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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신흥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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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전주신흥중_new.jpg
학교 전경

<colbgcolor=#00751a><colcolor=white> 전주신흥중학교
全州新興中學校
Jeonju Sinheung Middle School
파일:전주신흥중학교 교표.png
파일:전주신흥중학교 교표 및 교명.png
개교 1900년
유형 일반계 중학교
성별 남녀공학
형태 사립
학교 법인 호남기독학원
교장 이현노
교훈 지인용(智仁勇)
교화 무궁화
교목 은행나무
학생 수 463명(2023)
교직원 수 38명(2023)
관할 교육청 전북특별자치도전주교육지원청
주소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완산구 서원로 399
홈페이지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2. 학교 연혁
2.1. 3·13 만세 운동2.2. 광주학생항일운동 참여2.3. 신사참배 거부에 따른 폐교2.4. 복교2.5. 6·25 학도병 참전
3. 교훈 및 상징
3.1. 교표3.2. 건학 이념 및 교훈3.3. 교가
4. 학교 특징5. 학교 시설
5.1. 강당, 본관 포치
6. 학교 생활
6.1. 주요 행사
7. 출신 인물8. 이용 가능한 대중교통
8.1. 버스
8.1.1. 시내 버스8.1.2. 시외 버스
8.2. 철도
8.2.1. 일반 철도8.2.2. 광역 철도
9. 기타
9.1. 희현당

[clearfix]

1. 개요

전주신흥중학교(全州新興中學校)는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에 있는 사립 중학교다.

1900년 9월 9일에 미국인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레이놀즈가 설립하였다. 본래 학교명은 "예수학교"[1]였으나 1908년 신흥학교로 개명했다. 1909년 사립 신흥학교로 인가 받았고 제1회 졸업생을 5명 배출했다.

2. 학교 연혁


1900년에 개교하여 무려 [age(1900-01-01)]년이라는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2.1. 3·13 만세 운동

파일:전주_신흥중고_정문_크기변경.jpg

"3.13 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3일 전주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이다. 지역 인사들과 함께 신흥학교 학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만세운동을 이끌었다.

박태련, 김신극 등 전주지역 지도자들은 군산에서 1919년 3월 4-5일 만세운동이 감행됐다는 소식을 듣고 전주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했다. 신간회 총무 박태련의 집과 천도교 측에서 필요한 태극기를 인쇄 했으나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방에서 만세운동이 계속되자 일본 경찰은 전주 지역에서도 만세 운동이 일어날까 염려해 신흥학교와 기전학교를 비롯한 전주시내 학교에 강제 방학조치를 취해버렸다.

이에 최종삼 등 신흥학교 학생 5명은 밤을 이용해 신흥학교 지하실에서 태극기 등 인쇄물을 만들었고, 13일 장터서 거사하기로 모의했다, 13일날 학생들은 채소가마니로 위장한 태극기를 장터로 실어 나르고 거사 직전 시장 입구인 완산동과 전주교 건너편에서 군중들에게 은밀히 배부하였다. 낮 12시20분께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 및 천도교도 등은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남문 밖 시장, 제2보통학교(현 완산초등학교)에서 모여 인쇄물을 뿌리며 시가지로 구보로 행진했다. 시위는 오후 11시까지 서너차례 계속되었고, 다음날 오후 3시에도 군중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일제는 고형진, 남궁현, 김병학, 김점쇠, 이기곤, 김경신 등 신흥학교 학생들을 시위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체포했고, 모두 실형 1년을 언도 받았다. 또한 이외 신흥학교 학생 3명이 일제의 고문에 옥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위를 지도한 김인전 목사는 이후 중국 상하이로 거처를 옮겨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현재 신흥학교 교문 옆에 만세운동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이 날의 만세운동을 기념해 매해 3월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와 함께 만세운동 재현 행사를 하고 있다. 2019년 100주년을 맞아 큰 행사가 열렸다. 참조1 참조2

