하기 위해서 각방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한국 임시정부와 광복군측에서는 우리들의 주장을 종래 찬성하지 아니하였고 결국은 중국군사위원회 명령에 의하여 조선의용대는 한국광복군 제 1지대로 개편하게 되었다 물론 우리들은 우리의 정확한 주장이 실현되지 못한 점에 대하여 약간 유감이 없다고 할 수 없으나 하여간 「통일」은 우리들의 기본주장인 이상 금번 군사 통일에 의하여 무한한 기쁨과 다행[51]을 표시할 뿐만 아니라 또 진일보하여 관내 우리 혁명 운동은 금번 군사통일을 통해서 장차 획기적 중대한 발표가 있으리라고 확언한다. 이에 임하여 우리들은 조선의용대의 과거 광영(光榮)[52]한 역사를 한 번 다시 추소(追溯)[53]하면서 또 우리들은 앞으로 집행할 간거(艱巨)[54]한 혁명적 임무를 언명하려고 한다.

조선민족의 전투적기치(旗幟)[55]-조선의용군은 1938년 10월 10일 「보위우한」의 소음 속에서(聲浪中) 성립된 이래로 김약산 대장의 정확한 영도하에서 가장 우수한 수백 청년 간부의 희생적 분투와 노력에 의하여 모든 험한 길(險路)과 난관을 충파(衝破)[56]하면서 전진하여 왔으며 또 이런 과정을 통하여 과거 43개월간 조선의용대의 광영한 역사를 창조하였다.

위대한 항일전쟁이 폭발하자 조선의용군은 우울한 고민의 환경중에서 돌아온 원수(復仇)의 검을 갈고 있는 조선혁명청년에게 「중국항전에 직접 참가하자」「조선무장대오를 건립하자」하는 정확한 전투적 정치노선을 지시하였다. 이 때에 높이들은 의용대의 기치야 말로 애국의 열혈이 심장에서 약동하는 혁명청년에게 얼마나 고려와 희열을 주었으며 전세계 인사의 얼마나 환영을 받았는가

조선의용군은 정확한 정치 노선의 지시자일 뿐만 아니라 또 관내에 있어서 제 1 우수한 군사정치 간부의 절대다수의 골수간부(骨幹)들로서 조직된 간부집단이다. 전체대원 9/10는 황포군교를 위시하여 혹은 조선인 간부학교 혹은 중국 군사정치학교를 졸업한 지식 청년들로서 본대가 성립되기 전에 이미 실제 혁명투쟁의 용노(熔爐)[57] 속에서 다년 하속(鍜鋉)된[58] 혁명청년들이다.

조선의용대는 성립된 즉후에 「전선으로」「전선으로」하는 전투적 구호하에 함락 2일전의 우한을 뒤에 주고 남북 항일전선으로 전진하였다. 이 때에 고난과 간고는 필설(筆舌)로 형언할 수 없을만치 눈물겨웠었다. 그러나 중국항전과 조선혁명 승리의 광명을 바라보는 열혈청년들은 희생적 투쟁을 통하여 혁혁한 성적을 창조하였다. 오른손에는 총. 왠 손에는 지탄(紙彈)을 들은 동지들이 혹은 최전선에서 혹은 유격구에서 수시간의 전쟁을 외치고(喊話戰) 적 참호내 영방내(營房內)[59]에서 전단살포 또는 일면 퇴거 일면 전단살포등 견줄바 없는(無比) 영웅적 희생적 정신을 발휘했고 석탄지비기(石彈紙飛機) 소포(小包) 소형 전단기일근양화(傳單旗一根洋火) 등등 부단한 창조는 대적 선전공작 상에 있어 실로 신도로를 개척하였다.

중국 부대의 작전을 협조하여 혹은 기관창수(기관총수), 보병지휘관이 되고 결사대에 참가하여 적진에 잠입하여 적영방(敵營房)[60]을 소훼(燒燬)[61] 혹은 박격포탄 지뢰의 매장 공로, 교량의 파괴 전선 전도 철사망의 단절 운륜차(運輪車) 원극차(垣克車)의 십격 부상한 아군을 사경에서 구출하는 등등 가장 간고한 공작에 충실하였으며 또 퉁샨(通山) 시샨(錫山) 진공시 그리고 다음해 허베이(河北) 싱타이(邢台)전역 중 휘황한 전적은 다만 본대의 광영뿐만 아니라 실로 우리민족의 우수한 혁명적 역사전통을 발휘하며 그의 영웅적 기개를 충분히 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이 조선의용대는 견결(堅決)한[62] 혁명적 실천을 통하여 조선혁명과 중국항전에 충실히 복무하였으며 또 이런 결과로 중국 당국과 일선 군민의 위대한 원조와 찬양을 전해 얻으며(傳得) 한중 양민족의 합작기초를 터를 닦았으며 국내외 우리 동포들에게 정신적 고려와 혁명적 각성을 조장 제고하였으며 특히 재미교포들은 본대후원회를 성립하여 정신적으로 본대를 적극적으로 원조 지지하였으며 또 우리 민족의 국제적 지위를 제고케 하는 동시에 세계인사의 조선 혁명에 대한 동정과 주의를 더욱 인기케 하였다.

친애하는 동지동포들! 우리들은 다만 본대의 과거 역사를 추억하는데만 그칠뿐만 아니라 금번 광복군과 통일로 인하여 앞으로 모든 공작을 좀 더 순리있게 진행시키며 또 본대의 혁명적 역사 전통을 더욱 진일보 발양 광대하리라고 결심하여 자신한다.

본대 전체동지는 금일부터 전후방을 막론하고 원광복군 동지와 정성 단결하여 진정한 일심일체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며 또 과거의 사소한 격막도 금후 실제 공작 장소에서 서로 협조와 서로 경애와 비판에 의하여 완전히 해소될 것을 확신하며 또 본대의 중심공작임무 적후방 동포 쟁취에 더욱 적극적으로 노력하여 광대한 군중기초 위에서 금후 광복군을 확대 발전 시키기 노력할 것을 언명한다.

우리들은 이와 같이 성명하는 동시에 우리의 과거 주장을 의연히 견지한다. 즉 군사통일은 정치통일의 기초 위에 성립되어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 정치통일이 아직 완성지 못한 한에 있어서 광복군의 발전 전도에 각종 조애(阻礙)[63]가 없으리라고 단언할 수 없다. 그럼으로 우리들은 우리 혁명운동의 발전을 위하여 또 광복군의 확대 공고를 위하여 정치적 통일의 구체적 방법으로 과거로부터 우리들의 주장해오던 임시의회 소집과 결액의원(缼額議員)[64] 보선을 계속 요구하며 또 당 통일 파열에 대한 구조방법으로 각 혁명집단연합회를 성립하게 제의한다. 우리들은 진정한 혁명성의와 또 동지적 입장으로 임시정부 당국과 한국독립당 방면으로 우리의 건의를 찬동하기 심절히 바란다.

1942년 7월
조선의용대

1942년 4월 16일 임시정부 국무 회의의 결정에 따라, 종전의 조선의용대를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하고, 조선의용대 대장 약산 김원봉(若山 金元鳳)이 5월 21일부로 제1 지대장 겸 총사령부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미묘한 사정으로 광복군 개편 선언은 7월에 가서야 있고, 김약산이 총사령부 부사령관직에 취임한 것은 1942년 12월 5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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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제 1지대장 약산 김원봉(若山 金元鳳) 장군

이 날, 김약산(金若山) 부사령은 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 앞에서 임시정부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는 선서식(宣誓式)을 거행한 후에 정식으로 부사령직에 취임하였던 것이다.

이 보다 앞서 12월 1일, 김약산 지대장은 충칭(重慶) 방송국을 통하여 ‘국내외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취임 연설을 하였다.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 지대로 개편되는 동시, 본인이 지대장 겸임 광복군 총사령부 부사령에 취임하게 됨을 기쁘게 생각한다. 우리조국의 해방을 위하여는 민족의 총역량을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 한국 인민은 마땅히 독립군 진영에 참가하여 한국의 해방을 위하여 분투해야 할 것이며, 한국이 나라를 빼앗긴 지 벌써 32년이 되는 동안 우리 한국 인민은 쉬지 않고 무력으로 저항하였으니, 한국의 광영(光榮)적인 역사라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자유와 행복을 누리려면 반드시 오랜 시기의 간고(艱苦) 분투를 거쳐야만 바야흐로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65]

김약산이 부사령직에 취임한다는 소식을 접한 재미 한교 연합회 집행부에서는 축하 전보를 쳐 오고 ≪신한민보(新韓民報≫는 축하의 논설을 게재하기도 하였다.
광복군 제1 지대장 겸 부사령 직에 취임한 김약산은 부대의 재정비와 아울러 대원의 교육 훈련에 힘을 경주하는 한편, 중국군 당국이 제정하여 실시되고 있는 소위 9개 행동 준승에 대한 개정[66]을 촉구하기 위하여 총사령을 보좌하면서 광복군 지위 향상과 발전을 위하여 중국 군사위원회 당국에 교섭을 추진하였다.

파일:단쯔시.png

당시 광복군 총사령부 및 제1 지대 본부는 충칭에 있었는데, 이곳은 양쯔강(揚子江) 상류가 쓰촨성(四川省) 경내에서 민강(岷江)과 자링강(嘉陵江)으로 분리된 중간의 3각 지점의 분지이며, 인구는 백만, 기후는 아열대에 가깝고, 민강 북안은 장베이현(江北縣) 이다. 총사령부는 임시정부가 있는 치싱강(七星崗) 리엔화치(蓮花池)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고, 제 1지대 본부는 자링강(嘉陵江) 남안의 양쯔강 원류(原流) 가의 단쯔시(彈子石) 150호 2층 건물에 자리잡고 있었다.

지대 본부에서는 주로 대원들의 군량수급사무(軍糧需給事務), 신입 대원에 대한 교육 훈련과 연합군 측에서 필요로 하는 인원을 요청할 경우의 인원 파견, 그리고 교육훈련이 끝난 대원들을 지대장 특명으로 수시 적 점령 지구인 적방으로 파견하여 초모 선전, 정보 수집 및 연합군과의 합작 공작 등 임무를 수행하게 하면서, 각 구대의 공작 활동을 지휘 감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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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스촨성 충칭 한국광복군 제 1지대 본부 대원들

1942년 11월 광복군 개편 이후, 충칭에 있던 제1 지대 본부의 편성과 대원 명단은 아래와 같았다.

제 1지대 주유(駐渝)[67] 대원 명단
지대장 김약산(金若山) [68]
지대부 신악(申岳)
부관 주임 선한린(孫漢林)[69]
비서 이달(李達)
사서 장징쥔(張競郡)[70], 랴오준더(廖峻德)[71], 리요우송(李友松)[72], 왕청위(王成宇)[73]
총무조장 이집중(李集中)
조원 야오시핑(姚西屛)[74], 한지성(韓志成)[75], 주세민(周世敏)
군의 한금원(韓錦源)
사약 리밍슈(李明守)[76]
부대장 성현원(成玄園)[77]
대원 마일신(馬一新), 정상산(鄭象山), 왕현덕(王賢德), 서진무(徐振武)[78], 한태은(韓泰恩)[79], 김건옥(金鍵玉), 김복옥(金福玉), 윤규운(尹虯雲), 최우강(崔友江), 장희수(張熙守), 양동근(梁東根), 김영주(金令洲), 박시창(朴始昌), 최창례(崔昌禮), 진가명(陳嘉明), 왕통(王通), 윤징우(尹澄宇), 조빈(曺斌), 이소원(李蘇元), 문정진(文靖珍), 송영순(宋英順), 이병숙(李丙淑), 최동선(崔東仙)[80], 김상엽(金尙燁)[81], 박신숙(樸新淑)[82]

군사행동에 관한 군무부 군사보고(1942. 10. 27)

임시정부 문서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편제 인원 계급 직원성명(겸임) 연령 국적
지대장 1 상교[83] 김약산(金若山)[84]
지대부 1 중교 신악(申岳) 51 한국
부관 1 상위 선한린(孫漢林) 25 중국
비서 1 소교 이달(李達) 33 한국
사서 2 소위(준위) 장징췬(張兢群) 26 중국

총무조
편제 인원 계급 직원성명(겸임) 연령 국적
조장 1 소교 이집중(李集中) 49 한국
조원 1 상위 랴오시핑(廖西屛) 28 중국
사서 1 준위 리요우송(李友松) 33 중국

정훈조
편제 인원 계급 직원성명(겸임) 연령 국적
조장 1 소교 김인철(金仁哲)[85] 30 한국
조원 3 상위 이정호(李貞浩) 한국
조원 3 중위 한지성(韓志成)[86] 한국
조원 3 중위 주세민(周世敏) 한국
사서 1 준위 왕청위(王成宇) 중국
제약사(司葯) 1 리밍수(李明守) 27 중국

그리고, 제 1구대는 후베이성(湖北省) 라오허커우(老河口)에 있고, 제 2구대는 저장성(浙江省) 진화(金華)에 있다가 일본군의 침공 작전으로 인하여 그 후 장시성(江西省) 옌산(鉛山)으로 이동하였으며, 본부 구대는 지대 본부와 같이 있었다.

제1 지대는 1942년 5월 21일 광복군으로 편입될 대부터 종전 후 1946년 5월 16일 복원될 때까지 다음과 같이 지대장의 교체가 있었다.
제1 지대 역대 지대장 명단

초 대
김약산(金若山)

2 대
이집중(李集中)

3 대
송호성(군인)(宋虎聲)

4 대
이준식(李俊植)

5 대
채원개(蔡元凱)

1945년 6월에 이 집중 지대장 명령에 의하여 제1 구대의 전방 공작원을 제외하고 호북성(湖北省) 균현(均縣) 노하구(老河口)가 왜군에 점령됨에 따라 제1 구대가 이동된 곳에 집결하고 있었는데, 대원 중 장철부(張哲夫) 등 30여명을 중경 제1 지대 본부로 집결하여 운남(雲南)에 있는 한·미 합동 기갑부대(機甲部隊) 전차훈련반(戰車訓鍊班)에서 3개월 과정의 교육 훈련을 받으라는 지시에 따라, 대원 30여명이 8월초 중경에 도착하였으나, 8·15 해방으로 인하여 교육 훈련 계획은 중단되고 말았다.

그리고, 8·15 해방 당시의 제1지대 본부의 편제와 대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제1 지대 본부 편제표 (1945. 8. 15)
지대장 채원개(蔡元凱)
부지대장 신악(申岳)
부관주임 김승곤(金勝坤)[87]
경리주임 (중국인 장교)
의무주임 한금원(韓錦源)
비서 조빈(曺斌)
부관 손한림(孫漢林)
부관 유충성(柳忠成)[88]
본부구대장 김승곤(金勝坤) 부관주임 겸직
제 2분대장 정훈(鄭薰)
제 3분대장 나영학(羅榮鶴)
제 4분대장 최명선(崔明善)
지대본부 요원 문정진(文靖珍)·최기옥(崔基玉)·유시보(柳時保)·김근수(金根洙)[89]·이의신(李義臣)·이무중(李武重)·박석권(朴錫權)·박재희(朴載喜)·홍동산(洪東山)·이정득(李廷得)·이동초(李東初)·홍종윤(洪鍾允)·강홍모(姜弘模)·배상갑(裴相甲)·방충국(房忠國)·안중달(安仲達)·김득명(金得鳴)·권혁주(權革柱)·이봉선(李奉先)·표경화(杓徑華)·노원근(盧源根)·김장균(金長均) 이천의(李川義)·이제형(李弟兄)·정일수(鄭一洙)·강명호(姜明鎬)·장철부(張哲夫)[90]·전월순(全月順)[91]·허지수(許志秀)·이백규(李白奎)·부병일(夫炳一)[92]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서 1942년 11월 5일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정치부 주임 하응흠에게 보낸 양곡 지급요청 공함(公函)에는 39명의 조선의용대 출신 한국광복군 제1지대 대원 명단이 나온다. 이 명단을 보면 제 1지대 주유(駐渝) 대원 명단과 다르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즉 본부의 간부진과 분대장 등을 제외하면 분대원(25명)은 1942년 5월 당시의 편제구성과 큰 차이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조선의용대의 한국광복군 편입이 적지 않은 우여곡절을 거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4.4. 제 1지대 제 1구대 | 舊 조선의용대(잔류파)

파일:1지대 1구대 위치.png
제 1구대는 후베이성(湖北省) 꽝화현(光化縣) 라오허커우(老河口)에 설치되어있었고 다음과 같은 인원으로 우선 제 1구대를 편성하였던 것 같다.

군사행동에 관한 군무부 군사보고(1942. 10. 27) [93]
직책 계급 성명 연령 국적
구대장 소교[94] 김준(金俊)[95] 44 한국
부구대장 상위[96] 김창국(金昌國)[97] 42 한국
서기 중위[98] 궈이창(郭以昌) 25 중국
특무상사 상사
간호원 하사
제 1분대장 김석산(金石山)[99] 24 한국
제 2분대장 임평(林平)[100] 31 한국
제 3분대장 왕자인(王子仁)[101] 30 한국
파일:리쭝런.png
리쭝런(李宗仁) : 중화민국 초대 부총통, 광시성 구이린(계림) 출신의 군벌, 제 5전구 사령장관
라오허커우(老河口)는 당시 중국군 제 5전구 사령부(第五戰區司領部)가 있던 곳으로 이곳에는 조선의용대의 제 2지대 지대장 이익성(李益星)과 지대부 진원중(陳元仲)을 비롯한 15명이 배속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라오허커우(老河口)에 제 1구대가 설치된 것은 바로 이곳이 조선의용대 활동지역이기 때문이고 화북으로 진출하지 않은 대원들이 남아 있었다.

구대장 김준(金俊)은 활동지역을 알 수 없지만 조선의용대의 전방공작대원이었다고 하며 제 2분대장인 임평(林平)조선의용대 제 2지대 정치지도원으로 라오허커우(老河口)에 활동하고 있었던 인물이다. 나머지 4명은 그 출신과 경력을 알수 없지만, 제 1구대는 조선의용대 시절에 파견되어 활동하던 공작대원을 중심으로 하여 설치되었다.

편성초기에는 개별적이었지만, 공작기반이 조성되면서 각 지역에 거점을 둔 5개 초모공작반을 편성하여 초모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공작반을 통한 초모활동과 함께 초모되어 온 인원들을 중국군 제 5전구 사령부와 교섭하여 간부훈련을 받도록 하였다.

제 5전구 간부훈련단 특설 정공간부훈련반 제2기 한국학생 성적표와 조사표
성명 출생 관적 당적 참가일자
최인기(崔麟麒) 1914년 4월 18일 경남도 부산군(慶南道 釜山郡) 민족혁명당 1938년 가입
최상제(崔相齊) 1923년 9월 22일 조선 경북도 경주군 내동면(朝鮮 慶北道 慶州郡 內東面) 민족혁명당 1943년 5월 가입
김홍도(金洪道) 1911년 5월 6일 평남도 성천군 사가면(平南道 成川郡 四佳面) 민족혁명당 1943년 10월 가입
마정(馬程) 1925년 6월 22일 평양 기림정 200호(平壤 箕林町 200號) 민족혁명당 1944년 가입
이무중(李茂重) 1923년 4월 11일 평남 평양 평천면(平南 平壤 平川面) 민족혁명당 1944년 2월 가입
서정천(徐廷天) 1917년 8월 10일 조선 전북도 김제군 성덕면(朝鮮 全北道 金堤郡 聖德面) 민족혁명당 1943년 10월 가입
김지산(金志山) 1926년 1월 22일 평남도 안주읍 소면(平南道 安州邑 小面) 민족혁명당 1944년 3월 가입
최대길(崔大吉) 1924년 9월 11일 평북도 선천군 선천읍면(平北道 宣川郡 宣川邑面) 민족혁명당 1943년 10월 가입
황하규(黃河奎) 1921년 12월 29일 조선 전북 익산군 망성면(朝鮮 全北 益山郡 望城面) 민족혁명당 1944년 3월 가입
한복(韓復) 1925년 9월 23일 평북 의주군 의주면(平北 義州郡 義州面) 민족혁명당 1945년 4월 가입
우춘바오(吳春寶) 1920년 5월 7일 안후이성 퉁청현(安徽省 桐城縣) 1942년 가입
고병찬(高秉燦) 1925년 1월 12일 황해도 봉산군 초면 은파리(黃海道 鳳山郡 楚面 銀波里) 민족혁명당 1944년 4월 가입

이들이 1구대에서 초모한 인원 중, 제 5전구간부훈련단에서 특성한 정공간부훈련반 제 2기로 졸업한 12명이다. 정공간부는 정치공작 간부를 말한다. 이들의 출신이나 경력은 알려져있지 않지만 대게 1943~1944년에 초모되었고 대부분이 조선민족혁명당 당원으로 가입하고 있었다.

초모한 인원들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102] 이들 12명 외에 라오허커우(老河口)에 들렀다가 김영록 [103], 안광언 2명이 잔류한 경우도 있다. 이들이 모두 1구대에 편입된 것으로 본다면 제 1지대 제 1구대는 구대장을 비롯한 대원 수가 대략 27명 정도였다.

광복군 제 6징모분처에서 출발한 장준하, 김준엽 일행이 라오하커우에 도착하면서 김준 구대장과 접촉한 사실이 있다. 당시 제 5전구 사령관은 리쭝런(李宗仁) 사령관으로 라오하커우 공작요원으로 활동해주길 바랬던 것 같다.
우리는 다시 30~40리를 걸은 뒤에 라오하커우에 도착하였는데 그 날은 1944년 12월 20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기뻣던 것은 라오하커우에 우리 광복군의 전방 파견대가 있다는 소식이었다. 이곳에는 광복군 제 1지대의 제 1구대가 있었는데 구대장은 김준이고 대원은 14~15명이었다.(대부분이 전방에 나가고 구본부는 김준씨 외에 2명만 있었다.) 여전히 김원봉 세력 하에서 좌파 노선을 걷고 있었지만 우리의 도착을 크게 환영해주었다. 그들은 제 5전구 사령부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대적공작을 열심히 진행하고 있었고 또한 허술한 건물이기는 하나 2층집을 청사로 쓰고 있어서 우리는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음식도 제공하여 이곳에 있는 동안 우리가 따로 식사를 준비하는 번거로움이 없었다.

라오하커우는 한수이 강변의 절벽 위에 자리 잡은 도시로서 크기는 린촨이나 난양과 비슷하였다. 이곳에서부터 파촉령을 넘을 수 있어서 국민정부로서는 화중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기지인 제 5전구 사령부를 설치하였고, 화중 일대의 군수물자 공급지이기도 하였다. 도시에서 내려다보이는 한수이는 정말 아름다웠다. 강 건너에는 군수창고가 즐비하였고, 교외에 비행장이 있어서 미국 제 14항공대(셔놀트 소장) 파견대가 중국군의 전투릴 지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리는 조용하고 옛 생각을 하기에 알맞은 곳으로 느껴졌다.

(중략)

우리는 공습으로 더들썩했던 나날을 잊어버리고 몸과 마음을 푹 늘어지게 쉰 다음 막연하게 나마 충칭에 있는 광복군 제 1지대 본부에서 무슨 희소식이 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였을 때 김준 구대장이 열렬히 환영해주었고 앞으로 충칭까지 가는 데는 아무 걱정할 것 없다면서 피복이며 노자, 심지어 비행기편까지 주선하겠다고 말하였기에 우리는 안심하고 이곳에 체류하였던 것이다. 다만, 충칭에 있는 제 1지대 본부의 지시를 받아야만 된다기에 우리는 희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우리는 구대장의 말을 의심할 수 밖에 없었다. 일주일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을 뿐만 아니라 김준의 태도가 이상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린촨의 김학규 주임과 마찬가지로 충칭행은 무의미하다면서 우리 일행의 개개인에게 은근히 설득하였고, 우리 일행의 대표격인 나와 장준하, 윤재현 동지들로부터 고립시켜 단결을 와해하려는 공작을 전개한 것이다.

김준 구대장은 우리의 단결을 무너뜨린 다음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동지를 이곳에 남도록 하려는 것인데, 그것은 자기 세력을 확장하고 또한 우리를 좌경화하자는 의도였다. 이에 대하여 우리 셋은 우리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하여 단호하게 대항하였다. 동지들도 대부분 우리 셋과 같은 의견으로, 이제부터 우리의 장정은 우리 손으로 해결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나와 장준하 동지를 다시 대표로 선정하여 리쭝런(李宗仁) 사령관에게 직접 교섭하는 방법을 택하게 되었다. 나는 리쭝런 사령관을 만나서 일대 열변을 토할 준비를 단단히 하였다.

(중략)

나와 장 동지는 긴장된 마음으로 사령부에 찾아가 대담하게 리쭝런 장군과 면담을 요청하였다. 유감스럽게도 장군은 전선 시찰을 나가 자리에 없었고 그의 참모장이 우리를 만나 주었다. 참모장 쉬주이 중장은 우리에 관한 보고를 이미 받고 있었던 것 같이 친절하게 대해 줄 분만 아니라 우리의 노고를 치하하고, 또한 일본이 망할 때까지 끝까지 싸우자고 격려하였다.
(중략)
수일 후에 전구 사령부에서는 외투를 비롯한 보급품은 물론이고, 내가 제의한 10여만 원을 지급해주었다.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중국군 소위의 봉급이라는 명목으로 지급했는데 정말로 고맙고 기쁘기가 한량이 없었다. 나는 그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우리 동지들을 대표하여 중국측과 교섭을 맡았고 그때마다 운 좋게 성공하였다.

아무튼 우리는 큰 금액을 영수하여 한 사람당 2천원씩 분배하고 나머지 돈을 노능서 동지에게 공용으로 보관케하고, 1945년 1월 6일 라오하커우를 떠나 파촉령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안광언, 김영록 동지는 이곳에 남게되어 학병 출신은 23명만이 충칭으로 가는 장정을 계속하게 되었다. 김영록 동지는 옴이 심하여 도저히 걸을 수가 없어 이곳에 잔류하게 된 것이다.[104]

4.5. 제 1지대 제 2구대 | 이소민(李蘇民) 부대, 舊 조선의용대(잔류파)

파일:한국광복군 활동지역(1지대 2구대).png
제 2구대는 제 3전구 구주통(顧祝同)사령장관의 제3 전구 지역인 저장성(浙江省) 찐화(金華)에 주재하고 있었는데, 이소민(李蘇民)을 구대장으로 하는 제2 구대는 조선의용대 시절부터 그 지역에서 현지 중국군 당국과 긴밀한 협조를 유지하며, 초모·선전·첩보 공작 및 포로 심문·적문서 번역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광복군으로 개편될 당시의 구대 편성은 다음과 같다.

제 2 구대 편성표
편제 인원 계급 직원성명 연령 국적
구대장 1 소교 이소민(李蘇民) 36 한국
구대부 1 상위 강진(康晋)[105] 30 한국
서기 1 중위 김지강(金志剛)[106] 27 한국
제 1분대장 선우국풍(鮮于國風) 25 한국
제 2분대장 성현원(成玄園)[107] 46 한국
제 3분대장 문정일(文正一)[108] 29 한국

구대장 이소민(李蘇民)은 찐화(金華) 지구를 근거지로 하여 전방 공작을 수행하던 중 제 3전구 사령장관부의 지시에 따라 왜군에 의한 침공 작전, 특히 절감작전(浙贛作戰)[109]에는 항전하는 현지 중국군을 도와 대적 심리 작전에 적지 않은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지역에 김문호(金文鎬)가 인솔하는 광복군 징모 제 3분처가 파견되어 오면서는 때로 알력과 대립의 현상을 나타났으며, 따라서 공작 활동이 일시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는 중, 이소민(李蘇民) 이하 간부 전원이 분발하여 직접 적 점령 지구에 내왕하면서 활발하게 초모 공작을 전개한 결과, 1944년초에는 김용(金龍)[110]·김여재(金如載)[111]·박시준(朴時晙) 등이 금화(金華)의 광복군 진영으로 왔다.[112]
당시 2구대 사정은 7, 8명의 대원과 같이 제 3전구 사령부에서 공급해주는 군량과 봉급을 받아다 호구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113]

1944년 6월, 장쑤셩(江蘇省) 쑤저우(蘇州)에 주둔한 일본군내의 한국 학도병 출신 일본군 소위(少尉)성동준(成東準)·김영남(金映男) 등과 접촉이 되어 이들을 포섭하는데 성공하였다. 성동준(成東準)·김영남(金映男)·유재영(柳在榮)·박영(朴英)·최덕룡(崔德龍)·정병훈(丁炳薰)·김봉옥(金鳳玉) 등이 무기를 휴대하고 읿본군 진영을 탈출하여 광복군으로 오게 하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114]

난창(南昌) 지구에서는 김응전(金應篆) 등 수명이 정보 수집 및 초모·선전 공작을 전개한 결과, 윤우현(尹宇鉉)·유재영(柳在榮)·박종선(朴鐘善)·김득만(金得萬)·박병두(朴炳斗)·김대준(金大俊) 등이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광복군 진영으로 가담하게 하는 데 개가를 올렸으며, 이러한 사실이 중국 각지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국제적으로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도 되었다.

특히 구대장 이소민(李蘇民)은 중국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출신인 관계로 제 3전구 내에 많은 선배·동창·후배 등이 있어서 섭외 활동이 원활하게 진행되었으며, 또 구대장 자신이 중국군 상교(上校)[115]로 중국군에도 군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군과의 연결이 잘 되었다. 그러나, 광복군으로서의 공작 활동은 다소 소홀한 감마저 있었기 때문에 지대 본부로부터 경고를 받은 일도 있었다.

1944년 9월경에는 다시 일본군의 소위 소탕 작전으로 인하여 구대 본부를 강서성 옌산(鉛山)으로 옮기었고,

1945년 초에는 이소민(李蘇民) 자신이 전방 공작에 나서서 얼마동안 구대장의 자리를 비웠기 때문에, 2월경에는 제 3전구 사령장관 구주통(顧祝同 상장(上將)이 중국 군사위원회로 제2 구대장 후임 문제를 조회(照會)한 일도 있었다.
한국광복군 제 1지대 제 2구대장에 관한 전문電文(1945. 1. 22)

제 3전구사령부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1945년 1월 22일
중앙집행위원회 비서처에 알립니다.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는 구대장 이소민(李蘇民)의 직위가 해제된 이후 신임 구대장이 아직까지 우리 사령부와 연락을 취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제 3전구 사령장관 구주통(顧祝同)에게 보낸 전문의 답신을 보내니 참고해 주십시오.
광복군 제1지대의 경비 지급에 관한 대전(代電)(1945. 5. 16)

구주통(顧祝同) 제 3전구 사령장관
군사위원회

1945년 5월 16일
충칭(重慶) 군사위원회에 올립니다. 일전 한국광복군 제 1지대 제 2구대장 이소민(李蘇民)의 보고를 받았습니다. 보고에서 이소민은 “한적(韓籍) 적병들에 대한 反正 공작을 강화하면서 상당한 성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다만 지난해 7월부터 광복군 총부로부터 본대에 경비가 지급되지 않고 있어 현상을 유지하는데도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신속하게 군사위원회에 연락하여 본대의 경비 분배를 책임지고 있는 주관당국에게 경비지급을 재촉해주십시오. 더불어 우선 급한 대로 15만 원을 빌려주셨으면 합니다.”고 어려움을 호소하였습니다. 이에 본전구에서는 이소민 부대에 15만 원을 빌려주었습니다. 속히 이소민 부대에 밀린 경비를 지급해 주기 바라며, 아울러 본전구에서 빌려준 15만 원도 갚아주었으면 합니다.

4.6. 新 제 1지대 제 3구대 | 제 9전구 공작대

1. 조선의용대 활동시기
파일:p1495721a414079886-ss.jpg
중국 제 9전구는 후난(湖南省)성을 중심으로 하여 후베이성(湖北省)의 양쯔강 이남과 장시성(江西省) 서북부를 관할하는 전구로 쉬웨(薛岳)사령관이다.

파일:9전구공작대 위치.png

후난셩(湖南省) 창샤(長沙)에 사령부를 둔 제 9전구에는 광복군 이전에 이미 조선의용대가 활동한 적이 있었다.

1938년 10월 후베이셩(湖北省) 한커우(漢口)에서 결성된 조선의용대는 결성 직후 제 1구대[116]를 장샤(長沙)로 파견하였다. 장샤(長沙)에서는 국민혁명군과 일본군 간의 제 1차 챵샤회전(第一次 長沙會戰 | 1939년 9월 13일 ~ 10월 8일)이라고 불리는 시가전을 벌이고 있었고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김승곤 제1구대를 이끌고 창사(長沙)의 중국 제 9전구 지역에 도착하여 1938년 말경 제1차 장사대회전(長沙大會戰)에 참전하였다. 그 후 구룡산(九龍山), 오동산(梧桐山) 전투에서 일본군과 수십차의 전투와 유격전을 수행하였다.

