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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라힘 파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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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 대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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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데브시르메2.2. 총애2.3. 처형
3. 사후4. 각종 매체에서

1. 개요

Ibrahim Pasha
(1493년 ~ 1536년 3월 15일)

쉴레이만 1세 시대 오스만 제국대재상. 정치가로서 뛰어난 능력을 보인 명재상이기에 쉴레이만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권력 투쟁에서 패하는 바람에 끝내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 인물이다.

동명이인과 구분하기 위해 오늘날 "그리스의 파르가(Πάργα) 출신"인 데에서 유래한 별명을 붙여 파르갈르(파르가 사람) 이브라힘 파샤(Pargalı Ibrahim Paşa)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이 밖에 "서유럽 놈"이라는 뜻의 프렝크 이브라힘 파샤(Frenk İbrahim Paşa),[1] "총애를 받는다"는 뜻의 마크불 이브라힘 파샤(Makbul İbrahim Paşa), "처형당했다"는 뜻으로 마크툴 이브라힘 파샤(Maktul İbrahim Paşa)라고도 불린다.[2]

2. 생애

파일:attachment/이브라힘 파샤/ibrahimpasha1.jpg
베네치아 측에서 묘사한 초상화

2.1. 데브시르메

오늘날에는 그리스령이고 당시에는 베네치아 공화국 영토였던 그리스 서부의 파르가(Πάργα) 출신으로, 그리스계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바르바리 해적[3]에게 납치되어 아나톨리아 반도 서해안의 마니사에서 노예로 팔렸다.

한편 이 무렵 마니사에는, 당시 황제였던 셀림 1세의 아들인 쉴레이만 황태자가 지방 총독으로 부임해 있었다. 장남이라고 반드시 황위를 계승하는 법은 없었던 오스만 제국은 황자들이 어느 정도 나이가 차면 예외 없이 지방으로 내려보내 그 자질을 알아보게 했는데, 쉴레이만 역시 오스만 제국의 관습에 따라 제왕 교육을 받고 있던 것. 그리고 어떻게 인연이 닿아 노예로 팔려온 이브라힘을 만나 절친한 사이가 되었고, 이후 이브라힘은 오스만 제국의 황궁에 보내져 교육받게 되었다.

튀르키예의 드라마《위대한 세기》의 영향으로 이브라힘이 예니체리 출신이라고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재현 오류다. 또 데브시르메(Devşirme)[4] 제도로 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무조건 예니체리가 되는 것도 아니다. 징집된 기독교도 소년들은 그 자질에 따라 예니체리 교육과정(Acemi oğlan, 아제미 오을란)[5]관료 교육과정(İç oğlan, 이치 오을란)으로 나누어져 서로 다른 교육을 받았기 때문.[6] 이브라힘은 관료 교육과정을 이수한 것으로 보이므로, 예니체리라 할 수는 없다.

2.2. 총애

파일:Pargali-Damat-Ibrahim-Pasha-Palace.jpg
현 튀르키예 이슬람 미술 박물관인 이브라힘 파샤 궁전

1520년에 셀림이 죽고 쉴레이만이 황제로 즉위하면서, 노예로 팔려온 이브라힘도 그 팔자를 펴기 시작한다. 일단 황궁에서 사냥용으로 쓸 매를 키우는 일을 담당하는 관직에 임명된 것을 시작으로 황실 가족들의 침상을 살피는 일을 책임지는 관직으로 승진했다. 이후 승진 코스를 몇 단계 씩 뛰어올라갔던 것.[7] 이브라힘의 승진이 얼마나 빠른 것이었냐면, 이브라힘 스스로가 쉴레이만에게 "다른 대신들의 질투를 받을까 두려우니, 제발 천천히 승진시켜주십시오. 아니, 애당초 고위 관직 따위 바라지도 않습니다."라고 간청했을 정도. 이에 대해 쉴레이만은 이브라힘의 겸손함을 크게 기뻐하며, "짐이 옥좌에 앉아 있는 한,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대를 처형하는 일은 없을 것이니라."라고 맹세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브라힘은 쉴레이만이 즉위하고 3년만인 1523년에 재상에 임명. 고작 3년 만에 황궁의 최하위 직위에서부터 최고위직까지 뛰어오른 인물이 되었다.[8]

재상으로서의 이브라힘의 업적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가운데 몇 가지만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이집트의 행정 및 조세, 군사 제도를 재정비했다. 1524년에 당시 재상이었던 이브라힘에게 반발했다가 이집트 대총독으로 좌천된 하인 아메드 파샤가 오스만 제국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된 일이 있는데, 이때 이브라힘은 일시적으로 이집트 총독도 겸하게 되어 이집트에 파견되어서 통치체제를 재정비했다.

