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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20:06:59

장성호/선수 경력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장성호

1. 개요2. 아마추어 시절3. 해태 타이거즈 시절4. KIA 타이거즈 시절
4.1. 2001 ~ 2003 시즌4.2. 2004 ~ 2005 시즌4.3. 첫 번째 FA4.4. 2006 시즌4.5. 2007 시즌4.6. 2008~2009 시즌4.7. FA 파동과 트레이드
5. 한화 이글스 시절
5.1. 2010 시즌5.2. 2011 시즌5.3. 2012 시즌
6. 롯데 자이언츠 시절
6.1. 2013 시즌6.2. 2014 시즌
7. kt wiz 시절
7.1. 2015 시즌7.2. 은퇴
8. 국가대표 경력9. 연도별 주요 성적

1. 개요

2. 아마추어 시절

충암초, 충암중, 충암고를 졸업[1]하고 1996년 해태 타이거즈에 지명되어 입단해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해태에 지명된 입단 동기는 김상진을 비롯해 김종국 등이 있다. 당시 서재응도 고졸 우선지명을 받았으나 인하대로 진학한 뒤 뉴욕 메츠와 계약을 맺고 미국으로 가게 된다.

장성호는 고교 2년을 혼자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며 날려버린 상태에서 고3(1995년) 때 겨우 충암고 야구부로 복귀해 팀의 주장을 맡으며 당시 에이스 박명환과 함께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 우승을 차지했다.[2] 정대만의 실사버전 상태였다. 그런데 해태에서는 오로지 이 1년도 안 되는 시기의 포텐셜만 보고 2차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지명, 계약금 1억을 안겨주는 등 해태 나름의 초강수를 둔다.[3] 당시 현대 피닉스가 신인이란 신인은 죄다 빼내가서 신인들의 계약금이 껑충 뛴 탓에 해태도 나름 재산 싹싹 긁어내면서 장성호, 투수 김상진, 포수 황성기[4]에게 각각 1억이라는 해태 나름의 거액 계약금을 안겨줬지만 사실상 프로에서 롱런한 건 장성호 뿐.[5][6]

3. 해태 타이거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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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01e23><colcolor=#ffff00> 해태 타이거즈 No.1
장성호
張盛好 | Chang Sung-ho
말 그대로 김응용 감독의 짝사랑을 한몸에 받으면서 프로 초년시절을 보낸다. 해태 시절만 본다면, 좌타거포 좌타거포 노래를 부르던 김응용 감독의 전폭적인 지원과 오리궁둥이로 유명한 김성한 타격코치의 지도를 받으며 외다리타법을 장착하고 본격적으로 주전으로 성장하게 되면서 장성호는 타이거즈 역사상 최고의 타자 스카우팅 중 하나로 역사에 기록된다.[7]

덧붙여 98~03중 모든 시즌에서 타율로 이승엽을 이긴 유일한 선수.[8]

참고로 97년도에 이호준과 함께 일본으로 연수를 받으러 갔는데, 김성한의 엄격한 지도와 많은 연습량이 곁들여져 타격 스킬을 완성할 수 있었다.[9] 일단 점심은 짬뽕 한 그릇으로 때우면서, 배트 들고 한 다리로 서 있기 등의 연습도 했으며 자세가 흔들리면 바로 김성한의 호통이 작렬했다고 한다. 고로 이호준은 현재도 장성호를 후배가 아닌 동반자로 취급한다.[10] 그리고 그 효과가 바로 98년도에 이종범이 떠난 타이거즈에 나타나는데, 고참타자인 홍현우, 이호성, 최훈재가 부진하면서 그들을 받칠 기둥으로 떠오른 것이었다. 결과론적 이지만 97년도의 삼성 바로 밑으로 평가받던 해태의 타선과 98년도의 최하위급 타선을 비교해본다면 장성호와 이호준의 각성이 없었다면, 더욱 답이 없었을 것이다.

입단 첫 해인 1996년부터 개막전에 선발 출장해 데뷔 첫 타석에서 안타를 기록하는 등 3안타를 쳤으나, 정작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들지 못했다.[11] 2년차인 1997년에는 김성한 코치의 지도를 받으면서 타격 스킬이 많이 늘어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는 2번타자 1루수로 뛰며 데뷔 2년차에 우승반지를 낀다.[12][13]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우승과 KIA 타이거즈의 첫 우승을 모두 경험한 네 사람(이종범, 김종국, 이대진)중 한 명이며, 해태 타이거즈 마지막 우승 멤버 중 김상진과 함께 가장 어린 선수였다. 이 때문에 해태 막내라는 이미지가 있다. 실제로 1999년 정성훈이 들어오기 전까지 3년동안 야수 막내이기도 했고.[14] 사실 해태에 몸담았던 선수 중 가장 어린 현역 선수는 그가 아니라 한화로 간 김경언이지만, 김경언은 우승멤버도 아닌데다 들어온 지 반 년만에 팀 이름이 KIA로 바뀌었기 때문에 해태 이미지가 거의 없다.

장성호가 진가를 나타내기 시작한 시절은 동렬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시절, 즉 해태 타이거즈 - KIA 타이거즈의 암흑기였다. 1998년 이종범이 주니치로 떠난 뒤 해태의 1번타자는 무주공산이었는데, 이 시기에 타율 .312 15홈런 출루율 .381 장타율 .462 OPS .843 sWAR 3.7을 기록하며 해태의 1번타자로 활약한다. 99년도에는 더욱 발전하여 .342로 타격 3위, 출루율 .420 장타율 .561[15]로 도루가 많지는 않았지만 뛰어난 출루능력으로 커버했다. 1998년~2000년 당시 장성호는 정수근과 완전히 다른 유형의 1번타자였지만, 눈야구로 인한 높은 출루율과 기동력을 커버할 수 있는 장타력 덕으로, 클래식한 1번타자는 아니었지만 생산력 쪽에서는 오히려 정수근보다 좋은 WAR을 찍은 팀에 도움이 되는 1번타자였다. [16]

KIA로 스폰서가 바뀌기 전까지는 뛰어난 컨택 능력과 나쁘지 않은 주루능력, 더불어 빼어난 출루율로 굉장히 유동적이던 당시 타이거즈 타선에서 테이블세터와 클린업을 오가면서 활약했다.[17] 특히 99년은 당시 홍현우, 양준혁, 샌더스, 브릭스와 같은 강력한 타자들과 함께 타율 .342(3위) 24홈런 출루율 .421(5위) sWAR 5.63(9위) wRC+ 152(7위) wOBA .425 (7위)를 기록하며 리그 최고의 교타자 중 한 명으로 거듭난다.

2000년대 초반 KBO 리그에서 최고의 타자를 말하면 이승엽, 심정수와 항상 등장하는 인물. 동기간 활동했던 이호준은 그런 평가를 받은 적은 없었다.

4. KIA 타이거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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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70125><colcolor=#ffffff> KIA 타이거즈 No.1
장성호
張盛好 | Chang Sung-ho
장성호는 최전성기인 1999시즌부터 2003시즌까지 그는 5시즌 모두 OPS 0.9 이상을 뚫었고 타자의 이상적인 슬래시라인이라는 3/4/5를 4년 연속으로 찍었으며, sWAR은 5점대를 당연하듯이 기록하면서 1998년부터 2006년까지 9년 연속으로 3할 타율을 기록했다.[18]

4.1. 2001 ~ 2003 시즌

KIA로 팀이 바뀐 이후,[19] 그는 클린업에 안착하게 되는데, 일본에 나갔던 이종범이 다시 돌아와 제2의 전성기를 누렸고 김종국이 부상과 타격부진에서 벗어나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더이상 테이블 세터로 걱정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 그 덕에 2002년부터는 3번타자 1루수로 위치하기 시작했으며, 그 덕에 장성호의 타격실력이 더욱 제 진가를 발휘하게 된다. 클린업에 안착한 2002년에 타율 .343를 기록하며 곧바로 타격왕을 차지하고 이승엽의 출루율왕을 저지했다. 그야말로 OPS 중장거리형 교타자의 교본과도 같은 성적. 98~03시즌 6년간 이승엽은 단 한번도 장성호보다 높은 타율을 기록한 적이 없다.[20] 다만 당대 최고의 거포와 타격실력이 빼어난 선수가 많이 모이는 1루수라는 포지션의 특성으로 인해 골든글러브와는 도통 인연이 없었다. 신인시절에는 동시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승엽에 밀리고 이승엽일본으로 가자마자 각성한 이대호김태균에 밀려 골든글러브는 한 번도 받지 못했다.[21] 가장 유력한 시절은 오히려 외야수로 뛰었던 99년이었는데, 좌익수 디스카운트와 30-30의 제이 데이비스도 골글을 못받는 타고투저로 인해 안타깝게 묻히고 말았다. 그래도 한 때 양준혁이 자신의 기록을 갈아치울 선수로 장성호를 뽑기도 했을 만큼, KIA의 암흑기를 지켜주는 대들보 같은 선수였다.