장샤(長沙)로 도착한 직후 제 9전구 정치부를 도와 이재민들의 구호사업 및 도시복구사업에 참여하였다. 이후 제 9전구의 각 전선으로 배속되었다.
김승곤 : 일본군은 모든 물량을 총동원해서 창사 공격을 시작했으며 당시 장제스씨는 초토항쟁(焦土抗爭) 전술로 일면 방어 일면 후퇴하며 적군을 후방 깊숙히 유인 작전을 썼습니다. 1938년 12월 초 오후 1시에 조선의용대가 창사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런데 백만 도시가 불에 훨훨 타고 있었으며 아직도 다이너마이트로 방화대가 방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정말 가관이었죠. 당시 중요한 거리는 5~6층 건물인데 한 도시가 일시에 불에 타고 있는 현상은 드문 일일 것입니다. 이 불은 초토 항쟁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도착한 전날 0시부터 방화대가 방화를 한 것입니다. 일부 시민들은 아직 철수를 못했고 현장은 아비규환에 무법 천지였으며 수만 마리의 가축들은 주인을 잃고 우왕좌왕 갈피를 못잡고 있는 현상이었죠. 일본군은 창사 문턱까지 왔다가 입성도 못하고 퉁청현까지 패퇴하는데 아군의 기습 공격으로 많은 희생을 냈죠. 이 전쟁이 제 1차 창사대회전이죠.[117]

제 9전구에 배속된 이들은, 국민혁명군과 협동작전으로 일본군과 제 2차 챵샤회전(第二次 長沙會戰 | 1941년 9월 6일 ~ 10월 8일)부터 직접적인 전투를 전개하기도 하였다. 특히 적 문서를 번역, 포로심문, 정보수집 및 분석 등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활동은 조선의용대가 독자적인 활동노선과 영역을 확보하기 위하여 화북진출을 결정하면서 제 9전구에 배속되어있던 제 1지대 제 1구대가 쉬웨(薛岳)[118]의 지도하에 1940년 3월 뤄양(洛陽)으로 북상할때까지 진행되었다.

2. 조선의용대 철수 이후(1943.7~)

세 차례에 걸쳐 장사 회전(長沙會戰)에서 승리를 거둔 중국군 당국은, 다시 적군의 공세가 있을 것을 예상, 광복군 총사령부와 중국 군사위원회 합의 하에 한·중 군사 합작과 공동 전선을 확장 강화하는 계획의 일환으로 1943년 7월, 황푸군관학교 제 6기 출신인 최문용(崔文鏞)은 시안(西安) 광복군 제 5지대(한국청년전지공작대)에서 중앙전시간부훈련단을 나온 이병곤(李炳坤)[119]·김귀선(金貴先) 등 간부 2명과 함께 후난성 창사시(長沙市)에 주둔하고 있는 제 9전구 장관 사령부로 파견되었다.

이들 3명이 활동 거점으로 한 제9 전구 지역은, 사령장관 쉬웨(薛岳) 지휘 하에 후난성 전역과 장시성(江西省)을 포함한 인접 성(省) 일부까지를 방위 담당 경계선으로 한 대전구였으며, 하나의 도시에서 무려 네 번이나 큰 전역(戰役)을 치른 장사(長沙) 대회전(大會戰)의 격전장이 있기도 하였다.

1944년 4월부터 시작된 일본군 최후의 대작전인 대륙타통작전(大陸打通作戰)을 계기로 제 4차 장샤회전(第四次 長沙會戰 | 1944년 5월 27일 - 1944년 6월 19일)이 전개되었다. 피아간의 치열한 혈전으로 점철(點綴)된 일대 공방전이 20일 동안이나 계속되다가 끝내는 적군에게 점령되었지만, 이 회전에서 방위군 2개 사단이 최후까지 후퇴하지 않고 옥쇄(玉碎)한 예를 보더라도 이 작전이 얼마나 치열했던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적에게 점령은 되었지만 다시 탈환할 때까지 1년여에 걸친 장사 공방전은 극한 상황을 지속하였으며 , 이 작전 기간 중에는 일본군에 적을 두었던 많은 우리 애국 청년들이 경계가 삼엄한 일본군 진영을 결사적으로 탈출하여 항일 전열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제 9전구에 도착한 최문용 소교(少校)[120] 등 3명은 장관 사령부 정치부(政治部)에 적을 두고, 정치부 주임 쉐종위에(徐中嶽) 중장 지휘 하에서 제 1차적인 공작으로
① 한·일어 전단 및 표어 작성
② 한·일어 벽보 작성 공작대
등을 임무로 하는 심리 작전을 실시하면서,
① 대적 방송 실시
② 포로 심문 및 적 문서 번역을 통한 정보 수집
③ 일선 중국군 장병들에 대한 일본어 대적 구호(口號) 교육
등의 작전 임무를 수행하여, 우군의 특수전(戰) 분야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어, 그들에게 새삼 광복군 활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하였다.

특히 적의 이른바 상계작전(湘桂作戰)이라 호칭하는 제4차 장사회전은 적 제11군 중장 타케야마(橫山)의 지휘 아래 8개 사단을 투입한 대병력의 침공 작전이었으며, 20여 일 간의 장사 격전에 이어 전개된 헝양(衡陽) 회전은 적 6개 사단이 투입되어 3개월에 걸친 결사적 백병전(白兵戰)으로서 중·일 전쟁 개시 이래 최대의 격전으로 평가되는 것이었다.

장사와 형양 등 도시가 비록 적군 수중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적은 역시 점(點)과 선(線)을 점령한 데 불과했으며, 중국군에 의한 반격과 유격 작전은 끊임없이 계속되어, 적군에 있어서도 막대한 피해를 보았던 것이다.

장사·헝양 작전에 참가한 적 부대내에는 학도병 및 징병 출신의 한적(韓籍) 병사가 많이 있었는데, 이들 중 민족의식이 강한 청년들은 탈출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었다.

1944년 10월 4일 교전 상태가 계속되고 있을 때에, 학도병 출신 최덕휴(崔德休)는 형산(衡山) 주둔 적 제 64사단 소속 부대를 탈출하여 왔으며, 뒤이어 정윤성(鄭允成)·나진근(羅珍根)·안용순(安龍淳)·한면필(韓冕鉍)[121]등 학도병과 징병(徵兵) 출신의 이남진(李南珍)·최희룡(崔羲龍)·고창종(高昌鐘)·이우룡(李雨龍) 외 3명이 첸현(郴縣) 주재 제 9전구 장관 사령부에 도착, 이병곤 등과 제휴하여 공작 범위 확장의 계기가 되었다.
최덕휴(崔德休)를 비롯하여 일본군을 탈출한 이들 12명은 장관 사령부에 도착 즉시 쉬웨(薛岳) 장군을 위시한 고위 간부급에 대하여,
① 적국 내의 인적·물적 자원의 결핍
② 적군 장병들의 사기 및 염전경향(厭戰傾向)
③ 한국 출신 사병들의 동향

등에 관한 신빙도(信憑度) 높은 첩보를 제공, 적정 분석과 우군의 작전 판단 및 사기진작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이들 12명은 사령장관 명에 의하여 간부 훈련반에서 2주간의 단기 교육을 받은 후, 최덕휴(崔德休)는 인솔자로서 중위로, 나머지 11명은 중국군 소위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전방 각 군단과 사단 및 유격대에 파견되어 초모 공작 및 대적 선전 공작을 담당하였다.

특히 최덕휴(崔德休)는 공작 활동에서 많은 공적을 세워 그 후 상위로 승진되었으며, 정윤성(鄭允成)은 4개 국어(중국어·일본어·영어·프랑스어)을 통하는 인재로서 발탁되어 제 9전구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사지원단장(美軍事支援團長)의 보좌관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리고, 안용순·이우룡은 작전 중 전사하였으며, 나진근·고창종은 유격대와 같이 임무수행 중 행방 불명되었다.

1944년 말을 전후하여 각 전선에는 백여 명의 애국 청년들이 일본군을 탈출하여 왔는데, 현지 중국군 지휘관은 재량에 따라 한적 사병의 역이용(逆利用)을 꾀하여 그들 나름의 대적 공작 임무를 수행시키고 있었는데, 이들의 정확한 정보 제공 및 인도로 인하여 적 수개(數個)의 소부대를 섬멸하는 한편 다수의 포로를 포획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병곤(李炳坤)은 쉬웨(薛岳) 사령 장관에게 이들을 후방 지역에 집결시켜 교육을 실시하게 할 것과, 제9 전구를 단위로 한 광복군 편성에 협조하여 줄 것을 요청했으며, 설악 사령 장관은 이를 쾌히 수락하여 지금까지 탈출해 온 백여 명의 인원과 앞으로 탈출하여 올 한적 장병 전원을 장관 사령부 소재지인 구이동(桂東)과 전방 지휘소 소재지인 장시성(江西省) 이춘(宜春)에 각각 집결시키도록 전 예하 부대에 지시하는 한편 광복군 편성에 따르는 절차에 대하여 군사위원회에 주선해 줄 것을 승락하였다.

파일:9전구 공작대.png

이러한 내용의 쉬웨(薛岳) 사령장관 지시가 각 부대에 시달된 직후, 1945년 1월을 전후하여 제 1진으로 후베이성 신디엔진(新店鎭) 주둔 유격대에서 활동하던 김영춘(金永椿)·김택기(金宅基)·이종렬(李鍾烈)·장성표(張聖杓)·조청래(趙淸來)·이종구(李鍾九)·전병림(全炳林)·장석창(張錫昌) 외 4명과 후난성 웨저우(岳州) 지구의 제 45사단에서 활동하던 현준석(玄準錫)·한상렬(韓相烈) 외 3명, 후난성 장샹헌(蔣鄕縣)지구 유격 종대에서 공작 중이던 전재덕(全在德)·김종철(金鍾哲)·권구원(權九瑗) 등이 도중에서 합류된 학도병 박정렬(朴貞烈)·유영중(柳英中)과 일단이 되어 전재덕과 박정렬의 인솔로 구이동(桂東)에 도착하였다.

제 2진으로 루청(汝城) 지구 유격대에서 활약하던 학도병 출신인 황갑수(黃甲秀)[122]·강익진(康翊鎭)·김상학(金相鶴)·이충렬(李忠烈)과 지원병 출신의 김배길(金倍吉)[123]·고재옥(高在玉), 징병 출신의 박해옥(朴海玉)·박하규(朴夏圭)·백문기(白文基)·윤종록(尹鍾錄)·정옥모(鄭玉模) 등이 도착한다.

제 3진으로 제 4군 101사단에서 활동하던 김충홍(金忠弘)·김화남(金化南)·임기열(林基烈)·윤치하(尹致夏)·허정국(許禎國) 등 5명과 후난성(湖南省)·랴오자완(寥家灣)에서 활동하던 김은섭(金殷燮)·최종오(崔鍾五)·신종선(申鍾瑄) 등이 도착함으로써 구이동(桂東) 장관 사령부에는 새로이 40여 명의 한국 청년이 집결되었다.

3. 비호대(飛虎隊) 창설
한편, 전황 관계로 격리되어 있는 장시성 이춘(宜春) 주재 전방 지휘소(부사령관 사령부)에는 학도병 진병길(陳炳佶)과 제 3군 예하 신편 제 12사단에서 활동하던 이봉훈(李奉勳)[124]을 위시한 60여 명의 인원이 집결되어, 광복군으로 편성될 때까지 비호대(飛虎隊)라는 부대명으로 대장 이봉훈, 부대장 진병길을 주축(主軸)으로 하여 동지 결속 및 우군에 대한 작전 지원 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리하여, 현지 중국 각 부대에서 활동하던 인원의 후방 집결은 대체적으로 완료되었다. 그러나, 류양(劉陽) 주둔 량한밍(梁漢明) 중장 지휘 하의 제 99군에서 활동하던 20여 명 중 1944년 말 경 이곳으로 탈출하여 공작 기반을 구축한 박효근(朴孝根)·이찬영(李燦英) 및 최영철(崔永喆)·이경훈(李慶勳)·심응창(沈應昌) 등과 왕링지(王陵基) 장군 휘하 신편 제 15사에서 활동하던 김준경(金駿卿)·한장석(韓長錫)[125]·노재섭(盧在燮) 외 6명은 소속 부대장들의 진지한 요청에 의하여 현지 부대에 계속 잔류하여 공작을 수행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광복군 편성에 있어서 도 지구대(地區隊) 요원으로서의 활약을 지속했다.

4. 광복군 편입과 활동(1945.2~)
앞서 쉐웨(薛岳) 사령 장관이 요청한 바 있는 광복군 편성 문제에 대하여 중국 군사위원회는, 광복군 총사령부와 협의한 결과를 1945년 2월에 다음과 같은 요지로 지시해왔다.
① 제 9전구 내에 있는 한국인 전원을 대상으로 한국광복군 제 1지대 예하의 제 3구대(區隊)를 편성하라.
② 구대 조직은 분대(分隊)·반(班)으로 편성한다.
③ 보급 지원은 중국 정부와 한국 임시정부간의 협약에 따라 제 9전구 장관 사령부가 이를 전담한다.
④ 상당한 실력을 갖춘 중국 장교와 기술자 등을 파견하여 광복군의 작전 활동을 지원하라.
⑤ 파견 근무 중인 이병곤(李炳坤) 소교[126]를 구대장 겸 지구 책임자로 임명한다.
동지 초모 및 우군의 작전 지원을 임무로 한다.

이와 같은 지침에 따라 1945년 2월 15일을 기하여 제 1지대 제 3구대가 창설되었는데, 구대 및 지원 체제의 편성은 다음과 같다.
구대 편성
구대장 이병곤(李炳坤)
구대부 박정렬(朴貞烈)
제 1분대장 유영중(柳英中)
제 1분대 공작반장 강익진(康翊鎭)·전재덕(全在德)·이충렬(李忠烈)
제 2분대장|비호대(飛虎隊) 이봉훈(李奉勳)
제 2분대 공작반장 서영찬(徐永燦)·장학민(莊鶴敏)·유유준(兪有濬)
제 3분대장 진병길(陳炳佶)·황갑수(黃甲秀)[127]
제 3분대 공작반장 김배길(金倍吉)·최갑득(崔甲得)·한일근(韓一根)[128]
제1지구대 최덕휴(崔德休)·정윤성(鄭允成)·나진근(羅珍根)·안용순(安龍淳)·최희룡(崔羲龍)·이남진(李南珍)·고창종(高昌宗) 등 9명
제2지구대 박효근(朴孝根)·이찬영(李燦英)·최영철(崔永喆)·이경훈(李慶勳)·심응창(沈應昌) 등 6명
제3지구대 김준경(金駿卿)·노재섭(盧在燮)·한장석(韓長錫) 등 10명

지원 체제 편성[129]
지도장(指導長) 리우광웨이(劉光偉)[130]
군사지도관 리지핑(李芝萍)[131], 리핑이(李平一)[132], 천다판(陳大凡)[133]
정치지도원 김귀선(金貴先)[134], 왕모(王某)[135],리우루칭(劉儒卿)[136]

이렇게 광복군으로 편성됨에 따라, 3개월을 기간으로 하여 정규 교육 훈련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교육 도중, 각 전선으로부터 광복군 공작 요원을 파견해 달라는 요청이 쇄도하여 부득이 일면 교육, 일면 공작으로의 방침으로 변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구대장 이병곤(李炳坤)은 구이동(桂東)에서, 먼저 편성된 제 1분대 대원 중에서 전재덕(全在德)·강익진(康翊鎭)·황갑수(黃甲秀)를 각각 조장(組長)으로 한 3개 공작조를 편성하고, 김상학(金相鶴)·김충홍(金忠弘)·김화남(金化南)·김영춘(金永椿)·김택기(金宅基)·박하규(朴夏圭)·박해옥(朴海玉)·임기열(林基烈)·김종철(金鍾哲)·백문기(白文基)·현준석(玄準錫)·한상렬(韓相烈)·장석표(張錫杓)·최종오(崔鍾五)·이종렬(李鍾烈)·윤종록(尹鍾錄)·이종구(李鍾九)·조청래(趙淸來)·권혁무(權赫武)·김필환(金弼煥)·장석창(張錫昌)·정옥모(鄭玉模)·전병림(全炳林) 등을 파견하여 공작에 임하게 하였다.

조금 늦게 이춘(宜春)에서 편성된 제2·제3 분대에서도 30여 명의 공작 요원을 선발하여 다시 전방으로 파견.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새로이 40여 명의 동지를 획득하는 성과를 얻었는데 제2·3 분대에서 공작 활동한 인원은 아래와 같다.
백진규(白振奎)·조영오(趙榮五)·정재윤(鄭在允)·이운선(李雲善)·장지언(張志彦)·이병오(李秉五)·최평규(崔平奎)·우영숙(禹永淑)·김정필(金正弼)·이정희(李正照)·김재길(金在吉)·이응진(李應進)·김상호(金相鎬)·권재명(權在明)·유경희(劉敬熙)·방극삼(房極三)·강영수(姜永秀)·김영태(金榮泰)·김기연(金基淵)·홍태영(洪泰榮)·이태식(李泰植)·성기덕(成耆德)·정종우(鄭鍾禹)·김영이(金榮伊)·김용안(金龍安)·송재원(宋在元)·조동현(趙東鉉)·조병두(趙炳斗)·박주대(朴周大)·김쾌봉(金快鳳)·박연섭(朴淵鍱)·박종락(朴鍾洛)·김교열(金敎烈)[137]

한편, 구대 본부에서는 구대부(區隊附) 박정렬(朴貞烈)을 중심으로 하여 권구원(權九瑗)·김배길(金倍吉)·김은섭(金殷燮)·서영찬(徐永燦)·남정욱(南廷昱) 등으로 교육반을 편성하여, 후방 잔류 대원 및 새로 입대하는 인원에 대한 자체 교육을 실시하면서 다음 단계의 목표로 구대장 이병곤을 위시한 간부진에서는 지도장 리우광웨이(柳光偉) 소장의 협조 아래, 결정적인 시기에 무장 부대로 강화하여 참전할 계획을 세우고, 미 군사 지원단에 근무하면서 단장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는 정윤성을 통하여 미군의 신예 무기 획득을 위한 교섭을 진행, 거의 성공 단계에 이르게 되었을 무렵에 8·15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렇듯 제 9전구지역에 있어서의 광복군의 활동은, 우군의 제일선 싸움터에서 1백 70여 대원이 집결되어 전방 또는 후방 공작에 참여함으로써 우군 작전에 많은 공헌을 세웠다. 그러는 중에는 또, 조동현(趙東鉉)·김용안(金龍安)·안재원(安在元)·정종우(鄭鍾禹)·김상호(金相鎬)·권재명(權在明)·박주대(朴周大)·김교열(金敎烈) 등이 전방 공작 중에 전사하였고 김영이(金英伊) 외 2명의 행방 불명자를 내기도 하였다.[138]

5. 귀국
8·15해방과 더불어 전선에 파견 중이던 대원들은 각기 현지에서 중국군의 적 무장 해제를 협조하고 후방 요원의 대다수도 이 공작에 참여하여 우군과의 유대 강화의 실적을 거두고 1945년 9월 장시성 펑청(豊城)에 집결, 1946년 3월 총사령부 명에 의하여 한커우(漢口)로 이동, 채원개(蔡元凱) 제 1지대장의 지휘하에 들어가 5월 6일 한구를 출발, 선편으로 남경에 도착하고, 이범석(李範奭) 장군 인솔 하에 5월 말 상해에서 승선하고 6월초 인천에 도착하였다.

4.7. 舊 제 1지대 제 3구대, 舊 조선의용대(연안파)

舊제 1지대 제 3구대 | 박효삼 부대 '''
군사행동에 관한 군무부 군사보고(1942. 10. 27)에 따르면 제 1지대 제 3구대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

舊제 1지대 제 3구대 편제
편제 인원 계급 직원성명 연령 국적
구대장 소교 박효삼(朴孝三) 36 한국
구대부 상위 이익성(李益星) 30
서기 중위
1분대장
2분대장 양민산(楊民山)
3분대장 조열광(趙烈光)

하지만 박효삼의 제1 지대 제 3구대는 1941년 4월 의용대 주력을 이끌고 화북전선으로 들어가 같은 해 7월 부대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편, 그 지대장이 된다. 1940~1941년 이때부터 다수의 공산진영의 조선의용대는 팔로군을 따라 화북으로 가게 된다.

반면에, 약산 김원봉을 포함한 제 1지대 제 1구대(김준)와 제 1지대 제 2구대(이소민)은 광복군으로 편제되어 활동을 한다.

1942년 7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되면서 그 지대장으로, 같은 시기에 결성된 화북조선독립동맹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한국광복군 일원으로 활동하지 않게 되며 이 문서 작성 당시엔 그 사실을 몰랐던 것 같다.

4.8. 한국광복군 주인면 공작대(韓國光復軍駐印緬工作隊)[139]

정식 영문 명칭은 : KNALU-Korean National Army Legion Unit.[140]
파일:한지성 대장과 베이컨 부부.jpg
(오른쪽부터) 한지성 대장, 롤랜드 베이컨(Roland Bacon) 대위의 아내 펄 맥래(Pearl MacRae) 여사, 한지성 대장의 부인이자 안공근 차녀이자 안중근 의사의 조카딸인 안금생 여사.[141]

1942년 겨울, 인도주둔 영국군총사령부는 조선민족혁명당 측에 공작인원의 파견을 요청한다.이에 민혁당 총서기인 약산 김원봉은 최성오, 주세민 2명을 인도에 파견하게 된다.[142] 인도로 파견된 이들은 가성과 아납감 등지의 전방에 배치되어 대적선전공작을 담당하였다. 이들의 활동에 영국군측에서는 만족했는지 총사령부 안에 대적선전단을 측설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인도/버마전선의 광복군 공작대가 파견되었다.

1943년 5월 민혁당 총서기 김원봉과 인도주둔 영국군총사령과 매켄지(Colin Mackenzie) 사이에 ‘조선민족군선전연락대(朝鮮民族軍宣傳聯絡隊) 파견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143]. 국한문 및 영문으로 남아있는 이 협정 전문이 바로 국한문 및 영문자료 1이다.
조선민족혁명당에서 파견하는 조선민족군선전연락단위에 관한 협정의 계획

조선민족혁명당 대표 김약산 장군과 재인도 영국군 총사령부 대표 멕켄지 선생은 조선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고 영군의 완전전승을 촉진하기 위해서 조선민족혁명당은 재인도영국군의 대일작전을 협조하고 영국군은 조선민족혁명당의 대일투쟁을 원조하는 원칙 하에서 아래와 같이 협정함.

1. 조선민족혁명당은 영국군의 대일작전을 협력하기 위하여 「조선민족군선전연락대(朝鮮民族軍宣傳聯絡隊)」를 파견함.

2. 연락대는 10~25인으로써 대장 1인을 두되 영국군의 제복을 입고 조선민족혁명의 연락대라는 잘 보이는 휘장을 부착함.

3. 연락대의 주요공작은 영국군의 대일작전에 유리한 대적선전과 가능하다면 조선혁명운동에 유리한 선전과 전투에서 획득한 문건을 번역하는 것임.

4. 연락대의 복무기한은 6개월을 제 1기로 하되 쌍방의 협의에 의하여 연기할 수 있음.

5. 이전 기수가 만료되기 전에 조선민족혁명당이 필요로 인해 시기나 영연방의 요구가 있을 때에는 일부분 혹은 전부의 인원을 교대할 수 있음.

6. 대장은 재 인도 영국군 대위와 동등한 대우를 받고 대원은 재 인도 영국군 중위와 동등한 대우를 받으되 공작상 우수한 공적이 있는 자는 특별장려를 받음.[144]

7. 연락대의 공작을 유효히 진전시키기 위해서 조선민족혁명당은 상주대표 1인을 인도에 파견하여 전반적인 행동에 있어서 밀접히 합작케 함.

8. 영국군이 포획한 조선인 포로에게 공작대인원이 자주 접촉하게 해서 가능하다면 그들을 훈련하여 복무케 함.

9. 위에서 말한 연락대 인원의 파견교대 혹은 철회에 수요되는 일절 경비는 영연방에서 부담함.

10. 연락대 인원은 영국군 장교와 동일한 여행상 편리와 대우를 누린다.

11. 부대 인원이 델리에서 공작할 때는 숙소는 무료로 제공함. 아마도 텐트 생활이 되기 쉬움. 만약 호텔에서 숙박할 수 있을 때에는 급여 중에서 100 루비 이하 공제해서 그 숙박비에 쓰게 함.

12. 조선민족혁명당 대표(김약산)는 주로 델리에 거주하고 그의 변공 생활여행 등 비용은 상당한 대우로 영연방에서 부담함.

인도 영국군 총사령부 코린맥켄지
조선혁명당 총서기 김약산

1942년 5월
SUGGESTED SCHEME OF AGREEMENT FOR THE SID(DIS)PATCHING OF A KOREAN NATIONAL ARMY LIAISON UNIT (PROPAGANDA) BY THE KOREAN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General Yaksan Kim, representative of the Korean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and Mr. Conlin Mackenzie, representative of G. H. Q., India, in order to achieve the independence of the Korean people and to accelerate the complete victory of the British Forces, hereby are agreed in principle that the Korean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shall co-operate with and aid the Korean National Revolutionary Party’s struggle against Japan, and therefore adopt the following clause of agreement.

1. The Korean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shall dispatch a “Korean National Army Liaison Unit (Propaganda) of the Korean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to co-operate with and assist the British Forces in warfare against Japan.

2. The said Liaison Unit shall consist of one commander and from ten to twenty five members, and they shall wear the uniform as worn by British Forces and a distinct badge of the Korean National Revolutionary Party’s Liaison Unit.

3. The Liaison Unit’s main work shall consist of propaganda towards the enemy, favourable to the British Forces’ warfare against Japan, and when expedient propaganda favourable to Korean cause, and translation of captured documents.

4. The length of service of the Liaison Unit shall be six months for the first term, and the duration of service may by mutual agreement be extended.

5. Before the expiration of the first term as stated in the previous clause, should the Korean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doom it necessary or should the British side make the request, a part or the whole of the personnel may be replaced.

6. The commander of the Unit shall receive treatment equal to that of the rank of captain of the British Army in India and all other members of the Unit shall receive equal treatment to that of the rank of lieutenant in the British Army in India. Any individuals who have distinguished themselves in service shall be given special awards.

7. In order to enhance the effective working of the Liaison Uint the Korean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shall dispatch a permanent resident representative in India to closely co-operate with the British side in conducting the whole operation.

8. The Liaison officer will be given full access to any Korean prisoners captured by the British in order if possible to train them for service.

9. All expense connected with the dispatch, transfer or recall of the above mentioned members of the Liaison Unit and of the Resident Representative shall be borne by the British side.

10. The members of the Liaison Unit shall receive the same traveling facilities and treatment as British officers.

11. When members of the Unit are working in Delhi accommodation shall be furnished free. This may have to be tents. If living in a hotel is available it will be provided and a deduction of not more than Rs 100/ will be made from pay to cover full board and lodging.

12. The Korean National Revolutionary Party’s Representative shall generally reside in Delhi, and his office, living, and traveling, etc., expenses shall be appropriately provided for by the British side.

Colin Mackenzie, Yaksan Kim,

G. H. Q., Secretary General of the India. Korean National Revolutionary Party.

May, 1943.
조선민족혁명당에서 파견하는 조선민족선전연락단위에 관한 협정의 계획

이 협정에 따르면 ‘조선민족군선전연락대’는 “조선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고 영국군(英軍)의 완전 전승을 촉진하기 위하야 조선민족혁명당은 재인영군(在印英軍)의 대일작전(對日作戰)을 협조하고 영군은 조선민족혁명당의 대일투쟁을 협조하기 위하여” 파견하기로 되어있다.

그러나 이 협정은 “한 · 중 · 영간에 복잡한 관계로 인하야” 실현되지 못하였고, 광복군총사령부에서 인도공작대를 파견할 것을 주장한 중국군사위원회의 주장에 따라 한지성을 대장으로 하는 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가 파견되었다. 당시 ‘광복군9개준승’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인도주둔 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는 중국 군사위원회의 관할을 받게 되었다. [145]
인도 공작대에 관하야(한지성)

(1) 인도 공작대의 성립경과 그리고 그 관계성

인도에 주둔한 한국 광복군 공작대는 1943년 8월에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서 인도에 파견한 일개의 선전 공작 연락대이다. 그 성질은 본국의 선전 공작과 주재국의 선전에 관한 것을 연락하며, 상호 협조 하는 것이다. 영국, 미국, 소련 등 각 국은 중동, 혹은 유럽 각국에 각종 연락대를 상호 파견하고 있으며, 영국 처칠 수상의 아들도 연락원의 자격으로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원수에게 파견하였다.

본래 1942년 겨울에 조선민족혁명당 총 서기 김약산 동지는 인도 영국 총사령부의 요청에 의하여 최성오, 주세민 두 동지를 인도에 파견하여 영국 측의 적을 향해 수행하는 공작을 협조하여 주었다. 영국 측은 두 동지의 공작 성적에 대하여 크게 만족하고, 영국군 총사령부내에 대적 선전대를 특설하고 조선민족혁명당은 선전 공작 연락대를 파견해서 영국 측의 대일 작젼을 원조하고 이에 대하여 조선 독립을 촉성하기로 하였다(이것은 조선민족혁명당 대표 김약산 동지와 인도에 주둔한 영국군 대표 맥캔지 장군과 1943년 5월에 체결한 협정 총측이다). 그러나 한국, 중국, 영국 간에 복잡한 관계로 인해 그 협정이 실현되지 못하고 중국 군사 위원회는(광복군 9개 준승이 취소되기 전)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인도 공작대를 파견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로서 지금 인도에 주둔한 한국 광복군 공작대는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파견하게 되었다.

당시 중국 군사 위원회는 광복군 9항 준승에 의해서 인도에 주둔한 광복군 공작대를 관할하게 되었고, 대의 소환, 파견, 지도 등은 중국 군사 위원회에서 처리하게 되는 반면에 광복군 총사령부에서는 이를 그대로 지나쳐 보낼 수는 없게 되었다. 작년(1944년) 8월 23일 광복군 9개항 준승이 취소되고 광복군이 임시정부에 직접으로 부속되게 됨을 따라서 인도 공작대도 법적으로나 사실 상으로나 광복군의 일종 특수 대오(부대)로 총사령에 부속되는 동시에 임시정부에 부속되었다. 그럼으로 금차(이번) 9인을 더 파견하는 것도 임시졍부 주석 김구 선생이 정부를 대표해서 중국 정부 관계 당국과 교섭한 것이다. 인도 공작대의 관계성이 지금 여사히(이와 같이) 변화된 것은 우리 운동의 발전과 진보를 표시하는 것이요 운동이 정상적인 길로 전진 한 것으로 인정됨으로 누구든지 이 현상을 기쁘게 느낄 것이다.

(2) 인도 공작대의 영국과의 관계

인도 공작대는 한 · 중 · 영 세 나라 사이에 불합리한 관계에서 여러 가지 모순을 안고 탄생 하였으나 김약산 · 맥캔지 협정 정신에 의하여 인도 공작대 전체 동지들의 순결한 애국 열졍과 건결한 노력으로서 양방 간에 평등과 호혜의 원칙을 엄수하여왔다.

첫째, 파견과 소환에 관하야 파견된 인원 중에 우리는 영국의 요구에 의하야 일부, 혹은, 전부를 소환할 수가 있고 귀환 전이라도 우리은 필요에 의해 일부, 혹은, 전부 인원을 소환할 수 있다. 둘째, 인도에 있어서 공작하는 기간 내에 영국측은 특전보로 공작대 대원을 이동할 수 없으며, 필요시에는 반드시 대에 요구하고 대는 동의하는 지점에 동의하는 공작에만 인원을 파견하게 되었다.

쌍방에서 서로 상대측의 자주성을 존중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것은 비록 적은 대(隊)이나 영국과 우리 조선 양 민족간에 이와 같은 평등 호혜의 관계를 쟁취하고 확보한 것은 우리 민족의 금일 형편으로는 특서할만한 역사적 사실이다. 특히, 임시졍부의 승인을 쟁취하기 위하야 노력하는 이 주요국으로 하여금 정부, 혹은 군을 사실 승인하도록 하는 것은 중요한 대단한 성취라고 인정한다.

(3) 인도 공작대의 발전 진로

한 · 영 국교 관계는 망국 후 지금까지 거의 40년간 중단 되어왔다. 인도 공작대를 통해서 양 민족의 관계를 다시 새로히 건립한 것은 한 · 영 국교 상에 의미 깊은 사실이다. 국제관계는 가장 현실적이다. 상호 의존하는 조건하에서 국제적 관계가 존재하고 의존하는 정도 여하(어떻게 하는지)에서 관계 여하(어떻게 하느냐)도 규정되는 것이다. 특히, 전쟁이 계속하는 기간 동안에는 공동한 적을 타도하는 것과 공동한 세계를 건립하는 데 상호간 역량의 대비와 의존성 여하에서 합작 관계가 건립되고 그 관계가 발전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 합작 조건을 부인하고서는 어떠한 유력한 합작관계가 존재할수 없는 것은 사실이 증명하는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인도 공작대는 영국과 우리와의 합작에 현실적 존재이고, 또한, 목적 존재이다.

