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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25:12

파이돈(대화편)

1. 개요

영혼의 불멸성에 대해 논한 플라톤의 대화편으로, 흔히 향연, 정체와 함께 플라톤의 중기 대화편 중 가장 주요한 저작으로 여겨진다. 소크라테스의 사형을 다룬 소크라테스의 변명 - 크리톤 - 파이돈의 마지막 대화편으로 보통 초기작으로 여겨지는 소크라테스 3부작 중 중기 대화편으로 추정되는 유일한 작품이다.

2. 등장인물

파이돈: 대화편의 화자.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목격하고 이를 에케크라테스에게 설명한다.
에케크라테스: 플레이우스[1]피타고라스 학파의 일원. 대화편의 청자가 그로 설정되었다는 점에서 파이돈 내의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력을 찾기도 한다.
소크라테스
심미아스와 케베스 : 둘 모두 테베 출신으로, 소크라테스를 추종하는 철학자들이다. 소크라테스의 영혼 논변에 반박을 펼치는 이 대화편의 주 대화 상대들이다.

3. 내용

3.1. 에케크라테스와 파이돈

엘리스 출신 파이돈은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목격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플레이우스를 들린다. 플레이우스의 에케크라테스는 파이돈에게 소크라테스의 죽음과 그의 사형이 재판 이후로 왜 그렇게 지연되었는지에 관하여 묻는다.[2] 파이돈은 아테네에 존재하는 델로스 섬 사절단 관습을 설명하며, 테세우스를 기념하는 이 사절단이 오가는 동안에는 사형을 포함한 모든 살인이 금지되었고, 소크라테스의 재판은 사절단 선박의 출항 바로 직전에 있었기에 배가 돌아오기 전까지 사형이 집행되지 않았다고 답한다. 에케크라테스는 이에 소크라테스가 죽었던 당시 상황에 대해 최대한 명확하게 알려달라고 요청하고, 파이돈은 자신은 소크라테스를 회상할 때마다 기쁨을 느낀다며 이를 수락한다

3.2. 소크라테스 사형 직전

델로스의 배가 돌아오기 직전, 아테네의 감옥에는 아폴로도로스[3], 크리토불로스와 그의 아버지 크리톤[4], 헤르모게네스, 에피게네스, 아이스키네스, 안티스테네스[5], 크테시포스[6], 메넥세노스[7] 등을 비롯한 아테네 추종자들과 테베 출신의 심미아스, 케베스,[8] 파이돈데스, 메가라 출신의 에우클레이데스[9]와 테르프시온이 소크라테스의 임종을 지키고 있었다. 플라톤은 병이 들어 참여하지 못했다.[10] 파이돈은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하고 대화편 내용은 액자식 구성의 내부로 들어가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추종자들은 새벽부터 감옥 문 앞에 모여 문이 열리면 소크라테스와 하루종일 토론을 하며 날을 보내곤 하였다. 그런데 그 날은 사형 집행 지시가 내려왔기에 추종자들은 평소보다 일찍 감옥에 방문한다.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는 슬픔에 겨워 통곡하고, 소크라테스의 요청에 크리톤이 하인들을 시켜 크산티페를 돌려보낸다.[11]

크산티페가 떠나자 소크라테스는 서로 반대된다고 생각되는 고통과 즐거움이 사실 보통 같이 따라다니는 것을 보아, 아이소포스 였으면 신이 고통과 즐거움 그 둘을 화해시키기 위해 한 머리에 묶어 함께 다니게 했다는 우화를 짓지 않았겠나며 운을 뗀다.[12] 케베스는 아이소포스 이야기를 듣고는 소크라테스가 과거에는 시와 우화를 짓지 않았는데 유독 감옥에 들어온 이후에는 아이소포스를 소재로 한 시를 짓기 시작한 이유에 관해 묻는다. 당대의 유명한 소피스트이자 시인이었던 에우에노스가 이를 궁금해 한다면서. 소크라테스는 이에 에우에노스를 비롯한 다른 시인들의 적수가 되려던 것은 아니고, 원래부터 자신의 머릿속 다이몬[13]이 시를 지으라 명령했는데 자신은 철학이 최고의 시라고 생각해서 이를 무시하다가 죽기 직전에 시간이 남자 혹시 그 명령이 진짜 통상적인 시가를 말하는 것인지 걱정되어 늦기 전에 신의 명령에 따르는 것이노라고 답한다. 그리고 우선 사람들한테 친숙한 아이소포스 이야기를 소재로 해보았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러면서 에우에노스에게 분별이 있다면 빨리 자신을 따라오라고 전해달라고 요청한다. 심미아스는 이에 놀라서 어째서 그런 것을 권하느냐며, 에우에노스는 분명 이에 따르지 않을거라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살은 나쁜 법이지만 죽음 그 자체는 철학자라면 무릇 따르고 싶어하는 법이라고 답한다. 케베스가 이에 대해 묻자 소크라테스는 피타고라스 학파와 함께하며 이 이야기를 듣지 못했냐며, 마침 이렇게 된 김에 이에 관해 한번 검토해보자고 한다. 죽기 직전에 딱 어울리는 주제 아니냐고 하며.

