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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메이 황후

쿠죠 사다코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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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쇼 덴노의 황후
데이메이 황후
貞明皇后
파일:데이메이 황후.jpg
<colcolor=#dca600> 출생 <colbgcolor=#fff,#1f2023>1884년 6월 25일
일본 제국 도쿄부 도쿄시 간다구 간다센마치[1]
사망 1951년 5월 17일 (향년 66세)
교토부 교토시 오미야 어소(大宮御所)
즉위 1915년 11월 10일 (교토고쇼)
능묘 도쿄도 하치오지시 다마 동릉(多摩東陵)
재위기간 황후
1912년 7월 30일 ~ 1926년 12월 25일
황태후
1926년 12월 25일 ~ 1951년 5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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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dca600> <colbgcolor=#fff,#1f2023>사다코([ruby(節子, ruby=さだこ)])
부모 부친 구조 미치타카(九條 道孝)
1839.6.11 ~ 1906.1.4 (향년 66세)
모친 노마 이쿠코(野間 幾子)[2]
형제 4남 5녀 중 다섯째 (4녀)
배우자 다이쇼 덴노
1879.8.31 ~ 1926.12.25 (향년 47세)
자녀 4남
쇼와 덴노
1901.4.29 ~ 1989.1.7 (향년 87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1902.6.25 ~ 1953.1.4 (향년 50세)
다카마쓰노미야 노부히토
1905.1.3 ~ 1987.2.3 (향년 82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1915.12.2 ~ 2016.10.27 (향년 100세)
학력 화족여학교 초등소학과
화족여학교 고등소학과
화족여학교 초등중학과
종교 신토
십이지 원숭이띠 (갑신년)
오시루시[3] 등나무 }}}}}}}}}
1. 개요2. 출생과 친정 가문3. 성장4. 황태자비 간택5. 황후 시절6. 태후 시절
6.1. 한일 정략결혼에 관여
7. 가족
7.1. 황실 가계도7.2. 자녀
8. 시어머니로서의 모습9. 사망10. 기타

[clearfix]

1. 개요

다이쇼 덴노황후이자, 쇼와 덴노의 어머니. 이름은 구조 사다코(九條節子). "데이메이(貞明 정명)"는 사후에 정한 시호이기 때문에 생전에는 사용한 적이 없고, 생전에는 사다코 황태자비, 사다코 황후, 사다코 태후로 불렸다.

2. 출생과 친정 가문

1884년 6월 25일, 구조 미치타카(九條道孝) 공작과 측실 노마 이쿠코(野間幾子)의 4녀로 태어났다. 구조 가문은 고셋케 중 하나로, 데이메이 황후 외에도 그 전에 고메이 덴노의 정실부인인 에이쇼 황후를 배출한 바 있다. 에이쇼 황후는 구조 미치타카 공작의 누나로, 데이메이 황후에게는 시할머니이자 고모가 된다.

데이메이 황후의 둘째 언니(동복) 노리코(範子)는 방계 황족 야마시나노미야 기쿠마로(山階宮菊麿) 왕의 비가 되었다. 노리코 비는 2남 1녀를 남기고 기쿠마로 왕보다 먼저 사망했고, 기쿠마로 왕은 훗날 데이메이 황후의 큰며느리인 고준 황후의 이모 시마즈 히사코(島津常子)를 후처로 맞이하여 아들 셋을 더 낳았다. 히사코 비의 장남 후지마로(藤磨) 왕은 훗날 덕혜옹주의 신랑감으로 거론되었으나, 그는 신적강하를 신청하여 황족에서 화족(후작) 신분으로 내려갔으며[4] 모리 기요코(毛利喜代子)라는 일본 여성과 결혼했다.

셋째 언니(동복) 카즈코(籌子)는 교토 니시혼간지 주지승인 오타니 고즈이와 결혼했고, 이복 남동생 요시무네(良致)는 고즈이의 여동생 다케코와 결혼했다. 다케코는 카즈코와 함께 불교계 여학교인 교토여자대학을 설립하였다.

