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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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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이경태 (李敬泰)[1], 이수선 (李首先)[2]
출생 1917년 8월 12일
평안남도 평양시 강변리 (江邊里) 50
사망 1973년 5월 9일 (향년 55세)
한양대학교병원
본관 경주 이씨
종교 개신교 장로회
가족 배우자 정영
장인 정봉주, 처남 정영호, 매형 정윤관
학력 난징 국립중앙대학 법학원(法學院) 법정계(法政系)
독립운동 경력 한족동맹(韓族同盟) 회장[3]
한국광복군 제 3징모분처 한교전지공작대대원
(韓國光復軍 第三徵募分處 韓橋戰地工作隊)
중화민국 제 3전구 정치부 대일 광파선전대
(中華民國 第三戰區 政治府 對日廣播宣傳隊) 소교[4]
광복 후 경력 미군정 CIC[5](1947~1948년)
대한민국 체신부 검열과장 (1949년)
내무부 비서실장 (1951년)
내무부 치안국 교육과장 경무관 (1951년)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290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3. 독립운동4. 일본 경찰로부터 체포됨5. 난징 탈출6. 광복 이후
6.1. 미군정 CIC 요원6.2. 내무부 치안국 교육과장/「대남간첩단사건」
7. 기타8. 참고문헌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자 내무부 치안국[6] 경무관이다. 한족동맹(韓族同盟)과 한교전지공작대(韓橋戰地工作隊) 지하공작 활동과 한국광복군 대원으로 활약하였다.

2. 생애

1935년 6월 숭실중학교 신사참배반대시위사건으로 잡혀 병보석 중 국내를 탈출하여, 베이징의 화잉전수학교(華英專修學校)를 거쳐 1940년 9월 난징 국립중앙대학(南京國立中央大學校) 법학원(法學院) 법정계(法政系)진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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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중앙대학 법학사 이경태 졸업사진, 이경태는 난징중앙대학교 등록할때 쓰였던 이름이다.

3. 독립운동


한족동맹(韓族同盟)은 일본군 점령지 내에 있는 난징중앙대학교(南京中央大學校) 한인유학생들을 주축으로 만들어진 비밀결사조직으로 중국 문학을 전공하던 3학년(1943년 기준) 학생 송지영(宋志英)그리고 법학을 전공하던 이일범(李一凡)·조일문(趙一文) 독립운동에 관련하고 한국 유학생의 독립노선 모색에 앞장 섰던 주동인물이다.

난징중앙대학은 각지의 우수 학생 모집하고 입학생들의 경제적 부담 면제를 위한 조치로서 한인 유학생들의 학비를 비롯한 기본적 비용들이 면제하고 장학금을 지불하였다. 이에 각지에서 입학지원자가 몰려 한 때 입학생 수가 천여 명에 달하였다.[7]

1940년대 국립중앙대학 출판물 중, 한인 입학생/재학생 기록[8]
성명 적관 전공학과 입/재학기록 졸업시기 본명
리게카이(李圭海) 조선 문학원 중국문학계 1940.9. 이규해
리게타이(李敬泰) 일본 법상학원 정경, 경제계 1940.9. 이일범
야마모토 테츠(山本哲) 조선 농학원 농학계 1941.2. 박철원
야마모토 시에이(山本志泳) 조선 문학원 중국문학계 1941.9. 송지영
나카하라 스스무 (中原進) 일본 법상학원 1942.2. 조일문
미하라 세이이치(三原誠一) 조선 보습반 1942.2.
야나기 교로쿠(柳享祿) 조선 보습반 1942.2. 유향록
키야마 후쿠로쿠(木山福祿) 조선 법상학원 정경, 경제계 1944.5. 이복록
다나카 준이치(中田順一) 조선 선천 의학원 1944.5. 1945.6. 정영호
츠키에 토오루(月江徹) 조선 의학원 1944.5.

1940년 이전부터 충칭(重慶)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엄밀히 연락을 취하여 지하공작을 전개하였다.송지영(宋志英)·이일범(李一凡)·조일문(趙一文)·박철원(朴哲遠)·이정선(李正善)·신영묵(申榮默)·박익득(朴益得) 등과 접선이 된다.

중화민국 정부 난징 특파원 링즈난(凌志男)상교[9]의 지령으로 한·중 혼성된 구국청년군에 지원하는 애국청년들을 전후 4~5차례 걸쳐 비밀리에 초모후송는데, 매차 그 수효가 수 10명에 달하였다.