3.3. 자살은 나쁘지만 죽음 그 자체는 좋은 이유

케베스는 스스로 자신을 해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은 여러 번 들어봐서 알고 있으나 명확한 설명을 들은 적이 없다고 말하며 소크라테스한테 이를 설명해달라고 요청한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은 좋은데 자살이 나쁜 게 불합리하다고 생각되겠지만 나름의 일리가 있다면서, 우리는 신들의 소유물인데 우리도 소유물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죽으려 하면 화가 나고 벌을 내리지 않겠냐며 그렇기에 자살은 신들이 싫어하는 일이라고 설명한다. 케베스는 이에 납득하면서도, 자신이 진정 궁금한 것은 자살이 나쁜 이유가 아니라 죽음 그 자체가 좋은 이유라고 말한다. 진정 현명한 이라면 최고의 주인인 신들의 곁을 떠나는 쪽을 노여워하는 것이 자명하지 않냐는 것이다. 심미아스도 이에 동조하며, 소크라테스에게 답변을 요구한다.

소크라테스는 케베스의 논리가 철저함에 흡족해하면서, 답변을 시작한다. 만일 사후에 신들과 훌륭한 죽은 이들 곁으로 가지 못한다면 죽음을 싫어했겠으나, 자신은 훌륭한 이들 곁으로 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기에 죽음을 좋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심미아스는 이에 대한 더욱 상세한 논변을 요구한다. 하지만 크리톤이 잠시 끼어들어 사형집행인이 죽기 전에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말라고 했다고 전한다. 이야기를 하다 열이 오르면 사약이 잘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런 말은 무시하기로 하며 논변을 시작한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철학자들이 죽음을 추구하는 이유는 바로 죽음이 곧 몸으로부터의 영혼의 해방이기 때문이다. 훌륭함을 추구하는 철학자들은 먹을 것과 마실 것, 몸치장과 같은 육체적인 것을 하찮게 여긴다. 철학자들에게 정녕 중요한 것은 몸이 아닌 영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중들은 그렇게 인생을 즐기지 못하고 재미없게 사는 이들을 죽은 이와 다름 없다고 여긴다. 또한 감각은 우리를 속이기만 하기 때문에 현명함의 추구에 있어서 몸은 영혼의 추론을 방해하는 존재밖에 되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는 분명히 존재하는 아름다움 그 자체, 좋음 그 자체, 정의로움 그 자체를 보고, 듣고, 만질 수 없다. 이를 탐구하기 위해선 몸의 간섭에서 벗어나 최대한 순수하게 사고할 줄 아는 영혼이 필요하다. 게다가 몸은 영양 공급을 요하고, 병에 걸리기도 하고, 욕정과 욕망, 두려움 등으로 영혼을 방해한다. 이는 여가가 생겨 진지한 탐구를 하려 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이러한 몸에서 영혼이 해방되어 그 자체로 있을 수 있게 해주는 죽음은 우리를 순수하게 해주고 사고를 정화시켜 진리를 획득할 수 있게 해주는 좋은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렇기에 죽음과 유사한 상태, 즉 육체의 간섭에서의 해방을 추구하던 훌륭한 철학자들이 막상 진짜 죽음을 목전에 두고 노여워한다면 우스꽝스러운 일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철학은 죽는 것을 수행하는 것이라고도 부를 수 있지 않겠냐고 한다. 게다가 죽으면 하데스에서 그리워하던 이들을 볼 수 있는 희망이 있는데 그럼에도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는 지혜보단 육체와 재물,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이라고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철학자를 제외한,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용기란 죽음으로부터의 용기이고[14], 절제란 육체적 즐거움으로부터의 절제[15]이다. 하지만 이들은 두려움 때문에 두려움을 이겨내고 즐거움 때문에 즐거움을 이겨낼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용기와 절제, 정의는 사실 참된 미덕이 아니고, 진정한 용기, 절제, 정의는 현명함이 동반되어 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16] 정화작업은 일종의 입교 의식과 같아서, 입교하고 죽을 시 신과 더불어 살 수 있으나 그렇지 못할 시 진흙탕 속에서 굴러야 한다고 하며 자신은 입교하기 위해 현명함으로 자신을 정화시키려고 노력했다고 부연한다. 그러니 죽은 후에 신들과 훌륭한 이들을 만날 수 있을거라 기대한다는 것이다.

3.4.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논변

케베스는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납득하면서도, 한가지 의문점을 제기한다. 영혼이 죽음 이후에도 존재한다면 소크라테스의 말이 맞겠으나, 죽음과 동시에 파괴되거나 그 기능을 상실한다면 이는 틀렸을테니 이에 관한 논변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수긍하며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검토를 시작한다.

소크라테스는 죽음 이후 영혼이 하데스에 갔다가 다시 이승에 태어난다는 이야기를 들며 만일 이것이 사실이고 산 자의 영혼이 모두 죽은 자에게서 비롯되었다면, 하데스는 존재하며 죽은 이의 영혼이 파괴되지 않는다는 증거가 되지 않겠냐고 한다. 케베스가 이에 동의하자, 소크라테스는 큰 것은 그것보다 더 작은 것으로부터 생겨나고 더 약한 것은 더 강한 것으로부터 생겨나듯 무언가에 반대되는 사물들은 그 반대되는 것들로부터 생겨나지 않느냐고 주장한다.[17] 그리고 커짐과 약해짐처럼 그 반대되는 것으로 바뀌는 변화 역시 존재하지 않느냐고 한다.[18] 그리고 작은 것은 그보다 큰 것에서 생기고 작아짐 역시 존재하는 것처럼 그 반대 역시 존재하지 않느냐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런데 삶의 반대는 죽음이니 죽음은 삶에서 생겨나고 삶은 죽음에서 생겨나지 않느냐고 하며 삶에서 죽음으로 변함(죽어 감)이 존재하듯 그 반대인 죽음에서 삶으로의 변화 역시 존재하지 않겠냐고 주장한다. 그러니 살아있는 이의 영혼은 죽은 이로부터 오는 것이 맞고 죽음과 함께 영혼이 소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만일 모든 것이 순환하지 않고 직선적이라면 잠에서 깨어남으로의 변화가 없으니 모두가 엔디미온 처럼 잠에 빠져있을테고 뭉침에서 흩어짐으로의 변화가 없을테니 모든 것은 한데 모일테며, 죽음에서 삶으로의 변화가 없다면 결국 모든 것은 죽어있는 상태가 될 것이라며, 산 것들이 죽은 것에서 비롯된 것은 필연이라고 주장한다.

