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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종합경기장 야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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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단 선수단 명단선수단 등번호
유니폼 KIA 타이거즈 유니폼
경기장 1군 파일: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로고.svg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월명종합경기장 야구장무등 야구장전주종합경기장 야구장
2군 기아 챌린저스 필드전남 야구장
타이거즈 역사 해태 타이거즈 역사KIA 타이거즈 역사감독해태 왕조김씨 왕조(김씨 타선)KKK포이강철-조계현-이대진SKYCK포-LCK포양현종-헥터 원투펀치박전문전장정(JJJ 라인)
타이거즈 기록 해태-KIA 타이거즈 기록 및 인물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1호 기록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공사 현장 변천사홈런존 저주
우승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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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V11986 V21987 V31988 V41989 V51991 V61993 V71996 V81997 V92009 V102017 V112024 V12
현재 시즌 202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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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 기본 정보 쌍방울쌍방울 레이더스쌍방울 레이더스 2군
구단 역사 정보 구단 역사역대 시즌 | 1996년 플레이오프1997년 준플레이오프 역대 감독역대 주장사건 사고
구단 세부 정보 선수단등번호유니폼
기타 쌍방울 홈 17연승의 비밀쌍방울 레이더스/1997년/8월/23일
경기장 관련 정보 전주종합경기장 야구장(홈구장)월명종합경기장 야구장(제2 홈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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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20230118580045.jpg
철거 직전인 2023년 1월의 전주종합경기장 야구장
<colbgcolor=#eeeeee> 전주종합경기장 야구장
全州綜合競技場 野球場 | Jeonju Baseball Stadium
<colcolor=#373a3c> 개장 <colbgcolor=#ffffff,#191919> 1963년 9월 18일
폐장 2022년 12월
철거 2023년 5월
소재지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1가
홈 구단 해태 타이거즈 (1982~1989)
쌍방울 레이더스 (1990~1999)
크기 좌우 펜스 95m
중앙 펜스 110m
펜스 높이 2.1m
잔디 천연 잔디
좌석 규모 9,375석[1]
첫 경기 (해태) 1982년 4월 10일 (VS OB 베어스)
(쌍방울) 1991년 4월 9일 (VS 삼성 라이온즈)
마지막 경기 (해태) 1989년 9월 23일 (VS 빙그레 이글스)
(쌍방울) 1999년 10월 8일 (VS LG 트윈스)
파일:전북특별자치도 휘장.svg
1. 개요2. 역사
2.1. 해태 타이거즈 제2 홈구장(1982~1989)
2.1.1. 해태 타이거즈 제2 홈구장 시절의 경기 전적
2.2. 쌍방울 레이더스 제1 홈구장(1990~1999)2.3. 쌍방울 레이더스 해체 후(2000~2022)2.4. 전주종합경기장 재개발 및 대체 경기장 신축 계획2.5. 철거
3. 대체 신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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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www.jbpost.co.kr/4684_9453_5949.jpg
2016년 항공 사진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덕진구 덕진동 전주종합경기장 내에 위치했던 야구장. 무등 야구장과 더불어 호남 지역 야구 역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경기장이었다.

1980년대에는 해태 타이거즈제2 홈구장으로 사용하였으며 1990년대에는 쌍방울 레이더스가 제1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그리고 2000년 쌍방울 해체 이후에는 특별한 용도 없이 아마추어 전용 야구장으로 사용했다.

2022년 말부터 시설을 철거하고 전주월드컵경기장으로 이전하고 있다.

2. 역사

1963년 전라북도 전주시 일대에서 열린 전국체육대회 진행을 위해 주경기장과 함께 건립한 야구장이다.

1982년부터 1989년까지는 해태 타이거즈제2 홈구장으로, 1990년부터 1999년까지는 쌍방울 레이더스의 제1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1989년 월명종합경기장 야구장을 건립하기 전까지는 전라북도의 대표 야구장으로 전라북도 지역 아마 야구를 위한 장소로 이용되었다. 1987년 조명탑을 설치하면서 야간 경기도 가능해졌다.

