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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징후이

장경혜에서 넘어옴
파일:만주국 국기.svg
만주국 국무총리대신
<rowcolor=#373a3c> 초대 제2대
정샤오쉬 장징후이
만주국 제2대 국무총리대신
장징후이
張景惠/张景惠(장경혜) Zhang Jinghui
파일:장징후이 .jpg
서오(叙五)
출생 1871년 6월 21일
청나라 봉천성 태안현
사망 1959년 1월 11일 (향년 87세)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무순전범교도소
국적 파일:청나라 국기.svg 청나라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만주국 국기.svg 만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국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학력 봉천 강무학당
직업 정치가, 군인
총리
임기
2대 1935년 5월 22일 ~ 1945년 8월 18일

1. 개요2. 생애
2.1. 초기 이력2.2. 직봉전쟁국민혁명2.3. 한간이 되다2.4. 2대 만주국 총리대신2.5. 중일전쟁 시기2.6. 말년
3. 매체에서4. 주요경력5. 참고문헌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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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봉천군벌의 일원. 만주사변 이후 일본 제국에 투항하여 만주국의 2대 총리대신을 지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71년 청나라 봉천성의 농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젊어서 도박질을 하는 두부 장수였으나 청일전쟁 이후 만주가 무주공산이 되자 자신도 도적질에 뛰어들어 팔각대 마적단 두목에 이르렀다. 그러던 중 장쭤린과 만나 의기투합하여 그를 자신의 밑의 단련장으로 받아들였으며 장쭤린이 청나라 조정에 귀순하면서 1903년 7월 순방마보유격대의 부영장이 되었다. 계급은 초관, 방대를 거쳐 관대에 이르렀다. 1907년 쉬스창이 동삼성 총독에 취임하자 쉬스창의 명령에 따라 장쭤린과 함께 같이 도적 두립삼을 토벌하면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1911년 조이손이 동삼성 총독에 임명되면서 봉천성 강무학당을 졸업하였으며 1912년 위안스카이가 임시 대총통에 취임하자 장쭤린이 27사단장에 임명되었는데 산하 연대장을 지냈다.

1917년 펑더린과 내통한 탕위린을 대신하여 53여단장에 임명되었다. 1918년 호법전쟁돤치루이장쭤린이 동맹을 체결하자 선발대를 이끌고 베이징으로 진군하여 북양정부의 편으로 참전했다. 이후 16사단장, 28사단장을 역임했다.

2.2. 직봉전쟁국민혁명

1920년 안직전쟁이 발발하자 봉천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관내로 진출하여 안휘군벌과 교전했다. 이후 차하얼 도통, 열하 도통을 지냈으며 1921년 4거두 회의에 참석했다. 직예군벌 23사단장 왕승빈이 장쭤린을 예방하자 이에 대한 보답으로 바오딩을 방문하여 차오쿤을 예방했다. 1922년 1차 직봉전쟁에 앞서 직예군벌을 이길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직예군벌과 화해하자고 했으나 장쭤린은 그의 의견을 무시하였고 전쟁이 발발하였다. 1차 직봉전쟁에서 서로군 총사령관 겸 1부대장에 임명되어 전선에 투입되었다. 장신점 전투에서 호위병들을 이끌고 직접 독전하여 겨우 승리를 거둘 수 있었지만 직군의 후방 공격에 포위당할 위기에 처하자 결국 총퇴각 명령을 내렸다. 장징후이는 베이징에 남아 차오쿤에게 죄를 청했고 대총통 쉬스창은 그에게 안위장군직을 수여했다. 장쭤린이 만주국 보안사령관에 추대된 후 쑨원돤치루이, 장쭤린 사이의 반직삼각동맹 결성을 추진했으며 장쭤린의 봉천군 현대화 작업 중 양위팅, 장쭤샹 등과 함께 동삼성 정무위원에 임명되었다. 직봉풍전쟁우페이푸에게 파견되어 직봉합작을 추진하였으며 옌후이칭 내각에서 육군총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하얼빈과 중동철도를 관리하는 동성특구장관으로 흑룡강의 군벌로 군림하였다. 1927년 장쭤린이 대원수에 취임하자 판푸 내각 하에서 실업총장, 육군총장에 임명되었으나 1928년 황고둔 사건에 휘말려 부상을 입었다. 그해 12월, 동북역치가 일어나면서 국민정부에 귀순하였다. 1929년부터 반장전쟁이 발발하자 장쭤린과 관내진출 문제를 놓고 긴밀히 협의하였다. 1929년 7월 7일, 장쉐량과 국민정부 외교부장 왕정팅이 회담한 후 8월 8일, 29차 중국 국민당 상무회의에서 하얼빈 당무특파원에 임명되었다. 1929년, 중동로 사건이 일어나자 중동로 전화국을 소련으로부터 회수하였으며 소련 영사관을 습격해 소련 외교관들을 체포하고 소련이 중국에서 공산화를 기도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확보했다. 이후 소련의 침공에 맞서 대소 방비 강화에 나섰으나 봉소전쟁에서 현대화가 이루어진 소련군에게 패배한다. 1931년 6월, 훈정시기 약법이 반포되면서 국민정부 위원에 선출되었다.

