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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7 22:09:59

코튼 실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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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코튼 실링: 나의 사적인 트랜스포비아2. '코튼 실링'이란 말을 들은 반응
2.1. 과연 상대방이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만으로 상대방과의 관계를 거부할 수 있는가?2.2. 인간관계를 형성함에 있어 커밍아웃은 의무인가?2.3. 코튼 실링 비판이 전환치료의 논리로 치달을 수 있단 의견
3. 코튼 실링을 극복하기 위한 현실에서의 대처4. 창작물에서의 묘사5. 관련 문서

1. 코튼 실링: 나의 사적인 트랜스포비아

유리천장이라는 말이 있다. 명확히 보이지는 않으나 올라가다보면 언젠가는 마주치게 되는 성차별의 장벽으로 인해 남성들과 대등한 능력을 지녔음에도 일정 수준 이상의 직급으로 올라가지 못하는 여성 차별 현상을 일컫는 페미니즘 용어로, 영어로는 glass ceiling이라고 부른다.

코튼 실링(Cotton ceiling, 면 천장)이런 비유에 착안한 신조어로, 오로지 자신의 성 정체성과 그에 부합하지 못하는 신체를 이유로 연인에게 성행위, 더 나아가 일체의 인간관계를 거부당하는 현상을 '속옷의 면을 못 넘는다'는 뜻으로 '면 천장'으로 표현한 말이다. 굳이 의도를 살려 좀 더 외설적(?)으로 번역하자면 팬티천장 정도가 되겠지만 온 천장을 팬티로 장식했다는 뜻도 아니고(...) 면 천장이든 팬티천장이든 한국어로 번역한 단어는 딱히 널리 쓰이지는 않아서 그냥 코튼 실링이라고 부르는 게 일반적이다.

남녀라는 두가지 성별만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성별 이분법적 사회에서 트랜스젠더에 대한 박해는 극우파마냥 대놓고 자행하는 증오 선동, 폭력만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공적 영역에서의 이슈로는 안전한 성전환 치료를 받기 위한 의료접근권, 법 앞에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을 권리, 차별금지법 투쟁, 병역 처분과 군에서의 인권보호, 법적 동성결혼, 구직활동 시의 부당대우 등이 있다. 허나 무릇 트랜스포비아란 절대 공적 영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사적 레벨에서의 차별, 혐오가 트랜스젠더의 삶을 더욱 피폐하게 만든다. 일단 커밍아웃과 성전환 치료가 시작되면 첫째로 가족, 친지들과의 대인관계가 서먹해지고 의절에 이르기까지 한다. 살다살다 조카몬조차도 그리워지는 순간이 온다. 그나마 남아있는 옛 지인들은 자신을 계속 짜증나는 옛 이름으로만 부른다. 그렇게 옛 대인관계가 흐지부지되면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새로 생기는 지인들은 아예 스텔스에 들어간다면 주변의 다른 아저씨, 아줌마, 젊은이들일 테고 F-35급의 스텔스 기술력을 못 갖춘 이들은 주로 트랜스젠더를 비롯한 성소수자 판의 퀴어들을 만난다. 그렇게라도 어떻게든 자신이 원하는 삶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삶을 살며 자존감을 끌어올리고 그러다 서로 눈이 맞아 연애를 시작한다.

문제는 트랜스젠더라는 정체성에 아무리 프라이드를 가진들 연인간의 성적 관계에서는 상대방이 바라는 것을 주기 어렵다는 것이다. 더욱이 연인과 교제를 시작하면서 자신의 과거를 숨기고 있었다면 호감이 깊어질수록 성행위에 대한 압박은 커지기만 한다. 결국 상대방이든 자신이든 누군가 먼저 성관계를 원하게 되는 것이 보편적이다. 그렇게 되면 트랜스젠더 당사자는 "얘가 내 꺼 보고 놀라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끝내 성행위에서의 어색함을 해소하기 위해 갑분싸해지는 커밍아웃을 하게 된다.

그런데 커밍아웃 후로 서로간의 관계는 예전처럼 친근하지가 않으며 연락도 뜸해진다. 애인은 스스로의 성적 지향에 대해 한치의 의심도 없다며 트랜스젠더라 커밍아웃한 애인을 괴물 보듯이 혐오스러운 시선이나 그 정도까진 아니어도 몹시 서먹하게 대하며 일체의 스킨십을 거부하더니 결국 결별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아픔, 트랜스젠더가 아니었더라면 겪을 필요가 있었을까? 만약 시스젠더로 태어나 평범하게 데이트했더라면 이렇게 서럽게 차였을까? 법적으로, 제도적으로 문제되지 않는다고 이런 사적 영역에서의 차별대우와 설움은 당연히 감내해야 하는 것일까?

