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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5-12-11 18:33:15

정조의 왕자가 작가로 살아남기

정조의 왕자가 작가로 살아남기
<nopad> 파일:정조의아들이작가로살아남기표지.jpg
장르 대체역사
작가 귀차
출판사 제이트리미디어
연재처 문피아
네이버 시리즈
연재 기간 2025. 07. 14. ~

1. 개요2. 줄거리3. 연재 현황4. 등장인물
4.1. 조선
4.1.1. 이의(주인공)4.1.2. 왕실4.1.3. 관료4.1.4. 기타
4.2. 청국4.3. 프랑스
5. 설정
5.1. 작중작
6. 개변된 역사
6.1. 조선6.2. 청국
7. 평가8. 기타

1. 개요

한국의 대체역사소설. 작가는 귀차. 약칭은 왕자작가/정조작가.

2. 줄거리

조선의 왕자로 태어났다.
그런데 아빠가 소설을 극혐한다.

3. 연재 현황

2025년 7월 14일 문피아에서 연재를 시작하였다.

2025년 10월 14일 네이버 시리즈에서 연재를 시작하였다.

4. 등장인물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4.1. 조선

4.1.1. 이의(주인공)

1786년 11월생.[1] 작중에서는 한동안 '원자 아기씨'라고만 불리다가 세자 책봉 직전 정조에게 이의(李𤦌)라는 이름을 받는다.[2] 현대에서는 대충 먹고살 만 했던 웹소설 작가. 하지만 본인의 고전 취향과 맞지 않아 성공한 축에는 끼지 못했던 듯하다. 효창공원에서 의문의 궁녀 복장을 한 혼령과 마주친 뒤 조선의 왕자로 환생한다. 고전문학사 전공이지만 전반적인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는 역알못이라고 한다. 고등학교 때 배운 역사 수준을 희미하게 기억하는 정도라고.

원자였던 시절 우연히 정신과 시간의 방이라는 능력을 깨우쳐 몰래 소설을 쓰고 퍼뜨리기 시작하는데, 소설을 이용한 나비효과가 자신의 예상 이상인 것을 알고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조선을 문화대국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이며 자신의 소설이 널리 퍼지기 위해서는 대중들의 경제력이 올라야 하기 때문에 조선의 경제를 성장시킬 방법을 찾고 있다. 그 와중에 아버지의 과도한 성리학 공부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진도를 따라가기 위해 정신과 시간의 방에서 어떻게든 공부를 하느라 개고생 중이다.

아버지를 닮아서 신하들을 노예 취급하는 성격이지만, 아직 어린 데다 아버지만큼 다혈질은 아니다 보니 약간 다른 방식으로 신하들을 이용하거나 압박한다. 전작의 주인공처럼 저도 모르게 주변인들을 광신도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가 많지만, 본작의 특성상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역알못이지만 전작의 주인공처럼 상당히 다재다능하다. 친모를 닮아서 미남이라 꾸준히 언급되고, 심미안 하나 까다로운 건륭제가 소설가로서 문필력과 글씨체를 인정할 정도이며,[3] 정조가 직접 성리학 공부를 시킬 당시 정신과 시간의 방에서 빡세게 공부한 것도 있지만 그동안 가르쳐온 초계문신들보다 더 습득력이 빠르다고 칭찬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시선이라 다소 콩깍지가 끼었을 수는 있지만 고생을 하면서도 고난이도의 성리학 교육을 다 따라잡는 걸 보아 부모님을 닮아서 상당히 머리가 좋은 듯하다.[4] 머리가 얼마나 좋으면 나중에 건륭제가 조선을 떠날때쯤 되면 건륭제와 초급 이상의 만주어로 회화를 자연스레 할 정도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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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본인만 모르는 출생의 비밀이 엮여 있었다.옷소매 붉은 끝동 읽은 독자들은 복선을 일찍 눈치챘다 카더라 그는 원 역사에서 태어나지 못하고 죽은 의빈 성씨의 막내 아이로, 본작에서는 수빈 박씨가 입궐하지 않아 순조가 아예 태어나지 않았다.[5] 이후 정조의 언급을 통해 원 역사 의빈 성씨의 사망일에 미숙아로 태어났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1786년 10월 24일(그레고리력 11월 4일)생으로 확정되었다.

