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크리톤은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이다. 감옥에 갇힌 소크라테스와 친구 크리톤이 나누는 대화가 주 내용이다. 부제는 '(윤리적) 의무에 관하여.' 소크라테스의 변명 - 크리톤 - 파이돈으로 이어지는 소크라테스의 최후 3부작의 일부로 플라톤 대화편 중 많이 읽히는 작품 중 하나이다. 흔히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알려진 악법도 법이다가 크리톤의 오독에서 비롯된 것으로 많이들 여겨진다. 이 말 자체는 크리톤에 나와있지 않다. 문제는 소크라테스-플라톤 철학이 '악법도 법이다'라는 생각을 지지하는지 여부인데, 이 문제는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박종현 교수와 이기백 교수는 '악법도 법이다'가 소크라테스-플라톤 철학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본다.2. 등장인물
소크라테스크리톤[1]
3. 줄거리
이 대화편은 소크라테스의 변명 바로 이후 시점이다. 변명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소크라테스가 감옥에서 최후를 기다리고 있다 그의 절친 크리톤이 그날따라 새벽 일찍[2] 면회오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크리톤은 델로스로 떠났던 배가 곧 돌아올 것임[3]을 알리며 강력하게 탈옥을 권유한다.크리톤은 소크라테스가 죽으면 자신은 친구를 잃고 친구를 구하지 못했다는 평판을 얻고야 말 것[4]이라며 소크라테스 자신이 아닌 크리톤을 위해서라도 탈옥해달라고 요청한다. 소크라테스가 왜 무분별한 대중의 시선을 신경쓰냐고 반문하자 크리톤은 다수 군중이 옳든 그르든 그에게 해를 끼칠 수는 있다고 하며 소크라테스가 탈옥 시 남을 친구들을 걱정하는 줄 알고 모두들 그를 위해선 어느정도 위험을 기꺼이 무릅쓸테니 걱정 말라 하고 아테네를 탈출하면 아테네 바깥 폴리스의 사람들이 소크라테스를 반겨줄테니 서둘러 탈옥을 하자 한다. 이에 더해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의 적들이 원하는 일만 자진해서 시켜주는 셈이고 세상에 남을 자식들을 버리고 가는 것과 다름없으니 정의롭지 못한 행위라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이 와중에도 틀린 방향의 열의는 가치가 없다며 평소 하던대로 크리톤의 주장의 옳고 그름을 따져보자 한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오며 지켜오던 원칙을 이러한 극한상황이라고 거스르진 않을거라 하며[5] 크리톤의 주장이 틀리고 소크라테스의 원칙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탈옥하지 않겠노라고 한다. 그리고 다수의 판단과 시선 문제를 꺼내들며 사람들이 하는 모든 판단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진 않지 않냐고 한다. 분별있는 자의 좋은 판단이라면 존중해야겠지만 어리석은 이의 나쁜 판단은 무시하는 편이 더 현명하다고 주장하며. 그리고 몸에 관해선 대중보단 의사나 체육 선생의 판단을 듣는 것이 맞듯 덕과 시비에 관해서도 다수의 시선에 따르기보단 현명한 이의 판단을 따르는 쪽이 맞지 않냐[6] 하고 크리톤은 이에 모두 동의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렇다면 의사 한사람의 꾸중을 거스르고 다수의 시선을 따라 몸이 망가졌을 때 삶을 살 가치가 없어지는 것처럼 몸보다 더욱 중요한 영혼을 다수의 시선을 의식하느라 망치는 것은 더욱 삶의 가치가 없어지는 일 아니냐고 하며 다수의 시선에 연연하지 말자고 한다. 거기에 더해 다수에게 위협받는 극한상황이라도 그들의 모든 판단이 존중받을 가치는 없다는 원칙이 깨지진 않고 자신은 이를 지키겠노라고 하며 아까 크리톤이 했던 '다수가 옳든 그르든 우리를 죽일 수는 있다'는 말을 반박한다.