2. '코튼 실링'이란 말을 들은 반응

이 말은 원래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 이도 저도 아닌 존재로 여겨지며 겉도는 트랜스레즈비언의 푸념조로 나온 거라 가장 격렬한 반감을 표한 쪽은 아무래도 동성애자 커뮤니티였다. 레즈비언들은 이 말을 듣고 "니가 여자냐?", "고추 달린 놈이랑 자기 싫어!", "사기꾼!", "전환치료하고 자빠졌네!" 등의 노골적인 반감을 드러냈으며 이를 레즈비언과 성행위하려는 '여장남자'들의 변명이자 성폭력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가스라이팅이라고 여겼다. 시스젠더 레즈비언들 입장에서는 '여성기'를 갖춘 여성과의 성행위를 당연하게 여기기 때문에 이런 말을 들은 첫 반응은 이럴 수밖에 없었으며 그 과정에서 페미니즘의 이름으로 트랜스포비아를 정당화하는 TERF나 그것을 지지하는 레즈비언들은 트랜스젠더들을 분탕종자로 규정하고 혐오 발화와 증오 선동을 시작했다. 예로부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시스젠더 남성 세계의 트랜스젠더를 성적으로 대상화하는[1] 각종 음담패설에서 알 수 있듯이 트랜스젠더리즘을 우리들 중 누군가의 살아가는 모습이 아닌 '우리들과 다른 불쾌한 존재'로 여기는 이런 시선은 '평범한 남녀'만으로 이뤄진 세계를 살아가던 남녀들에겐 일반적인 것이었다. 그런 데다 성적 지향 면에서 소수에 해당하는 동성애자, 양성애자 등의 결집력은 상상 그 이상이다. 프라이드 퍼레이드 같은 것만 봐도 감이 오지 않는가! 인맥풀이 상대적으로 좁은 그들의 사회에서 이뤄지는 성적인(혹은 로맨스) 목적의 인간관계는 비성소수자 사회에서의 그것보다도 더 큰 신뢰를 담보로 하지만 트랜스젠더리즘이란 관념은 이런 성적 지향 소수자들 간의 신뢰에 있어 혼란을 초래하는 요인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유성애적 성적 지향 소수자들의 연애 시장에서 '반칙'으로 간주되었으며 정신적으로 남자건 여자건 몸으로 그 정신을 온전히 증명하지 못하는 트랜스젠더들은 시장질서를 흔드는 사기꾼, 먹튀, 투기꾼(?)으로까지 여겨졌다.

이런 비난을 보다 못한 담론의 지지자들도 즉각 반발했다. 공적인 차별도 서러운데 사적 대인관계조차도 자신의 남다른 성별 정체성을 이유로 어려움을 겪는 것이 온당하다는 주장을 트랜스젠더들이 용납할 수 있겠는가. 비록 코튼 실링이라는 말이 듣기에 굉장히 직설적이고 노골적인 것은 사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트랜스젠더들이 연인과의, 사실 로맨틱한 관계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사회생활에서의 인간관계를 형성함에 있어 겪는 어려움과 컴플렉스를 아주 분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트랜스젠더의 생애사를 관통하는 하나의 떡밥으로서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에게는 충분히 의의가 있었다.[2] 트랜스젠더들은 특정 성별에 대해 끌리는 성적 지향을 갖고 있으면서도 정작 그 성별의 연인이 트랜스젠더이며 성기의 생김새도 자신이 기대했던 것과 다름을 알게 되자 그러한 끌림이 눈 녹듯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본질적으로 미스젠더링의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주장했다.

2.1. 과연 상대방이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만으로 상대방과의 관계를 거부할 수 있는가?

당연히 있다. 그 어떤 이유에서라도 사람의 성적 자기결정권은 존중받아 마땅하며 이런 거부 의사를 무시하는 걸 성폭력이라고 한다. 그 어떤 이유를 들어도 싫은 건 싫은 거고 끌리지 않는 것은 끌리지 않는 거다. 그런 거부 의사를 듣고도 계속해서 맘에도 없는 성행위를 억지로 요구하는 인간과의 관계는 정말 무서운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미리 끝장을 보는 것이 스스로의 안위에 좋다.