1940년 2월 난징 거주 교포인 정윤관(鄭允官)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아 각지의 공작대원에게 분배, 전달하였고, 그 해 7월 7일 난징에서 일본인 출입 음식점에 시한폭탄을 장치하여 일본인 5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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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동화극장(일본인 조계내 위치) 고노 켄로쿠 설계의 일본식 영화관·극장으로 1936년 완공. 일본 패전 후, 중국 해방극장으로 운영되었다.

그 후 후방에서 계속 밀파되는 유기석 소교[11] 등 5 ~ 6명의 공작원은 난징, 상하이 등지를 중심으로 모병, 첩보, 민심교란, 투탄파괴 등 공작사명을 띠고 상시 난징지구에 은신하고 활동했으며, 상하이 동화극장(東和劇場) 및 국제무용청(國際舞踊廳)[12]에 투탄사건 등 그 공작원들의 임무수행을 위한 협조 또는 은신처 제공 등 일체에 관해서는 전술한 왕하이칭(王海靑), 링단루(凌澹如), 렌시위안(任世源)씨 등이 전담 협조했었다.
① 애국 청년 규합 공작
② 일본군 동태 탐사
③ 초모 인원 후송 공작
등의 임무를 전개하고 있었으며, 특히 초모된 애국 청년들의 후송 임무는 왕하이칭·쑤징허(蘇景和) 등, 중국인 동창이 책임을 지고 충칭(重慶)과 시안(西安) 및 제3 전구 지역을 왕래하고 있었다.

이 무렵 쑤징허(蘇景和)은 신영묵·박익득(朴益得)을 안내하여 시안 광복군 제 2지대에 도착하여 난징(南京) 지구 지하 공작 상황을 이범석(李範奭) 지대장에게 보고하였으며, 이범석 지대장은 다시 임시정부 및 광복군 총사령부에 전보(轉報)함으로써 조일문·이일범 등은 난징(南京) 주재 공작 특파원에 임명되었다.

난징 국립중앙대학 총장 퇴출 운동(1943.5)과 아편 반대 소각 시위(1943.12)가 터진다. 1943년 5월, 난징중앙대학 학생운동은 교장 판중윈(樊仲雲)의 퇴출을 요구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이유는 학생들의 식비를 착복하고 허술한 식사를 제공했다는 것이었다. 1943년 5월 31일 새벽 천 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식당에 집합하여 대오를 만들고 이허로(頤和路) 왕징웨이(汪精衛) 공관에 이르러 부패 교장의 파면을 청원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중국 학생들은 불행한 사태 발생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미리 어떤 한 한국학생과 연락을 취하여 일본군 헌병대 쪽과 소통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왕징웨이(汪精衛) 정부는 학생들과의 담판을 거쳐 교장을 파면하고 동시에 학생 간부들을 체포하고 학생운동을 진압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고 적관을 일본으로 기록하기도 했던 한인 유학생들은 불안과 신변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4. 일본 경찰로부터 체포됨


1943년 6월 중순[13], 충칭(重慶) 임시정부에서 밀파되어 중경에서 파견된 한국독립당 소속 김병호(金柄豪) [14]가 송지영의 거처로 찾아와 한국독립당 상하이ㆍ난징 지구 공작 임무를 맡아 줄 것을 제의했고 이에 송지영은 쾌히 승낙하였다.[15] 당시 김병호는 국내에 갔다가 돌아온 후 난징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면서 베이징으로 떠났다.

김병호(金柄豪)가 상하이(上海)의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므로써 송지영도 임시정부의 비밀 공작원이라는 사실이 탄로나고 말았다. 송지영도 상하이에서 체포되었고 고문으로 인하여 이일범, 조일문, 이정선 등 체포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당시 난징(南京)에 있던 일본 헌병대와 영사관 경찰에서는 이같은 사태를 중대시하고 난징중앙대학에 재학 중이던 모든 한국인 학생의 숙소를 수색하고 이들의 신변을 압축하였다.[16]

5. 난징 탈출

송지영, 이일범은 각각 17년 형을 선고받고, 조일문은 난징 중앙대학 쿠니미츠만리(國光萬里) 교수의 노력으로 난징특무기관(南京特務機關) 근무를 조건으로 석방되었다고 한다.[17]