4.2. 2004 ~ 2005 시즌

저 시기에 2004년과 2005년 연속으로 반올림 3할을 달성하고, 거기에 2005시즌 3할을 달성하기 위해 시즌 몇게임 남은 .296인 상태에서 1번타자로 나와 5타수 5안타를 치고 나머지 경기를 나오지 않았다. 3할을 치는 절실함이 낳은 괴력 비슷한 것(...)을 보여주면서 야구팬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타자는 3할되기 직전의 장성호라는 우스갯소리가 널리 퍼졌었다.[22][23]

4.3. 첫 번째 FA

2005년 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어 당해 최대어로 떠올랐고, 시장으로 나올 거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우선협상기간 동안 4년간 최대 42억이라는 당시 FA 최고액 2위에 계약을 마무리지으며 KIA 타이거즈에 잔류했다.[24][25][26] 이 계약은 시즌이 지날수록 연봉이 높아지는 형태의 계약이었는데, 다음 FA 때 이적은 생각도 안 한다는 계약이었다.[27] 이 당시 KIA가 제시한 대우에 대단히 만족했다는 증거였으며 실제로 본인 역시 이적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터뷰로 증명했다. 그리고 이 계약이 이후 FA파동의 진원이 된다.

4.4. 2006 시즌

2006년에는 04-05 시즌에 약간 손해봤던 커리어가 반등하며 기아 타선을 이끌었다. 홈런갯수가 약간 준 것에 대한 부연 설명을 하자면, 서정환이 부임하면서 97-113-97의 무등구장을 97-119-97로 늘리고[28], 그린 몬스터를 설치하면서 잠실에서도 135m 가는 홈런이 가지 않는 이상 가운데는 넘길수가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무등구장의 파크팩터가 엄청나게 투수친화로 바뀌게 된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즌 중후반까지 이대호와 타점왕 경쟁을 하며 투고타저를 뚫고 역대 거액 FA 타자중에 손꼽히는 활약을 했다. 특히 시즌이 정확히 절반을 돌 시기에 이미 12홈런을 터뜨려 수많은 기아팬들은 장성호의 커리어하이를 기대했다. 그러나 투수친화적으로 변한 홈구장 + 시즌 후반부터 당시 이용규와 장성호를 제외하면 너무나도 부실했던 기아 타선 덕분에 고의사구가 쏟아지며 전반적인 스탯은 약간 하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때의 활약을 통해 3번타자 하면 떠오르는 전형적인 타자가 되었다.[29]

그렇게 기아는 이용규, 장성호, 이재주[30]의 활약과 서정환의 투수진 혹사를 통해 겨우겨우 4강에 진출했으나, 준플레이오프에서 결국 시리즈 스코어 1:2로 아쉽게 탈락. 시즌 후 커리어 마지막 국가대표에 뽑혔으나 그 국가대표는 전설의 도하 참사 대표팀. 장성호는 이 대표팀에서조차 3할 타율과 홈런 1개를 치며 역시 3할하면 장성호라는 이미지를 이어갔다.

1998년부터 2006년까지의 장성호의 성적은 9년 연속 3할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도 훌륭했는데, 전성기였던 9년 동안 장성호는 그 기간 동안 타율 .317(1위) WAR 43.34(3위)[31] 164홈런(11위) 689타점(4위) 1341안타(1위) 747득점(1위) 2루타 258개(1위) 2115루타(1위) 673볼넷(1위) 출루율 .414 장타율. 500 OPS.914 sWAR 43.34(2위) wRC+ 147.1, wOBA .405를 기록하며 리그를 대표하는 타자로 꼽기에 손색이 없었다. 괜히 양준혁이 본인의 기록을 갈아치울 선수로 장성호를 지목한게 아닌 것이었다.

4.5. 2007 시즌

2007년에는 구단 선수들의 투표에 의해 주장으로 선출되었다. 시즌 초 최희섭이 메이저리그에서 완전히 연을 끊고 영구 귀국하여 아예 한국 리그에 오면서 KIA에 합류하자, 장성호는 1루수를 최희섭에게 내준 뒤 본인은 신인 시절처럼 좌익수로 출장하게 되었다.[32] 그럼에도 여전히 크게 타선이 보강되지 않은 타이거즈의 대들보였으며 김기아라고 놀림받던 타선에서 이용규와 플루크시즌이었던 이현곤과 함께 그나마 믿을 수 있는 타자였다. 그러나 2007년 6월 27일 한화전에서 홈으로 들어오던 중 신경현과 충돌로 인해 무릎에 부상을 당했는데, 부상을 입은 상태로 휴식 및 재활을 하지 않고 본인의 연속 3할 타율 기록 경신과 서정환 감독의 역대급 망상이었던 서머리그 우승을 위해[33] 계속 출장을 강행하면서 결국 부상이 악화되었고[34], 결국 이후 커리어 하락의 계기가 되었다.

대신이라면 이 시기에 장성호의 유명한 절구질[35]이 중계되었고, 장성호에 대한 부정적 편견[36]이 싹 날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10년 연속 3할이라는 리그의 대기록이 걸려있던 시즌이었기 때문에 팬들의 주목도도 높아졌던 시즌으로, 2005 시즌의 전설적인 활약의 이미지가 남아있던 덕에 시즌 말미에 경기가 끝날 때마다 장성호 타율을 계산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그러나 결국 부상의 여파로 10년 연속 3할타율은 실패하게 되었다. 이는 단순한 기록연장의 실패에서 멈추지 않고 본인의 커리어의 일종의 전환점이 되어버린 시기였다.

4.6. 2008~2009 시즌

2008년부터는 부상과의 사투를 벌이곤 했다. 08년에는 최희섭의 부진으로 인한 주전확보와, 고의사구효과로 어찌어찌 비율스탯에서는 커리어 반등에는 성공했지만 대신 조범현 감독과 플래툰 기용과 소통의 오류 [37] 로 인하여 앙금이 생겼고, 최희섭이 각성해버린 2009년부터는 확실히 입지가 줄었다. 당시 포지션에서 경쟁하던 다른 타자들에 비해 확실한 매력이 부족한 탓인지 결국 플래툰 타자가 되었고, 수비 포지션 역시 매우 유동적이었다. 또한 이전의 부상의 여파가 여전히 여전히 남아 있는 것도 한 몫했다.

2009년은 98년 이후 장성호의 커리어 로우 기록이었다. 비율상으로는 07 시즌과 비슷했지만 타석수가 98년 이래 가장 적었다. 그 와중에 인상깊은 장면을 남겼는데 8월 30일 잠실 두산전에서 이재우를 상대로 대타 역전 만루포를 쳐내면서 팀의 월간 최다승을 경신했다.


캐스터가 더 살벌하다.[38]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즌 내내 장성호는 불평불만 없이 무난하게 시즌을 치렀고, 당연히 팬들은 장성호가 단순 안식년을 치르고 내년을 노릴 것으로 생각했다. 이유는 바로 상술한 FA 계약으로, 연봉이 꽤 높아 다른 구단이 영입하기엔 보상금이 걸림돌이 된 탓에 KIA 잔류가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성호는 FA 신청을 선택했고 모든 야구 커뮤니티가 동요하는 사건이 시작되었다.