일부는 트랜스젠더와의 관계를 거부하는 것이 트젠에 대한 불합리한 편견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하지만 이런 전제는 로맨틱 성애를 느끼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비판이다. 무로맨틱 이성애자는 상대방을 성적으로 "사랑"하는 감정을 못 느끼고 육체에 성욕만 느끼는 성적 특성이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로맨틱 분야에 드는 성정체성(gender)를 이유로 사귀는 것을 강제하면 이는 교정강간에 해당된다.

가장 흔한 로맨틱 섹슈얼 이성애자라도 코튼 실링은 로맨틱 성애와 섹슈얼 성애 기준이 어긋나는 경우인 만큼 무조건 혐오를 이유로 거부한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다. 자신의 섹슈얼적 성적지향과 다른 기준의 육체접촉에 거부반응이 일어나고 비육체적 로맨틱 플라토닉 관계는 괜찮다면 이는 혐오가 아니다.

예를 들면 트젠이 '진짜 여성'이 아닌 것 같다는 이유로 이별을 고한다면 그것은 차별 행위가 되겠지만 특정 성기나 육체에 끌림을 느끼기 때문에 관계를 거절한다면 그것은 차별로 볼 수 없다. 트젠과의 관계를 거절했다고 트젠에 대해 불합리한 편견이 있으리라고 성급하게 추측한다면 그것도 또다른 폭력이 될 수 있으니 조심하자.

이렇다보니 트젠은 교제를 시작하기 전에 자신이 트젠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사회적 편견이나 여러 두려움으로 커밍아웃하지 못한 채 교제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별의 책임을 트랜스젠더에게만 돌리는 것은 상당히 부당할 것이지만 트랜스젠더인 것을 알지 못하고 교제를 시작한 상대방에게도 그 일이 날벼락일 것은 마찬가지일 테니 너무 자기연민적으로 굴지는 말자. 당신이 어떤 마음가짐과 상처를 가지고 있든 성적 지향에 어긋날 수 있는 조건을 뒤늦게 밝히는 건 파트너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운 일일 수 있다.

2.2. 인간관계를 형성함에 있어 커밍아웃은 의무인가?

근본적으로 트랜스젠더가 트랜스젠더 호르몬 치료, 성전환 수술 등의 치료와 커밍아웃을 감행한다면 인간관계의 호칭부터 시작해 외모 변화, 남이 자신의 행동거지를 보는 시선 등 사회생활 곳곳에서 전으로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겪게 된다. 이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처음엔 즐겁다가도 장기적으로는 즐겁다기보다는 굉장히 피곤한 일이 된다. "남자에요? 여자에요?" 소리도 한두번이지 맨날 듣는다면... 이러한 피곤하기만 하고 해결해 봤자 남들 대비 본전치기밖에 안 되는 문제를 회피하고만 싶은 것은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벽장 밖으로 나와 자신이 원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찾아가는 트랜스젠더들은 이런 짜증나고 피곤한 문제들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스텔스 성능 향상에 필요한 여러가지 사회생활 노하우를 습득하고 갖가지 수단과 방법으로 노하우를 실천한다. 성전환 수술을 다 하고 성별 정정까지 마쳤음에도 연인에게 자신의 목소리가 거슬리게 들리지 않고자 음성여성화수술을 받고 수술의 흔적이 남은 크고 작은 흉터를 가리기 위해 현란한 문신을 입히고 미칠듯이 운동하여 체격을 키우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남은 평생을 피곤한 상황에 놓이지 않을 수 있다면 그 정도 수고는 충분히 값어치를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피곤한 문제를 친구나 연인이 온전히 공감하고 보듬어주리란 보장이 있는가? 기껏 커밍아웃했더니 자신의 아픔을 외면하고 떠나 버리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는가? 그런 리스크를 감수하건 그냥 회피하건 그건 트랜스젠더 당사자가 판단해야지 왜 남이 주제넘게 강요하는가?

