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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30 07:41:18

양위팅

파일:양우정.jpg
중화민국 2대 강소독판
정체 楊宇霆
간체 杨宇霆
한국식 독음 양우정
영문 Yang Yuting
능각(凌阁) → 인갈(麟葛)[1]
출생 1886년 청나라 봉천성 법고현
사망 1929년 1월 10일 중화민국 봉천성 봉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학력 일본육군사관학교
직업 군인, 정치가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4. 관련문서

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장쭤린의 측근으로 봉천군벌의 핵심인물 중 하나였다.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생을 중심으로 사관파를 이끌었으나 황고둔 사건 이후 봉천군벌의 수령이 된 장쉐량에게 처형당했다.

본명은 양옥정이며 지략으로 인해 정계에서 작은 제갈량으로 불렸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86년 봉천성 법고에서 태어났다. 과거시험을 보아 수재가 될 정도로 머리가 좋았는데 1911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장쭤린 휘하에 들어가 1916년 봉군 27사단 참모처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정치, 군사면에서 장쭤린에게 많은 계략을 짜내 장쭤린의 측근이 되었으며 1917년 호법전쟁이 발발하자 자신의 육사 동기인 육군차장 쉬수정과 연결하여 봉천-안휘 동맹을 체결하고 진황도에서 일본제 무기를 탈취해 7개 혼성여단을 조직하여 봉천군벌을 강화했다. 이후 동삼성순열사에 임명되어 동북의 최고 실력자가 된 장쭤린은 1920년 12월 양위팅을 동삼성순열사처 총참의에 임명하였으며 동삼성 공병창 독판을 겸임시켰다.

2.2. 1차 직봉전쟁 ~ 손봉전쟁

1922년 1차 직봉전쟁 패배 이후 동북훈련총감을 맡아 정군 작업 및 구조조정을 실시하여 봉천군의 현대화 작업에 착수했다. 지속적으로 관내진출을 주장하며 보경안민을 주장한 구파, 육대파와 충돌했다. 1924년 한린춘에 뒤를 이어 병기창 독판이 되어 포창, 화구창, 주조창, 제산창, 목공소 등을 신설하여 총 8개의 공장과 4개 사무소를 두었고 통계위원회, 병기학교, 병기의원 등 17개 조직을 설치하여 만주의 군수공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이 공으로 장쭤린의 더욱 큰 신임을 받게 되어 독군서 총참의도 겸직하게 되어 정책결정에 깊게 관여했다.

1924년 2차 직봉전쟁 때 직군토벌 참모장에 임명되어 큰 공을 세웠으며 이후 돤치루이 임시집정 정부가 들어서자 1925년 선후회의 회원이 되었다. 봉천군벌 내부에서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사관파를 조성하여 그 수장이 되었다. 전후에 강소독판 자리를 장쭤린에게 요구했는데 이 자리는 원래 안휘군벌 루융샹의 것이었으나 강절전쟁으로 세력이 붕괴된 루융샹이 더 이상 자리를 유지할 수 없어 봉천군벌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하야한 상태였다.