4.7. FA 파동과 트레이드

FA를 신청했지만, KIA 프런트로부터 무시에 가까운[39][40] 대응을 받고 시장에 나왔다. KIA 구단에서도 이렇게 나올 만한 나름의 이유가 있었는데, 앞선 계약 기간 동안 장성호는 크고 작은 부상으로 제대로 된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앞서 언급된 07년 무릎부상 뿐 아니라 08년 손목, 등, 갈비뼈 등의 부상이 있었고, 09년 시즌 종료 뒤 손목 수술까지 받아야 했다.[41] 결국 구단 입장에서는 06년의 활약을 제외하면 실패한 계약이었으니, 두번째 계약에서도 무리한 금액을 질러 똑같은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42][43]

하지만, 장성호가 시장에 나왔음에도 그를 영입하려는 구단이 없었다. 연봉 및 보상금이 워낙 막대했고, 부상과 수술 경력, 이제는 적지 않은 나이가 걸림돌이 된 것이다.[44] 더욱이 컨택터 1루수라는 애매한 특성 역시 타 구단이 원하는 스타일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2005년 첫 FA 당시만 해도 거의 대부분의[45] 구단이 장성호를 탐냈었으나 불과 5년도 안 되어 완전히 상황이 바뀌어버렸다. 정확히 말하면 FA제도의 보상금 등의 제약이 없었다면 원하는 구단은 있었으나, 이미 구단과 장성호가 서로 돌아선 상황이 명백한 이상 트레이드 매물이 될 것이 자명한 장성호를 FA로 영입할 이유는 사라졌다. 장성호는 FA신청 이후 내내 이적을 원했고 KIA에 다시 발을 붙일 의도를 전혀 드러내지 않았는데, 이것이 장성호 스스로 본인의 시장성을 깎아내는 행동이 되었다.

결국 KIA와의 최종 협상에서 연봉 2억 5천만 원의 재계약 제의를 받자 팀에 트레이드 요청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2010년 1월 14일 1년 2억 5천만원으로 재계약했으나 구두상으로 '조건이 맞을 경우 트레이드 추진'이라는 단서가 붙게 되었다.

5. 한화 이글스 시절

파일:20100608 장성호 한화행.jpg
<colbgcolor=#ff6600><colcolor=#ffffff> 한화 이글스 No.1
장성호
張盛好 | Chang Sung-ho
한화 또는 두산[46]으로의 트레이드설이 돌았고, 우여곡절 끝에 결국 6월 8일 한화 이글스로 트레이드되었다.# 장성호+이동현+김경언안영명+김다원+박성호의 3:3 트레이드.[47]

이 시기의 장성호의 평가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는 부정적이며 일부 반론이 있는데, 일반적으로는 FA 이후 트레이드 요구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팬들이 장성호의 잘못으로 보고 있으며 KIA 팬들이 등을 돌린 계기도 대부분 이 때였다. FA 때 언론플레이는 오히려 장성호에게 긍정적이었던 편이었는데, 이는 장성호의 언플이 철저하게 감독과 프런트를 향했고 단순히 구단이 싫다는 투정이 아니었기에 작용한 모종의 동정론과, 장성호라는 선수가 한국프로야구의 차세대 레전드이자 타이거즈라는 구단의 불세출의 스타라는 압도적인 위상이 기능한 사례이다. 또한 전년도에 이도형으로 인해 FA 규정의 불합리함이 불거진 상황에서 장성호는 '구단이 선수의 권리가 있으니 따라야 한다' 는 개념과 '선수에게 불리한 관행은 없어져야 한다' 는 개념의 큰 충돌이었으며, 에이전트 없는 FA 권리자의 상징으로 언론에 비추어졌다. '장성호가 입털고 다른구단 가서 싫다' 는 주장은 당시의 분위기와는 약간 거리가 있으며 오히려 당시에는 장성호가 KIA에 입지가 없었다는 것이 팬들에게 인정받는 분위기였으며 이런 정황이 칼같이 맞아떨어져 FA 미아가 되었음에도 트레이드로 풀릴 수 있었다. 실제로 KIA 구단은 장성호에게 레전드 대접을 해주겠다는 어떠한 자세도 없었고, 어쨌든 장성호는 한화에서 명실공히 2년간 주전에다 2011년은 후반기부터는 없어도 되는 수준이었지만 2012년에는 어쨌든 리그 OPS 20위의 준수한 타자였으니 아직 주전으로 뛰고 싶다는 본인의 주장은 일단 마냥 틀린 것은 아니었다. 반면 장성호 본인 스스로 기존의 상식적으로 여겨지던 트레이드 룰을 혼란스럽게 하고 구단 운영을 꼬아버린 것 역시 명백하며, 엄연히 계약한 타자가 2군에서 태업을 작렬한 것 역시 나름의 평가를 받을 것이다. kt로 이적한 이후 본인의 인터뷰로 추측하자면 감독에게 감정적으로 대응했던 것은 본인의 잘못으로 인정하는 듯하다.#

KIA는 이종범, 김종국 이후 최고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덕아웃 리더를 잃었으며, 이종범마저 은퇴해버렸던 2012년 이후, 한동안 그 대체자를 찾지 못했다. 장성호가 나가면서 타이거즈 구단에는 이종범과 이용규 사이의 중견선수가 제 앞가림 하기도 빠듯한 김상훈[48]정도 밖에 남지 않았고, 김상훈이 은퇴하고 이용규는 한화로 이적해 가면서 팀리더의 공백은 더욱 더 커지게 되었다. 더 현실적으로는 장성호가 나가고 나자 막상 KIA의 1루 및 지명타자 자리는 최희섭이 계속 부상당하면서[49] 매년 1자리 이상 펑크가 났으며, 이 펑크는 브렛 필을 영입하고 나서야 풀리게 되었다. 그리고 브랫 필이 떠나고 김주찬이 말년에 자리잡은 2년 이후 타이거즈는 1루에 확고한 주전이 없는 상황이 되었다.[50]

5.1. 2010 시즌

6월 16일 안영명과의 이적대결을 펼쳤다. KIA팬들은 홈런 맞으라고 하고 한화팬들은 삼진 잡으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다. 결과는 삼진.

6월 19일 삼성과의 경기에서 역전 결승타를 쳤다. 그러나 이후 두 달 가까이 삽질에 삽질을 거듭하며 한화팬들이 수비담당관, 장성호-안영명 트레이드가 아니라 김경언-안영명 트레이드라며 까고 있다. 영입 목표였던 장성호가 오히려 부진하고 기아에서 잉여자원이라고 버린 김경언이 최근 중견수로 출장하며 3할 타율을 기록하고 있으니.

7월 28일 류현진의 등판일에는 병살타로 찬물을 끼얹어서[51]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패배가 모두 장성호의 책임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한화팬들이 가장 예민해지는 류현진의 등판일이라.

그러나 류현진의 다음 등판날인 8월 3일 넥센전에서는 선취점과 결승타점을 내고[52] 그 다음 등판날인 8월 8일 롯데전에서는 시즌 첫 홈런을 치고 호수비까지 했다. 덕분에 아직 스탯을 회복하진 못했지만 까이는 게 일시적으로 줄어든 상태.

그리고 또 몇 경기동안 제대로 삽질해서 가루가 되도록 까이다가, 류현진의 등판일이었던 8월 17일 LG전에서 또 홈런을 쳤다. 이 홈런으로 역대 12번째 900타점을 달성. 다만 이 날은 홈런을 치긴 했어도 안타를 치고 3루까지 가다가 주루사한지라, 마냥 깔 순 없지만 까방권을 주기도 뭐한 애매한 상황. 류현진도 16승을 달성하지 못한데다 경기 결과도 무승부로 끝났고.

부진 원인은 아무래도 스프링캠프에 참여하지 않은 것과 트레이드 파동 때문에 정신적인 방황까지 겹친 것이 가장 크다. 실제로 한대화 감독은 현재 훈련이 부족해서 하체가 부실해진 상태다. 올 시즌 끝나면 하체부터 강화시킬 것이라고 공표해둔 상태. 그렇게 피지컬이 부실한걸 알면 2군을 보내든가, 아니면 타순조정이라도 해야 되는데 1루수 철밥통에 클린업트리오 타순으로 기회 말아먹은게 한두 번이 아니다.

9월 13일 vs LG전에서 올시즌 첫 연타석 홈런을 쳤다. 근데 그 경기는 7:10으로 졌는데, 7점 중 6점이 장성호의 몫이다. 슬슬 감을 되찾는거 같은데, 시즌은 거의 막바지이다.

2010시즌 최종성적은 타율 0.245 출루율 0.344 OPS 0.673 4홈런 29타점.

신인시절의 2시즌을 제외하면 타율 0.280 OPS 0.800 이하의 성적을 기록한 적이 없었던 타자였기에, 커리어로우 성적이다. 이 때문에 통산타율은 0.306에서 0.303으로, 통산출루율은 0.400에서 0.398로 하락.

그리고 아래 기록들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2010년 시즌까지 통산 1,799안타 199홈런 898볼넷 699삼진이다.