2.1. 해태 타이거즈 제2 홈구장(1982~1989)

전주 야구장에 본격적으로 변화의 바람이 분 것은 1982년 해태 타이거즈가 호남을 연고로 창단한 직후였다. 해태는 전라남도 광주시를 제1연고지로, 전라북도 전주시를 제2연고지로 사용했다. 무엇보다 창단 당시 해태는 제1연고권역인 광주광역시·전라남도보다 제2연고권역인 전라북도의 입김이 강력했기에[2] 전라북도 야구의 중심이었던 전주시를 꽤 중시했다.

특히 해태는 전주시에서의 승률이 높은 편이라서 1년에 7경기~8경기를 전주시에서 소화했다. 실제로 1982년부터 8시즌간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을 홈구장으로 쓰는 동안 거둔 통산 성적은 65전 40승 1무 24패로 승률이 무려 0.623에 이른다. 이 시절 승률이 이토록 높았던 것은 당시 해태가 어느 상대팀을 만나던 무적의 전력을 뽐냈다는 점도 있지만 전주시의 홈 어드밴티지도 상당했다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크게 두 가지 에피소드로 해태 시절을 규정할 수 있는데, 하나는 1986년 5월 18일에 경기가 잡히자 광주광역시에서 전주시로 급히 홈구장을 옮긴 사례다. 그 전날인 5월 17일은 광주광역시에서 경기가 열렸기 때문에 어떤 의도로 옮겨졌는지는 현대사를 조금만 공부한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3][4] 다른 하나는 1987년 플레이오프가 치러진 장소가 전주시라는 점이다. 당시 광주광역시에서 전국체전이 열린 관계로 경기를 가질 여건이 안 되자[5] 전주시에서 경기를 치렀다. 이때 해태는 접전 끝에 OB 베어스를 누르고 1987년 한국시리즈에 진출, 삼성 라이온즈를 꺾고 세 번째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2.1.1. 해태 타이거즈 제2 홈구장 시절의 경기 전적

