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거
1990년 충북 선산에서 발견된 의열도(義烈圖)가 한국 역사상 최초의 만화로 여겨진다. 의열도는 조선시대 초 1745년, 선산의 부사였던 권상하가 지역에 내려오는 각종 이야기를 담은 책인데 서민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일부 이야기는 그림으로 묘사했다. 이 중 주인을 구한 소 이야기를 담은 의우도와 주인을 구한 개 이야기를 담은 의구도는 사실상 4컷 만화로, 그림이 중심이 되는 묘사, 4컷 분할, 기승전결 구조 등 4컷 만화가 갖춰야 할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다만 의열도는 어디까지나 최초의 한국 만화였을 뿐, 다른 작품으로 이어지는 뿌리가 되거나 훗날 한국 만화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현대 한국 만화의 시초라고 보긴 어렵다.
2. 시초 ~ 격동기
1909년부터 1910년까지 대한민보에 게재된 이도영의 삽화가 근대적 한국 만화의 시초다. 일제와 기득권층의 탄압에 대한 풍자 만화였으나 일제의 국권침탈과 경술국치로 대한민보가 폐간되며 연재가 끝났다.
이후 1920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면서 시사만화가 연재되기 시작했고 1924년 멍텅구리 헛물켜키[1]가 인기를 누리면서 4컷 유머 만화가 인기를 누렸다. 1930년대 일제가 시사만화에 대한 탄압을 자행하면서 시사만화의 전성기는 끝났고 그 대신에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신문, 잡지에서도 아동, 유머 만화가 유행을 탔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이 시작된 이후에는 여타 문화계와 마찬가지로 군국주의적 프로파간다 작품이 대세를 이루는 등의 암흑기를 겪었으며 1945년 해방후에 만화행진을 시작으로 만화잡지가 창간되는 등 봄을 맞으려고 하나 싶었지만 6.25 전쟁으로 상당히 초토화되었다. 일제 연간부터 해방 직후까지 이름을 남긴 만화가중에 의외로 화가로 더 알려진 정현웅도 있었는데, 사실 만화가로서의 커리어도 유명해서 해방 초기 한국 만화사 형성에 큰 영향을 준 작가중 하나로도 거론될 정도였지만, 하필이면 전쟁통에 월북하는 바람에 정현웅에 대한(특히 만화가로서) 재평가는 상당히 늦었다. 관련기사
그 후 1950년대 중반의 회복기를 거쳐 만화잡지 - 단행본 시스템의 정착이 시도되었으나 당시에는 열악한 경제환경과 과도한 경쟁으로 인해 자멸하였고, 1950년대 말에 만화노점이 진화(?)되어 만화방이 널리 생겨나면서 독자층이 대거 확대됨에 따라 주류 자리를 차지한 대본소 만화는 1980년대 중반 ~ 90년대 초반에 정점을 찍었다가[2] 지속적으로 쇠락하고 있다. 그리고 대본소 만화 자리를 대신하여 부활한 잡지만화계는 일본식 코믹스 시스템을 그대로 모방했는데 마찬가지로 1990년대 중반에 정점을 찍은 뒤, 청소년보호법 파동과 외환위기, 불법 공유 등의 여러 복합적인 문제로 인해 지속적으로 쇠락해나가고 있는 상황이고 1990~2000년대 잡지만화계의 작가진 또한 2010년대 들어 웹툰으로 진출하고 있는 형태며 그나마 남은 출판만화들도 일본만화의 양식을 모방한 작품들이 상당수다. 이 와중에 인터넷의 대대적인 보급으로 웹툰이 인기를 끌게 되고, 학습만화 또한 급부상함에 따라, 결국 잡지만화가 몰락하여 현재는 웹툰과 학습만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만화가의 대우가 시원치 않고 아직까지도 한국에서 만화라고 하면 그저 어린이들만의 것 내지 비교육적, 저질 문화 등지의 주장을 펴는 사람도 적지는 않다.[3] 또한 만화라고 하면 일본 만화의 영향 때문인지 폭력적이고 잔인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청소년 유해매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사실 만화에 대한 저질시비는 상당히 뿌리깊은 악습이었다. 1920년대 조선일보에 4컷 만화 <멍텅구리> 시리즈를 연재했을 때에 일부 식자층에게 '어른들을 단순 사고만 해대는 바보처럼 묘사하고 미련하게 표현했다'는 식으로 처음으로 만화의 저질성이 지적된 바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비판은 상업 어린이 만화 시대가 도래한 1948년 7월 5일에 발행된 잡지 <백민(白民)[4]>에 실린 수필가 양미림[5]의 글 <만화시비>를 들 수 있다. 전문은 아래에서 설명한다.