2.2. 광주학생항일운동 참여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시작된 지 3달 후인 1930년 1월 25일 신흥학교 학생들은 학생운동을 벌였다. 교우회 문예부장 박문수(후의 이름은 박철웅), 운동부장 이재영(후의 이름은 이철), 그리고 문예부의 문예계와 서무부의 사교계를 맡았던 함수만, 문예부 도서계와 서무부 기록계를 맡았던 원용덕 등이 중심이 되어 12월 2일 개교 기념 행사 후 거사할 예정이었으나 연기되었다. 이후 12월 12일에 다시 거사하려 하였으나 학교 당국이 사태를 눈치채고 조기 방학에 들어감으로 무산되었다. 개학(1월 25일) 이후 재차 거사를 할 계획이었지만 학교에서는 개학 이후에도 학생들에게 등교하지 말라고 했다.

이에 간부들은 기숙사에 모여 있던 학생들을 규합하여 1월 25일 거사를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학생들은 빛이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해놓고 태극기와 전단을 붓으로 그려가며, 거사를 준비했다. 1월 25일 아침 8시 30분 간부들은 기숙사에 있던 학생들을 모아 태극기와 전단지를 나누어 주고 다가교 쪽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을 규합하여 80여명을 모았다. 9시 30분 결의문을 낭독하고 전단을 살포하면서 "자주독립 만세! 학생 만세! 동감(同感)[2] 만세!" 등을 외치며 다가교를 건너 시내로 진출했다.

시위학생들은 중앙동으로 진출하였고, 출동한 일본 경찰들은 총을 쏘며 학생들을 연행했다. 이 날 경찰에 연행된 학생 총수는 36명이었다. 검거된 학생에게 최고 29일, 최하 15일 구류처분을 즉결하여 동일 오후 4시경에 전주형무소로 넘겨졌다. 주동자의 한 사람인 함수만은 감옥을 나온 후 후유증으로 예수병원에 입원하였고, 1930년 5월 19일 예수병원에서 분사하고 말았다. 해방 후 함수만에게는 공적이 인정되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 표창)이 수여되었다.

2.3. 신사참배 거부에 따른 폐교

파일:rsfMb7i.jpg
폐교를 앞두고 학생들[3]이 학교 이니셜 S자를 만든 모습
1930년대 들어 일본군국주의 색채를 강하게 나타내면서 신사참배가 조선에도 강요됐는데,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에 의해 세워진 신흥학교는 기독교의 유일신론에 위배되는 신사참배를 수용할 수 없었고, 신흥학교의 설립 주체인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는 신사참배에 대해 1937년 2월 2일 총무인 풀톤목사를 파견하여 조사 보고하도록 했다.

1달여의 조사 끝에 1937년 2월 말경 전주에서 풀튼의 성명이 발표되었는데 "현재의 상태로는 학교사업을 더 이상 계속할 수 없다"라는 간단한 성명이었다. 풀튼 성명에 따라 남장로교 선교회가 경영하고 있는 10개의 중등학교는 1937년부터 신입생을 받지 않았고, 당국이 재학생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않는 한 나머지 학생들에 대한 교육은 계속해 나가기로 했다.

하지만 중일전쟁(1937년 7월 7일) 발발 후 매달 6일을 애국일로 정해 전국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9월 4일 전라도의 모든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사전협의회가 열렸다. 결국 9월 6일 신흥학교와 기전학교 학생들은 일본 경찰에 의해 다가공원에 있는 신사로 인솔되었다. 참배 구호 후 일본 순사와 관리만 참배하였고, 학생들은 참배를 하지 않고 꼿꼿이 서있었다. 재차 참배 구호가 내려졌지만 신흥학교 학생들은 퇴장하였고, 기전학교 학생들은 자리에 주저 앉아 울어버렸다. 신사참배는 무산되었고, 조선총독부는 학교를 폐교하려 했으나 이에 앞서 신흥학교는 자진 폐교 청원을 내고 9월 22일 학교 문을 닫았다.

폐교 후 전체 학생 246명 가운데 197명은 고창고등보통학교전학했고, 나머지 49명은 전학을 위한 학비 150원이 없어 중도에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들 외에도 고창고보로 5명의 교사가 전근가야 했으며, 신흥학교에서 사용하던 책상과 걸상의 일부도 고창고보로 옮겨졌다. 학교와 관련된 서류 일체는 도청 학부부에 보관되었고, 건물은 후에 일본인들의 저금 관리국수련소로 사용되었다.