1화에서 언급된 바에 따르면 21세기의 어느 날[6] 절 입구에 조선식 베냇저고리를 걸친 덜 자란 이른둥이가 버려져 있었고, 주지 스님이 이를 부처님의 뜻이라 여겨 동자승으로 키웠다가 나이가 들어 독립했다고 언급된다. 거기다 여자 귀신을 만났다는 효창공원은 원래 의빈 성씨와 문효세자가 묻힌 효창원이 이장되기 전의 장소고, 여자 귀신과 주인공의 묘사를 보아 원 역사에서 태어나지 못하고 죽은 아이를 미래에 보내 성인으로 성장시킨 뒤, 다시 19세기로 보내 다 자란 아기로 만든 듯하다. 이는 이후 109화에서 밝혀졌는데, 의빈 성씨가 죽기 직전 자신의 혼백이 흩어지더라도 아이만큼은 지키겠다고 하늘에 맹세했고, 하늘이 그 맹세를 들어줘서 장성한 아들을 미래에서 다시 만나는 환상을 보았다라는 말을 남긴 뒤 사망했다. 이후 정조에 따르면 의빈 성씨가 죽고 그 태에 들어있던 태아가 사산되어 숨을 거뒀다가 잠시 뒤 다시 살아났었다고. 그와 별개로 원 역사처럼 자식의 생사와 상관없이 효의왕후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가지라는 유언도 남겼다.

주인공이 유독 소설에 집착하는 것은 의빈의 뜻으로 보이는데, 소설을 좋아하던 의빈이 생전 정조에게 소설로 정조의 치세를 돕겠다는 약속을 했고, 주인공의 한글 필체는 정조조차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의빈의 필체와 똑같으며, 주인공이 쓴 소설이 정조의 치세에 도움이 되는 것을 보고 정조가 의빈과 한 약속을 떠올리며 의빈이 쓴 글일까 생각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7] 의빈이 죽기 전에도 자신이 정조와 한 약속을 자신의 아들이 이루어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주인공에게 생모 건을 한동안 가르쳐주지 않았던 건 생모가 자신을 낳던 중에 사망했다는 것이 알려지면 아직 어린 주인공이 큰 충격을 받을 것을 우려하여 왕비가 친모라 속인 것으로 보인다.[8] 그 외에 정조가 의빈의 묘에서 '우리 아이는 네가 바라는 대로 잘 크고 있다'고 한 것을 고려하면 의빈이 숨겨달라고 요청했을 수도 있다. 거기다 주인공이 고전문학사를 제외한 역사를 잘 모르는 탓에 자신이 효의왕후의 친아들이라 착각하고 있다.[9] 주인공의 외모는 친모인 의빈과 많이 닮아서 주변인들이 주인공을 아끼면서도 의빈이 떠올라서 심란해하는 경우가 많다고.

1797년 주인공의 생일에 관례와 세자 책봉을 동시에 치르고 휘(諱)를 받았으며, 세자로 책봉되기 전날 문효세자와 의빈의 묘를 참배하고, 그날 저녁 부자끼리 한양 거리에 미복잠행을 나갔다가 <황제의 여인>을 조선풍으로 각색한 정조와 의빈의 로맨스와 매우 유사한 연극을 정조가 보고 심란해한 것을 계기로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듣게 되면서 자신을 낳은 게 효의왕후가 아니라 의빈이고, 정조의 장남인 문효세자의 어머니와 동일인물임을 알게 된다. 모든 걸 알게 된 뒤 의빈을 자신의 생모로서 받아들이는 한편, 자신을 태어날 때부터 키워준 적모이자 양모인 효의왕후 또한 여전히 어머니로 여기는 한편, 문효세자와 의빈의 제사를 잘 챙기기는 정조의 뜻을 받들게 된다.

이후 110화에서 세자책봉례를 거치며 조선의 왕세자가 되었고, 정식으로 이름을 의(𤦌 - ⿰王宜)로 받아[10] 왕세자 이의가 되었다.