인천대학교 대나무숲에 올라온 사연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당사자 입장에서는 저 가해자를 튀겨죽이고 싶을 노릇이지만 이게 어떤 기분인지 모르는 사람들은 정말 이걸 사기라고 여긴다. 물론 이 사연에서는 뺨 때리고 훅 나가버린 애인은 둘째치고 아웃팅을 아주 당당히 자행하고는 저런 대나무숲 글을 작성한 친구부터가 문제 많은 인간이긴 한데 애인에게 커밍아웃을 하건 말건 그건 당사자가 알아서 처리할 문제다. 그런 치부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금니 꽉 깨물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커밍아웃한다는건 사랑하는 사람을 진심으로 믿는다는 뜻이다. 이렇게 스텔스 상태에서 트랜스젠더가 커밍아웃을 한다는 것은 자신의 생존과 행복을 위한 절박한 외침일 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전적으로 신뢰하기에 자신의 모든 치부를 드러내면서라도 쌍방 간의 깊은 신뢰관계를 원한다는 의사의 표현이지만 커밍아웃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상대방을 불신한다거나 상대방을 기만하려는 뜻으로 읽힐 수는 없다. 트랜스섹슈얼리즘이 HIV마냥 성행위에 앞선 사전 대비가 필요한 법정 감염병도 아니고 사람이 사람에게 정체성을 까발리라고 강요할 수 있는가? 외국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는데 이 사건의 당사자였던 트랜스남성은 '사기'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사건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댓글창에서도 트랜스젠더 남성이 종교마저 뛰어넘은 7년간의 교제 과정에서 겪었을 마음고생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고 '사기결혼'이라는 말만을 반복하고 있다. 결혼에 이르기까지 커밍아웃을 하지 않았다는 점은 신부의 입장에선 너무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트랜스젠더 남성은 왜 그것을 '반드시' 알려야 하는가? 자신의 아픔에 대해 쉬이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녕 법의 철퇴까지 맞아야 하는가? 이 글에서도 지적하듯이 연인으로서의 공감과 이해는커녕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존중조차 받지 못하는 것이 과연 트랜스젠더가 자신의 정체성을 알리지 않은 대가로 감수해야 하는 일인가? 인간으로서 존중을 받을 가치와 권리는 당연히 있으나 상대방의 정체성을 몰랐던 애인 입장에서는 사기가 맞다. 애인으로서 상대방과 결혼까지 약속하였는데, 정작 그 애인이 자신을 신뢰하지 않아 본인 입장에서의 치부를 드러내지 않고 속이고 있었다면 어떤 기분이겠는가? 상대가 본인을 속였다는 배신감과 인간관계 사이의 신뢰감이 깨질 가능성이 높다. 

2.3. 코튼 실링 비판이 전환치료의 논리로 치달을 수 있단 의견

정신적인 사랑을 못 느끼는 무로맨틱인 오직 성욕만 느끼는 유성애자가 있다고 하자. 우연히 모르고 트랜스젠더를 만나다 사실을 알고 헤어졌다면 트랜스 혐오가 아니고 도리어 교정강간 위협을 당한 피해자가 된다. 정신적 젠더(gender)가 어쩌든 무로맨틱 유성애자는 정신을 기준으로 하지 않기에 이를 강요하는것은 인권침해다. 가장 흔한 유로맨틱 유섹슈얼 성애자라고 하더라도 이 두 성 정체성이 상충을 일으키기 때문에 섹슈얼 정체성에 어긋나는 육체관계를 부정하고 오직 정신적인 교류만 인정한다면 이는 혐오가 아니며 반대로 강요하는게 혐오다.

코튼 실링이 인종이나 장애를 이유로 헤어지자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주장이 나왔는데 개인의 성적 지향에 따라서 상대방의 조건을 선별하는 것은 오랫동안 성소수자들이 외친 권리다.

이는 외모나 재산 또는 특정 인종이나 장애여부 등[3] 성적 취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조건에 따라 상대방을 사귀고 성행위하는 것은 분명하게 개인의 인권이다.

왜냐하면 연애는 개인의 삶을 침범하기 때문이다. 울타리 밖에서 자신과 다른 성적 지향을 가질 수 있고 이로 인해 조금이라도 불이익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현대적 가치이고 정의지만 울타리 안쪽에서 상대방에게 성적 지향을 들이대고 강요한다면 이는 폭력이다. 만약 이게 허용된다면 상대방이 일방적인 짝사랑을 하고 있는 경우에도 상대방의 사랑이 순수하다는 이유만으로 연애 및 성행위 등을 죄다 받아들여야 된다는 논리가 된다.

물론 문서 전반에 서술된 대외적인 아웃팅이나 차별로 만연한 사회 분위기에 편승해 타인의 인권을 짓밟는 행위는 절대 용서받을 수 없다. 트랜스젠더의 커밍아웃에 이전과 다른 시선으로 당사자를 바라보는 것조차 잘못된 행위로 근절되어야 한다.

