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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6 02:34:34

최동민

문재인 정부 대통령비서실 일자리수석실 행정관
최동민
崔東民 | Choi Dongmin
파일:최동민.jpg
<colbgcolor=#082e59> 출생 1969년 6월 10일 ([age(1969-06-10)]세)
전라북도 부안군
거주지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장안동
학력 전주한일고등학교 (졸업)
서울시립대학교 (법학 / 학사)
서울시립대학교 도시과학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병역 대한민국 육군 8사단 병장 만기전역
소속 정당
파일:zsdkl3gasdg.svg
경력 문재인정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행정관
서울특별시 정무부시장실 정무보좌관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국회의원 보좌관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부의장
민주화운동 관련자
국토해양부 대외협력과장
국토연구원 연구원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간사
서울시립대학교 총학생회장
SNS 파일:네이버 블로그 아이콘.svg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1. 개요2. 생애
2.1. 대학 입학 전까지2.2. 대학 시절, 민주화 운동과 군 복무2.3. 대학졸업 후 사회생활2.4. 국회의원 보좌관
3. 정치 활동4. 여담5. 선거 이력6. 소속 정당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정치인이다. 문재인 정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행정관, 박원순 서울시장 정무보좌관, 더불어민주당 추미애 당대표 보좌관 등 주요 보직을 역임했다.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동대문구청장에 출마했지만 국민의힘 이필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 생애

2.1. 대학 입학 전까지

1969년 6월 10일, 전라북도 부안군 하서면 언독리에서 태어났다.[1] 부모님은 서울에서 막일을 전전하다 귀향을 결정했고, 덕분에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진 부안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2]

전주한일고등학교에 입학하며 고향집을 떠나 유학[3]생활을 하게 되었다. 고등학생 시절 독서토론에 참여하고 김남주(시인)의 시를 즐겨 읽으며 사회비판에 눈을 떴다. 당시 전주한일고는 전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학생 인권에 관한 시위가 일어났던 고등학교였고, 그 시위의 주동자는 최동민의 하숙집 룸메이트였다고 한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자 ‘독재 타도’를 외치며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

2.2. 대학 시절, 민주화 운동과 군 복무

1988년, 서울시립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아버지가 바라는 대로 사법시험에 도전할 계획이었으나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88년 5월 15일 서울대학교 조성만 열사[4]가 사회운동을 하다가 투신했다는 자보가 학교를 뒤덮었고, 대자보와 조성만 열사의 유서를 읽은 최동민은 부끄러움을 느껴 이틀 후인 5월 17일 총학생회가 마련한 버스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한 비디오를 시청하며 군사정권에 대한 분노와 사회개혁에 대한 의지를 키웠다.

학생회 활동에 전념하던 그는 89년 이철규 의문사 사건[5] 당시 사인 규명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광주교도소에서 5개월간 수감생활을 했다.[6] 서울시립대학교 법학과 학생회장으로 활동했고, 1991년 총학생회장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당시 총장직선제로 선출된 고건 전 서울시장을 노태우 정부가 승인 거부하자, 교수 및 교직원과 연대하여 외압 거부 운동을 조직하기도 하였다.[7]

파일:최동민_학생운동.jpg

1991년, 명지대학교에 다니던 강경대 열사가 학원 자유화와 노태우 정권 타도를 위한 결의대회에 참석하다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머리를 다쳐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전국 각지에서 강경대 열사의 구타치사 사건을 규탄하는 집회가 열렸고, 최동민은 서울시립대 총학생회장으로 강경대 열사 장례위원으로 참여해 경찰의 수배대상이 되었다.

1991년 11월 26일, 동대문역에서 5명의 사복 경찰들에게 검거되어 구타 등 고문을 겪었다.[8] 성동구치소에서 1년간 수감생활을 했는데, 이 때, 지금의 아내에게 편지를 받으며 큰 힘을 얻고 이후 연인이자 아내로 발전했다고 한다.[9] 당시 한 번도 면회를 오지 않은 아버지와 아버지와 그 사이를 오가며 고생한 어머니에게 아직까지 죄송함을 가지고 있다고 책에서 적기도 했다.

