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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트뤼포

프랑소와 트뤼포에서 넘어옴
프랑수아 트뤼포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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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çois Truffaut
프랑수아 트뤼포
파일:mw58ㅓ덛756.jpg
본명 프랑수아 롤랑 트뤼포
François Roland Truffaut
출생 1932년 2월 6일
프랑스 제3공화국 파리
사망 1984년 10월 21일 (향년 52세)
프랑스 뇌이쉬르센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직업 영화감독, 영화 평론가, 배우
신체 167cm
배우자 마들렌 모겐슈텐 (1957~1965)
파니 아르당 (1981~1984 / 사실혼)

1. 개요2. 생애3. 필모그래피
3.1. 주요 작품
4. 매체5. 여담6. 말말말7. 외부 링크

[clearfix]

1. 개요

파일:external/www.bfi.org.uk/fahrenheit-451-1966-002-francois-truffaut-on-set-1000x750.jpg
프랑수아 트뤼포가 영화사상 최고의 감독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가 영화사상 가장 영화를 사랑한 감독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1]
정성일
프랑스영화감독, 영화 평론가, 배우, 작가. [2]

누벨바그의 핵심 인물로, 역사상 가장 대표적인 시네필 중 하나이며, 또한 영화사에서 '작가주의'라는 사조를 널리 퍼뜨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카예 뒤 시네마》를 중심으로 영화계 다방면에서 활약했다.

2. 생애

일명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 혼신을 바쳐 영화를 사랑한, 불꽃 같은 삶을 살았다.

1932년, 방탕한 파리 여인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트뤼포는 스스로 불행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고 회상했다. (계부를 아버지로 생각했다고 한다) 친부는 한번도 만난적이 없지만, 알고 있었다. 사립탐정을 고용해서 알아냈는데, 바욘 출신 유대인 치과의사었다고 한다. 몰래 뒤를 밟아 그의 집까지 가보기는 했지만, 결국 마음을 돌리고 극장에서 찰리 채플린의 〈황금광 시대〉를 구석에서 봤다고 한다. 그의 아내 말에 따르면, 계부를 존중하는 차원에서 만나지 않았다고.

10대의 트뤼포는 계부의 타자기를 훔쳐서 번 돈으로 영화클럽을 조직하고 운영했다고 한다. 10대에 그는 양아치와 같은 삶을 지냈는데, 소년원까지 들락거렸다고 한다.[3] 이때 그를 딱하게 여긴 상담원이 앙드레 바쟁을 소개시켜줬고, 이후 트뤼포는 방황을 접게 된다. 그는 앙드레 바쟁의 후원을 받으며 자랐고, 트뤼포는 바쟁을 아버지처럼 여기며 많은 것을 배웠다. 이 후원의 영향인지, 트뤼포도 나중에 커서 장 피에르 레오(400번의 구타 주인공)를 후원했다.

나중에 군대에 가서 사이공(현 호치민)에 갔지만, 탈영해서 영창까지 갔다. 이 경험 때문인지, 프랑스 군대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살았다. 프랑스군이 악랄하게 나온 페이크 다큐멘터리알제리 전투 (La batalla de Argel, 1965)〉가 이탈리아 베니스 영화제 대상인 황금사자상을 받자, 장뤽 고다르를 비롯한 많은 프랑스 영화인은 말없이 퇴장하던 반면, 트뤼포만 혼자 남아 박수까지 치며 축하해준 적이 있다. 또한 '반전(反戰) 영화 같은 건 없다'라는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1984년, 뇌종양 진단을 받은 후 별세했다. 향년 52세.

