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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03 05:00:24

조르주 멜리에스

<rowcolor=#fff> 시애틀 대중문화박물관(MoPOP) 선정
SF & 판타지 명예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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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조르주 멜리에스
Georges Méliès
파일:George_Melies.jpg
본명 마리 조르주 장 멜리에스
Marie-Georges-Jean Méliès
출생 1861년 12월 8일
프랑스 제2제국 파리
사망 1938년 1월 21일 (향년 76세)
프랑스 제3공화국 파리
직업 영화 감독, 제작자
활동 1888년1923년
배우자 유지니 게닌 (1885년 – 1913년, 사별)
자네 들시 (1925년 결혼)
자녀 2명
서명 파일:Georges_Méliès_Signature.svg

1. 개요2. 생애
2.1. 영화산업에 종사하기 전2.2. 영화 제작2.3. 말년
3. 다른 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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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멜리에스의 가장 뛰어난 점은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영화적 기법의 대부분을 그가 다 만들었다는 점이다. 근래 들어 영화사 학자들은 과거 멜리에스의 영화들을 보면서 마치 거친 3D 화면의 초기 단계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930년대부터 50년대를 지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공상과학, 판타지 영화의 맥을 잇는 해리 하우젠, 스필버그, 루카스, 제임스 카메론까지 일직선상에 있다. 멜리에스는 우리가 지금 컴퓨터로 그린 스크린과 디지털로 하는 작업을 모두 스튜디오에서 카메라만 가지고 해냈다."
마틴 스코세이지#

조르주 멜리에스는 프랑스영화감독이자 배우, 제작자다.

영화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영상 편집 기법을 창시하여 기술적 영역에 머물러 있었던 '활동사진'을 창작과 예술의 영역인 '영화'로 '승화'시켰고, 그 외에도 각종 영화기법과 특수효과를 창작해낸 예술가이다.

2. 생애

2.1. 영화산업에 종사하기 전

본래 연극마술을 병행하며 자신의 극장을 운영하던 사람이었다. 마술사를 하기 위해선 필수 조건인 손재주가 훌륭해 마술에 쓰이는 기계 장치를 손수 만들었고 이 외에도 부업으로 장난감 등도 만들었다.

2.2. 영화 제작

조르주 멜리에스는 마술을 하면서도 당시 신기술인 영화에 관심이 있었다. 토머스 에디슨과 그의 조수 윌리엄 케네디 딕슨이 만든 키네토스코프[1]를 즐겨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시네마토그라프로 만든 영화 《열차의 도착》을 보자 영사기를 구입하고 영화 산업에 뛰어들었다. 처음에는 영사기를 이리저리 굴려보고 자신 나름대로 개조를 하며 이 취미 활동에 점점 열을 올린다.

이렇게 영화를 찍던 멜리에스는 영화계에 혁신을 넘어 영화라는 예술매체를 탄생시킨 기술을 선보였는데 바로 ‘콜라주’기법의 도입이다. 이전까지는 그냥 일상의 풍경을 담고 그것을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게 영화의 전부였다. 《열차의 도착》을 보면 그냥 열차가 달려오는 모습을 찍은 게 전부였음에도 관객들은 신기해 했다. 영화란 건 단순히 사진이 움직이는 신기한 구경거리에 지나지 않았던 것. 참고로 영상도 1분 남짓한 분량이었다. 초창기의 영화가 활동사진(motion picture)이란 명칭으로 불렸던 것도 이 때문이다.

반면 멜리에스는 영화에 편집이 가능함을 알아내었고 픽션을 도입한다. 원래부터가 연극을 무대에 올리던 사람이었기에 무대 대신 영화에 연극을 집어넣었고 무대효과를 편집으로 대응하면 짧은 연극 한 편이 그대로 필름에 담겼고, 이는 극장에서 공연이나 마술 쇼 사이의 막간극으로 쓰기에는 매우 좋았다.[2]

편집기법의 기원에 대해 2가지 설이 있다. 한 이야기에서는 어느 날 멜리에스가 카메라로 길거리를 촬영하다가 한 차량이 등장하는 타이밍에 실수로 카메라가 멈춰 버렸고, 그 차량은 카메라를 다시 작동시키기 전에 떠나버렸다. 하지만 새로운 차량이 등장하고, 이 필름을 돌려보던 멜리에스는 필름에 마치 순식간에 서 있는 차량이 바뀐 것 같은 영상이 담긴 것을 보고 영화에 편집이 가능함을 인식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필름을 돌리며 열심히 영사하다가 실수로 필름이 엉켜버리는 사고가 일어난다. 조르주 멜리에스는 그 겹쳐버린 필름을 보자 이미지가 겹쳐 보이는 것을 보았다. 멜리에스는 곧장 그 필름을 영사해 보았고 결과는 두 필름이 서로 겹쳐 보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조르주 멜리에스는 필름을 이용한 편집이 가능함을 깨닫고 오만가지 편집기술을 창작하게 된다. 연유야 어찌되었건 영화에 극적 요소를 담기 위해 가장 필요한 기법인 편집이라는 방식이 그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진실이다.

그외에도 다재다능한 기술자이자 예술적 기질도 충분했던 그는 세트를 세우고 미니어처를 도입해 촬영을 하고, 필름을 자르고 이어붙여 최초의 '편집'을 하고 페이드 인, 페이드 아웃을 도입하는 등 현재 영화에 쓰이는 수많은 기술과 개념을 고안한다. 그가 세운 촬영소는 현재 영화의 '스튜디오' 개념이다.