하지만 반대로 무조건 상대방의 성적 지향을 깔아뭉개고 자신의 성적 지향만을 강요하는 것도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성적 지향을 타인의 압력으로 변경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이를 사전에 고지하고 상대방의 성적 지향과 합의하지 않는다면 이후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커밍아웃은 크게는 생존권과도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그 어떤 성소수자에게도 쉽게 강요할 수 있는 행위는 아니지만 성적 지향에 관련된 사실을 상대방에게 밝히고 합의하는 과정은 육체 관계를 포함한 연애에서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사항이 아니며 성적 지향에 따른 사회적 편견이 완전히 없어진 사회를 가정한다면 처음부터 상호 존중을 기반해 성적 지향과 정체성을 밝힌 후 만나는 단계가 기본적인 예의가 되어야 할 것이다.

3. 코튼 실링을 극복하기 위한 현실에서의 대처

연애를 시작하면서도 이러한 우울한 결말을 두려워하지 않는 트랜스젠더가 없다 보니 동성, 이성 관계를 막론하고 트랜스젠더들은 트랜스젠더 연인과 사귀는 이들이 꽤 있다. 트랜스젠더라고 자신이 좋아하는 성기가 따로 없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같은 트랜스젠더들은 애인의 컴플렉스를 스스로도 느끼기 때문에 진심에서 우러나온 배려와 공감을 할 수 있으므로[4] 젠더 디스포리아가 뭔지도 모르는 시스젠더 애인에게 자신의 사정을 납득시켜야 하는 스트레스를 겪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트랜스젠더끼리밖에 사귈 수 없다면'[5] 이는 만인에게 열려 있다는 자유 연애 시장에의 접근을 성 정체성을 이유로 차단당한 결과이기 때문에 경쟁력 떨어지는 약자는 도태되는 것이 당연한 '시장원리'라면 몰라도 '인권'의 관점에서는 불평등한 양상이 아닐 수 없다. 무슨 트랜스젠더들이 연애 시장 투기꾼도 아니고... 트랜스젠더가 아니어도 양성애자나 범성애자 연인을 만난다면 다행이겠으나 코튼 실링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시장성 면에서 높이 평가받지 못하는 트랜스젠더로서 시스젠더 연애시장에 끼어들어 그런 소수 성적 지향을 가진 사람만 골라 사귈 경쟁력을 갖춘다는게 쉬운게 아니다.

더러는 이러한 번민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선의의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자신이 트랜스젠더라는 커밍아웃 대신 인터섹스라는 거짓말을 하는 것. 무성애자가 아닌 이상 연인 간의 사랑이 깊어질수록 성행위에 대한 욕구는 커지기만 하지만 애인 앞에서 속옷을 벗기는 어렵기만 하다. 그 과정에서의 심적 부담을 덜기 위해 선천적으로 성기가 기형이었다거나 염색체나 호르몬 분비에 이상이 있었다는 등의 어설프면서도 그럴싸한 핑계를 드는데 애인도 퀴어인 경우엔 씨알도 안 먹힐 헛소리로 들리겠지만 흔한 시스젠더 이성애자 남녀라면 이런 핑계는 적어도 리스크를 줄이는 데는 꽤 효과가 있다. 트랜스젠더리즘에 대해 무지, 몰이해, 편견으로 점철된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아주 어릴 적부터 스스로 키워지는 성별과 다른 성별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고 하면 쉬이 와닿지 않을런지 몰라도 태어날 때부터 신체 장애가 있었다고 하면 느낌이 뭔가 다를 것이다. 이렇게 리스크를 줄이면 자신과 깊은 관계에 있는 사람의 그런 아픈 사정을 듣고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동정심 내지는 연민을 갖고 포용적인 태도를 보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한 말을 듣는 입장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몸 때문에 고생해온 애인을 '태어날 때부터 가졌던 아픔'을 이유로 차기엔 자신이 나쁜놈이 되는 것만 같아서 대놓고 나쁜 소리를 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사기다.

한편으로는 애인이나 배우자가 이해심 많은 사람이라면, 되려 애인 스스로부터 성적 지향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는(...) 경우도 있다. 중년 이상의 나이에 커밍아웃 후 성전환을 진행하면서도 미운정 고운정 다 든 배우자와 백년해로하는 이들의 사례를 보면 배우자들은 이미 성적 지향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해탈해 버린 경우가 대부분이다. 스스로를 이성애자, 동성애자 등으로 정체화하면서도 자신의 성적 지향이 향하는 방향에 백년해로하는 배우자의 성 정체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신의 정체성에 의심을 갖는 것도 없다. 굳이 퀴어 씬의 용어를 끌어와 표현하자면 성별 정체성에 무관하게 '사람'에게 매력을 느끼는 지향성인 범성애에 해당될 것도 같지만 정작 본인들은 재정체화하지 않는다. 여러모로 사랑하는 사람과 백년해로하는 만렙 커플에 가까운 심리다.