오빠 미치자네(道實)는 덕혜옹주의 전남편인 소 다케유키의 후견인이다.[5] 미치자네의 5녀 도시코(敏子)는 방계 황족 가야노미야 쓰네노리(賀陽宮恒憲) 왕에게 시집가 6남 1녀를 낳았는데, 고명딸 미치코(美智子)[6] 여왕은 도쿠다이지(德大寺) 가문에 시집갔다가 이혼했다.

3. 성장

화족 사회의 관습에 따라, 갓 태어난 사다코는 학령이 될 때까지 다른 가정에 맡겨졌다. 도쿄 근교에 있었던 그 집은 농가였고, 어린 사다코는 농촌에서 뛰어놀면서 활달하고 씩씩하게 자라났다. '구조 가문의 쿠로히메(黑姬)'라는 별명은, 그녀의 어린 시절을 잘 나타낸다. 짧은 머리카락에 온종일 밖을 돌아다니며 새카맣게 그을릴 때까지 뛰어놀았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 먹성도 좋아서 식사 때 반찬으로 나온 생선은 내장까지 모두 먹어치울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건강함과 활달한 성격요시히토 황태자의 병약함과 대조되는 것이었고, 사다코가 황태자비로 간택되는 요인이 되었다.

1890년부터는 화족여학교[7]에 입학하여 공부를 시작했다. 어릴 적 놀았던 습관과 스타일 때문에 초반에는 힘들어했다고 한다. 학창 시절에는 시모다 우타코(下田歌子), 이시이 후데코(石井筆子), 쓰다 우메코(津田梅子)[8] 등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특히 후데코와는 평생 깊은 친분을 쌓아, 후데코와 그녀의 남편 이시이 료이치(石井亮一)가 운영하는 타키노가와(瀧乃川) 학원[9]을 후원하기도 했다.

4. 황태자비 간택

1900년 2월 11일, 사다코는 만 15살의 나이로 5년 연상인 요시히토 황태자와 약혼하였다. 황실로 시집오기 전, 사다코는 마데노코지 사치코(万里小路幸子)라는 늙은 여관(女官)으로부터 궁중의 예법을 배웠다. 사치코는 어린 사다코를 엄격하게 가르쳤다. 당시 사다코는 무척 힘들어했으나, 훗날에는 "그때 사치코의 교육이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며 고마워했다고 한다. 무사히 교육을 마친 후, 사다코는 동년 5월 10일 요시히토 황태자와 결혼식을 올리고 황태자비가 되었다.

사다코 황태자비는 병약하고 유약하여 바보 취급을 받던 남편 요시히토 황태자를 직접 돌보아서 상태를 호전시켰고, 부부 사이도 원만했다. 데이메이 황후 본인이 당시의 일본인 여성으로서는 상당히 성격이 활달하고 시원시원한 편이어서, 그런 점이 가식을 부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담백한 성격이었던 다이쇼 덴노와 오히려 잘 어울렸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

또한 오랫동안 정실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후궁 소생으로 계승되던 일본 황실의 전통 아닌 전통을 깨고, 건강한 아들을 4명이나 낳았다. 만 16세이던 1901년 4월 29일에 장남 미치노미야 히로히토 친왕을 낳았고, 이후로도 아들을 3명이나 더 낳았다. 그래서 요시히토 황태자는 굳이 후궁을 둘 필요가 없었고, 아들을 4명이나 낳은 사다코의 입지는 굳건해졌다. 이 때 태어난 히로히토 친왕이 황태자 시절부터 후궁 제도를 거부함에 따라, 일본 황실에서 일부일처제가 확립되었다.

5. 황후 시절

1912년 7월 30일에 시아버지 메이지 덴노가 사망하고, 남편 요시히토 황태자가 새 천황으로 즉위하면서 사다코 황태자비도 황후가 되었다. 1915년 11월 10일 교토고쇼에서 즉위식이 치러졌으나, 사다코 황후는 넷째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결석하였다. 약 한 달 후 출산할 때는, 메이지 덴노의 후궁소노 사치코가 도왔다.