즉 뤼미에르 형제가 기술적 개념으로서의 영화(혹은 넓은 의미에서 '영상')를 최초로 발명했다면, 조르주 멜리에스는 현재 창작물과 예술로서의 영화를 최초로 발명한 사람이다. 프랑스의 영화에 대한 자부심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기술의 원천’ 및 ‘예술의 원천’ 둘 다 프랑스에서 유래하였기 때문이다.
파일:external/www.craveonline.com/George_Melies_Big_Head.jpg
1901년작 《The Indian Rubber Head》

멜리에스는 최초로 영상에 합성을 시도한 감독이기도 하다. 매트 기법을 사용한 이중노출로 현재 봐도 전혀 손색 없는 합성을 가능케 했다. 멜리에스가 고안한 매트 기법은 디지털 크로마키까지 이어지는 영상 합성의 기본이 된다.

최초의 호러 영화를 만든 감독이기도 하다.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유명했던 고딕 호러 장르를 채택해 1896년에 《악마의 성》이라는 영화를 감독했다. 멜리에스 자신은 이 영화에서 악마를 연기한다.

1896년부터 1910년까지가 그의 전성기라고 볼 수 있는데, 이 시기에 무려 530편이나 되는 영화들을 만들어냈다. 특히 1902년에 제작된 《달 세계 여행》은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최초의 SF 등 수 많은 최초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달 세계 여행》은 미국으로 수출되어 에디슨 스튜디오 소속의 에드윈 S. 포터라는 감독에게 영감을 주게 된다. 에드윈 S. 포터가 영감을 받아 만든 《미국 소방관의 하루》는 미국 최초의 극영화로 기록된다.

덤으로 자동차가 악마에게 홀려 멋대로 움직이며 사람을 공격한다는 줄거리까지 무려 1902년에 흑백 무성영화로 만든 바 있다. 아쉽게도 해당 영화는 필름이 후술하는 대로 사라져 명단에 작게 언급만 되어있고 극소수의 스틸컷만 존재하기에 제목을 포함한 정확한 줄거리는 불명이다. 아무튼 공포의 검은 차킬도저! 같은 영화들보다 아득하게 오래전에 원조였던 셈.

2.3. 말년

하지만 말년은 불행했다. 1920년 이후로는 다른 사람들도 멜리에스의 기술을 모두 흡수한 상태였으며, 관객들이 좀 더 사실적인 영화를 요구하게 되면서 멜리에스의 환상적인 영화들은 인기가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멜리에스는 특유의 장인적 고집이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이 때에는 고집을 잘못 부렸다. 게다가 멜리에스는 영화로 거액의 돈을 벌었음에도 돈 관리를 잘 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멜리에스는 프랑스 대형영화사인 파테 영화사[3]와 저작권 문제로 법정공방을 벌였으나 패소하여 만들던 영화들을 헐값에 넘겨야 했다.[4]

결국, 멜리에스는 파산하고 모든 재산을 정리하여 아내와 같이 사탕 및 장난감을 파는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하면서 겨우 벌어먹고 살게 되었다. 이렇게 멜레에스는 완전히 잊히다가, 그의 팬인 프랑스 영화잡지 편집장 레옹 드뤼오에 의해 재발견되면서 뒤늦게나마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진다.

드뤼오의 회고록을 보면, 역가에 있는 작고 초라한 가게에 앉아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며 졸던 노인이 멜리에스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이때 그를 찾아가서 "멜리에스 씨죠?" 라고 질문하자 눈을 뜬 멜리에스는 "나 같은 노인을 아는 댁은 장난감이라도 사러 오셨소?"라고 말했는데 드뤼오가 "아닙니다. 당신의 영화를 좋아하는 영화잡지 편집장입니다." 라고 말하자 멜리에스는 "이제서야… 이제서야 오셨구려!"라고 말하며 그의 두 손을 잡고 울었다고 한다.

이후 일부 영화계 인사들의 호평 속에 멜리에스는 영화 역사를 바꾼 위대한 영화감독으로 재조명받았으며 1925년에 재혼한 아내랑 죽을때까지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5] 1929년 12월, 이미 70대에 이른 멜리에스는 모처럼 프랑스 영화인들이 주선하는 명예인사 기념 잔치에 나가 미소를 짓기도 했다. 그렇게 뒤늦게나마 재평가되면서 달세계 여행을 비롯한 그의 작품 중 200여 편의 필름이 보존되어 남아 DVD로도 발매하기에 이른다.

이 일화는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영화 《휴고》를 통해 각색된다.

3. 다른 매체에서


[1] 커다란 기계에 우리 눈만한 유리구멍에 눈을 대고 자기가 직접 필름을 돌려보는 1인용 영사기.[2] 이 때문에 초기 영화는 대개 10–15분을 넘지 않으며, 애니메이션의 경우도 초기작은 10분짜리 단편인 경우가 많다. 대표적으로 월트 디즈니의 증기선 윌리호.[3] 아직도 있는 회사이며 지금은 레아 세두의 할아버지 제롬 세두가 운영하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1970년까지 극장용 뉴스를 제작했다.[4] 필름들은 폐기되어 신발을 가공하는 재료가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질산염을 원료로 썼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가 만든 영화 필름들 다수가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 이외에는 화가 난 멜리에스가 여지껏 만든 영화 필름을 죄다 태워버렸다는 이야기도 있다.[5] 여담으로 이 후처는 1956년에 91세로 별세할때까지 남편의 영화 작품들을 알리고자 노력했다.[6] 영화 촬영 전문가, 에디슨에게 험악하게 대함, 달 세계 여행 세트장 등등 오마주.[7] 여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