2.) 1533년에 합스부르크 황가와 헝가리 문제를 결론지었다. 당시 헝가리는 1526년에 헝가리 왕 러요시 2세가 쉴레이만의 공격으로 전사한 뒤 후계가 끊어져 합스부르크 황가와 오스만 제국이 서로 차지하려고 싸움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로써 강화를 체결. 헝가리의 3분의 2를 오스만 제국 영토로 받아왔다.

3.) 1535년에 프랑스와 대(對) 합스부르크 군사 동맹을 체결했다. 이는 유럽 역사상 이슬람과 체결한 첫 군사 동맹으로, 이후 양국 함대는 서로 힘을 합쳐 서지중해에서 합스부르크 황가를 견제했다. 또한 이 군사 동맹은 이후 17~18세기까지 오스만 제국의 음악이나 의복 등이 유럽에서 유행하게 되는 시작이기도 했다.[9]

파일:attachment/이브라힘 파샤/turkishstyle.jpg
투르크식 의복을 입은 프랑스 왕 루이 15세의 애첩 마담 드 퐁파두르.

파일:attachment/이브라힘 파샤/picture.jpg
한스 홀바인이 그린《대사들》. 보통 해골에만 주목을 하지만, 탁자 위에 펼쳐진 붉은색 물체(?)는 오스만 제국산 융단이다.

한편 재상으로 임명된 뒤에도, 이브라힘은 쉴레이만으로부터 이런 저런 작위와 관직을 받아 겸하게 되었다. 이 가운데 몇 가지를 들어 보면, 먼저 루멜리아[10] 대총독에 임명. 루멜리아 전역을 관장하게 되었고, 전쟁 시에도 루멜리아 주둔군 전체의 지휘권을 갖게 되었다. 또한 오스만 제국군 총사령관도 겸하여, 전쟁 시 쉴레이만이 총사령관이라면 이브라힘은 부사령관에 해당하게 되었다[11]. 또한 작위나 관직은 아니지만 쉴레이만은 이브라힘에게 가장 사랑하던 여동생인 하티제 술탄(Hatice Sultan)[12]을 아내로 주었다.[13]

이렇듯 이브라힘은 사실상 쉴레이만과 거의 대등한 권위와 권력을 갖게 되었으며, 그 덕분인지 그가 세운 자신의 저택은 저택이 아니라 이브라힘 파샤 '궁전'(İbrahim Paşa Sarayı)이라 불렸다.[14]

2.3. 처형

이처럼 이브라힘은 쉴레이만의 총애를 받으며 막강한 권세를 누렸지만, 결국 그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대를 처형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맹세했던 쉴레이만이 맹세를 깨버리면서 그의 명령에 의해 처형당하고 만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했는데, 하나씩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이브라힘 자신이 본인의 능력과 쉴레이만의 총애를 믿고 오만해지며 다소 경솔한 언동을 일삼았던 듯 하다. 특히 페르시아와의 전쟁(1532년 ~ 1555년)[15] 때 스스로 세라스케르 술탄(Serasker Sultan)을 칭했는데, 문제는 이게 절대 스스로 붙이고 말고 할 칭호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술탄이야 명예직[16]이라고 넘어간다 하더라도, 세라스케르란 군사적으로 굉장한 재능을 보였거나 황제가 대단히 아끼는 신하인 관계로 칭송받을 만한 인물에게나 붙이는 것이었다. 그러니 쉴레이만에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스스로 세라스케르 술탄을 칭한 것은 황제인 쉴레이만의 입장에서 "어라? 이 친구, 이제 날 무시하기 시작하네?"라고 생각하고 심히 불쾌해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17].

다음으로, 다른 대신들과의 불화가 표면화했다. 앞서 이브라힘은 재상이 되기 이전에 쉴레이만에게 "다른 대신들의 질투를 받을까 두려우니, 제발 천천히 승진시켜주십시오."라고 간청한 일이 있었는데, 그 질투가 마침내 큰 소란을 일으킨 것.[18] 특히 재무장관인 이스켄데르 첼레비(İskender Çelebi)와의 불화가 심각했는데,[19] 이브라힘은 이스켄데르를 증오하여 쉴레이만에게 이스켄데르가 반역 음모를 꾸미고 있으니 처형해야 한다고 설득하였고 결국 이스켄데르는 1535년에 처형되었다. 그런데 이스켄데르는 처형 직전에 쉴레이만에게 "재상 이브라힘이 반역을 도모하고 있나이다!"라고 고발하고 처형당했던것이다. 이러다보니 이브라힘에 대한 쉴레이만의 의혹은 확신으로 굳어져버렸다.