이일범의 매부 정윤관은 쿠니미츠만리(國光萬里) 교수를 일화 20만엔에 매수, 그를 통하여 일본 중지파견 헌병사령부(中支派遣 憲兵司令部) 특고과장 중좌(特高課長 中佐/성명미상)를 일화 100만엔에 매수하여 처남 이일범을 헌병총사령부 통역으로 근무하는 조건으로 석방시켰다. [18]

1944년 3월, 박철원(朴哲遠)으로부터 난징대 사건 발생의 소식을 상세하게 전해들은 유기석은 왕진 의사로 위장하고 난징(南京)에 잠입한다. 지하조직망의 재정비, 혁명 동지와의 연락 및 초모 공작을 위하여 자신이 위험을 무릅쓰고 난징(南京)으로 잠입, 이일범·조일문· 유익배(柳益培)·김해일(金海一) 등과 비밀히 접선하여 완난(晥南) 징시안(逕縣)으로 탈출로를 알려주었다.[19]

1944년 4월 초[20], 매부 정윤관 도움으로 박시춘(朴時春)이 인솔하는 서울신협가극단원 43명을 초청하여 일본군의 긴장을 느슨해짐을 틈타 특무기관에서 근무하고 있는 조일문과 함께 일본군 군사기밀을 가지고 탈출했다고 한다.
나카하라 스스무[21]는 적군 연락부에서 1주일 동안 몰래 탐지하다가 결국 한 무더기 중요한 기밀자료를 훔쳤는데, 칭따오靑島에서 샤먼厦門 연해에 이르는 적군 방어지도나, ‘광호光號 작전계획[22], ‘현재의 적 정황도’, ‘중국에 있는 조선인 반일분자 활동정황조사’ 등이 포함되어있다. 적에게 이것은 심각한 타격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전략부서, 방어계획 그리고 군사사업이 모두 누설되었기 때문이다. 적이 다년간 계획한 해상과 지면의 배치는 한 번에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일 태평양전쟁과 중국대륙에서의 항일 전쟁이 무기한으로 연장되면 작전계획의 발각으로 말미암아 적의 세력은 더욱 피동적인 지위에 처하게 될 것이다.

조일문이일범 두 사람은 적의 손으로부터 상급의 비밀자료를 훔친 후, (1944년) 4월 어느 토요일 오후에 쉬저우徐州나 카이펑開封 등지의 조선 친구 20여 명과 함께 몰래 난징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노정에 따라 우후蕪湖, 완지灣址, 시허西河 등지를 거쳐, 적의 거점을 돌아서 순조롭게 마두 봉쇄선에 진입했다.
...
(중략)
...
그들이 난징을 떠난 후, 다음 날은 일요일이라 적은 아직 알아차리지 못했다. 월요일이 돼서야 헌병대나 연락부 등 기관은 많은 조선 관적의 인원이 출근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이에 비로소 놀라 깨닫고 바로 검사를 했으며 한 무더기 기밀문건과 지도 등이 사라져 버렸음을 발견했다. 그래서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으며 적당한 조치를 취할 줄도 몰랐다. 그들이 전보로 각지의 수비군에게 뒤쫓고 뒷조사를 하라고 명령했을 때, 우리들의 친구는 일찌감치 안전한 지대에 도착했다.[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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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한족동맹 활동 당시 사진 (중국 제 3전구)
1열 왼쪽 첫번째가 이일범, 2열 오른편에 아이를 들고 있는 여인이 부인 정영 중앙 태극기 한족동맹 대장 유기석 대장
Washington Registry Intelligence Field Files, 1942-1947 (Entry UD 108),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한국 독립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보고에서는 한족동맹(Korean National League) 간부들을 일일이 나열하여 기록하고 있다.