1982년부터 1989년까지 해태 타이거즈가 이곳에서 치른 홈경기는 다음과 같다.
날짜 경기 비고
1982.04.10 (토) OB 3 : 0 해태 (패)
1982.04.11 (일) OB 5 : 3 해태 (패)
1982.04.17 (토) 삼미 9 : 6 해태 (패)
1982.05.02 (일) MBC 4 : 11 해태 (승)
1982.05.08 (토) 롯데 1 : 2 해태 (승)
1982.06.13 (일) 롯데 10 : 6 해태 (패)
1982.07.17 (토) OB 7 : 4 해태 (패)
1982.09.11 (토) 롯데 1 : 7 해태 (승)
1982.09.22 (수) 삼성 0 : 2 해태 (승)
1983.07.25 (월) 롯데 1 : 6 해태 (승)
1983.08.13 (토) MBC 2 : 0 해태 (패)
1983.08.16 (화) 롯데 7 : 4 해태 (패)
1983.09.01 (목) 삼성 2 : 5 해태 (승)
1983.09.16 (금) MBC 2 : 3 해태 (승)
1983.09.20 (화) 삼미 2 : 6 해태 (승)
1984.05.01 (화) MBC 14 : 9 해태 (패)
1984.05.02 (수) MBC 9 : 1 해태 (패)
1984.05.03 (목) MBC 3 : 8 해태 (승)
1985.07.27 (토) 롯데 6 : 0 해태 (패)
1985.07.28 (일) 롯데 4 : 2 해태 (패)
1986.05.14 (수) 청보 2 : 3 해태 (승)
1986.05.18 (일) MBC 3 : 4 해태 (승)
1986.05.21 (수) 빙그레 2 : 8 해태 (승)
1986.07.29 (화) OB 11 : 0 해태 (패)
1986.07.30 (수) OB 0 : 1 해태 (승)
1986.09.06 (토) 빙그레 0 : 9 해태 (승)
1986.09.16 (화) MBC 1 : 4 해태 (승)
1986.09.17 (수) MBC 9 : 4 해태 (패)
1987.06.11 (목) OB 5 : 2 해태 (패)
1987.06.12 (금) OB 1 : 3 해태 (승)
1987.08.06 (목) MBC 6 : 2 해태 (패)
1987.08.19 (수) 청보 3 : 4 해태 (승)
1987.09.08 (화) 청보 3 : 1 해태 (패)
1987.09.09 (수) 청보 3 : 6 해태 (승)
1987.09.13 (일) 청보 6 : 10 해태 (승)
1987.09.26 (토) 빙그레 0 : 3 해태 (승)
1987.09.27 (일) 빙그레 2 : 1 해태 (패)
1987.10.10 (토) OB 4 : 1 해태 (패) 플레이오프 3차전
1987.10.11 (일) OB 3 : 4 해태 (승) 플레이오프 4차전
1987.10.12 (월) OB 0 : 4 해태 (승) 플레이오프 5차전
1988.04.30 (토) 태평양 4 : 12 해태 (승)
1988.05.01 (일) 태평양 7 : 9 해태 (승) 더블헤더 1차전
태평양 2 : 5 해태 (승) 더블헤더 2차전
1988.06.14 (화) 삼성 4 : 7 해태 (승)
1988.06.16 (목) OB 1 : 11 해태 (승) 더블헤더 1차전
OB 12 : 0 해태 (패) 더블헤더 2차전
1988.08.04 (목) MBC 1 : 6 해태 (승)
1988.08.05 (금) MBC 9 : 1 해태 (패)
1988.08.20 (토) 태평양 1 : 7 해태 (승)
1988.08.21 (일) 태평양 2 : 8 해태 (승)
1988.08.26 (금) 삼성 5 : 0 해태 (패) 더블헤더 1차전
삼성 0 : 4 해태 (승) 더블헤더 2차전
1988.09.01 (목) 롯데 2 : 3 해태 (승) 더블헤더 1차전
롯데 7 : 9 해태 (승) 더블헤더 2차전
1988.09.03 (토) 빙그레 1 : 5 해태 (승)
1988.09.06 (화) 삼성 3 : 13 해태 (승) 더블헤더 1차전
삼성 7 : 9 해태 (승) 더블헤더 2차전
1988.09.08 (목) 빙그레 0 : 7 해태 (승)
1988.09.10 (토) MBC 5 : 3 해태 (패)
1989.05.27 (토) 롯데 4 : 5 해태 (승)
1989.05.28 (일) 롯데 0 : 1 해태 (승)
1989.06.15 (목) 태평양 0 : 4 해태 (승)
1989.06.23 (금) 빙그레 1 : 4 해태 (승)
1989.07.30 (일) OB 3 : 3 해태 (무)
1989.08.16 (수) 삼성 3 : 4 해태 (승)
1989.08.17 (목) 삼성 11 : 7 해태 (패)
1989.09.23 (토) 빙그레 1 : 2 해태 (승) 전주 고별전

2.2. 쌍방울 레이더스 제1 홈구장(1990~1999)

1990년 전라북도 지역을 연고로 하는 쌍방울 레이더스가 창단되면서 전주 야구장은 쌍방울의 주 홈구장이 되었다. 그러나 허약한 선수 구성에 실력마저도 변변찮은데다 전라북도 출신 선수도 많지 않았던 탓[6]에 창단 후 4년~5년간 전주시 시민들에게도 외면을 받았다. 프로야구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던 1995년까지 단 한 번도 시즌 누적 관중이 20만명을 넘지 못했고 좌석 점유율도 30%를 밑돌았다는 것이 그 증거다. 이 시기에 관중이 가장 붐비던 경기는 옛 연고팀 해태 타이거즈의 전주시 원정 경기였는데 이마저도 1루 쌍방울 관중석보다 3루 해태 관중석에 앉은 팬들이 더 많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1996년부터 전주 야구장에도 봄이 찾아오게 되는데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 쌍방울이 돌풍을 일으켰을 때다. 이 때 쌍방울은 홈경기 17연승을 질주하면서 홈 팬들을 열광시켰다.[7] 무엇보다 1996년1997년 잇따라 PO에 오르면서 쌍방울만의 고유한 팬과 색깔이 드디어 드러나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해태와 그다지 차별화되기 어려웠지만, 쌍방울의 선전으로 확실히 달라지게 된 것이다.[8]