2.4. 복교

해방 이후 1946년에 신흥중학교가 복교했다. 윌리엄 린튼 교장이 복귀해서 첫 사업(?)으로 교내 제일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신사를 변소(!)로 만든 것이 이 때의 일.

2.5. 6·25 학도병 참전

파일:6.25참전용사적명판.png
6.25가 발발하자 전주신흥학교 학생들도 학도병으로 징집되었다.[4] 학도병으로 징집된 학생들은 전주북중학교[5] 운동장에 모인 후 순천 등지에서 군사 훈련을 받고, 안강-기계 전투, 낙동강 전선에 투입되 인민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낙동강 전투에서 인민군의 남하는 지연되었고, 국군은 반전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60여년이 지난 2012년 6월 19일, 육군은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호남 지역 최초로 전주신흥학교 강당에서 '6․25참전용사 명패 모교 증정 행사'를 가졌다. '6․25참전용사 명패'는 가로 90cm, 세로 120cm의 크기로 돼 있으며, 71명의 학도병의 이름이 새겨졌다. 6.25 당시 전주신흥학교에 재학하다 학도병으로 징집 되었던 최승규 옹의 블로그에 당시 상황히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자세히 알고 싶다면 참고해볼만 하다. 한국동란과 학도병

3. 교훈 및 상징

3.1. 교표

파일:전주신흥중학교 교표.png
교표의 전체 모양은 국화인 무궁화 모양을 본떠 민족혼과 나라사랑을 표현하고 있다.

3.2. 건학 이념 및 교훈

건학이념: 하나님을 경외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사람을 기른다.

교훈: 지인용(智仁勇)

지(智) : 진리를 탐구하고,
인(仁) : 사랑을 실천하고,
용(勇) : 정의를 실현한다.

3.3. 교가

전주신흥학교 교가[6]
<colbgcolor=#00751a><colcolor=#fff> 작사 <colbgcolor=#fff,#010101>김진상
작곡 외국곡(프로이센 행진곡)
편곡 최남식
[ 가사 ]
1절. 완산 정기 모아드는 수려한 곳은
옛부터 문명한 희현당기지로다
백운간에 솟아있는 층층한집은
지인용을 배양하는 신흥학교다

2절. 풍우상설 반만고난 인내함으로
동량지재 굵은나무 양성하지니
복음진리 여러학문 공부하여서
반도문명 발전하세 우리학도들

3절. 태평양대서양의 무한한물은
심산유곡 개천들을 지내옴이니
우리들도 장래목적 성취하려면
백절불굴한 연후에 능히할지라

후렴. 만세 만세 만만세 신흥학교 만만세
지인용을 삼덕으로 신흥할지니
학도들아 용감력을 분발하여서
한 목소리 한 발자국 나아갑시다
[ 악보 ]
파일:전주신흥고등학교 교가 악보.jpg

독립군들이 부른 용진가와 후렴구 부분이 가사까지 매우 유사하다.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으나, 여러 주장들이 존재한다. 일단 신흥학교에서 이 노래가 유래하였다는 주장이다. 신흥학교 졸업생이 만주 등으로 이동하여 독립군이 되거나 신흥무관학교에 들어가서 모교의 교가를 군가로 바꿔 불렀다는 것이다. 또 다른 주장은 독립군에서 유래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은 두 가지 경위로 나뉜다. 1910년대 신흥고에 재직했던 선생님들의 다수가 민족의식이 강했던 오산학교숭실학교 출신이었기에, 이들이 당시 만주에서 활약한 독립군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교가로 도입되었다는 주장이 있고, 신흥무관학교 출신 교사를 통해 전파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아무튼 어느 쪽이 먼저 사용되었든 서로 영향이 있었다는 거다.

