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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8-13 13:28:46

정봉주(1903)

파일:8704.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월강(月江)
이명 정동률(鄭東律)
출생 1903년 11월 22일
평안북도 선천군 천북리 311
사망 1987년 8월 9일 (향년 83세)
서울특별시 강동구 진황도로61길 53, 중앙보훈병원
본관 진주 정씨
학력 평양숭실대학교 문과(文科)
경력 대한수리조합연합회(大韓水利組合聯合會)[1] 총무과장, 1954년 5월 사무관, 외자청[2] 업무과장 회계과장 및 여수상무과장
군경력 한국광복군 제 3징모분처 한교전지공작대 부대장 및 정치지도원(韓國光復軍 第三徵募分處 韓橋戰地工作隊 副隊長/政治指導員) 군자금 조달 공작요원, 한족동맹회 감찰위원장[3]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5묘역-295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3. 독립운동4. 해방 이후5.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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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자 외자청(外資廳)의 공무원이다.

파일:임시외자관리청부산사무소부두과_정봉주.jpg

2. 생애

1903년 11월 22일 평안북도(平安北道) 선천군(宣川郡) 선천면(宣川面) 천북리(川北里) 311에서 태어났다.
1922년 10월 11일 독립운동가 정영(鄭瑛) 득녀[4]
1924년 8월 19일 독립운동가 정영호(鄭英昊) 득남

3. 독립운동

독립운동에 뛰어든 계기
1925년, "경성제국대학을 제외한 한국에 대학을 둘 수 없다."는 일제의 강압에 의해 전문학교로 개편되었다.[5] 이에 반발하여 1926년 3월 평양 숭실대학 문과 수료 후, 만주 봉천 등지에서 항일규합에 참가했다.

아들 정영호(鄭英昊)의 회고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제 가친도 독립유공표창을 받았어요. 만주 봉천(奉天)서 곡물장사를 했는데, 대두 등 한-만(韓-滿)교역을 하며 남는 이윤으로 독립군 군자금을 댔지요. 가친은 다리가 불구[6]라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어요. 이런 부친의 영향도 있고 또한 제가 어릴 때 공부한 신의주엔 독립운동가의 왕래가 잦아 행길에서 노숙하는 것도 보고 이야기도 듣고 하여 자극을 받았는데요. 더 직접적 계기는 만주가 일본군 수중에 들어가고 푸이(溥儀)정부가 서니까 아버님은 상하이(上海)로 간다는 것이 난징(南京)에 정착했지요."[7]

1937년 임시정부 활동을 위해 중국 난징(南京)으로 건너간다. 객주집(도매상)을 하면서 만주에서 광복군을 은밀히 돕다가, 만주사변으로 일본군이 밀려들자 난징으로 몸을 피한다. 중국 난징에서 한국청년후송 및 군자금 조달요원으로 활동한다.

1941년 안창호 선생의 비서인 독립운동가 유찬희 선생의 아들 유기석과 접선하여 광복군 징모 제 3분처 적후 지하공작요원으로 활동한다.

난징에서 탈출
1943년 6월, 충칭(重慶) 임시정부에서 밀파된 한국독립당 소속김병호[8], 가 송지영의 거처로 찾아와 한국독립당 상하이ㆍ난징 지구 공작 임무를 맡아 줄 것을 제의했고 이에 송지영은 쾌히 승낙한다. 당시 김병호는 국내에 갔다가 돌아온 후 난징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면서 베이징으로 떠난다.

김병호(金柄豪)가 상하이(上海)의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므로써 송지영(宋志英)도 임시정부의 비밀 공작원이라는 사실이 탄로나고 말았다. 송지영(宋志英)도 상하이에서 체포되었다.[9] 그리하여 당시 난징(南京)에 있던 일본 헌병대와 영사관 경찰에서는 이같은 사태를 중대시하고 난징중앙대학에 재학중이던 모든 한국인 학생의 숙소를 수색하고 이들의 신변을 압축하였다.[10]

송지영 사건 이후, 난징중앙대학교 내 모든 한국 학생은 송지영(宋志英)의 뒤를 이어 구속될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난징, 상하이에 있던 한국 유학생들과 한국 교민들은은 일제의 쇠사슬보다 죽음을 무릅쓴 탈출과 항일투쟁에의 길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11]

1944년 4월 초, 유기석 상교[12]의 안내로 조일문, 이일범과 함께 일본군점령지구를 대거 탈출하여 중화민국 제 3전구[13] 광복군 징모 제 3분처와 합류하게 된다. [14]

중앙군 제 3전구 사령장관(顧祝同) 소속 독립운동가 유수인(柳樹人)이 이끄는 한교전지공작대(韓僑戰地工作隊)의 부대장 겸 정치지도원 한족동맹회 감찰위원장 역임했다.
파일:The Officer of Korean National League_1.jpg[15]
정동율 한족동맹 조사위원회. 43세, 숭실대학 졸업.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과 함께 1946년 3월 4일, 상하이에서 미군정에서 제공한 L.S.T.상륙정을 타고 3월 13일, 부산항에 귀국했다고 한다.[16]

4. 해방 이후

1948년 2월
대한수리조합위원회 총무과장

1954년 5월
사무관으로 진급하여 외자청 업무과장, 회계과장 및 여수상무과장

부산에서 여생을 보내다
1987년 8월 9일에 서울중앙보훈병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정봉주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8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5. 출처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265·267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615면
軍, (고정훈) 동방서원, 1967년
[1] 대한수리조합연합회는 1938년 5월 조선수리조합협회로 시작하여 1940년 7월 조선수리조합연합회로 설립되었고, 1950년 6월 조선농지개발영단과 대한수리조합연합회가 통합되었으며 1962년 1월 토지개량조합연합회로 명칭 변경되었다.[2] 現 조달청[3] 정봉주 독립운동공적정보[4] 정영의 독립운동 공적정보[5] 숭실대학역사 참조[6] 소아마비[7] 한국경제신문, 「식물학서 두 번 『극일(克日)』한 것이 보람」, 1989년 9월 17일자 11면[8] 본명 김병호(金柄豪), 훗날 1955년 특무부대장 김창룡에 의해 꾸며진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혐의로 대구형무소에서 옥사하게 된다. 중국에서 이름은 김중민(金仲民), 정정화의 장강일기에서는 고중민(高仲民)으로 나온다.[9] 김용의 회고에 따르면 송지영은 최상교의 밀고로 일본영사관 형사에게 검거되었다. 김용, 나의 길을 찾아, 도서출판 이화, 2012, p.90[10] 이때 체포된 인원은 김병호, 송지영, 김덕원, 이일범, 조일문, 이정선이다.[11]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pp.853~857[12] 국민혁명군 계급 대령으로 쑤베이(蘇北) 유격대에서 복무한 이력이 있다.[13] 중앙군[14] 고정훈, 軍, 동방서원, 1967[15] Washington Registry Intelligence Field Files, 1942 - 1947 (Entry UD 108),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소장[16] 김용, 나의 길을 찾아, 이화, 2012, pp. 249~2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