케베스는 이에 더해, 소크라테스의 상기설[19]에 의해서도 탄생 이전에 영혼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고 부연한다. 만일 배움이라는 것이 우리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상기시킨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영혼인 상태로 그것들을 이미 봤기 때문이 아니겠냐는 것이다. 심미아스는 그 상기설의 증명이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며 케베스가 상기설의 증명을 말하게 한다. 케베스는 '무지한' 이가 질문을 받으며 올바르게 인도되면 스스로 모든 것을 깨우칠 수 있는데, 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이에 관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고, 새롭게 배우는 것이 아닌 이를 상기시키는 것에 불과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그 증명을 설명한다. 소크라테스는 이에 흡족해하며, 누군가가 무언가를 상기시킨다면 그는 이미 이전에 그것을 알고 있어야 하지 않냐고 주장한다. 그리고 어떤 지식을 감각에 의해 습득하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관념을 감각을 통해 상기시키는 것 아니냐고 가정한다.

또한 개개 목재들과 돌들이 같음을 보고 같음이라는 개념 그 자체를 상기시키킬 수도 있지 않냐고 한다. 개개 목재들과 돌들처럼 서로 같은 것들은 같으면서 다를 수 있는데, 같음 그 자체는 그럴 리 없으니 같은 것들과 같음 그 자체는 다른 것이며 같은 것들은 같음 그 자체에 비하면 부족한 것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리고 같은 것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 부족함을 알아차리는데, 그렇기 위해선 감각지각으로 같은 것들을 알아차리기 전에 같음 그 자체를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감각지각을 사용하기 전인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이데아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모든 것들의 지식을 태어나기 이전에 알고 있었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망각하고, 감각을 사용해 다시 상기시킬 뿐이라는 것이다.

다른 한가지 가능성은 망각 없이 모든 것을 아는 채로 태어나 지식을 계속 가지고 있는 것인데, 어느 쪽인것 같냐는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심미아스는 선택을 못하겠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알고 있는 것이라면 설명할 수 있어야 할텐데 오늘 이야기한 주제들을 모든 사람들이 설명할 수 있을지 묻는다. 심미아스는 당연히 아니라고 답하고,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태어나기 이전, 현명한 영혼인 상태일 때 알았겠노라고 말한다. 심미아스는 태어남과 동시에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닌 이상 그렇다고 답하고, 소크라테스는 이에 지식을 잃어버리는 것 역시 출생과 동시인데, 얻음과 잃어버림이 동시에 일어날 수는 없지 않느냐며 반론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영혼이 태어나기 전부터 존재하는 것은 필연 아니냐고 선언하고 심미아스는 이에 동의한다.[20]

심미아스는 하지만, 아직은 증명이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고 하며, 태어나기 이전부터 영혼이 존재함은 충분히 증명되었으나, 죽음 이후에도 영혼이 존재함을 증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케베스가 이에 동의하자, 소크라테스는 살아있는 것은 죽은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전의 논증을 상기시키며, 이와 태어나기 전에 영혼이 존재했다는 논증을 합치면 죽은 이후에도 영혼이 존재함은 필연적인 결과 아니냐고 말하나, 두 사람이 원하는 것 같으니 좀 더 자세하게 검토해보자고 제안한다. 소크라테스는 흩어져 소멸하는 존재와 그렇지 않은 존재의 차이에 주목해보자고 하며, 소멸하는 것들은 결합체이며 보이는 것들이지만, 소멸하지 않는 것들은 이데아처럼 결합체가 아니며 보이지도 않는 것 아니냐고 한다. 즉 몸과 같이 보이는 것들은 소멸하지만 영혼과 같이 보이지 않는 것들은 소멸하지 않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느냐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전 논의에서 말했듯, 몸이 감각을 통해 탐구할 땐 헤메고 혼란스러워하나 순수한 영혼이 탐구할 땐 현명함을 가지고 있기에 영혼은 소멸하지 않는 것에 더욱 가깝고 몸은 그 반대인 점이 증명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개념 그 자체가 개개 사물을 지배하듯 영혼은 몸을 지배하는 것 역시 몸은 소멸하지만 영혼은 불멸인 증거라고 한다.

그러므로 영혼은 소멸하지 않고 하데스로 떠나며 그동안 자신을 방해하던 몸여러 나쁜 인간사로부터 해방되어 현명함을 되찾고 신을 포함한 훌륭한 이들과 함께 있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하지만 육체적인 욕망과 즐거움에 찌든 영혼은 훌륭함과 현명함을 기피하는 성질을 갖게 되어 죽은 후에도 하데스로 떠나지 못한 채 이승에 붙잡혀 다시 태어난다고 말한다. 이 때, 전생에 찌들었던 욕망에 따라 그 습성에 맞게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폭식을 일삼던 부류는 나귀로, 부정의와 강도질을 좋아하던 부류는 늑대나 매로, 철학과 지혜가 없지만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온 이들은 벌이나, 개미, 아님 인간으로 환생하게 된다고 한다. 신의 영역에 닿을 수 있는 자는 오직 철학을 갈고닦아 영혼을 정화한 자 뿐이라고 하면서. 그들은 육체적 쾌락과 고통의 방해를 멀리하면서 오직 영혼만으로 탐구하는데, 영혼을 이승에 묶어놓는 가장 극단적인 악덕인 매우 큰 즐거움과 매우 큰 고통을 경계하면서 살아가다가 육체로부터의 해방을 이뤄줄 죽음을 추구한다.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신들의 세계로 갈 수 있을거라 하며 이러한 삶을 권장한다.[21]