영국이 태평양 전쟁에 적극 참가 할 것은 영국 정부의 누차 성명을 발표하여서도 알 수 있거니와 영국이 원동(극동)에 대한 정세과 대외관계를 보아서도 그러한 것은 사실이다. 각 방면의 보도에 의하면 싱가폴, 베트남, 미얀마, 태국, 남중국 연해 등지에 십 수만 동포와 상당한 수의 조선 사람 군인이 출병되고 있다는 사실은 영국과 우리와의 합작 조건과 인도 공작대 주요 공작과 발전 전도를 말하는 것이니, 우리 임시정부와 광복군 당국은 이에 대하여 비전 주의하여 주기 바라며 무릇 '내가 하지 않는 공작이면 모두 나쁜 것이다.' 이렇게 방관 · 비판하는 관념을 일소(한 번에 제거)하고 전 민족의 행복과 광영을 쟁취하기 위하여 몇 분 후의 자기 생명을 예측 담보 못하고 전장에서 분투하는 인도 공작대 동지들을 이해하고 더 적극적으로 공작을 영도하여 주기 바란다. 금차(이번) 김구 주석, 군무부장 김약산, 광복군 이청천 총사령관, 주석 변공실 주임 민필호 선생 이 점을 주의하고 일치 단결해서 공작대원 증원대를 파견한 것은 현명한 정책이요, 또 그것이 민족 독립의 유일한 작풍(방법)이라고 본다. 2년 내에 현안으로 되어 있든 공작대 증원대 파견이 다소간 해결됨에 있어서 필자는 인도에 있는 전체 동지를 대표해서 우리 정부의 모든 영도자들과 중국 군사 위원회 그리고 중국 국민당 중앙당부 모든 선생에게 간절한 감사의 뜻을 이에 표하며, 닥쳐오는 태평양 대결젼을 압두고 많은 청년 동지들이 인도 공작에 참가해서 민족적 사업을 공동히 발전시키기 바란다.

-1945. 4. 1 일부 발행 중경(앞 길)에서-

출처 :『독립』 제3권 제75호, 1945년 6월 13일자.

설령 광복군에서 대원들을 파견한다 해도 중국군사위원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것이 당시 현실이었다. 중국군군사위원회에서는 이 문제를 광복군총사령부가 주도해야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원래 협정은 민혁당에서 체결되었지만 중국군 군사위원회의 방해공작 및 광복군 9개 준승에 의하여 이뤄지지 못하고 실행은 광복군총사령부가 맡게 되었다. 문응국 지사의 증언에 의하면 철기 이범석 주장으로 광복군 제 2지대 파견된 것이 아니다고 강조한다. 광복군 제 2지대에 있던 인원이 한독당 전당대회에 참석차 충칭에 머물게 되었고 제 2지대가 아닌 총사령부가 주도를 잡으면서 인면전구공작대로 편입되었다고 보는게 맞다.[146]

총사령부에서는 각 지대에서 인도로 파견할 대원들을 선발하였다. 선발기준은 신체조건과 어학(일본어)이 중시되었으며 제1지대에서 2명 제2지대에서 7명 등 모두 9명을 선발 그리고 부대장 문응국 지사의 증언에 의하면 안원생이 합류하여 총 10명이다. 다음과 같이 인도파견 공작대를 편성하였다.
파일:인면전구공작대 단채사진.jpg
인면전구공작대 대원.
인면전구공작대의 대원들은 1지대, 2지대(5지대) 혼성으로 편성되었다.
대장 : 한지성 (1지대)
부대장 : 문응국(2지대)
대원 : 최봉진(2지대), 김상준(2지대), 나동규(2지대), 박영진(2지대)[147], 송 철(2지대), 김성호(2지대), 이영수(1지대), 안원생(1945년에 합류)[148]
1943년 5월에 구성해서 공작을 나가야 할텐데, 안우생씨가 영국 대사관에 연락하고 그렇게 민혁당은 둘이고 나머지는 다 한독당이었죠. 그 때 지청천 장군이 사령관이고 김약산이 부사령관이었어요. 구성해서 중국 군사위원회에 가서 3주 교육을 받았어요. 우리가 교육시킬 처지가 못되니까. 그래서 9월 하순경에 인도 캘커타(Kolkata)로 갔어요. 그런데 나중엔 전부 민혁당에 가입되었어요.

이현희 : 민혁당이라면 조선민족혁명당인가요?

문응국 : 네, 이게 다 한독당 당원인데, 개인이 탈퇴하고 이중으로 가입한 거지요. 그런데 파견될 때에 한지성이 대장이고 내(문응국)가 부대장이에요.

이현희 : 모두 몇 분인가요?

문응국 : 안원생씨까지 10명입니다. 안원생씨는 나중에 왔어요. 1945년에 왔어요.

이현희 : 10명이 한 공작대가 되었어요?

문응국 : 여기 9명이 한 공작대이고, 안원생씨가 임정의 청년부장이 되었어요. 그러다가 1945년에 정부에서 백범 선생이 보내서 갔지요. 그래 왔는데, 그 양반이 전투에 참가를 못했고, 우리는 1945년 9월까지 전투에 참가했어요. 그래 여기에서 해방되고 나왔어요. 1945년 9월에 내가 나왔는데..... 내가 한 가지 중요한 이야기를 하겠는데, 우리가 인도에 가니까 그 때 몬트 밧덴이 사령관인데 동남아시아 총사령관이에요. 영국군은 실론(Ceylon)에 본부가 있었고, 캘커타에 도착해서 곧 뉴델리(नई दिल्ली, New Delhi)로 갔어요. 그래서 뉴델리에 쭉 있었어요. 도착할 때, 이 옷이 돈이 없어서 충칭 고물상에서 사입고 간거에요. 충칭에서 이렇게 짧은 것을 입고 중산복 비슷한거 입고 있다가 떠날 때 영국 군대에서 돈을 조금 주데요.인도에 갈 때까지의 조직은 이야기 했으니까 구성은 민혁에서, 그러니까 1지대에서 2명, 2지대에서 7명, 합해서 9명.

이현희 : 그러니까 2지대가 단연 우세하네요?

문응국 : 그렇죠. 철기 장군은 그것은 2지대에서 파견한 거라고 그렇게 말한다고요. 그래서 나는 역사에는 그렇게 기록하고 싶지 않다고 그랬어요.[149]

이들은 중국군사위원회에서 일정 교육을 받은 후 인도로 파견하였다. 중국군과 함께 중국군사위원회에서 3주간 군사훈련, 인도/버마 실정과 정세에 대한 예비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교육을 마친 9명의 공작대원들은 1943년 8월 말 인도 캘커타로 파견되었다.

인도군총사령부에서 교육을 받았다. 교육은 주로 영어와 방송기술이었다. 영어는 델리에서 17리 떨어진 인도학교에서 교장인 윌리암으로부터 받았으며 방송은 인도군총사령부에서 연습하였다. 1943년 9월 15일 ~ 12월 10일 방송학과를 수료한다.
교육을 마친 후, 이들은 영국 육군 부대에 분산 배치되었다.
송철 인도군총사령부
이영수, 최봉진[150] 캘커타 방송국
나머지 6명은 한지성 대장의 인솔하에 부야크로 이동 여기서 2개 분대로 나뉘어 영국군에 배속된다.
문응국[151], 김상준, 나동규 영국 육군 제 201부대
박영진, 김성호 영국 육군 제 204부대
에 배속되었다고 한다.

영국군에 배속 된 후 임팔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곳은 영국 육군 15사단 사령부가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버마는 연합군측이 중국측 전쟁물자를 수송하는 주요 통로로 일본군에 의하여 중국의 해안선이 봉쇄되자 연합군측은 버마 랑군항으로부터 북부의 라시오를 거쳐 중국의 쿤밍으로 이어지는 버마공로를 통해 전쟁물자를 수송하였던 것이다. 이 통로가 일본군이 버마를 점령함으로써 차단되고 말았다. 버마공로를 다시 확보하기 위해 1943년 버마 탈환작전을 전개하였다.

1944년 1월 7일, 부야크에서 문응국, 김상준, 나동규는 제 201부대와 함께 임팔전선으로 출발하였고 제 204부대에 배속된 박영진, 김성호는 아라컨을 거쳐 3월 7일 임팔전선으로 이동하였으며 한지성도 이곳에 도착한다.

1944년 3월 말, 일본 육군이 천두이강을 건너 임팔지역을 공격해오면서 영국군, 일본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고 이들은 임팔을 비롯하며 띠마플, 티딤, 비센플 등 각지에서 전개되는 전투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들의 주요 임무와 활동은 대적선전공작이었다. 전투를 할 수 있도록 무장하고 적과 가장 가까운 진지에서 적을 향하여 일어방송을 하였고 선전물을 제작하여 살포하였으며 문건을 번역하여 포로도 심문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의 투항자가 발생하였고 일본 육군 통역관으로 근무하고 있던 김귀락이 탈출해온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인면전구공작대는 투항한 일본군 포로 중에서 조선인 포로들을 별도의 수용시설에 수용하여 군사훈련을 할 수 있도록 영국군과 협정[152]을 맺었는데 그 수는 대략 일본 육군 15사단 통역관 김귀락을 포함하여 대략 100명 정도였다.

적정보 분석과 적의 무선통신을 통해 일본군의 작전계획을 사전에 알아내기도 하였고 일본군에 포위되어 위기에 처해있던 영국군이 이를 벗어나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 예로 영국 육군 제 17사단이 버마 반격작전을 개시하여 만델레이로 남하하던 중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고 포위되어 악전고투를 하고 있을때, 문응국 등이 적문서와 포로심문을 통해 정확한 정보를 분석 제보함으로써 적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문응국 : 인도에 파견된 주인면 공작대의 명칭이 그렇게 해서 합의를 봤어요. 보고 나서 이제부터 일선을 하는데, 영국 사람이 3파트로 나누어야 된대요. 9명이니까 3사람씩 나누는 거에요. 그래 제 1진은 여기 이야기하는 송철이 이 사람이 송연암이에요. 송철이 중심으로 해서 한 그룹 세 사삼, 그러니까 송철, 이영수, 최상철이 한 조가 되고, 그 다음에 한지성하고 한 조가 된 것이 김성호, 박영진, 나(문응국)와 한 조로 구성된 것이 김상준, 나동규 이렇게 한 조가 되었는데, 훈련을 받고, 대적 방송, 전단 만드는 연습, 코리아 신문 만드는 것이 다 끝났으니까. 제일 먼저 임팔 작전에 참석한 것이 내가 맡은 조입니다. 최일선에 나간 것이 그 때 헤어졌어요. 임팔 작전 그러니까 1943년에 가서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일선에 배치되니까, 우리가 임팔에 도착한 것이 12월 하순이 되었어요. 임팔이 어떻게 되느냐 하면, 버마 국경으로부터 36마일 지점입니다. 그래 난 거기 가서 제일 처음에 한 3개월 동안 임팔 시내에 있었어요. 임팔이라는 데가 마니폴 왕국의 수도인데, 인구가 약 만오천밖에 안되요. 만육천인가 그렇데요. 거기거 대기하고 있다가, 총 반격 작전이 일어났어요. 윙게 장군(Gen. Winege)라고 있지요. 공중에서 산화되었지만, 그 사람이 소령 때 버마에 있다가 후퇴해 나오면서 그 양반이 죽은 때가 준장입니다. 그 양반이 다시 공수로 해서 인도의 탈환 작전, 그걸 전개하게 되었는데, 난 거기 있다가 어디까지 나갔으냐 하면, 그게 작전이 전개될 때에 티딤이라는 데가 있어요. 티딤은 버마 땅입니다. 임팔서 66마일 지점이에요. 그러니까 인도를 벗어나서 완전히 버마로 들어간 거에요. 거기 17사단 영국 사람을 블랙 캣 디비전(Black Cat Div.)이라고 그럽니다. 마크가 블랙 캣이에요. 검은 고양이. 인도 사단의 제 17사단인데, 여기의 구성이 어떠냐 하면, 인도 사람이 주로 되어 있고 1개 여단이 영국 정규군이 배속되어 있습니다. 티딤이란 곳에 도착한지 사흘만에 역습을 당했어요. 이쪽 D-Day가 3일 후인데, 일본사람들이 먼저 쳐들어 왔어요. 그래서 거기서 산산조각이 나서 후퇴를 하는데, 임팔까지 다시 나오는데, 한 달 동안 돌파 작전이죠. 포위를 당했으니까. 거기서 아마 우리가 일본 말, 일본 문서 그 중에서 제일 귀중한 것을 영국 사람이 제공한 것은 딴 것이 아니라 그 문서에 의해서 일본 사람들의 작전이란 것은 군사에 대해서 아는 분들은 굉장히 흥미 있겠지만, 대대장을 대위로 바꾸었어요. 바꾸니까 일본 문서에는 갑자기 대대장이 둘 나타나니까 1개 연대가 2개 연대로 된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사단이 하나 더 느는 겁니다. 연대가 늘면 사단이 늘거든. 그랬는데, 내가 유심히 보니까 전투하기 전에 대대장이 벌써 둘이 나온 거지, 그 다음에는 하나다. 왜놈들이 할 때에는 꼭 지휘관의 이름을 씁니다. 중대장은 다이고, 대대부터는 부따이에요. 그러니까 부대장의 이름이 둘이 나오면 2개 대대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전혀 틀리죠. Gen. Gown이라고 곤 소장인데요. 불러서 묻데요. 그래서 서류상 그렇게 되었다고 하니까, 그러느냐고 하면서 그 날 그 자리에서 돌격 명령을 내리데요. 그래서 임팔까지 후퇴하는데 한 달 걸렸어요. 그래서 제가 곤 장군의 지지를 많이 받았어요. 나동규하고 김상준 셋이서 임팔을 나와서 언제까지 싸웠느냐 하면 한 달 돌파해서 임팔까지 나오니까 한국 사람들의 활용도가 높다 해서 몽땅 다 끌고 왔어요. 딴 곳에 파견되었던 사람들까지. 거기서 6개월을 싸우는데 임팔에 나와서 처음에 병력이 모자라서 일선에 배치되어 있다가 이쪽이 1개 군단이에요. 영국군이 증강되었으니까 그리고 보급은 전부 공중보급입니다. 차단되었으니까. 3개 사단이 들어왔어요. 15사단, 30사단, 31사단인가... 거기서 한 6개월하면서, 우리가 주로 하는 것은 포로 심문, 전단 만들어서 뿌리는 것....

이현희 : 방송도 있었죠?

문응국 : 우리가 거기 가서 방송한 것은, 영국 사람들이 참 신사 나라에요. 가서 탱크를 딱 포위해놔요. 투항 권고를 15분간 합니다. "너희 지금 포위되었으니 갈 곳이 없다. 투항하라." 그리고 책임을 줘요. 시간은 딱 15분간이다.

이현희 : 그 안에 빨리 결정하라는 이야기죠?

문응국 : 네, 그 안에 결정해서 손들고 나와라. 아니면 15분 후에는 책임 안진다. 그리고 최일선에 나갑니다. 내가 나가서 방송하고서 뒤로 후퇴해 들어오면, 15분 딱 넘으면 너희들 마음대로 행동하라. 이제부터 공격해라 하면 불바다가 되요.

이현희 : 그냥 집중 포격하는 거죠?

문응국 ; 네, 포위했으니까, 거기의 포격은 포탄이 아니고, 소이탄이에요. 정글지대거든요. 대개 거기는 조금 위치가 높고 정글이니까. 우리 한국의 정글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거긴 참 깊어요. 그래 소이탄으로 불바다 만드는데 견뎌 배겨요? 일본 사람은 잘 투항을 안합니다. 급하면 기어 나오는 것을 줏어 오는 거야.

이현희 : 손들고 나오는 녀석들이 별로 없어요?

문응국 : 별로 없어요. 있기는 있는데, 대위 녀석 하나 있기는 있었는데, 대대장하던 놈. 그렇게 몇 있었지만 그렇게 흔하지는 않았어요. 그래서 6개월을 했어요. 7월이죠. 다시 들어왔어요. 영국군 하나 특징이 있어요. 일선 근무를 하면서 이동해 나가는 시간까지 꼭 6개월이에요. 전투가 그렇게 치열한데도 장병간의 한 달 동안 휴가를 다 주어요. 그거 아주 철저합니다. 우리는 교대 시간이고 뭐고 없고 거기서 전과 올린 데에서 영국군 아 ! 한국 사람들이 이렇게 했다. 해서 아마 제일 인정을 받았을 겁니다. 그 후에는 6개월 더 쉬어 가지고 어디로 갔는고 하면, 랭구운 상륙 작전에 참가했어요. 6개월 쉰 다음에 3개 파트로 또 나누었습니다. 하나는 내가 포함되어 있는 랭구운 상륙작전이고, 만달리하고 만달리 북쪽에는 미군부대하고, 그 때 미군을 중미 연합군이라고 그래요. 연합군이 북쪽에서 내려오고 우리는 3 파트로 나누어서 나하고 송철이하고 둘은 상륙 작전이 중요하다고 해서, 그 사람 일본에서 중학교 나왔어요. 우리들은 일본말에 대해서는 막히는게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거기 배치되고 딴 사람들은 만달리고, 그리고 버마란 곳이 한 가지 단일 민족이 아닙니다. 크게 3민족으로 나누어야 합니다. 북부하고 만들리하고 랭구운하고, 그런데 그 다음에 전부 헤어져서 했으면서 각자가 나중에 와서 종합하고....[153]
파일:sj16ob.jpg
당시 임팔전선에 뿌려진 연합군 삐라

1945년 3월 베이컨 육군 대위와 송철, 김상준 김성호 공작원들은 만달레이 전선 내 모니와 근방에서 작전을 하던 중 기관총 사격에 노출되어 제압되었다. 베이컨 대위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조그만 풀섶위로 기어올라가 망원경으로 기관총 진지를 관측하려는 와중, 기총사격을 받아 복부에 중상을 입어 전사하였다.[154]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베이컨 대위를 국가유공자로 지정하였다. 202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 놈들아, 학생들의 머리에 불이 붙었느냐? 왜 쇠갈구리를 휘두르는 거냐?

이것이 3 · 1 운동 당시, 만세를 부르는 함흥 학생에게 일본 소방서원이 불 끌 때 쓰는 쇠 갈구리를 마구 휘두르자, 그것을 막으면서 고함친 한 서양인의 목소리였다. 그는 캐나다 선교사 맥래(MacRae) 였다. 그는 경찰서장을 찾아가 항의하기도 하고, 경찰서에 불려가 혼나기도 했다.

맥래 목사의 딸 펄(Elizabeth Pearl)은 베이컨(Roland C. Bacon)과 결혼했다. 베이컨도 신학대학 출신의 목사로서, 한국에 가서 선교활동을 하겠다고 자원했다. 둘은 한국에 와서 충청남도 일대의 선교 사업을 담당하였다. 한 때 만주 룽징(龍井)에서 동북 성경학원을 경영하며, 한국 동포를 위한 교육과 선교 사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부전서전이랄까, 베이컨도 그 장인 못지 않게 한국 사람과 깊은 우정을 맺고, 한국 사람의 일을 내 일처럼 돌보았다.

1941년, 이들은 일본 관헌에 의해 한국을 쫒겨났다. 후일 베이컨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들은 나를 추방했으나, 내 발자국을 다 쓸어 버리지는 못할거야. 나는 언젠가는 저 복사꽃 피는 내 고향으로 돌아가 정든 형제들을 만날 거야."라고 했다.

1942년, 베이컨은 인도에서 영국군에 입대하여 장교훈련을 받고 대위로 임관된다.
이 무렵, 한국 광복군 10명의 인도 공작대를 뉴델리고 파견하였다. 얼마 후 이들은 캘커타에서 영국 GSIK 제 201부대와 합동훈련에 들어가고, 여기에서 베이컨 대위를 만났다. 베이컨은 광복군 연락 장교로 배속된 것이었다. 그들은 타향에서 만난 고향 친구처럼 반가와했다.

이 때, 베이컨과 같이 캘커타에 가 있던 부인 펄이 캐나다에 있는 동생 헬렌에게 보낸 편지;
"얘, 참 놀랍구나, 롤랜드(베이컨 대위)가 한국인 장교들을 데리고 집에 오지 않았겠니. 먹고 웃고 떠드는 동안, 우리는 다시 한국에 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단다. 모두들 이 전쟁은 한국 독립을 위해 하는 거란다. 그리고, 전쟁에 이기면 새 한국 건설의 임무를 맡을 거란다...."

1943년 말, 인면전구공작대는 임팔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듬해 적은 임팔을 공략하여 버마루트를 차단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연합군은 카사블랑카-워싱턴-카이로 회의에서 인면작전계획을 확정하고, 스틸웰 장군 지휘 하에 일대 반격전을 개시하였다.

영국군 제 15군단도 하늘과 지상으로부터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전선은 일진 일퇴, 1945년 초에야 비로소 적은 각 전선에서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영국군의 일부는 맨달레이 진격 작전에, 다른 일부는 랭구운 상륙 작전에 가담했다. 비와 피와 땀이 뒤범벅이된 치열한 전투였다. 전사가(戰史家)들은 붓을 모아 기록하였다.
"포와 비와 기아에 시달린 당시의 버마 전선은 태평양전사상 가장 처참한 죽음의 행렬이었다고..."

베이컨 대위는 맨달레이를 바라보며, 승리의 일보 직전에서 전사하였다. 1945년 3월 13일, 해방 5개월 전의 일이었다.

그가 전선에서 아내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 :
"우리는 머지않아 신생 한국에서 정든 친구들과 웃음의 꽃을 피울 날이 올 것이오. 펄!"[155]

이후 영국군은 지속적으로 충칭의 임시정부에 인원 증파를 요청하였으며 국민정부에 의해 불허된 인원을 제외한 나머지 대원을 임시정부 차원에서 1945년 3월 파견하려 했지만 종전으로 무산되었다. 남은 공작대원들은 1945년 5월, 연합군의 랑군탈환전에 종사하였으며 1945년 9월 10일 충칭의 광복군총사령부로 복귀하였고 송철 등 일부 대원들은 인도 현지에 남겨져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156]
문응국 : 그래 9월 6일에 거기서 떠나니까 11시간 만에 충칭에 도착해요.

이현희 : 열차로요?

문응국 : 아니에요. 비행기지요. 그땐 프로펠러인데 11시간 걸렸어요.

이현희 : 그렇게 오래 걸리는군요. 비행기인데.

문응국 : 그게 거리가 얼마입니까? 히말라야 산을 넘어야 하는데 인도의 캘커타에서 충칭까지인데. 충칭서 윈난까지 비행기로 3시간이 걸려요. 그런데 와서 보니까 신익희 선생이 그 중에도 그렇게 생각했던지, 그 땐 신익희 선생이 내무장관이었습니다. 그래 날 그렇게 기다렸다고 해요. 그러다 떠난 지가 일주일 되었다나. 나를 기다리다. 그 때 부랴부랴 내려가려 하니까 지청천 영감이 "좀 쉬라" 그러는 거야. 돌아올 때 "난 안남겠다." 그래서 송철이더러 인도에 남으라고 그랬어요. "남겠냐?"하니까 남을 의사가 있어 송철이 "남겠다."하기에 나보다는 이 사람이 괜찮다고 말하고, 난 6일 떠났는데 9일에 돌려보냈어요. 나 외에는 필요없대요. 그래 영국 사람들이 얼마나 사상적으로 강해요? 난 이런 것을 왜 강조하느냐 하면 그런 점은 깨끗이 끊는다고요. 그건 배울점이라고 봅니다. 내가 뭡니까? 잘난 것도 아니고, 식민지 백성 아닙니까? 그런데도 "당신 외에는 거기에는 아무도 필요치 않다."는 거에요. 그래서 내가왜 이것을 늘 이야기 하느냐 하면 한국에 와서 가만히 생각하니까 경교장, 저 한미호텔에서 처음에는 경양식 비슷하게 밥 좀 주너니 석달 지나니까 일변해요. 국내에서도 또 그렇게 생겼네. 그래서 이거 안되겠다. 신익희 선생, 이시영 선생이 내 군대에 들어올 때 내 보증인으로 되어 있다고, 그 때 신익희 선생하고 백범 선생한테 가니까 "경찰직해라."그래 "나 경찰직에 안 들어 가겠다."그러니까 신익희 선생이 "너 이것저것 하지 말고 지금 혼란기인데...." 아!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당으로 끌고 가요. 다 끌고 가요. 당이 몇 개인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래서 지청천 영감이 대동청년회인가 한다고 해서 가볼까 했더니, 이것도 개판이야. 그래서 백범 선생보고 "나 다시 배울 계기를 마련해 주십시오."그러니까 이 영감이 돈이 없어요. 그래 옛날에 살던 청진동집에 가보니까 없어졌지. 그래서 뭘 할까 망설이다가....

이현희 : 1946년 9월이라고 했죠?

문응국 : 여기 들어온 건 1946년 6월 23일 부산항에 도착했어요. 상하이에서...[157]

부록
광복군 주인면전구공작대 계급을 받았다는 사실에 대해서 정정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현희 : 굉장한 영웅으로 추대한 것 아닙니까?

문응국 : 그래요. 안원생씨를 퇴원해라 해서 다시 캘커타로 와서 귀국 준비를 했는데, 내가 1945년 9월 6일 아침에 떠났어요. 한 3일 전부터 준비를 하는데 있어야 별 것 없지. 그 군복 다 가지고 올 수도 없고, 영국 군복인데 뭐, 계급장만 우리가 다르게 달았어요. 영국 계급장을 달려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싫다. 그래 우리가 임시로 만들어 단 겁니다. 광복군은 계급장이 없거든 그때까지.

이현희 : 광복군은 계급장이 없었어요?

문응국 : 없었어요. 그 때 우리가 편지를 해서 빨리 계급장을 만들자 해서 무궁화로 만든 것이 그겁니다. 그래서 영국식을 많이 닮았어요.[158]
파일:인면전구공작대_동아일보.png
광복 이후 동아일보 1946년 3월 16일자에 한지성 대장 보도가 되었으며 대서특필되었다.
파일:인면전구파견공작대.png
국가보훈부 총무과(당시엔 원호처)에서 1977년에 생산된 문서에는 한지성 대장을 포함하여 송철, 김성호, 이영수를 행방불명처리를 했다. 해당문서는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한국광복군총사령부명단을 검색해서 확인해볼 수 있다.

4.8.1. 인면전구공작대 서훈 문제


공작대장 한지성과 대원 김성호·송철·이영수는 독립유공자로 포상되지 않았다.

인면전구공작대장인 한지성에 대해 2018년 3·1절을 앞두고 서훈 심사가 진행됐으나 포상이 이뤄지지 않았다.

1912년 경상도 성주 태생인 한지성은 1930년을 전후해 중국에 망명한 후 독립운동에 매진하는데, 김원봉 쪽과 돈독한 관계를 형성했다. 그리고 안공근[159]의 둘째딸 안금생과 결혼하여 사실 상 백범 김구와 친인척관계였다. 1938년 김원봉이 중국 한커우에서 창설한 조선의용대에서 정치조 선전주임(1939년), 외교주임(1941년)으로 활약했다.

김원봉이 이끈 조선민족혁명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 후 한지성은 임시정부의 입법 기관인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됐다. 임정 선전부와 광복군 업무도 수행하던 중 공작대장으로서 인도·버마 전선에 파견돼 활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런 공적에도 서훈 대상이 되지 못한 건 광복 후 행적 때문이다. 1946년 귀국 후 한지성은 좌우 연합 전선 구축을 시도한 김원봉·여운형 등과 함께 활동하지만, 1947년 경찰에 잡혀 석 달간 구금되는 등 어려운 상황에 놓인다.

결국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 참석차 평양에 간 후 북한에 머물게 된다. [160] [161] 한국전쟁 발발 후 서울이 북한에 점령된 때에는 서울시임시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김성호·송철에 대한 서훈 심사가 진행됐으나 포상이 이뤄지지 않은 것도 분단 문제와 무관치 않다. 보훈부는 "해방 후 친북 활동 자료에 두 사람 이름이 나오는데, 동일인인지 동명이인인지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이들의 신상 정보가 불명확하다는 점도 작용했다. 김성호는 출신지(신의주)는 확인되지만 생몰년이 미상이고, 송철은 출신지·생몰년 모두 미상이다.

이영수도 출신지·생몰년 미상인데, 송철과 달리 서훈 심사조차 받지 못했다. 보훈부는 "기초 조사가 충분치 않아 심사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밝혔다. 광복 후 78년이 지나도록 '미심사' 상태인 이영수 사례는 한국 사회에서 공작대가 어떤 위치에 놓여 있는지를 보여준다.

섣불리 결정지을 수도 없는 것이 문응국 지사의 증언에 따르면 송철 등 몇몇 대원은 충칭이나 인도에 잔류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국가보훈부와 여러 단체와 국사학계가 노력하고 추적하여 유해를 봉환해야 할 것이다.

5. 제 2지대(1942.8.1. ~ 1946.5.16.) | 舊 제 5지대

5.1. 제 2징모분처

1940년 11월 공진원(公震遠)[162]은 시안(西安)에서 3개 지대로 편성될 때, 제 2지대장 겸 징모2분처(徵募二分處) 주임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 뒤 나태섭(羅泰燮)·고시복(高時福)·유해준(兪海濬)·지달수(池達洙)[163]·이욕해(李慾海) 등을 이끌고 쑤이위안성(綏遠省)[164]의 바오터우(包頭)를 근거지로 전방 공작 활동을 전개했었다.

파일:징모제2분처 위치.png

그런데, 현지에서 포섭한 교포 중의 한 사람인 최준(崔俊)이란 자가 처음에는 열성을 보이는 듯 했으나 점차 태도가 변하여 마침내는 일본헌병대에 자수하여 버렸는데, 이 일을 모르고 있었던 제 2징모분처 간부들은 갑자기 들이닥치는 적 헌병들에 의하여 체포당하기도 하고 필사의 노력으로 도망가기도 하였다.

유해준(兪海濬) 이때 체포되어 일본 규슈(九州)로 이송되었으며, 고쿠라(小倉)재판소에서 징역 2년에 3년간의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제 2징모분처 군사특파단의 주요임무는 시안(西安)에 군사거점을 확보하고 화북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선전활동과 한국광복군으로 모집활동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존 시안에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1940년 11월 시안에 정착하고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시안판사처가 설치되면서 끝마쳤다. 1941년 1월 1일 원년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한국광복군 제 5지대로 편입되면서 기존에 제 2징모분처의 자리는 광복군 총사령부가 사용하게 된다.

지청천 장군의 아들 지달수(池達洙)는 지복영 회고록 민들레의 비상[165]에서 기진맥진한 상태로 충칭에 귀환했다고 한다.

5.2. 창설배경

제2지대는 초기 편성되어있던 1,[166] 2[167], 5지대[168]를 통합하여 편성하였다. 제 2지대가 성립된 계기는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편입이었다. 조선의용대가 제 1지대가 되면서 개편을 하게 된다. 여기에 제 5지대 내에서 일어난 나월환 지대장 암살사건이 발생하면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대원들이 동요하게 되었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지대 통합을 추진하게 되었다.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합편 결의(1942. 4. 20)

국무의회 주요기사(國務會議 重要紀事)

조선의용대합편안(朝鮮義勇隊合編案)

대한민국 24년 4월 20일(大韓民國 二十四年 四月 二十日) 국무회의(國務會議)에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으로 합편(合編)하기로 결의(決議)하다.

제 2지대는 조선의용대광복군 편입이 결정된 후 성립이되었다. 그때 이미 조선의용대를 광복군 제 1지대로 한다는 것이 결정되었다.