사다코 황후는 신토의식 등의 전통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근대 여성교육자 및 신여성들을 자주 궁중에 부르기도 했고, 신식 여학교들을 방문하여 격려하기도 했으며, 시어머니 쇼켄 황후의 뒤를 이어 양잠 사업을 장려하였고, 나병 구제 사업에도 힘썼다.

즉위 이전부터 상태가 썩 좋지 않았던 다이쇼 덴노는 병으로 나랏일을 더이상 하지 못하게 되었고, 1921년 11월 25일부터 불과 20살의 장남 히로히토 황태자가 대리청정을 맡게 되었다. 사다코 황후는 남편을 돌보는 한편, 어린 장남의 배후에서 황실과 나랏일을 장악하며 거물급의 대신들과 맞섰다. 그러한 사례 중 하나로 궁중모중대사건이 있는데, 바로 장남 히로히토 황태자의 황태자비를 간택할 때 벌어진 일들이다.

당시 일본 정계의 실력자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총리는, 황태자비 후보로 화족 가문의 딸인 이치조 도키코(一條朝子)를 지지했다.[10] 그러나 사다코 황후는 항상 자신의 남편을 무시하며 함부로 굴던 야마가타가 지지하는 규수를 며느리로 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황태자비로 삼을 만한 규수들을 초청하여 다과회를 여는 등, 나름 스스로 맏며느리 후보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방계 황족 가문의 딸인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을 지지하던 쪽에서는 그 점을 알고 은밀하게 사다코 황후에게 접근했고, 사다코 황후는 그들과 연합하여 야마가타 일파와 물 밑 싸움을 벌였다. 결정적으로 당사자인 히로히토 황태자도 나가코 여왕을 마음에 들어했고, 결국 나가코 여왕이 황태자비로 확정되었다. 패배한 야마가타는 쓸쓸히 정계를 떠났다.

1923년 관동대지진 때는 이재민들을 위문하기도 했다. 당시 '황태자의 약혼녀' 신분이었던 나가코 여왕도 예비 시어머니의 행보를 따라, 추모와 애도의 뜻을 표하는 와카를 짓기도 했다.

1925년 12월 6일, 장남 히로히토 황태자와 나가코 황태자비가 첫 아이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를 낳았다. 첫 손주가 태어남으로써 사다코 황후는 할머니가 되었다.

6. 태후 시절

1926년 12월 25일, 다이쇼 덴노는 하야마(葉山)에 있는 황실 별저에서 생모인 야나기하라 나루코[11]가 지켜보는 가운데 사망했다. 그리고 장남 히로히토 황태자가 쇼와 덴노로 즉위함에 따라, 사다코 황후는 태후가 되었다.

남편이 죽은 후로 사다코 태후는 남편의 영정이 모셔진 방에서 시간을 보냈으며,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을 대하며 시중드는 것처럼 행동하였다고 한다. 한편 나병 구제 사업도 계속하여, 1931년에는 사다코 태후의 하사금으로 나병 예방 협회가 설립되었다. 사다코 태후의 생일 전후는 '나병 예방의 날'로 지정되었으며, 나중에는 '나병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주간'이라고 개칭되었다.

1943년, 맏손녀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가 시집갔다. 손녀사위는 방계 황족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12]의 장남인 모리히로(盛厚) 왕이었다. 시게코 비는 1945년 3월에 첫 아이 노부히코(信彦) 왕을 낳았고, 사다코 태후는 증조할머니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도쿄에까지 폭격이 한창일 때도 황실은 피난하지 않았는데, 이는 황실의 가장 큰 어른인 사다코 태후가 피난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다코 태후와 친분이 있었던 야마모토 겐포(山本玄峰)라는 승려는 "태후께서는 전쟁으로 국민들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아 괴로워하십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패전 뒤에는 시즈오카의 황실 별장에서 보냈다.