2000 남북정상회담평양국제비행장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맞이한 북한 군악대가 이 곡을 연주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참조1
파일:external/blog.joins.com/yongjin.gif

예전에는 비공식적으로 1절과 후렴구에 (헤이!)나 (아멘)[7]을 붙였다. 주로 2, 3학년들이 그랬는데, 1학년들은 처음에는 뭔지 의아해 하면서도 나중에 가보면 자기들도 후배들한테 이 짓을 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요즘은 그런 전통(?)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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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학교 특징

선교사가 세운 개신교 미션스쿨이다 보니 매일 강제 예배를 해야 한다. 연도마다 방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보통 1주일에 1번 강당에서 전교생이 예배를 한다.

학교에는 교목이라고 불리는 상주하는 목사가 있어서 강당에서의 예배를 주관한다. 화요일 아침에는 학급예배를 하고 그 외의 날들은 방송 예배를 한다. 학급예배는 종교부장이 주관하며 담임교사의 재량에 따라 번호순으로 돌아가며 기도를 드리기도 한다.

5. 학교 시설

5.1. 강당, 본관 포치

파일:대한민국 국장.svg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171호 172호 173호
서울 누하동 이상범 가옥과 화실 전주 신흥고등학교 강당과 본관 포치 전주 중앙동 구 박다옥
파일:전주신흥고본관포치.png 파일:전주_신흥중고_강당 전경.jpg
본관 포치 강당 전면 전경
파일:전주신흥고_스미스_리모델링 전.jpg파일:전주신흥고_스미스_리모델링 후.jpg
스미스 홀(리모델링 전) 스미스 홀(리모델링 후)
전주신흥중학교 내에 강당과 본관포치는 교문에 들어서서 바라볼 때 왼쪽 전방에 위치하고 있다. 본관은 1928년 12만원의 예산으로 지어졌고, 강당은 1936년 리차드슨의 기증으로 3만 3천원의 예산을 갖고 지어졌다. 하지만 본관은 1982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관 포치만 남아 있다. 두 건축물은 근대 역사 건축물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2005년 6월 18일 등록문화재 제172호로 지정 되었다. 하지만 문화재로 지정된 터라 함부로 보수공사를 할 수 없다. 1936년 3월 7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완공된 강당의 모습이 실려있다. 1936년 완성된 강당 모습

6. 학교 생활

6.1. 주요 행사

희현축제는 학교 개교기념일인 9월 9일을 전후에 열리는 교내 축제이다. 과거에는 개교기념일을 전후에 열리는 희현축제가 큰행사였기때문에 전주지역 여학생들도 초대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입시때문에 교내행사로 한정이 되어서 예전처럼 타학교와의 교류가 크게 줄어들었다. 공교롭게 9월 9일은 북한의 구구절과 날짜가 같아서 학생들은 종종 구구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추수감사절 행사는 매년 추수감사절을 전후에 열리는 행사이다. 학교가 개교된 초기에는 제법 큰 행사였지만, 현재는 의미가 많이 쇠퇴된 행사이다. 그 밖에 만우절을 기해 열리는 반바뀌기 행사 등이 있다. 여담으로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와 지척 가까운 거리에 있어 교류가 활발하던 시절에는 만우절에 여학교반과 남학교반을 바꿔서 수업을 했던 때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교사나 학생들 모두 즐기는 분위기였지만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행사가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가 가능했던 것은 교사들 중에 상당수가 선배출신인 경우가 많아서 였기 때문이고 심지어는 교사와 제자관계가 3대에 걸친 경우가 있다. 즉, 교장의 제자가 학년부장을 하고 학년부장의 제자가 담임을 맡는 경우도 있다. 교사가 교사의 별명을 부르는 경우가 있어 학생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7. 출신 인물

8. 이용 가능한 대중교통

8.1. 버스

8.1.1. 시내 버스

||<-2><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000000,#dddddd><table bgcolor=#ffffff,#1f2023> 신흥중고등학교(30621·30625) ||
간선
일반
||<-2><table width=100%><table bordercolor=#000000,#dddddd><table bgcolor=#ffffff,#1f2023> 다가교서문교회/서문(30623·30640·30646) ||
일반

8.1.2. 시외 버스

8.2. 철도

8.2.1. 일반 철도

이곳은 폐쇄된 교통 시설입니다.