소크라테스는 그러니 다수의 사람들이 고려할만한 아이들의 양육이나 평판 같은 것 보단 탈옥이 정의로운지를 따져보고 만일 그것이 정의롭다면 그때 하자고 한다. 그냥 사는 것이 아닌 훌륭하고 정의롭게 사는 것을 가장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다.[7] 그리고 비록 극한 상황이나 타인의 악행에 대한 보복 같은 경우라고 할지라도 정의롭지 못한 일을 행하는 것은 모든 경우에 나쁘고 부끄러운 일 아니냐고 묻는다. 크리톤이 동의하자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한 일이니 타인이 끼친 해의 보복이라 할지라도 해를 끼치는 것은 옳지 않냐고 한다.[8][9] 그리고는 우선 타인이나 공동체와 합의한 것의 정의롭다면 합의를 따라야 하지 않겠냐 하며 아테네의 법률과 국가공동체의 판결을 거스르는 것이 타인을, 절대 해해서는 안되는 이들까지 해롭게 하는 것인지 따져보자고 한다.[10]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크리톤한테 소크라테스는 국가 공동체[11]와의 가상의 논변을 진행해보자고 제안하고 이를 시작한다. 국가는 우선 탈옥하려는 소크라테스에게 왜 법률과 나라 전체를 파괴시키려 하냐고, 개인에 의해 합의와 질서가 흔들리면 나라가 전복되지 않겠나고 묻는다. 소크라테스와 크리톤이 그 법률이 내린 판결이 정의롭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답하겠다고 하자 국가는 다시 혼인 제도를 통해 당신을 태어나게 해주고 교육을 통해 당신을 양육해준 것이 바로 자기 자신, 즉 국가인데 부모에게 부당하게 당한 것을 되갚으려 하지 않으려 할 것 처럼 국가의 명령에 반발하는 것은 패륜보다도 더 경건하지 못한 것 아니냐고 묻는다. 정의로운 사람들은 조국을 부모보다 더욱 존귀하게 여기고, 정 국법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여기면 법을 어기기보단 국가를 설득해보는게 맞지 않냐고 하면서.[12][13]
국가는 거기에 더해 자신은 원하지 않는 이들에게 아테네를 떠나 다른 폴리스로 이주할 권리를 부여했다고 하며 소크라테스는 그동안 아테네를 따로 떠나려 하지 않고 아테네에서 혼인까지 하며 70여년을 살아왔다며 아테네의 법률과 아테네 사회가 만들어낸 합의에 만족하며 살아오지 않았나고 한다. 또, 법률은 소크라테스에게 이미 추방형을 제시할 기회를 줬으나 그 기회를 걷어찬 것은 오히려 소크라테스 아니냐고 한다[14] 즉 소크라테스가 탈옥을 한다면 그건 그 자신도 동의해온 합의로 이루어진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는 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가는 마지막으로 소크라테스가 만약 탈옥을 해 다른 나라로 망명을 가더라도 사회 질서를 무너뜨린 그를 환영하겠냐고, 그리고 이미 정의를 버린 그가 계속 참된 선이 무엇인지 토론하며 다닐 수 있겠냐고 묻는다. 그리고 만일 그의 친구들이 진정한 친구들이라면 이승에 남겨두고 갈 자식들을 당연히 양육해줄 거라며 소크라테스의 탈옥을 말린다. 소크라테스는 그러니 탈옥은 정의롭지 못하고 자신은 정의와 선보다 평판이나 자식 양육 같은 다른 문제를 더 우선으로 두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크리톤은 씁쓸한 듯 네 말이 맞고 더 할말이 없다 하고 설득을 멈춘다.
4. 위작 논란
플라톤의 저작에 대한 위작 논란은 항상 불거지고는 하는데, 크리톤도 역시 그러한 논란에 휩싸였었다.문제가 되는 것은 처벌을 받아들이는 소크라테스의 자세인데, 원래 소크라테스는 국가를 비롯해서 우리가 무엇이라고 알고 있던 모든 것들에 대해 의문과 회의를 던지는 것을 즐겨하는 이었다. 따라서 아무리 국가의 법과 규칙이라해도 그것이 과연 정말로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한번 더 의문을 가져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15]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이미지는 항상 엄청 똑똑한 양아치.. 였다.
때문에 크리톤[16]이 와서 하는 얘기도 평소 소크라테스가 하던 이야기 그대로 이다. 애초에 소크라테스의 사형에 대한 판결이 잘못된 것은 누구도 옳음이 정확히 어떠한 것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냐는 것.
그러나 우리의 소선생은 갑자기 "국가는 우리를 길렀다. 나는 그런 국가의 명을 받아들여야할 의무가 있다." 같은 드립을 치기 시작한다. 그러더니
"죽고나서 거기에 모든 것을 아는 성인이 있다면, 그를 만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죽는 건 별로 나쁜 장사가 아닌 거 같아." 하고 사망 플래그를 가뿐하게 꽂아 주신다.
이렇게 지금까지의 일관된 소크라테스의 자세에서 무척 벗어난다는 이유로, 아마도 이것이 위작 또는 실제 소크라테스와는 다른 플라톤의 창작이 아니냐는 의문이 계속해서 제기된다.