젊어서 러일전쟁을 겪었기 때문에 일본의 힘을 두려워하였고 이 때문에 장쉐량의 친영미 노선을 비난하며 일본과 경제상의 공존공영을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대외 확장 문제에 있어선 관내 진출을 반대하며 만주를 잘 경영하자는 보경안민을 주장했다. 또한 소련의 동북 지역의 침투와 중국 공산화에 큰 경계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에 맞서기 위해 일본과 협력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1931년 4월, 일본군 육군 참모본부가 책정한 <쇼와 6년도 정세 판단>을 바탕으로 작성된 <만몽문제 해결책>에서 만주 통치를 위해 포섭해야 할 인물로 주목되었다.

2.3. 한간이 되다

9월 18일 만주사변이 터진 후 9월 27일, 하얼빈에서 동삼성특별구 치안유지회를 조직하고 스스로 위원장에 취임하였으며 1932년 1월 1일, 흑룡강성 정부를 조직, 1월 6일, 흑룡강성 정부주석에 취임하여 본격적인 만주 독립을 주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장쭤샹, 마잔산, 완푸린 등 독립반대론자들이나 아예 아이신기오로 시치아처럼 청나라 복벽을 주장하는 군벌들과 충돌했다. 이에 짱스이, 아이신기오로 시치아와 연합하여 연성자치, 독립국가 건설을 주장하며 이시와라 간지의 만몽영유론과 맞섰다. 결국 독립을 주장하는 군벌들이 힘을 얻으면서 이시와라도 만주국 건국에 찬성하게 되었고 일본군은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켜서 국제적 관심을 상하이로 돌린 후 괴뢰국 수립을 위한 물밑작업에 들어갔다. 관동군 막료들은 1932년 2월 5일, 건국회의를 개최하여 만주국 건국을 준비했고 2월 16일, 봉천의 장징후이의 저택에서 동북 행정위원회를 조직했다. 장징후이는 동북 행정위원장에 추대되었으며 2월 18일, 국민정부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동북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3월 1일, 만주국 건국을 선언하기에 이름으로 본격적인 한간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선통제를 만주국의 수장으로 옹립하기로 결정되자 일본군으로부터 선통제 옹립 지지파로 기대를 받았으나 정작 장징후이는 선통제 옹립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아 군벌인 짱스이를 만주국 수장으로 옹립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의견을 보였다. 이후 짱스이, 마잔산, 자오신보와 같이 입헌공화제를 주장하였고 결국 양보를 보아 돤치루이가 1924년에 만든 용어인 집정이라는 칭호로 합의를 보았다. 이후 선통제가 집정으로 취임하고 정샤오쉬가 1대 국무총리에 임명되자 정부에서 동성특별행정구 장관, 군정부총장 등을 역임하면서 군정부를 중심으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1934년 10월, 4성제를 10성제로 개편하면서 흑룡강 성장직에서 해임되었고 이 때문에 권력에서 밀려나서 참의부 의장이라는 명예직만 받고 '가을석양같다'는 평가를 받으며 뒷방 늙은이 신세로 전락했다.