Strategic Services Unit, 전쟁부[24]
국적 : 한국
제목 : 한족동맹(韓族同盟) 간부들, 마오린(茂林) 본부
문서기원 : 상하이
전구 : 중국
문서 생산날짜 : 1945년 5월
파일:The Officer of Korean National League_1.jpg
유수인 한족동맹 의장. 현재 제 3전구 한교전지공작대 주임. 41세 진링대학(金陵大學) 졸업. 향촌사범학교 교장, 남화한인연맹 가담.
박철원 한족동맹 총비서[25]. 제 3전구 한교전지공작대 대원, 27세, 남경중앙대 농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및 만선일보 기자.
전일 한족동맹 조사위원장. 30세이며 일본에 센슈대학(専修大學)에서 공부함. 만주의 조선혁명당[26]의 정보부장.
정동율 한족동맹 조사위원회. 43세, 숭실대학 졸업.
파일:한족동맹 이일범.jpg
이일범 한족동맹 조사위원회. 27세 남경중앙대 법학과 졸업. 일본 헌병대에 통역병으로 근무.
안강 한족동맹 총무과장. 26세 일본중앙대 졸업. 안후이성(安徽省) 벙부(蜯埠)에서 일본영사관 직원이었다.
조일문 한족동맹 정치부장. 27세 남경중앙대 법학과 졸업. 일본군 특무부대에 통역병으로 근무.
김호 한족동맹 훈련부장. 32세 보성고등학교 졸업. 환남총사령부 고문.
류향 한족동맹 비서. 24세. 일본의 대학에서 다닌 적이 있다. 광신소학교 교장.
심용철 한족동맹 비서. 32세. 푸젠셩(福建省) 민생학교(民生學敎)[27]에서 훈련반 졸업. 난징괴뢰국(中華民國南京國民政府)의 훈련장교였다.
피춘여 한족동맹 총무부 총무본부. 26세 봉천대학
변일성 한족동맹 총무부 회계조장. 25세. 도쿄이과대학.
정람명 한족동맹 총무부처 공공복지담당. 26세, 평양전문의대 졸업. 약사
김형석 한족동맹 정치부 정보장교. 28세.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제3 분대장
파일:The Officer of Korean National League_3.jpg
한진원 한족동맹 선전부장. 38세. 피어슨 성경 기념 학원(Pearson Bible Training School)[28] 졸업. 한국광복군 대원
김해성 한족동맹 징모처장. 28세 강계고등학교 졸업. 난징괴뢰국의 특무대원.
석원석 한족동맹 군사훈련장교 23세. 일본군 26사단 통역병.
박화 한족동맹 군사훈련장교, 22세. 난징중앙대 건축과 이수.
1945년 3월 이후 중화민국 제 3전구 정치부 소속, 대적 광파선전대(廣播宣傳隊)[29] 소교[30]로 배속되어 일본군 포로 심사, 대일선전문을 작성 방송함으로써 일군에게 염전 및 반전사상을 고무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었다.

6. 광복 이후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하자, 징모 제 3분처에서는 간부 20명을 중심으로 적군지역에 대한 초모 확대반 5개조를 조편성하여 파견계획을 완비하던 중 적이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되여 총사령부 지시에 의한 적 점령지구 내의 교포 생명/재산 보전 및 한적 장병 수용 임무를 구축하고자 각 지구에 선발대를 파견하였으며 그 명단은 아래와 같다.
우후지구(蕪湖地區) 박승학
난징지구(南京地區) 이일범, 박철원, 피문성
상하이지구(上海地區) 김용, 박시준[31]
항저우지구(抗州地區) 전호인, 정영호[32], 유익배

등이 파견되어 소임직무를 완축하였다.[33]
해방이 되자 한국광복군 제3전구의 이일범(李一凡) 등이 선발대가 되어 난징에 진주하여 왜군부대 내에 억류되어 있던 한적장병 수 천여 명의 신병을 인수하여 난징대학에 수용하였다.
그 후 제3지대에서는 초모위 때 난징 방면으로 출진한 바 있는 서파가 단장, 윤창호가 부단장, 김윤택 등과 수 명이 단원이 되어 난징에 특파되자 이일범은 난징대학의 한적장병 등을 서파 단장에게 인계하니, 서파 단장은 이를 잠편지대로 편성, 국군화 계획을 추진하던 중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서 각 지대 각 전구가 장악하고 있는 특파단의 관할의 재조정 편성에 따라 서기 1945년 11월에는 난징 제3지대 특파단의 업무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서 파견된 안춘생 특파단장에게 인계되면서 서파는 당분간 잠편지대 참모로 활약하였다.
김문택 회고록

1946년 3월 4일, 상하이시에서 미군정에서 제공한 L.S.T.상륙정을 타고 3월 13일, 부산항에 귀국했다고 한다.[34]

6.1. 미군정 CIC 요원

1947년 4월, 이순용의 추천으로 미군정 CIC 요원으로 활동했었다. 이순용태평양 전쟁기간, 미국 육군 중사 신분으로 CIC(미군 방첩대)에서 국무부 촉탁으로 일하며 백의사와 CIC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으며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도 기여했다. 이일범은 미국 육군 제224 CIC 파견대 요원으로 발탁되었다.