정조는 원 역사에서 자신이 사망한 해인 1800년이 되면 아들에게 양위하고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수원 화성으로 내려갈 생각이라 세자가 된 뒤에도 직접 교육을 주관할 예정이다. 이는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숭하고 임오화변의 원인을 영조와 사도세자가 아닌 신하들에게 다 뒤집어씌워 임오화변으로 인해 불안정해진 정조-주인공 혈통의 정통성을 안정시키고 왕권을 완성시키기 위한 정조의 계획 때문으로, 정조는 생전의 영조에게서 추숭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아니라 아들에게 이 일을 맡기기 위함이다. 1786년생인 주인공이 세는나이 15세가 되는 해로, 조선에서는 세는나이 15세부터 친정이 가능해지며 의빈이 죽은 뒤부터 급속도로 정조의 몸 상태가 악화되어 정조도 가능한 빨리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줘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113화에 따르면 변장이 능숙하여 소환으로 변장했을 때는 누구도 주인공이 원자인지 몰랐으나, 최상궁만은 어머니 덕임의 외모를 닮아가는 주인공을 보고 정체를 눈치챘다고 한다. 게다가 아미전의 자필 초고의 필체를 보고는 덕임과 너무 같은 글씨체라 모를 수가 없었다고.

4.1.2. 왕실

4.1.3. 관료

4.1.4. 기타

4.2. 청국

4.3. 프랑스

5. 설정

5.1. 작중작

6. 개변된 역사

6.1. 조선

6.2. 청국

7. 평가



||<table align=center><table width=480><table bordercolor=#00e164,#00e164><table bgcolor=#ffffff,#2d2f34><bgcolor=#00e164,#00e164> 파일:네이버 시리즈 로고.sv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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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기타

초반부 무료 연재 당시에는 독자들의 유입 부족 때문에 여러 차례 제목을 개명했다가 최종적으로 현재 제목으로 자리잡았다.