2.4. 2대 만주국 총리대신

그러던 중 1935년, 정샤오쉬 총리가 퇴진하자 관동군으로부터 신임 총리대신에 지명되었다. 당시 푸이는 민정부대신 짱스이를 지지하고 있었고, 정샤오쉬는 자신의 후임으로 젠다오 성장 차이윈성을 지지하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장징후이가 임명된 것이었다. 이를 두고 국무원 비서처장 가미오 가즈하루는 "일본어도 모르고, 한적도 읽을 줄 모르며 국정에 대해 발언할 것 같지도 않다는 것을 관동군이 높이 샀던 것이리라."라고 평가했다. 이후 일본군에게 무조건 좋다고 아부하여 '하오하오 선생'이라고 불렸다.

1935년 총리대신에 취임한 이후 10년간 총리대신에 재직했지만 이름 뿐인 총리였을 뿐 정무를 보지 않았다. 10년간 장징후이의 비서를 지낸 마쓰모토 마스오의 회고에 따르면, 총리 집무실 안에서 정좌하고 경전 베끼기에 빠져 정치가가 아니라 고승을 보는 듯 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누군가 인사를 해도 반응도 없었으며 싫다, 좋다는 감정도 얼굴에 전혀 띄우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국무원 회의에서도 단 한번도 반대 의견을 고집한 적이 없었다. 덕분에 장징후이 재직 기간 동안 만주국 조직법상 황제를 보필하며 모든 권력을 쥐고 있다는 국무원은 완전히 무력화되어 총무청이 만주국 국정의 중심으로 떠오르게 된다. 장징후이는 자신은 허수아비가 되고 총무청 장관이 모든 것을 장악한 현실에도 "좋아, 이걸로 하지."라는 말만 반복하면서 일본의 허수아비 노릇을 계속하였다.

1936년 도문회담을 개최하여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와 회담하였다. 1937년부터 독이일 삼국방공동맹을 지지하였으며 1937년 조선을 방문하였다. 이때 '만선일가'의 구호를 외치며 조선과의 정치 경제현안에 대해 논의했다. 이때 조선의 지식인들은 만주에서의 조선인 차별을 중지해 달라는 탄원을 장징후이에게 제출하였다.

2.5. 중일전쟁 시기

중일전쟁이 발생하자 지지를 표명하였다. 하지만 난징 전투가 벌어지자 일본군에게 난징을 공격하지 말 것을 호소하면서 중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을 호소하며 필요하다면 자신이 중국과 일본의 중재자로 나서겠다고 제안했지만 씹혔다. 1938년, 경제부대신 한윈지에를 로마에 파견하여 비오 12세를 알현하게 했으며 교황청 국무경 에우세비오 파첼리 추기경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전달했다.
로마 교황청 국무장관 에우세비오 파첼리 각하.
신앙과 도덕을 위해 공산주의를 부인하는 것이 기독교의 사명입니다. 공산주의자가 파괴하는 평화와 문화를 구제하여 확립하는 것이 만주 제국의 이상입니다. 귀 교황청에서는 우리나라와 중화민국을 구분하여 하나의 독립 포교구로 설립하였습니다. 즉 저는 건국의 이상을 이해하고, 독립이 엄연한 사실의 결과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저와 우리 국민은 충심으로 감사합니다. 저는 교황청과 우리나라는 우호 관계를 공고히 하고, 또 세계의 평화와 인류복지를 목표로 공동으로 이상을 조기에 실현시키기 위하여 절망을 하지 않습니다.
저의 이 서신을 만주제국 수호경제사절단장 한윈지에 각하가 각하에게 경의를 표하며 전합니다.
대만주제국 국무총리대신 장징후이
강덕 5년 7월 29일