1947년, 조선공산당이 합법적으로 활동하던 시대라 조선공산당 관련 조직을 검거하기 위해 김용, 김문호[35]와 의형제를 맺고 공조로 조선상사주식회사 부사장 최창성, 사업부장 김찬도를 체포했다. 북조선로동당 자금조달책인 서울시 미국인 시장 고문 박길용를 체포하여 북한 김일성남조선로동당에 지원한 자금에 대한 수사를 했었다.

이후, 미군정 CIC 내부에서 김문호가 배제되자 김용과 이일범도 출입과 임무를 제한받았고, 미군정이 해체되자 이순용은 미국에 돌아가는데,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이순용의 소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순용 귀국 후, 내무부 비서실장(1951)와 대한민국 체신부 검열과장을 맡게된다.(김용 회고록)
파일:조선민족청년단 서울시단부 발기인총회 19470520.png
1947년 5월 20일, 조선민족청년단 서울시지부 이사겸 사업부장을 역임한다.
파일:1948경교장 김구.png
1950년 6.25 전쟁이 터지자 장석윤 치안국장으로 지프차 열쇠를 받아 부산까지 철수하게 된다.[36] 대전체신국, 대구체신국을 머물면서 전방지역 감시 및 정보 수집했다.

1950년 9.28 서울 수복 직전, 김용·이일범은 이순용으로부터 미육군성 연락파견대(Department of Army Liaison Detachment, DA/LD)에 근무하게 된다. 미 육군 특수작전사 연구에 따르면 DA/LD라는 명칭은 6.25 전쟁 초기 미국 중앙정보국의 OSO 정보활동을 위한 위장 조직명으로 사용됐으며, OSO는 주로 전략정보 수집과 첩보활동을 담당했다. 준군사공작은 별도의 OPC가 중심으로 활동했었다.# 여기서 구분해야 할 점은, 한국군 CIC와 합동수사본부(김창룡) 소속이 아니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게 되자 이순용을 통해 미 육군성 파견대로 정찰 임무를 수행했었다. 주로 북한군이 38선을 넘어서 서울에 침입한 목적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한 임무였다. 한국전쟁 기간엔 체신부 검열과장 미 육군성 정보원으로 활동했다.

6.2. 내무부 치안국 교육과장/「대남간첩단사건」

1951년 7월 27일, 내무부 치안국 교육과장으로 특채되었다.서울신문 1951년 08월 01일자
파일:1000040635.jpg
파일:이일범경무관휴직.jpg
1951년 12월 14일,「대남간첩단사건」으로 김창룡 대령이 이끌던 군 수사시관에 체포되어 급작스럽게 퇴직하게 되었다. 이후 긴 법정 다툼 끝에 1958년 최종 무죄판결을 받고 명예를 회복하였다. 유족들은 이일범김용6.25 전쟁 중에 고위직 자녀들의 군 복무 기피 사례를 내사하다가 당시 지도층의 미움을 사 고초를 당하게 되었다고 한다.[37]
육군특무대, 대북간첩사건 관계 혐의자들 송치
1952년 1월 3일 자유신문

지난 12월 14일 돌연 활동을 개시한 육군특무대에 검거되어 그동안 대장 김창룡(金昌龍) 대령 직접 지휘 하에 엄중 문초를 받아오던 세칭 대북간첩사건 관계 혐의자 일당은 20일간의 구류기간이 만료된 1월 2일 일단 조사를 완료, 3일 상오 6시 대구 고등군법회의로 압송되어 검찰관의 조사에 이관되었다.

송치된 일당의 면모를 보면 이영근李榮根(전 조봉암 曺奉岩씨 비서)·양한모梁漢模(일명 홍민표洪民杓씨)· 김종원金鍾源(전 서울보도연맹 간사장)· 김용金龍(전 치안국 정보수사과장)·이일범李一凡 (전 치안국 교육과장)·남궁南宮요세(무역상)·이봉혁(李奉赫) · 정우섭(鄭禹燮) · 김봉진(金奉鎭) 등 9명이고, 한편 이와 함께 조사를 받아오던 송지영(宋志英) 외 2명은 동일 검찰청으로 이송되었으며, 나머지 수명은 계속 조사를 받고 있는 중인데 이로써 동 사건 수사는 아직 수사선상에 수명의 용의자를 남기면서도 어느덧 한고비를 넘었다.

