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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10-06 03:54:44

전호인

파일:전호인.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전일(全一)
출생 1919년 10월 12일
평안남도 평양부[1] (現 평양시)
사망 1986년 5월 18일 (향년 66세)
인천직할시 북구 가좌동 가좌주공아파트 2단지 자택
(現 인천광역시 서구 가좌동 인천가좌두산위브트레지움)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45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2. 생애3. 가족관계4.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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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경찰공무원. 한국광복군에서 활동한 공적을 인정받아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919년 10월 12일 평안남도 평양부(現 평양시)에서 태어났다.

1936년 만주국으로 건너가 길림성 통화현(通化縣)[2]을 거점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했으며, 그 뒤 국민혁명군에 입대해 제3전구 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안휘성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김해일(金海一)의 인솔하에 한국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했고, 제3징모처 절서 분실 주임으로 근무하면서 절강성 항주시, 상하이시 등지에서 일본군에 대한 심리전 책임자로서 일본어 방송 활동 등을 수행했다. 1944년에는 강소성 소주시[3]·진강현(鎭江縣)[4], 안휘성 무호현(蕪湖縣)[5] 등지에서 초모, 선전 활동을 수행함으로써 10여명의 청년을 포섭해 한국광복군에 입대시켰다. 1945년에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주호 판사처 비서 등으로 근무했다.

8.15 광복 후 귀국했고, 1948년 경찰공무원으로 입직했다. 강릉경찰서장 재직 중이던[6] 1949년, 관내 왕산면 대기리 노추산에 공비 100여명이 집결해 부근 일대에서 주둔해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10월 10일부터 공비 소탕전을 전개해 공비 30여 명을 사살해 공비 소탕에 큰 공을 세웠다. 또한 이 과정에서 공비들의 은신처에 납치되어 취사 등 잡역에 종사하던 15~16세 되는 소녀 10여 명을 구출해 친척들에게 돌려 보내주었으며, 의탁할 곳 없는 소녀들은 적당한 곳에 알선해주는 등 선행을 베풀기도 했다.

6.25 전쟁 발발 당시 조선인민군강릉군(現 강릉시) 강동면 정동진리 정동진에 상륙해 강릉군 읍내로 진출한다는 보고를 받고는 제8보병사단에 통보하고, 관할 경찰서에 비상을 걸어 상륙을 저지하려 했으나 통신망 두절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후 6월 27일 평창군 도암면 횡계리 대관령으로 후퇴하고, 주문진경찰서 소속 경찰과 합류해 낙동강 전선으로 철수,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였다.

1950년 9월 10일부터 1951년 11월 13일까지 제7대 충주경찰서장을 역임했으며, 1953년 6월 30일에는 경기도경찰국 사찰과장으로 근무하다가 10월 17일 총경으로 대한민국 내무부 치안국으로 전보되었다. 그 뒤 1954년 4월 10일 같은 한국광복군 출신인 김기도, 이세경(李世鏡)과 함께 근무형편을 이유로 면직했다. 이후 다시 복직했으나 1960년 퇴직했다.

이후 경기도 인천시(現 인천광역시)에 거주했고, 1963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다. 이후 광복회 인천지회장을 역임했고, 1977년 11월에는 건국포장을 수여받았다.

1986년 5월 18일 인천직할시 북구 가좌동 가좌주공아파트 2단지(現 인천광역시 서구 가좌동 인천가좌두산위브트레지움) 자택에서 협심증으로 별세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고, 2003년 11월 7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3묘역에 이장되었다.

3. 가족관계

장녀 전성희(全聖姬)는 대성산업 김영대 회장의 비서실장으로 40여 년 째 근무 중이며, 국내 최고령 비서이다. 첫째 사위이자 전성희의 남편인 심재룡(沈在龍, 1943 ~ 2004. 10. 20)[7]은 1961년 서울고등학교를 거쳐 1965년 서울대학교 철학과(61학번)를 졸업하고 1968년부터 경향신문 기자로 근무했으며, 1969년 동서문화재단 장학생으로 하와이 대학교로 유학해 석사 과정을 거쳐 1979년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해 귀국 후 모교인 서울대학교 철학과 불교철학 전공 교수로 부임했다. 2004년 10월 20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학교병원에서 지병백혈병으로 별세했다.

4. 참고자료



[1] 1950년 3월 13일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중화민국 출생이라고도 한다.[2]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퉁화시.[3]중화인민공화국 장쑤성 쑤저우시.[4] 現 중화인민공화국 장쑤성 전장시.[5] 현 중화인민공화국 안후이성 우후시.[6] 강릉경찰서 홈페이지에는 무슨 이유에선지 전호인의 재직 기간을 1950년 3월 19일부터 1950년 9월 29일까지로 기재하고 있다. 강릉경찰서 홈페이지에 따르면 1949년 10월 10일 당시 강릉경찰서장은 제8대 윤종한 서장(재직기간 1949. 9. 25 ~ 1950. 3. 18)이었고, 전호인은 제9대 서장이었다.[7] 초명은 심광웅(沈光雄)이며 광웅(光雄, 미츠오)이 일제식 이름과 같다고 하여 1974년 12월 16일 항렬자인 '재'를 따서 재룡으로 개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