성동구치소에서 출소 한 다음날 바로 군대에 강제 징집되었다. 당시는 시위전력이 있는 사람을 의가사 제대로 1년가량 일찍 내보내는 경향이 있었는데, 최동민은 이를 거부하고 육군 8사단에서 2년간의 군복무를 모두 마치고 병장으로 만기전역 했다.[10]

2.3. 대학졸업 후 사회생활

군에서 전역한 후 대학을 졸업하며 사회과학 서점을 개업했다. 서울시립대학교 앞 작은 서점을 인수해 ‘창의서점’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지역사회와 대학이 함께 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랑방을 만들겠다는 취지였다. ‘창의서점’은 지역 풀뿌리 운동의 마중물이 되었고, 3년 만에 문을 닫았다.

민주화 이후 사회 각층의 에너지가 지역운동, 주민참여, 지방자치, 시민운동 등으로 뻗어나가던 시기에, 노무현 전 대통령이 1993년도에 설립한 지방자치실무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활동했고, 이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지방자치국 간사로 활동하며 지방자치에 대해 관심을 더욱 갖게 되었다.

1995년 지방자치제도가 부활하며 자치단체장 직선제 선거가 있었고, 풀뿌리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이 때 경실련에서 함께 활동하던 하승창, 서왕진 등은 이후 중앙과 지방정부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기도 했다.

이후 국토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할 것을 제안 받아 자리를 옮겼으며, 대통령자문 노사정위원회 경제사회위원, 참여정부에서 건설교통부 지방이전추진단 지원팀장[11]국토해양부 대외협력과장을 지냈다.

이 때 학창시절과 시민운동 시기에 갖게 된 사회변화에 대한 꿈이 행정과 제도권 영역에서 어떻게 구체화될 수 있는지 고민하며 경험을 쌓았던 것으로 보인다.[12]

2.4. 국회의원 보좌관

2008년, 참여정부가 끝나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국토해양부에서 나왔다. 당시 국토해양부는 계속해서 근무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거절했다.

이명박 정부가 균형발전정책을 뒤엎는 방향으로 흘러가자 자신의 신념과 다른 일을 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마침 당시 통합민주당추미애 국회의원이 보좌진을 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합류하게 되었다.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특별법을 발의한 추 의원의 소신을 인상 깊게 본 것이 보좌관 생활을 시작하겠다는 마음을 먹는데 영향을 끼쳤다.

이후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여대야소의 정국을 거치며 추미애 의원을 보좌하였으며, 평균 근속년수가 1.6년에 불과한 보좌관이라는 직업에서 무려 10년 동안 근속했다. 추미애 의원이 환경노동위원장을 지내던 당시 ‘비정규직 보호법’의 첫 시행을 이루어내기도 하였다.

3. 정치 활동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거치며 광화문에서 촛불을 들었고, 제19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시 문재인 후보 국민주권선거대책위원회에서 팀장으로 일하며 문재인정부 출범에 기여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사회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던 때, 2018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동대문구청장에 출마하겠다고 결심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 당대표를 맡고 있던 추미애 국회의원의 수석보좌관이었기 때문에 유리한 지역으로 갈 여지가 있었으나, 30년 동안 거주한 동대문구에 대한 관심과 애정으로 지역구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2018년 3월 1일, 청량리역 광장에서 동대문구청장 출마를 선언했다. ‘신(新)동대문시대’를 열겠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3월 10일, 동대문구청 대강당에서 ‘동민과 더불어 동대문구의 내일을 말하다’라는 책을 출판하고 북콘서트를 개최하였다. 북콘서트에는 현역 동대문구청장인 유덕열 구청장을 비롯해 안규백, 박홍근, 한정애 국회의원 등이 참석했다.[13]

5월, 동대문구청장 더불어민주당 당내경선에서 현역 구청장인 유덕열 구청장에 이어 2위로 낙선하였다. 낙선 이후 바로 지역 어르신들에게 식사대접 자원봉사에 참여하는 모습을 보여 호평을 받았다. 현역 구청장, 그것도 3선 구청장(이후 4선)에 맞서 경쟁력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차기 유력 구청장 후보군으로 이름을 올렸다.

