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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코르시카 공화국 국기.svg
코르시카 공화국의 국기에 있는 무어인 그림
1. 개요
Moors좁은 의미로는 중세 이베리아반도에 거주하던 무슬림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만 이들이 대부분 현대 모로코를 비롯한 북서아프리카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넓은 의미로는 이베리아반도로 이주하지 않고 남아 있던 사람들까지 전부 '무어인'이라고 한다. 어원은 로마 제국 시절 북서아프리카를 가리키던 말인 마우레타니아.[1]
크게 아마지그인과 흑인[2][3], 이주민인 아랍인으로[4] 구분되지만 유럽인들은 이들을 크게 구분하지 않고 그냥 통틀어 무어라고 불렀다. 이슬람 세계에는 '무어'에 해당하는 말이 없었으며 북서아프리카 지역은 마그레브, 이베리아 지역은 알 안달루스(안달루시아의 어원)라고 불렀다. 현대에서는 아랍인+베르베르인 혼혈인을 나타낼 때 쓰인다. 하라틴인이라고도 한다.
2. 역사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무슬림의 시칠리아 침공(827년)으로 유입되기 시작하였는데 시칠리아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반도 일부까지 점령하여 바리 토후국 등이 세워지기도 하였지만 동로마 제국 원정군, 노르만인의 침공으로 인해 11세기 말에는 남부 이탈리아의 토후국이 모두 멸망했고 13세기 중반에 무어인을 추려내 추방함에 따라 이 지역에서는 무슬림들을 볼 수 없게 되었다.이베리아반도에서는 711년 우마이야 왕조의 침공으로 이슬람 국가가 세워졌으며 이후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거주하던 아랍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하여 8~12세기까지 번영을 누렸다. 물론 많이 이주해와도 당시 해운능력으로 그렇게 많은 인구를 수용하기 힘들었고 무엇보다 중동-마그레브 지역의 정치가 불안정해서 항로-육로 등 연결로가 위태로웠다. 그래서 인구에서 토착 이베리아인에게 열세였지만 우마이야조의 특징인 아랍인 최고 우대정책에 의해 한줌이었던 이들이 기득권층으로 떵떵거리면서 높은 영양상태와 생활수준으로 많은 자식을 부양 가능했고 낮은 영아사망률과 확실한 혼처로 현지에서 인구수가 폭발적으로 불어났다.[5]
하지만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레콩키스타로 인해 점차 밀려나기 시작하여 마지막에 남아 있던 무어 국가인 그라나다 토후국이 1492년에 멸망하였다. 17세기 초에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무어인들까지 추방해서 흔적을 지우려고 했는데 성공했는지는 의문이다. 추방이 이루어진 적이 없는 지역도 있고 먼 길을 돌아 다시 돌아온 비율도 높으며 지하에 숨어서 추방을 면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탄압으로 인해 몰래나마 유지하던 신앙이나 언어를 보존할 수는 없었고 완벽하게 스페인인과 동화되었다.
몰타는 열강의 각축장을 거쳐 현재는 사실상 가톨릭 국가가 되었지만 이슬람 세력 지배의 영향으로 토착언어가 사라지고 유럽 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아랍어 방언 끝판왕인 셈계 몰타어를 쓰는 국가가 되었다.