구장이 작아 쌍방울은 1군 무대에 뛰어든 1991년부터 1995년까지 피홈런 1위를 기록했다. 이 문제는 김성근 감독의 부임으로 해결되었는데, 김성근 감독은 2.1m 펜스 위에 3.7m 철망을 얹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했다.[9] 그가 구사한 벌떼 야구는 그렇게 먼저 구장 개조를 통해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 해체 직전 1999년 쌍방울의 피홈런 수는 187개였다.[10] 거기다 그 해의 187개 중에 7개는 이승엽이 치고 간 것이었다. 그 해 해태의 홈 광주구장의 피홈런수는 182개[11], 당연히 전주시가 최다 피홈런 구장이었다. 게다가 김성근이 펜스를 높인 3년간 전주시는 타자에게 아주 만만한 곳이 아니었던 것만 빼면, 9년 중 6년을 이 곳이 최다 피홈런 구장이었던 것.

하지만, 1999년 쌍방울이 재정난으로 해체되면서 전주 야구장의 야구 열기는 사그라졌다. 쌍방울 출신 선수들과 개별 계약하고 쌍방울의 권리를 인계한 SK 와이번스는 연고지를 인천광역시로 확정지으면서 전주시와 프로야구의 관계는 끊어졌다. 그 뒤 전북특별자치도의 연고권은 KIA 타이거즈로 반환되었지만, 시설 낙후 문제 탓에 주로 제2 홈경기를 치러도 군산시 월명종합경기장 야구장에서 했다. 여담으로 안 좋은 의미로 유명한 어느 외국인 선수KBO 리그 데뷔전은 이곳에서 치렀다.

2.3. 쌍방울 레이더스 해체 후(2000~2022)

쌍방울의 해체 후로는 대학야구 대회가 가끔 열렸던 것을 제외하면 사실상 방치된 상태였으며, 제대로 된 시설 보수도 이뤄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2000년대 들어와서 딱 한 번, 천하무적 야구단 촬영을 위해 보수했던 적이 있었지만, 이후로 다시 방치되는 중.

이후 전주시 야구소프트볼 협회에서 전주시 시설관리공단에 임차신청을 했고, 사회인 야구장 겸 중학교 야구부의 연습장으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야구장 자체가 지어진지 60년을 바라보는데다가 방치된지도 10여년이 지나 위험하기 때문에, 그라운드와 1층 기록실 정도만 열어서 쓰고 있다. 야구장 자체의 안전등급이 워낙 낮은 수준인지라, 야구장 근처에 주차했다가 차가 파손되었을 시에는 시설공단(전주시)이 책임지지 않는다는 안내문도 붙어있다.

2019년의 전주 야구장 모습을 촬영한 유튜버가 있으니 근황이 궁금하다면 참고하자.

2.4. 전주종합경기장 재개발 및 대체 경기장 신축 계획

파일:/news/201506/04/newsone/20150604152544846gmgb.jpg
초기 계획 조감도
파일:external/img.yonhapnews.co.kr/PYH2015071407030005500_P2.jpg
최종 조감도
2010년 전주시는 전주종합경기장 부지 재개발 계획을 수립, 종합운동장과 야구장을 함께 철거하여 그 자리에 호텔과 컨벤션센터, 아파트를 건립할 것을 목적으로 롯데그룹과 2012년 협약을 맺었다. 지난 2005년 전라북도가 종합경기장 및 실내체육관을 전주시에 무상양여하면서 제시한 ‘대체시설 이행각서’가 전주 야구장 건설에 추진력을 불어 넣을 것으로 예상된다. ‘대체시설 이양각서’는 전라북도가 이들 체육시설의 소유권을 전주시에 넘겨주면서 내건 조건으로, 월드컵경기장 주변에 1종 육상경기장과 5000석 규모의 야구장 등의 대체 체육시설을 건립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전라북도는 이들 시설의 사용과 관련해서는 10년 간 체육시설로 사용할 것과 10년 이내에 체육시설 이외의 용도로 사용하거나 용도를 폐지할 때는 사전 협의해야 하고, 이 경우 ‘대체시설 이행각서’를 준수토록 했다. #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새로운 야구장은 기부채납을 통해 전주월드컵경기장 인근에 마련될 것으로 알려졌다.[12]