3.5. 심미아스의 케베스의 반론

소크라테스의 논변이 끝난 후, 모두들 그 이야기를 곱씹느라 오랫동안 침묵이 이어진다. 하지만 심미아스와 케베스는 납득하지 못한 부분이 있어 서로 작게 소곤댄다. 소크라테스가 이를 보더니 이 이야기를 더욱 검토해보기 위해 의심스러워하는 부분을 말해달라고 요청한다. 이에 심미아스는 아까부터 궁금한게 있었는데 죽기 직전에 심기를 더욱 해칠까 걱정했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조용히 웃으며 방금까지 자신이 죽음을 불운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유에 관해 논했는데 설득이 잘 안된 것으로 보아 자기 말을 못 믿은거 아니냐고 하며, 개의치 말고 물어보라고 한다.

심미아스는 논의가 충분히 검토되지 않은 것 같다고 하며, 지금까지의 영혼과 관련된 논변을 뤼라와 그 현들의 조화에다가도 적용할 수 있지 않냐고 묻는다. 뤼라가 들려주는 조화로운 음은 보이지 않고 아름다우며 신적이지만, 뤼라 그 자체는 물체적이고 가시적이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뤼라가 파괴되거나 현이 몇 개라도 끊어지면 조화가 더 이상 일어날 수 없다. 심미아스는 마찬가지로, 만일 영혼이 육체가 내는 혼합과 조화라면 비가시적이고 훌륭한 것과 관계없이 죽음과 함께 소멸해야 정상 아니냐고 주장한다. 부서진 뤼라가 조화로운 음보다 오래 남아있듯이, 차라리 죽음 이후의 육체가 영혼보다 오래 남아있는 것 아니냐면서.

소크라테스는 심미아스의 철저한 논변에 흡족해하며, 우선 답하기 전에 케베스의 반론부터 들어보자고 말한다. 케베스는 심미아스의 주장처럼 영혼이 육체보다 약하고 짧게 산다는 것을 동의하는 것은 아니나, 영혼이 죽음 이후에 남더라도 그것이 영원히 보존되리란 법은 없지 않느냐고 묻는다. 예를 들어 어떤 직조공이 외투를 만든 채 죽으면 외투가 사람보다 오래 남는다. 그렇다고 해서 외투가 사람보다 더 우월하고 강한 것은 아니게 된다. 사실 그 직조공은 그 외투 이전에도 많은 외투를 만들었으니까. 비슷한 식으로 영혼 역시 육체보다 더 우월하고 오래 사는 것은 자명하지만 결국 그 끝이 존재해 여러 몸을 옮겨다니며 환생하다가 마지막 몸을 남기고 소멸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케베스는 지금까지 증명했던 태어나기 전 부터 영혼이 존재했고, 죽은 후로도 영혼이 존재하며, 죽은 이의 영혼이 다시 태어난다는 것 모두가 사실이라도 결국 영혼이 완벽한 불사가 아니라 마지막에 소멸한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도 충분히 존재하지 않냐고 주장한다.

3.6. 막간: 논변 혐오 경고

두 사람의 반론을 듣고 좌중은 불쾌감에 휩싸인다. 소크라테스의 논변에 설득당했던 사람들이 다시 그 논의의 진위를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액자 밖 에케크라테스도 비슷한 심정을 느끼며 파이돈에게 빨리 소크라테스가 어찌 대응했는지 이야기해달라고 한다. 파이돈은 그가 반론들을 정중하고 호의적으로 받아주었으며 함께 논의를 잘 고찰해주었다고 말하며 설명을 이어나간다.

소크라테스는 파이돈에게, 심미아스와 케베스의 논변을 반드시 이길 것이라며 희망을 불어넣어준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한가지 당부를 하는데, 바로 논변 혐오자가 되는 것에의 경고이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이는 인간 혐오와 닮아서 본인이 사람 본성에 관한 전문 지식 없이 대하다가 데여놓고는 모든 인간을 불신하게 되는 것처럼, 어떤 논변이 참이라고 여겼다가 갑자기 거짓이라고 생각되면 모든 것이 오락가락하고 상대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어 논변 자체를 불신하게 되는 것이라 한다. 하지만 아주 좋은 사람과 아주 나쁜 사람이 소수이고 중간 정도의 사람이 다수이고 나쁜 사람한테 데이고 인간 혐오에 빠지는 것이 어리석은 행동인 것처럼, 참이고 안전한 논변은 소수이고 참일수도 거짓일 수도 있는 논리가 다수이다. 그런데 안전한 논리가 분명 있음에도 참일수도 거짓일수도 있는 다수 논리를 접하고 혼란스러워 할 때, 자신의 서투름을 탓하지 않고 논변 그 자체가 쓸모없는 것처럼 혐오한다면 진리와 지식을 상실한 채 불쌍한 여생을 보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온전한 논리를 만들어 내도록 노력해야 하며 소크라테스 본인도 자기 자신을 설득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을 약속한다.