5.3. 부대인원

실제 구성원은 총사령부 제 1지대, 제 5지대 대원들로 구성되어있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광복군에 편입하여 편성되었던 제 5지대는 전지공작대 시절부터 초모활동을 통해 이미 대원들을 확보하고 있었고 1941년 말경에는 그 숫자가 1백여명에 달하고 있었다. 나월환 지대장 암살사건으로 인해 대원 중 20명이 체포 구금되었지만, 나머지 대원들이 모두 제 2지대에 편입된 것으로 보여지고 성립당시엔 약 80명 정도로 추정된다.
한국광복군 제 2지대 편조 비준과 제 2지대장 임명을 대신 전보(1942년 8월 1일)

문서번호 : 渝辦一參字第23073號
발신자 : 군사위원회 판공청
수신자 : 외교부

1942년 8월 1일
사유 : 한국광복군 제2지대 편조가 비준되었으며 이범석(李範奭)이 지대장으로 임명되었음을 알림

외교부에 알립니다. 한국광복군 제1지대의 편조가 비준되었음은 이미 대전을 통해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이번에 상부의 명령에 의해 한국광복군 시안(西安)총무처, 지현(吉縣) 특파원, 베이핑(北平)제 1징모처, 텐진(天津) 제 2징모처, 샹라오(上饒) 제 3징모분처 등의 명의를 모두 철폐하고 이들 조직의 인원을 모아 서안에 한국광복군 제2지대를 편조하기로 하고 이범석(李範奭)을 지대장에 임명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정을 발표함과 더불어 각 기관에 알리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군사위원회판공청 渝辦一參印
지대장 이범석(李範奭)[169]
지대부 뇌진
비서 쟝펑샹(張鳳祥 | 중국인)
부관 오성행(吳成行), 서곤
OSS책임자 써전트(Clyde B. Sargent) 미합중국 육군 대위 (미국인)
무전교육책 정운수(鄭雲樹 | 미국인)
정훈조장 송면수(宋冕秀)
부조장 이재현(李在賢)
조원 한형석(韓亨錫), 민영수(閔泳秀), 이윤장(李允章), 이덕산(李德山)
총무조장 노복선(盧福善)
서무 최동균(崔東均)
조원 김용주(金容珠), 김석동(金奭東), 김용의(金容儀), 맹조화
공작조장 이재현(李在賢)
부조장 김천성(金天成)
조원 김용주(金容珠), 김석동(金奭東), 김용의(金容儀), 백정현(白正鉉), 김찬원(金贊元), 김유신(金有信), 서곤, 이해순(李海淳), 정일명, 장이호(張利浩), 이욱승, 한휘(韓輝), 김형철, 최전
군의 최동인(崔東仁, 金敬寅), 안영희(安英姬)[170]
본부요원 김마리, 엄익근(嚴益根), 송영집(宋永潗)[171], 민영주(閔泳珠)[172], 전태산(全泰山)

제 1구대
구대장 안춘생(安椿生)
구대부 김유신(金有信)
1분대장 박재화(朴載華)
2분대장 김의원
3분대장 이해순(李海淳)
대원 조원구, 이월봉(李月峰)[173], 이지홍, 박인숙, 신영묵(申榮默), 박익득, 박금룡(朴金龍), 홍재원(洪在源), 조순옥(趙順玉), 장준하(張俊河), 김준엽(金俊燁), 김유길(金柔吉), 홍기화(洪基華), 문말경, 이호길(李浩吉), 이준승(李濬承), 김성근(金星根), 오건, 김욱배(金旭培), 이순승(李淳承), 김두환, 이동환, 이도순(李道淳), 이원범(李元範), 최문식(崔文植), 강일성, 이삼녀, 이경녀, 황삼룡(黃三龍), 유덕량, 강창복, 이우성, 이건림, 김동건, 안일용(安一勇), 백준기(白俊基), 박명광, 허봉석(許鳳錫), 최간란, 윤태현(尹泰鉉), 한정임, 김세용(金世用), 김복성

제 2구대
구대장 노태준(盧泰俊)[174]
구대부 지달수(池達洙)
1분대장 장이호(張利浩)
2분대장 박훈
3분대장 최전
대원 이하유(李何有), 오서희(吳庶熙), 김해성(金海星), 임재남(林栽南), 이계현, 김봉식(金鳳植)[175], 배아민(裵亞民)[176], 장덕기(張德祺), 최봉상(崔鳳祥), 임정근(林正根), 김영준(金永俊), 정정산(鄭正山),고여순(高如順), 박영섭(朴永燮), 조광선(趙光善), 김명택(金明鐸), 지창순, 장경숙(張京淑)[177], 김용(金湧)[178], 이한기(李漢基), 전일묵(田一默), 이우향, 이운학, 정순옥, 백옥순(白玉順)[179], 동방석(董邦石), 이지성(李志成), 임소녀(林小女)[180], 신국빈(申國彬), 김상을(金商乙), 노성환(盧星煥), 한종원, 이동학(李東學), 송석형(宋錫亨), 김성율, 송수일, 안국보, 고철호, 최창모, 전성윤, 김숙영(金淑英), 안정숙

제 3구대
구대장 노복선(盧福善)
구대부 백정현(白正鉉)
1분대장 강정선(康貞善)
2분대장 허영일(許永一)
3분대장 최철(崔鐵)
대원 선우기(鮮于基), 김현(金鉉), 장철(張鐵), 이명( 李明), 염재항(廉宰恒), 이보비(李寶妣)[181], 문학준(文學俊), 박지호(朴芝鎬), 최군삼(崔君三), 이정선(李正善), 최복련, 박성화( 朴成和), 이한성, 이영길(李永吉), 장두성(張斗星), 김운백(金雲白), 왕태일(王泰日), 김선옥, 정상섭(鄭相燮), 박규채(朴圭彩), 송창석(宋昌錫), 계의성, 한경수, 김명천(金明天), 석호문(石鎬文), 윤치원(尹致源), 신덕영(申悳泳), 정인교, 노능서, 김영호(金榮鎬), 석근영(石根永), 김춘정, 김덕원, 김중호(金仲浩), 윤재원, 태윤기(太倫基), 구자민(具滋民), 김성갑(金成甲), 이종무, 정재민, 박수덕, 박승렬, 박춘규, 남지현, 김성환(金聖煥)

적점령 지구내 협조자
루안(潞安) 지역
이서룡, 차영철, 정태희, 정기주, 권혁상, 정윤희, 정영순

신샹(新鄕) 슈우(修武) 지역
인순창, 김진호

뤄양(落陽) 지역
홍구표, 김기도, 최창희

5.4. 철기 이범석 장군 암살 미수 사건

이재현의 광복군 제2지대사에 따르면 나월환 암살사건 직후 이범석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졌다고 한다.
어떤 사건이란 철기 장군에 대한 총격 미수사건을 말하는데, 후일 알게 된 일이지만, 철기 장군은 제 2지대장으로 부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배아민(裵亞民)이라는 대원으로부터 피격당할 뻔 했었다. 배아민은 제 5지대 시절의 지대장 송호성과 매우 돈독한 사이였는데, 송호성이 지대장 직을 물러나게 된 데 대한 불만이 있었는지 아무튼 배아민(裵亞民) 대원은 철기 장군을 암살하려 했다.
이 사건 이후, 배아민과 송호성의 밀접한 관계, 송호성 등이 간 4단 특무대에 선물까지 하며 우리 동지들의 사형 집행을 촉구한 것 등이 백일하에 밝혀지자. 철기 장군은 우리 동지들의 문제에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182]

철기 이범석은 자신을 암살하려는 사건의 배후에 송호성이 있다고 보았다. 나월환 암살사건 직후 1942년 4월~7월, 광복군 제 5지대 대원들이 제 2지대에 흡수되는 과정에서 당시 제 2지대장이던 송호성(군인)이 광복군 장악을 위해 1942년 10월[183]에 새로 제 2지대장으로 부임해온다.

문응국 지사의 인터뷰에서는 제 2지대 대원들이 송호성 전술교관을 추천해서 제 2지대장이 되었으나 총사령부 윗선의 압력으로 이범석 장군이 지대장으로 왔다고 한다.
체포된 사람은 이해평, 이하유, 김동수 등이지요. 박기성씨는 먼저 나왔고, 그래서 3.1절에 사고가 나지 않았어요? 사고가 나니까 안되었데요. 아까운 사람들이 몇 붙잡혔어요. 일선에서 그 어려운 사선을 넘어 같이 온 사람들이 거기에 가담했으니 할 수 있나요? 그 때에 나머지 사람들 중에 누가 지대장 노릇을 하느냐가 문제가 되었어요. 그러니까 그 때 지대장은 죽어서 없었지 않아요?

이현희 : 보선을 해야겠네요?

문응국 : 네, 보선을 해야 할텐데 우리가 추천을 했어요. 송호성이라고 그때는 송호라고 했습니다.

이현희 : 호랑이 호虎자지요?

문응국 : 네, 거기에 소리 성聲자를 더 붙였지요. 그 분은 전술 교관을 했어요. 그 당시 교관은 역사 교관으로 지금 조경한 선생, 조시원 선생, 이분들이 교관을 했어요. 조시원 선생과 조경한 선생은 만주 독립운동 관계, 조시원 선생은 삼국사 관계도 조금 하고 다음에 한독당의 역사 이런 것들을 가르쳤지요. 그래서 우리가 이럴 수 없다 하고 송호성 선생을 추천했어요. 그 분은 전술 교관이고 고참인데다, 독립군 중에서 중국 군대 사단장을 했답니다. 우리들의 전술 교관을 했습니다. 가시 밭에다 들여놓고 훈련시키는데 혼났어요. 그래도 그 사람이 고참이고 다른 사람은 못믿겠다 해서 그 사람을 모셨지요. 1942년 3월 이후에 중국 기관에서도 승인을 했어요. 그 분은 중국 바오딩군관학교(保定軍官學校) 나온 사람입니다. 참다운 군인이고 우리가 그 분을 모셨어요. 그래서 지대장을 했어요. 그런데 그게 위에서는 아마 불만이었던 모양이에요.

이현희 : 윗 사람하고 잘 안맞았던 모양이네요?

문응국 : 왜냐하면 그 분도 군대에 있다 왔으니깐요. 조선의용대는 옌안으로 다 도망가고 제 1지대라는게...제 2지대가 치장에 있었는데, 제 2지대는 우리와 같이 일선에서 자진해서 들어간 사람들이 많거든요. 거기에는 조선의용대가 섞여 있어요. 내가 보건데, 옛날에는 청산리 전투나 신흥군관학교가 있어서 처음에는 교육을 조금 했지만, 그 나먼지 종합적이고, 단합된 교육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우리만이 그래도 한데 뭉쳐서 중국 기관에서 위탁 교육을 받았지만 받을 때는 다 받았으니깐요. 1942년 3월 이후에는 송호성 영감이 하다가 10월에는 철기(이범석) 장군이 온거에요. 황학수 선생은 내내 광복군 지부 사령관에요. 그 때 시안에 소위 말하는 조선의용대를 제외하고는 광복군을 창설하는 중심지입니다. 조선의용대 일부도 그리로 흡수되었지요. 김학규씨도 와 있었죠. 군대 관계는 다 와 있었어요. 말도 하기 싫고, 잘 했다 할 수도 없고, 같이 어울리기도 싫지만, 이것을 정리해야 되겠다 해서 우선 이 정도나마 만들어 놓자 하고 해놓은 겁니다.

문응국 : 송호성 영감이 철기 장군이 오기까지 제 2지대장을 했습니다. 송호성 장군이 지대장을 했던 것을 빼버렸어요.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나를 송호성파라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데, 역사가는 사실 그대로 하지, 왜 잘못한 것을 다 빼버리고 좋은 것만 내놓겠다 그러느냐구요. 철기 장군이 도착하기 전에 우리가 떠났어요. 9월 하순에 한독당 대회가 있다고 해서 시안을 떠났어요. 그 때 떠난 사람이 내가 인도로 데리고 간 사람들입니다. 충칭으로 갈 때도 이제 고인이 되신 조시원 선생, 조경한 선생 이 분들이 당 계통이니까 같이 같습니다. 우리를 데리고 거기서 오라고 그래요. 그래서 나더로 뽑으라고 해서 가겠다는 하는 사람을 뽑았습니다. 그 때 충칭으로 갈 때 우리 고향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돌아가신 고시복 장군, 거기서는 왕중량이라고 했지만 나태섭씨와는 한 고향 사람들입니다. 조경한 선생, 조시원 선생 이분들하고 그 때 인도에 간 사람들 7명 모두 충칭에 몇 사람 남았죠. 그래서 충칭에 간거에요. 철기 장군을 내가 처음 어디에서 봤냐하면 바오지(寶鷄) 조금 지나서, 바오치가 시안서 200리가 넘지요. 트럭 위에서 봤어요.[184]

추측컨데 1942년 후반부터 1943년 초 기간 동안 철기 이범석 장군 암살 미수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배아민(裵亞民) 대원을 송호성 편으로 끌어들여 이범석을 암살하고자 했다고 한다.
이재현 : 암살 사건 후 5지대는 이북으로 간 송호성이 교관으로 왔었는데 이 분이 욕심이 생긴 거에요. 처음에는 이 분이 충칭에서부터의 제 5지대 핵심 간부들을 모조리 감옥에 집어 넣었어요. 그때 벌써 우리는 임정 제 5지대로 편성되어 있을 때니까 송호성이 총사령부에 보고를 했는데 우리 군의 기강을 생각해서 우리를 모두 총살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하루 아침에 우리 모두는 총살감이 된 것이지요.
충칭에서는 이청천 장군이 총사령관이었고 이범석 장군이 참모장이었는데, 이범석 장군이 보고만 믿고 총살령에 싸인을 한 거에요. 그 때 이하유, 나(이재현), 김동수, 36사단에서 초모해 놓은 50~60명 중 젊은 친구들 7명도 들어갔죠. 그러다가 문제가 복잡해지니까 이범석 장군이 소장 계급을 떼버리고 상교(대령)으로서 시안으로 왔어요. 왜냐하면 한 지대의 지대장은 상교[185]밖에 할 수 없거든요. 수습하기 위해서였어요.
그런데 얼마 후 또 쿠데타가 일어났어요. 송호성이 일으킨 것이죠. 이것은 가외의 이야기지만 이범석 장군은 영리한 세퍼드 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는데, 훈련을 잘 시켜서 이 양반이 손짓을 안하면 앉지도 않고, 이 분이 주는 밥이 아니면 이틀이고 사흘이고 안먹을 정도였어요. 송호성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침실 창에 검은 그림자가 어른거리니까 그 개가 뛰어가서 침입자를 물었어요. 뒤쫒아 나가보니까 권총을 가지고 철기 장군을 암살하려고 했던 거에요. 그렇게 되니까 우리가 살아나게 된 거지요. [186]

이범석 암살 미수 사건으로 인하여 1944년 봄, 김동수, 이하유, 박기성, 이재현 나월환 암살사건 연루자들이 중국 감옥에서 석방되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한국광복군 제 2지대 대원들이 이범석 지대장에 반대하여 소동을 일으키는 등 많은 갈등이 있었던 것이 중국군 군사위원회 보고가 된다.
파일:한국광복군 제 2지대 소동상황을 보고.png

결과
이범석은 같은 독립운동가 이면서도 송호성 등 기존 임정 세력과 특히 김구 선생과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창군기 시절 장교들의 증언에 따르면 송호성은 한독당 계열에 가깝다고 했지만 이범석은 그렇지 않았다.

김승곤 지사는 1934년 7월 15일 민족혁명당에 가입, 남경에서 석문룡(石文龍), 최성장(崔成章), 하동진(河東振) 등 동지들과 함께 동 당 특무부 간부가 되어 일본 밀정을 조사·보고 하는 등 비밀정보활동에 종사해서 김구와 지청천, 이범석에 관련된 관계를 잘 알고 있다.
Q : 동아일보 신문이라고요? 아, 그 신문이 중국으로도 왔습니까?
김승곤 : 상해로. 남경 본단에서 우리에게 신문 한 부를 보내줘요. 신문에는 암호 글자가 있지. 암호. 암호글자를 써서. 신문에 있는 암호는, 소다물로 닦으면 뻘건 글씨가 나와. 그러면 신문을 보고 지령을 받는거지. 그런데 남경서는 사건 사고가 나지 않았겠어요. 배반을 했거든. 김구 선생을 이청천이, 이범석이가 배반을 했어.

Q : 배반을 했단 말입니까? 누가 말입니까?
김승곤 : 이청천이 하고 이범석이 하고.

Q : 두 사람이 사이가 갈라졌단 말입니까?
김승곤 : 배신을 했지요, 배신을. 김구 선생을.

Q : 아, 김구 선생을 배신했다는 말씀입니까?
김승곤 : 두 사람 다 김구 선생이 데려다 놨거든. 그런데 그 사람들이 김구 선생을 반대했단 말이야. 그래갖고는, 그래서 쫓겨났어. 낙양사관학교에서 쫓겨났지. 이범석이가.

Q : 그러면 그 두 사람은 어디로 갔습니까?
김승곤 : 그 둘이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지. 그 후 상해학교 졸업하고 남경에 오니까, 이청천이도 남경에 와있고.

Q : 이범석은요?
김승곤 : 이범석은 …

Q : 모르시구요?
김승곤 : 떠돌이 군대. 이범석이는 떠돌이 군대에 들어갔어. 단의 지시를 받아가지고 재무장을 한대. 상해, 남경서. 그 당시에는 일본놈들이 남경에 쫙 깔렸어. 상해에는 말할 것도 없고. 상해는 일본놈 세력 뿐이여. 다른 나라 군대 있지마는 별로 활동이 없는데 일본놈들은 우리 한국 독립운동원들을잡기 위해서 눈알이 빨개 가지고 쫙 깔렸어.
그런데, 그러는 중에 1937년에 중일사변이 터졌어. 중일사변이 터져가지고, 그래 인자 한국청년이 한 120명이 있었어요. 상해에. 그래 단장 김원봉이 장개석에게 교섭을 해가지고, 훈련을 받게 해달라. 훈련을 좀 받게 해달라. 전선에 나가려니 군사훈련을 못받았으니 어떻게 나가겠나.
최소한 군사훈련은 6개월을 받으라. 그 훈련반에 가서 특별훈련을 받으라. 그래서 6개월 우리가 훈련받았어요. 받고 조선의용대를 만들었어요. 1938년 10월 10일날 조선의용대가 창립되었어요. 보훈처에서 실시하는, 뭡니까, 공적심사위원. 독립운동한 사람 뽑는데 나를 심사위원 맡겼거든요.[187]

이범석은 광복군 시절에도 총사령관 지청천과 사이가 좋지 않아[188] 참모장에서 지대장으로 보직을 바꿨었고 광복 이후, 이범석 장군은 김구 보다는 이승만과 더 가까웠다. [189]

송호성이 육사의 전신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南朝鮮國防警備士官學校) 교장으로 재임 중이던 1947년 12월, 생도 분열식 중 이범석이 연설 직전 사관생도들이 보는 앞에서 "송호[190]는 단을 내리라(연단에서 내려가라)!"고 할 정도였다.

5.5. 편제 및 위치

파일:철기 이범석 장군.png
광복군 제 2지대장 철기 이범석(鐵驥 李範奭)장군

제 2지대의 편제는 광복군 참모장에서 새로 부임해온 제 2지대장 이범석을 중심으로하여 제 5지대가 있었던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에 근거를 두었다. 당시 시안(西安)은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화북지대와 최전선으로 마주하던 곳이다. 화북지역은 20여만명으로 추산되는 한인교민들이 있어 선전/초모활동에 적합했던 곳이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시안(西安)에 교두보를 마련한 이후, 지대본부와 3개 구대가 모두 시안(西安) 남쪽 두취(杜曲)에 주둔하고 있었다.
파일:제2지대본부 위치.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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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西安) 두취(杜曲)

5.6. 초모공작

광복군의 개편과 함께 철기(鐵驥) 이범석(李範奭)을 지대장으로 하여 제 2지대의 초모공작의 성과는 나월환 제 5지대장 사후, 제 5지대 대원들의 성과로 계승하여 이어나가고 있었다.

1942년 5월을 전후하여 그 동안 산시(山西)·허난성(河南省) 등지에서 선무·초모 활동을 전개하여 오던 대원 김천성(金天成) 등은 최철(崔鐵)·이원범(李元範)·최전(崔銓)·왕태일(王泰鎰)·김도제(金道濟)[191]·강창복(康昌福)·배아민(裵亞敏)·강일성(江一成)·전일묵(田一默)·박영섭(朴永燮)·김명택(金明澤)·강정선(康貞善)·정인숙(鄭仁淑)·최동인(崔東仁)[192]·박훈(朴勳) 등 많은 청년들을 초모하여 산서성의 루안(潞安)과 윈청(運城)을 거쳐 시안(西安)으로 들어와서 입대하게 하였다.

1942년 10월, 백정현(白正鉉) 등 공작원들의 초모 활동에 의하여 장덕기(張德祺)·김용(金湧)·유덕량(劉德亮)·이해순(李海淳)·황삼룡(黃三龍)·이우성(李宇成)·박인숙(朴仁淑)·한정임(韓貞任) 등 많은 인원이 적 점령 지구를 탈출하여 서안으로 들어왔다.

1942년 12월, 2지대에서는 그 동안 중국군 전시 간부 훈련단 안에 설치한 한청반(韓靑班)[193]에서 새로 수업을 끝낸 대원들을 다시 전선 각지로 다수 파견하여 정보·작전·초모 등의 활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게 하였다. 그 중에도 한휘(韓輝)·이욱성(李旭成) 등은 스좌장(石家莊)·신샹(新鄕) 방면에서, 김유신(金有信)은 뤄양(洛陽) 부근에서 장이호(張利浩)·정일명(鄭一明)·이한기(李漢基)·서곤(徐昆)·이해순(李海淳)·이한성(李漢成) 등은 산시성(陝西省), 허난성(河南省)의 자오쭤(焦作)·신샹·카이펑(開封) 등지에서, 김천성(金天成)·백정현(白正鉉) 등은 산시성 일대에서, 김용주(金容珠)·김진호(金振鎬) 등은 허난성(河南省) 자오쭤(焦作)에서 각각 활발한 공작을 전개하였는데, 그 중에도 중국어에 능통한 김유신은 뤄양 부근 도구(渡口) 우체국의 직원으로 가장 잠입하여 긴밀한 연락 및 초모 공작을 폈다.

또 이무렵, 이범석 지대장은 서신을 중국측의 현지 군사·정보 책임자인 오종택(吳宗澤)·장공달(張公達)·오계성(吳啓誠)·우지후(于之厚)·이연년(李延年)·장옥현(張玉鉉)·왕진(王震) 등에게 보내어 협조를 요청하므로 하여 긴밀한 연락 활동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1943년 5월, 산시(山西) 지구에서 활동하던 김천성(金天成)·백정현(白正鉉)·정일명(鄭一明)·이해순(李海淳) 등은 박영만(朴英晩)·유기현(柳史鉉)·나광(羅光)·김성률(金成律)·김덕원(金德元)·신국빈(申國彬)·백준기(白俊基)·이우경(李宇卿)·이지성(李志誠)·김운백(金雲白)[194]·이운학(李雲鶴)·안일용(安一勇)·정상섭(鄭相燮)[195]·동방석(董邦石)·안정숙(安貞淑)·김의원(金義元)·문말경(文末景) 등 많은 사람을 적군 점령지로부터 탈출시켜 루안(潞安)·윈창(運成) 등지를 경유 시안(西安)으로 들어와서 2지대에 입대하게 되었다.

1943년 6월, 김형철(金亨徹)·최전(崔銓) 등 4인의 대원이 다시 산시·허난 지구로 침투하여 종전 공작원들의 활동을 협조 보강하였다.

1943년 10월, 신샹(新鄕)·자오줘(焦作) 등지에서 활동하던 서 곤(徐昆)은 중국군 군통국(軍統局) 요원으로 근무하던 인순창(印淳昌)을 광복군으로 포섭하였는데, 그 후 인창순은 정일명(鄭一明)과 함께 베이핑(北平)·쩡저우(鄭州) 등지의 많은 공작 성과를 거두었다.

1944년 2월, 김천성(金天成)·백정현(白正鉉) 등은 다시 최봉상(崔鳳祥)·한종원(韓宗元)·박금동(朴金童) 등을 초모하여 서안에서 입대하게 하고, 10월에는 다시 계의성(桂義成)·송창석 (宋昌錫)·이순승(李淳承)·김숙영(金淑英)[196] 등 4명이 적지에서 탈출하여 본대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이 때에는 중국군과의 절충을 위하여 제 2구대장 노태준(慮泰俊)이 직접 중화민국 제 34집단군(第三十四集團軍)사령부가 있는 케난포(克難坡)까지 가서 전기 인원을 대동하고 귀대하기도 하였다.

1944년 11월, 김천성·백정현 등의 적 점령 지구에서의 과감한 활동으로 전성윤(田成潤)·최창모(崔昌模)·윤치원(尹致源)·이병학(李秉學)·김두환(金斗煥)·박승렬(朴承烈)·김명천(金明天)·최봉련(崔鳳蓮)·김선옥(金善玉) 등 많은 청년들이 다시 적지를 탈출, 시안으로 들어와서 입대하였다.

1944년 12월, 장이호(張利浩)·정일명(鄭一明) 등은 뤄양(洛陽) 방면에서 김기도(金基燾)·홍구표(洪嶇杓)·최일룡(崔一龍) 등 청년들을 포섭하여 바로 현지에서 공작에 참가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광복군 전방 공작원들의 활동이 점점 확대 강화되고, 또 전쟁의 대세가 하루 하루 적 일본측을 궁지로 몰아넣게 됨과 함께 국내에서는 더욱 더 많은 청년들이 혹은 소위 지원병으로, 혹은 징병으로 대륙 전선에 끌려나가게 되니, 이러한 청년들이 자진하여 천신만고를 겪으면서 광복군 진영으로 찾아와서 입대하게 되는 인원도 날로 늘어나게 되었다.

초모된 인원들은 교육과 훈련을 거쳐 광복군으로 편입되었다. 중화민국 제 34집단군(第三十四集團軍)[197]에서 운영하는 중앙전시간부훈련단 내에 한국청년훈련반을 설치해서 이들에 대한 훈련을 실시한 것이다. 한청반은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시절 후중난(胡宗南)제 1전구 사령장관(第一戰區司令長官)의 협조를 얻어 설치한 것으로 2지대가 성립한 후에도 이곳에서 교육 훈련이 실시되었다.

6. 제 3지대(1942.2. ~ 1946.5.)

6.1. 창설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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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제 3지대장 백파 김학규(白波 金學奎) 장군
신흥무관학교를 졸업 후,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인 양세봉 장군의 참모장으로 신빈현(新賓縣)전투. 영릉가(永陵街)전투 경험이 있는 장군이다. 1940년 11월, 광복군 총사령부가 시안(西安)으로 이동됨에 그는 참모처장/참모장을 겸직했다.

제 3지대는 징모 제 6분처가 발전되어 성립된 지대이다. 징모 제 6분처는 종전의 제 3지대를 근거로 하여 편성한 것이다. 당시 제 3지대 대원들 없이 지대장 김학규(金學奎)만으로 편성되어있었고 김학규(金學奎)는 서안총사령부 참모장직을 겸임하고 있었다.

1942년 2월에 제 3지대장인 김학규(金學奎)를 주임으로 하여 오광심(吳光心)[198], 오희영(吳熙英), 지복영(池復榮)[199], 신송식(申松植)[200], 김광산, 서파(徐波), 신규섭 8명으로 편성되었다.[201]

징모 제 6분처의 공작전역은 산둥반도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산둥반도는 화북의 요소이자 국내와 만주지역 교포들과 상호연락이 용이한 지점이었다. 그 곳에는 김학규(金學奎)와 잘 아는 국민혁명군 제51군[202] 사령관 위쒜중 장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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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지대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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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명으로 구성된 징모 제 6분처는 1942년 4월 하순 산둥(山東)반도를 향해 시안(西安)에서 출발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목적지까지 도달하지 못한 채, 중간기점인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정착하고 말았다. 이들이 푸양(阜陽)에 도착했을때 일본군과 바루쥔(八路軍)간의 전투로 타격을 입은 위쒜중 장군의 국민혁명군 제51군[203]이 푸양(阜陽)으로 철수했던 것이다.

6.3. 편제

제 3지대는 편제상으로는 존재하나 명목상의 편제이지 실제 구성원이 갖추어 편제되어있던 것은 아니었다. 총사령부에서 제 3지대 편성 인준은 1945년 3월 17일이었고 푸양(阜陽)에 있던 징모 제6분처가 지대편성 명령을 받은건 1945년 3월 말이었다.

제 3지대 편성은 바로 이뤄지지 못했는데 이때 김학규 지대장은 OSS훈련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 충칭(重慶), 쿤밍(昆明), 리황(立煌)[204]등을 왕래하고 있었고 푸양(阜陽)엔 없었기 때문이다.

제 3지대의 조직체계는 일반대원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일부 간부에 의해서 유지운영되었다. 제 3지대가 주로 적 점령지구에 나가 비밀지하공작을 전개했던 관계로 조직을 보호하기 위한 조처로 생각된다. 조직 자체가 비밀리에 유지 운영되고 있었던 만큼 그 대원수를파악히기 어렵다.

근거는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205] 지대본부, 제1전구본부, 3개 분대, 전방공작원을 합쳐 모두 189명의 명단이 존재한다.[206]

6.4. 초모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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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푸양(阜陽)은 지형상으로는 일본군의 포위망 속에 있던 일본군 점령지역과 근접해있는 지역이었다. 때문에 적후에 초모공작하기 유리한 지역이었다. 초모공작의 성과를 거두기 시작한 것은 1944년에 들어서면서 지하공작을 통해 적점령지구에 있는 교포 청년들이 포섭되기 시작되었고 또한 학도병들이 일본군을 탈출하고 있었다. 초모된 교포청년과 일본군을 탈출한 학도병들은 지하공작의 연락대원들을 통해 중국국민정부의 유격대 협조와 안내를 받아 푸양(阜陽)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1944년 9월 경에 이르면 70여명 정도이다.
이들의 출신은 다양했다. 충칭(重慶)에서 파견된 사람이 5명, 자진탈출한 학도병이 30여명, 일본군 점령지역에서 상업이나 접대부 노릇하면서 연락공작에 참여하였던 여성동지 몇 명, 중국군에 의하여 포로가 되었다가 인수된 몇 몇, 왕징웨이 군에서 장교로 있다가 탈출한 사람으로 설명하고 있다. 1944년 11월 한광반 출신을 비롯하여 모두 53명을 중경으로 이송한걸 포함하면 징모 제 6분처는 3년 동안 160명 정도 인원을 초모확보한 셈이다.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주요 도시에 비밀 조직망, 즉 공작 거점을 구축한 제6초모 분처의 전방 각종 공작은 점차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초모 분처와 전방을 왕래하면서 거점과 연결을 취하는 본부 공작원과 전방 거점을 근거지로 초모 공작 및 첩보·선전·공작 등을 전개하는 지하 공작원 사이의 유기적인 협조가 주효(奏效)한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제 10전구 산하 중국군 각 부대는 물론, 적 점령 지역에서 활약하는 중국군 유격대의 협조도 매우 컸다.

방부(蚌埠)·난징(南京)지구에 파견된 서파(徐波)는 상당수의 애국 청년을 포섭하고 후송할 안전 통로 개척을 요청하였는데, 쉬저우(徐州) 지구 근교 중국군 유격 부대에 밀파된 신송식(申松植)·김국주(金國柱)·전월성(全月星) 등은 유격 부대와의 합의를 보고, 서파와 연결을 지으려고 노력하였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다.

그 원인은 공작 상황이 탄로된 서파(徐波)가 몸을 피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김국주(金國柱는 유격대의 보호를 받으며 쉬저우(徐州)에 들어가 고성봉(高聖鳳) 등 애국 청년을 포섭하여 쉬저우(徐州) 시내에 거점을 확보하고, 이를 발판으로 애국 청년 포섭과 일본군내의 한적 사병 유인 공작을 벌이게 되니, 여기서 적군 첩보 수집은 물론 유격대의 협조로 공작상 안전 통로를 개척하는 데 성공하였다

1944년 7월 9일, 태평양 전쟁이 연합군의 본격적인 공세와 함께 사이판 전투결과 미군에게 함락되면서 미 공군에 의한 일본 본토 공습 등으로 전세는 급전 직하로, 일본군의 패색(敗色)이 짙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적 점령 지구에서의 제반 공작 활동은 일본 군경(軍警)의 발악적인 감시와 경계에도 불구하고 크게 진전을 보게 되었다.

1944년 상반기에는 베이핑(北平)·카이펑(開封)·구이더(歸德) 등지에서 배경진(裵京鎭)[207]을 비롯하여 선우진(鮮于鎭)·김중섭(金仲涉)·김중호(金仲浩)·김상걸(金尙杰)·이성봉(李成鳳) 등 애국 청년들이 조동린(趙東麟) 등 전방 공작원들의 노력으로 부양에 집결 입대했다.

학도 지원병(學徒志願兵)이라는 미명 아래 일본군 부대에 강제 입대하였던 한적 학도병들이 각 지역에 구축된 공작 거점을 통해서, 또는 공작원과 직접 접선이 되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숙원의 독립군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자발적인 행동을 취하여 개별 또는 집단적으로 적 병영을 탈출, 공작원의 안내로 혹은 중국 유격대를 통하여 광복군으로 집결하게 되었다.

한성수(韓聖洙)[208]·승영호(承永祜)·전이호(全履鎬)·정명(鄭明)·김성환(金聖煥)·김성근(金星根)·김우전(金祐銓)·윤영무(尹永茂)·차약도(車若島)·노능서(魯能瑞)·석근영(石根永)·김준엽(金俊燁)·이문화(李文華)·서상렬(徐相烈)·박승헌(朴承憲)·신현창(申鉉昌)·장준하(張俊河)·윤경빈(尹慶彬)·이계현(李啓玄)·이영길(李永吉)·김춘청(金春鼎)·김영록(金永祿)·김유길(金柔吉)·안광언(安光彦)·윤재현(尹在賢)·홍기화(洪基華)·백정갑(白正甲)·홍석훈(洪錫勳)·김용민(金容旻)·변영근(邊榮根)·김윤택(金潤澤)·박영록(朴永祿) 등 30여 명이 주로 쉬저우(徐州) 지구의 왜 병영을 탈출, 전후하여 광복군에 입대함에 따라 광복군으로서는 처음 큰 개가를 올렸다.

이들 중에는 중국군과 상호 대치 교전 중 적진으로부터 필사적 탈출에 성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부분은 야간을 이용하여 적 병영을 비밀히 탈출했다가 적의 끈질긴 추격을 받으며 구사일생으로 중국 유격대 지역으로 와야 했다. 또, 유격대측은 한·일 국적의 구별, 스파이 혐의의 유무, 탈출의 동기, 본인의 요망 등에 관하여 엄격한 심문을 거쳐 광복군 진영에 이르게 되는데 그 동안 여러 유격대 부대를 경과하는 중에는 그 때마다 심문을 받아야 하는 등 무수한 사선(死線)을 돌파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들과 함께 또는 다른 학병과 더불어 일본군 부대를 탈출하다가 적군의 추격을 받아 애석하게 비명에 쓰러지기도 하였고, 또 적으로 오인(誤認)되어 불귀의 객이 되거나, 방향을 잘못잡아 공산 진영으로 들어가게 된 애국 청년들의 수도 적지 않았다.