3. 필모그래피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 장편 연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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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링크 열기
연도 제목 연출 각본 제작 출연 비고
1955 Une visite O O 단편
1957 개구쟁이들
Les mistons
O O 단편
1959 400번의 구타
Les quatre cents coups
O O O O 장편 데뷔작, 앙투안 드와넬 5부작
1960 네 멋대로 해라
À bout de souffle
O 원안 참여
1960 피아니스트를 쏴라
Tirez sur le pianiste
O O
1962 쥴 앤 짐
Jules et Jim
O O O
1962 스무살의 사랑 中
앙투안과 콜레트
Antoine et Colette
O O 옴니버스 영화 참여작, 앙투안 드와넬 5부작
1962 부드러운 살결
La Peau douce
O O O
1966 화씨 451
Fahrenheit 451
O O
1968 상복 입은 신부
La mariée était en noir
O O
1968 도둑맞은 키스
Baisers volés
O O O O 앙투안 드와넬 5부작
1968 벌거벗은 유년 시절
L'Enfance-Nue
O
1969 미시시피의 인어
La sirène du Mississipi
O O
1970 야생의 아이
L'enfant sauvage
O O O
1970 부부의 거처
Domicile conjugal
O O O O 앙투안 드와넬 5부작
1971 두 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 대륙
Les deux Anglaises et le continent
O O O
1972 나처럼 예쁜 여자
Une belle fille comme moi
O O O
1973 아메리카의 밤
La nuit américaine
O O O
1975 아델 H 이야기
L'histoire d'Adèle H.
O O O
1976 포켓 머니
L'argent de poche
O O O O
1977 여자를 좋아했던 남자
L'homme qui aimait les femmes
O O O O
1977 미지와의 조우
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
O
1978 녹색 방
La chambre verte
O O O O
1979 사랑의 도피
L'amour en fuite
O O O 앙투안 드와넬 5부작
1980 마지막 지하철
Le dernier métro
O O O
1980 이웃집 여인
La femme d'à côté
O O O
1983 신나는 일요일
Vivement dimanche!
O O O 유작
1988 귀여운 여도적[4]
La petite voleuse
O 원안 참여

3.1. 주요 작품

파일:external/movieimg.nate.com/lposter001449-6.jpg장 피에르 레오가 나온 영화. 나중에 레오는 트뤼포 영화의 페르소나가 된다. 앙트완 5부작의 시작이며, 자전적인 면이 강한 영화. 우리나라에 들어올 땐 일본에서 직역한 것(400回の殴打)을 그대로 가져와서 이러한 제목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프랑스어의 관용구 'faire les quatre cents coups'는 말에서 유래해 '무분별하고 제멋대로 사는' '말썽꾸러기'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고 애초에 트뤼포의 첫 영화인 단편영화 이름이 말썽꾸러기로도 해석이 가능한 '개구쟁이들(Les Mistons)'이다. 정작 일본에서의 제목은 '大人は判ってくれない(어른들은 모른다)'라고 부른다.

파일:external/file2.instiz.net/9628d14f117e84628fb029a00e782d4a.jpg
파일:external/3.bp.blogspot.com/story_of_adele_h.jpg이자벨 아자니 주연의 영화. 빅토르 위고의 딸 아델 위고가 벌인 막장얀데레 일기다. 나중에 로저 코먼이 미국에 배급해서 대박냈다.

파일:external/images.moviepostershop.com/fahrenheit-451-movie-poster-1967-1020174218.jpg영국 프랑스 합작. 책에다 불을 싸지르는 발화수를 다룬 디스토피아영화.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 화씨 451을 각색, 나치에게 점령당한 프랑스 상황을 대입했다.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 감독직을 포기하고 선택한 영화이다.[5] 이 영화를 준비하는데 5년 정도가 걸렸다. 주연이었던 오스카 베르너와는 사이가 엄청 안 좋았다고 한다.
원작자 레이 브레드버리는 줄리 크리스티가 1인 2역을 맡은 것을 빼고는 영화 각색을 좋아했고, 직접 편지를 적어 프랑수아 트뤼포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 내의 평은 별로 좋지 않았다.

파일:external/www.notrecinema.com/la-mariee-etait-en-noir-poster_8570_49904.jpg환상의 여인의 작가 코넬 울리치의 소설을 각색한 건 맞는데, 마지막의 반전을 자르고 영화화했다.

파일:external/2.bp.blogspot.com/affiche_Femme_d_a_cote_1981_2.jpg매우 통속적인 치정극을 소재로 한 것이지만, 대단히 냉정하고 섬세한 연출덕분인지 깊은 감정이입과 충격적인 감흥을 얻게 된다. 소소한 에피소드들과 아기자기한 대사들의 연결도 뛰어나고, 특히 제라르 드파르디외와 파니 아르당의 표정연기가 인상 깊다.