제7회 지방선거 이후 서울특별시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의 정무보좌관으로 근무했다. 서울시에서 나온 후 제20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는 것이 아니냐는 지역사회의 관측도 있었으나, 친분이 깊은 장경태 당시 후보를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모습을 보여 당선에 기여하였다.

2020년, 문재인 정부 청와대 대통령비서실로 자리를 옮겼다. 일자리수석실 행정관으로 근무하였다.

2021년, 청와대에서 퇴사하고 활발한 지역 활동을 SNS를 통해 공개하고 있다.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으며, 2022년 치러질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동대문구청장 출마가 유력하다.

2022년,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 부의장으로 임명되었다.

2022년 2월, '대전환의 시대, 동대문구의 내일을 말하다'라는 책을 출판하고 출판기념회를 개최하였다. 출판기념회에는 현역 동대문구청장인 유덕열 구청장을 비롯하여 박홍근, 이수진(1969년 5월), 장경태 국회의원, 정원오 성동구청장 김선갑 광진구청장이 참석하고, 안규백, 추미애 두 전 현직 국회의원이 영상으로 축사를 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도 축전을 보냈다. 정계에서 활동한 최동민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

2022년 5월, 더불어민주당 당내경선에서 김인호 서울시의회 의장, 윤종일 전 동대문구문화원장, 지용호 전 국무총리실 정무실장을 상대로 4인 경선을 펼친 결과, 41.04%의 높은 득표율로 더불어민주당 동대문구청장 후보로 확정되었다. 6월 1일 지방선거에서 국민의힘 이필형 후보를 상대로 본선을 벌이게 되었지만 본선에서는 낙선했다.

4. 여담

5.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22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 동대문구청장
파일:더불어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72,377 (46.94%) 낙선 (2위)
역대 후보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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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더불어민주당 최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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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소속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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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 2015 합당[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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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 당명 변경


[1] 계화도 간척사업으로 조성된 드넓은 평야가 펼쳐진 곳이다[2] 이 고향마을을 처음 본 아내는 ‘당신의 따뜻함이 어디서 나온 건지 알 것 같아’라고 말했다고 한다.[3] 90년대까지도 지방 소도시에서 공부를 제법 하는 학생들은 대도시로 유학 가는 경우가 많았다.[4] 조성만 열사는 전북 김제 출신으로 최동민의 고향인 부안 바로 옆 동네 출신이다.[5] 나무위키 링크를 위해 ‘이철규 의문사 사건’ 적었으나, 이 사건은 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으로 외부의 힘에 의해 큰 상처를 입고 물에 던져져 익사한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당시 군사정부가 반독재투쟁에 앞장서던 이철규를 구타하고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의혹으로 큰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6] 수감생활 중 과대표로 선출되기도 했다![7] 고건 전 총리가 자진 사퇴하며 사태는 종결되었다.[8] 고문을 당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겁이 난다고 주저앉아만 있으면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는 말을 되새겼다고 한다.[9] 구치소에 수감중인 최동민을 위해 학생운동을 함께 하던 지금의 아내가 학교 풍경을 바뀌는 계절마다 그려서 보내왔다고 한다. 낭만적인 이야기다.[10]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것과 군 복무를 하는 것이 똑같이 나라를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11] 아직까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는 공공기관 지방이전 실시협약(MOU)을 추진하여 공로를 인정받기도 하였다.[12] 첫 사회생활이던 경실련에서 연구했던 주제가 ‘지방자치 및 도시개혁’이었는데, 국토해양부에서 ‘도시 건설 법제’나 ‘전국 11개 혁신도시 계획’ 등을 연구했다. 그 과정에서 지자체의 운영에 관심을 갖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13] 추미애, 안규백, 민병두, 이인영 당시 국회의원과 현재 국회의원으로 활동 중인 김주영 당시 한국노총위원장이 책에 추천사를 싣기도 했다.[14] 시민통합당과 합당[15] 새정치민주연합에 흡수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