3.7. 심미아스의 주장 재반론

소크라테스는 다시 논변으로 돌아와서 두 사람이 배움은 상기라는 주장과 영혼이 몸 안에 갖히기 전에 필연적으로 어딘가 있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냐고 묻는다. 심미아스와 케베스 모두 이에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는다. 소크라테스는 그러나 영혼이 곧 조화라고 생각한다면 그 조화를 이루는 것, 뤼라의 경우 현이자 영혼의 경우 육체 이전에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뤼라의 조화로운 음은 우선 뤼라와 조화되지 않은 음이 조합되어 형성되고, 그 둘보다 먼저 소멸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심미아스의 주장은 영혼이 몸보다 우선 존재한다는 논증과 어우러지지 못한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소크라테스는 영혼은 조화라는 가설과 (영혼이 육체 이전에 존재한다는 근거였던) 상기설 중에 어느 쪽을 택할건지 심미아스에게 묻는다. 심미아스는 자신의 가설은 단지 그럴듯 해 보여서 제기해보았을 뿐이라며 제대로 추론된 쪽에 가까운 상기설을 고른다.

소크라테스는 이어서, 조화와 조화를 구성하는 것의 상태는 같아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조화 그 자체는 조화를 구성하는 것과 반대로 행동하지 않지 않냐는 것이다. 마치 뤼라의 화음이 뤼라 현의 음색과 뤼라 그 자체에 위배될 수 없는 것처럼. 심미아스는 이에 동의한다. 소크라테스는 뒤이어 조화에는 더욱 조화된 것이 존재하지만 영혼은 더욱 영혼인 상태가 존재하냐고 묻는다. 심미아스는 그렇지는 않다고 답한다. 소크라테스는 거기에 영혼이 조화라 하는 이들은 덕을 조화된 영혼, 부덕을 조화가 제대로 안 된 영혼이라고 여기겠으나 영혼이 조화라면 더욱 영혼인 상태가 존재하지 않으니 더욱 조화된 상태도 없지 않냐고 한다. 게다가 만일 영혼이 조화 그 자체라면 부조화, 즉 악덕을 가지고 있을 수도 없게 된다. 즉 살아있는 모든 영혼들은 똑같이 좋은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되는데 소크라테스는 이게 제대로 된 주장인 것 같냐고 묻는다. 심미아스는 절대 아니라고 대답한다.

소크라테스는 거기에 더해 영혼은 허기질 때 식욕을 참는 것처럼 몸의 상태들에 저항하기도 한다면서 영혼이 몸의 상태로 이루어진 조화라면 그 구성요소인 몸에 반대되는 일을 할 수 없을거라고 주장하고 심미아스는 이에 동의한다. 소크라테스는 호메로스 오디세이아의 '마음이 험한 일을 견뎠다'는 구절을 인용하며 영혼은 몸을 통제하는 주인노릇을 하며 조화라기엔 더욱 신적인 존재라는 논거를 굳힌다. 심미아스가 이에 동의하며 영혼이 곧 조화라는 가설은 최종적으로 반박된다.[22]

3.8. 케베스의 주장 재반론

소크라테스는 심미아스의 반론이 대충 정리되었으니 이번엔 케베스의 반론을 한번 논의해보자고 한다. 케베스는 소크라테스의 재반론에 감명하며 그가 분명 재반론에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소크라테스는 케베스의 반론을 다시 한번 상기한 후, 곰곰히 생각하다 이는 생각보다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며 생성과 소멸 전반에 관한 고찰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이에 관해 탐구하고 시행착오를 겪어온 과거사를 풀기 시작한다.[23]

소크라테스는 젊은 시절 자신이 자연철학에 빠져 생성과 소멸, 우주, 생물, 원소, 기억과 같은 여러 주제를 탐구한 바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그런 탐구에 소질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데, 무언가를 깨닫기는 커녕 알고 있던 것 마저도 아리송해졌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나에 하나를 더할 때, 둘이 된다는 사실을 전에는 명확히 알았는데, 이제는 더해지는 쪽의 하나가 둘이 되는지, 더하는 쪽의 하나가 둘이 되는지 조차 잘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던 중, 아낙사고라스가 쓴 책을 읽게 되는데, 모든 것에는 질서가 있고 그 원인은 바로 지성이라는 내용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마음에 들어해 기뻐했다.[24] 지성이 모든 것의 원인이라면 좋음과 훌륭함을 탐구한다면 자연의 이치 역시 알아낼 수 있을거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젊은 소크라테스는 아낙사고라스의 저서를 탐독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저서는 공기와 물, 에테르와 같은 것들을 원인으로 돌리는 것에 불과했고, 근육이 사지를 굽힐 수 있게 만든다던가 하는 시시콜콜한 것들에만 원인을 돌리고 참된 원인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25]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재판 결과에 승복하여 여기 감방에 앉아있는 것도 근육이 뼈와 관절을 움직이지 않아서 그런 거냐며 조소하고는, 아낙사고라스는 잘못된 것을 원인으로 본다고 비판한다.[26]