작중 묘사에 따르면 주인공은 현대 웹소설 메타를 조선 후기에 갖고 와서 성공한 잘 나가는 상업 소설가에 속한다. 원래부터 조선 후기 한양의 출판사들은 20~30짜리 에피소드를 주기적으로 연재하는 연재본과 1권씩 묶어서 파는 정발본이 따로 있었는데, 주인공은 당시 조선에서 전례가 없던 빠른 연재 속도로 몰아치는 웹소설 연재 메타를 통해 수많은 독자들을 유입시켰다고 한다.
[1] 건륭제에게 병오(1786)년 9월생이라고 말하는데, 시헌력을 기준으로 하므로 그레고리력으로는 11월생이 된다. 이전 항목에는 건륭제에게 말한 생일이 병오년 10월생이라 적혀 있었으나 작가가 오류를 발견해 수정했거나 착오가 있었던 듯. 하지만 1786년 9월 14일은 율리우스력으로는 10월 24일, 그레고리력으로는 11월 4일이므로 뭐가 되었든 현대 기준 11월생은 맞다. 이후 109화에서 원 역사 의빈의 사망일과 같은 날에 미숙아로 태어났다는 것이 밝혀진다.[2] 다만 뒤늦게 이름을 받은 이유는 간단한데 조선 왕실의 적장자는 왕세자로 정식으로 책봉되기 이전에는 이름 대신 원자 아기씨(元子阿只氏)라고 불렸기 때문에 원자라고만 불리는 것. 보통 세자 책봉과 함께 종묘와 사직에 책봉 사실을 고하며 이름을 받는다. 후기로 갈수록 임시 이름인 아명조차도 붙이지 않게 되었다고. 참고 링크[3] 한글은 어머니를 닮아서 귀부인 스타일의 여성적인 글씨라고 하며, 반대로 한자는 매우 남성적인 분위기가 강하다고 한다.[4] 현대에서도 친구피셜 명문대 출신이라고 했다. 하지만 취직 잘되는 과는 안 가고 소설이나 썼다[5] 작중에서 왕비 외에 '아버지에게 없는 사람 취급받는 후궁 하나가 있다'고 하며, 요절한 형을 제외한 어떤 형제도 언급되지 않는다. 이후 본작에서는 순조가 아예 안 태어났다고 확실히 명시되며, 주인공이 어렸을 적 신하들이 주인공의 요절을 우려해 후궁을 들일 것을 권했지만 정조가 거절했다고 언급되기 때문에 수빈 박씨가 입궁하지 않은 것이 확실해졌다.[6] 109화에 따르면 원 역사의 의빈 성씨가 사망한 음력 9월 14일이었다고 한다.[7] 다만 한자 필체는 다르다고 한다.[8] 어차피 정조의 유일한 자식이자 아들이라 후계자가 되려면 요절한 형처럼 왕비의 자식으로 입적될 필요가 있기도 했다.[9] 한 권으로 읽는 조선사라는 개론서가 정신과 시간의 방에 운 좋게 남아있어 이 책 내용을 기반으로 역사적 사건들을 파악하는데, 정조와 의빈 성씨의 로맨스가 수록되지 않았던 듯하다.[10] 정조가 관례를 무시하고 직접 자신이 이름을 지어줬다. 한자의 구성은 구슬 옥(玉)변에 마땅할 의(宜)를 붙인 꼴인데, 의는 어머니였던 의빈 성씨에서 한 글자를 따온 거고, 구슬 옥 변이 부수가 되면 점이 빠지며 임금 왕(𤣩)의 형태가 되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왕(정조)과 의빈 사이에서 나온 아이라는 의미도 담겨있다. 참고로 의빈의 봉호인 의(宜)자도 신하들이 처음 제안한 봉호 3개가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조가 직접 지은 것이었다.[11] 조선시대에 34세 차이이면 조손뻘에 가까웠다. 이 때문에 1782년 30세가 되어서야 문효세자가 태어나자 '비로소 아비란 소리를 듣게 되었으니, 이것이 다행스럽다'고 말했을 정도.[12] 단순 소설이었다면 삼국지연의 애독자였던 영조가 그렇게 화를 내지 않았겠지만 실제로 사도세자의 수집품 중에는 천주교 소설과 변태 수준의 음란 소설, 심지어는 BL소설까지 있었다.[13] 이 때문에 주인공은 정조의 공부 강요에 시달리면서 '할아버지(사도세자)가 게장왕(영조)에게 느낀 감정이 이거였냐'고 속으로 까기도 했다. 영조도 사도세자 때의 공부 실패를 반성해서 정조는 나름 진도를 조절한 걸 고려하면 정조가 더 막나가는 걸지도. 그도 그럴 게 해당 에피소드는 신해박해(1791)와 동년에 일어난 일로 추정되는데 주인공은 1786년 11월생이라 만으로 4~5세밖에 안 되는데 엄연한 성인에 과거까지 통과한 성균관 생도들 이상의 공부를 시킨다는 건 학대 수준의 과도한 교육이 맞다. 주인공의 정신연령이 20대 성인인 데다 공부를 끝까지 따라갈 만큼 타고난 인내심이 강해서 망정이지...[14] 이 말을 들은 건륭제는 요절한 자식들을 떠올리며 공감을 표했다. 원 역사의 순조문효세자와 달리 정조가 죽는 해 1800년 10세에 책봉되었음을 고려하면 실제로 문효세자의 요절 때문에 둘째의 세자 책봉을 늦춘 듯하다.[15] 주인공이라고 눈치챘다는 암시가 있다. 아예 주인공도 너무 들뜬 나머지 아버지가 자신이라고 정체를 파악한 것 같다는 불안감을 무시했다고 언급할 정도.[16] 목적은 제주도를 청의 광저우처럼 조선의 국제무역항으로 개방하기 위해서다.