신흥예술로서의 만화의 독특한 매력은 오늘날 시사만화를 비롯하여 참으로 광범한 활동의 무대를 차지하고 있다. 특히 그 간소미[6]와 풍자미는 정신발육이 왕성한 청소년들에게 새로운 한 개의 독물[7]로 등장할 만큼 위대한 매력을 내포하고 있다. 해방 후 우리나라의 출판계를 일별[8]해볼 때 거기에는 참으로 놀라울 만큼 이 신흥예술 '만화'의 성행을 찾아볼 수 있으며, 오늘날 적어도 양적으로는 압도적인 전성을 보게 이르렀으니 그 공죄[9]가 응당(당연히)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만화를 문제시할 때 거기에는 '어린이'를 분리해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불가분의 것이 되었으며 그만큼 어린이들이 만화를 욕구하는 것만은 숨길 수 없는 현실적 사업이다. 그러면 그처럼 그들이 욕구하고, 또 출판업자들로 하여금 잘 팔리고 수지 맞는 출판물로 내놓은 이 만화는 과연 어떠한 상태에 있으며 또 어떠한 방향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는가? 우수한 그림으로 된 건전한 만화책의 내용도 없는 바 아니다. 대다수는 무명 신만화가[10]들의 독담[11]한 매우 열[12]한 그림에 불건전한 내용임에 일고[13]를 가하는 동시에 적당한 대책을 강구하자 않을 수 없는 중대 문제다.
이제 여기서 그 작자와 서명(책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는 번[14]을 덜겠거니와 또 도저히 그것이 용이할 만큼 적은 수효의 가짓수가 아니다. 끝으로 결론삼아 몇 가지 만화에 대한 공통된 시비를 요약해 말해보면 첫째로 그 제재가 허무맹랑한 것과 미신적 내지 비과학적인 내용인 점이며 그 위에 또 회화예술의 소양이 매우 부족한 솜씨로 그려진 졸렬한 색채 - 이것은 인쇄에도 다소 책임이 있다. - 제멋대로의 사투리와 한글 철자법 사용 등이다. 감수력이 강렬하고 예민한 청소년들에게 주어지는 더구나 정화[15]가 아닌 만화그림인 즉, 그 저작자와 출판자는 잘 팔리는 데만 정신이 팔리지 말고 모름지기 그 영향의 결과까지를 고려에 넣는 양심적 출판행동을 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만화를 문제시할 때 거기에는 '어린이'를 분리해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불가분의 것이 되었으며 그만큼 어린이들이 만화를 욕구하는 것만은 숨길 수 없는 현실적 사업이다. 그러면 그처럼 그들이 욕구하고, 또 출판업자들로 하여금 잘 팔리고 수지 맞는 출판물로 내놓은 이 만화는 과연 어떠한 상태에 있으며 또 어떠한 방향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는가? 우수한 그림으로 된 건전한 만화책의 내용도 없는 바 아니다. 대다수는 무명 신만화가[10]들의 독담[11]한 매우 열[12]한 그림에 불건전한 내용임에 일고[13]를 가하는 동시에 적당한 대책을 강구하자 않을 수 없는 중대 문제다.