탈출 학병 박승헌(朴承憲)의 소개로 포섭된 1943년 중국 쉬저우(徐州)에서 국일관(國一館)출신 희락관(喜樂館) 료테이 기생 김영실(金永實)이 김국주(金國柱)와 연결하고 갖은 위험을 무릅쓰고 초모 공작에 적극 가담하게 되면서 적지 않은 성과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그 후 이 사실이 일본경찰에게 탐지되었으나 김영실(金永實)은 포위망을 탈출 무사히 부양으로 나오는데 성공했고, 신송식·전월성·김국주(金國柱 등은 5월경 부양으로 귀대하였다.

김학규(金學奎) 지대장은 제 10전구 사령부 및 광복군 총사령부에 실정을 보고하는 한편, 중앙 군관 학교 제10 분교내에 한광반(韓光班)을 설치하는 데 합의를 보고, 50여 명을 입교 훈련을 시켰다.

훈련생 중에서 공작에 적응성이 있는 청년을 선발하여 전방 공작을 감행하게 하였는데, 윤창호(尹昌浩)를 쉬저우(徐州)로 파견하여 임일옥(林一玉)·이복순(李福順) 등을 포섭하는 한편 미나도(美那都)라는 요식점(料食店)을 거점으로 조직망(組織綱) 구축에 성공하였으며, 또 배경진(裵京鎭)을 국내로 침투시키기 위하여 우선 베이핑(北平)으로 밀파하였는데, 현지에 잠입한 배 경진은 이미 거점책(據點責) 지득성(智得成)에게 포섭된 백학천(白鶴天)의 자택을 공작 거점으로 하여 초모 공작을 전개하고, 한편 시내 각급 학교에 유학하고 있는 한적(韓籍) 학생들로 지하 비밀 조직망을 구축하는데 성공하여, 후일 다수의 애국 청년 학도들을 부양으로 후송 입대하게 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1944년 7월에는 조동린이 구이더(歸德)·카이펑(開封)·신샹(新鄕)·스좌장(石家莊)·바오딩(保定)·베이핑(北平)·텐진(天津) 등 각 지구를 순방하여 활동 상황 파악과 조직 강화 포섭, 동지 후송 등을 촉구하면서 개봉·귀덕에서 민치대(閔致大) 등 10여 명을 인솔하고 귀대하였으며, 9월 하순에는 송병하(宋炳河)·이영수(李英守)·김군남(金君南) 등이 푸양(阜陽)으로 왔고, 10월에는 베이핑·텐진 지구에서 전방 공작원들과 이미 접선되어 활약하던 김광언(金光彦)을 비롯하여 이정수(李延秀)·이윤하(李允夏)·홍순명(洪淳明)·김영진(金永鎭)·김의명(金義明)·선우석(鮮于碩) 김순근(金順根)등이 공작원 윤창호(尹昌浩)의 안내로 푸양(阜陽)에 집결 입대하였다.

1944년 말에는 충칭 임시정부의 지령을 받고 국내 침투를 목표로 다시 푸양(阜陽)에 도착한 조병걸(趙炳傑)[209]이 김학규 지대장의 밀령에 의하여 베이핑으로 잠입, 배여성(裵麗星)[210]·지득성(智得成)·백학천(白鶴天)과 제휴하여 공작 활동을 진행하였다. 그 중 배여성은 다시 국내로 침투하여 평안북도 일대에 공작 거점 구축에 성공한 후 다음해 4월에 북평으로 복귀하여 후속 공작 인원과 합류 해방시까지 활약하였다.

한편 김학규 지대장은 초모 공작의 조직 확대와 강화를 위하여, 한광반(韓光班)을 졸업한 한성수·윤창호·변영근 및 전방 공작을 위해 단기 특별 교육을 받은 김광언·이정수·홍순명·김영진 등을 베이핑(北平)·텐진(天津)·쉬저우(徐州)·상하이(上海) 등지로 파견시켰으니 때는 1944년 11~12월경이었다.

이때, 김광언과 이정수는 베이핑 지구로, 윤창호는 텐진 지구로, 변영근은 쉬저우(徐州) 지구로, 한성수·홍순명·김영진은 상해 지구로 각각 파견 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베이핑에서는 김은석(金銀錫)·김경윤(金景潤)·정길주(鄭吉冑) 등 10여 명이 후송되었으며, 뒤이어 전방 각 거점 또는 공작원과 접선, 유격대를 거쳐서 국내·만주내지는 일본에서 박상기(朴相基)·문응명(文應明)[211]·김영일(金永逸)·김진동(金鎭東)·김문택(金文澤)·김용관(金容寬)·조장호(趙璋鎬)·백운룡(白雲龍) 등이 결사적으로 탈출 망명하여 광복군에 입대하였다.
잠 못 이룬 감격의 밤이 지나고 새 날이 밝아오니 서기 1945년 1월 11일 희망의 새 아침이다. 잠시 후 누군가가 큰 소리로

“기상(起床)! 기상! 동지들, 일어들 나시오.”

라 외친다. 같은 방에 있던 동지들은 모두 자리를 박차고 문 앞뜰로 나간다. 이 때 기상이라 외치던 주번 동지(?)는

“어젯밤 새로 들어온 동지들은 오늘만은 그냥 방에서 쉬쇼.”

라 말한다. 왜군에서 기상 나팔소리로 시작되었던 그 지긋지긋하고 골치가 아팠던 점호였지만, 오늘 아침의 기상 소리는 왜 이다지도 내 마음을 훈훈하게 감싸주며 내게 새 활력소를 불어넣고 용기를 일깨운단 말인가! 순간 ‘그렇게도 열망했던 독립군이 되어 이 땅에 섰노라. 이에 더한 영광 또 어디 있으랴’라 속으로 외친다. 문 밖에는 끝없는 대평원이 펼쳐지고 동쪽 지평선에는 붉은 둥근 해가 물씬물씬 대공(大空)에 솟아오르고 있다. 어찌 통쾌한 아침이 아니랴.

그렇다. 이 대평원상의 한 지점인 이 싼타지(일명 쑈쪼우장)란 촌락은 중국의 촌락이 그렇듯이 흙벽돌로 만든 보잘 것 없는 4~5채의 집(?)이 있을 뿐이고, 이 집들 둘레에는 ‘쪼우’(棗) 자가 뜻하듯이 큰 대추나무 10여 그루가 앙상하니 서 있고 다시 그 둘레에는 큰 대추나무 10여 그루가 앙상하니 서 있고 다시 그 둘레에는 3~4미터 폭 넓이에 2미터 가량 깊이의 ‘크리크’(壕)가 있어 물이 살짝 얼어붙었으니 이 쑈쪼우장이란 분명 이 대평원상에 놓여 있는 오아시스가 아닐 수 없다.

바로 이 고장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의 국군이자 독립군인 한국광복군 제3지대 본부가 있는 고장으로, 왜적으로부터 빼앗긴 조국을 되찾아 내일의 영광된 조국 건설의 운명을 두 어깨에 걸머질 젊은 독립투사들이 정의의 정염을 뿜어내는 활화산의 진원지가 될 고장이다.

잠시 후 앞뜰에서는 조용한 아침 공기를 깨트리는 주번 동지의 구령소리에 뒤이어 “하나 둘 셋……”이라는 난생 처음으로 들어보는 구령소리가 고막을 두드린다. 순간 가슴이 뭉클해지며 피가 끓어오르며 새삼 긴장해짐을 어찌하랴. 그도 그럴 것이 왜적 밑에 살아온 우리들에게는 그저 왜말로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외쳤던 ‘어찌(一), 니(二), 상(三)’하는 것만이 구령인 줄만 알았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앞뜰에서는 여러 동지들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존하세
라 부르는 애국가(지금 부르는 안익태 씨의 곡임)가 우렁차고 장엄하게 이 대지에 울려 퍼진다. 이뿐인가. 앞뜰에는 태극기가 하늘높이 휘날리고 있다. 순간 나는 문을 활짝 열었다. 눈앞에 나타난 동지들의 이 광경! 우리 네 명은 방 안에서 무릎을 꿇어앉았다. 순간 밖에서는 분명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이란 구령소리가 들린다. 어찌 고개를 숙여 눈을 감지 않으랴. 두 줄기 눈물이 쭈루룩 흘러내리며 콧시울이 시큰해진다.

우리 배달민족의 정기(正氣)가 아로새겨 있고 조국의 얼이 깃들어 있는 저 태극기와 애국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보는 태극기와 처음 듣고 처음 불러보는 애국가가 무엇이며 하물며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던 우리들![212]

이렇듯 입대하는 청년들의 격증과 그들의 정신 무장화 및 간부화를 위하여, 김학규 지대장은 참모 김용민(金容旻)의 계획에 의거, 전이호(全履鎬)·차약도(車若島) 등을 훈련 교관으로 하여 자체의 군사 훈련이 시작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동안 한광반 출신 이동진(李東鎭)·김우천(金祐鏡) 등은 린취안(臨泉)에 있는 제 10전구 전방 지휘소에 광복군 연락 장교로 파견되어 중국군 당국과의 교섭 및 전방 각 지구에서 후송되어 오는 애국 청년들을 푸양(阜陽)으로 보내는 임무를 수행하는 일방, 김우전은 당 지구에 파견된 미군 제14 항공대 소속의 버치 대위와 접촉하였다.

그리고, 쉬저우(徐州) 지구 공작에서 철수한 김국주(金國柱)는 전방과 후방을 연결하는 안후이성 하류(河溜)[213] 연락소의 책임을 지고 푸양(阜陽)으로 입대하는 애국 청년들의 후송 및 중국측 각 기관과의 협조 등에 전력하였는데, 중국군 파견 대장으로 근무하는 한국 출신 김소(金沼 대위)와 연결을 맺었다. 김소 대위는 부양의 김학규 지대장을 방문하여 광복군 활동에 적극 협력할 것을 약속하고, 그 후 우리의 공작 활동을 지원하는 동시, 중국군과의 유대 강화에 앞장서서 노력하는 등 그의 공로는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또, 개봉과 서주 중간 지점인 구이더(歸德)을 경유 푸양(阜陽)으로 들어오는 이팔집(李八集), 계수(界首) 연락소에는 석만금(石萬金)이 파견되어 책임을 지고 있었다.

1945년에 접어들면서 제6 초모 분처는 전방에 대한 공작 활동을 재정비 강화하였는데 그 대략은 아래와 같다.
① 지난해 구이더(歸德)·카이펑(開封)·텐진(天津) 등지에서 개가를 올린 조동린은 공작 지역을 구이더(歸德) 지구로 집중하게 하였고,
② 베이핑(北平)에서 활약하던 이정수는 공작 지역을 타이위안(太原)·스좌장(石家莊)으로 이전하게 하였으며,
③ 김광언이 활약하는 베이핑(北平)에는 김순근(金順根)에 이어 김규열(金圭洌)·김영진(金永振) 등을 증파하였고,
④ 구이더(歸德) 부근에서 연락책으로 활약하던 석만금(石萬金)은 전부터 지난(濟南) 지구에서 활약하는 이장식(李張植)과 합류하게 하였으며,
윤영무[214]는 특명으로 쉬저우를 경유하여 산둥성(山東省) 지난(濟南)·칭따오(靑島)에 파견되는 등 각 지구마다 진용이 강화되어 재반 공작이 확대 일로에 있었다.

1945년 초부터 다시 전방으로부터 계속 신입 청장년들이 후송되고 있었는데, 북평 지구의 김광언은 명고옥(名古屋) 사건 연루자 중의 한 사람인 김지옥(金址玉)을 비롯하여 목연욱(睦然旭)·김옥경(金玉卿)·김환(金煥) 등을 인솔해 왔다.

1945년 3월경 변영근은 쉬저우(徐州) 구이더(歸德) 일대에서 이원규(李元奎)·김관덕(金觀德)·엄일청(嚴一靑)·한명숙(韓明淑) 등을 인솔해 왔으며, 베이핑에서 조병걸(趙炳傑)과 접선된 지인중(智仁仲)[215]·박윤기(朴允基)·김성환(金成煥) 등이 공작원의 안내로 입대하였다. 그리고, 뒤이어 김광인·윤창호 등과 접선된 난징중앙대학(南京中央大學)의 김택주(金澤周)를 비롯하여 이차녕(李次寧)·이정호(李貞浩) 등이 베이핑과 텐진 방면으로부터, 또 윤창호는 전형운(田瀅雲)·정인덕(鄭仁德)·변수정(邊守貞)·이창배(李昌培) 등을 인솔하여 푸양(阜陽)으로 왔다.

만주 펑톈(奉天) 소재 동광 중학(東光中學)을 중심으로 비밀 조직망을 형성하고 있던 이영순(辛英淳)·오성규(吳成奎)·조승희(趙昇熙)·김철수(金鐵壽)·이선규(李善奎)·김병익(金炳益)과 장춘(長春) 법정 대학(法政大學)의 한이윤(韓伊尹) 등이 만주를 탈출하여 북평 경유 부양에 도착 입대한 사실이다. 이것은 푸양 성내의 병영(兵營)으로서는 이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없어 병영을 구리구(九里溝)로 이동한 후의 첫 경사(慶事)였다.

이어 베이핑에서 김성관(金成觀)·차성훈(車聖勳)·조대훈(趙大勳)·이철민(李鐵民)·이창도(李昌道)·이아청(李鴉靑) 등이, 개봉에서 이신성(李信成) 등이, 멍청(蒙城)에서 김병학(金炳學) 등이, 기타 지역에서 윤국선(尹國善) 등이 입대하였다.

1944년 3월말까지는 칭따오(靑島) 지구로 파견됐던 백운룡(白雲龍)이 귀대 중, 윤창호 등과 합류하여 구이더(歸德)의 공작 거점 김병환(金秉煥)이 포섭한 문성근(文誠根)·박성관(朴成官)·최이옥(崔伊玉)·옥인찬(玉仁讚), 그리고 조동린과 접선, 구이더(歸德)에서 거점 활동을 하던 박재곤(朴載坤)·박금녀(朴金女) 외에 이헌일(李憲一)·김응주(金應柱)·김봉현(金鳳賢) 등이 구이더(歸德)에서 지하 공작을 해오던 신흥균(申興均)·이원규(李元奎) 등을 안내 집결하였다.

전방 공작에 앞장서서 다대한 성과를 올리면서 활약하던 공작원 조동린이 1945년 1월 중순 구이더(歸德)에서 한인 밀정의 밀고로 투옥된 얼마 후, 1944년초부터 조동린과 접선되어 개봉 지구 공작 책임자로 활약하던 장호강(張虎崗)은 왕정위 괴뢰군의 고급 장교로 근무하면서 초모·선전·첩보 공작을 계속 추진하고 있었으나, 3월말경 일본군에서 탈출하다가 체포된 한적 사병의 사실 폭로로 지하 조직망이 발각되었는데, 공작 간부 전원이 검거 직전에 여자 공작원의 기밀한 연락으로 왜군 헌병·경찰의 포위망을 뚫고 장호강(張虎崗)을 비롯한 지하 조직원 이건국(李建國)·박노일(朴魯一)·왕세일(王世一)[216]·박용운(朴龍雲)·김하진(金夏鎭) 등이 카이펑(開封) 지구를 분산 탈출하였으며, 장호강이 먼저 본부가 있는 푸양(阜陽)에 들어왔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윤창호와 접선되어 지하공작에 힘써 오던 이원하(李元河)·신조일(申朝日)·이득우(李得雨)·박기은(朴基恩)·조병팔(趙炳八)·신응녀(申應女) 등이 귀덕 또는 녹읍(鹿邑)에서 탈출하여 장호강과 합류 부양으로 집결 하였으며, 나성돈(羅盛頓)·장용담(張龍淡)·최윤경(崔允慶) 등이 상하이·난징에서 푸양에 입대하였다.

한편,텐진(天津) 지구에 파견 공작 중이던 윤용호(尹龍虎)는, 텐진 및 베이핑의 거점에서 포섭한 김유환(金裕煥)·장세국(張世國)·백순보(白淳甫)·박동환(朴東煥)·김용희(金龍凞)·김찬식(金燦植)·용택서(龍澤瑞)·백여준(白汝俊)·김석호(金碩虎)·김봉영(金鳳永) 등 10여 명을 인솔하고 개선했으며, 뒤이어 신선재(申善才)·강신국(姜信國)·최응세(崔應歲)·김봉섭(金鳳燮)·안성근(安成根)·정이세(鄭利世)·문흥빈(支興彬)·오일립(吳一立) 등이 각 지구 거점을 거쳐 집결 입대하였다.

그리고, 동년 5월 이원하신조일·조병팔 등과 더불어 적후방으로 파견된 후 이미 접선된 바 있는 최규련(崔奎連)·강병익(姜炳益)·유창근(劉昌)·김철(金哲)·김옥선(金玉仙)·장부희(張富凞)·최시화(崔時華)·유순희(劉順姬)·김만식(金萬植) 등을 구이더·녹읍·수시안(宿縣)으로부터 인솔 입대 시켰는데, 특히 최규련은 자영(自營)하던 운수업용 트럭 수대(數台)를 처분, 90여만 원(元)의 거액을 지대에 헌납하여 적후방 공작비에 유효하게 충당했다.

쉬저우(徐州) 지구에 조직망이 있고, 이 지구에 익숙한 김병학은 1주일 동안의 심사를 걸쳐 ‘학병 탈출을 도모하고’, ‘쉬저우 지구의 조직망을 강화하며’, ‘적의 작전 임무를 교란’ 하는 중임(重任)을 띠고 1945년 4월초 구리고우(九里溝)를 출발하였다.

김병학은 하류(河溜)에서 김국주(金國柱)와 중국군 장교인 김소(金沼)의 협조를 얻어 무사히 방부(蚌埠)로부터 4월 22일 쉬저우(徐州) 잠입에 성공, 조직 자금책(組織資金責)인 대풍공사(大豊公司) 박명찬(朴明贊) 집에 숨어 있으면서 쉬저우(徐州) 일본 헌병대 통역 박호림(朴虎林)·김종순(金琮舜)과 왕정위 괴뢰군 소장 범의(范儀)·쉬저우(徐州) 지구 적군 사령부 통역 예명채(芮明彩) 및 유일한 중국인 동지 왕희(王熹)와 김승조(金承祚)·장이호(張利鎬) 등과 밀접한 연락망을 구축하는 동시, 멍청(蒙城) 지구 유격 사령관(蒙城地區遊擊司令官) 손펑지(孫風之) 중장[217] 앞으로 왕희를 급파하여 사실을 알리며, 박명찬·범의·왕희 등의 집에 잠복하여 단오절을 기한 공작 계획을 추진하였다.

박호림·김종순 두 사람의 정확한 제보로, 1945년 5월 4일에는 적 일본군이 한적 사병들의 탈출을 방지하기 위한 간흉한 계략으로 쉬저우(徐州) 공설 운동장에서 간단한 학병 환영식과 함께 축구 경기가 있고, 그날 밤은 미리 마련된 계획대로 한국 교포 책임 하에 3명 5명씩 맡겨 이틀간 자유 시간을 준 다음, 5월 6일 지정된 집합 장소에 전원 집합하도록 짜여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김병학은, 왕희·김승조를 대동하고 5월 4일 10시 쉬저우(徐州) 공설 운동장 환영식장에 들어갔다.

축구 경기 하프 타임 중 김병학은 학병 김재기(金在基)를 은밀 접견하고 광복군 공작원임을 단도 직입적으로 알리는 동시에 임명장(任命狀)을 수교하였으며, 접선 장소를 한국 요정 미나도(美那都) 난실(蘭室)로 정하게 되었다.
그날 저녁 7시, 김재기 학병은 3명의 다른 학병과 이들의 신원을 맡은 산코히로유키(三光洋行) 사장은 학병 위로 주연을 베풀기 위하여 미나도로 왔으며, 우리측 공작원 기생 옥주(玉珠)는 김병학을 대신해서 김재기와의 밀담 결과를 이웃 방에서 손님을 가장한 우리 공작원에게 알려왔는데, 그 내용인즉 ‘5일 저녁 김재기는 7·8명을 데리고 올 터이니 탈출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대원들은 이 일을 위한 만반 대책을 세운 후, 박호림·김승조(金承祚)·장이호(張利浩) 등으로 인솔 탈출하게 하고, 범(范) 소장에게 부탁하여 쉬저우역 비상경계를 맡게하고 김병학과 왕희는 이들을 역 구내까지 호송하는 일을 맡도록 하였다.

그러나, 익일 미나도에는 김재기 한 사람만이 황급히 나타났다. 왜 헌병이 눈치를 채었기 때문에 혼자 도망해 왔노라며 곧 탈출시켜 줄 것을 간청하므로, 곧 김승조(金承祚)·장이호(張利浩)로 인솔 탈출하게 하였다.[218]

쉬저우(徐州)에 잔류하는 김병학은, 박·왕 두 사람으로 하여금 적의 동태를 살피면서 학병에 대한 탈출 공작을 계속했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학병 위안회 사건으로 하여 쉬저우(徐州) 일대는 분위기 흉흉하였기 때문에 일은 여의하지 못했으며, 김병학은 범 소장의 비호를 받으며 중국 상인으로 가장, 왕희와 함께 방부를 경유 하류로 귀환하였다.
파일:한국광복군 제 3지대 성립전례식.png
한국광복군 제 3지대 성립전례식은 광복이 되기 약 1.5개월 전인 1945년 6월 30일이 되어서야 성립이 되었다. 그 이전엔 징모 제 6분처라고 불렀다.

6월부터 7월 사이에 지대 본부에서는 초모 공작을 위한 돌격 작전의 일환으로 필수 기간 요원과 훈련 중인 신입 대원들을 제외하고 민첩하고 활동력이 강한 대원을 전에 연고가 있는 적 후방 지역으로 아래와 같이 대거 출동 시켰다.
민치대(閔致大) 카이펑 지구
김택주(金澤周) 상하이 지구
장이호(張利鎬) 쉬저우 지구
함세만(咸世 ) 텐진 지구
지인중(智仁仲)·박성관(朴成官)·이선규(李善奎)·이차녕(李次寧)·이정호(李貞浩)·최동권(崔東權)·김창석(金昌錫) 베이핑 지구
윤국선(尹國善) 구이더 지구
문성근(文誠根)·김승조(金承祚) 구이더 경유 텐진 지구
전이호(全履鎬)·최윤경(崔允慶)·신조일(申朝日) 안칭(安慶) 지구
이상과 같이 진출시켰는데, 각 반마다 자기 나름대로의 변장을 갖춘 후 목적지로 향발하였다. 그 중 김승조는 쉬저우에서 공작 중 일본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최후의 돌격 작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각 적지구에서의 초모 공작은 성과를 나타내었다. 이선규(李善奎)는 북평으로부터 김태한(金台漢)·김만진(金晩鎭)·김만진(金萬鎭)·김상현(金尙鉉)·박문자(朴文子) 등을 인솔하여 오고, 천진 및 북평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함세만(咸世萬)은 이종금(李鍾金)·김상후·이인곤(李仁坤)·조동빈(趙東彬)·정수정(鄭守貞)·이길영(李吉永)·김기창(金基昌)·박지영(朴芝榮)·박유일(朴惟一)·박영일(朴英一) 등을 인솔 후송하여 개가를 올렸다.

각 지구로부터도 최창범(崔昌範)·최하진(崔夏鎭)·홍종석(洪鍾石)·정회일(鄭會一)·유청수(劉淸水)·임상호(任尙鎬)·김정옥(金貞玉)·유기준(柳基俊) 등과 이청천(李靑天)·김순애(金順愛)·나응환(羅應煥)[219]·정우진(鄭宇鎭)·최광성(崔光星)·정태운(鄭泰運)·이득영(李得榮)·이득선(李得善)형제와 이홍근(李弘根) 등이 전후하여 입대하였다.

1945년 8월초 김학규 지대장은 위임스 대위와 함께 OSS작전 준비 관계로 충칭으로 떠나갔는데, 이때 김지옥(金址玉)·박노일(朴魯一)·이건국(李建國) 등이 수행하였다.

그리고, 카이펑을 거쳐 쉬저우로 진출한 민치대(閔致大)는 일본군 부대에 학도병 출신 견습 사관(見習士官)인 차(車)모씨를 포섭하여 지하 조직의 거점을 구축하고, 후일 무장 집단 병력을 인솔, 대거 푸양(阜陽)으로 와서 입대하기로 약속되었으며, 이 외에도 각 지구 벽지에서 지하공작을 하던 많은 공작원들이 8·15 해방을 전후하여 많은 애국 청년들을 초모·인솔 귀대 하였다.

요컨데 제 3지대의 초모 인원이 3백 명을 헤아린 성과는, 김학규 지대장 지휘 하에 치밀한 계획, 과감한 공작과 전 공작원의 일치 협력의 소산이었던 것이다. 그 중에도 초모 작전을 위하여 갖은 고난과 위험을 무릅쓰고 희생적 정신과 용감한 행동으로 초인(超人)적인공적을 쌓은 전방 공작원 가운데는 김국주(金國柱)·조동린(趙東麟)·윤창호(尹昌浩)·김광언(金光彦) 등의 공적은 특별히 컸던 것으로서 그들의 활동으로 베이핑·텐진 지구에서 제 3지대로 입대한 대원만도 1백 20여 명에 달하였다.

7. 제 5지대 (1941.1.1. ~ 1942.7.31.) | 舊 한국청년전지공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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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지대장 나월환(羅月煥)

지대장이며 징모 제5분처 주임위원인 나월환(羅月煥)은 중국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제 8기 졸업생으로 중국군 헌병대에서 헌병 장교로 복무하다가 1937년에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본국으로 압송되어 갈 때 대담하게도 칭따오(靑島)에서 탈출하여 본대로 돌아 왔다는 무용담을 지닌 용장으로서 몸매는 작으나마 의지가 강한 전형적인 군인이었다.
파일:한국청년전지공작대_충칭.jpg
류저우(柳州)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220] 1939년 4월 4일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그 해 8월 한국국민당을 중심으로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이 연합하여 한국광복단체연합회 를 결성하게 된다. 1939년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광복진선)를 조직하여 군사활동을 추진하게 된다. 1938년 9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를 조직하여 공진원(公震遠)이 대장에 취임한다.[221]
대장 고운기
대원 김동수, 박영준, 노복선, 이재현, 진춘호, 이하유, 전태산, 마초군, 지달수, 민영구, 이우송, 한대원, 김 인, 유평파, 조시제, 김원영, 김진헌, 김석동, 이윤창, 지정계, 이윤철, 방순희, 김병인, 김효숙, 신순호, 안미당, 오광심, 오희영, 오희옥, 멍자오허(孟兆和)

광복진선은 선전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고 3.1절 기념공연, 위로금 모금공연 등의 선무공작을 시작으로 중국 학생군과 합동하여 대일항전을 벌인 청년단체다. '한중연합군의 연대투쟁'을 주제로 한 연극 <국경의 밤>을 통해 중국인 관객들에게 진정한 한중연대를 몸소 공감하고 체감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을 마련해주었다. 청년공작대가 전개한 항일공연 예술 활동은 적은 수의 인원으로 최대의 선전효과를 누리고 입장권 발매를 통해 많은 수익금을 창출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항일선전효과와 파급력이 극대화된 투쟁방식이었다.

한유한은 동포들의 광복군 지원을 촉구하고 중국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가극 ‘아리랑’을 1940년 5월 시안에서 처음 무대에 올렸다.관련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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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대 중국 현지에서 한유한의 가극 ‘아리랑’을 공연하는 장면.

음악과 연극이 결합된 ‘아리랑’은 목동과 촌녀 부부가 일본의 핍박으로 정든 고향을 떠나 중국에서 항일투쟁을 벌이다 희생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유한은 피아노, 바이올린 등 서양 악기와 얼후, 징, 북 등 동양 악기 20여 개로 구성된 오케스트라를 동원해 웅장한 소리를 냈다. 당시 출연진과 악단에 한국인은 물론 중국인 예술가가 대거 참여해 한중 공동항전의 의미를 살렸다. 극중 곡들은 군가풍이 많았는데 클라이맥스에서는 아리랑이 연주됐다.

한유한은 본래 작곡과 연출을 맡았지만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한국인 배우가 마땅치 않아 남자 주인공 역까지 해냈다. 공연은 매회 매진을 거듭한 끝에 기간이 연장됐고 장제스(蔣介石) 등 국민당 수뇌부가 관람할 정도로 대성공을 거뒀다.

광복군 아리랑
스칼렛 합창단 광복군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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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3·1운동 기념과 중국군 부상병 위문 모금을 위해 개최한 제 4차 ‘아리랑’ 공연 포스터.

항일 공연예술 활동을 하고 그 수익금을 대일항전을 위해 기부받아 1939년 11월 11일에 한국청년전지공작대로 확대 개편되었다가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이 창설된 이후 한국광복군 제 5지대로 귀속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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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청년전지공작대 본부 소재지인 중국 시안시 얼푸지에(二府街) 29호 건물

한국청년전지공작대 편재(1939년 11월)
대장 나월환
부대장 김동수
군사조장 박기성
정훈조장 이하유
공작조장 이재현
예술(선전)조장 한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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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 촬영 다음 날, 1939년 11월 18일 충칭을 떠나 시안으로 이동하여 중국군 후종난(胡宗南)사령장관이 있는 제 34집단군 타이항산(太行山) 유격대 정훈부에 배속되어 공작 활동을 펼쳤다.
3줄 왼쪽: 멍자오허(孟兆和)[222]. 이하유. 핑지셩(平智盛)[223]. 김원영. 조시제. 현이평. 이재현. 주지
2줄 왼쪽: 김동수. 박기성. 중국인 여성. 허쉰치(何尙祺)[224]. 중국인 여성. 진쭤셩(金作生)[225]. 엄익근. 나월환
1줄 왼쪽: 박영준 엄항섭. 박찬익. 김구. 유진동. 김인[226]

제 5지대의 전신은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韓國光復陣線靑年工作隊)[227]였는데, 1939년 4월나월환(羅月煥) 대장 인솔 하에 충칭에서 시안(西安)에 도착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는 30여 만 대군을 지휘 통솔하는 제 1전구 사령장관(第一戰區司令長官) 후종난(胡宗南)과 교섭 끝에 양해를 받고, 그 휘하 중국군과의 유대를 긴밀히 하여 한·중 양국간의 군사 합작 추진에 힘을 기울이며 새로운 기지를 개척하려는 기초 작업을 굳혀 갔다. 주요 임무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때처럼 적후공작과 대원 훈련이었다.
낙양군관학교 제 18반을 한인특별반으로 정하고 각파에서 모집한 한국청년 약간 명을 육군장교로 양성하게 되었다. 이들은 총책임자 이청천, 교육대장 이범석 장군 등 역전 독립군 지도자에 의해 다시 1년간 맹훈련을 받았다.

이윽고 1940년 10월 광복군 총사령부를 충칭(重慶)에 설치, 총사령 이청천, 참모장 중국인 자오더슈(趙德樹)은 충칭(重慶)에 머물렀다.

1943년 전세가 점차 열띠어 가자 광복군은 그 조직을 확대키 위하여 의열단(義烈團) 계통과 합작하게 되어 조선의용군을 광복군으로 편입시키고 그 조직을 강화하였다.

이 광복군은 제 1지대, 제 2지대, 제 3지대, 제 5지대로 나뉘었다. 여기서 내가 속한 지대는 제 5지대였다.

나월환, 이하유 등은 이윽고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를 만들어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으로 가야했다. 이 때 한께 가게 된 동지들은 나월환, 박기성, 이하유, 김동수, 이해평(이재현) 등이었다.[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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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안(西安)은 산시성(陝西省)의 성도(省都)이지만 비교적 일선이 가까운 군사 중심지이다. 이곳은 적 점령 지구에 대한 초모·선전·첩보·훈련 공작 등을 전개하기에는 가장 적합한 지역이다. 이 해 9월 임시정부에서 조성환(曹成煥)을 단장으로 하는 군사특파단(軍事特派團)을 이곳으로 파견한 이유도 이러한 지리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였기 때문이었다.

광복군 제 5지대 편재(1941년 1월 1일)
지대장 나월환
부지대장 / 1구대장 김동수
훈련조 / 2구대장 박기성
정훈조 / 정치지도원 이하유
공작조 이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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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제 5지대 성립전례기념 대한민국 23년(1941년) 원단(1월 1일)
광복군 총사령부 정훈처
1941년 2월 1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성립된 뒤에 해내 해외의 한족은 모두 향응하여 용약 참가하였다. 한국 혁명 진영의 추세는 날로 통일되어 혁명 역량은 더욱 집중 되었으며 각지의 한국 무장 부대는 모두 광복군 총사령부 지휘 밑에 집결되었다.
여기서 모두 전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역시 한국광복군 제5 지대로 편입하였는데 이미 금년 원단 서안(西安)의 이부가(二府街)에 있는 대의 본부 대례당에서 성립 전례식을거행하였으며, 정황이 퍽 열렬하여 전례에 출석한 자는 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의 전체 직원과 그대의 전체 대원 및 내빈 함께 2백여 인을 계산하게 되었다. 벽두에서 대회의 주석 황학수 선생이 광복군 제5 지대가 성립되는 의의와 광복군의 임무를 강술하고 뒤에 그대의 대장 나월환(羅月煥)이 서사(誓辭)를 선독하고 임시정부 군무부장 조성환(曹成煥) 선생의 치사와 내빈 송수창(宋壽昌) 선생 및 이웅(李雄) 선생의 축사가 있었고 끝으로 나(羅) 대장의 답사가 있은 다음 전례식은 성공리에 산회하였다.
그대의 과거 성적은 퍽 아름다운 것으로 이번 개편을 거쳐서 금후 광복 사업에 대하여 더욱 공헌할 것이다.