5.2. 2011 시즌

파일:KBO 리그 로고(영문/다크모드).svg
2011 KBO 리그 볼넷 1위

2010년 10월 18일 오른쪽 어깨 연골 봉합수술을 받았다. 미니홈피 가보면 병상에서 생일을 맞는 사진도 있다...

이전에도 계속 통증을 느꼈으나 FA를 위해 진통제를 먹으면서 참았다고 한다. 하지만 트레이드 당시에는 '프로야구 선수 누구나 갖고 있는' 잔부상 정도밖에 없다고 했다.# 덕분에 한화 팬들에게는 말년에 돈도 벌고 퍼질곳 찾아 왔다고 폭풍처럼 까이는 중에 장사기라는 멋진 별명까지 얻었다. 아예 방출해버리자는 팬들도 많다.

그런데 우습게도 개막전부터 김강이 타격은 물론 수비에서 완전히 무너지자 한화 이글스 갤러리를 비롯한 주요 야구 사이트의 한화 팬들은 장성호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4월 24일 이대수가 2군으로 내려가면서 1군으로 콜업되었다. 그날 치른 두산전에서 3번 지명타자로 출격하여 4타수 1안타 1타점으로 1800안타를 달성했으며, 4월 26일 넥센전에서는 2타수 2안타 2볼넷으로 전 타석 출루에 성공하고 900볼넷도 달성했다. 하지만 기껏 장성호가 돌아왔더니 다른 타자들이 부진하는 바람에(특히 넥센전에서의 최진행) 류현진이 완투패를 먹는 참사가 벌어졌다.

6월 16일 KIA와의 경기에서 4타석 4연속 볼넷으로 한국 프로야구 통산 4번째 1,000사사구를 달성했다.# 그리고 그 볼넷은 결과적으로 카림 가르시아의 만루홈런으로 이어졌다.

7월 2일 KIA와의 경기에서 KBO 역사상 5번째로 통산 1,000득점 달성.

올스타전 브레이크 기점으로 타격과 선구안이 급격하게 저하되고 있다. 본인이 출루하는 일도 거의 없고, 득점권 찬스땐 여지없이 똥볼에 폭삼. 한화 이글스 갤러리에서는 이제 장스나라는 별명 대신 장물총, 장폭삼, 장조루, 장득병, 장광고 등으로 도배하면서 까고 있다. 8월 26일 LG전에서는 무려 6타석 동안 출루조차 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까지 하였다.

그래도 그 뒤로는 명불허전의 선구안으로 볼넷은 잘 골라 나가고 있으나, 내야 플라이, 땅볼 등등을 자주 치며, 타격에서는 아직 회복세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 선구안은 살아있는 게 확실하나, 2년 연속 스프링캠프를 소화하지 못한 것이 원인인지 체력 저하가 확실히 눈에 보이는 상태. 게다가 아주 야금야금 볼넷 골라나가는 것도 떨어졌다.

최종성적은 116경기 출장하여 478타석 390타수 95안타(2루타 13개) 8홈런 37타점 53득점 타율 0.244 출루율 0.379[53] 장타율 0.338 OPS 0.717을 기록했다. 특기할 사항으로 81개의 볼넷은 리그 1위 기록이었다. 게다가 달랑 홈런 8개치고 전구단 상대홈런을 기록했다는 것이다.[54]

그런데 또 다시 수술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이번에는 왼쪽 어깨라고. 이번에도 스프링캠프 참가는 힘들다고 한다. 악! 장성호 또 수술했다. 한화 초비상 김태균과 박찬호의 영입으로 희망에 부푼 한화 팬들에게 또 다시 찬물을 끼얹었다. 이쯤되면 KIA에서의 갈등이 단순히 코치진이나 프런트의 문제만은 아니었다는 의견이 점점 더 설득력을 얻을 듯.

5.3. 2012 시즌

파일:장성호2012타격폼1.png
타격폼 변경전.

앞서 기존 장성호 외다리타격폼은 다리를 크게든후 다리를 펴준뒤 친다는 형태였으나, 나이때문인지 타격폼을 바꾸었다.

파일:장성호22.png
타격폼 변경후.

이후 다리를 펴지 않고 다리에 힘을모아 나이때문에 힘이 떨어지는 장성호에게 장타를 조금이라도 칠수있는 타격폼으로 바꾸었다.참고

어깨부상을 딛고 재활해서 시범경기부터 등장했다. 바뀐 점으로는 라식을 해서 안경을 벗었고, 외다리 타법을 바꿔서 아예 다리를 들고 치지 않았다. 이후 다시 외다리 타법으로 돌아가긴 했으나 다리를 드는 높이가 낮아졌다.

2012 시작부터 한화팬들은 그 동안 장성호의 3번에 우려를 많이 하고 있었는데, 개막 초에는 아직 체력이 있어서인지 김태균과 함께 중심타선의 면모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4월 12일에 1900안타를 달성했다. 큰 부상만 없다면 시즌 후반에 2000안타를 달성할 것으로 보이나, 훈련량이 부족한지라 시즌 중후반에 체력 저하가 우려된다.

5월 26일 넥센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역대 2번째 개인 통산 1000볼넷을 달성했다.

6월 29일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자신의 통산 3000루타를 솔로홈런으로 장식했다. 역대 4번째 3000루타.

8월 15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포항 야구장 1호 병살타를 쳤다.

9월 18일 삼성 라이온즈와의 포항 야구장 경기에서 2000번째 안타를 쳤다. 그런데 대기록 작성에 너무 흥분을 했는지 6회 말, 2사 상황에서 하주석의 호수비에 이은 송구를 그대로 알을 까서 실점을 유발, 이후 류현진은 흔들리기 시작해 결국 그 회 3실점을 해 패전 위기에 처했다. 대기록을 달성하고도 팬들에게 좋은 소리는 커녕 포풍까임을 받게 됐다.

10월 2일 대전에서 열린 SK 와이번스와의 시즌 최종전에서 4회 말 선두타자로 등장, 채병용을 상대로 우월 솔로 홈런을 터뜨리며 선행주자의 도움 없이 스스로 프로 통산 아홉 번째 1000타점의 주인공이 되었다. 장성호의 1000번째 타점은 이 경기의 결승타점이 될 뻔했으나 불펜의 부진으로 경기가 뒤집혔는데, 다행히 김태균의 끝내기 안타가 작렬, 이 날은 마지막까지 웃을 수 있었다.

시즌 최종 130경기에 출장하여 501타석 429타수 113안타(2루타 28개) 9홈런 52타점 57득점 2도루 타율 0.263 출루율 0.364[55], 장타율 0.392 OPS 0.756을 기록했다. 리그가 작년에 이어 투고타저 흐름을 보이면서 wRC+나 WAR 모두 작년보다 나은 수치를 보여줌에 따라 세이버 상으로는 나름 준수한 활약을 한 시즌이었다.

6. 롯데 자이언츠 시절

파일:장성호 롯데.jpg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롯데 자이언츠 No.1
장성호
張盛好 | Chang Sung-ho
2012년 11월 27일, 롯데 자이언츠 신인 대졸 좌완투수 송창현과의 맞트레이드로 롯데로 이적하게 되었다. 한화로서는 부족한 투수 자원을 보완하고 롯데에서는 홍성흔이 빠진 구멍을 메꿔줄 자원을 보완하기 위해서 한 트레이드 같지만, 17년간 통산 타율 2할9푼7리 2007안타 1076득점 1000타점을 올린 베테랑 선수와 아직 검증도 되지 않은 신인 투수와의 일대일 트레이드라는 점에서 논란이 생기고 있다. 사실 완전히 납득이 가지 않는 트레이드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는 것이 장성호의 한화이글스에서의 성적만 놓고 본다면 3년간 타율이 2할 5푼대로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고, 김태완의 복귀로 장성호의 자리가 없기도 하는 등 여러가지 문제가 얽혀있다.