이제 여기서 그 작자와 서명(책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는 번[14]을 덜겠거니와 또 도저히 그것이 용이할 만큼 적은 수효의 가짓수가 아니다. 끝으로 결론삼아 몇 가지 만화에 대한 공통된 시비를 요약해 말해보면 첫째로 그 제재가 허무맹랑한 것과 미신적 내지 비과학적인 내용인 점이며 그 위에 또 회화예술의 소양이 매우 부족한 솜씨로 그려진 졸렬한 색채 - 이것은 인쇄에도 다소 책임이 있다. - 제멋대로의 사투리와 한글 철자법 사용 등이다. 감수력이 강렬하고 예민한 청소년들에게 주어지는 더구나 정화[15]가 아닌 만화그림인 즉, 그 저작자와 출판자는 잘 팔리는 데만 정신이 팔리지 말고 모름지기 그 영향의 결과까지를 고려에 넣는 양심적 출판행동을 해야 할 것이다.
위와 같은 글은 현학적 평론의 대표적 케이스로 꼽힌다. 당시 몇몇 지식인은 어려운 한자어를 써서 학문의 깊이를 넌지시 뽐내는 경향이 있었다. 이런 류의 지식인들 입장에선 만화는 단지 비하의 대상일 뿐이었다. 양미림의 비평은 만화를 청소년 교재의 하나로 보아 학습효과가 큰 만큼 이의 내용은 어른들이 나서 정화를 해야 한다는 소위 계몽주의적 메시지를 드러냈다.
이렇게 만화 내용에 대해 학습논리를 주장하는 시각은 현재 대다수 보수 성향의 기성세대들이 견지하고 있는 대 대중문화관 또는 만화관으로 봐도 무방하다. 또 횡보 염상섭이 그해 연말에 경향신문에 기고한 <만필의 만화시기>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염상섭 선생은 만화매체가 지닌 특징인 허구의 기능성마저 '비과학적, 비민주적'이라고 매도하는 논리를 폄으로써 그의 글 역시 비판을 위한 비판 수준에 머물러 있으나 글을 자세히 살펴보면 단순히 웃고 즐기기 위한 오락으로써의 만화가 아닌 독자들에게 감상과 비평을 할 수 있게끔 하기 위해 작품다운 작품이 만들어지길 희망하고 있음도 나타나 있다. 후술할 일부 내용을 보면 답이 나온다.
만화가나 출판업자는 이 '찾는 만화'를 찾아서 주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보는 만화'가 아니라 '읽는 만화' 즉 '스토리'를 말이다. (중략) 계모, 서모라고 하면 으레 고정된 '타입'이 있다. 그러나 그것을 깨뜨리고 인자한 서모, 적자를 친자식처럼 사랑하고 교육시키는 서모는 못 그려볼까? 참된 건설적 정신은 그러한데서 비롯되는 것이요. 새 한국의 출발점도 거기에 있다. 그러한 만화라면 어린아이보다도 계모와 서모도 눈을 씻고 보게 될 것이다. 질투와 독기, 중상모략 혹은 격투와 강박으로 어린이의 정서를 기르려 하는가?
어찌 됐든 이러한 비판은 만화가 갖는 이해력, 확실한 연상작용 등의 매체적 관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단지 후지게 만든 책이라는 것과 일부 만화의 저질성을 집중 부각하는 단편적 시각일 뿐이다. 문학계의 이와 같은 시각들은 곧 '만화무용론'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또 지식인의 만화 비판에도 이유가 있다. 만화평론가 손상익이 말한 바에 의하면 기존의 활자영역인 문학장르가 신생 문화매체인 만화와 전면전을 폈다는 점이다. 활자매체보다 더 강렬하고 쉽게 이해 가능한 만화가 대중 앞에 나서며 인기를 장악하자 기존 문학인이 이에 거부반응을 드러낸 감도 없다는 해석도 있었다. 물론 당시 사회가 지닌 도덕성이나 규범으로 볼 때 일부 만화가 소설이나 시 등에 비해 다소 과격하거나 선정적이었던 점은 인정하나 이런 소수의 저질은 당시 우리 문학계, 예술계에도 존재했던 것이다. 현재도 일부 보존되고 있는 해방 전후의 만화를 살펴보면, 당시 시중에 나돌았던 3류 연애소설이나 춘화첩에 비해 훨씬 건전한 내용을 담고 있었던 것도 이를 반증한다.