1940년, 왕징웨이 정권이 수립되자 난징을 방문하여 왕징웨이와 회담하고 일본과의 '동고동락, 동주공제'를 주장하였으며 1941년 태평양 전쟁의 발발도 지지했다. 시키지도 않는데도 일본에 아첨, 아부를 멈추지 않아서 '만신노골'이라는 조롱을 받았으나 마쓰모토 마스오에 따르면, 알게 모르게 오족협화를 주장하면서 중국인을 멸시하는 일본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장징후이는 일본어를 한마디도 몰랐으나 일본인들이 중국인을 대하면서 멸시하는 것은 알 수 있어서 그때마다 "우월감!"이라고 외치면서 일본인을 꾸짖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개척 이민을 위해 중국인 농부들의 땅을 강제로 매수하는 일을 줄이기 위해 척무대신 고이소 구니아키에게 호소하였으나 별 효과는 보지 못했다.
파일:wwii greater east asia confedence.jpg
1943년 11월, 대동아회의에 참석한 장징후이, 왼쪽에서 두번째 인물이다.

1942년 만주국 건국 10년을 기념해서 방문한 윤치호, 최남선 등을 만났으며 자신이 쓴 기념사가 수록된 신경만주학해사에서 출간한 <반도사화와 낙토만주>에 표지 글씨를 써주었다. 1943년, 대동아회의 참여를 위해 도쿄에 방문하여 완 와이타야콘, 왕징웨이, 바 마우, 호세 라우렐, 찬드라 보스, 도조 히데키 등 일본 제국과 괴뢰국 대표들을 만났다.

2.6. 말년

1945년 8월, 만주 전략 공세 작전으로 소련군이 만주로 쇄도하고 원자탄을 맞은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자 강덕제는 만주국 해산을 선언했다. 푸이가 장징후이의 손을 잡고 작별인사를 건네자 장징후이는 일본의 패망을 통탄해하였는데 평소에 장징후이의 국무총리 자리를 호시탐탐 노리다가 개털이 되었던 궁내부 대신 시치아가 미친듯이 웃으면서 비웃었다고 한다. 이후 소련군과 협상하기 위해 장춘의 소련군 사령부에 출두했지만 그대로 체포되어 치타로 이송되었다. 장제스와 협상할 수 있다고 여겨 스탈린에게 국민정부로 송환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씹혔고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했단 말에 경악했다고 한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중공으로 신병이 인도되었으며 무순전범관리소에 갇혀 있다가 1959년, 88세를 일기로 옥사했다.

3. 매체에서

호이4에서 만주국 육군 장성으로 등장한다. 동 게임의 모드인 8년 항전 모드에서는 만주국 국가원수로 구현되어 실제 역사의 고증을 맞추었다. 바닐라에서 만주국 국가원수였던 푸이는 서유럽의 입헌군주국들처럼 안정도 부여 국가정신으로 변경되었다.

마지막 황제에서 간사한 한간으로 등장한다. 중국 배우 진술(陳述, 1920~2006)이 분했다. 원 역사보다도 더 무게가 없는 부역자 정도로 나오는데 명색이 봉천군벌의 원로이며 만주국 건국 이후에도 군정총장을 역임한 장징후이를 푸이가 처음 보는 사람처럼 너는 누구냐?라고 묻는다. 거의 비중이 없던 정샤오쉬가 푸이의 일본 방문 사이에 숙청된 후 총리대신에 임명되어 일본인과 푸이에게 굽신대지만 푸이가 만주국의 자주권을 주장하자 관동군을 따라서 줄줄이 퇴장하는 등 만주국이 망하기 전부터 푸이에게 노골적으로 등을 돌렸으며 중공에 송환된 후에는 고압적으로 굴며 푸이와 충돌한다. 한국어 블루레이 자막에서 '장진귀'라는 괴상한 이름으로 번역되는 수모를 겪었지만 황석희가 다시 번역하면서 수정되었다.

4. 주요경력

만주국 역대 총리대신
파일:만주국 국장.svg
초대 2대 만주국 멸망
정샤오쉬 장징후이
(1935년 5월 22일 ~ 1945년 8월 18일)
만주국 역대 참의부 의장
파일:만주국 국장.svg
만주국 건국 1대 2대
장징후이
(1932년 3월 9일 ~ 1935년 5월 21일)
짱스이

5.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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