15세기 말-16세기에 걸쳐 강제추방당할 무렵 무어인들은 이베리아반도에 이미 눌러붙은지 800년이 넘었고 이들이 고향으로 인식했던 곳은 당연히 그라나다, 발렌시아, 세비야 같은 비옥한 남부 스페인의 도시들이었지 척박한 북아프리카가 아니었다. 언어와 종교는 같아도 대부분 이베리아 무어인들은 주로 도시민, 정주 농경 민족으로서 베르베르 유목민들의 영향력이 강했던 현대 모로코와 알제리 일대 마그레브인들과도 정체성이 어느 정도 분화되었고 연고도 크게 없었던 상황이라 해적들이 뭐 같은 종교인들이라고 봐주는 사람들도 아니고 강제추방 과정에서 수많은 무어인들이 사기나 약탈을 통해 노예로 팔려나갔다. 이런 수난을 겪으면서 어찌 그래도 마그레브나 오스만 제국에 정착한 무어인 난민들은 먹고 살길도 막막해졌겠다 바로 그 악명 높은 바르바리 해적단에 대거 가입하는 걸로 자신들을 추방한 통합 가톨릭 스페인에 대대적인 복수를 가했다. 중세 이탈리아, 이베리아 반도 지중해 기독교 국가들의 해군력 증강으로 인해 좀 잠잠해지는 듯 싶었던 서지중해 마그레브 해적들은 무어인 추방으로 인한 인력 유입이 동시대 오스만 제국의 후원과 시너지 효과를 내어 그 숫자와 활동 규모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인적자원 측면에서도 당시 추방당한 무어인들은 현지 카스티야어, 카탈루냐어도 대부분 능숙하게 구사했고 현지 지리도 빠삭하며 심지어 많은 경우에는 추방 이전 현지인들과 이웃으로 교류하면서 어느 해안가 마을엔 누구네 집안이 몸값 비싸게 받을 수 있는 유지니, 경계가 느슨한 수확철은 몇월 며칠이니 이런 식의 농밀한 현지 사정에도 훤한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근대적 사회 통제 기술, 수단 발전 이전 전근대 국가의 사회 통제력의 한계란 어쩔 수 없는지라 같은 마을에서도 어떤 무어인 집안은 얄짤없이 강제추방당한 반면 그 사촌 집안은 적절한 타이밍에 성공적인 기독교인 코스프레+연줄과 지역 정치[6] 덕분에 여전히 남아 있는 등 실제 현지에선 영 어설프게 집행된 사례도 흔했다.
이러다보니 바르바리 해적 습격이 집중된 발렌시아 해안 마을 같은 지방들의 종교재판소와 시립, 지역 민병대의 기록을 보면 해적 단원들이 평소에는 아예 그냥 현지인인 척 숨어 지내다가 미리 약속 잡은 거사일이 되면 마을 봉화를 끄거나 파발마를 암살하는 식으로, 깊은 내부침투와 호응 없이는 불가능한 정교한 작전을 짜서 털어먹는 등 그 활동의 규모와 심각함을 알 수 있는 기록이 여럿 남아있다. 안그래도 흑사병과 이탈리아 전쟁이 대표하는 중세말-근세 유럽의 정치구도 재편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던 서지중해 이탈리아, 이베리아 해양세력들에게 이렇게 정교하고 치밀해진 대규모 해적 창궐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치명타였고 같은 시대 대서양 무역이 열리면서 장기적으로 지중해 무역의 몰락과 유럽 세계의 정치경제적 중심지가 대서양 북방으로 이동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
3. 현대
현대의 모로코와 알제리, 튀니지, 몰타, 모리타니, 사하라 아랍 민주 공화국 사람들이 중세 무어인들의 후예라고 볼 수 있다.물론 남부 스페인인, 남부 이탈리아인들은 유럽 지역에서 가장 북아프리카인, 세파르딤 유대인과 유전적으로 가까운 것이 사실이다. 수백년 동안 부대꼈는데 통혼이 안 이루어졌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사람들의 외관도 그렇고 북아프리카인들이 사용했던 언어인 아랍어와 베르베르어의 영향은 현대 스페인어에도 상당하다.
현재 스페인은 레콩키스타 이후 추방된 유대인들의 후손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고 있는데 이에 모로코 사람들이 "우리들도 추방당한 무어인의 후손이다!" 라고 들고 일어나 시민권을 요구하고 있다.[7]
스페인 현지에서 무어인이란 뜻의 단어인 moro는 학술적이거나 문화 관련된 문맥이 아니라 일상 사회에서 저 무어인 본인들(...)인 모로코를 비롯한 북아프리카인들을 일컬 때는 주의하여 사용해야 하는 단어이다. 일단 가깝다 보니 현대 스페인은 웬만한 대도시 어딜 가던 상당한 규모의 모로코인 커뮤니티가 눌러앉아 있고 프랑스나 영국, 이탈리아 같은 다른 유럽 나라에 비하면 스페인은 덜 시끄러운 편이긴 하지만 현대 서방 국가 어디에 가든 어느 정도는 존재하는 다문화 사회에 대한 불안감, 역사적 불신, 질시 같은 정서도 당연히 있다.