또, 문학계 전반의 만화거부 여파는 우리의 근대 문화사에서 벌어진 일종의 문화충격 현장으로도 해석될 여지가 있다. 기존 보수문화가 인접한 분야의 새로운 대중매체 확산에 대해 충격과 더불어 집단 거부 현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그동안 문학장르가 누려왔던 기득권이 훼손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도 거기에 내포돼 있음은 물론이다. 이들의 만화 비판은 특히 아동문학계 측에서 나타났는데, 주 독자층인 어린이들이 동화책보다 만화를 선호하여 독자층의 상당 부분을 뺏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당시 문학계의 만화 비판은 1960년대까지도 줄기차게 이어지다가 급기야 1961년부터 실시된 관 주도의 만화 사전심의에 이론적 바탕을 만들어낸 것이다. 이들이 비판을 해 대자 김용환 화백 등 몇몇 만화작가들은 이에 반발해 '만화 바로보기'를 위한 논평 작업에 나서기도 했다.
1961년부터 1997년 청보법 제정 전까지 정부의 검열이 주였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YWCA 등 시민/종교단체에 의한 민간 주도 하의 감시가 대두되는 등, 열악한 상황이었다.[16]
만화방 문화가 성행하던 1970~90년대 초까지 아이들이 만화방 가서 만화 보다가 부모님에게 걸려 '너 깡패 되려고 그러냐?'라는 소리를 들으며 얻어맞았다는 내용의 이야기, 장차 커서 만화가가 되겠다는 자녀들과 안정적인 직업을 강요하기 위해 이를 막으려고 했던 부모와의 갈등 역시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이러한 추세는 21세기에도 여전하여, 2013년에도 스페인의 안토니오 알타리바가 만든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이 음란성을 이유로 간윤에서 '청소년 유해매체' 판정을 받았다가 출판사와 원작자의 항의로 재심의에서 유해매체 판정이 취소되었다. 또한 만화방, 도서대여점, 만화카페 역시 2022년 3월 개정 '교육환경보호에 관한 법률' 시행 전까지 PC방처럼 학교 앞 직선거리 200m 내외(상대정화구역)에 못 차리는 유해시설 취급을 받았고, 1999년 개정 이전까지 '풍속영업의 규제에 관한 법률'에 따라 경찰의 단속까지 당한 바 있다.
1980~90년대 이후 오락실, PC방 같은 신종 놀이문화가 만화방의 자리를 뺏어간 데다, 21세기 이후 웹툰이 약진하고 어릴 적 얻어맞으며 만화를 보던 학생들이 청장년층에 편입되면서 게임이 십자포화에 시달리고 있다. 그래도 다행히 게임에 대한 민간의 탄압도 과거에 비해선 아주 많이 약해진 편이다. 과거에는 아이들이 오락실에 가면 똑같이 '너 깡패 되려고 그러냐?' 하면서 신나게 얻어맞고 혼났지만 21세기 들어 PC방 간다고 애들을 이렇게 혼내거나 프로게이머의 꿈을 가로막는 부모는 확실히 줄어들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퓰리처상까지 받은 쥐 같은 작품들을 보면 뭐라고 반응할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 작품의 경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의 유태인 학대를 주제로 하기 때문에 폭력적인 면이 있다. 물론 상당수 인기있는 만화는 폭력성이 어느 정도 들어가 있는 것도 사실. 당장 할리우드에서 영화화 되는 인기 높은 미국 만화부터 드래곤볼과 원나블로 대표되는 일본 만화까지 죄다 폭력성이 들어가 있다.
한편 위의 이유만 내세우며 남 탓만 하고 자신들의 문제[17]를 돌아보지 않으며 징징대기만 하는 만화가들이 많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공장장이라며 까이기는 하지만 대여점 책임론을 역이용한 김성모, 시장이 큰 일본에서 활동하기도 하는 양경일, 임달영, 성인층을 만화로 끌어들이고 드라마/영화화까지 되고 있는 허영만, 윤태호 등 나름대로 돌파구를 찾은 만화가들도 분명히 있고, 웹툰이나 학습만화 같이 부정적인 사회적 인식에서 벗어난 길도 개척되어 왔기 때문이다.