하지만 한 가지 유념해야할 것은, 소크라테스의 주제는 항상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였다는 점이다. 그가 대화를 통해서 이러한 해답을 얻고자 한 것도 어찌보면 사람들 사이의 합의와 고민을 통해서 얻은 것이 진짜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에서 였을지 모른다. 그러한 의미에서 국가는 최소한 그러한 논의가 가능할 수 있는 바탕이 되는 것이지, 그것마저도 부정해버려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암튼 결국 소선생은 탈출을 포기하고 이야기는 파이돈으로.
[1] 소크라테스의 동갑내기 친구. 철학적 소양은 없으나 상당히 부유하다. 에우튀데모스등 다른 대화편에도 등장하거나 언급되는 상당히 가까운 친구이다.[2] 크리톤이 면회를 자주 오며 교도관과 친해졌고 새벽 일찍 면회하기 위해 그날은 뇌물도 사용했다.[3] 당시 아테네에서는 매년 델리아라고 부르는 종교 행사의 일환으로 사절단을 델로스 섬으로 보냈고 델로스로 간 배가 돌아오기 전엔 사형집행을 금지했다. 소크라테스의 사형 집행도 기간이 마침 델리아와 맞물려 한 달 정도 늦춰졌고 역으로 배가 돌아온다는 말은 바로 사형이 집행된다는 말이기도 했다.[4] 크리톤은 상당히 부유했는데 그런 부유한 자가 친구 벌금도 대신 안내줘서 사형당하게 만들었다는 평판을 두려워하고 있다.[5] 물론 소크라테스가 고지식한 원칙주의자란 소리는 아니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따르고 만일 기존 생각보다 더욱 좋은 생각이 있으면 입장을 바꾸기도 하는 합리적인 원칙주의자라고 봐야 할 것이다.[6] 플라톤의 다른 여러 대화편에도 이러한 논변이 등장하고 보통은 아테네 직접민주주의 비판을 위해 사용된다.[7] 훌륭한 삶은 소크라테스를 상징하는 말 중의 하나로 꼽히며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나 고르기아스에서도 비슷한 맥락의 주장이 등장한다.[8] 고대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보복적 정의관이 대세였으나 소크라테스는 여기서 이를 극복하고 보복은 옳지 않다는 윤리관을 확립한다.[9] 고르기아스에서도 남에게 해를 끼치는 것 보단 차라리 해를 입는 편이 낫다는 비슷한 논지의 주장이 나온다.[10]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알려져있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경구와 가장 비슷한 주장을 하는 부분이다. 뒤이어지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이 경구와 같은 말이라 볼 수 있는지에 관해선 정치철학과 시민 불복종 문제가 엮인 큰 논란이 있고 현재로선 로마시대의 경구가 크리톤 오독과 엮여 소크라테스의 발언으로 잘못 알려진 것이라는 설이 대세이다.[11] 혹은 법률[12] 현대 시점에선 이런 논변이 국가주의나 전체주의로 보일 수도 있으나 당시 아테네인들은 현대의 개인주의 사회와는 달리 국가와 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굉장히 중시했으며 민주정도 부당하게 지배받지 않을 권리를 중시하는 자유주의보단 사회 참여의 의무를 중시하는 공화주의적인 배경 하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 없다. 현대에도 법치주의 사회윤리의 관점에서 보자면 법 질서 파괴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위법보단 악법을 고치도록 노력하는게 낫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틀린 말이 없고.[13] 이 부분은 사회 공동체의 법률이 악법이어도 따르는게 옳다는, 즉 악법도 법이다와 같은 내용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전 시간대인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는 정의를 위해 악법에 단호하게 맞서는 소크라테스의 모습이 담겨있고 이를 소크라테스의 모순이라고 부른다. 하술되는 위작 논란도 이 모순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것으로 이를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따라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라는 말을 했다고 볼 수 있는지의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대화편의 묘사와 실제 소크라테스의 행보를 살펴보았을 때 그는 아테네의 법률을 악법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으나(제자 플라톤과 사실상 그의 대변인인 대화편 속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실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 직접민주주의 시스템을 부정하진 않았다는게 중론이다.), 사람들이 내린 판결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크리톤에서 탈옥을 거부한 것은 재판 중 기회가 있었음에도 자신이 배심원 비위맞추기를 거부하며 선고된 사형을 막판에 부정하고 국가질서를 깨트리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14]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의 변명 시점 사형 재판 당시 추방형과 벌금형을 받을 기회가 있었으나 오히려 형량 판결시 자신은 영빈관에서 향응을 받아야 하는데 자기 친구들 권유를 따라 벌금형을 제시하겠다고 어그로를 끌면서 사형을 자초했다.[15] 이러한 자세는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아주 잘 드러나 있다.[16] 크리톤은 그밖에도 다른 대화편(라케스, 에우튀데모스 등)에도 자주 나오는 소크라테스의 베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