나월환(羅月煥) 대장은 이곳을 기지로 정하고 제1차적인 초모·선전 공작을 펴기 위하여, 일본군 점령 지구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에 입대한 김천성(金天成)을 앞장 세워, 김동수(金東洙)·이해평(李海平)등 수명을 중앙군 유격대의 협조 아래 산시성(山西省) 루안(潞安) 방면으로 파견하여 결사적인 공작을 추진하게 하였다. 그 결과 반 년미만에 이도순(李道淳)·장철(張鐵)·문응국(文應國)[229]·나동규(羅東奎)[230]·최봉진(崔俸鎭)[231]·김상준(金尙俊)[232]·송철(宋哲)[233]·김성호(金成浩)[234]·장덕기(張德棋)·김형철(金亨哲) 등 50여 명의 애국 청년들을 시안으로 인솔하여 오는 데 개가를 올렸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가 이렇게 초모 공작에 성공한 이면에는 루안(潞安) 교민 회장 박춘섭(林春燮)의 공로가 컸는데, 그는 당시 그곳에 있는 일본 헌병 대장과 일본에서 대학 동기 동창이었기 때문에 그의 지원과 협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문응국 :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걸렸어요. 그리고는 나를 억지로 사다리에 꺼꾸로 매달더니 물을 먹이지 않겠어요? 그런데 김천성이를 내보내고 내가 맡아서 약 6개월을 보냈는데, 내가 그만 잡혀 들어갔던 거에요. 거기서 물을 먹이고 그러기에 "내가 제일 국민으로서 잘못한 게 무엇이냐고 물어보라."고 했어요.

이현희 : 고문이군요?
문응국 : 고문이지요. 물을 댓 주전자 먹고 인사불성이 되니까 나중에는 토하게 만들더군요. 그렇게 하더니만 나를 집어 넣더군요. 중국 사람하고 같이 가줬어요. 내가 운이 좋았어요. 그 안에 들어가니까 한 사람이 쿡 찔러요. 중국 사람은 그것 하나는 위대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고백 안했으니 걱정 말라."고 해요. 그때 직접 와 닿는 것이 있었어요. "나는 오늘 저녁에 죽는다."면서 죽는 것까지 알아요. 중국 밀정들이 불지 않으니까 일본군이 아예 자기들끼리 확신만 서면 밤 12시 정도 되어 끌어다 죽여요. 그가 오늘 밤에 죽는다는 것을 이야기하면서 "절대로 네 이름은 이야기 하지 않았으니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나도 생면부지한 사람인데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기운이 나더군요. 그리하여 하룻밤을 거기서 재워요. 일본의 보조 헌병 한 사람이 와세다대학 재학 중에 왔어요. 그는 군인으로 왔는데 박춘섭씨를 존경했어요. 왜냐하면 와세다대 선배이기 때문이죠. 그는 전에 나한테 늘 왔었어요. 그 다음날 아침 그가 문을 열더니 나에게 괜찮으냐고 물어요. 그는 참으라면서 오늘은 제일(帝日) 국민 넣는 곳에 같이 넣어준다고 해요. 아침이 되니까 밥을 큰 그릇에 중국 사람과 같이 넣어 주는데, 중국 사람은 그 날 밤에 나가서 죽었어요. 발설하지 않고 그냥 죽을 것이라는 그의 말이 나에겐 힘이 되었어요. 점심 때가 되기 전인 10시 정도가 되니까 나는 일본놈들이 있는 곳으로 옮겨가게 되었어요. 들어가서 보니 소위가 앉아 있었는데, 다이아몬드를 팔아먹었다는 죄목입니다. 계급장은 없었고 복장은 장교복인데, 나는 그의 이야기를 믿지 않았어요. 나는 그가 나를 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장교가 들어와 있으니까 겁이 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잔뜩 긴장해서 "나는 시계를 잃어버렸는데 내가 어디 팔아먹었다고들 하더라."고 했더니 그가 "절대로 내가 말한 것 입 밖에 내지 말라."고 주의를 주더군요. 그러길래 나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고 하니까 "그러냐?"고 하면서 자기는 자동차도 팔아먹고, 뭐도 팔아먹고 했다면서 자꾸 나에게 말을 시켜요. 나로서는 긴장이 되어 어떻게 되는 줄도 모르는데 점심을 같이 먹자고 그래서 먹는데 정말로 쓰더군요. 그 후 한 사흘을 지내니까 소쬬(曹長)가 나오라고 해요. 헌병에는 소쪼가 진짜 헌병이라나요. 악질이에요. 헌병대장은 잘 나타나지도 않고 실질적으로 소쪼가 다 해요. 그가 다시 생각해봤느냐고 물어 보더군요.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했지요. 그런데 그들이 그 동안에 박춘섭씨에게 갔다 온 거에요. 난 문응국이 본명입니다.[235]

충칭에 남기고 온 광복진선 대원들을 제외하고도 시안에 집결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 대원은 이로써 1백 여 명에 달하였다. 이렇듯 인원이 급격히 많아지고 보니 어려운 문제가 하나 둘이 아니었다. 우선 시급한 사정은 이들에 대한 식량·피복·침구 등의 보급 문제였고, 또 이들을 수용할 병사(兵舍)와 그리고 교육 훈련을 실시하는 문제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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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제 1전구 사령장관 후종난(胡宗南)

이러한 문제를 타결하기 위하여 나월환(羅月煥) 대장은 주요 간부와 같이 중국측과 온갖 방법을 다하여 교섭을 벌였지만 좀처럼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가 어려웠다. 결국 시안에 있는 중앙전시간부훈련단(中央戰時幹部訓練團) 제 4단(=간 4단)에 들어가게 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자연히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후종난(胡宗南) 사령장관에게 이 방안의 협조를 진지하게 요청하였다. 우리 애국 청년들의 열렬한 독립 정신의 호소에 큰 감명을 받았던 것으로 드디어 후종난(胡宗南) 사령장관의 승낙을 얻어, 제 4단내에 한청반(韓靑班)[236]을 특설하게 되었으며, 제 1차적으로 50여 명의 한국 청년을 입교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941년 1월 1일, 한국 청년 전지공작대가 광복군 제5 지대로 개편되고, 나월환(羅月煥) 대장이 지대장 겸 징모 제5 분처 주임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 해 봄부터 전시 간부 훈련단에 교관으로 파견되어 있는 간부 및 지대 본부 기간 요원을 제외한 이해평(李海平)·김천성(金天成)·김용주(金容珠) 등 간부 수명을 허난성(河南省)·뤄양(洛陽)·쩡저우(鄭州) 등지에 기지를 정하고 신샹(新鄕)·카이펑(開封)·타이위안(太原)·스좌장(石家莊)·베이핑(北平) 등지로 파견하여 주도 면밀하게 거점을 확보하면서 징모 제 5분처로서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지대장 나월환(羅月煥)은 시안 본부에 있으면서, 대다수의 인원이 군사 훈련을 받고 있는 전시 간부 훈련단에 대한 교육 감독 및 지원 등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중국 당국과의 협조와 연락에도 정열을 쏟고 있었다.

7.1. 나월환(羅月煥) 제 5지대장 암살 사건

개요

1942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을 마친 후 제 5지대 본부에서 지대장 나월환 암살사건이 일어났다. 암살사건은 후종난 부대에서 받은 영화 관람권을 대원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을 때 일어났다. 나월환의 시신은 암살사건 며칠 후 제 5지대 본부와 가까운 지금의 시안시(西安市) 롄후구(蓮湖區) 롄후공원(蓮湖公園) 내 폐쇄된 우물 속에서 발견되었다. 그리고 이 우물에서는 1년 전 행방불명된 현이평 시신도 함께 발견되었다. 이 사건이 일어난 배경과 관련하여 다음의 상황을 전제해야 한다.

당시 임시정부가 전시공작대 활동을 평가하고 전시공작대를 임시정부 산하로 끌어들이기 위해 지대장 나월환을 충칭으로 초대하여 귀빈관에 머물게 하며 회유하였다. 그렇지만 전시공작대는 “특정 정파에 속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립한다.”라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충칭에서 시안으로 돌아온 나월환은 임시정부 측 제안을 전시공작대에 공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내부적으로 전시공작대에서는 나월환의 태도를 의심하는 시선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비뚤어진 ‘영웅심’에 휩싸인 박동운 등에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나월환은 본래 그 성품이 급한 편이었고 재주가 출중하여 영웅심이 강한 탓으로 반감을 살 수 있는 성격이었다.
충칭에서 분명히 돌아온 것으로 알았던 나월환이 며칠이 지나도록 보이지 않자 후쫑난(胡宗南) 부대에서는 그의 행방을 찾게 되었고 마침내 폐정(廢井)[237] 속에서 그의 타살된 시체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후종난 부대에서는 임시정부의 사이에서 얽힌 공작대의 내분에서 빚어진 타살사건으로 단정하고 간부 등 20여명을 체포, 군법재판에 회부하여 극형에 처하려 하였다.
이 사건의 범인은 박동운이었다. 그는 일본군 헌병대 군속으로 있다 탈출하여 공작대원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공작대의 공기를 파악하고 영웅심으로 나월환을 제거하기로 결심하였다. 1942년 3월 1일(3.1절 기념일)에 나월환이 후쫑난 부대에서 영화관람권을 얻어다가 대원들에게 분배하고 있을 때 박동운이 그를 살해해버렸다.[238]

이에 공작대 간부 전원이 체포되어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다. 하지만 후쫑난(胡宗南)의 스승이었던 후보이의 노력으로 박동운 1명만 처단되고 나머지는 무죄로 석방되었다. 이때 임시정부 측에서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 간부 전원을 가차없이 처단해 달라고 요구하였다.[239]
그때 임정측은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몰라도 후쫑난에게 체포된 대원의 처단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만일 이들이 처단되는 경우 임정에 추종하지 않는 세력이 없어질지는 모르나 이제까지 쌓아온 청년공작대의 공적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고 생각한 후보이가 후쫑난에게 "한국의 독립운동세력에는 여러 갈래가 있어서 그 모든 무장세력이 반드시 임시정부의 통솔 아래로 들어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항일세력이던 다 같이 중국군은 그들을 우군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간언하여 범행자 2명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그 후 모두 석방되었다. [240]

유림과 정화암은 나월환 암살 사건의 진상을 밝혀줄 것을 요구하였다. 광복군 사령부가 나월환 사건의 주범 8명을 사형에 처하여 달라고 중국 당국에요구한 사실을 있는지 물었다. 이에 군무부장 조성환은 범인들을 엄중히 처벌해 줄 것을 요구한 적은 있지만, 8인을 사형 집행하라고 요구한 일은 없다고 답변하였다.[241]

암살원인

나월환 지대장의 암살원인은 중국인 애인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은 이하유의 시기심이 유발되었고 그 시기심이 와전되어 박동운 등 부하들에게 암살을 부추기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하유는 정치지도원으로 나월환 대장과 각을 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정치지도원 제도는 손문이 소련과 연합하면서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를 개설했을 때, 소련 적군의 제도를 들여온 것으로 혁명파가 군벌세력과의 내전을 거치면서 사병들의 정치의식 지도를 확실히 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에 도입된 것이다. 따라서 중화민국 군대의 정치장교들은 중국국민당의 이념을 토대로 장교와 사병들의 정치의식을 지도(감사 기능)하였으며,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치고 1990년대 대만이 민주화될 때까지 계속 운용되었다.
이하유는 5지대 대원들의 정신적 지주라 할 만큼 대원들 사이에 존경과 믿음이 두터웠었다. 이에 비해 나월환은 리더십에 있어서나 평소 행동에 약간 문제가 있어 대원들의 신망을 얻지 못하는 편이었다. 더욱이 나월환의 시기심이 강한 편이었는데,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일부 대원들 사이에 박동운과 같은 불만이 있었던 것 같다. 나월환은 공작대 이전에 중앙군 헌병대 중교[242]으로 군생활을 했기 때문에 생활이 넉넉한 편이었다. 당시 그는 애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나월환이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대장이 된 후에도 (여자친구가 그에게) 군복이며 용돈 등을 대주었고, 그래서 그의 사생활은 비교적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 대부분의 대원들은 된장국도 제대로 먹지 못하던 형편이었고 그래서 나월환의 넉넉한 생활은 대원들의 감정을 자극하곤 했었다.[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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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쉰치(何尙祺)
정식으로 장가는 안 갔어. 그런데 나 대장이 일요일에 집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여자를 자주 불렀지. 중국여자였는데 중국음식을 성의껏 만들어 내놓곤 했다. 부인으로도 볼 수 있고, 애인으로도 볼 수 있지, 그런데 둘 사이에 아기는 없었어.[244]

박기성 지사의 회고록에서는 당시 대원들이 나월환 지대장이 유흥비로 탕진했다고 오해를 한 듯 하다.
설사, 그가 우리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의 자금을 모두 유흥가에 썼다고 하자. 그리고 단점이 많은 사람이라고 하자. 그렇다고 쳐도 그에게 당장 남아 있는 것이라고 뭣인가. 집 한칸 마련하지 않았지 않은가. 생각할수록 비참한 생각 뿐이었다. 그리고 생각할 수록 몇몇 동지들이 어리석은 놈들이라고 생각될 뿐이었다.[245]

중국군 수사 당국의 엄준한 조사로 인하여 암살 사건에 관련된 하수인과 관련자 등 8명이 검거되었다. 그 중 나월환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관계된 대원들은 박동운, 이하유, 김동수, 이해평, 이도순, 고여순, 김송죽, 김용주이다.
나월환은 머리가 우수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장점이 많은데 반해 단점도 많았다. 아무튼 대원들 간의 여론이 좋지 않아서 제일 가깝고 그를 잘 알고 있는 나는 틈만 있으면 그에게 충고를 해주었다.

"나 대장, 지금 현재 나 대장에 대한 대원들간의 여론이 좋지 않으니 매사에 조심해주게."했다. 그러나 나월환은 조금도 수그러들지 않고,

"아니 내가 뭐가 어쨋다는 거요. 도대체 어떤 놈이 나더러 뭐라고 합디까! 뭣을 조심하라고 합니까."이렇게 응수하며 여전히 그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진심에서

"........ 뭐라곤가 딱 집어서 얘기하기는 곤란하네만 내 생각에 자네는 한동안 어디가서 쉬었다 왔으면 싶네."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러자 그의 말이

"나는 굵고 짧게 살 생각이오. 내가 어떻게 되든 박형은 나에게 개의치 말아 주시오." 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나는 그의 말대로 일체 그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쨋든 그 뒤에도 나월환이하유는 걸핏하면 다투었다. 무슨 일로 다투게 되는지 알아보면 하찮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걸 본 나는 역시 나월환은 지도자 다운 덕(德)이 없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적어도 이하유를 다룰 수 없는 그가 어떻게 대장의 자격이 있는가.

이윽고 전지공작대 본부에서 (1942년) 3.1절 기념행사를 거행하게 되는 날이었다.
우리 한국청년훈련반에 구대(區隊)가 둘이 있었는데 제 1구대 대장은 김동수였고, 제 2구대 대장은 내(박기성)가 맡고 있었다. 그때 내 계급은 상위(上尉)였다. 그런데 그 날 3.1절 기념행사가 있을 때 나는 그냥 본대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이하유가 나더러

"왜 3.1절 기념행사에 안나가느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 말이

"3.1절에 읽을 연설문을 구상 중이니 먼저 가 있게. 나도 곧 가겠네."고 했다.

그 때 김동수가 부대원을 인솔해 가지고 전지공작대 본부로 갔다. 그 날 밤중에 나는 대원 하나가 나를 찾아와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3.1절 행사 후에 나월환의 방에 누군가 들어가 나월환 대장을 죽였다하는 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나중에야 알았는데 그 사람은 박동운이라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캄캄하기만 했다.

이윽고 나월환을 죽인 대원들은 본대로 돌아왔다. 대장을 죽이고 돌아왔으니 일종의 반란을 일으키고 돌아온 셈이었다. [246]
1942년 3월 1일, 3.1절 기념식은 5지대 본부에서 거행하게 되어있었다. 지대의 본부 요원들은 제 1, 2구대가 귀대하기를 기다렸다. 1, 2구대원들은 간 4단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지대본부와 간 4단과의 거리는 약 5km, 아침에 1, 2구대가 본부에 도착, 성황리에 기념식을 마쳤고 대원들은 해산했다. 자유시간을 갖게 된 대원들은 제각기 모처럼 휴일을 즐기기 위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뿔뿔이 흩어졌다.

대원들이 운동장에서 모두 빠져 나가고 나자 지대 본부에서는 정적이 감돌았다. 주위가 고요해지자 나도 차 한잔 들며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나는 밖으로 나가 지대 본부 정문 앞의 끊는 물 파는 가게에서 차를 마시며 잠시 상념에 잠겼다. 그러게 얼마나 지났을까, 박동운이 헐레발떡 달려 왔다. 벌겋게 상기된 그의 얼굴에서 나는 직감적으로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음을 알아챘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내게 내뱉은 첫 마디는 "해치웠어!"였다.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눈 앞이 캄캄해진 나는 아무 댓구도 못하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있었다. 나월환 사건은 이렇게 벌어졌다. [247]

사건 수사 결과

중국군과 한국 광복군의 공동수사 결과에 따르면, 나월환의 부대에 속한 이하유[248] 등이 나월환에게 불만이 있다는 소문이 돌아서 그를 체포해 심문해보니 그가 나월환을 살해한 것을 인정했다고 한다. 그들이 나월환을 살해한 이유는 나월환이 아나키즘에 반대하고 광복군 본부에 아나키즘을 추구하려는 대원들을 밀고한 것에 반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 년 전 행방 불명이 된 젊은 독립 투사 현이평(玄以平)[249] 역시 이들의 범행임이 드러났다. 이렇듯 군의 규율을 문란하게 하고 상관을 살해한 하극상의 테러 행위는 군의 명령 계통과 단결을 파괴하는 것으로서 도저히 용인할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결말

영화관람권을 나눠주던 나월환을 직접 살해한 박동운을 비롯한 사건 관계자 8명이 체포되었다.
그 중 박동운은 사형 선고를 받았고, 이하유, 김동수는 무기징역형에 처해졌으며, 이해평, 이도순, 고여순은 15년형, 김송죽, 김용주는 2년 형을 선고받았고 나머지는 무혐의 처분되었다.

중국군 법무 당국은 전시 간부 훈련단내에서 군법 회의를 열고 범행자 들의 죄상에 의하여 박동운(朴東雲)에게 사형 등 유죄 판결을 내렸다.

나월환 지대장의 시신을 찾아낸 제 5지대에서는 군례장(軍禮葬)의 의식으로 장례식을 융중하게 거행하였다. 이 사건이 있은 후, 후임으로는 총사령부의 편련처장(編練處長)으로 있던 송호성(宋虎聲)이 제 5지대장(1942.3.2~1942.10.1)으로 취임하여 대원들에 대한 무마에 노력하였다.
1942년 3월 이후에는 송호성 영감이 하다가 10월에는 철기(이범석) 장군이 온거에요. 황학수 선생은 내내 광복군 지부 사령관에요. 그 때 시안에 소위 말하는 조선의용대를 제외하고는 광복군을 창설하는 중심지입니다. 조선의용대 일부도 그리로 흡수되었지요. 김학규씨도 와 있었죠. 군대 관계는 다 와 있었어요. 말도 하기 싫고, 잘 했다 할 수도 없고, 같이 어울리기도 싫지만, 이것을 정리해야 되겠다 해서 우선 이 정도나마 만들어 놓자 하고 해놓은 겁니다.

(중략)

문응국 : 송호성 영감이 철기 장군이 오기까지 제 2지대장을 했습니다. 송호성 장군이 지대장을 했던 것을 빼버렸어요.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나를 송호성파라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데, 역사가는 사실 그대로 하지, 왜 잘못한 것을 다 빼버리고 좋은 것만 내놓겠다 그러느냐구요. 철기 장군이 도착하기 전에 우리가 떠났어요. (1942년) 9월 하순에 한독당 대회가 있다고 해서 시안을 떠났어요. 그 때 떠난 사람이 내가 인도로 데리고 간 사람들입니다. 충칭으로 갈 때도 이제 고인이 되신 조시원 선생, 조경한 선생 이 분들이 당 계통이니까 같이 같습니다. 우리를 데리고 거기서 오라고 그래요. 그래서 나더로 뽑으라고 해서 가겠다는 하는 사람을 뽑았습니다. 그 때 충칭으로 갈 때 우리 고향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돌아가신 고시복 장군, 거기서는 왕중량이라고 했지만 나태섭씨와는 한 고향 사람들입니다. 조경한 선생, 조시원 선생 이분들하고 그 때 인도에 간 사람들 7명 모두 충칭에 몇 사람 남았죠. 그래서 충칭에 간거에요. 철기 장군을 내가 처음 어디에서 봤냐하면 바오지(寶鷄) 조금 지나서, 바오치가 시안서 200리가 넘지요. 트럭 위에서 봤어요.

이현희 : 그 때 기차는 없었어요?

문응국 : 기차는 바오지까지 타고, 바오지부터는 기차가 없어요. 거기서 트럭을 타고 가는데 철기 장군이 충칭에서 내려와요. 내 이름을 불러요. 그래서 "접니다."하고 내리니까. "시안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그래요. 아마 그때는 내가 비중이 좀 컷던 것 같아요. 백범 선새이 우리를 오라고 하고 그 때까지 김구 선생은 우리 못봤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안됩니다. 백범 선생이 오라고 했으니 만나뵙고 다시 오는 한이 있어도 여기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그러니 "정 그렇다면 그렇게 하라"하여 우리는 그곳을 떠났어요. 떠나서 충칭에 도착한 것이 1942년 9월 하순, 그러니까 10월 초지요. 도착해서 우리는 군사 훈련을 받고, 10월 1일 부로 졸업인데 우리는 졸업 열흘 전에 떠나서 졸업장을 못가지고 온 거예요. [250]
직책 성명 결과
지대장 나월환 박동운에 의하여 암살
부지대장/제 1구대장 김동수 제 2지대에서 활동 후, 1945년 4월 임시정부 경위대장(제 3대)
훈련조장/제 2구대장 박기성 나월환 대장 장례식, 나월환 대장 암살 사건 수습하고 충칭에서 미군식 훈련을 받은 후, 국민혁명군 25사단 통신 중교(중령) 영장으로 복무 중, 김홍일 장군의 호출로 광복군 총사령부 정보참모처에 정보참모부장
정훈조/정치지도원 이하유 나월환 암살 사건으로 군법 판결 무기형 복역 중 8.15 석방 귀국
공작조장 이재현 나월환 암살 사건으로 투옥 중 이범석 장군의 노력으로 1944년 봄 석방, 광복군 제 2지대 편성. 1944년 4월에는 한미합작훈련인 OSS훈련 무전반에서 교관 1945년 국내 정진군의 본부요원이 되어 국내 침투공작 활동을 위하여 대기하던 중, 광복을 맞음

이후 제 5지대의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고 많은 대원들이 이탈하는 등 혼란에 휩싸였다가 1942년 4월 1일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합류했을 때 제1지대[251], 제2지대와 통합하여 제2지대로 재편되었다.

8. 제 3징모분처(1941.3.1.)→제 2지대 제 3구대 제 3분대[252](1942.10.1.)→한교전지공작대(1944~1945.8.15.)

제 3전구 공작대는 국민혁명군[253] 제 3전구 지역에서 활동하던 징모처 제 3분처를 일컫는 것이다.

파일:구주통 장관.png

중국의 제 3전구는 장쑤성(江苏省) 남부[254], 안휘성(安徽省) 남부, 장시성(江西省) 동부, 저장성(浙江省), 푸젠성(福建省) 등을 관할하는 전구로 사령관은 구주통(顧祝同)이었다. 이곳에 징모 제3분처가 파견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파일:제 3징모분처 발족식.jpg
한국광복군 징모 제3분처 위원 환송기념식(1941년 3월 1일)
충칭시 허핑루(和平路) 우시예샹(吳師爺巷) 1 호에 자리 잡고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에서는 이날 오전 제23주 3·1절 기념식의 뒤를 이어, 오후에 김구(金九) 주석, 이청천(李靑天) 광복군 총사령관을 위시한 정부·군·정당 관계 요인들이 다수 참석한 가운데 임시정부 비서 실장 차이석(車利錫)의 사회로 한국광복군 징모 제3분처의 성립 전례식(典禮式)이 있었는바, 이 날 임명장을 받고 임지를 향하여 떠나게 된 제3 징모분처의 임원 명단은 아래와 같다.[255]

주임 위원 겸 선전 조장 김문호(金文鎬)
위원 겸 정보 조장 이지일(李志一)[256]
위원 겸 훈련 조장 한도명(韓道明)[257]
위원 겸 회계 조장 신정숙(申貞淑)
위원 강정청(姜正淸)[258]

1941년 3월 1일 임시정부 청사에서 김문호(金文鎬를 주임으로 하여 한도명(韓道明), 이지일(李志一), 신정숙(申貞淑)으로 편성되었다. 편성직후 중국군 제 3전구 사령부 소재지인 강서성 상요로 파견되었다. 제3분처 제3전구 지역으로 파견된 것은 김문호 주임이 제 3전구 사령부에서 복무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다.

와세다 대학 출신인 김문호는 중국으로 건너와 절강성 금화에서 간첩혐의로 국민혁명군에 체포되었다가 우연히 중국인 동창생을 만나 석방되어 국민혁명군 제3전구 정치설계위원으로 복무한 바가 있다. [259]

그는 임시정부를 찾아 중경으로 왔다. 이때 군무부에서 징모처를 설치하게 되자. 김문호는 자기가 활동한 바가 있단 강남지역에서의 초모활동을 자원, 징모 제3분처의 임무를 맡아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다.

파일:징모제3분처위치.png

1941년 4월 10일, 장시성(江西省) 상라오(上饒)에 도착한 김문호일행은 왕가원에 민가건물을 얻고 여기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 징모처 제 3분처'와'한국독립당 광복군 제8지구특별당부'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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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라오(上饒)·옌산(鉛山) 등지 일대 건물 벽에
‘중·한 양대 민족 연합 기래(起來) 타도 일본 제국주의’
‘군사 제일, 승리 제일’
‘국가 지상(至上), 민족 지상’
‘유전 출전(有戰出戰), 유력 출력(有力出力)’
‘중·한적 제형 휴수기래(携手起來), 분쇄 일본 제국주의’

이를 본부로 하여 3분처에는 선전, 초모활동과 함께 제 3전구 특무단본부에 수용되어 있는 일본군 포로들을 심문하여 적정보를 수집하는 활동을 전개하였고 이를 통해 확보해갔다. 이곳에 전시간부훈련단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형석(金亨石), 강치명(姜治明), 전복근, 유상공, 유상운, 정봉수, 김운경(金雲慶)을 편입시켰다.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제3분대 공작인원 명단(1943년 7월)
직책 성명 연령 적관 출신 비고
대장 김문호 29 황해 해주 해주보통학교, 해주중학교, 와세다 대학 법학과 졸업
대원 김운경 27 경성 경성 매동공립보통학교 제 3전구 포로/ 광복군 편제에 제외 보안처에서 관리
대원 왕영일 32 함남 원산 일본 다이인 고급중학 졸업제 3전구 포로
대원 마춘림 31 황해 해주 해주중학 졸업 제 3전구 포로
대원 신봉빈 31 전북 전주고등과 여성, 신정숙으로 김문호의 내연녀
대원 이지일 28 평북 신견중학 교사 가명 전선학[260]
대원 김형석 25 전북 농림학교 졸업, 측량기사 이소민 부대 편입
대원 이명식 24 황해 해주 고등학교, 장사 이소민 부대 편입
대원 한진원 24 경기 경기 숭실중학 졸업, 교사 제 3전구 포로, 현재 항저우에 있음
대원 유명경 26 강원 강원농업학교 졸업, 농림기사 펑텐 거주
대원 유상운 27 황해 해주 옥산여고 졸업, 교사 여성, 상하이 거주
대원 이기심 27 경기 인천중학 졸업, 기사 제 3전구 포로, 항저우 거주
대원 진몽각 35 평북 신의주 중학 졸업, 제지회사 사원상하이 거주
대원 증 명 24 경기 경기고등직업학교 졸업 난징 거주
대원 조동걸 28 함북 청진고등중학 졸업. 교원 상하이 거주
대원 최일영 29 경기 경성 숭실중학 졸업, 운전수 상하이 거주
대원 김운정 33 전남 하포중학교 졸업, 장사 난징 거주
대원 사중득 24 전남 부산중학여성 이소민 부대 편입
대원 유증영 26 중국 산시성 간이사범학교 졸업 여성, 중국인, 이소민 부대 편입
대원 정봉수 제 3전구 포로, 횡령 도망하여 붙잡혀 처벌됨.
대원 김 의 제 3전구 포로, 정봉수와 도망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제 1지대가 되고 개편되는 과정에서 징모 제 3분처는 1942년 10월 1일[261]부로 제 2지대 제 3구대 제 3분대[262]로 개편되었다. 1943년 7월까지 인원은 약 20여명 정도였다. 이들 가운데 1명은 중국인이고 7명은 제 3전구에서 포로출신이다. 중국군사위원회 점검결과 포로출신에 대하여 상당한 경계를 하고 있었다.

제 3분처는 전선의 변동에 따라 푸젠성 젠양, 난핑, 연산 등지를 거쳐 1945년 8월 장시성 상라오에 정착할때까지 여러차례 본부를 옮겨 다녀야 했다. 절감회전(浙贛會戰)(1942년 5월 15일~ 9월 4일)으로 자주 옮겨다녀야 했다. 절감회전으로 인하여 잠시동안만 상라오, 옌산이 일본군에 점령이 되었고 나중에 전선 유지를 못해 일본군이 철수했다고 한다.

1943년,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 이소민 구대장과 제 2지대 3구대 3분대 김문호 분대장의 파벌투쟁으로 인하여 서로 마찰을 벌여 초모공작이 중단되는 일이 발생되자 정화암의 주선에 의하여 유기석이 중재에 나서게 되면서 제 3전구 한교전지공작대로 통합이 되어 유기석 부대장이 된다.
파일:한국광복군 공작지휘 처리방침.png
한국광복군의 공작 지휘 처리 방침 요청에 대한 답전(答電) [263]
"내가 건양에 도착하기 전부터 파견되어 있었던 김문호는 중국 관청이나 중국군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있었다. 이소민과 알력도 알력이려니와 그 성과도 별로 없었다.[264]
三. 이번 점검 결과에 의하면 현재 남평에 주재하고 있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제3분대 대원은 대장과 대원 4명에 불과합니다. 여기에 김문호의 내연녀인 신봉빈(신정숙)과 잡일하는 사람과 취사원을 포함한다 해도 모두 7명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김문호는 처음에는 매달 21명분의 군량을 꼬박고박 지급받았다가 나중에는 18명분으로 줄였습니다.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제3분대의 매달 경비는 2천 원으로, 대원 1인당 매달 월급과 식비 보조금으로 80여 원씩 계산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실제 대원에 대한 지출과 소액의 판공비 · 잡비 지출을 제외하고도 매달 1천 원 정도를 남길 수 있습니다. 여기에다 매달 군량국에서 18명분의 군량을 수령하고, 합작사에서 구매하는 기름 · 소금 등 물품도 공정가격으로 구매하기 때문에 여기서도 상당한 차액이 남을 것입니다. 제3분대 대원인 김운경의 말에 의하면 실제 인원보다 부풀려 수령한 군량과 기타 물품들은 모두 분대장인 김문호가 시중에 내다 파는데 구체적인 액수를 공개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사용처도 상부에 보고하지 않고 있다 합니다. 이는 김문호가 중간에 사욕을 취하고 있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四.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제3분대가 성립된지 이제 1년이 다되어 갑니다. 그러나 제3분대는 내부적으로 구성원이 복잡하고, 김문호는 상급자인 제1지대 제2구대장 이소민(李蘇民)과는 계통이 달라 평소 의견충돌이 빈번합니다. 김문호는 공산당 계열이라고 분류되는 이소민과 서로 한인을 받아들이기 위해 치열하게 경합하고 있어 이 지역 한국광복군의 내홍이 심각합니다. 그 결과 한국광복군은 조직이 흐트러지고 실제 공작에는 별다른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김문호는 사욕을 채우기 위해 대원 숫자를 허위로 보고하는 등 오직 자신의 이익을 챙길 기회만 엿보고 있습니다.