하지만 2012 시즌 OPS 20위권 선수를 2대1이 아닌 1대1 트레이드를, 그것도 제대로 검증도 안된 신인투수와의 트레이드를 했다는 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문제제기를 하고있다. 뭐니뭐니해도 장성호는 한화가 가진 최고의, 아니 유일한 트레이드 카드였으며 [56], 동시에 트레이드 상대는 선수진이 쏠쏠한 롯데. 게다가 롯데는 1루/지명타자가 없어 차기시즌 준비에 목이 타던 상태였으며 이에 따라 트레이드 자체를 롯데에서 먼저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 상황에서 한화는 롯데의 치명적인 약점을 시원하게 긁어주었고, 동시에 팀의 최고의 트레이드 카드를 대졸 미필의 무명투수 한명에 써버렸으며, 동시에 롯데는 장성호 트레이드를 발판삼아 FA 보상선수 픽에서도 대박을 터뜨리며 2명의 FA로 인한 출혈을 최소한의 공백으로 메우게 된다. 아무리 장성호의 서비스타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곤 하지만 송창현도 결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대졸미필이며, 송창현 외에도 선수를 얻어 올 수 있는 카드를 송창현으로 거래를 끝내버렸다는 건 송창현의 차후 성장과 아무런 상관 없는 치명적인 장사의 실수다. 1+1 제품에서 1을 그냥 포기한 수준.[57] 하지만, 트레이드 결과는 결국 시즌 개막 후에 밝혀지는 것이므로 속단은 금물.[58]

11월 28일, 이적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통영시에서 열린 롯데 자이언츠의 납회식에 참석하여 새 팀에서의 새출발에 대한 강한 의욕을 다졌다.

등번호는 기아, 한화시절때부터 썼던 1번을 계속 쓴다. 기존에 1번을 썼던 이승화[59]는 51번을 쓰게 되었다.

6.1. 2013 시즌

3월 30일 한화 이글스와의 개막전에서 5번 타자로 출전했다. 4회와 6회에 뒤져있는 스코어를 따라잡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천금같은 볼넷[60]을 얻어냈고, 4:5로 뒤진 9회말 1사 만루에서 안승민의 스플리터를 절묘하게 동점 적시타로 만들어 내며 승리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2013년에는 박종윤과 1루수 자리에 번갈아 선발 출장중이다. 아무래도 나이가 있는 만큼 수비 능력이 현저하게 딸리기 때문에... 초반엔 팡야보다는 타격 능력이 월등히 좋아 대타로도 종종 나왔으며, 지명타자로도 나왔다. 좋은 타격감과 자신의 특기인 눈야구를 후배에게 전수하는 모습 등으로 인해 팬들의 지지가 높아 한화 이글스 입장에서는 아쉬운 장면이었지만, 초반과는 달리 팀 전체의 타격력 하락을 막는 데는 역부족이었고 본인도 점차 타격 부진에 빠져 결국 5월 13일에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다.

그 후 2군에서 권두조 감독님의 은총을 받아 신나게 구르다가 6월 경에 1군에 올라왔다. 올라와서 결승타를 친 건 좋았는데 올라온 당일 주루 플레이를 하다가 팔꿈치를 다쳐서 깁스를 하고 도로 2군에 갔다. 7월달에 부진한 김대우와 자리를 바꿔 올라왔다.

결국 2013시즌 최종 83경기에 출장하여 278타석 241타수 64안타(2루타 10개, 3루타 1개) 4홈런 27타점 21득점 타율 0.266, 출루율 0.363, 장타율 0.365 OPS 0.729에 라는 장성호라는 이름값에 비하면 초라한 성적을 그쳤으며, 곧 다가올 2차 드래프트에 대해서도 장성호를 보호선수에 묶지 않는 걸 당연시할 정도로 입지가 좁아졌다. 이적 당시 송창현하고 비교하며 한화 팬들이 아우성치던 걸 생각하면 격세지감.

6.2. 2014 시즌

시즌 전 인터뷰에서 2014년 후 은퇴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롯데에서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싶지만, 은퇴식은 KIA에서 치르고 싶다고. KIA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루이스 히메네스최준석이 롯데에 영입되면서 장성호의 입지는 없어진 거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시즌 초에 잠시 1군 엔트리에 등록되었으나 5경기 5타석에 나와서(모두 대타로 출전했다) 안타를 하나도 때리지 못했으며 루이스 히메네스가 콜업되면서 2군으로 내려갔다. 5월 9일 이후 한동안은 2군 경기에도 나오지 않다가 5월 30일에야 다시 출장.

일단 퓨처스리그 성적은 3할 6푼에 볼넷도 적지않게 골라내 장성호다운 모습을 보여줬지만, 1군경기 출장은 위에서 말한 5경기 5타석이 전부. 히메네스가 없다고 해도 박종윤과 최준석에 밀려 롯데에서의 1군 출전은 사실상 어려워 보인다.

조성환이 은퇴를 선언했을때 자신의 페이스북에 눈물 셀카를 올렸다. 팬들은 슬픈 것은 공감하지만 왠지 웃긴다고. 후에 다음 스포츠에서 조성환이 카톡 상태 메시지를 "굿바이"라고 했는데, 이걸 본 장성호가 울컥해서 진짜로 울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1년 선배가 은퇴하니 자기 나이를 실감하기도하고 슬프기도 해서 울었을 듯. 둘은 충암고 선후배 관계이다.

6월 19일 이후 재활군에 내려가며 쓸쓸하게 시즌을 끝냈다. 팀도 4강 진출에 실패하고, 내부 문제까지 발생하며 여러모로 베테랑 장성호에겐 씁쓸할 시즌.

시즌 후 일부 KIA 팬들은 장성호의 복귀를 바라고 있다. 프런트가 물갈이되어 장성호와의 갈등이 약화되고, 정신적 지주인 이종범선동열 감독이 사실상 내치면서 반강제로 은퇴하고, 팀 성적은 추락했다. 급기야 2014년엔 나지완이 부상을 숨기고 AG 국가대표에 선발되어 병역특례를 받아 팬들에게 큰 비난을 받는 등의 좋지 못한 일 등이 일어날 정도로 팀 케미가 박살났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거기다가, 장성호가 2군에서 밥값하는 것과는 달리 2013년 1루수였던 최희섭은 연봉은 1억씩 받으며 2군 경기 출전도 없이 사이버화가 되고 있어 만년 유망주 김주형김민우가 1루를 보는 상황인지라, 브렛 필의 백업 1루수 역할도 필요하다. 게다가 2012년 이후로 KIA 덕아웃에서 젊은 선수들을 다잡아줄 고참이 사실상 씨가 말라버렸기 때문에 팀 분위기를 위해서라도 해태/KIA 출신의 프랜차이즈이자 레전드인 장성호는 매력적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선동열 감독이 안치홍에게 임의탈퇴 이야기를 꺼냈다가 팬들의 포화를 맞고 사라졌기 때문에 정말 KIA로 이적할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리고, 인터뷰가 있었다. 2군에서 맹활약 했는데도 불구하고 1군 승격은 커녕 부상 없이 재활군으로 내려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구단에게서 직접 맹활약은 곤란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다. 아마 1군으로 올리자니 최준석히메네스가 있고, 2군에 계속 두자니 팬들의 집중 포화가 곤란했을 것이란 추측을 했다 한다. 그런데 저 기사에 장성호가 CCTV 사찰에 대해 항명하다가 이를 빌미로 2군으로 내려갔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삭제되었다는 카더라가 있었다. 이는 미디어스의 기사를 통해 이영미 기자가 자신이 스스로 삭제했다고 밝히면서 사실로 밝혀졌다.

7. kt wiz 시절

7.1. 2015 시즌

파일:external/www.ktwiz.co.kr/water_2015033011114645.jpg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kt wiz No.1
장성호
張盛好 | Chang Sung-ho
KIA 시절의 조범현 감독과 있었던 갈등이 해소되었고 조범현 감독도 장성호가 kt wiz로 오는것에 호의적이라는 기사가 보도되면서 kt행이 기정사실화된 가운데, 11월 25일 롯데 자이언츠의 보류선수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그리고 이틀 후, kt로 이적했다. 연봉은 1억원. # 여담으로 조범현-장성호 간의 화해 무드를 조성하는 데 같은 충암고 출신인[61] 조성환이 가교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박동희 기자에 의해 알려졌다. # 기사의 대략적인 내용은 2014시즌 롯데 2군에 있던 장성호가 kt와의 경기때 조범현 감독에게 인사를 가려고 하지않자, 조성환이 장성호를 잘 다독여서[62] 조범현 감독에게 인사를 같이 갔고, 이를 본 조범현 감독도 반가워하며 장성호와의 은원을 잘 마무리했고 그동안 쌓였던 오해를 모두 풀었다고, 그리고 조범현 감독이 장성호에게 추후에 같은 팀에서 뛰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3월 28일 개막전과 3월 29일 경기에 출전했지만 29일 경기 도중 햄스트링 통증으로 5월 21일이 되어서야 1군에 다시 등록되었다. 본인 말에 따르면 근육 부상은 처음 당했던지라 회복 및 재활에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부진했던 시절의 성향이 더욱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성적을 기록하고 있다. 장타는 전혀 없는데 볼넷은 미친듯이 주워담고 있다. 박종윤의 정반대.