장쭤린은 원래 장덩쉬안을 강소독판에 임명할 생각이었으나 양위팅을 신임했던 장쭤린은 강소독판을 달라는 양위팅의 청을 들어주어 그를 강소독판에 임명했다. 양위팅은 강소성의 성도 난징에 부임하면서 자신이 용감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병사 한명 거느리지 않고 나타났다. 강소 군무방판 천댜오위안(진조원)과 강소군 10사단 사단장 정준언이 그를 마중나오자 양위팅은 매우 오만한 태도로 그들을 밀쳐내고 역을 걸어나왔다. 천댜오위안은 그 순간을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양위팅이 난징에 부임 차 왔을 때 우리들은 강소성 유지들과 강을 건너 역으로 마중을 나갔다. 양위팅은 우리를 보고 차갑게 대하며 남을 멸시하는 듯한 태도로 말했다. 아울러 그의 말에는 화난 투가 잔뜩 묻어 있었다.
"강소는 하는 것들이 마땅치 않다. 군이 군같지 않고 정치가 정치같지 않고 모두가 봉천같지 않다. 나는 난징으로 오고 싶지 않았지만 우정 장군이 강력히 권해서 오게 되었다."
자기가 우정[2]을 칭하면 되겠는가? 독판서 입구에서 그의 차는 곧장 들어올 수 있었고 우리들은 문밖에서 하차해야 했다. 우리들은 방판이 아닌가? 이러한 태도를 누가 참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우리들은 각 방면의 사람들과 연계하여 공동으로 양위팅을 몰아내려고 하였다. 이렇게 강소군벌들은 양위팅을 난징에서 몰아내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양위팅은 강소성의 장군들을 하대하면서 구박을 일삼았고 1925년 5.30 운동을 탄압하여 분노를 샀다. 이어 쑨촨팡이 동맹을 청하자 오만불손하게 대답하고 휘하 부대를 관리하지 않아 봉천군이 가는 곳마다 약탈, 강간을 일삼았다. 결국 쑨촨팡은 1925년 10월 펑위샹과 의형제를 맺고 오성연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손봉전쟁을 일으켰다. 결국 양위팅은 순식간에 상하이를 잃고 쫓겨났고 천댜오위안 등이 쑨촨팡에 호응하면서 난징에서도 쫓겨나게 된다. 봉천으로 쫓겨온 양위팅을 장쭤린은 구박하면서도 봉군총참모장에 임명했다. 1925년 그와 사이가 좋지 않던 궈쑹링이 그의 해임을 요구하며 반봉사건을 일으키기도 했고 이 때문에 일시적으로 해임당했으나 궈쑹링이 체포되어 처형된 이후 다시 중용되었다. 이후 궈쑹링 밑에 있던 3,4방면군의 주요 장령들을 처형하여 분풀이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장쭤샹이 강력하게 관용론을 주장하였기에 이뤄지진 않았다.

2.3. 국민혁명에서 황고둔 사건까지

그러던 중 1926년 장제스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포,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우페이푸쑨촨팡직예군벌을 박살내고 산동, 하남성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1927년, 장제스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켜 중국 공산당 및 우한 국민정부와 단절했고 이에 장쭤린은 장제스와 협상하여 세력을 보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양위팅은 1927년 6월 15일 베이징의 대원수부에서 장제스의 대표 방본인과 함께 회담하며 동북으로 회군하여 동삼성 자치를 실시하자는 구파의 주장에 반대하여 연남항일[3]을 주장, 장제스와 협상하여 난징 국민정부를 중심으로 통일을 하자고 주장했다. 이후 7월 31일에도 장제스의 대표 하성준과 회담하였으며 이어 옌시산과 회담, 난징-봉천-산서의 삼각동맹을 구상하였다. 허나 어디까지나 난징 국민정부와의 합작을 찬성했을 뿐이지 장제스의 리더십을 의심하였기 때문에 장제스 개인과의 합작은 반대했다.

1928년의 국민당의 2차 북벌에서는 전임 군단장 한린춘이 중풍 치료를 위해 봉천으로 돌아가자 그를 대신하여 3-4방면군 군단장이 되었다. 3-4방면군은 장쉐량과 궈쑹링이 육성한 부대였기 때문에 군단 내부에서는 양위팅의 부임에 대해서 대단히 불만이 많았으나 장쉐량은 양위팅의 임명이 장쭤린의 명령이라면서 불만을 무마하며 양위팅과의 갈등이 불거지지 않게 주의하였다. 이후 양위팅은 경한철로에서 북벌군에 대항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베이징을 국민혁명군에게 내주어야 했다.

황고둔 사건 이후 장쭤린의 죽음을 알지 못하고 그저 짱스이로부터 봉천으로 돌아오라는 전보를 받았을 뿐인 장쉐량에게 "아마도 노원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다."라고 말하여 장쉐량을 비롯한 장씨 일족의 의심을 샀다. 장쉐량이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자 양위팅은 프랑스 공사관에서 들은 일이라고 대답했는데 이 때문에 양위팅이 관동군과 밀약하여 관동군의 음모를 알고도 침묵했다는 음모론도 제기되었지만 일본 제국은 연남항일을 주장한 양위팅을 개인적으로 싫어하여 양위팅이 동삼성의 정국을 장악하는 것에 대해 절대 반대를 표명하고 만만해보이는 장쉐량을 지지했다. 관동군 사령관 이하 관동군의 고급 장교들은 장쉐량과 개인적으로 접촉하며 양위팅을 호시탐탐 장쉐량의 직위를 대리하려는 음모가라고 언질을 주었다.