五. 제3분대 대원인 김운경은 원래 제3전구의 포로입니다. 고집불통인 김운경에게서는 전혀 감화훈련의 성과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또한 이소민에게 이용되어 수시로 김문호와 충돌을 빚고 있습니다. 이번 점검 시 점검단은 김문호와 이소민에게 자제를 부탁하였지만 아무런 성과가 없었습니다. 만일 한국광복군 내부의 갈등과 내홍을 속히 치유하지 않는다면 장래 더욱 갈등의 골이 깊어지게 될 것입니다. 비록 강박에 의해 일본군에 끌려오기는 하였지만 그간 행적과 사상으로 보아 김운경은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다시 적진으로 도망할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따라서 이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격리 차원에서 점검조의 명의로 김운경을 잠시 보안처에 구금하고 한국광복군총사령부의 처리를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이번 점검과 각 방면의 관찰 결과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볼 때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제3분대 분대장 김문호는 비록 한국혁명에 대한 열정은 그런대로 간직하고 있지만 학식과 경험 및 능력이 모두 부족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김문호는 한인들로부터 전혀 신망을 얻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제1지대 제2구대장 이소민과의 깊은 불화로 서로 배척이 심하여 전혀 혁명공작을 전개하지 못하고 있으니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이번 점검 결과에 의하면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제3분대는 성립 당시부터 중국인을 대원으로 편제하는가 하면 억지로 인원을 부풀리기 위해 감화의 성과도 보이지 않는 한적 포로들을 대원으로 편성하였습니다. 더구나 이들 한적 포로 출신 대원들에 대한 관리와 교육이 엉망이었던지라 내부적으로 대원들의 구성이 복잡하고 사상이 분열되어 효과적인 통제가 불가능하였습니다. 이번 점검 시 점검단의 명의로 김운경을 보안처에 이송한 것이 제3분대의 어지러운 상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라 하겠습니다.

물론 지금까지는 제3분대 대원이 적을 위해 간첩행위를 한다든지 하는 불법적인 행위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사례는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근본적으로 혁명정신이 결여된데다 지휘부도 사욕을 채우는데만 혈안이 되어 대원들이 하나로 뭉치지 못하여 공작에 전념하지 못하고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상태로 내버려둔다면 장래 이들 가운데는 분명 적진으로 도망하는 자가 나올 가능성이 있을 것입니다.

결국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제3분대는 현재 그 이름은 있으나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상태입니다. 만약 적시에 효과적인 개선책을 내놓지 않으면 이 부대의 존재는 한국혁명의 위업에 커다란 악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또한 항전건국의 전도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상 한국광복군 점검에 나섰던 점검단 제2조의 공작 상황과 결과를 보고 드리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職 우젠(吳貞) 올림. ○○○ 남평에서.[265]
1943년 나는 쑤베이으로부터 완난 툰시(屯溪)를 거쳐 장시성 상라오에 도착했다. 당시 상라오에 있던 한국 동포는 십 몇 명이 있었으며, 푸젠 젠양(建陽)의 조선인은 7~8명이 있었다. 상라오 한국 동포는 한국광복군 제 1지대 2구대로 편성되었다. 젠양의 한국 동포는 이 군대 제 2지대 제 3분대로 편성되었다. 이렇게 되었는데, 충칭(重慶)방면의 이 군대 제 1, 2지대가 파벌투쟁으로 말미암아 합작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지방의 구대와 분대가 각각 배경이 달랐기 때문에 서로 마찰을 일으키고 모든 사업은 다 멈추게 되었다. 실질적으로 소위 마찰이나 투쟁은 역시 이소민 구대장과 김문호 분대장 두 사람 사이에 반목에 불과하며, 그들의 지도 아래 일반 한국 동포 대원들은 이유없이 두 적대적인 조합으로 분열되었다. 나는 상라오로 간 이후에 그들과 함께 있었고, 두 곳의 한국 동포의 연합을 위하여 몇 개월 동안 작업을 벌였으며, 후에 또 젠양에 가서 상당히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었다. 1944년 젠양(建陽)과 상라오 두 지역의 한국 동포는 옌산(鉛山)으로 집중되었는데 사업상으로부터 출발하여 다시 하나의 공작대를 조직했으며 '제 3전구 한교전지공작대'라고 명명했다. 원래의 광복군의 한 구대와 한 분대는 잠시 활동을 멈추기로 결정하고, 모든 성원을 다시 공작대에 편입하여 내가 부대장의 직무를 맡았다.[266]

제 2지대 제 3구대 제 3분대로 개편된 징모 제 3분처는 1943년 이후, 정화암, 유기석 선생의 도움으로 공작을 다시 피게 된다. 당시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의 기록을 대조해보면 제 3징모분처(제 2지대 제 3구대 제 3분대)와 제 1지대 2구대 이소민 부대와 정화암의 전시공작대, 유기석의 한교전지공작대를 혼용해서 사용하는 분도 있다. 이들 부대는 전부 제 3전구 소재에 있었으니 대원 소속 상관없이 서로서로 도운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야기는 한교전지공작대에서 후술하기로 한다.

정화암의 전시공작대와 미 공군 사령부와 영/미 조종사 합동 구출 작전
태평양 전쟁의 격화와 함께, 1942년 여름부터는 미국 공군기가 일본의 요코하마(橫濱)·오사카(大板)·고베(神戶) 등 공업 지대를 폭격하는 등 공중전이 치열해졌는데,[267] 대륙 방면의 적군은 제3 전구내에 있는 미국 공군 기지를 점령하기 위하여 일본군 5만여명과 왕징웨이(汪精衛) 군 10여만 명을 동원, 기동 부대를 앞세우고 금화(金華)·상요(上饒) 지구로 진격을 개시하였다.

이 때 금화·상요 일대를 중심으로 하는 제3전구내에는 구주 총참(衢州總站), 옥산(玉山) 28참(站), 여수(麗水) 27참·공주(贛州) 비기참(飛機站), 강신(康信) 비기참, 광풍(廣豊) 비기참, 건구(建甌) 비기 총참 등 많은 비행 기지가 있었으며, 그 중에도 절강성(浙江省)과 강서성 경계이며 상요 북동방 약 50km 지점에 위치한 옥산 28참은 산악 지대로 화강 암산을 뚫노라 막대한 인력 동원과 물자를 투입하여 건설하였던 미 공군의 최전방 동굴 기지이며, 많은 군용기와 폭탄·탄약 등 군수 물자가 비치되기도 하였던 곳이다.

따라서 이러한 요새지를 중심으로 하는 절강성·강서성 일대에 걸친 전투는 미·중·일이 공중 전력까지 동원하는 대규모의 격전이었으며, 광복군 제3 징모분처에서도 제3전구 장관 사령부의 정치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금화(金華)에 있는 중국 제 10집단군(國民革命軍第十軍) 총사령부와 협조하여 이 작전에 협력하게 되었다. 김문호를 위시한 전복근(全福根)·강치명(姜治明)·조명(曹明)·조동걸(趙東傑) 등의 대원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한국광복군 징모처 제3분처’ ‘한국독립당’ ‘제3 전구 정치부’ 등의 명의로된 반전 비라, 염전(厭戰) 사상 고취 전단, 일군 귀순 통행증 등을 화물차로 싣고 야전 방송기 등을 휴대하고 금화 지구로 출동하여 선전물의 살포, 일선 방송을 하며, 한편으로는 선전물을 미군 비행대에 공급하여 적군 점령 지역에 공중 살포하게도 하였다.

미국 항공모함에서 출발한 미국 B-25/B-26중거리 폭격기 50대가 적 수도 도쿄를 폭격을 감행하고, 중국의 강서성 모 비행장에 착륙하려고 하다가 기름부족으로 적 점령 지역인 상하이(上海) 장완(江灣) 비행장에 불시착하게 되고 대부분 조종사들이 상해에 있는 적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944년 11월, 정화암(鄭華岩)[268] 김문호 대장과 함께 비밀 간무 회의를 열고 주중 미 공군 사령부에 포로수용소의 소재지 확인, 보고함으로서 포로수용소 소재지 폭격 중지하게 하게 했다.

김문호가 미 공군에서 제공하는 비밀 통신문과 공작금을 가지고 분처로 돌아오자, 이강(李剛)·정화암(鄭華岩)·신정숙(申貞淑)·전복근 등과 함께 간부 회의를 열고, 공작 업무 수행에 관한 방안을 토의하였다. 그 결과 비밀 통신 연락 공작은 수년간 상하이 방면에서 잠복 활동하여 온 정화암(鄭華岩)이 현지 임무를 책임지고, 김문호를 일반적인 정보 수집 등을 담당하기로 하여, 주중 미 5공군 사령부에 미·영 포로수용소의 소재지를 확인 보고함으로써 수용소 소재지에 대한 폭격을 중지하게 하는 등 한·미 합작의 성과를 거두었다.

1945년 3월, 분대장 김문호 및 전복근(全福根)·최일영(崔日英)·조동걸(趙東傑) 대원과 함께 전선 각지에 파견 공작 중인 대원들을 순방 격려하였다.

특히, 절서(浙西) 지구에 중점을 두고 중국 제 1유격정진종대사령부 및 미 5 공군 파견대 등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한·중, 한·미 합동 공작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징모 제3분처의 이러한 활동은 중국 측의 관심을 유도하였으며, 중국 군사위원회에서는 제3전구 사령장관 구주통(顧祝同)에게 한국광복군의 반정(反正) 공작에 협조하라는 명령을 하게 되었다. 이에 구주통(顧祝同) 사령장관은 다시 제 1유격정진군 사령관 겸 제 5군장 타오광(陶廣)에게 한국광복군에 대해 물심양면의 지원을 명령하니, 여기서 한·중 양국 현지 장병들은 협동 합작으로 더 유리한 대일 항전 활동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269]

9. 그 외의 부대들

9.1. 임시정부 경위대(臨時政府 警衛隊)

경위대는 임시정부 내무부 소속으로 되어 있었고, 주로 임시정부 청사와 요인들의 경호를 담당했었다.
1945년 1월말 푸양현(阜陽縣) 린취안(臨泉)으로부터 50여 명의 광복군 대원들이 대거 충칭(重慶)으로 옴에 따라 1945년 2월 10일 직제상에 있던 경위대가 요원을 확보하게 되었다.

조직된 경위대 요원은, 윤경빈(尹慶彬)[270]을 대장으로 서상렬(徐相烈)[271]·박승헌(朴承憲)[272]·승영호(承永祜)·이영길(李永吉)·신현창(申鉉昌)[273]·백정갑(白正甲)[274]·선우진(鮮于鎭)·이문화(李文華) 등으로 편성했는데, 이들은 린취안(臨泉)에서 중국 군관 학교 제 10분교에 설치된 간부 훈련단 한광반(韓光班)을 졸업한 청년들로 대개 학도병 출신이었다.[275]
경위대의 임무
①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비
② 임시정부 고위 요인의 호위

청사 경비 근무는 분대장 인솔하에 1주일씩 교대로 근무하였으며, 대원들은 초소(哨所)의 운영과 순찰, 출입자의 기록, 안내 및 단속 등에 물샐틈 없는 근무를 수행하였다.

임시정부 요인의 경호는 상부의 지시에 따라 국무 위원급 이상의 정부 요인에 대하여 필요한 시기와 장소에 수행하면서 경호함은 물론, 연락과 비서 업무에 이루는 부수적인 임무도 수행하다가 1945년 8·15 해방을 맞아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환국하였다.
선우진 : 일본 치하에서 최고 학부까지 나온 사람들이 일본에 동화되지 않고 충칭까지 찾아온 것은 대단한 수확이었습니다. 그 문제로 임정에 대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어요. 그때까지 중국에서는 인정하는 정도였지 정식 정부로 승인을 안하고 있었습니다.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만이 대대적으로 우리를 환영해 주었어요. 중한문화협회(中韓文化協會)는 중국 국민당 계통이었어요. 그 때 백범 선생이 거기서 환영사를 하였는데, "봐라, 우리 임정에서 아무것도 안한 걸로 당신들이 알고 있지만, 우리가 전방과 국내에 공작을 편 결과 최고 학부를 나온 이 사람들이 탈출해서 여기까지 오지 않았느냐? 이런 걸 보더라도 우리 임정의 업적을 당신들은 알아야 한다."이런 말씀이 지금까지도 기억이 납니다. 중국 정부에서도 그때부터 임정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했습니다. 결과로 저희들 대부분은 시안으로 갔습니다. 시안에는 광복군 제 2지대가 있었는데, 그 때 철기 장군이 충칭에 와서 일일이 면담을 하고는 총사령부보다는 실질적인 대일 항쟁을 위하여 전방에 나가 공작도 하고, 국내에 정모망도 있으니까 될 수 있으면 전부 2지대로 가는 것이 좋겠다며 데리러 왔어요. 그래서 아까 이야기한 김준엽, 장준하 등 대부분이 갔고, 저희 9명은 남았습니다. 충칭에 있어보니 민족혁명당이 우리에게도 추파를 많이 보냈어요. 거기에 김약산이 있었는데 유혹을 많이 받았지만 저희는 정치적인 일에 관여할 수 없었지요. 나중에 신익희 선생께서 암시를 주더군요. 그래서 저희가 보건대 이래선 안되겠다 해서 저희 9명은 시안으로 가지 말고 남아 있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임정 각료들의 위신을 세워드려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9명이 임시정부 경위대를 조직했는데, 그 때 경호대장은 윤경빈씨였어요. 정부의 위신을 세우는 동시에 민족혁명당 활동을 봉쇄하고자 했습니다.

이현희 : 그 때 무기도 받았죠?

선우진 : 네, 중국 국민당 첸청(陳誠)씨에게 부탁해서 체코제 모젤 3호 24자루를 기증받았습니다.[276]

9.2. 토교대(土橋隊)

엄밀히 말하자면 토교대는 광복군 부대가 아니다. 특이한 성격으로 광복군 조직체로 볼 수 있는 것으로 토교대가 있다. 토교대는 토교에 설치되어있었다. 토교는 중경시에서 남쪽으로 20km 정도 떨어져있는 곳으로 주로 임시정부 관련된 인사들의 가족이 거처하던 곳이다.
연월일 : 1945년 4월 3일

싸전트의 한국인 마을 방문

1945년 4월 3일, 본인은 그들이 초청한 계획대로, 중경에서 약 25마일 떨어진 거리의 구이양(貴陽)으로 가는 간선 도로상에 있는 토교(土橋) 한인 마을에 함께 갈 수행원 몇 사람을 동반시키기 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본부로 갔다. 그 일행은 이청천 장군, 이범석장군, 김학규 소장, 정환범씨, 그리고 최근에 일본군에서 탈주하였거나 안휘(安徽)에서 충칭(重慶)으로 온 대한민국 광복군 소속 요원 몇 명이다. 토교에서 우리는 민석린(閔石麟), 이 대령(1924년 운남강무당 졸업), 공보부장 엄항섭(그는 자기 이름을 David H. S. Um으로 서명하였다), 그리고 유진동(劉振東) 박사(그는 자기 이름을 Dr. New Pillten으로 서명하였고, 그의 명함에는 한인청년학교 극동지부 보건위원회 회장으로 기재되어 있음) 등과 합류하였다.

여행의 목적은 두가지 였다. 하나는 토교에 있는 한국인 마을에 대하여 파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안휘에서 최근에 도착한 37명의 한국인을 만나는 것이었다.

한국인 마을은 약 3년 전에, 부분적으로는 중경 임시정부 요원들의 가족들의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경에 대한 극심한 공습을 피하기 위하여 토교에 설립되었다. 마을에는 임시정부 요원들의 부녀자 및 어린아이들 약 80명이 거주하고 있었다. 현재는 안휘에서 온 37명의 한국인들도 숙소를 배정받아 거기에서 거주하고 있다. 마을은 4개의 건물동으로 구성되어 간선도로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으며, 토교에 있는 큰 다리를 건너자마자 우회전하고, 중국 군용주차장으로 운전해 들어간 뒤, 바위언덕을 오르면 마을에 다다를 수 있다.

유진동의 부인이 제공한 한국식 점심을 먹은 후, 본인은 한국 군인들에 대한 짧은 연설을 요청받았다. 이범석 장군에 의하여 소개를 받은 후 본인은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약 8분 동안 연설을 하였고, 정환범씨가 이를 통역하였다. 본인의 즉석연설에 이어 전체가 한국 군가와 애국가를 불렀다(본인의 요청으로).

본인은 안휘에서 온 37명의 한국 군인들로부터 강한 인상을 받았다. 이들 모두가 지적이고, 기민하고 빈틈이 없었다. 본인이 본 군인 집단 중에서 가장 지적인 집단이었고, 본인이 생각하기에 그들의 능력은 어떤 미국 청년 장교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들 대부분은 대학 졸업자들이라고 들었고, 그들 중 몇 명은 영어를 곧잘 했다. 중경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본인은 그들 중의 몇 명과 격식 없는 이야기를 나눴다. 본인은 이범석 장군에게 그들 모두를 독수리계획의 훈련 프로그램에 참가시키기 위해 산시성(陝西省) 두취(杜曲)으로 데려올 것을 제안했다.

토교대는 광복군 편제 상의 상설조직은 아니었다.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이전한 후 중경에도 일본군 탈영병과 한광반 출신들 중국군 포로된 한적사병 등이 토교에 집단 수용되었다. 이들은 일정기간 수용되어 광복군총사령부로 교육과 훈련을 받은 후, 총사령부, 지대, 경위대 등으로 배치되었다. 즉, 토교대는 한인 청년의 집결에 따라 그때 그때 임시로 편성되는 비상설조직이었다.
토교대의 임무
① 광복군 총사령부 경비 및 고위 요원의 호위
② 광복군 기간 간부 및 장차 건국 후의 국군 사관 요원의 양성
③ 일본군내의 한적 사병에 대한 탈출 공작
④ 기타 총사령부의 지시에 의한 공작 수행

대원들은 이들 가족에 대한 보호와 민사 업무 등도 수행하면서 '교포 위안의 밤' 등을 열어 이역에서 외롭게 고생하는 이들 가족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복돋우어 주기도 하며, 나이 어린 자녀들에게 우리나라 민요와 가요곡 등을 가르쳐 주기도 하였다.

중국 국민에 대한 선무 공작의 일환으로 연극과 음악에 소질이 있는 대원 20여명을 선발하여 군예대(軍藝隊)를 조직, 중경과 인접 현성(縣城) 등지를 순회하면서 '일본군 탈출기' 등의 연극과 우리나라의 민요·가요·민족 무용 등을 공연하여 항전 8년, 일본군에게 시달려 온 중국 민중의 사기 앙양과 한·중 양 국민의 우의 증진에 힘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이 밖에 운동에 소질이 있는 대원들을 뽑아 체육부를 구성하고, 충칭시(重慶市)를 중심으로 한 각 사회 단체 또는 대학생들과 친선 경기를 가지면서 우리 젊은이들의 체력과 구기(球技)의 우수성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1945년 8·15 해방을 토교에서 맞은 당시의 토교대는 대부분이 광복군 제 1지대에 편입되어 환국하였다.

9.3. 한·중 합동유격대(韓·中合洞遊擊隊)/전시공작대(戰時工作隊)[277]

9.3.1. 한·중 합동유격대(韓·中合洞遊擊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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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 정현섭(華岩 鄭賢燮), 정화암(鄭華岩)
1939년 초 가을, 정화암이 젠양(建陽) 주둔 중국군의 협조를 얻어 조직한 부대이다. 중국인 아나키스트들과 한국청년전지공작대였던 나월환의 제 5지대와 유동적인 조직으로 주로 상하이, 항저우 등 잠입, 첩보, 정보수집 등 지하공작활동을 했었다.
젠양(建陽)에는 첸용알슈민퇀(泉永二屬民團)에서 같이 일을 했던 량롱광(梁龍光)과 그 외 많은 중국인 동지들이 있었으며 그 중에는 중국중앙정부 정규군의 참모직위에 있는 사람도 많았다. 또 구주통(顧祝同) 장군과 긴밀히 연락을 하고 있는 정추준(鄭秋準)이 있어서 많은 협조를 받았다.[278]

시안(西安)에 근거를 둔 한국청년전지공작대와 서로 긴밀한 연락하에 상라오(上饒), 젠양(建陽)을 중심으로 모여드는 독립운동가와 일본군 탈출 한국인 장병들을 모아 중국군과 합세하여 군사적 공격을 수행하는 한 편 일본군 점령지역에 잠입하여 후반교란과 산발적인 유격전을 전개했다.

한중합동유격대의 위기
1942년 광복군 제 5지대에서 대원 박동운에 의하여 나월환 지대장이 암살된 후, 시안(西安)의 공작대 활동이 약화되어 공작대 활동이 주춤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공작영역을 안후이성(安徽省), 장시성(江西省), 푸젠성(福建省), 후베이성(湖北省)으로 확대되어 갔다고 한다.

1940년 11월, 일본 정부가 왕징웨이 난징 괴뢰 정부를 수립하고 중국 국공합작에 균열이 발생하여 1940년 7월부터 후중난(胡宗南)부대가 협감영(陜甘寧)[279] 지구를 공격함으로써 국공합작이 깨졌고 신쓰준(新四軍)사건(1941년 1월 7일~1월 13일)이 발생한다. 신쓰준(新四軍)이 북쪽으로 이동하다가 안후이성 남부(晥南)에서 공산군 시앙잉(項英)이 전사하고 예팅(葉挺)이 체포되는 등 전멸상황까지 이룸으로써 합작은 파국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9.3.2. 전시공작대(戰時工作隊)

1943년 말,[280] 전열을 정비하여 유격대를 전시공작대(戰時工作隊)로 개편하고 일본군과 왕징웨이군과 공산군과의 대결에 대비한다. 상라오(上饒), 젠양(建陽)을 중심으로 일본군에서 탈출한 한국인 병사들로 조직되었다. 이들을 일괄수용하고 중국군과 협력하여 항일 투쟁에서 군사적 공격을 대항하기 위해서는 이들에게 훈련을 실시하여 힘을 키우게 하는 일이었다.
한국인 병사들이 저장성에 있는 일본군대에서 탈출해오는길은
파일:난징부양.png
① 난징(南京), 자오장(鎭江)방면에서 우후(蕪湖)나 푸양(阜陽)
파일:진화 상라오.png
② 찐화(金華)에서 상라오(上饒)나 젠양(建陽)으로 넘어오는 일이었다.

전시공작대(戰時工作隊)와 미 5공군(5th Air Force)의 합동작전 1944년 11월

윈난성(雲南省) 쿤밍(昆明)에 있는 미 5공군 사령부에서 상라오(上饒)에 분소를 두고 일본군에 대한 폭격자료를 얻기 위한 정보수집업무의 일부도 전시공작대(戰時工作隊)가 수행했다.[281]

젠양(建陽)과 상라오(上饒)는 장시성(江西省), 안후이성(安徽省), 푸젠성(福建省), 저장성(浙江省)의 중심지였고 구주통(顧祝同) 군단의 제 3전구가 있는 중요지점이다.또 윈난성(雲南省) 쿤밍(昆明)에 있는 미군 5공군 사령부에서 상라오(上饒)에 분소를 두고 일본군에 대한 폭격자료를 얻기 위한 정보수집업무의 일부도 전시공작대(戰時工作隊)에서 수행해야 하는 과업의 하나였다.

미국 공군기가 일본군 주둔지를 폭격함에 있어서는 그 주둔상황을 관한 정확한 정보에 의해야 하는데 그것이 부정확한 탓으로 연합군의 포로수용소가 잘못 폭격되어 많은 희생을 초래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므로 미국 공군 사령부에서는 연합군 포로수용소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다.

미 5 공군의 상라오(上饒)분소 정보책임자 쇼우가 정화암에게 사람을 보내 정보 수집에 협조해줄 것을 요청해 왔다. 중국정부의 정보나 각 군의 정보를 종합해도 신빙성이 없다면서 어디서 들었는지 나와 손을 잡으면 좋은 성과를 거둘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정보 수집을 의뢰해 온 것이다.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전시공작대(戰時工作隊)로서는 침략자 일본군을 통쾌하게 때려 부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므로 쇼우의 요청을 받아 들였다.

미 5공군에서 알고자 하는 정보는 텐진(天津) 베이징(北京) 등 화북지방으로부터 상하이(上海), 항저우(抗州), 우한(武漢) 지방 등에 있는 포로수용소 위치였다. 그 중에서도 상하이(上海)근교에 있는 포로수용소의 위치를 아는 대로 유격대를 보내 일본군을 공격하고 연합군의 포로를 단시간 내로 안전지대로 빼내야겠다는 것이다.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는 부대 가운데 우리 전시공작대(戰時工作隊)가 가장 건실하고 일본군에서 탈출한 한인병사의 수효가 많아 신빙성이 있는 정보를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면서 정보업무수행에 필요한 자금을 주겠다고 말했다.

마침 전시공작대(戰時工作隊) 대원들의 의식주와 훈련 등에 필요한 자금이 부족했던 때인지라 여기에 필요한 자금까지 요청해 볼 생각도 해 보았으나 그것은 흑심만을 보여줄 뿐이라는 판단에서 정보수집에 필요한 금액만을 자세한 계획서와 같이 제시 하였더니 쇼우는 깜짝 놀라며
쇼우 : “이 돈으로 충분 하겠느냐?"
정화암 : “쓰다 부족하면 또 청구하지요.”

쇼우는 솔직한 정화암의 태도에 호감이 들었던 모양이다. 청구한 돈과 같이 지프(Jeep) 한 대를 보내 왔다. 그리고 정화암 포로수용소의 확인방법을 이렇게 알려주었다.
“암호문이 쓰인 얇은 비단 쪽지를 포로수용소라고 인정되는 곳에 비밀리에 들여보내면 회답이 나오게 되어 있다. 연합군의 장교라면 대개는 그 암호문을 해독할 수 있다.”

정화암은 항저우(抗州)에서 백리길이 넘는 동요라는 최전선까지 나아갔다. 거기에서 대원 두 사람을 상하이(上海)에 밀파하여 정계원을 불러 왔다. 오랜만에 만나는 정계원은 매우 반가워했다. 정보임무의 막중함을 이야기하고 위혜림을 찾아 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위혜림으로부터 신통한 정보가 들어오지 않았다.

일화사창이니 영미사창이니 하는 큰 공장에 수용되어 있다는 정보에 따라 <비단쪽지>를 들여보내려 했으나 불가능했고 쇼우에게 알렸더니 그 곳은 아니라는 것이다. 미 5공군 사령부에서는 정보 수집을 한 군데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비단쪽지의 회답만 얻어 오면 틀림없다고는 하지만 일본군 몰래 들어가서 회답을 받아 내기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전시공작대(戰時工作隊)는 상하이(上海)와 항저우(抗州), 우한(武漢)지방을 중심으로 탐색을 시작했다. 새로 일본군에서 탈출해 오는 학병과 군속들에게서 아는 대로 정보를 듣고 이를 종합하여 쇼우의 지시대로 비단쪽지를 들여보냈다. 그 결과 우한(武漢)지방의 한 촌락의 일본군 부대였다.

다음 날, 새벽에 그 비단쪽지가 되돌아 왔다. 그 곳은 분명히 포로수용소였다. 쇼우에게 알렸더니 ‘이제 됐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쇼우는 그곳을 공격하지 않고 한 일주일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그곳의 일본군 병력을 조사한 것이다. 정작 일본군의 큰 병력은 그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한커우(漢口)와 자오장(九江)에 있었다. 그 후에야 미 공군기가 그 곳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수용소를 유격대가 공격하여 그 수용소 안에 있던 연합군 포로를 빼내오는 것이다. 전시공작대(戰時工作隊)의 활동은 쇼우와의 합작으로 그 후에도 계속되어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9.4. 한교전지공작대(韓僑戰地工作隊)

파일:450px-유기석.jpg
유기석(柳基錫, 柳樹人, 柳絮)은 안창호(安昌浩) 국무총리의 비서직을 역임한 유찬희(柳纘熙) 선생의 장남이며, 중·일 전쟁 발발 이후로는 중국군 제 3전구 쑤베이 지역 유격사령부에서 상교(上校)로 근무하면서 독자적으로 항일 전선의 최전방에서 대일 투쟁에 활약해 온 혁명 투사이었다.

한교전지공작대[282]유기석이 완난(晥南) [283] 마오린(茂林)에서 조선 청년들과 합작을 거쳐 조직한 단체로 책반공작(策反工作)을 중심 임무로 하였다. 김문호의 제 3징모분처 광복군 제 2지대 제 3구대 제 3분대(강남분대라고도 불린다.)의 동일한 의미로 쓰인다.

1943년, 한국광복군 제 1지대 제 2구대 이소민 주임과 제 2지대 3구대 3분대 김문호 주임의 파벌투쟁[284]으로 인하여 서로 마찰을 벌여 초모공작이 중단되는 일이 발생되자 정화암의 주선에 의하여 유기석 주임이 중재에 나서게 되면서 제 3전구 한교전지공작대로 통합이 되어 유기석 부대장이 된다. 주로 일본군 점령지에 있었던 병사, 의사, 상인, 노동자, 유학생, 기독교 전도사, 부녀, 아동으로 구성되어있었다고 한다. [285]

주 임무는 경현[286]과 마두진(馬頭鎭)이라는 관문에서 검열소 활동 및 주둔군대를 감독하는 조사업무를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287]

자세한 공작내용은 한교전지공작대(韓僑戰地工作隊)에 자세히 설명한다.

아나키스트들은 원칙적으로 군대를 부정한다. 군대는 구성원의 자주성을 철저히 부정하는 대표적인 상명하달식 조직이므로 아니카즘 조직관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아나키스트들이 군대를 인정하는 경우는 자위를 위한 군대에 한정될 뿐이다. 이들 군대는 일본제국주의에 전면적으로 저항하기 위해 조직된 것이었다. 조선민족전선연맹의 무장력인 조선의용대(제1지대)와 한국청년전지공작대(제5지대)가 대표적이지만 정화암의 한중합동유격대(전시공작대)와 유기석의 한교전지공작대가 조직되어 군사활동을 전개했다. [288]

약산 김원봉, 나월환, 화암 정현섭, 유기석 전부 아나키스트들이고 이 아나키즘 사상적인 주체는 단재 신채호선생이다. [289]

10. 한·미 군사특수공작 (韓·美 軍事特種作戰)

10.1. 주중 미국 대사관 한국인 공작반(駐中 美國大使館 韓國人 工作班)

1. 배경
1943년 9월 하순, 인면전구공작대의 활동을 전후하여 영국 대사관 무관처의 요청으로 한국에 관계된 일체의 첩보를 수집, 분석, 평가하는 정보업무를 담당하는 요원으로 광복군 총사령부에서는 영어, 중국어에 능통한 권일중(權一中), 안원생(安原生)[290] 안미생(安美生) 등 수명을 영국 대사관 정보처로 파견하여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카이로 선언이 공표된 후, 영미 연합군측의 한국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으며 영국 대사관 무관처에서 한국 광복군 파견원들의 활동 성과가 큰 것을 알게 된 미군측에서도 주중국 미군 총사령부 심리 작전 부문에 광복군 공작원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게 되었다.

2. 파견과 임무
그리하여 광복군 총사령부에서는 1944년 말, 엄도해(嚴道海) 안원생(安原生) 안병무(安炳武), 진춘호(陳春浩) 안우생(安遇生)[291] 송면수(宋冕秀) 등을 파견되어 주중 미 대사관 내에 한국인 공작반이 설치 되어 본격적인 정보공작활동이 전개하게 되었다. 임무는 일본 및 한국 본토에서 발간하는 신문, 잡지 등 출판물과 전파를 통하여 오는 방송, 그리고 광복군 진영으로 들어온 신입 대원으로부터 첩보를 수집하고 이를 분석 평가하여 가치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안우생(安遇生), 송면수(宋冕秀)는 서안 2지대 본부 현지에서 출정하여 전방 공작원 및 새로 들어온 대원들을 직접 면담하여 많은 첩보를 수집하는데 힘썼으며, 제 2지대에서는 이원범(李秀範), 박영만(朴英晩) 등이 이 공작에 적극 참여했다.
선전물 내용
"한국 민족은 왜적을 공격할 3천만 개의 폭탄을 가지고 있다."
일본이 우리 민족에 가한 오만가지 죄악상 소개
우리나라 독립 투쟁사 소개
"한국의 위치는 중국 대륙과 왜구의 섬을 잇는 교량이다. 이 다리를 끊으면 중국 대륙에 있는 왜적 군졸이 고립될 거시며 왜구 본토도 고립된다. 이 다리를 끊어라! 그러기 위해서는 광복군을 이용하라."

3. 결과
공작반에서 분석, 가치있는 정보는 곳 OSS(전략사무국)에 보내지며 작전 상 필요한 정보는 다시 미 공군 부대에 전달되어 작전 행동에 연결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미군측은 광복군의 존재 가치를 새로 인식하게 되었다.

4. 협력자
- 조지 맥큔(George M. McCune) 소령[292] " 평안북도 선천에서 출생한 미국인 선교사 윤산온이라 불리는 조지 새넌 맥큔(尹山溫 | George Shannon McCune) 목사의 아들이다.
- 미국 워싱턴 주재 임시정부 구미 외교위원회
- 미 국무성
- OSS 사령관 도노반 소장

10.2. 만주 지구 공작반(滿洲 地區 工作班)

1944년 6월, 주중 미국 대사관 무관 버드 대령은 "만주에 있는 일본군 정보를 얻고 싶으니 만주에 갈 공작원을 추천해 달라."는 통고를 미 대사관 한국인 공작반에 요청해왔다. 공작반은 마친 노하구 제 1지대 제 1구대에서 중경에 도착한 김근수(金根洙)를 추천하여 만주지구 공작에 관한 의견서를 작성하여 미 대사관에 제출하였다.