마지막으로, 황후 휘렘 술탄(Hürrem Sultan)과의 정쟁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이 부분은 쉴레이만의 가족 관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먼저 쉴레이만은 첩인 마히데브란 술탄(Mah-i devran Sultan)과의 사이에서 장남인 무스타파(Mustafa)를 얻었고 황후 휘렘 술탄에게서는 셀림(Selim), 바예지트(Bayezit), 지한기르(Cihangir)라는 아들들을 얻었다.[20] 그런데 이 가운데 장남인 무스타파가 가장 영특했으므로 주위에서부터도 차기 황제로 기대를 모았고, 재상인 이브라힘도 오스만 제국의 내일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무스타파를 지지했다.

하지만 자신의 친아들을 차기 황제로 옹립하고 싶어했던 휘렘 술탄이 여기에 끼어들었다. 오스만 제국의 관습상 황제가 되지 못하면 자신의 아들들은 몰살당하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고, 자기 자신도 처형당하지는 않더라도 말년이 좋지 못할 것이기 때문.[21] 일전에 이브라힘과 휘렘은 무스타파를 차기 황제로 인정하되 휘렘의 아들들만은 처형하지 않기로 합의를 보았었지만, 그게 지켜리리라고는 서로 생각하지 않았다. 휘렘은 그런 비참한 말로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무스타파와 그를 지지하는 이브라힘을 밀어내야 했고, 이브라힘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여러 대신들과 결탁하여 이브라힘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결국 이와 같은 여러 요인으로 인해, 쉴레이만은 이브라힘을 처형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이것은 결정만 한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는데, 예전에 쉴레이만은 이브라힘을 처형하지 않겠다고 신에게 맹세를 했기 때문. 이에 쉴레이만은 성직자들에게 자문을 구했고, 성직자들은 맹세를 깨는 대가로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모스크를 새로 하나 지으라고 제안했다. 쉴레이만은 이에 따르며 이브라힘을 체포하여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다만 처형하기 직전, 쉴레이만은 이브라힘에게 탈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감옥에 가두기는커녕 가택연금했고 미리 그대를 처형할 수밖에 없게 되었노라고 통보하며, 몇 번이나 단 둘이 만나 식사를 했던 것. 즉, "도망치려면 지금이다."라는 뜻을 전한 것이지만 이브라힘은 끝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떠나지 않았다. 결국 쉴레이만의 명령대로 이브라힘은 1536년 3월 15일에 처형된다. 향년 46세로, 재상으로서의 임기는 13년에 이르렀다. 사후 그의 재산은 몰수되어 국고에 보태졌다.

위의 아름다운 미담과 다르게 이브라힘 파샤 궁전에 처형인들을 보내 잠자고 있던 이브라힘을 그냥 죽여버렸다는 다른 내용의 이야기도 전해진다.

3.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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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4년 이브라힘 파샤가 이집트의 반란이 진압된 이후 그 통치를 잠시 맡을 때 카이로 성채에 세운 무캇담 성탑은 현재까지도 그 위용을 뽐낸다.

황후 휘렘 술탄의 입장에서, 이브라힘의 처형은 자신의 친아들을 차기 황제로 내세울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는 말과도 같았다. 이에 휘렘은 무스타파를 파멸시키기 위한 음모를 꾸몄고, 결국 무스타파는 1553년에 반역죄로 처형당했다.

한편 쉴레이만은 말년[22]에 들어 이브라힘을 처형한 일을 후회했다고 한다. 쉴레이만은 스스로 여러 편의 시를 썼는데, 이브라힘 사후 20년이 지난 뒤에도 친구간의 친분과 믿음에 대한 주제의 시를 자주 썼으며 이브라힘과 비슷한 타입의 인물들에게서 영감을 얻는 일이 많았다.