이는 만화가 심도깊은 내용을 담지 못하고 말초적 쾌락만을 추구한다는 편견, 글로 표현하지 못하니까 만화로 표현하고 그 때문에 비교육적 저질매체라는 편견에서 온 것도 크다. 하지만 당연히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앞서 언급된 쥐를 비롯해 맨발의 겐과 같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만화들도 많이 존재하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성공한 작가 중 한명인 이외수의 경우에도 만화 형식의 소설을 낸 적이 있을 정도. 고바우 영감이나 장도리같이 사회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시사만화들도 만화의 형식을 하고 있다. 애초에 만화는 예술의 표현 형태 중 하나일 뿐이다. 글로 풀어 쓰면 문학이고 그림과 글을 곁들이면 만화가 되는 셈이다. 당연히 각자의 장단점이 있지만, 어느 형태의 예술이 더 천하고 모자라다는 말엔 정당성이 전혀 없다. 지금은 고급 예술 중 하나인 뮤지컬도 과거에는 오페라에 비해 천한 예술로 여겨져 천대받았고, 영화도 등장 초기에 천대받았다. 심지어 소설도 천대받았다. 하지만 과거 천대 받던 이런 장르/매체의 예술 작품들은 21세기 들어 향유해도 부끄럽지 않고 오히려 격식있는 예술이 되었다. 예술과 문화를 향유하고 즐길 때에는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 즐기는 자세가 필요하며, 좋은 작품을 통해 사회에 팽배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해소하려는 만화가들의 노력 또한 이어져야 한다.
도서대여점 등에 의해서 만화시장이 침체중이라는 말을 하는데 물론 출판만화업계는 계속해서 위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웹툰과 학습만화가 그 빈틈을 메울 정도로 잘 나가고 있으며 시장 규모를 놓고 보면 한국의 만화 시장 규모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거대 매체다.
2003년부터 프랑스에서도 관심을 받기 시작하고 있으며, 만화축제 중 하나인 앙굴렘 국제만화제에서 한국 만화가 소개되고 있고 한국 만화 특별전에도 초청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이렇듯 세계적으로는 만화가 재미있는 오락 매체로 여겨지지만, 문화 예술 분야에서는 세계적으로 봐도 인기와 명성이 기존 오락 매체에 비해선 낮은 편이다. (프랑스에서는 만화가 제9의 예술이라고 하긴 한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오덕과 대중, 예술 3가지를 포괄하는 접점으로서 가장 광범위하게 보급된 문화라 할 수 있다. 애니메이션만 해도 보는 사람이 한정된 편이지만 만화는 이른바 '일반인'들도 부담없이 가볍게 볼 수 있기 때문에 많이 즐기는 편이다. 게다가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이 담긴 만화도 늘어나면서 과거와 달리 무작정 나쁘게 볼 수가 없어진 것이다. 특히 만화가 영화, 드라마, 예능 등에 원작으로 사용되면서 이런 인식은 점차 좋아지고 있다. 잘 팔리고 인기를 끄는 작품들은 상업성에 치중한 편이긴 하지만, 예술성에 치중한 만화 또한 계속해서 제작되고 있다. 오늘의 우리만화상이나 부천만화대상 등 한국만화의 작품성에 대한 담론 또한 이어지고 있지만, 아무래도 영화 등 타 대중예술에 비해 상업성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팽배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3. 검열과 탄압
- 국가 탄압 검열 관련 사건들은 만화 검열제, 경무대 똥통 사건, 정병섭군 자살사건, 청소년보호법, 간행물윤리위원회 참조.
- 시민사회(NGO), 여성계, 기독교계의 간섭 관련은 YWCA, 여성가족부 참조.
- 만화탄압 관련 일지는 대한민국/문화 규제와 탄압/일지 문서 참조.
- "악서를 배척하여 사회풍기 순화하자"(현수막)
4. 불법공유와 대여점 문제
- 불법공유 관련은 스캔본 문서 참조.
- 대여점, 출판만화 관련은 대여점 책임론, 만화가들의 절규, 열혈강호 인터뷰 사건 참조.