[17] 임오화변은 살해 과정 때문에 인류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엽기적인 비속살해 사건 중 하나로 꼽히는데, 아무리 별 괴담이 다 나오는 전근대 왕실사라지만 너무 엽기적이라서 재앙이라는 뜻의 화변(禍變)이라 불리게 된다.[18] 훗날 고종이 칭제건원할 때 사도세자를 조(祖)로 추존하면서 간접적으로 복적시키긴 했다.[19] 실제로 실록이나 일성록, 어찰에 남은 기록을 보면 저 시기 이후 정조는 흰머리가 생기고 이빨이 빠지며 살이 찌는 등 안 좋은 신체 변화란 변화는 전부 나타나는데 중년에 접어든 나이탓도 있겠지만 스트레스를 상당히 심하게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20] 10대 중반에 결혼해서 자식을 가지던 조선의 특성상 33세 차이는 조손이 되는 것도 가능하다.[21] 효의왕후 문서에도 서술되어 있지만 정조가 지은 제문에 의하면 실제 역사에서도 동갑내기 의빈을 형제처럼 여기며 특별히 친애했던 듯. 의빈 성씨가 정조를 두 번이나 찼을 때도 효의왕후를 이유로 댔다.[22] 고증이다.[23] 주인공의 말에 따르면 정조는 주인공이 태어나고 몇 년간은 의빈의 유언대로 효의왕후를 자주 찾았지만, 주인공이 점차 나이를 먹어가고 효의왕후도 여전히 아이를 가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만두었다고 한다. 신하들은 미숙아로 태어난 외동아들 하나뿐인 것을 불안해해 후궁을 더 들일 것을 권했지만 정조는 특유의 성격과 의빈 사후 계속 나빠지던 몸 상태 때문에 아이를 더 가지는 걸 포기했다.[24] 이 때문에 청연군주와 청선군주는 생전에는 세자의 적녀인 군주(郡主) 신분이었고 사후 사도세자가 왕-황제로 추존되면서 청연군주와 청선군주도 청연공주청선공주로 추증된다.[25] 어두운 분위기가 풀풀 풍겨서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들이 다 꺼린다는 묘사가 있다.[26] 자신이 쓴 무협소설은 재미없다는 이유로 출판을 거부당했고, 주인공이 쓴 한글 소설을 한문으로 번역했는데 건륭제에게 '안 어울리는 문체로 글을 망쳐놨다'고 까였다. 아예 건륭제 스카우터 피셜 공문서는 잘 쓰지만 필력은 없다라고.[27] 조선의 왕세자빈은 워낙 어릴 때 입궐시키다 보니 1~2살 연상을 입궐시키는 경우가 많았고 연하의 경우에도 1~2살이 넘어가지 않게 했다. 순원왕후도 순조보다 1살 연상이었다.[28] 학습도서인 <도술천자문>을 보고 정체를 확신했다.[29] 청에 존재하는 인맥을 통해 순식간에 입수해버렸다. 작중 언급으로는 그의 임무를 버스 태워줄 사람이 북경 현지에 말 그대로 깔린 수준이라고 표현할 정도.[30] 중국 황하, 회하, 해하 인근을 비롯한 광범위에 서식하는 흑돼지 품종. 각 지방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리지만 전원이 같은 품종이기 때문에 하나로 통일된 이름이 바로 황회해흑저다.[31] 솥뚜껑에 돼지고기를 구워, 가운데 모인 기름에 김치를 튀기듯 굽는 방법[32] 쓰려고만 하면 주인공 얼굴이 아른거려서 못 쓴다고. 여담으로 주인공도 부용이 뭔가 수상하다고는 여기고 있다.[33] 김조순이 해당 소설을 퍼트린 장본인이라 생각해서 김조순 앞에서 가문의 권위를 들이밀며 자신들이 쓴 책을 한양에 퍼트리라고 강요했었다.[34] 다만 주인공은 자신이 초서를 쓸 수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아직 전서를 익히는 것도 버거워 다른 글씨체는 익히지 못했다는 핑계를 대서 넘어갈 수 있었다. 초서를 쓸 수 있는 이유는 21세기 당시 고전문학을 전공한지라 초서가 눈에 익을 정도로 접했기 때문이라고.[35] 건륭제는 즉위 전에는 아주 뛰어난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무난하게 좋은 시를 쓰는 인물이었는데, 즉위한 뒤 시 수준이 나락으로 가버린다...[36] 당시 정조를 비롯한 왕실 일가는 창덕궁-창경궁의 동궐(東闕)에 거주하고 있었다. 당시 경희궁은 서궐(西闕)이라 불릴 정도로 규모가 컸기 때문에 북궐(北闕)인 경복궁이 터만 남아있던 당시에는 경희궁밖에 보낼 데가 없었다.[37] 효현순황후와 효의순황후는 건륭제 사후 건륭제의 시호인 순황제(純皇帝)의 순(純)을 추가한 것이라 건륭제 생전에는 효현황후와 효의황후였다.[38] 효현황후의 직속 궁녀였다는 설정이다. 실제로도 효의황후는 내무부 포의 가문 출신으로 수녀 선발에 통과해 입궁한 신분이었고, 이들은 대부분 궁녀로 일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건륭제가 지은 추모시에도 그녀가 효현황후 옆에서 교양을 배웠다는 걸 암시하는 구절이 있다고 한다.