드물게는 트랜스젠더 당사자가 이런 문제와 동떨어진 것으로 여겨지는 무성애자, 무로맨틱 등으로 정체화하기도 하는데 만약 자신이 실제로는 타인에 대해 성적, 감정적 끌림을 분명하게 느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그러한 '선언'을 해야 한다면 이는 그냥 모태솔로의 삶을 강요받고 그에 굴복한 격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함에 있어 오로지 자신의 생각에만 근거할 수 없다는 것이 아이러니할 따름이다. 다만 'A의 세계'에 눈을 뜨고 정체화하는 트랜스젠더들의 사연을 모두 비자발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부적절한데 적잖은 트랜스젠더들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성기를 갖고 주체로 참여하는 성행위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위화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려고 억지로 남자친구 여자친구랑 이성 교제를 해봤지만 성관계가 그 자체로 몹시 불쾌했다, 자기 같은 트랜스젠더 애인을 만나서는 섹스 같은거 안해도 잘만 놀았다는 썰이 트랜스젠더 씬에 흔한 데엔 다 이유가 있다.

4. 창작물에서의 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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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관련 문서



[1] 이쪽은 러버들을 생각하면 된다. 사실 러버들도 트랜스젠더들을 사람 대 사람으로 존중하기에 앞서 자신의 판타지를 투영한 성적 대상으로만 여긴다는 점에서는 다른 이들에 비해 나을 것은 없다.[2] 문서 전반에서 알 수 있는 부분인데 코튼 실링이란 관념에 대한 입장에 따라 코튼 실링의 요점을 어떻게 인식하는지도 차이가 있다. 코튼 실링이라는 말을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성적 자기결정권'을 근거로 들며 '성행위'에 초점을 맞춘다면 코튼 실링을 차별로 인식하는 이들은 이 관념이 성행위뿐만 아니라 연인, 친구, 지인들과의 폭넓은 인간관계 전반에 걸쳐 작동한다고 여긴다. 심지어 일부 트랜스젠더들은 차별의 존재를 인식하더라도 정작 스스로는 성행위를 상상만으로도 불쾌하게 여기거나 성전환 치료 과정에서 상당한 성욕, 성기능 변화를 겪는 등의 이유로 이 문제의 초점을 성행위에 맞추는 것을 거부하기도 한다.[3] 매우 혐오적으로 들릴지 모르나 이렇게 생각해 보자. 포토샵으로 인종이나 장애 여부를 가리고 랜선연애를 했다고 하자. 그 사람은 포토샵으로 나온 외견에 성적 끌림을 느낀 것이지 본인이 내면과 정체성을 봐달라고 해도 섹슈얼적 성애에 어긋난다면 관계를 강요하는 것은 성범죄에 해당한다.[4] 이 말은 이러한 배려와 공감 관계가 무너지는 순간 이들의 로맨스는 시스젠더-트랜스젠더간 관계와 다를 바 없어진다는(사실은 그보다 더 심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한 쪽이 트랜스젠더 커뮤니티를 떠나 스텔스 상태에 들어가며 억지로 결별을 선언하는 것인데 이러면 홀로 남겨진 쪽은 실연이 끔찍한 트라우마 수준이 된다. 시스젠더들과의 인간관계에서 늘 느껴야 했던 죄책감과 열등감을 잊게 해주었던 유일한 사람과 함께할 수 없는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이 애인의 스텔스화 성공으로 입증된 이상 홀로 남겨진 입장에서는... 이 '원인'이 자신에게 존재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주변인들의 '훈수'를 납득하기 위해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잊고 살았던 젠더 디스포리아를 온전히 마주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정신줄 꽉 붙들고 살기는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다.[5] 세상만사 다들 끼리끼리 노는 법이라지만 끼리끼리 놀지 않는다고 박해를 받아야 한다면 이는 차별과 혐오가 맞다. <안녕, 헤이즐>을 예로 들자. 죄다 같은 암환자 자조 모임에서 만나며 친해지는 등장인물들을 보면, 그리고 암 없는 여친한테 '장님 남친을 찰 수는 없다'며 안암 수술 직전 차인 불쌍한 조연을 보면 시스젠더 사회에서 기피되며 트랜스젠더끼리'만' 인간관계를 형성하라고 강요당하는 트랜스젠더들의 슬픔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