이브라힘의 아내이자 쉴레이만의 여동생인 하티제 술탄은 이브라힘이 처형된지 2년만에 덩달아 죽었는데, 남편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뒤를 따라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4. 각종 매체에서

2011년부터 2014년까지 방영된 터키 사극《위대한 세기》에서는 쉴레이만의 경호원이자, 쉴레이만의 침실에 들 여성을 검문하는 역할[23]로 등장한다. 담당배우는 터키의 배우인 오칸 야라비크. 정확하게는 휘렘이 궁전에 처음 들어와서 다른 새내기 궁녀들이랑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을 보고[24] 이브라힘이 "저 여자는 누구요?" 하고 눈여겨보기 시작한 게 휘렘과 쉴레이만의 만남의 첫 계기다. 물론 얼마 안돼서 둘은 적이 되지만. 이브라힘이 쉴레이만의 경호원이었다는 이야기가 나돌게 된 것이 이 드라마의 영향 때문이 아닌가 싶지만, 휘렘과의 정쟁으로 처형되는 것은 그럭저럭 재현해놓았다. 본 작에서는 본토 튀르크계 출신이 아니라 그리스 파르가 지방에서 끌려온 이방인이라고 고관대작들에게 무시, 견제당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오스만령 그리스, 발칸 반도에서 기독교 집안 자제들을 징집하여 고위 공무원, 군인으로 훈련 시키는 데브시르메 제도가 정착한 건 극 중 시기 보다 백 오십년 이전인 1380년대 무라트 1세 시절의 일이다.[25] 이 시점에서 오스만 제국 궁정 고관대작들은 거의 대부분 이브라힘 파샤처럼 데브시르메로 뽑혀온 루멜리아 출신들인데 이방인 어쩌고 하는 건 재현 오류.[26] 애초에 초기 경쟁자로 묘사되는 아흐메트 파샤 역시 조지아계이다. 다만 최고 재상으로 나오는 피리 메흐메드 파샤는 아나톨리아의 군인 가문에서 태어난 튀르크계이긴 하다.

시노하라 치에(篠原 千絵)의 만화《꿈의 물방울, 황금의 새장》에서는 휘렘을 쉴레이만에게 진상한 인물로 등장하며[27] 처음에는 서로 호감을 느꼈으나 후계자 문제로 사이가 벌어진다.[28]

대항해시대 온라인》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대신 NPC로 이스탄불에 있다. 플레이어는 오스만 해상 NPC와의 교신 작업으로 우호도를 친애까지 올린 뒤 일정금액과 명성을 지불하고 오스만으로 망명할 때 이브라힘을 통해 완료할 수 있다.