7월 10일 3회말에 신명철이 스트라이크존에 격하게 항의하다가 퇴장당하면서 교체 투입되어 2타점 2루타를 올리고 삼성 수비진의 실책으로 3루까지 진루하는 등 4타수 2안타 2타점 1득점으로 팀 승리를 견인하였다.

8월 18일 넥센의 김동준을 상대로 시즌 첫 홈런을 만들어냈다.

8월 19일 넥센의 한현희를 상대로 2100안타를 달성했다. 양준혁에 이은 역대 두번째 개인 통산 2100안타. 게다가 이 안타를 시작으로 팀이 기적적인 대역전승의 시발점이자 발판이 되었으니 팀과 개인 모두 의미가 깊었던 대기록이었다. 그러나 9회말 손승락에게 정강이에 사구를 맞아 4주 공백이 발생하였다. 다음날 아침 일어났더니 맞은 부위 상태가 안 좋아 병원에 갔더니 실금이 갔다고 한다. 사실상 시즌 아웃. 그리고 이것이 현역 마지막 타석이 되었다.

대타 위주로 출장하다보니 경기 출장수나 타석 수는 각각 49경기에 114타석으로 적었지만 타율 0.309, 출루율 0.421, 장타율 0.383 OPS 0.804를 기록하며 비율스탯상 오랜만에 OPS가 0.8을 넘겼고, 이상하리만치 높은 득점권 타율과 5할이 넘는 대타 타율을 기록하면서 유종의 미를 거둔 시즌이 되었다.

2016년도 FA 자격대상자에 해당되었으나(재자격), 권리행사를 신청하지 않은 채 2015년 12월 7일 은퇴를 선언했다. 후에 장성호가 은퇴 사유를 밝혔는데 KT 구단 쪽에서 재계약 의사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2100안타 딱 채웠고 팁 내 입지도 애매해서 미련없이 은퇴했다고 한다.

7.2. 은퇴

장성호의 은퇴식은 2016년 9월 11일 KIA전에서 진행되었다. 은퇴식을 먼저 제안한 것은 kt 구단이지만, 순위싸움이 한창인 팀에 방해가 되기 싫어서 미루고 있었다고 한다. 특별히 kt 팬 30명과 KIA 팬 30명을 뽑아서 그라운드를 돌면서 한 번씩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순서가 마련되었고, KIA측에서도 기념 유니폼을 증정해주는 등 양 팀이 함께하는 훈훈한 은퇴식 현장이 되었다. 그리고 은퇴식은 kt 시절 유니폼과 KIA 시절 유니폼을 나란히 놓고 진행. 은퇴사에서는 프로에 처음 입문했던 해태 시절 김응용 감독, KIA의 김성한 감독, 한화 시절 한대화 감독, 그리고 자신을 kt로 불러 준 조범현 감독에게 감사 인사를 표했다. 본인이 희망했던 대로 타이거즈에서 은퇴하지는 못했지만, 타이거즈와 함께 하는 은퇴식은 가능했다.

선수생활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데뷔 첫 타석과 2009년 한국시리즈[63], 그리고 마지막 타석이라고 한다. 그리고 은퇴사에서도 KIA 팬들에 대한 감사인사를 빼놓지 않는 것을 보면 KIA에 대한 애정은 확실히 남아 있는 듯 하다. kt팬이야 자세한 설명 생략하고, KIA 팬들 중에서도 애증의 관계지만 그 동안 타이거즈의 대들보였던 만큼 그에 대한 예우를 갖추면서 수고했다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KIA 팬들도 "영원한 스나이퍼, 감사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내용의 현수막으로 은퇴를 기념했다. 그리고 은퇴경기는 역대급 투수전이 되었다[64]. 그리고 각주에 적어놓았듯 kt는 졌다...

8. 국가대표 경력

2000 시드니 올림픽2002 부산 아시안 게임2006 도하 아시안 게임/야구 국가대표로 출전했으며 2000년 올림픽 동메달로 병역특례를 받았다. 2002년 아시안게임에서는 금메달을, 2006년 아시안게임에서는 동메달을 수상했다.

8.1. 2000 시드니올림픽

2000년에는 누가 봐도 김응용 감독의 의중대로 억지로 외야수로 국대에 들어간[65] 경우로, 당시 배트에 연습용 링을 그대로 끼우고 타격에 들어간다거나 평범한 파울볼을 파울플라이 처리해서 1점을 헌납하는 등 부진한 타격에 에피소드만 무수히 연출하였다.

8.2. 2002 부산 아시안게임

그러나 짬이 어느정도 쌓이고 팀내 타선에서 클린업에 익숙해지던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는 그가 전성기였음을 증명하듯, 대회내내 5할 타율을 기록하며 상대팀을 두들겨 팼다. 그러나 하필 역대 최고의 1루수였던 이승엽이 국가대표에 승선했기 때문에 이승엽의 컨디션에 따라 1루수지명타자 사이를 오가곤 했다. 타격에서는 이승엽 보다 좋았다.[66]

8.3. 2003 삿포로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대만전에서는 5번타자(DH)로 선발출장했고 1회 1타점 적시타를 기록했으나, 팀은 패배했다.

일본전에서는 7번타자(DH)로 선발출장했으나 무안타에 그쳤고, 팀도 패배하면서 아테네올림픽 본선진출이 좌절된다.[67]

8.4. 2006 도하 아시안게임

정규시즌 준수한 활약을 하여 부산에 이어 2회 연속으로 선발 되었다. 국가대표 데뷔 이후 첫 홈런을 때렸으나, 대표팀은 아쉽게 도하참사 라는 굴욕을 당하며 3위 기록을 하며 동메달을 획득한 것에 그쳤다. 장성호는 3할과 1홈런을 치면서 체면치례는 했다.

8.5. 2007 타이중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그 외에 2007 대만 타이중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 마지막 국가대표로 출전하였다.

9. 연도별 주요 성적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1996 해태 타이거즈 71 189 .206 39 9 0 2 11 16 0 21 .286 .286
1997 103 314 .268 84 14 1 4 35 36 2 13 .357 .305
1998 125 465 .312
(5위)
145
(4위)
23 1 15 49 76 5 44 .462 .381
1999 129 485 .342
(3위)
166
(5위)
32 1 24 62 110
(4위)
5 61 .561 .420
(5위)
2000 115 450 .324 146 30 1 14 48 90 6 88
(1위)
.489 .436
(1위)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2001 KIA 타이거즈 133 489 .311 152
(5위)
32
(2위)
4 23 97
(5위)
86 6 90
(5위)
.534 .422
2002 133 481 .343
(1위)
165
(2위)
29
(3위)
0 19 95 82 7 86 .522 .445
(1위)
2003 130 476 .315 150 36
(3위)
2 21 105
(4위)
93
(5위)
13 84
(3위)
.532 .417
(5위)
2004 130 474 .300 142 29
(5위)
0 19 80 78 11 76
(5위)
.481 .401
2005 123 464 .300 139
(3위)
23 1 16 74 70 4 61 .457 .382
2006 126 445 .306
(4위)
136
(5위)
24 2 13 79
(3위)
62 6 83
(3위)
.456
(4위)
.413
(3위)
2007 116 395 .281 111 22 0 11 62 55 9 63 .420 .381
2008 85 293 .304 89 17 1 7 46 39 15 53 .440 .412
2009 88 271 .284 77 11 3 7 39 39 7 40 .424 .378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2010 한화 이글스 74 237 .245 58 8 0 4 29 34 0 35 .329 .344
2011 116 390 .244 95 13 0 8 37 53 0 81
(1위)
.338 .379
2012 130 429 .263 113 28 0 9 52 57 2 67 .392 .364
<rowcolor=#373a3c,#212121>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2013 롯데 자이언츠 83 241 .266 64 10 1 4 27 21 0 37 .365 .363
2014 5 2 .000 0 0 0 0 0 0 0 3 .000 .600
연도 소속팀 경기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볼넷 장타율 출루율
2015 kt wiz 49 94 .309 29 4 0 1 16 11 1 17 .383 .421
<rowcolor=#373a3c,#212121> 통산(20시즌) 2064 7084 .296 2100 394 18 221 1043 1108 99 1101
(4위)
.451 .394