이 문서에서 서술하는 교통 시설은 폐쇄되어 더 이상 운영하지 않습니다.

8.2.2. 광역 철도

이 교통 시설 또는 노선은 개통되지 않았습니다.

이 문서에는 현재 설계, 계획이나 공사 등의 이유로 개통되지 않은 교통 시설 또는 노선에 대한 정보가 서술되어 있습니다.

9. 기타

9.1. 희현당

파일:희현당.jpg

신흥학교는 조선시대의 학당이었던 희현당 위에 세워졌다. 교가에도 희현당이 등장하며, 건물 중에도 희현당의 이름을 가진 신흥 건물이 있다. 희현당은 숙종 26년(1700)에 당시 관찰사로 재임한 김시걸(金時難)이 지방 유지인 오명기와 더불어 황학대(黃鶴臺) 기슭인 옛 전주향교[13] 사마재 터에 학당을 창건했다. 김시걸은 희현당을 지어 놓고 이듬해에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기 전에 병사하고만다. 창설당시의 규모를 보면 강당과 주방을 마련했고, 전답을 사들여 그 수입으로 경비를 쓰도록 하였으며, 책을 비치하여 학업을 돕고 당규(堂規)를 제정하여 규율을 세웠다. 봄·가을 반으로 나누어 전주에서 10명, 도내에서 20명의 학생을 뽑아 수강하도록 했다. 그 후 관찰사 이집(李集)이 중수(重修)하려고 하였으나 임기가 짧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가 그의 아들 이주진(李周鑛)이 영조 14년(1738)에 부임하여 먼저 규모보다 더 넓게 중수했으며, 새로 당규 40종목을 제정하고 당기(堂記)를 써서 학생들을 격려했다. 그 후 오랜 세월 동안 당쟁으로 선비들간의 의견이 엇갈리고 경영이 충실하지 못하여 퇴락한 상태에 있다가 이곳에 신흥학교가 세워지게 됐다. 현재 신흥학교에 남아 있는 희현당 사적비와 희현당 중수사적비는 땅 속에 묻혀 있던 것을 발굴해서 세운 것으로 희현당을 창설한 김시걸과 이를 중수한 이주진의 곡정을 내용으로 한 것이다.

또한 전주신흥고등학교에선 18세기 말엽에 희현당철활자를 이용하여 출간한 ‘정묘거의록’, ‘맹자집주대전 1’ 등 서적 5권을 인사동에 있는 고서점을 통해 구입하였다. 이 덕분에 1798년에 발간된 ‘정묘거의록’ 같은 경우엔 222년 만에 희현당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외에도 전주신흥중학교와 전주신흥고등학교에서는 사생회, 백일장, 학교 축제 등을 희현당의 이름을 따서 희현제로 명명하고 있다.

[1] 1900년 개교 당시에는 신학문당(新學問堂)으로 불렀다.[2] 광주학생들의 운동에 동감(同感)한다는 뜻 이다.[3] 5학년 학생 전원이 만들었다고 한다.[4] 자원 입대가 아닌 징집이었다. 소집령이 내려지고, 영장이 발부 되었다고 한다.[5] 전주고등학교의 전신으로, 당시 6년제 학제였다. 현재에도 전주고등학교 동문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총동창회에 북중학교 기수가 반영된다.[6] 독립군들이 군가로 불렀던 용진가(勇進歌)와 같은 곡이다. 후렴구의 가사도 매우 흡사하다.[7] (아멘)은 학교가 미션스쿨이었기 때문에 붙인 것으로 보인다.[8] 광주[9] 목포, 영광, 무안, 함평[10] 고창, 김제, 부안, 정읍[폐지] 1981년, 전라선 동산-신리 구간의 이설로 인해 폐지[12] 김제역부터 전북혁신도시를 거쳐 전주역까지 운행하는 노선이 계획되어 있는데, 이 노선이 전주 완산구청을 통과할 예정이기에 노선이 착공된다면 학교와 제일 가까운 곳에 역이 위치할 수 있다.[13] 전주향교는 공민왕 3년에 신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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