2.4. 동북역치

1928년 6월 4일, 베이징 함락 직전에 황고둔 사건으로 장쭤린이 사망 후 장쉐량, 장쭤샹과 더불어 봉천군벌의 군정대권을 계승할만한 유력한 인물로 손꼽혔다. 하지만 만주 구파가 (궈쑹링의 제자이며 양위팅과 사이가 좋지 않던) 장쉐량의 승계를 지지하면서 장쉐량이 6월 19일 정식으로 봉천독판에 취임하고 6월 21일 정식으로 장쭤린의 사망을 발표했다. 6월 24일 동삼성 연합의회는 만주구파의 수장인 장쭤샹을 동삼성보안총사령 겸 길림성 사령에 추대했지만 장쭤샹은 이를 거절하고 장쉐량을 지지하여 7월 3일 장쉐량이 동삼성보안총사령에 추대되어 당일 취임했다.

만주 구파는 양위팅이 장쭤린을 부추겨 보경안민 노선을 버리고 관내진출을 일으켰기 때문에 국민정부와 전쟁을 하게 되었으며 4방면군 대리였던 양위팅이 경한선 작전에 실패했기 때문에 장쭤린이 사망한 것이라면서 양위팅에게 장쭤린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국민정부와의 합류로 가닥을 잡고 있던 장쉐량에게는 자신의 집권을 지지하는 것은 만주 구파지만 동북역치에 관해서 입장을 같이 하는 것은 양위팅이었기 때문에 둘 중 한명을 택일하기 어려운 입장이었다. 옌시산은 양위팅에게 역치를 권했으나 양위팅은 펑위샹을 토벌한 이후에 역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대세에 따른 역치에 대한 찬성을 표했다.
"동삼성에 청천백일기를 게양하는 것은 故 장쭤린이 반대해온 것이다. 나 개인의 입장에서도 반대하였다. 그렇지만 이제 장쭤린이 있던 당시와 사태를 달리한다. 새로운 것을 취하지 않을 수 없다. 민중은 모두 화평을 요구한다. 그리고 청천백일기의 게양에 의해서 평화를 기약할 수 있는 것은 대세이다. 어쩔 수 없이 청천백일기를 게양하지만 동삼성 정치에 남방인을 끌어들이는 것은 아니다. 남방화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서 타협을 요하는 것이고, 타협을 위해서는 기를 바꾸어 다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에 진실로 어쩔 수 없는 형편이다. 그리고 이는 단지 평화를 요구하는 민의에 따르는 것일 뿐이다."

이후 관내에서 봉천에 복귀한 장쉐량이 3-4 방면군단 개편에 착수하자 부군장에 임명되었고 동삼성정무위원회가 구성되어 동북삼성의 최고 정치행정기구로 자리잡자 양위팅은 장쭤샹, 탕위린, 장징후이, 완푸린, 창인화이(상음괴) 등과 함께 정무위원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정무위원회는 어디까지나 만주의 실력자들의 연합체에 불과하지 실질적인 행정기구로서 작동하진 못했고 양위팅은 자신이 실제 결정 과정에서 구파와 장쉐량의 연합 때문에 배제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정무위원회 참여를 거부하고 장쉐량의 섭정을 자처하며 장쉐량의 인사 행정에 사사건건 개입하며 장쉐량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보였고 이 때문에 장쉐량과 양위팅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거기에 장제스는 8월 25일, 양위팅과 바이충시가 회담했을 때 바이충시가 양위팅을 부추겨 장쉐량을 몰아내라고 교사했다는 정보를 제공하며 장쉐량과의 합작을 추구했다.[4]

1928년 계계군벌 바이충시와 연합하여 자유행동을 선언하고 반란을 일으킨 장쭝창의 직로연군 부대를 토벌하기 위해 열하로 출병했고 1928년 10월 8일 장쉐량이 국민정부위원으로 임명되자 장쉐량이 자신의 위치를 흔들 것을 우려하여 자신이 봉천에 돌아갈 때까지 결정을 미뤄달라고 요구하며 반발을 표했고 이 때문에 장쉐량은 10월 12일 국민정부위원 직에 취임하지 않겠다는 뜻을 전했다.