5. 출판만화 시장의 붕괴와 변화
출판만화는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정부의 탄압이나 욕지거리되는 신세였고 특히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에 걸쳐 사회적 지위는 물론이고 만화계 내부에서조차 합동출판사의 독점체제가 구축되고 그 기간 동안 발어진 전횡으로 인해 만화가들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어려움에 붕착했다. 물론 이때는 비단 만화만 탄압받았던것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사회적 입지는 어느정도 있었던 소설이나 신문, 가요, 여론관리용으로 매우 유용했기 때문에 정부가 특별히 신경썼던 라디오나 텔레비전같은 방송부문 등과는 다르게, 다르게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이 주로 즐기는 오락거리였다는 점때문에 부모들로부터 시선도 좋지 못했다. 물론 이 당시 만화방 자체는 호황이었지만 이것도 정병섭군 자살사건으로 한 동안 된서리를 맞는 등 사회적인 입지가 좋지 못했다. 이후로 독점체제가 깨지면서 이전보다는 사정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검열에 시달리는것은 매한가지였고 검열제도가 완화되는것은 타 부문과 마찬가지로 1987년 6월 항쟁 이후의 일이었다. 한 편으로 1982년에 보물섬이 창간되면서 독자적인 만화잡지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고, 이후로 만화광장, 르네상스, 아이큐 점프, 소년 챔프의 잇따른 창간으로 일본식 단행본 시스템이 도입되었으며, 기존의 만화방을 제치고 1990년대 초중반에는 굉장한 호황을 누렸다.[18]그러나 1990년대 중반에 만화잡지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기 시작했고 1997년 청소년보호법 파동으로 분위기가 본격적으로 저물기 시작했고 급기야 IMF 외환위기가 겹치면서 만화 전반에 대한 투자가 위축되었고, 출판사들도 일본 대중문화 개방과 함께 더욱 활발히 일본만화를 출간하였으며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불법 다운로드가 성행하게 되었다. 물론 90년대 만화잡지 시장을 주도한 대원씨아이는 애니원을 만들거나 지속적으로 여러 애니메이션을 제작했고, 서울문화사는 시사저널을 인수하는 등[19] 그 동안 쌓아올린것은 많았기에 당장 몰락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튼 투자위축과 인터넷의 보급으로 만화잡지의 발행부수가 급속히 저하되기 시작한것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이 때문에 당대의 만화가 상당수가 설자리를 잃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물론 학습만화와 웹툰이라는 대안이 있었지만 학습만화는 아무래도 본격적인 창작만화에 비해서 격이 낮다는 인식이 만화계에 펼쳐있었고, 웹툰은 시장이 제대로 형성되기 이전인지라 수익성이 불투명했다. 물론 파페포포 메모리즈, 스노우캣. 일쌍다반사 등이 인기를 크게 끌면서 웹툰의 가능성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웹툰 연재 시스템을 갖추워지기 시작한것은 2003년 다음 웹툰 서비스 시작이 시초로 여겨지는 만큼 아직은 모험성이 너무 강했던 탓이었다.