혐의내용은 수사당국에서 아직 엄중히 비밀에 부치고 있는데 탐문한 바에 의하면 이영근이 주동이 되어 남한 기밀정보를 북한 괴뢰집단에 제공한 것, 홍콩과 일본에 형제를 둔 한국 기업 사장 남궁요세가 주동이 되어 홍콩으로부터 다량의 아편을 밀수하여 그 이윤 중 일부를 김종원을 통하여 신당 공작비로 제공, 동 당에 좌경한 분자들을 침투시켜 정권 쟁취를 기도한 것 등이 주요한 혐의사실, 한 수사관계자가 비공식으로 말한 바에 의하면 동 사건 내용은 매우 복잡 미묘한 것이라고 하며 사건 진전에 따라서는 극히 의외의 인물인 모씨에게도 비화할는지도 모른다고 한다.

사건의 그 연루자들의 면면으로 보아 아연 세간을 놀라게 하고 있으며, 과연 흑이냐 백이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일반은 그 귀추를 주목하고 있다.
파일:대남간첩단사건 이일범 무죄.png
이영근은 1919년 충북 청원군에서 출생, 일제강점 시기 항일운동에 참여, 1944년 여운형이 만든 건국동맹에 가담하였고, 해방 직후 여운형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하였으며, 여운형의 동생 여운홍이 조직한 사회민주당의 선전국장을 지내기도 하였다.[38]

1951년 이영근은 조봉암 국회부의장을 중심으로 한 신당창당 사무국의 책임자로 일하던 중 「대남간첩단사건」의 혐의자로서 구속 기소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된 후, 1958년 조봉암진보당 사건이 발생하자 일본으로 밀항하였다. 이영근은 1951년 당시 조봉암이 신당을 창당하는데 관여하였는데, 이승만 대통령이 진보계 정당창당을 방해하기 위해 특무대로 하여금 자신과 치안국 정보수사과장 김용, 치안국 교육과장 이일범 등을 엮어 「대남간첩단사건」 사건을 공작하도록 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39]

김용 유족은 별도의 이유를 제시했다. 김용이 치안국 정보수사과장 시절 이기붕에게 불리한 정보를 수집하다가 모함을 당한 것 같다고 증언했다.광복군 출신 독립운동가 2명, 해방후 경찰고위직 임용 추가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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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73년 5월 11일자
청년시절 항일 독립운동에 매진하고 광복 후, 조국 발전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은 이일범 경무관은 1973년 5월 9일 숙환으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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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전현충원 이일범의 묘소에서.. 좌로부터 정희섭, 조일문, 정영호, 유익배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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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버 한족동맹에서 이일범 추모곡을 들을 수 있다.