한편 양위팅을 싫어했던 일본 제국은 계속 도쿠가와 이에야스도요토미 히데요리의 고사를 들먹이는 한편 만철부속지 경찰서와 일본 특무기관에서 수집한 양위팅과 창인화이에 대한 정보를 넘겨주며 양위팅에 대한 장쉐량의 경계심을 부추겼다. 양위팅은 청운항공관에서 연일 연회를 베풀며 군인, 정객을 모아 위세를 과시하곤 했는데 이는 장쉐량에게 몹시 위협적인 제스처로 다가왔다. 특히 양위팅의 아버지의 칠순잔치 때는 각성의 사람들이 모여 문전성시를 이루었는데 마치 양위팅이 만주의 주인인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이후 장쉐량은 이때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린췐주(林權助, 임권조)가 도쿄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한 것이 일본의 역사에서 도쿠가와 막부시대의 사실에 관계된 것을 보고, 당시 동북의 정치상황과 연상되어 나는 몹시 불안을 느꼈다. 게다가 양위팅은 당시 비록 어떤 직무도 없었지만, 동북 군정요인이 그의 문하에 몰려 비위 맞추기에 바쁘고, 심지어 국내의 각성 군정대표가 심양에 오면 모두 그를 방문했다. (...) 나는 그의 부친 축하연에 참가했지만, 만약 양위팅, 창인화이가 취이대지(取而代之)하려 한다면 전혀 피를 흘리지 않고도 동북정권을 장악할 수 있고, 임권조가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정황을 말한 것이겠구나. (...) 나는 히데요리가 도쿠가와에게 살해당했던 것과 달리 내가 먼저 그를 제거해버릴까라고 끊임없이 생각했다. (...) 그후 이를 결정하기 위해 은화로 점을 쳤고, (...) 결국 먼저 그를 제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양위팅, 창인화이 두 사람의 당시 정황으로 나는 정신상으로 지극히 큰 위협을 느꼈고, 이때 제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배태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2.5. 최후

결국 1929년 1월 10일, 그의 세력을 경계한 장쉐량이 구파의 지지도 이끌어낼겸, 과거 궈쑹링 휘하에 있던 육대파의 주요 장령인 가오지이(高紀毅, 고기의), 왕이쩌(王以哲, 왕이철), 류도췐(劉多荃, 유다전), 탄하이(譚海, 담해) 등을 소집하여 양위팅과 창인화이를 제거하기 위한 회의를 열었고 양위팅과 창인화이를 자신의 관저로 불러들인 후 이들과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 양위팅과 창인화이는 중동철로를 소련으로부터 회수하고 독판공서를 설치하자고 제안했는데 이들의 제안을 듣던 장쉐량은 갑자기 복병을 풀어 양위팅과 창인화이를 체포하였다. 가오지이가 양위팅과 창인화이의 죄상을 선포한 이후 탄하이가 몇사람의 부관을 대동하여 양위팅, 창인화이를 끌어낸 후 신형률 101조 제1항 내란죄 및 수정군법 제27조 제7항 반란죄를 적용하여 내란죄, 역치에 반대한 죄[5]를 물어 총살했다. 이후 임시고등군법회의의 판결문은 양위팅이 중국 공산당과 결탁하여 폭동을 일으키려 했다고 지적했지만 증거가 없다.

양위팅이 반란을 일으키려 해서 죽였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양위팅이 죽은 이후에 나온 말로 정작 양위팅 사망 직후에는 남북통일에 반대하고 경봉차량의 압수와 군비 축소 계획에 반대한 일 등만을 언급하고 있다. 양위팅이 죽은 후 왕가정이 장쉐량에게 신중치 못한 일이었다고 지적하자 장쉐량은 이미 끝난 일을 가지고 그만 말하라고 크게 화를 냈으며 "이후 우리들이 잘하지 못한다면 진실로 지하에 있는 양위팅과 창인화이에게 죄송한 것이다."라고 말하면서 죄책감을 드러냈다. 이런 정황을 말미암을 때 양위팅의 죽음은 그가 정말로 정변을 일으켜서 죽었다기 보다는 장쉐량의 입지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3. 참고문헌

4. 관련문서



[1] 제갈량에 비견된다는 뜻이다.[2] 장쭤린의 호.[3] 난징 국민정부와 연대하여 일본 제국의 만주 침략에 저항하자는 뜻이다.[4] 하지만 양위팅이 정변을 꾀하려 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장제스의 주장이고 실제로는 계계군벌과 단순히 정치적 연대 정도를 시도한 것을 장제스가 장쉐량의 관심을 끌기 위해 침소봉대했을 가능성이 높다.[5] 물론 위에서 보았듯이 양위팅은 역치에 찬성하는 인물이었고 역치에 대한 양위팅의 입장은 장쉐량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