[39] 자신의 장녀인 고륜화정공주가 19세에 요절하자 충격을 받아 급사하였다.[40] 워이기야씨는 자신의 아들이 황제로 즉위하자 건륭제가 효의황후로 추존시켰다. 영린은 개망나니였던 탓에 가경제는 영린을 싫어했다고 한다.[41] 본명은 장 조제프 마리 아미오. 실제로 1700년대 청에서 활동한 프랑스 예수회 소속 신부다.[42] 송시열이 깔려 죽음을 본 독자들은 알겠지만, 당시 조선은 전근대 국가 기준으로도 정부에 돈이 너무 부족해서 행정이 그리 좋지 않았다.[43] 엘뢰테르는 미국으로 추방되서 이후 미국의 화학회사 듀폰을 창립하게 된다.[44] 당시 전주에는 한성 못지않게 출판사가 발달했었다. 한성의 경판본과 쌍벽을 이루는 전주의 완판본이 유명했을 정도.[45] 한자를 사람들이 쉽게 익히게 만들기 위한 학습도서라는 점이 성리학의 근간에 충실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당대 조선의 윤리도 초등학교 교과서처럼 설명해주고 있다고.[46] 청나라에서는 각 지방에 설치된 관학을 이렇게 불렀다.[47] 건륭제를 오래 모신 환관에게 직접 증언을 수집해가며 각색이 이뤄졌다.[48] 한양은 수정 후 결말을, 전주는 수정 전 결말을 더 높이 치고 있다. 이는 전주 방각본자들에게 계덕상이 수정 전 판본을 팔아치우면서 발생한 일.[49] 불치병 히로인 속성이 먹혔다고 한다.[50] 당시 중국과 조선에서는 現 왕조 에피소드를 바로 쓰기 찜찜하다 싶으면 전대 왕조의 이름만 빌려서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경우가 많았다. 백거이당현종양귀비의 일화를 따서 지은 장한가한무제로 구라를 쳤다.[51] 특히 상단집 막내아들에서 주인공이 조선 후기의 상인들이 실제로 쓰던 악덕상술을 전부 기재해버린다거나, 성균관 성채에서 과거시험 관련 문제를 싹 기재해버린게 크다.[52] 흔히 당시 가톨릭이 유교식 제사를 전면 금지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당시 교황청에서는 공자에 대한 제사는 완전히 금지한게 맞으나, 단순한 조상에 대한 제사의 경우 칙령을 통해 위패의 망자의 이름 위에 이는 부모를 공경하는 천주교의 도리다(天主敎孝敬父母之道理)라는 문구를 적어넣았을 때는 위패를 쓰는 제사를 허용하는 예수회의 우회 교리를 인정하고 있었다. 다만 당시 청의 교구를 담당하던 주교였던 구베아 주교가 그 전까지의 선교사들이 소속되어 있던, 현지 문화에 적응한 선교를 주장하던 예수회에 반감을 가지고 순수한 교리로만 선교하는 프란치스코회 소속이라 해당 문구를 사목교서에서 해당 내용을 아예 빼고 알리는 바람에 동아시아의 신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것. 덕분에 원 역사에서는 배교한 정약용이 조선의 천주교 탄압을 나몰라라 하는 구베아 주교에게 아주 악담을 쏟아내기도 했다.[53] 당시 청나라에는 아담 샬 이후 대대로 흠천감 소속으로 선교사가 몇 있어서 역법과 천문 관련으로 기여를 하고 있었다.[54] 등 뒤를 찌른다라고 해서 북충이다. 사방을 신체로 비유하면 北은 등 뒤를 의미하기 때문. 마찬가지 이유로 조선의 팔도는 임금이 전방(南)을 바라보는 기준으로 우측(東)과 좌측(西)으로 나누어 특정 강이나 산을 기점으로 우도와 좌도로 구분하여 절도사가 파견되었다. 임금이 남쪽을 바라보는 기준으로 매겨진 것이라 실제 지도상으로는 서쪽이 우도, 동쪽이 좌도에 해당한다.[55] 건륭제가 무대극을 즐긴 건 놀랍게도 고증이었다.[56] 골동품과 예술품 판별안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건륭제에게는 너무 쉬운 일이었다고 한다.[57] 원곡은 월량대표아적심인듯.[58] 조청우호의 비문의 탈을 쓴 건륭제 공덕비에 가깝다. 실제로 작중에서도 공덕비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언급된다. 작중에서 건륭제가 한 일을 나열해보면 막대한 돈으로 조선의 상업과 경제를 돌렸다 하나만으로도 조선 전역의 존경을 받고 있을 정도였기 때문.[59] 청의 황제와 할아버지-손자처럼 친하게 지내는 것도 삼전도의 굴욕의 결과물인 삼전도비를 치웠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저승에서 숭정황제가 조선 땅을 보고 웃을거라며 괜찮다고 반응하는 유교-탈레반(벽파)들이 언급될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