그러나 실제 사업 실시에 필요한 시의회의 동의가 지역 상권 붕괴를 우려한 시민들의 목소리로 인해 한동안 표류했다. 그 덕에 당초 2013년 6월에 착공해 2015년 2월에 완공할 계획이었던 새 구장 건설 계획도 아무런 진전이 없이 한동안 방치되었다. 특히나 경제민주화의 기폭제가 되었던 대형마트 영업시간 규제를 처음으로 도입한 곳이 전주시였기 때문에, 더더욱 시민들의 목소리를 외면하기 힘든 상황. 2014년 지방선거 국면에 접어들어서는 전라북도지사전주시장에 출마하고자 하는 주자 대부분이 롯데에 의한 쇼핑센터로의 재개발을 백지화하겠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터라, 종합경기장 부지 개발 문제가 장기간 표류하거나 아예 백지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졌고 이는 사실이 되어 2015년 7월 민자를 유치해 대형 쇼핑몰로 개발하려던 전임 시장의 계획을 바꿔 전체 12만6000m² 규모의 경기장에 시 자체 예산으로 2018년까지 1500억 원을 들여 컨벤션센터와 호텔을 짓고 나머지 터에는 미국 뉴욕 맨해튼의 센트럴 파크처럼 도심 속 시민공원을 조성한다고 발표했다. #[13]

우선 전주시는 사업비 420억원 정도를 투입해 오는 2025년까지 야구장 부지에 어린이 미술관, 도서관, 예술도서관, 미술도서관, 미니전시실, 수장고, 편의시설 등을 조성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시립미술관 건립을 위한 위치 선정에 대해서도 미술인들의 의견수렴을 철저히 외면, 건립 확정 사실조차 모르는 미술인들이 대다수였다. #

종합경기장 대체 체육 시설로 전주월드컵경기장 옆 보조 경기장에 자체 예산 700억 원을 투입하여 1만5000석의 육상경기장(240억 원)과 8000석의 야구장(370억 원), 보조경기장(90억 원) 건립을 시작한다. 2015년 1월 기본계획수립 및 타당성 조사 용역을 거쳐 그 해 12월 지방재정 투자심사를 거쳐 2017년 3월 공사를 시작해 2018년 12월 마무리할 계획이었지만 # 2017년 말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2020년 상반기에 완공하는 것으로 늦춰졌다. 그러나 이미 2020년이 된 가운데 공사는 시작도 하지 못한 상태다. 결국 전주시와 전북특별자치도간의 힘겨루기가 끝나지 않는 이상 언제 신축될 지 미지수이다. 다만 전북특별자치도의회나 전주시의회에서 회의가 열 때마다 종합경기장 개발을 놓고 지지부진한 시,도정을 질타하는 시,도의원이 있어 그나마 관심은 이어지는 편이며 전주형 문화경제’ 실현의 한 방안으로 법원·검찰청부지, 전주종합경기장, 덕진공원, 한국소리문화의 전당, 전주생태동물원, 팔복예술공장을 아우르는 ‘덕진권역 뮤지엄밸리 조성’구상을 발표한 바 있는데 어떤 방식이든 개발소식이 나오는 이상 그래도 종합운동장 개발에 어느정도 가능성은 있는 편이다.

2022년 12월부터 야구장과 종합경기장을 철거하고 이후 롯데쇼핑과 협상 결과를 바탕으로 부지에 복합쇼핑몰과 종합컨벤션센터를 건립하는 방안을 발표했다. 이미 야구장 철거 예산이 반영되고 롯데쇼핑과의 협의도 상당히 진행되어 재개발이 급속도로 진척되고 있다.