패전 후인 1947년 5월 3일, 신헌법 시행에 따라 화족 제도가 없어졌고, 화족들도 모두 평민이 되었다. 뒤따라 10월 14일, 구황족황적이탈라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다이쇼 덴노와 사다코 태후의 직계 후손을 제외한 나머지 방계 황족들이 모두 평민 신분으로 전락한 것이다. 방계 황족에게 시집가 결혼 후로도 황족 신분을 유지하던 황녀들도 모두 평민이 되었다.

1950년에는 셋째 손녀[13] 다카노미야 가즈코 공주가 옛 화족(공작) 가문의 아들인 다카쓰카사 도시미치(鷹司平通)에게 시집갔다. 가즈코 공주는 황적을 이탈해 평민이 되었다.

6.1. 한일 정략결혼에 관여

대한제국의 황실 자녀들을 일본인정략결혼시키는 일에 관여했다. 영친왕일본 방계 황족 마사코 여왕과 결혼했고, 의친왕의 장남 이건 공은 화족 마쓰다이라 요시코(松平誠子)[14]와 결혼했으며, 덕혜옹주쓰시마 섬 도주 가문의 아들인 화족 소 다케유키와 결혼했다. 의친왕의 차남 이우 공도 일본인과 결혼시키려 했지만, 이우 공은 일본의 요구를 결사적으로 거부하며 저항했다. 결국 이우 공은 박영효의 손녀인 박찬주와 결혼했다.

사다코 태후가 사망한 후, 이건과 요시코는 불화 끝에 이혼했다. 소 다케유키는 평민으로 강등되어 가세까지 기운 와중에도 병으로 정신이 온전치 못했던 덕혜옹주를 한동안 데리고 살았지만, 결국 그도 1955년에 덕혜옹주와의 결혼생활을 그만두었다. 덕혜옹주는 의사표현을 할 수 없어서 옹주의 오빠 부부이자 후견인인 영친왕, 이방자 부부와 대신 합의하여 이혼 절차를 밟았다.

7. 가족

7.1. 황실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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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쓰카사 도시미치
         
이케다 다카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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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즈 히사나가
구로다 요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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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다다테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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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 소시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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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게 구니마로
모리야 케이



7.2. 자녀

파일:726px-Emperor_Taisho's_sons_1921.jpg
왼쪽부터 장남 히로히토, 4남 다카히토, 3남 노부히토, 차남 야스히토

오랫동안 적자 계승이 드물고 그녀의 남편조차 후궁 소생이었으나 그녀는 건강한 아들을 4명이나 낳았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시기였던 탓에 4명의 황자들은 결혼 이후 평생 아이를 갖지 못하거나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거나 패전 이후의 삶을 살아야했다.

8. 시어머니로서의 모습

맏며느리 고준 황후(나가코)에게는 매우 어려운 시어머니였다고 한다.[19] 사다코 태후는 화족 가문의 서녀였지만, 나가코 황후는 방계 황족 가문의 적녀여서 출신 신분이 더 높았다는 열등감도 있었다. 농촌에서 뛰어놀며 자라나 활달하고 씩씩한 성격이었던 사다코 태후와, 다소 차분한 성격이었던 나가코 황후의 성격 차이도 있었다. 나가코 황후의 친정 구니노미야 가문이 외척임을 믿고 방약무인하게 굴어 사다코 태후의 미움을 샀던 이유도 있으며, 나가코 황후가 결혼 후 공주만 줄줄이 4명을 낳았던 것도 시집살이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사다코 태후는 맏며느리를 꾸짖을 때, 좀처럼 직접 대놓고 꾸짖지 않고 늘 시녀를 통하여 전달하곤 했다. 그러나 그러한 방침을 깨뜨린 적도 있었다. 다이쇼 덴노가 아직 살아있던 시절, 황태자 부부는 하야마(葉山)에서 요양 중이던 다이쇼 덴노를 문병했다. 이미 그동안 시집살이에 시달렸던 나가코 황태자비시어머니의 앞에서 긴장한 나머지 장갑을 낀 채로 물수건을 짜는 실수를 저질렀고, 사다코 황후는 시종들도 있는 앞에서 "너는 무엇을 해도 못나게 구는구나!!"라고 꾸짖었다. 나가코 황태자비는 무어라고 대꾸할 수도 없어서 고개를 숙인 채 시어머니의 꾸중을 듣고만 있었고, 이 사건은 시종들의 앞에서 고부갈등을 드러낸 꼴이 되고 말았다.