[1] 2년 선배 신윤호, 1년 선배 조성환, 동기 박명환이 있다.[2] 최우수선수는 박명환이 선정됐다.[3] 당시 동기 박명환은 고려대 진학 대신 OB 베어스의 고졸우선지명을 받고 3억에 계약했다. 투수-타자 차이를 감안하고, 장성호가 해태의 연고지 광주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1차 지명이 아닌 2차 지명에서 뽑았다는 것, 그리고 나름 스몰마켓이었던 해태가 계약금으로만 1억을 줬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장성호의 계약금은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3년 전 연고지 출신 1차 지명자인 이종범이 1억을 요구하자 광주의 물가는 서울보다 낮다고 계약금 7천만원을 줬던 구단이 해태임을 잊지 말자.[4] 휘문고 출신의 포수로 1996~2002년 1군 69경기에 출전했다. 기록은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5] 3년 전 이종범이 받은 계약금이 7천만원이었다. 좌타자라면 사족을 못쓰는 코감독이 상당한 기대를 했다는 방증이고 해태는 그것의 몇 배를 빼먹을 수 있었다.[6] 김상진은 2년 연속 9승과 1997년 한국시리즈에서 최연소 완투승을 하며 안착했으나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며 타이거즈 팬들의 아픈 손가락으로 남게 되었다.[7] 우르크를 보면 그와 비교대상인 박용택이나 이병규를 이긴다.[8] 02시즌 정교함과 파워를 모두 갖춘 이승엽의 타율 성적 위에는 오로지 장성호만이 있었다.[9] 전설의 타이거즈에 김성한과 함께 출연한 최해식이 장성호와 이호준은 김성한의 작품임을 말했다. 김성한이 술회하길 감독이 신임하는 타자(97년에는 최훈재가 커리어하이를 기록하면서 김응룡 감독의 기대를 섭섭치않게 채워주고 있었다. 당연히 장성호가 중심타자는 아니었고)가 2할 1푼을 기록하고 있다는 건 팀이 개판이라는 거고(97년 해태가 우승했고 득점력도 삼성에 이은 2위라는 점을 생각하면 장성호는 이때까지 팀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타법을 같이 연구해보다가 한 쪽 다리를 드니까 몸의 중심이 잡히면서 타격실력이 일취월장했다고 한다. 당시 전반기 1할대였지만 후반에는 3할로 반등, 최종타율을 2할 6푼으로 마무리했다. 김종국도 비슷한 시기에 김성한이 코칭을 했는데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수하지 않은 오리궁둥이 타법을 김종국에게 전수시키면 성공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고 그 예감은 적중하여 2할 초반대 타율을 2할 후반대로 끌어올렸다고 한다.[10] 냉정히 말하자면 이호준은 김응용 말년에 포지션 싸움에서 장성호한테 졌고, 이호준이 2000년 SK로 트레이드되며 20대 중반까지의 커리어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2003년도를 기점으로 이호준이 각성하고, 30대 초반엔 주춤했지만 30대 중후반에 꾸준하게 활약하면서 역전, 결국 둘다 레전드로 평가받는다. 출루쪽에서는 장성호의 우세, 장타 쪽에서는 이호준의 우세인데 스텟티즈 기준 WAR은 장성호가 훨씬 높다. 어쨌든 장성호를 남기고 이호준을 보낸건 최선은 아니었겠지만 타이거즈 입장에서는 좋은 선택이었다. 당장 장성호의 통산 WAR은 포지션으로도 장성호보다 높은 점수를 받을 수 밖에 없는 LG 레전드 3인방(김동수, 이병규, 김재현)을 뛰어넘는다![11]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라면을 먹다가 배탈이 나서(...) 트레이너실에 누워있었는데, 김응용 감독이 이를 보고 열 받아서 발로 한 번 차고 집으로 보내버렸다고...[12] 이 때 한국시리즈 첫번째 안타를 치면서 당시 스폰서였던 한솔PCS로부터 상금 20만원을 받았다고 한다.[13] 그리고 그 다음 우승반지는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후에야 끼게 된다.[14] 그해 장일현, 유동훈 등이 들어오긴 했지만 대졸로 사실상 장성호의 1년 선배였다.[15] 1번타자가 팀의 최고 타자도 아니고 샌더스-양준혁-홍현우가 같이 움직이면 1~4번째 타자가 되니 처음부터 완전히 투수 기를 꺾고 들어갔던 것.[16] 정수근도 중견수 버프로 인해 12.53이라는 좋은 WAR을 찍었지만 장성호는 더 우월한 14.00.[17] 전성기 시절의 이병규와 약간 비슷한 유형이었으나, 이병규는 전형적인 배드볼히터였던 반면 장성호는 컨택 능력에 뛰어난 선구안을 바탕으로 볼넷을 많이 얻어나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18] 2004년과 2005년에 타율 2할 9푼 9리 6모를 기록하여 이를 반올림하고 9년 연속 3할. 타율 규정상 소수점 3째 이하는 사사오입이 인정된다. 94년의 양준혁이 기록한 2할 9푼 9리 8모를 3할 타율로 인정한 사례가 있다.[19] 여담으로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홈런을 친 타자다.[20] 이승엽을 6년 연속 타율로 이긴건 장성호가 유일했다.[21] 저 둘은 홈런왕과 타격왕 타이틀이 있고 이대호는 그 무시무시한 트리플 크라운을 2번씩 했다.[22] 그날 시작하기 전 타율은 .296이었다.[23] 여담으로 이런 비슷한 우스갯소리는 동시대에 같이 활약한 박한이도 있었는데, 다름 아닌 '아내가 직관온 박한이'.[24] 계약금 18억, 연봉 2006~2007년 각 4억 5000만원, 2008~2009년 각 5억 5000만원, 옵션 플러스/마이너스 총 4억.[25] 직전 2위가 박진만의 4년 39억이었으니 박진만보다는 좋은 대접을 받은 셈이었다.[26] 원래 기아의 처음 제시안은 28억이었는데 김익환 당시 사장이 장성호는 무조건 잡으라고 지시해서 저 금액이 나왔다고 한다.[27] 실제로 FA 계약을 할 때 세부 내역을 살펴보면 1~3년차 연봉은 높은 액수를 받다가, 마지막 해 연봉은 다른 해보다 줄여놓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다른 팀과 FA 계약을 할 경우 전년도 연봉에 따라 보상 규모가 정해지는데, 그만큼 선수 측면에서 원소속팀이던, 타 팀이던 계약을 이끌어내기가 유리하기 때문이다.[28] 당시 99-120-99라고 구라를 쳤는데 11년 실측결과 97-119-97이 맞다.[29] 이 시기에 이대호, 김태균 등 각 팀의 강타자들이 4번으로 자리잡으면서 3번타자 라이벌이 사라진 것도 한몫했다.[30] 당시 4번타자를 담당했다. 클래식 스탯만 놓고보면 타출장 .284/.370/.456에 13홈런 59타점으로 다소 애매한 활약 아닌가? 라고 볼 수도 있지만 2006 시즌은 굉장한 투고타저 시즌이었기에 나름 쏠쏠한 활약이었었다. 스탯티즈 기준 WAR은 지명타자였음에도 2.82를 올렸고 wRC+는 무려 143.5로 제 역할을 해냈다고 볼 수 있다.[31] 덧붙여 양준혁이 4위.[32] 흔히 이 시절 장성호가 최희섭에게 1루수를 내주고 좌익수로 밀려나 커리어 하락의 계기가 된 걸로 알고 있는 경우도 있었으나 사실이 아니다. 장성호는 해태 시절이었던 99년까지만 해도 좌익수로 출장하는 비중이 높았고 1루수 고정 이후에도 간간히 좌익수 알바를 뛰기도 했다.[33] 2007년 한 해에만 있었던 제도로, 7월 15일~8월 14일까지 기간을 서머리그로 따로 지정해 정규리그 순위와 별도로 해당 기간동안 승패 및 승률로 서머리그 순위를 매긴 뒤 우승팀에게는 상금 2억을 지급하였다. 당시 서머리그 우승팀은 삼성 라이온즈.[34] 장성호는 이에 대해 감독이 트레이너의 의견 무시하고 대타로 뛰라는데 뛸 수 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2군에 잠시 내려가거나 몇 경기 쉬었다면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고 말했다.