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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용철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심용철
沈容徹[1]로 등재되어 있다.]
파일:심용철.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심극추(沈克秋)
본관 청송 심씨[2]
출생 1914년 10월 23일[3]
함경북도 길주군 장백면 합포리
(현 함경북도 길주군 합포리)
사망 2001년 4월 21일
중국 지린성
독립운동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 맹원
한족동맹 비서
화평건국군 훈련장교[4]
한국광복군 제 3징모분처 한교전지공작대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965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3. 남화안인청년연맹 가담4. 한국광복군 한교전지공작대 입대5. 광복 이후6.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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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유기석과 함께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 맹원이자 한족동맹 비서이자 한교전지공작대대원이었다.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독립유공자 심용해는 그의 둘째 형이다.

2. 생애

심용철은 1914년 10월 23일 함경북도 길주군 장백면 합포리(현 길주군 합포리)에서 아버지 심병연(沈秉淵, 1871. 4. 23 ~ ?)[5]과 어머니 성주 여씨(星州 呂氏, 1884. 8. 7 ~ ?)[6] 사이의 3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7]

3. 남화안인청년연맹 가담

그는 일찍이 아나키즘 사상에 심취하여 둘째 형인 심용해와 함께 일본 제국주의 타도에 나섰다. 1931년 9월, 그는 형과 함께 정화암, 유자명, 유기석, 원심창 등이 조직한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담했다.

남화안인청년연맹은 1931년 11월 별동조직으로 상해에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을 결성하여 일제 고관 암살, 일제 관공서 파괴, 부일배 처단 등 구체적인 항일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1933년 흑색공포단원인 이강훈, 백정기 등은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의 암살을 기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외에도 흑색공포단에서는 일본영사관의 밀정인 이종홍(李鍾洪), 상해 조선인거류민회의 고문으로 친일파인 이용로(李容魯)를 사살하기도 하였다.

폐병으로 상하이를 떠나 요양하다가 1937년 상하이로 돌아와 유기석과 함께『남화통신』 발간에 참여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의 발발로 동지들이 체포되고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자 그는 정화암 등과 함께 중국 푸젠성 취안저우(泉州)로 이동하여 평민중학교(平民中學校)의 교사로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1941년 중국 국민혁명군 유격대 정치지도원으로 활동하였다.[8]

4. 한국광복군 한교전지공작대 입대

그 후 1945년 5월 안휘성 무림(茂林)[9]에 본부를 둔 한족동맹(韓族同盟)의 비서로 선임되어 유기석 등과 함께 적지구(敵地區)에서 한인 청년들의 초모공작을 전개하였다.
Washington Registry Intelligence Field Files, 1942 - 1947 (Entry UD 108)
한국 독립운동 지도자들에 대한 보고에서는 한족동맹(Korean National League) 간부들을 일일이 나열하여 기록하고 있다.