2.5. 철거

2022년 12월 22일 전주시는 이달부터 야구장 폐장 및 철거 공사를 시작, 2023년 상반기까지 철거를 완료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

2023년 2월 21일부터 철거 작업을 시작했다. #

2023년 5월 10일 전주시는 야구장 부지의 콘크리트 및 석축 구조물 등의 해체를 완료하였으며 이달 중 철거 부지 안전 펜스 설치를 끝으로 철거 작업이 모두 마무리가 됨을 밝혔다. 철거된 야구장 부지는 당분간 가맥축제, 복숭아축제, 시민장터 등의 문화축제장으로 활용되며 내년부터 종합경기장 부지 개발이 본격화되면 이곳에 한국문화원형 콘텐츠 체험·전시관과 시립미술관 등이 건립된다. 전주 시민의 숲 1963 참조.

3. 대체 신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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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대 수용 인원 10,000명.[2] 해태 창단 당시 선수단의 절반은 군산상고 출신이었고 이들 중에는 김봉연, 김성한, 김준환, 김일권, 김용남 등 프로 원년부터 해태의 핵심으로 자리매김한 선수들이 있었다.[3] 해태 타이거즈, 5.18 민주화운동 문서에도 소개돼 있지만 전북특별자치도5.18 민주화운동 당시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은 곳이다.[4] 해태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창단 직후부터 5월 18일에는 광주광역시에서 절대 경기를 안 하다가 2000년이 되어서야 5월 18일에 광주 홈경기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바로 이 경기에서 해태는 송진우에게 노히트 노런을 당했다.[5] 전국체전에도 엄연히 야구 종목이 있는데다 가뜩이나 낙후됐던 무등야구장에서 전국구급 스포츠 축제인 전국체전과 KBO 포스트시즌이 함께 열리면 헬게이트가 열리기 때문.[6] 전주고등학교 출신 선수는 프로야구에서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으며 최해식이 입단 당시를 회상하기를 군산상고 출신 선수들은 해태 타이거즈에 많았으며 반면에 쌍방울은 타지역에서 온 이방인들이 많았다고 한다.[7] 쌍방울 레이더스의 역대 홈 관중 동원 현황 중 가장 홈 관중이 많았던 해는 1996년으로 26만 5918명이 전주 야구장과 군산시 월명종합경기장 야구장을 찾았다. 다른 지역이라면 별 볼 일 없는 수준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 당시 전주시의 인구가 약 57만명에 불과했고 전주 야구장의 좌석 수도 고작 1만석 수준인데다 전주시의 시장성이 당시 8개 구단 중 가장 열악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대단한 수치다. 오류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수치 상으로는 전주시 인구 중 절반 정도는 야구장에 한 번씩 왔다는 해석도 가능할 정도로 당시 전주시의 야구 열기는 대단했다.[8] 오상민박명환야구TV에 출연하여 회상하기로 선수-관중석 간의 간격이 가까워서 전주시 팬들의 욕설이 생생하게 들렸고 선수들이 조금만 잘못하면 전주 팬들은 먹던 컵라면을 그냥 던져버렸다고 한다.[9] 이는 태평양 돌핀스 감독 시절 숭의야구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본래의 인천 숭의야구장 펜스 높이는 5m였으나 투수력 향상을 위해 7.1m로 높혔다. 그래서 인천 특유의 짠물야구가 나올 수 있었던 것.[10] 당연히 신기록이었다.[11] 1999년 해태는 광주광역시 무등 야구장에서만 무려 127개의 홈런을 쳤다.[12] 그런데 2011년 6월 김완주전라북도지사김황식 전 총리와 면담한 자리에서 LH 본사 진주시 이전에 대한 보상책의 일환으로 전북혁신도시 내에 야구 전용 구장 건립을 요구하였다. 따라서 새 야구장의 입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다.[13] 국내에서 이와 비슷한 차례를 찾자면 뚝섬 돔 경기장 건설 예정 부지에 서울숲을 조성한 게 비슷한 사례이다. 다만 전주 야구장은 기존의 낡은 경기장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공원을 조성하는 것인 반면, 뚝섬 경기장은 아예 삽도 못 떠본 채 공원이 대신 입지하게 된 거라는 차이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