특히 스페인의 모로코인들은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한일관계가 속편해 보일 만큼 서로 불편하면서도 깊숙하게 공유하는 점도 많다. 모로코인들 입장에서 스페인은 조상들의 원수이자 문화와 종교의 박해자이지만 동시에 사막화, 마약, 인신매매, 국경 단속 같은 거대한 국제적 사회 문제 해결에 있어서 꼭 필요한 파트너이고 스페인 입장에서 모로코는 태고적 숙적이었던 것만으로도 모자라 스페인 내전 당시 국민진영의 첨병으로 스페인의 노동자, 농민들을 잔인하게 유린했지만 동시에 스페인의 제국주의적 야욕의 피해자이기도 하고 북아프리카 무슬림들이 남긴 문화, 문명적 족적은 부정적으론 '피레네 이남 아프리카론'의 근거가 되기도 했지만 긍정적으로는 나머지 유럽과는 온전히 다르게 스페인'만'의 이베리아 문화를 형성한 선조'들' 중 하나이기도 하다.[8]
이런 복잡 미묘한 관계에 따라 스페인, 포르투갈 현지에서 무어란 단어는 중장년층은 아무런 문제 의식도 없이 여전히 종종 쓰지만 정치적 올바름이나 사회적 차별 등에 민감한 유년층과 스페인의 북아프리카계 이민자들 본인들은 거부한다. 학술서, 관광 가이드 서적 같은 인쇄물에서도 최근에 출판된 물건들은 moro란 단어보다 andalusí, mudéjar, árabe 같은 구체적인 고유 명사로 이동하는 추세다. 그러나 이베리아 무슬림들도 역사적으로 여러 소집단으로 분열, 독자적 정체성을 형성해 왔는데 '안달루시'란 단어는 문맥에 따라 역사적 알안달루스냐, 현대 행정구역인 안달루시아 자체냐 의미가 변할 수가 있고 중간에 낀 무데하르란 단어는 건축이나 미술 분야에서나 쓰이는 대중성이 없는 학계의 고유 명사에 가깝다. 그나마 보편적인 게 걍 '이베리아 아랍'이란 수식어인데 이것도 당장 아랍인과 베르베르인들의 대립은 주요 타이파들의 흥망성쇠와 지역 정치 역학에 엄청나게 중요한 갈등 요소였음을 생각해 보면 분명 종교는 같아도 아랍인들과 명백히 다른 공동체적 자의식과 지역적 차이를[9] 보였기 때문에 이베리아 무슬림 문화를 '아랍'문화로 퉁치는 건 역사 왜곡이다.
아랍인과 베르베르인의 갈등은 후우마이야 왕조 설립 이전의 일로, 후우마이야 왕조에서는 대거 슬라브 노예(아랍어로 Saqaliba, صقالبة) 군인들의 유입으로 인해 아랍인을 대체해서 베르베르인과 함께 군부의 두축으로 자리잡았고 중동의 투르크인들처럼 이들이 곧 안달루스의 지배자가 되었다. 실제로 타이파 시기의 국가들은 절반 가까이가[10][11] 슬라브 계열이 세운 것이고 비슷한 숫자가 베르베르계, 그리고 소수만 아랍계였다.
때문에 '모로', 즉 '무어인'이란 단어가 현대 정서에는 안 맞고 비하적 명칭으로서의 전통이 길다는 걸 알면서도 딱히 대체 용어가 없다는 이유로 존치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이 남긴 유명한 건축물은 알함브라 궁전뿐만 아니라 이베리아반도에 무수히 남아 있다.
서북아프리카 일대의 모리타니에는 백인계에 가까운 무어인인 베이단인(Beidane)들이 있는데 모로코와 서사하라에도 일부 거주한다.
3.1. 모리타니의 무어인
모리타니의 무어인, 이른바 하라틴인(Haratin)은 중세 무어인과 약간 다른데 주로 베르베르인과 아랍인, 흑인의 혼혈인을 지칭하는 말이다.