결국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탐구를 시작하며 이를 '두번째 항해'라고 부르는데,[27] 그 과정에서 태양을 관측하다가 눈 머는 사람처럼 되지 않기 위해 감각으로 물체를 파악하기 보단 그 물체의 상을 탐구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그는 가장 강하다고 판단하는 말[28]을 가정한 다음 이에 부합하는 것을 참으로, 부합하지 않는 것을 거짓으로 놓아가며 탐구해갔다고 한다. 그리고 그 가장 강한 가정은 아름다움, 큼, 작음 같은 개념들이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며 아름다운 물체들은 아름다움을 나눠가졌을 뿐이라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생각이 가장 단순하지만 안전한 가정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며 우선 이에 관해 더 논하지는 않겠다고 한다.[29] 이렇게 가정하면 예를 들어, 무언가보다 더욱 큰 것은 큼이라는 개념 자체가 개입한 것이기 때문에 말장난이 개입할 여지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케베스와, 액자 밖 에케크라테스와 파이돈 역시 이에 동의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과거 탐구하며 도달한 최종 결론에 동의했다면 이를 기반으로 다시 논의를 재개하자며 케베스의 주장을 반론하기 시작한다. 어떤 것은 다른 무언가에 비해서는 크고, 또다른 무언가에 비해서는 작을 수 있는데, 큼과 작음이라는 개념 그 자체의 영향을 받아 그렇게 된다는 가정 하에서는 작음이 접근할 때 원래 가지고 있던 큼이 물러나던가, 소멸하던가 둘 중 하나이기에 그렇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케베스는 이에 동의하나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은[30] 아까는 더 작은 것에서 큰 것이 생겨나는 것 처럼, 반대되는 것의 생겨남은 반대되는 것에서부터의 생겨남임을 동의하지 않았나고 묻는다. 소크라테스는 그 때의 이야기는 반대되는 사물에 관한 이야기이고 지금의 이야기는 그 속의 반대되는 개념 그 자체이기에 좀 다르다고 설명한다.[31]

소크라테스는 다음 예시로 숫자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셋이나 다섯은 그 자체가 홀수는 아니지만 홀수라고 부를 수 있으며 홀수라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이 경우, 둘과 셋은 서로 반대되는 것은 아니지만 반대되는 것을 지니고 있는데, 둘에 하나가 더해저 셋이 될 때에도 앞서 말한 것처럼 짝수라는 개념이 물러나거나 소멸한다. 즉 둘이 홀수의 이데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그 자체가 반대되는 개념은 아니지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존재한다.

케베스가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자, 소크라테스는 논의를 진전시킨다. 무엇이 생기면 몸이 뜨거워지는지의 답은 뜨거움 자체가 아니라 불이고, 무엇이 들면 몸에 병이 걸리는 지의 답은 병 그 자체가 아닌 열이다. 유사하게 둘에 무엇이 더해지면 홀수가 되는지의 답은 하나이다.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몸에 무엇이 들면 살아있게 되느냐고 묻고 케베스는 영혼이라고 답한다. 즉 영혼은 삶 그 자체는 아니지만 삶을 가져오고 삶의 이데아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삶의 반대는 죽음이기에, 영혼은 삶의 반대인 죽음을 지니고 있을 수 없다. 즉 영혼은 불사이다.

그리고 만일 불멸의 것이 반대 개념의 공격을 받는다면 이는 소멸하지 않고 물러날 것이다. 만일 눈이 불멸의 존재라면, 뜨거움의 공격을 받을 때 녹아 없어지지 않고 물러날 것이다. 유사하게 둘의 안에 존재하는 짝수라는 개념은 (만일 불멸하다면) 하나가 더해질 때 소멸하지는 않지만 물러난다. 그렇다면 불멸의 존재인 영혼은 죽음의 공격을 받을 때 소멸하지 않고 물러날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물론 불사인 존재가 불멸일 때에만 이것이 성립한다고 부연하지만, 케베스는 신, 이데아와 같이 불사인 것이 소멸을 받아들이진 않을 것이라고 답하며 이에 관한 논변은 필요없다고 한다. 그렇게 케베스의 반론 역시 반박되고, 심미아스를 비롯한 다른 이들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3.9. 소크라테스의 죽음

심미아스는 그렇지만, 논의의 크기가 인간이 따라가기엔 너무 커서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잘 말했다고 하며 사람이 죽으면 일어나는 일에 대한 설명을 시작한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다이몬이 그의 영혼을 인도하여 심판장으로 떠났다가 다 이승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하데스로의 여러 갈림길 중에서 현명한 영혼은 제 상황을 잘 알고 안내자를 따르나 육체적 쾌락에 젖은 영혼은 저항하고 퍼덕대다가 힘겹게 이끌려 떠나게 된다. 살인 등을 저지른 부정의한 영혼은 모두들 안내자가 되기를 기피하여 홀로 떠들다가 제 자리를 찾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영혼들은 지구 상의 여러 놀라운 공간에서 자기 위치를 찾는다고 말한다. 심미아스는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지구 구조에 관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한다.

소크라테스는 만일 지구가 천구 한 가운데에 구형으로 떠 있으면 그것이 떨어지지 않기 위해 천구 전체와 지구의 구성물이 평형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또한 지구는 거대한 것으로 우리지중해 주변을 따라 좁은 지역에서만 살고 있고 다른 많은 지역에서도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살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또, 별이 있는 천구 속아이테르로 채워져 있는데, 이 아이테르의 찌꺼기인 물, 안개, 공기가 지구 상의 우묵한 곳으로 흘러들어가며 우리는 그 우묵한 곳 속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마치 바닷 속에 살면서 해수면 위를 모르는 것 처럼 물과 공기로 가득찬 우묵한 공간에 거주하면서 그 바깥이 순수하고 균형잡혔다는 사실은 모른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사는 곳들은 그 물과 공기로 인해 모든 것이 부패하고 부식되는데 우묵하지 않은, 즉 순수한 곳은 그렇지 아니하고 아이테르로 가득찬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보다 훨씬 오래 살고 더욱 현명하다고 한다. 또한 그렇기에 공기 밖에서 지구를 보면 정말 순수하고 아름답다고도 한다. 한편 그 지구 속을 흐르는 여러 강이 있고 그 물의 흐름은 진동을 일으키는데 우리는 이를 보고 흔히 타르타로스라고 한다. 이러한 강들 중에 아케론 강이 존재하고 땅 속으로 흐르다가 하데스에 이르르는데, 이 곳에서 죽은 자들의 영혼이 기다리다가 다음 생을 살러 떠난다고 한다. 이 외에도 세계 전체를 둘러싸는 오케아노스 강과, 하데스에서 타르탈로스로 흘러 들어가는 퓌리플레게톤과 코퀴토스라는 험한 두 강이 존재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지구 구조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죽은 영혼의 향방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간다. 중간 정도로 산 사람들은 아케론을 따라 이승으로 돌아오고, 중대한 악행을 저지른 이들은 우선 타르타로스로 빠지는데, 1년이 지나면 큰 파도가 덮쳐서 살인자는 코퀴토스, 패륜아는 퓌리플레게톤을 타고 하데스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본인들의 피해자들이 허용해주면 빠져나올 수 있지만 아니라면 다시 타르탈로스로 끌려가게 된다. 한편으로 경건하고 지혜를 사랑하는 이들은 윗쪽의 순수한 공간으로 나올 수 있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그렇기에 지금까지 했던 논변들을 정리하며, 육체적 쾌락을 멀리하고 덕과 현명함을 권장한다는 말을 남긴다.