문명 6 몰려드는 폭풍》에서 오스만이 추가될 때 쉴레이만의 전용 총독으로 등장한다. 군주 자신 뿐 아니라 측근까지 묘사된 건 시리즈 사상 최초인데[29], 게임상에서는 전투와 정복에 관련된 보너스들을 제공하지만 문명의 성장에 기여하는 공용 총독들이 더 강력하다 보니 적극적으로 채용하기는 조금 망설여지는 편.
[1] 어차피 전체 재상의 절반 이상이 유럽 출신이었으므로 출신을 문제삼은 것은 아니다. 당시 오스만 제국에서 "프렝크"라는 말은 지독하게 경멸적인 어휘로 "우상을 숭배하는 음란하고 미개한 서방 이교 야만족"이라는 뜻으로 쓰였다. 명목상 당시 이슬람의 종주인 오스만 제국에서 이브라힘만 유독 서유럽의 르네상스 풍물을 좋아했으므로 그만큼 이를 씹어대던 무슬림들이 많았다는 의미. 튀르키예 사극 드라마《위대한 세기》에서는 자신의 집 정원을 그리스 로마 신화올림포스 12신르네상스풍 대리석 조각상으로 꾸미고 아내인 하티제 술탄에게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과 여신들을 차례로 소개해주는 장면이 나오고, 덤으로 그의 집을 본 사람들이 수군수군대는 장면도 나온다.[2] "총애"와 "처형"이 한 글자 차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실제로 이브라힘의 동시대인들은 그를 마크불 마크툴(총애받다 처형된) 이브라힘 파샤라고 불렀다.[3] 당시 오스만 제국은 북아프리카에 할거하던 해적 집단들과 계약을 맺었는데, 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오스만 제국은 해적들에게 태수의 관직을 내려 불법 점거자에서 합법적인 지위를 부여하며, 해적질에 필요한 물자나 자금을 지원한다. 또한 스페인 등의 공격을 받아 본거지를 잃으면, 오스만 제국은 그 탈환을 지원한다. 한편 해적들은 오스만 제국의 신하로서 오스만 제국에 적대적인 국가에게 지속적으로 피해를 입힐 의무가 있으며, 특히 오스만 제국이 해전을 벌일 때에는 해적질을 일시 중단하고 오스만 제국의 해군 노릇을 한다.[4] 강제 징집으로 알려진 경우도 있는데, 물론 아들을 내놓기 싫어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뇌물을 바쳐서라도 내 아들을 데려가달라고 사정하는 경우도 많았다. 데브시르메로 징집되어 고위 장교나 지방 총독, 심지어 재상의 반열에 오르면, 평민에서 귀족으로 신분이 상승하는 것이기 때문. 만일 데브시르메를 강제 징집이라 한다면, 조선 시대환관들 역시 강제 징집 되었다 해야 할 것이다.[5]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에 예니체리 관련 카드로 등장한다. 다만 표기가 잘못되어, 아세미 올글란이라 되었다.[6] 군인으로 키울 만 하겠다 싶으면 예니체리로 키우고, 군인도 좋지만 그러기엔 총명함이 아깝다고 판단될 경우 관료로 키웠다. 한편 예니체리 가운데에서도 이대로 군인 노릇을 시키기에는 아깝다는 것이 발견되면 재능에 맞는 다른 임무를 맡겼는데, 이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예니체리 산하부대 가운데 진군을 위한 길을 닦고 다리를 놓는 부대에 소속되었다가 건축가가 된 미마르 시난 (Mimar Sinan).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켈란젤로에 비견될 정도로 뛰어난 대 건축가다.[7] 이브라힘이 쉴레이만의 경호원 또는 경호대장으로서 총애를 얻었다는 내용이 보이는데, 설령 경호를 맡았더라도 그리 오래 맡지는 않았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더 높은 관직에 임명한다는 임명장이 날아왔을 테니.[8] 이전까지 황제의 각별한 총애를 받은 재상은 많았지만, 이건 정말 유례가 없다고 할 정도의 고속 승진이었다. 또한 쉴레이만과 이브라힘은 언제나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잤다고 하는데, 이 때문에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9] 물론 이때 체결된 동맹과 오스만 문화의 유행을 직접 결부시켜서는 곤란하지만, 적어도 "그 출발점이 되었다."나 "기원이 되었다."라고는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는 오스만의 학문이나 문화에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1561년에는 휘렘 술탄을 주인공으로 한 희곡이 상연되었고, 16세기 프랑스에서 발간된 기행문 가운데 절반이 오스만에 대한 것이었다. 또 1647년에는 쿠란프랑스어로 번역되어 나왔다.[10] 대한민국으로 치면 도에 해당하는 최상위 지방행정조직으로, 대략 오스만 제국 영토 가운데 대략 오늘날의 동남부 유럽에 해당하는 영역이었다. 여러 에야레트 가운데 아나톨리아 반도의 아나돌루와 함께 제국에서 가장 중요하고 넓은 지역이었다. 이건 기존에 재상으로서 받는 돈 이외에도 추가로 "제일 좋은 영지를 줄 테니 여기서 나온 수익을 더 가지게."'라고 선언하는 의미도 있다.[11] 다만 이건 이브라힘이 특혜를 받은 것이라기보다, 재상직에 기본적으로 붙어 있는 역할이었다.[12] 여기서 술탄이라는 이름이 갑툭튀하는 건, 메흐메트 2세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이후 오스만 제국 군주의 정식 칭호가 술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메흐메트 2세 이후 오스만 제국의 군주들은 로마 황제를 칭했고, 술탄이라는 칭호는 모후나 황자, 공주 등 황족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던 것. 