이후 나가코 황후가해자가 된 피해자의 길을 걸어 미치코 황태자비에게 악질적인 시집살이를 시켰다. 미치코 상황후/갖가지 시집살이 에피소드 참고. 미치코 황후도 맏며느리 마사코 황태자비가 아들을 못 낳는다며 고달픈 시집살이를 시켰다고 하니, 사다코 → 나가코 → 미치코 → 마사코까지 고부갈등의 대물림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그 아래의 들은 귀여워하여, 종종 불러 식사나 다과를 함께 하였다고 한다. 특히 둘째며느리 세츠코 비를 귀여워하였는데, 세츠코 비는 매년 히나마쓰리 때마다 시집올 적에 친정에서 가져온 인형들을 장식하였고, 그것을 시어머니 사다코 태후와 함께 감상하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세츠코 비는 이후 회고록에서 "아들만 네 분이시니, (딸을 위해 히나마쓰리를 준비해줄 일이 없었기 때문에) 말년의 낙으로 삼으셨다."고 언급했다.

그러나 정정하자면, 미치코 황후는 시할머니 데이메이 황후, 시어머니 고준 황후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마사코 황태자비와 갈등이 있던 것은 맞지만, 황실 어른으로서 할 만한 행동이 많았던 터라, 정작 마사코 황태자비에게 가해진 상식 이하의 유치한 괴롭힘은 시어머니 미치코 황후가 아닌 궁내청의 짓이었다. 더군다나 미치코 황후는 그럴 의도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사코 황태자비가 미치코 황후의 행동을 잘못 이해하여 마음고생 한 적도 많다. 애초에 근대 일본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내고 황실에서 50년 넘게 생활한 미치코와, 태생만 일본인이지 외국 각지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서구적 가치관을 형성하며 살아온 마사코가 고부관계로 살며 마찰이 없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40여년간 지속된 유치하고 엽기적인 괴롭힘으로 큰며느리를 시집살이시킨 고준 황후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큰 실례다. 더군다나 데이메이 황후의 경우 맏며느리를 사적으로는 싫어했을지언정, 공적으로는 일국의 황후로서 대했다. 장갑을 낀 채로 물수건을 짠 걸 빼면 항상 시녀를 통해서만 꾸중하는 말을 전달하는 등, 맏며느리 고준 황후처럼 일국의 황후라고 보이지 않는 수준으로 공사구별 없이 유치하게 행동하지는 않았다. 미치코 황후는 매번 필요할 때마다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면서까지 큰며느리에게 힘을 실어준 시어머니였다. 결국 고준 황후가 제일 나쁘다. 미치코 황후와 마사코 황태자비는 후미히토 일가의 만행 발각 이후부터 사이가 매우 좋아졌다.

9. 사망

연합군 점령하 일본 시기이던 1951년 5월 17일, 협심증으로 사망했다. 향년 66세였고, 67번째 생일을 불과 1달여 남겨둔 때였다. 사다코 태후는 황태자비 시절 잠깐 장티푸스에 걸렸던 것을 제외하고는 병을 앓은 적이 없이 건강했고, 이날도 공무가 예정되어 있었으나 급사하였다고 한다. 사후의 시호 '데이메이'는 "일월(日月)의 길은 정명(貞明)한 것이다"라는 《역경(易經)》의 구절에서 따왔다.