말을 마친 소크라테스는 슬슬 죽을 준비를 해야겠다 한다. 크리톤이 더 남길 말 없느냐고 묻자, 스스로를 돌보라고 답하고 매장 방식을 묻는 질문에는 아무렇게나 하라고 답한다. 그리고는 지금까지의 논변이 크리톤에게는 남은 사람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말로밖에 보이지 않은 것 같다고 하며[32], 다른 철학자들에게 자신은 죽고 나서 시체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떠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증시켜달라고 부탁한다. 이후 소크라테스는 죽기 직전 목욕을 하고, 곧이어 해질녘이 되자[33], 11인회의 관리가 와서 사약을 전하고는 눈물흘리며 돌아간다. 소크라테스는 그 관리를 호평하고는, 태연한 모습으로 주체없이 사약을 가져오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사약을 받자 태연히 비운다. 이내 아클레피오스[34]에게 닭 한마리를 빚지고 있다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는다.

액자 밖의 파이돈은 에케크라테스에게 소크라테스 그는 가장 훌륭하고 현명하며 정의로웠다고 말하며 대화편은 끝난다.

4. 여담

플라톤의 독자적인 사상인 이데아론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는 첫번째 저작으로, 소크라테스의 처형에 관해 파이돈이 에케크라테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의 형식으로 되어 있다. 주된 논의는 어째서 영혼이 불멸할 수밖에 없는가에 대한 것으로, 플라톤은 영혼의 불멸성을 믿는 소크라테스가 담담하고 품위 있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대화편 속의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이데아는 불멸하는 것으로, 이 이데아의 불멸성이 바로 영혼 불멸의 근거가 된다. 이데아는 사물과 현상계의 저편에 있는 본질적인 것이고 현상적 존재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육체는 현상계에 속한 것으로 그 수명이 다하면 소멸하지만, 영혼은 삶의 이데아와 관계하고 있는 것으로 소멸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영혼은 우리가 감각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생명이 생명이게끔 하는 근본 원인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것은 절대로 완전한 소멸이 아니며, 단지 현상계의 육신과 이데아에 속하는 영혼이 분리되는 과정일 따름이다. 흔히 드는 비유로, 플라톤이 말하는 육신과 영혼의 관계는 배와 선원의 관계와 같다.

영혼불멸에 대한 플라톤의 믿음은 이후 초기 기독교와 교부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기독교가 유대교적 전통에 그리스적 전통이 결합하며 탄생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탄생의 밑바탕에는 영혼의 불멸성에 대한 그리스 철학적인 믿음이 있었다. 이러한 믿음은 이후 초기 기독교의 교리를 정리하는 교부 철학자들에게로 이어졌고 그러한 교리가 현대까지 주류의 견해로 이어져 내려오게 되었다. 특히 육체는 저열하고 영혼은 숭고하다는 사상이 영지주의라는 이단 사상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35]

주제가 주제이니만큼 상당히 종교적인 분위기의 대화편이다. 특히 소크라테스가 설명하는 사후세계관에서 두드러지며, 파이돈에서 다뤄지는 소크라테스의 최후는 이후 기독교 세계에서 순교자의 전형처럼 취급받았다. 한편 니체는 플라톤을 두고 그리스도 이전의 그리스도인이라고 평했다.