[35] 마침 이 경기는 한기주이대호로부터 위협구 뒤 만루홈런을 얻어맞은 경기로도 유명하다.[36] 워낙 웃는 모습이 중계중에 자주 잡혔고 당시 엄격했던 분위기가 이어졌던 타이거즈 선수단 내부에서도 선수들간에 장난을 많이 치는 선수로 유명해 게임에 대해 별로 진중하지 못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당시 돌았다. 더욱이 신인시절 툭하면 김성한에게 농땡이 피운다고 혼난 일화가 더 유명한데다 그런데도 3할을 치니 게으른 천재 이미지가 생겨버렸다.[37] 감독이 아닌 코치의 단독 도루 사인으로 인한 도루자가 발생하자 감독이 '쟤는 팀보다는 자기 기록을 더 우선하는건가'라고 오해했다고 한다.[38] 이 영상의 캐스터는 라디오 중계를 하던 TBS 교통방송의 김동연 캐스터로, 당시 이 멘트를 외치고 나서 졸도한걸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같이 중계한 이병훈 해설위원의 말에 따르면 본인의 애드립이라고 한다.https://m.joynews24.com/v/printxx/439896?id=439896[39] 장성호 본인이 직접말했던 이야기이니 알아서 판단해야한다. 참고로 이에 대한 프런트의 대응은 없었다.[40] 2018.01.05 방송된 합의판정에서 장성호 본인이 당시의 비하인드를 밝혔는데, 구단에서 1년 계약을 제시하자 자리를 박차고 나와 식당에서 후배 하나 데려다 놓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41] 나중에 인터뷰에서 조범현 감독이 자신의 잘못을 알기를 바라며 2군으로 보냈는데도 반성하지 않다가(조범현이 보는 앞에서 택시를 잡아 부산 원정 숙소에서 광주로 돌아가는 등 대놓고 불만있는 티를 드러냈다.) 갈등이 생겼다고 한다. 최희섭과의 포지션 경쟁도 이적을 생각하게 된 이유 중 하나. 결국 은퇴를 앞두고 이러한 결정을 후회하고 반성했다고 한다.[42] 이것은 장성호라는 선수가 타이거즈라는 구단에서 차지하는 상징성을 감안할 때 약간 이해하기 힘든 입장이다. 당시에 은퇴하면 영결을 줄까말까 싶던 수준의 선수를 FA 신청했다고 아예 잡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건 결국 구단이 철저하게 실리적인 판단만을 했던가, 구단이 장성호를 그렇게 대단한 위치로 보지 않았던가 둘 중 하나. 물론 어디까지나 장성호의 발언에 기초한 것일 뿐 구단이 실제로 어떻게 협상에 임했는지는 알 도리가 없다.[43] 물론 당시 KIA에는 장성호의 자리가 없긴 했다. 외야는 이미 김원섭-이용규-이종범이 자리를 잡았으며, 1루와 지명에는 포텐이 터진 최희섭과 나지완 있었다. 당시 백업으로도 김주형, 이종환, 채종범, 신종길 등 자리가 중복되는 선수들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나이가 많던 장성호에게는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점을 감안하더라도 여전히 리그에서 상위권의 교타자이던 장성호를 박대한 KIA 프런트의 행보는 상당히 냉정하다 못해 얼음장과 같았다.[44] 대게 2번째 FA 하면 다들 40세 즉, 은퇴를 바라보는 시기와 노쇠화가 오는 시기를 의미하는 것 같다.[45] 돈 없는 현대 유니콘스 및 이미 FA를 두 명씩 영입한 삼성 라이온즈를 제외하면[46] 김상현(現 김태영)과의 트레이드 소식이 나왔으나 박동희가 아직 성사되지도 않은 트레이드 내용을 전부 까발리는 바람에 파토. 결국 김상현, 아니 김태영은 2013시즌 종료 후 한국프로야구 2차 드래프트에서 1순위로 지명되어 KIA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47] 그러나 안영명은 FA 이범호의 보상선수로 지명되면서 8개월 만에 원 소속팀으로 복귀하여 사실상 2:4 트레이드가 되어 버렸다. 하지만 2015년 5월 6일 또다시 양팀간에 트레이드가 진행됐다. KIA는 유창식+김광수+오준혁+노수광을 받아오는 대가로 한화에 임준섭+이종환+박성호를 내줬다가 결국 4:3 트레이드로 5년만에 박성호도 다시 친정팀으로 돌아갔고, 그때 트레이드 멤버였던 김다원KIA 타이거즈에 남았다.[48] 여기는 나이에 비해 노쇠화가 빨리 찾아오면서 이미 2010년부터 제 성적을 못 내주고 있었다.[49] 결국 15시즌 후 미련없이 은퇴했다.[50] 2022년 황대인이 있지만 생산력이 딱 리그 중간수준이고 나머지는 완전히 쉬어가는 타순이 되었다.[51] 그날 팀은 삼성에 2:3으로 패했다. 다행히 류현진이 패전투수로 기록되지는 않았지만.[52] 이 멀티히트로 장종훈 타격코치의 1771안타 기록을 깨서, 역대 최다안타 3위가 되었다.[53] 리그 10위.[54] 5.1 삼성전(1호), 5.3 SK전(2호), 5.11 LG전(3호), 6.5 넥센전(4호), 6.15 KIA전(5호), 7.6 LG전(6호), 8.13 두산전(7호), 10.6 롯데전(8호)[55] 리그 16위, 팀내 김태균 다음으로 2위.[56] 당시 한화가 내밀 트레이드 카드는 정말 없었다. 투수진은 류현진의 포스팅, 양훈의 군입대, 박찬호의 은퇴로 빈 자리 메꾸기도 힘들었고, 타자들중 그나마 한화에서 내놓을 뎁스라고는 1루와 지명타자 자리였고, 김태균,김태완, 장성호 중 그나마 장성호가 가능성이 높았다.[57] 혹자는 출루율 보다 타율을 훨씬 중요하게 여기는 김응용 감독의 성향이 나타났다고 말하기도 한다. 삼성 감독시절 통산 출루율이 3할5푼을 넘어가는 박한이를 FA 계약때 저평가 하는데 1등공신이 김응용 감독이었다.[58] 2015시즌 현재 송창현은 부상으로 출장하지 못하고 있고, 장성호는 롯데에서 2년만 쓰이고 kt로 트레이드되었다. 어쨌든 송창현은 한화에서 서비스타임이 남은 자원이라 송창현이 이득일 가능성이 더 높지만, 재미있는 것은 분명히 괜찮다 싶은 피칭을 했던 송창현의 2년간 WAR은 마이너스였고, 딱히 한 것 없어뵈던 장성호는 롯데에서 어쨌던 양수 WAR을 기록했다는 것.[59] 現 이우민[60] 볼넷 따위에 웬 천금이냐고 묻는다면... 롯데에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상대 투수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볼넷을 얻어내 주는 선수는 조성환 정도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다. 원래 선구안도 크보 바닥권이고, 거의 닥공밖에 모르는 스윙을 가져가기 때문. 양준혁 해설은 롯데경기 해설을 할때마다 상황에 맞는 눈야구가 안된다는 지적을 밥먹듯이 했고, 이 날도 또 지적했다. 한마디로 클래스를 제대로 보여주었다.[61] 조범현, 장성호, 조성환은 모두 충암고등학교 출신이다.[62] 말이 잘 다독인거지 반강제로 끌고 데려갔다고 한다.[63] 해태의 마지막 한국시리즈를 경험했지만 당시 주전은 아니었기 때문에, 2009년 우승이 더 기억에 남는다고.[64] kt 2:4 KIA, 승리투수 헥터 노에시 8.1이닝 2실점, 패전투수 KT 정대현 8.1이닝 2실점, 세이브 임창용 0.2이닝 무실점[65] 데뷔 초기만 해도 장성호는 1루와 좌익수를 오가는 초년병 시절이였는데 무려 2003년까지.. 그러다가 그 최희섭이 국내로 복귀하면서 메인 포지션인 1루를 뺏기며 지명타자와 좌익수를 오가다 발 부상으로 지명타자로만 뛰게 되었다.[66] 여담으로 2002시즌 홈런 1위였던 그 이승엽도 홈런 없이 4할대를 마크했고, 장성호도 얄쨜없이 0홈런에 그쳤다. 애초에 당시 대표팀 타자 중 유일하게 홈런을 친 선수는 김동주 한 명 뿐이었고 그 김동주마저도 1개밖에 치지 못했었다.[67] 특히 0대2로 뒤진 4회 2사만루 상황에서 상대투수 와다 츠요시한테 삼진을 당한 점은 아쉬운 대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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