이 때문에 만화계가 침체기에 빠지면서 상당수의 만화가 지망생이 게임계(게임원화가)로 이직했다. 하지만 너무 많은 인원이 게임계로 몰려서 새로운 헬게이트를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상황이 게임업계의 전성기에 일조하였다. 만화가 지망생이나 관련학과 졸업생들 중 상당수는 원화가로 이직하였고 그 중 일부가 다시 3D 그래픽 디자이너나 기획자, 게임 애니메이터 등으로 전직하였다. 물론 게임업계 인원이 전체 만화 관련 인물은 아니다. 프로그래밍은 IT, 전산학과 관련 사람들이 많고 기획자 중에는 문과출신, 장르소설 관련 사람들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임 인력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그래픽군이고 그 중 상당수는 만화에 한 다리(관련학과, 취미) 걸치지 않은 사람이 적다. 때문에 만화계, 게임계에선 여성가족부나 YWCA, 정부 정책에 상당히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6. 내부의 위기
사실 한국 만화 망했다만 연발하는 건 만화업계에 도움이 하나도 안 된다. 망했다는 소리 듣고 기분나빠 할 사람들은 결국은 정부나 대여점 주인들이 아니라 업계인들이라는 것이다. 어떻게든 한국에서 만화 그리겠다고 노력하는 사람들 옆에서 한국만화는 이미 끝났다라고 초를 처봤자 양적인 변화는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한국 만화의 몰락에 대해 대여점이나 문화검열에만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저것들이 한국 만화에 중대한 타격을 주긴 했어도 그것만이 몰락의 이유는 아니다. 해적판과 공장만화를 양산한 출판사들, 최소한의 작가정신도 결여되어 한국만화를 싸구려로 만든 만화가들, 만화를 '상품'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독자, 실용성은 밥 말아먹은 만화교육기관 등도 한국 만화의 몰락에 충분히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더불어 시장경쟁이 비교적 투명해진 21세기에 들어서도 메인 작가의 주도 하에 고료 분배 문제나 공동 참여 작가의 명의를 빼버리는 경우도 왕왕 있는 판국이니…[20]
시장 문제를 어느 하나로만 설명하는 건 엄청난 오판. 애초에 규제만이 원인이라면 규제는 완화되었지만 시장 자체는 옛날에 비해 확실히 줄어든 21세기의 한국 만화 시장이 설명되지 않는다.
세계 만화시장 규모가 2013년 75.34억 달러를 정점으로 이후 계속 감소하고 있는 추세로 이는 디지털 만화의 급성장에도 불구하고 시장점유율이 높은 인쇄만화시장의 매출 하락을 상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만화는 빠르게 디지털 만화(웹툰)으로 전환이 일어나면서 시장감소를 더욱 빠르게 겪었고 기존의 악재와 겹치면서 악역향을 크게 보였다는 추론도 있다.
7. 웹툰 시장 성장과 코믹스 시장 대붕괴 및 몰락
2000년대 중반부터 무너진 출판만화 시장의 빈틈을 뚫고 웹툰이란, 1. 공짜에다 2. 짬내서 보는 3. 폰으로 볼수 있는 웹툰 플랫폼이 한국의 만화계를 크게 부흥시키고 있다. 네이버와 다음이라는 양대포털사에서 웹툰을 연재하고 있기 때문에[21] 웹툰작가는 한국의 웬만한 유명인 수준이 되었다. 출판만화 작가들은 서서히 웹툰으로 연재처를 옮기고 있고, 학교나 사회에서는 무슨 웹툰을 보는지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웹툰은 이제까지 있었던 출판만화 시스템과 구별되는 것이 많다. 작가우선체제, 연재의 자유로움 등 여러가지 장점이 많으며, 무엇보다도 골 아픈 스캔본 문제를 쿨하게 씹어버리고 무료로 읽을 수 있으며 광고비와 조회수를 통해 비교적 공정한 수입 분배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외국의 웹코믹과는 매우 다른 특성과 그 특성을 살릴 수 있는 포털 사이트의 시스템 구축으로 시너지 효과가 생성되었다. 또한 여기서 인기를 얻으면 단행본을 비롯한 파생 상품까지 나오는 상황이다.
물론 웹툰 시장에는 고질적인 문제가 아직 남아 있다. 입문이 쉽다는 점으로 인해 퀄리티가 떨어지는 작품의 범람이라든지, 장점이자 단점인 연재에 대한 전문적인 편집과 고려가 부족한 1인 체제 등 앞으로의 문제점은 산재해 있다. 그러나 이는 시간을 두고 볼 문제고, 이러한 단점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가 한국 웹툰 시스템의 특수성에서 기인하는 것이니 한국의 만화 시장의 미래엔 청신호가 켜졌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웹툰은 최소한 앞으로 한국 대중문화 중 아주 대표적이고 대중적인 매체 중 하나로 뿌리를 박고 있는 상황이다.