Strategic Services Unit, 미 전쟁성 [10]
국적 : 한국
제목 : 한족동맹(韓族同盟) 간부들, 마오린(茂林) 본부
문서기원 : 상하이
전구 : 중국
문서 생산날짜 : 1945년 5월
파일:The Officer of Korean National League_1.jpg
유수인 한족동맹 의장. 현재 제 3전구 한교전지공작대 주임. 41세 진링대학(金陵大學) 졸업. 향촌사범학교 교장, 남화한인연맹 가담.
박철원 한족동맹 총비서[11]. 제 3전구 한교전지공작대 대원, 27세, 남경중앙대 농학과 졸업. 동아일보 기자 및 만선일보 기자.
전일 한족동맹 조사위원장. 30세이며 일본에 센슈대학(専修大學)에서 공부함. 만주의 조선혁명당[12]의 정보부장.
정동율 한족동맹 조사위원회. 43세, 숭실대학 졸업.
파일:The Officer of Korean National League_2.jpg
이일범 한족동맹 조사위원회. 27세 남경중앙대 법학과 졸업. 일본 헌병대에 통역병으로 근무.
안강 한족동맹 총무과장. 26세 일본중앙대 졸업. 안후이성(安徽省) 벙부(蜯埠)에서 일본영사관 직원이었다.
조일문 한족동맹 정치부장. 27세 남경중앙대 법학과 졸업. 일본군 특무부대에 통역병으로 근무.
김호 한족동맹 훈련부장. 32세 보성고등학교 졸업. 환남총사령부 고문.
류향 한족동맹 비서. 24세. 일본의 대학에서 다닌 적이 있다. 광신소학교 교장.
심용철 한족동맹 비서. 32세. 푸젠셩(福建省) 민생학교(民生學敎)[13]에서 훈련반 졸업. 난징괴뢰국(中華民國南京國民政府)의 훈련장교였다.
피춘여 한족동맹 총무부 총무본부. 26세 봉천대학
변일성 한족동맹 총무부 회계조장. 25세. 도쿄이과대학.
정람명 한족동맹 총무부처 공공복지담당. 26세, 평양전문의대 졸업. 약사
김형석 한족동맹 정치부 정보장교. 28세.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제3 분대장
파일:The Officer of Korean National League_3.jpg
한진원 한족동맹 선전부장. 38세. 피어슨 성경 기념 학원(Pearson Bible Training School)[14] 졸업. 한국광복군 대원
김해성 한족동맹 징모처장. 28세 강계고등학교 졸업. 난징괴뢰국의 특무대원.
석원석 한족동맹 군사훈련장교 23세. 일본군 26사단 통역병.
박화 한족동맹 군사훈련장교, 22세. 난징중앙대 건축과 이수.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15]

5. 광복 이후

광복 후 『민생보(民生報)』 편집을 담당하였고 교육자·학자로 활동하였다. 1958년 연변조선족자치주 정치협상위원에 선임되었고, 200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2001년 4월 21일 중국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2002년 3월 19일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 - 965에 이장되었다.

6. 참고문헌

심용철의 공훈록
유기석, 삼십년 방랑기 유기석 회고록, 국가보훈부, 2010
이 조국 어디로 갈 것인가(정화암, 1982) 187·188面
韓國獨立運動史資料(國史編纂委員會) 第22輯 574面
朝鮮獨立運動(金正明) 第2卷 628面
南華韓人靑年聯盟의 결성과 그 활동(朴 , 朴永錫敎授 華甲紀念 韓民族獨立運動史 論叢) 958·960面

[1] 청송심씨족보 2권 1535쪽에는 沈[2] 봉익공파-전서공 지백(之伯)파 21세 용(容) 항렬.[3] 청송심씨족보 2권 1535쪽에는 10월 13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4] 한적사병을 탈출시켜야 하니 적군 속의 장교로 복무했던 것으로 보여진다.[5] 이후 심능숙(沈能淑)으로 개명했다.[6] 여동률(呂東律)의 딸이다.[7] 어머니 성주 여씨는 아버지의 둘째 부인이며, 첫째 부인 양천 허씨(1872 ~ 1899. 10. 24) 허경(許烱)의 딸은 슬하에 장남 심용만(沈容萬, 1895. 9. 23 ~ ?)을 둔 뒤 1899년 10월 24일 요절했다.[8] 이 국민당 유격대가 난징 정부의 화평건국군으로 편입이 되었을 것이다.[9]중화인민공화국 안후이성 쉬안청시 징현(涇縣) 마오린진(茂林鎭).[10]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에 존재했던 미국 정부 의 정보 기관. 이는 전시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 의 비밀 정보 및 대첩 부서로 1945년 10월 1일 창설된다. 이 문서는 중국전구(China Theatre)에 주둔하던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요원이 작성하는 것으로 보이며 이 조직은 훗날 미국 CIA가 된다.[11] 유기석 회고록에선 보조대장으로 불린다. 유기석, 삼십년방랑기-유기석 회고록, 국가보훈처 2010[12] 양세봉, 지청천[13] 1937년 평민중학교(平民中學校)의 교사였다.[14] 現 평택대학교[15] Washington Registry Intelligence Field Files, 1942 - 1947 (Entry UD 108),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