대표적인 예로 술탄의 모후는 발리데 술탄(Valide sultan), 황태자를 생산한 후궁은 하세키 술탄(Haseki sultan)이라 했다는 것을 들 수 있다.[13] 그러나 "하티제 술탄이 이브라힘 파샤와 재혼하지 않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하티제 술탄은 이스켄데르 파샤와 결혼했으나 몇 년 뒤에 사별하여 청상과부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포덤 대학교의 조교수 에브루 투란이 <이브라힘 파샤와 하티제 술탄이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논문>을 2009년에 발표하였고, 2010년대에 들어서 이 학설을 따르는 서적도 몇 권 출간되었다. 해당 논문에 따르면 이브라힘은 보스니아를 다스렸던 고관인 이스켄데르 파샤(하티제 술탄의 전 남편과는 동명이인)의 손녀인 무흐시네 하툰이라는 여성과 결혼했다고 한다.[14] 세월이 흐른 만큼, 오늘날에는 누군가의 집이 아니라 터키 이슬람 미술 박물관이 되어 있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 정문 바로 앞에 위치한 오벨리스크 두 개가 세워졔 있는 말의 광장 바로 건너편에 그의 집이 있다.[15] 당시 사파비 왕조 페르시아와 오스만 제국은 종교 및 영토 문제로 싸움을 벌였다.[16] 앞서 소개했듯 황족에게 붙여지는 칭호였거니와, 이브라힘의 아내가 쉴레이만의 여동생. 다만 이 경우도 굳이 따진다고 하면 문제가 되는데, 황실의 여자(술탄)와 결혼했다고 해서 역시 술탄이 되는 게 아니라 다마트(damat)라는 칭호가 따로 있었다. 이 경우 이브라힘 파샤는 다마트 이브라힘 파샤를 칭할 수 있었다.[17] 한국사로 비유하면, 왕은 입도 뻥끗한 적 없는데 신하가 마음대로 공신 칭호를 스스로에게 붙인 격이다. 제아무리 총신이고 권신이라도 왕의 심기를 거스르는 짓인 게 당연하다.[18] 사실, 질투하는 게 당연하다. 누구는 몇년째 똑같은 직위에서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저쪽의 잘난 누구씨는 3년만에 재상의 자리에 올랐으니 말이다.[19] 페르시아와의 전쟁 때, 당시 쉴레이만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있었기 때문에 총사령관의 자리가 비어있었는데, 전략이나 누가 총사령관을 맡을 것인가를 두고 둘이 사사건건 대립했다고 한다.[20] 어려서 사망한 경우는 제외했다.[21] 오스만 제국의 황위 계승법에 대해서는 아흐메트 1세 항목 참고.[22] 1566년. 이브라힘이 죽은 지 정확히 30년 뒤에 죽었다.[23] 드라마 초기화에서 이브라힘이 경호실장으로 있었을 때.[24] 환관인 '쉼뷜 아아'를 가리키며 가위질 흉내를 낸다.[25] 보다 정확히는 무라드 1세 시대에는 데브시르메로 군인만 뽑았고, 유명한 메메드 2세의 부왕인 무라드 2세 시대부터 관료도 선발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무라드 2세 시대를 기준으로 잡아도, 쉴레이만 시대로부터 백년 전.[26] 조금 첨언하자면, 제국의 창건자 오스만 1세는 자신의 힘만으로 제국을 세운 것이 아니다. 당시 동쪽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던 몽골을 피해 많은 투르크인들이 아나톨리아 반도로 이주해 왔는데, 그 가운데에는 이슬람 세계의 십자군이라고 할 수 있는 가지(Ghazis)와 학자, 성직자 등 지식인 계층인 일미예(Ilmiye)들도 많았다. 오스만은 바로 이들을 포섭하여 나라의 기틀을 마련한 것이었지만, 이후 그들이 군주권을 위협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한국사에서 지방 세력가들을 포섭하여 성장한 고려광종 이전까지 어떤 모습을 보였는가를 떠올려보면 이해가 쉽다. 따라서 오스만 제국은 무라드 1세 시대부터 발칸 반도기독교도 소년들을 징집하여 군사로 만드는 데브시르메 제도를 시행하기 시작했고, 이들이 바로 훗날의 예니체리다. 데브시르메 제도가 성과가 있다고 판단되자 무라드 2세 시대부터는 데브시르메 출신자 중에서 관료도 선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이후부터는 이들이 아예 정계의 핵심으로 자리잡으니, 쉴레이만 시대에 "쟤 그리스 출신 듣보잡이래." 운운하는 건 심각한 재현 오류인 셈. 다만 이브라힘과 쉴레이만의 사이가 각별한 것은 사실이었고, 이로 인해 다른 관료들의 견제를 받은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27] 원 역사에서 휘렘을 쉴레이만에게 바친 것은 지방 태수다.[28] 오스만 술탄 가문에서 전해오는 야사들 중에는 휘렘이 자신이 쉴레이만의 여자이기 이전에 이브라힘의 애인이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그를 제거했다는 얘기가 있다고 하며, 이 만화에선 야사를 비튼 내용이 나온다.[29] 다만 지도자 특성이라는 게 문명 4문명 6에만 있는 시스템이고 그나마 4편의 것은 공용 특성을 잔뜩 만들고 각 지도자마다 둘씩 나눠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