4. 번외: 스리랑카의 민족
스리랑카의 무슬림 집단. 대부분 타밀족이다. 대항해시대 포르투갈인들은 남아시아나 동남아시아에서 만나는 무슬림들을 관습적으로 다 모루(무어인)라고 칭했는데 스리랑카 해안지대에 거주하던 무슬림들을 공격, 정복한 후 이들을 무어인이라고 부르던 것이 관례화되어 뒤이어 들어온 네덜란드, 영국 등도 이들을 스리랑카 무어라고 불렀다. 스리랑카 현지에서는 무어라고 잘못 말하다가는 큰일나고 타밀어로 இலங்கைச் சோனகர்(일란카익 코나카르), 싱할라어로는 랑카 요나카라고 부른다.5. 관련 문서
- 칼리파를 지도자로 삼았던 이슬람 왕조들
- 정통 칼리파 시대
- 아바스 왕조
- 파티마 왕조
- 우마이야 왕조의 이베리아 침공 (711 - 732)
- 후우마이야 왕조 (756 - 1039)
- 군소 이슬람 왕조(타이파)들의 난립 (1039 - 1085)
- 무라비트 왕조 (1085 - 1145)
- 무와히드 왕조 (1147 - 1238)
- 마린 왕조 (1215 - 1465)
- 나스르 왕조(그라나다 왕국) (1238 - 1492)
- Moorish Cavalry
- 사흐라위인
[1] 모리타니란 국가 이름과 어원이 같다.[2] 모두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잡아오거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부족들과 왕국들의 노예상들에게 사온 노예들이다.[3] 그래서 무어인 캐릭터가 등장하는 의적 로빈후드에서 흑인인 모건 프리먼을 무어인으로 캐스팅할 수 있었다.[4]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거주하던 아랍인들이다.[5] 이런 현상은 전근대 지구 역사 어디에서나 끊임없이 반복되어서 한줌의 지배층의 혈통의 기여율이 높고 한줌의 침투민족의 숫자가 폭증하는 형태로 반복된다. 더군다나 이슬람은 일부다처제를 허용해서 현지 인구펌핑이 쉬웠을 것이다.[6] 주로 중세 말 카스티야가 직접 정복, 재정착한 현대 안달루시아 일대는 무어인 박해에 지역 관민이 합심해서 나섰던 반면 통합 이전 아라곤 왕국령 발렌시아, 무르시아 같은 지방에선 오히려 대귀족 같은 강력한 토착 정치세력들이 종교재판소와 왕실이 주도하는 무어인 추방에 반발하고 지역 무어인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아라곤 쪽이 딱히 더 착하거나 관용적이었다기보단 이 일대는 기본적으로 재정복 자체도 13세기 정복왕 차이메 1세 시대에 비교적 일찍 이루어져 사회 구조도 더 안정적으로 자리잡았고 무엇보다 중세 카탈루냐-아라곤 왕국 자체가 활발한 지중해 해상 무역국가였던 만큼 흑사병에 의한 타격도 카스티야보다 훨씬 심하게 받아서 종교도 덜 가릴 만큼 지역 영농 인구 확보 자체가 절박했기 때문이다.[7] 이베리아반도에서 추방당한 무어인들이 가장 많이 정착한 곳도 오늘날의 모로코 지역이다.[8] 이 때문에 토착 스페인인들과 모로코계 스페인인들은 스페인의 정체성에 대해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이러한 논쟁에서 전자가 무어인들을 몰아내고 서고트 왕국 시절의 가톨릭 문화를 되찾은 걸 강조하는 반면 후자는 스페인 문화에 많이 남아있는 무어인의 흔적을 강조한다.[9] 현대 아라곤, 카스티야 라만차 지방에 자리 잡아서 기독교계 왕국들과 전면적으로 경계를 닫은 타이파들은 대부분 베르베르계였다.[10] 바다호스 타이파, 데니아 타이파, 알메리아 타이파, 마요르카 타이파, 발렌시아 타이파[11] 출처: https://en.wikipedia.org/wiki/Taifa_of_Badajoz, https://en.wikipedia.org/wiki/Taifa_of_D%C3%A9nia, https://www.wikiwand.com/en/Taifa_of_Almer%C3%ADa, https://ballandalus.wordpress.com/2015/08/03/the-taifa-kingdoms-ca-1010-1090-ethnic-and-political-tensions-in-al-andalus-during-the-11th-centu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