8.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부) 6권 442·443·445·615면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45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부) 9권 856면
고정훈, 秘錄 軍.(下) 고정훈. 동방서원 1967 pp. 372~377
유기석, 30년 방랑기 유기석 회고록, 국가보훈처, 2010
김용, 나의 길을 찾아, 이화출판사, 2012[44]
애국지사 정윤관 항일운동 공적서 자료 [45]
NARA 소장, Washington Registry Intelligence Field Files, 1942 - 1947 (Entry UD 108)
[1] 일본이름으로 추정, 리게타이[2] 30년 방랑기 유기석 회고록에서는 이수선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난징대학 중국학생들에게 부르기 좋게 만든 중국이름으로 추정된다.[3] 이일범의 공적정보[4] 국민혁명군 소령계급[5] 미 육군 제224 CIC 파견대 요원[6] 현재 경찰청[7] 왕더지 주편, 난징대학100년사, 난징대학출판사(王德兹 主篇, 南京大學百年史, 南京大學出版社), 2002, pp. 242~254[8] ➀ 국립중앙대학 30년도(1941년)각 학과 학생 명단, 국립중앙대학일람, 난징, 1942(國立中央大學三十年度各院系學生一覽, 國立中央大學一覽, 南京, 1942) ② 국립중앙대학사무국 편, 민국 32년도(1943년)복교 제1기 졸업생 연락처, 국립중앙대학교 제 1회 졸업 기념 간행물, 난징, 1944년 6월(國立中央大學秘書處 편, 民國三十二年度復校第一屆畢業生通訊錄, 國立中央大學復校第一届畢業紀念刊, 南京, 1944年 6月.) ③ 국립중앙대학사무국 편, 민국 33년도(1944년)복교 제2기 졸업생 연락처, 국립중앙대학교 제 2회 졸업 기념 간행물, 난징, 1945년 6월.(國立中央大學秘書處 편,民國三十三年度復校第二屆畢業生通訊錄, 國立中央大學復校第二届畢業紀念刊, 南京, 1945年 6月.)[9] 대령[10] 국제무용청(國際舞踊廳)에 투탄사건으로 추정된다.[11] 쑤베이 지방에서 유격대 근무한 이력으로 소령이란 계급을 가지고 있었다.[12] 중국 상하이시 창닝구 훙차오로 1650호[13] 김용의 회고록 p. 90에 따르면 송지영과 김병호와 접선해서 모의한 일을 1943년 6월 중순으로 기억하고 있다.[14] 김중민金仲民, 고중민高仲民, 전직 형사에서 임시정부로 귀순함.[15] 기말고사때라 이일범과 조일문은 김병호와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16] 1943년 7~8월즈음 체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용의 회고록에 따르면 9월 새학기가 되니 알고 있는 조선인 학생이 없었다고 한다.[17] 신영묵 회고에 의하면 김병호와 함께 유학생들이 체포되었을 때 난징 중앙대학에 교환교수로 와 있던 일본인 교수가 영사관을 설득해 결국 학생 중에는 송지영 한 명만 재판에 회부되고 나머지는 전원 훈방됐다고 한다.[18] 정윤관 증언[19] 30년 방랑기 유기석 회고록 참조[20] 유기석 회고록과 조일문의 증언에 따르면 1944년 4월 1일 토요일이거나 1944년 4월 8일 토요일로 추정[21] 조일문의 일본이름[22] 미군의 상륙에 대처하는 작전계획[23] 유기석, 30년 방랑기 유기석 회고록, 국가보훈처, 2010, p.319[24]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에 존재했던 미국 정부 의 정보 기관. 이는 전시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의 비밀 정보 및 대첩 부서로 1945년 10월 1일 창설된다. 이 문서는 중국전구(China Theatre)에 주둔하던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요원이 작성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 조직은 훗날 미국 CIA가 된다.[25] 유기석 회고록에선 보조대장으로 불린다. 유기석, 삼십년방랑기-유기석 회고록, 국가보훈처 2010[26] 양세봉, 지청천[27] 1937년 평민중학교(平民中學校)의 교사였다.[28] 現 평택대학교[29] 대적 방송홍보팀[30] 소령[31] 김용 지사의 회고록에 의하면 박시준은 중국 상하이에 남길 희망했다고 한다. 김용, 나의 길을 찾아, 이화출판사, 2012, p. 247.[32] 저장성 외교조원[33] 김승학, 한국독립사 제 2편 제 3장 제 6절 p. 302[34] 김용, 나의 길을 찾아, 이화, 2012, pp. 249~252[35] 광복군 제 3징모분처장, 육군 헌병총사령부 조사과장, 당시 계급 소령[36] 차량이 없던 광복군, 임시정부 출신의 인사들은 서울에서 탈출하지 못해 북한으로 납치된다. 노태준은 태양신문사 사장으로 서울에 잔류했었다.[37] 『대한민국경찰정신의 표상 참경찰 인물열전』 , 경찰청, 2022, 347쪽[38] 『창암 이영근 선생 저작집』, 조국통일로의 이 한길 (1992), 540쪽[39] 이영근 기고, 『진보당 조직에 이르기까지, 그 업적을 되돌아본다』, 정태영, 오유석, 권태복 엮음, 『죽산 조봉암 전집』 제4권(세명서관, 1999), 266쪽[40] 서울과 경기도[41] 평안도, 황해도[42] 1945년 10월 16일 귀국[43] 정병준, 1945년 해방 직후사, 돌베개, 2023, 347~348쪽[44] 이일범의 회고록은 없으나 중국 난징중앙대학 시절부터 치안국까지 함께하던 김용 지사의 회고록에 많이 언급되는 편이다.[45] 정윤관 후손측으로부터 받은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