4. 매체

5. 여담

파일:external/en-mobile-museeniepce.systalium.eu/Herschtritt-image-2.jpg

6. 말말말

"나는 영화가 영화를 만든다는 기쁨이 아니면, 영화를 만드는 데 따르는 고통을 표현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나는 이도 저도 아닌 영화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영화에서) 메시지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차라리 우체국에 가서 전보를 쳐서 보내라. [10]
"나는 예술을 사랑하고 무엇보다 영화를 사랑한다. 나는 일한다는 것은 배설물을 폐기하는 것과 같이 필요악이라 간주하며,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루에 세 편의 영화, 일주일에 세 권의 , 위대한 음악을 담은 레코드만 있다면 나를 행복하게 만들기에 충분할 것이다. 머지않아 내게 찾아올, 그리고 이기적 인간으로서 내가 두려워하게 될 나의 죽음의 그 순간까지."[11]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방법은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며, 두 번째 방법은 영화평을 쓰는 것이고, 세 번째 방법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12]
첫 번째 단계는 많은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나는 극장을 나설 때 감독의 이름을 적어두기 시작했다. 세 번째 단계에서 나는 같은 영화를 보고 또 보면서 내가 감독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박강수 팩트체커의 기사에서, #뉴스톱)
The first step involved seeing lots of movies; secondly, I began to note the name of the director. In the third stage I saw the same films over and over and began making choices as to what I would have done, if I had been the director. 트뤼포의 책, 구글도서

7. 외부 링크

프랑수아 트뤼포의 유년 시절 이야기


[1] 《트뤼포 -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 정성일 평론가의 추천사 中[2] 사실 많은 감독들이 이 네가지를 겸하는 경우도 많다. 영화 감독이니 글을쓰는 작가를 겸 할수도 있고, 다른 감독의 영화를 평가 할수도 있고, 직접 자기 영화에 출연해 배우를 할수도 있다.[3] 트뤼포의 아버지(계부)가 직접 경찰서에 끌고갔다.[4] 각본 원안만 작성한 상태였고, 트뤼포 본인이 직접 연출까지 맡으려 했지만 1984년 타계하는 바람에 클로드 밀러 감독이 연출했다.[5] 하지만 그는 워렌 비티가 주연을 맡은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6] EBS에서 주로 활동하는 영어 강사이며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한때 자주 나온 적이 있었다.[7] 결정적인 계기가 아메리카의 밤 시사회였다고 한다. 고다르는 영화를 역겹다고 까대자 트뤼포가 반발하면서 틀어졌고 이 이후론 완전히 절교해 죽을때까지 서로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8] 실제로 영화 세계도 누벨바그 이후론 상당히 극과 극으로 변했다. 고다르는 장 피에르 고랭과의 협연 등으로 정치적으로도 미학적으로도 급진적이고 난해한 영화를 만들었다면 반대로 트뤼포는 대중적이고 고전 위주의 영화를 만들었다.[9] 미국의 배우. 〈사냥꾼의 밤〉의 주연.[10] 트뤼포가 한 말로 가장 널리 알려져있긴 하나, 최초로 이 말을 사용한 사람은 메트로 골드윈 메이어의 창립자이자 당대의 거물 영화 제작자 새뮤얼 골드윈 (Samuel Goldwyn)으로 알려져있다. 정확히는 1940년에 동료 시나리오 작가가 각본에 사회적 메시지를 넣자고 건의하자 "Messages, messages. From Western Union you get messages. From me you get pictures.(메시지? 메시지라. 웨스턴 유니온한테 받아가는 게 메시지고, 나한테서 받아가는 건 영화 밖에 없소.)"라고 응수했다고.# 당대에 이미 퍼져있던 관용구였던 만큼 영화광이었던 트뤼포는 해당 관용구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었고, 그것을 본인이 임팩트있게 사용함으로써 널리 퍼진 사례.[11] 《트뤼포 -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 中[12] 일명 '영화광 3단계'라 불리는 매우 유명한 발언이다. 트뤼포 본인부터 이를 몸소 실천했다. 헌데 이 발언은 정성일 평론가가 국내에 처음으로 퍼뜨렸는데, 해외에서는 이 발언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고 출처가 불분명하다. 그래서 정성일이 유명한 트뤼포의 이름을 빌려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했다는 설이 유력했었는데, 이후 정성일 본인이 트뤼포의 원문이 아닌 일본 영화잡지에서 트뤼포가 한 말이었다고 소개한 글을 읽고 오해를 했다고 인정했다. 이후 트뤼포에 관한 저서인 <트뤼포 -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이 개정되어 2022년 출간했을 때 추천사에서 트뤼포의 발언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후, 오히려 트뤼포의 발언을 왜곡한 일본인이 자신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며 감사를 표했다. 오역된 글이 아닌 진짜 원문은 하단의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