1944년 7월, 미 대사관의 초청으로 김근수(金根洙), 유원해(柳原海), 윤원장(尹元章), 안원생(安原生), 안우생 등의 통역으로 버드 대령과 면담을 통해 만주 파견 첩보 공작에 관한 협의가 이루어졌다. 이때 미국측은 공작비로 약간의 금괴를 주었다고 한다. 김근수 외 3명은 만주 파견 공작원의 임명을 받고 임시정부 요원과 광복군 고급 간부들로부터 20일의 특수 교육을 받았으며 중국 군사 위원회에서 각종 증명서를 휴대하고

1944년 8월 초, 중경을 출발, 파동(巴東), 노하구(老河口)를 경유 남양에 도착후, 금괴 덩어리를 다시 작은 규모로 만들어 각각 분담하였다. 김근수는 허창, 정주, 석가장, 북평, 심양으로 유원해, 윤원장은 허창, 개봉, 서주, 제남, 심양으로 각각 경로를 달리하여 출발, 약속한 9월 어느 날 심양 역 앞 지정된 장소에 집합하였던 것이다.

집합한 대원들은 임시정부 요인들이 소개해준 인물을 찾았으나 거의 작고한 후였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심양을 거점으로 제 1단계 애국 동지 포섭에 노력하였다. 김세원, 김언수(金彦洙), 고윤원(高允源), 안흥기(安興基) 등 수명의 동지를 포섭하고 조직망을 구축과 첩보 공작을 전개하는 한 편, 다시 김세원을 한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유하(柳河)를 보내는 한 편, 김인수, 고윤원, 안흥기 등을 국내로 침투시켜 국내에도 조직망을 연결하는데 성공하였다.

1945년 초, 종합된 첩보를 광복군 및 미군 측에 제보하기 위하여 유원해를 중경으로 후송하는 동시에 새로운 사명을 받았다. 광복군에 OSS훈련이 시작된 6월에 장차 국내 정진대와 연결과 작전의 새로운 전개를 계획하기 위하여 미국측의 요구에 따라 김근수등이 중경으로 돌아왔으며 새로운 임무를 받은 후 다시 만주로 진출하려다 광복을 맞이한다. [293]

10.3. 쿤밍 지구 특파원 공작반 (昆明 地區 特派員 工作班)

1944년 광복군 총사령부에서는 윈난셩 쿤밍(雲南省 昆明)에 있는 미 제 5공군 사령부 특파원으로 김유철(金裕哲), 조중철(趙重哲) 등을 파견하여 대적 선전 공작을 담당했다. 중국 공군부대에서 복무중인 장성철(張聖哲), 김좌경(金左卿) 등과 운남 비행장 복무 중인 염온동(廉溫東) 중국 중앙군에 복무하는 김철군(金鐵軍), 유재원(柳在元) 등이 합류 협조하여 미 공군의 지원을 받았다.

주로 적 점령 지구에 살포한 반전(反戰) 삐라를 작성하여 미 공군 비행기를 이용하여 중국 각 전선에 투하 살포하였는데, 김유철(金裕哲)이 직접 그린 그림[294] 한국어와 일본어로 된 반전 투항을 권유하는 내용의 선전물을 제 1차 50만 매를 작성하였으며 제 2차 역시 50만 매를 한국어, 월남어, 버마어, 일본어 등 4개 국어로 된 반전 사상 고취와 투항을 권고하는 내용의 전단을 작성하여 중국, 한국, 월남, 버마 지역에 살포하여 심리전을 하였다.

유재원은 제 5공군 사령부에서 비행장으로 연락차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다가 교통사고로 순직한다.

김유철(金裕哲), 김철군(金鐵軍) 등은 윈난성 변경지역인 버마 전선에 대적 방송 및 삐라 살포 작전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해발 2천 5백미터 산정상에 설치된 미군 방송국을 이용하여 한국어, 버마어, 일본어 등 각국어로 된 반전 사상 고취 방송을 담당했다. [295]



[1] Korea Independent Army[2] 주의를 하여 단단히 다잡거나 다스림.[3] 훗날 조선의용군이 되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경우 중국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 의하여 무장해제를 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는데다 환남사변으로 인하여 중국 공산당 부대인 신사군, 팔로군과 함께 화북지대(일본군 점령지)로 숨어들어 유격전을 펼치게 된다.[4] 조덕천, 중일전쟁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지원, 동양학 제63호(2016년 4월),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실, p. 7~8[5] 규정에 의하여 정한 인원. 정원[6] 김원봉[7] 1940. 한국광복군 참모처장, 1944. 광복군 제 1지대장[8]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趙素昻)의 동생[9] 규정에 의하여 정한 인원. 정원[10] 규정에 의하여 정한 인원. 정원[11] 한국독립당을 탈당 1943년 11월 유동열(柳東說) 등과 조선민족혁명자통일동맹(朝鮮民族革命者統一同盟)에 가입[12] 규정에 의하여 정한 인원. 정원[13] 규정에 의하여 정한 인원. 정원[14] 규정에 의하여 정한 인원. 정원[15] 최용덕 장군의 호가 창석(滄石)[16] 규정에 의하여 정한 인원. 정원[17] 한국광복군 징모 제 1분처 산시성(山西省) 군사 초모(招募) 활동. 1942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서무과장. 1943년 8월 총사령부 제 3과장. 1944년 3월 총사령부 고급참모. 1945년 중국 군사위원회가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의 중앙군사학교 총무. 사망년월일 미상.[18] 1942년 2월 민족혁명당원(民族革命黨員)으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 통신처(通訊處) 계림(桂林) 지역 주임. 1947년 사망[19] 대한독립의군부 부주석, 임시정부 국무위원, 한국독립당 부위원장 조소앙(趙素昻) 선생의 아들[20] 임시정부의정원 의원, 임시정부 주화대표단 단장 박찬익(朴贊翊)선생의 아들[21] 규정에 의하여 정한 인원. 정원[22] 규정에 의하여 정한 인원. 정원[23] 유진동[24] 규정에 의하여 정한 인원. 정원[25] 규정에 의하여 정한 인원. 정원[26] 규정에 의하여 정한 인원. 정원[27] 공산주의 독립운동가 최창익(崔昌益), 변호사 허헌의 사위이자 허정숙의 남편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제 3대 부수상이 된다.[28] 양쯔강의 북쪽 지류인 한수이漢水강이 양쯔강과 만나는 지점을 둘러싼 3개 지역으로 삼국지에 적벽대전이 일어난 것도 이 근방이다.[29] 일본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정치운동가,1933년 5월에는 일본 전투적 무신론자 동맹에 참가. 한편 유물론연구회 에도 참가해 주로 고대사부회에서 연구에 종사하고 있었다. 1934년에 검거되어 1935년에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의 형을 받았지만, 전향문서에 서명해 출옥했다. 이후 상해에 건너 일중전쟁 발발 후는 중국 국민정부 에 의해 국제문제연구소 고문으로 초빙되어 적정연구 및 반전 사업에 종사했다. 충칭 국민당 정부 국제선전처의 대일공작 고문으로 코민테른 의 지령으로 대일공작에 종사했다.[30] 한양조 88식 소총클립을 말함[31] 「화북조선청년연합회(華北朝鮮靑年聯合會) 변구분회(邊區分會:국경지점)에서 옌안(延安)에 온 의용대원들을 환영」,<해방일보(解放日報)>1942년 6월 30일자; 앞의 중국의 광활한 대지 우에서, 682쪽에서 재인용. 이 일본인 여성은 중국인들에게도 꽤 알려졌던 것 같다. 그녀의 존재를 알리는 생생한 증언이 최근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즉 1940년대 전반기 팔로군(八路軍)의 간부로서 일본인 포로정책에 관계하고 있던 중국인 리우궈린(劉國霖)에 따르면 이 여성은 조선의용대원의 부인으로서 다른 한인들은 모두 權선생(또는 권씨)라고 불렀다고 한다(「劉國霖さんへのインタピユ-」, 󰡔日中戰爭下中國における日本人の反戰活動󰡕, 藤原彰 姬田光義 編, 東京, 靑木書店, 1999, 271쪽).[32] 마이(馬義), ≪조선의용대 승리의 4년(朝鮮義勇隊勝利的四年)≫, 충칭(重慶);국제출판사, 1942, p134[33] 다만, 함락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전투보다는 선전공작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34] 원 조선의용대의 일부[35] 마이(馬義), ≪조선의용대 승리의 4년(朝鮮義勇隊勝利的四年)≫, 충칭(重慶);국제출판사, 1942, p28[36] 마이(馬義), ≪조선혁명사화(朝鮮革命史話)≫, 동방출판사, 1944, p. 81[37] 강만길, 통일운동시대의 역사인식(서해문집, 2008) 275페이지[38] 다만 이후에도 조선독립동맹과 의용군 화북지대 공산당원의 수는 50여 명에 불과했다.[39] 지침대로 요청[40] 1920~30년대 공산주의와 합작한 아나키스트 정화암, 유기석도 공산주의를 비판하면서 자유노선으로 간 것도 그 때문이었다.[41] 조선의용대 1구대를 말함[42]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원문사료실 독립유공자증언자료집 1권 광복군편[43]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참사관실 주임, 중국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비서장, 당사무위원회 위원장, 중앙조사통계국 국장[44] 서명 및 제출[45] 상사에 대한 존경받는 직함을 말함[46] 살림살이에 필요한 물건을 차려서 살아 나갈 방도를 세움.[47] 김원봉[48] 대한민국임시정부공보 제75호(1942. 8. 20.)[49] 한국광복군[50] 이전부터 있던[51] 원문엔 幸[52] 빛나고 아름다운 영예[53] 되짚어보다.[54] 어렵고 힘든[55] 깃발[56] 부딪쳐 깨뜨리는 것.[57] 용광로[58] 강철투구같은[59] 적군부대내[60] 적군부대[61] 불태우다[62] 절기가 있고 굳셈.[63] 일이나 행동따위를 막아서 방해[64] 결손된 국회의원자리[65] 1) 국사편찬위원회 펴낸≪한국독립운동사≫ 자료 3. p.296.[66] 9개 준승조약에 의하여 광복군 총기 무장에 대한 제약이 많았다.김원봉의 선전영상이나 사진에서 마우저 권총 패용사진은 볼 수 없다.[67] 渝는 충칭을 의미하는 한자어로 주유(駐渝)는 '충칭에 주둔하는'이란 뜻이다.[68] 김원봉(金元鳳)[69] 중국인[70] 중국인[71] 중국인[72] 중국인[73] 중국인[74] 중국인[75] 인면전구공작대 대장[76] 중국인[77] 조선민족혁명당 재정부장[78] 김학선[79]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 한국청년회,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및 제 1지대 대원이정호의 아내[80] 김원봉의 3번째 부인으로 독립운동가 최석순의 딸, 최석순은 만주에서 대한통의부의용군 중대장, 참의부 참의장 역임한 독립운동가로 1925년에 사망.[81] 김두봉(金枓奉)의 딸[82] 추현수 펴낸 ≪자료한국독립운동≫ 3. p.184.[83] 총사령부 부사령관 소장으로 진급하기 전 계급으로 추정됨[84] 김원봉(金元鳳)[85] 조선민족혁명당 조직부장[86] 인면전구공작대 대장[87] 황민(黃民)[88] 유경로(柳景魯)[89] 왕석(王石)[90] 김병원(金秉元), 학병으로 중국 서주(徐州)에서 일본군을 탈출하여 1944년 광복군 제 1지대 제 1구대에 입대하여 활동하였다. 한국광복군에서 항일유격대장으로 활동하는 과정에서 이름을 장철부로 개명했고, 1945년 6월 장철부(張哲夫) 등 30여 명을 윈난성(雲南省)에서 실시하게 된 한·미 합동 기갑부대(機甲部隊) 전차훈련반(戰車訓鍊班)에 입교시키려고 충칭 제 1지대 본부로 후송하였으나, 광복으로 전차 교육 계획은 부득이 중단된다. 강홍모, 이건국, 김중진 등과 함께 백범 김구의 추천을 받아 중화민국 군관학교 기병과 20기로 입학해 1947년 졸업했다. 1950년 8월 5일 마지막 기병대장으로서 한국전쟁때 전사한다.[91] 김근수(金根洙)의 아내[92] ) 제1지대 편찬위원회 제공. 김승곤(金勝坤) 증언. 「광복군 제1지대원 家屬의 양곡지급에 관한 건」, 자료 한국독립운동 3, 추헌수 편,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3, 184-185쪽.[93] 김준엽, 장정 회고록에서 "김준씨 외에 2명만 있었다."라고 궈이창과 김석산 제 1분대장으로 추정된다.[94] 국민혁명군 계급으로 소령[95] 황포군관 4기, 의열단 간부학교 전술학 교관, 조선의용대 전방공작대원, 1945년 상해에서 순국[96] 국민혁명군 대위[97]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조선의용군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 이화림(李華林)의 남편[98] 국민혁명군 중위[99]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1구대에 제 5공작반 반장 김석산(金石山)은 허난성(河南省)과의 경계 지역인 후베이성 탄현(潭縣)지구에 거점을 구축하고 애국 교포 청년을 초모하고 있었다.[100] 어떤 문서엔 임평이 서기로 나오기도 한다. 1935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가입,공산주의자전위동맹(共産主義者前衛同盟)집행위원, 1942년 사망했으니 장준하, 김준엽 일행은 못만나봤을 가능성이 크다.[101] 본명은 최인(崔仁),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문서,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황허(黃河)를 건너 중공 측에 가담하게 된 경과에 따르면 화북 옌안으로 합류함.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당시 조선인민군 제 7사단장, 1951년 4월 제 6군단 참모장, 제 6군단장, 1952년 5월 기계화사령부 참모장을 역임. 1954년 7월 민주청년동맹 중앙위원회 체육지도부장, 1960년 내각 정보국장[102] 각 분대장들도 활동한 지역이 다 다른데다 이 명단은 1942년 5월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서 일방적으로 한국광복군 제 1지대로 편제한 명단이기 때문에 실제로 중국 각지에서 분산되어 있던 대원들의 활동지역을 고려하면 상당한 차이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103] 옴으로 인하여 장준하, 김준엽 일행과 갈라진 후, 라오허커우에서 광복군 제1지대 제1구대 대원이 되어, 광복군 병력을 모집하는 초모활동을 전개하였다. 제1구대에는 허난성 딩정우(定州)와 난양, 안후이성 루안(六安)과 타이허(太和), 허베이성의 담현(潭縣) 등 5곳에 초모공작반을 파견하여 병력을 모집하는 활동을 벌였다. 그 결과 최상재(崔相齋)·이무중(李茂重)·서정천(徐廷天) 등 12명의 한인 청년들을 모집하였다. 중국군 제5전구 사령부와 교섭하여, 이들을 제5전구 간부훈련단 정공(政工)간부훈련반에 입교시켜 교육과 훈련을 받도록 하였다. 정공(政工)간부는 정치공작 간부를 말한다. 이들은 졸업 후 모두 광복군 제1지대 제1구대 대원이 되었고, 1945년 3월 현재 대원수가 27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후 행적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광복 후 귀국하여 국군에 들어가 장교로 복무하였다고 하며, 1977년 운수업에 종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2004년 9월 12일에 사망하였고,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되었다.[104] 김준엽, 장정 나의 광복군 시절, 아연출판부, 2023, pp. 304~311[105] 강홍구, 일본을 상대로 대적 첩보 활동을 하던 중 1942년 왕자오밍(汪兆銘)군에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겪다가 1945년 광복이 되자 우후(蕪湖)에서 석방되었다.[106] 이지강(李志剛)으로 화북 옌안으로 합류[107]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집행위원회 검사위원/재정부장, 생몰년도 확인불가[108] 화북 옌안으로 활동[109] 절(浙)는 저장성(浙江省)을 의미하는 한자, 공/감(贛)은 장시성(江西省)을 의미하는 한자로 저장-장시전투라고 부른다. 두리틀 특공대가 일본에 폭격을 하고 저장성에 불시착을 했는데, 일본제국이 항저우로 상륙하여 감행한 전투이고 협상을 위해 다수 미군 조종사들을 포로로 잡아 수용했던 걸로 보인다.[110] 개명 전 본명은 김순재(金珣裁)[111] 김용의 친형[112] 관련수기를 찾아보고 싶다면 김용, 나의 길을 찾아, 이화, 2012 참조[113] 김용, 나의 길을 찾아, 이화, 2012, p154[114] 중국 충의구국군을 통해서 입대했다고 한다.[115] 국민혁명군 대령[116] 제 1구대는 중국의 31집단군 92군 21사단 121연대와 122연대에서 2년간 활동[117] 이현희, 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일반자료총서 86-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김승곤 증언[118] 광복군 독자적으로 작전할 수 없었다. 반드시 중국인 고위장교가 붙어 다니는 상황[119] 뇌명(雷鳴)[120] 소령[121] 양춘일(楊春一)[122] 황인덕(黃仁德)[123] 김우길(金佑吉)[124] 이봉학(李奉鶴)[125] 한장식(韓長植)[126] 국민혁명군 소령[127] 2대 분대장[128] 2·3분대는 2개월 후에 편성됨[129] 중국군 장교[130] 소장[131] 중교, 제1분대[132] 중교, 제2분대[133] 중교, 제3분대[134] 소교, 제1분대[135] 소교, 제2분대[136] 소교, 제3분대[137] 여기있는 인원들 대부분 공훈록엔 없는데, 그 이유는 국가보훈부 내규에 의거 광복군에 입대한지 6개월이 넘지 않았거나 구출된 학병으로 보면 된다.[138] 제9전구 공작대 편찬 위원회 자료 제공. 이병곤(李炳坤)·최덕휴(崔德休) 증언[139] 인(印)은 인도를 의미하고 면(緬)은 미얀마(버마)를 의미하는 한자어이다.참고로 버마공로는 전면공로(滇緬公路)인데 여기서 전(滇)은 운남성을 의미하는 한자이다.[140] 문응국 지사 증언 : 어디서부터 싸움이 시작되었는가 하면, 한국광복군 주인면 공작대(韓國光復軍駐印緬工作隊)는 확실한데, 그런데 이영수라는 사람이 광복군하면 Restoration Army로 하자 이거야. 그러니까 3가지 안이 나왔어요. Restoration으로 하느냐. Independence로 하느냐, 그래서 이거는 양쪽 다 높다. 성질상 그것을 쓰기는 높다 이거야. 그래 절충안으로 나온것이 National Army입니다. 그래서 KNALU-Korean National Army Legion Unit. 떠나기 전에 통일해야 되겠다. 그래서 결국은 Korean National Army Legion Unit으로 합의를 보았어요. 결국 한지성하고 나하고 본 겁니다. Restoration이나, Independence나 똑같은 어구니까 좋다. National Army가 좋다. People's Army로 하자고 그러기도 해요. 그건 말도 안된다. National Army가 절충이에요. 그래서 Korean National Army Legion Unit. 이게 우리의 정식 명칭입니다.[141] 문응국 지사 증언 : 그래서 (영국사람에게) 매일 (한국어) 가르치는데, 거기서 영국으로 가게 된 계기가 이루어진 겁니다. 그러다 버마 루트가 막히기 시작했어요. 왜놈이 그 당시 버마에 침공해 들어갈 때입니다. 그래 안우생씨하고 이루어진 것이에요. "몇 명을 인도에 보내고 싶은데 어떠냐?" 안우생씨는 학자 타입이거든요. 안우생씨는 안공근씨의 아들입니다. 그러니까 한지성씨가 안공근씨의 사위에요. 그러니 안우생씨하고 처남간이죠. 한지성 그 사람이 경북 성주 사람일 거야.. 그 때 약산의 직계라고....네, 부인 이름이 금생(錦生)이에요. 비단 금(錦)자. 무엇이나 하면, 자기 매부하고 나하고 인도에 가는데 한 조로 편성해 보라는 거에요.[142] 한지성, 인도공작대에 관하여, 독립 제3권 제 75호, 1945년 6월 13일 | 독립은 미주지부에서 발행한 신문이다[143] 김광재, 「朝鮮民族革命黨의 연합국과의 합작활동」, 447-448쪽[144] 부대장이었던 문응국 지사의 증언 자료에 의하면 1945년 9월 6일까지도 계급장이 없었다고 증언[145] 국한문및 영문자료 6, 한지성, 「인도공작대에 관하야」[146] 여담이지만 조선의용대, 민혁당 세력인 1지대 입장에선 공작성과가 뺏긴 것이고 충칭에서 1지대와 2지대 대원간 패싸움이 벌어지는데 신영묵 지사와 1지대간 주먹싸움이 있었다.[147] 1948년 10월 육군사관학교 제7기 특별반을 마치고 임관하여, 제6사단 제8연대에 대위로 복무 중 6·25 전쟁 발발 당일 북한군과 교전하다가 전사하였다.[148] 광복 후, 안원생은 1946년에 귀국하여 주한 미국 대사관에 근무했다.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 부회장과 대한축구협회 임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1949년 백범 김구 서거 이후의 행적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으며, 미국에 건너가 지내고 있다는 정도만 나와있다. 사망년도, 사망지 역시 알려진 바가 없다. 그의 동생인 안우생은 생계가 어려워져 홍콩을 경유해서 북한으로 입국하게 된다.[149] 이현희, 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일반자료총서 86-2), 한국정신문화연구원,1986, 문응국 지사 증언[150] 해방 후 육군사관학교 3기로 임관하고 1957년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였다.[151] 해방 후 육군사관학교 5기로 임관하고, 5.16 군사정변 직후 현역 육군 대령 신분으로 문화재 관리국장을 역임하였다.[152] 한영군사상호협정서(韓英軍事相互協定書) 8조[153] 이현희, 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일반자료총서 86-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문응국 지사 증언[154] 그동안 많은 정이 들었는지 광복군 대원들은 베이컨의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고, 인도에 거주하는 한인들로 부터 성금을 모아 전달하기도 하였다.[155] 조일문, 춘풍추우, 건국대출판부, 1997, pp.52~54[156] 한지성 대장이 공산주의자였다면 그 자리에서 소련으로 가거나 조선의용군처럼 화북지역으로 걸어서 갔을 것이다.[157] 이현희, 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일반자료총서 86-2), 한국정신문화연구원,1986, 문응국 지사 증언[158] 이현희, 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일반자료총서 86-2), 한국정신문화연구원,1986, 문응국 지사 증언[159] 백범 김구 주석의 사돈관계이다.김인+안미생[160] 평양에 머물게 된 이유는 확실하게 밝혀진 바 없으나 김원봉과 민전측이 노덕술에게 호된 가혹행위를 당했고 친일파와 동침하느니 북한 밖에 선택지가 없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때 의열단의 의거를 생각해보면 친일파가 미군정에 의해 우대받는 조국에선 살기 힘들었을 것이다.[161] 해방 후, 백범 김구의 대회 담당 비서였던 안우생도 1949년 김구가 암살된 후, 홍콩에 간 뒤 이후 자취를 감췄고, 월북한 것으로 추정된다. 독립운동가를 대우를 해야 대한민국 정통성이 유지되는 것이다.[162] 가오윈치(高雲起)라는 중국어 이름으로도 불리었었다.[163] 지청천 장군 아들[164] 1937년부터 1945년까지는 일본이 세운 괴뢰 정권인 몽강국의 일부이다.[165] 여성 한국광복군 지복영 회고록[166] 노태준(盧泰俊)·안춘생(安椿生)·노복선(盧福善)[167] 지달수(池達洙)[168] 이도순(李道淳)·장철(張鐵)·김천성(金天成)·김동수(金東洙)·이해평(李海平)·김성호(金成浩)· 장덕기(張德棋)·김형철(金亨哲)·김용주(金容珠) 등[169] 이범석 장군은 1942년 8월 1일, 참모장 소장에서 지대장 대령으로 예편 후, 1942년 10월 중순 이후부터 시안에 도착하여 제 2지대장을 맡게 된다.#[170] 의무대 여군[171] 여군[172] 민필호 장녀, 김준엽 부인[173] 여군[174] 임정 군무총장 노백린(盧伯麟)장군 둘째아들이다.[175] 여군[176] 철기 이범석 장군 암살미수로 공훈록에 삭제되어있다.[177] 여군[178] 김복신(金福信)[179] 여군[180] 여군[181] 여군[182] 이재현, 한국광복군 제 2지대사, 선인, 2022, pp. 164~165[183] 문서상에선 1942년 8월 1일[184] 이현희, 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일반자료총서 86-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pp. 103~105[185] 국민혁명군 대령[186] 이현희, 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일반자료총서 86-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pp. 287~288[187] 공훈전자사료관 원문사료실 독립유공자증언자료집, 제 1권 김승곤[188] 광복 후, 이범석은 민족청년단을 조직하고 지청천 장군도 대동청년단을 따로 조직하게 된다.[189] 청산리 전투에서의 승리 소식을 접한 이승만은 이후 매년 이범석과 서신 연락을 주고받았고, 선물과 피복을 보내 왔다. 1920년 이승만은 그에게 파커 만년필을 선물로 보내왔는데, "이제는 나도 전 세계를 향해 자랑할 밑천을 얻었소. 청산리 전투의 대승리로 거짓말을 하지 않고도 외교를 펼칠 수 있는 중요한 선전자료를 얻게 된 것이요. 청사에 길이 빛날 대첩을 이곳 동포들과 함께 충심으로 축하하는 바이오."라며 격려하였다.[190] 송호성의 별칭[191] 김현[192] 김경인(金敬寅)[193] 제 5지대 시절 설치된 한청반[194] 태항산 전투 전사자[195] 태항산 전투 전사자[196] 여군[197] 후중난 제 10전구 사령관이 제 34집단군장이었다.[198] 김학규 아내[199] 지청천 총사령관 딸[200] 진경성(陳敬誠)[20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6, p. 207[202] 舊 동북군 제1군단(東北軍 第 1軍)[203] 舊 동북군 제1군단(東北軍 第 1軍)[204] 안후이성 진자이현金寧縣[205]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 만큼 사기꾼이나 가짜 광복군 논란이 많은 곳이 제 3지대이다. https://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14150.html[206] 독립운동사 6 pp.616~620, 김준엽[207] 배여성(裵麗星)[208] 이상일(李想一)[209] 조성산(趙城山)[210] 배경진(裵京鎭)[211] 문수열(文洙烈)[212] 광복군 김문택 수기, 독립기념관 사이트 열람가능[213] 쉬저우와 난징 중간 지점[214] 양일한(楊一汗)[215] 지찬식(智燦植)[216] 최세득(崔世得)[217] 김병학이 부양으로 들어갈 때 협조한 사람[218] 여담이지만, 훗날 장준하가 약산 김원봉에게 가짜뉴스를 퍼뜨리는 계기가 여기서 나오게 된다. 사실 자기가 초모된 제 3지대에 있던 이야기를 약산 김원봉에게 뒤집어 씌운다. 장준하 또한 한광반 출신이니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몇 사람씩 따로 불러다가 술을 사 먹인다든가 혹은 금품으로 매수하는가 하면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 계열에서는 심지어 미인계를 쓰기도 하였다."[296][219] 경식[220] 광복진선[221] 민들레의 비상, 지복영 회고록에 따르면 정정화씨 책에는 노태준씨로 기록되어있는데 임시정부에는 제일 연장자가 대장을 하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222] 중국인[223] 중국인[224] 중국인 여성[225] 중국인[226] 백범 김구의 장남[227] 약칭 : 광복진선[228] 박기성, 나와 조국, 시온, 1984, p152[229] 인면전구공작대 부대장[230] 인면전구공작대의 대원[231] 인면전구공작대의 대원[232] 인면전구공작대의 대원[233] 인면전구공작대의 대원[234] 인면전구공작대의 대원[235] 이현희, 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일반자료총서 86-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문응국 지사 증언[236] 한국 청년 간부 훈련반[237] 폐 우물[238] 정화암, 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 자유문고, 1992, p.216[239] 화암 정현섭의 증언, 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편, 1991, P. 61~63[240] 정화암, 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 자유문고, 1992, p.216[241] 대한민국국회도서관 편, 1974, p. 289~300, <우리 통신> 제 6호(국사편찬위원회 편, 1998, p28)[242] 중령[243] 해평 이재현 한국광복군 제 2지대사, 선인, 2022, p.151[244] 박기성 증언[245] 박기성, 나와조국, 시온, 1984, p159[246] 박기성, 나와조국, 시온 1984, pp. 156~158[247] 해평 이재현, 한국광복군 제 2지대사, 선인, 2022, p.153[248] 중국측 보고서에는 김광구(金光朐)로 표기되었는데, 이하유를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249] 현익철(玄益哲)조카[250] 이현희, 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일반자료총서 86-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문응국 증언[251] 제 5지대 간부들이 투옥 중이거나 충칭으로 전출갔고, 제 1징모분처 출신인 노태준(盧泰俊)·안춘생(安椿生)·노복선(盧福善)이 구대장으로 취임한다.[252] 개편 후, 시안에 있는 2지대 3구대 3분대장 최철과 중첩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기존에 '제 3징모분처'또는 '강남분대'라고도 불렀다. 이소민 제 1지대 2구대장과의 알력다툼으로 인하여 1943년 이후로는 유기석 주임이 대장을 맡아 초모공작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253] 장제스의 핵심부대로 수도 난징에 있어서 중앙군이라 불렀다.[254] 난징일대[255] 김구(金九) 저 ≪백범일지(白凡逸志)≫ 기적(寄跡) 장강(長江) 만리풍(萬里風) 조, 김문호(金文鎬) 제공인 한국광복군 징모처 제3 분처 자료 참조[256] 이규학[257] 김응삼[258] 강치명(姜治明)[259] 엄항섭, 대한철혈남아사방에서 운집[260] 본명은 김응삼, 일명 한도명으로 알려져있는 평북 선천 출신 인물로 1942년 6월에 절감회전(浙贛會戰) 난계역에서 총상을 입고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이규학(이지일)이 동료의 별명을 문서에 적었는지는 모르는 일이다.[261] 나월환 제 5지대장 암살사건은 1942년 3월 1일이었으나 총사령부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7개월 걸렸다.[262] 하지만 제 3분처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출처 : https://search.i815.or.kr/dictionary/detail.do?searchWord=&reSearchWord=&searchType=all&index=1&id=447[263] #[264] 정화암, 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 자유문고, 1992, pp.221[265] 한국광복군 점검 결과에 관한 代電(1943. 7) #[266] 유기석, 삼십년방랑기-유기석회고록, 국가보훈처, p. 305[267] 둘리틀 특공대[268] 전시공작대를 운영하고 있었다.[269]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pp. 440~442[270] 광복군 부위(副尉)[271] 광복군 부위(副尉)[272] 광복군 부위(副尉)[273] 광복군 부위(副尉)[274] 총사령부 부관처 부관(副官)에 임명되었으며, 광복군 대위로서 토교대(土橋隊) 부대장[275] 중국군 소위로 임관했기 때문에 경위대 근무하는 인원들은 부위(副尉)로 일괄 진급한 것으로 보인다.[276] 이현희, 한국독립운동증언자료집(일반자료총서 86-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6, 선우진 지사 증언[277]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9240[278] 정화암, 어느 아나키스트의 몸으로 쓴 근세사, 자유문고, 1992, p.213[279] 산시성(陝西省), 간쑤성(甘肅省),닝샤성(寧夏省)을 말함[280] 1943년 10월 1일 제 3징모분처가 제 2지대 제 3구대 제 3분대로 개편 소식을 듣고 한중합동유격대를 전시공작대로 재편했을 것이다.[281] 김문호가 이끄는 제 3징모분처(제 2지대 제 3구대, 제 3분대), 유기석의 한교전지공작대, 정화암의 전시공작대는 거의 같은 지역에 있어서 공작협조를 서로 같이 해야하는 상황이라서 공훈록이나 국가보훈처 발간 자료를 보면 거의 겹치는 경우가 많다.[282] 뜻을 그대로 풀이하자면 한국교민으로 이뤄진 전투공작대라는 뜻이다.[283] 안휘성 남부지역을 환남이라고 부른다[284] 앞선글, 제3 전구공작대 (징모 제3분처)글 참조.[285] 유기석, 삼십년방랑기 유기석회고록,국가보훈처, 2010, p.305[286] 涇縣 (중국 안휘성 쉬안청시 징현)[287] 유기석, 삼십년방랑기 유기석회고록,국가보훈처, 2010, pp.307~311[288] 이호룡,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 운동의 실천적 지도자 류기석, 역사공간, pp.144~145.[289] 이호룡, 한국의 아나키즘(사상편), 지식산업사, 2001, p.144[290] An Smith[291]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공근의 장남으로 해방 후, 사돈관계에 있던 백범 김구 선생이 안두희의 총탄에 서거를 하자 홍콩을 통해서 북한으로 망명을 한다.[292] OSS 조사분석실 극동조[293] 김근수 (당시 만주 특파 공작원) 및 김세원 증언[294] 일본군 시체를 44열차에 실어가는 그림이다.[295] 김승학, 한국독립사, 제 6부 한국 광복군, p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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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 장준하, 『민족주의자의 길』(박경수, 돌베개, 2003년 8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