아이러니한 건, 위에 있던 검열과 탄압 등 격동적인 현대사로 인해 만화방은 1990년대 이후로 쇠락하고 잡지만화는 체제가 구축된지 10여년도 안되어 쇠락하는 등 기존 출판만화 생태계가 빨리 무너졌다는 점이 다른 나라보다 10년 이상 빨리 디지털 만화 플랫폼이 정착되게 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 이 기반 위에서 라인과 카카오의 두 기업은 전 세계 디지털 만화 시장을 선도하는 중으로 라인은 네이버 웹툰, 카카오는 다음 웹툰과 카카오페이지를 운영한 경험을 적극적으로 할용했다.
출판만화에서 활동하던 기성작가들의 경우 고질적으로 뛰어난 작화실력에 비해 좋은 스토리텔링 능력이 부족하다는 문제점이 크다. 그래서 일본 쪽으로 진출하는 작화가들도 많은 편. 입시만화나 만화학과가 주로 작화가 양성에 초점을 맞추는 편이라 빠른 시일 내에 개선되기는 어려운 문제일 듯하다.
한국 디지털만화 시장 규모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점차 성장해 해외에서도 인지도를 점점 쌓아가고 있는데, 해외에서 일본 만화를 'Manga'라 일본어 발음 그대로 읽듯이, 한국 만화를 'Manhwa'라 한국어 발음 그대로 일컫는다. 그런데 중국 만화도 마찬가지로 발음 그대로 'Manhua'라 읽어서, 이따금 헷갈려 하는 경우도 나타난다. 표기는 다르지만 발음은 거의 똑같기 때문이다.
[1] 참고로 독립운동가 안재홍도 멍텅구리 헛물켜기의 글 작가를 맡은 적이 있다.[2] 왜 1970년~80년대 중반이 전성기가 아닌지는 합동출판사, 만화 검열제 항목 참조. (한마디로 질적으로 60년대 초반보다 후퇴했기 때문)[3] 이는 후술할 1948년 양미림의 <만화시비>와 같은 문인들의 만화 비판을 비롯해 권위주의 독재정권의 만화탄압, 정병섭군 자살사건 등이 원인이다.[4] 1950년에 <문학>으로 개명.[5] 6.25 전쟁 때 북한군 치하에서 부역 활동을 하다 서울 수복 이후 북으로 피신해 현재 행방불명 상태이다. (참조.)[6] 簡素美. 간단하고 소박한 데서 비롯되는 아름다움.[7] 讀物. 한 마디로 '읽을 거리'를 뜻한다.[8] 一瞥. 한번 흘끗 훑어 본다는 뜻.[9] 功罪. 공훈과 죄악.[10] 無名新漫畵家. 무명 신인 만화가를 이르는 말인 듯.[11] 獨擔. '꽉 채운'이란 뜻.[12] 劣. '열악하다'는 뜻.[13] 一考. '고찰한다'는 뜻.[14] 煩. 번거로움.[15] 正畵. '바른 그림'이란 뜻.[16] 하지만 일각에서는 YWCA가 만화/애니에 영향을 준 게 없다고 하는 주장하기도 한다.[17] 질적 부족, 시대 변화에 도태[18] 그러나 이 당시에 애니메이션 쿼터제가 없었던 시절이고 애니메이션 투자도 극장판에 집중된데다가 연재된 만화가 어린이 드라마나 청소년 드라마, 어린이 영화 등으로 활발히 제작되지 않은관계로 미디어 믹스 시스템 정착까지는 되지 못했다. 아니 이건 이탈리아나 대만같은 다른 나라들도 마찬가지지만[19] 물론 시사저널은 나중에 편집권을 침해하는 병크가 일어나면서 인원들 다수가 시사인으로 빠졌고, 그 이후로 그저그런 중견잡지가 되었다.[20] 전진석 작가와 윤인완 작가, 핑크레이디 그림작가 은폐사건 등 문서 참조.[21] 다만 듣보잡 사이트나 신문사에 연재되는 경우도 있고 이전에 파란이나 야후, 엠파스등에서 웹툰이 연재된 적도 있지만 사이트가 망해버려서 붕떠버린 상황이고, 현재도 네이트 등에서 웹툰이 연재되고 있지만 듣보잡인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