사상적 내용과 별개로 문학성 또한 뛰어나다. 플라톤 자신의 은사였던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다루고 있으니만큼, 소크라테스의 의연함과 주변인들의 괴로움을 아테네의 사형제도와 관습에 대한 설명을 곁들여가며 현장감있게 묘사하고 있으며, 독주를 마시는 순간에 이르러서는 실로 그리스 비극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사망에 대한 서술도 실존하는 알칼리성 독의 기전을 정확히 묘사하고 있어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1] 펠로폰네소스 반도 북부의 도시이다. 파이돈의 고향 엘리스와 아테네 중간 즈음에 위치했으며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력이 강하였다.[2] 플레이우스는 스파르타의 영향권 안에 있어 아테네 관련 소식이 뜸하였다. 따라서 에케크라테스는 꽤 과거에 있었던 소크라테스의 사형 재판 내용만 대강 전해들은 상황이었다.[3] 감정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향연의 화자.[4] 크리톤은 그의 이름을 딴 대화편이 존재하며, 에우튀데모스에서도 아들 크리토불로스의 교육을 걱정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5] 소크라테스 추종자로 견유학파의 창시자.[6] 뤼시스에우튀데모스의 등장인물[7] 본인 이름을 딴 대화편이 존재하며, 뤼시스에서 그보다 더 비중있게 등장한다.[8] 이 둘이 이 대화편 속 소크라테스의 주 대화상대이다.[9] 유명한 수학자와는 동명이인으로, 메가라 학파의 창시자.[10] 대화편 전체를 통틀어 저자 플라톤이 본인에 대해 언급하는 몇 안되는 부분이다. 당시 실제로 병이 들었다는 설, 파이돈의 내용과 실제 역사적 사실 사이에 거리를 두고 싶어했다는 설, 소크라테스 사형 당시 스승을 외면하고 이에 대한 변명을 했다는 설 등이 존재한다.[11] 악처로 유명한 크산티페이지만 한량 남편을 구박했을 뿐 마냥 악처가 아니라는 점을 주장할 때 근거로 주로 드는 부분이다.[12] 고통과 즐거움 모두 육체적인 것이라는 점으로 다음에 나올 이야기를 암시한다.[13] 소크라테스가 자기 내면에 존재한다고 주장한 신령적 존재. 내면의 소리로 해석할 수도 있다.[14] 명예가 훼손될 두려움 등으로 인해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받아들이는 경우[15] 돈을 절약하는 등, 다른 즐거움을 위해 어떠한 즐거움을 자제하는 경우[16] 즉, 죽음을 두려워하는 범인들의 미덕을 초월해야 한다는 것이다.[17] 즉 비교대상이 있어야 어떠한 상태를 나타내는 개념을 정의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18] 상태를 나타내는 개념 A와 그 반대 개념 B가 존재한다면 그 상태가 변화하는 현상 A -> B와 B -> A 역시 존재한다.[19] 메논에서 본격적으로 다룬다.[20] 통상적으로 이는 감각과 추상적 개념 전반에 관한 논의로 파악되어왔으나, 근래에는 그런 건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고 이데아론과 같은 철학적 주제를 다룰 수 있는 사람들의 철학적인 앎에 관해서만 논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다만 이렇게 해석하면 이 대화편에서 다루는 영혼의 향방이 소수 철학자들의 영혼에 관해서만으로 국한되어버린다.[21] 플라톤 특유의 금욕주의가 드러나며 철학을 권유하는 이유와 중기 대화편 특유의 형이상학적 세계관이 드러나는 부분이다.[22]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본인의 저서 <영혼에 관하여>에서 조화설을 반박한다. 조화란 결합 혹은 결합 비율인데, 만일 전자라면 몸의 어떠한 결합이 지성적, 감각적, 욕구적 부분인지 설명해야 하고 후자라면 몸의 각 부분에 살과 뼈 등이 섞이는 비율이 다 다른데 영혼이 여러개가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또한 다른 논변도 제시하는데 생물이 조화되지 않은 상태는 병, 약함 추함이고 조화된 상태는 건강, 강함, 아름다움인데 영혼은 그 중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23] 이 과거사 파트는 대화편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취급되며 블라스토스는 "서구 자연철학의 거대한 전환점"이라고 평했다.[24] 이러한 세계관은 왜 이 상태가 최선인지를 알려주고 최선의 세계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기 때문이다.[25] 소크라테스(사실은 저자 플라톤)는 통일된 질서를 지닌 세계관을 원했다.[26]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과학이 발달한 현대에 이르러선, 소크라테스의 니즈에 가까운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목적론적 세계관은 학습만화 등지에서 조롱받고 있고 과학자들은 그보단 (이 대화편에서 비판받은) 자연철학자들과 같은 방법으로 세계를 탐구하고 있다. 물리학계 등지에서는 아름다운 세계 법칙과 같은 이야기가 꾸준히 나오고는 있지만.[27] 이 과정에서 소크라테스는 최소한 이 대화편 내에서는 목적론적 세계관을 통한 설명을 포기하고 대신 이데아론으로 세상을 해석하려 한다. 감각에의 의존이 자연철학자들을 오류에 빠트렸다는 것이다. 훗날 역시 경험주의적 경향이 강한 아리스토텔레스가 목적론적 세계관을 꺼내들었다는 점이 재밌는 점.[28] 이 가장 강한 가정은 도출가능성 혹은 일관성으로 해석된다. 보통은 그 둘 모두를 가리킨다는 말이 정설.[29] 이데아와 사물의 관계의 관한 부분은 이 대화편에서는 일단 넘어가나, 이후로도 플라톤을 괴롭히고 결국 후기 대화편 <파르메니데스>에서 이를 비판적으로 다루게 된다.[30] 파이돈은 이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하지 못하였다.[31] 이와 같이 원인과 결과가 반대될 수 없다는 가정은 영혼불멸론의 핵심 가정이지만 진리로 보기에는 너무 강하다보니 '창문이 깨질 때 돌도 깨져야 하냐'와 같은 반론을 듣기도 한다. 플라톤은 이를 이데아에 한정지어 넘어간다. 즉 이데아론을 반박한다면 이 부분 역시 반박이 가능해진다.[32] 크리톤은 철학자가 아니며, 논변에 그다지 인연이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33] 소크라테스와 제자들은 하루 종일 관련 논변을 한 것이다.[34] 아폴론의 아들로 전해지는 의술의 신으로, 이 구절은 통상적으로 육체라는 병으로부터 치유해준 것에의 소크라테스의 감사라는 해석이 우세하다.[35] 사실은 기독교 철학은 전반적으로 플라톤의 영향력이 강력하나 영지주의를 반박하기 위해 주류 크리스트교에서는 육체와 영혼 문제에 있어서는 플라톤보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과 가까운 입장을 보이기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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