황후릉은 하치오지시타마 동릉이다. 데이메이 황후는 역대 일본 황후 중 최초로 간토 땅에 묻힌 황후이다. 또한 패전 이후 새로 제정된 일본 헌법황실전범에 따라 묻힌 최초의 황족이기도 하다.

데이메이 황후가 사망한 지 얼마 안 되어, 넷째 손녀 요리노미야 아츠코 공주가 옛 화족(후작) 가문의 아들인 이케다 다카마사(池田隆政)와 약혼했다. 초상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쇼와 덴노궁내청 장관에게 명하여 약혼을 발표하게 했다고 한다. 이듬해인 1952년, 아츠코 공주는 다카마사와 결혼하여 황적을 이탈했다.

10. 기타

데이메이 황후(貞明皇后)의 시호인 정명(貞明)은 전근대 동양 사회에서 나름 많이 사용된 호칭이다.


[1]도쿄도 치요다구[2] 정실 부인이 아닌 측실이었다.[3] 일본 황족에게 주어지는 개인 표식. 주로 식물이며, 사용하는 물건 등에 붙는다.[4] 이때 '쓰쿠바(筑波)'라는 성씨를 지어, '쓰쿠바 후지마로'로 이름을 바꾸었다.[5] 소 다케유키는 일찍 양친을 모두 잃어, 미치자네가 다케유키의 후견인이 되어주었다.[6] 데이메이 황후의 손자며느리 미치코 상황후와 한자까지 똑같다.[7] 이후 가쿠슈인에 통합되어 가쿠슈인 여학부가 되었다. 가쿠슈인 여학부는 교사(校舍)가 화재로 불타버려 새로 건물을 지어 이전하게 된 것을 계기로 여자 가쿠슈인으로 개편되었고, 패전 후인 1947년에는 가쿠슈인으로 다시 통합되어 오늘날의 가쿠슈인 여자중등과, 여자고등과, 여자대학이 되었다.[8] 일본 여성 최초로 미국유학을 다녀온 인물 중 하나. 1871년 8살의 어린 나이로 다른 소녀 4명과 함께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영어와 신학문을 배웠고, 개신교 세례를 받고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귀국 후 영어교육 및 여성교육에 힘썼으며, 일본의 명문 여자대학쓰다주쿠대학을 설립했다.[9] 일본 최초의 지적장애인 시설[10] 이치죠 가문 역시 데이메이 황후의 친정인 구조 가문처럼 후지와라가 뿌리인 고셋케이다.[11] 메이지 덴노후궁이다. 그러나 다이쇼 덴노는 꽤 오랫동안 쇼켄 황후가 자신의 생모인 줄 알았다고 한다.[12] 쇼와 덴노의 고모부이며, 나가코 황후의 숙부이다. 즉 나가코 황후로서는 작은아버지이자 시고모부이자 사돈이 되는 셈.[13] 둘째 손녀 히사노미야 사치코 공주는 생후 6개월에 죽었다(1927-1928).[14] 이방자 여사의 이종사촌 여동생. 이혼 후에는 이름의 한자를 佳子로 바꾸었다. 카코 공주의 한자와 같다.[15] 이방자 여사의 이종사촌 여동생이기도 하다.[16] 노부히토 친왕과 키쿠코 비 내외도,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조카며느리 미치코 황태자비를 멸시했다. 자세한 것은 미치코 상황후/갖가지 시집살이 에피소드 항목을 참조.[17] 패전 이후 신분과 재산을 잃는 등 어려움을 겪다가, 1948년에 자살했다.[18] 할머니 데이메이 황후가 세상을 떠난 지 5개월 후에 태어났다.[19] 덤으로 고준 황후부터 본격 일부일처제가 시작되면서, 그에 대한 황실 시집살이가 기록되었다 볼 수 있다. 데이메이 황후 시절은 후궁을 들여도 되었던 시절이나, 당시 천황인 다이쇼 덴노가 굳이 들이지 않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