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922년 9월 5일 |
평안남도 평원군 동송면 청암리 | |
사망 | 1979년 10월 6일 국립묘지 안장일자 1990년 10월 25일 |
서울특별시 강동구 진황도로61길 53, 중앙보훈병원 | |
본관 | 평산 신씨 |
학력 | 오산학교,일본상업학교(日本商業學校), 남경 국립중앙대학 |
군경력 | 한족동맹(韓族同盟) 난징 지하공작원, 한국광복군 제 2지대 제 1구대 제 2분대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1묘역-206호 |
상훈 | 건국훈장 애국장,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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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광복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의 경찰공무원.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수여.2. 생애
1922년 9월 5일 평안남도 평원군(平原郡) 동송면(東松面) 청암리(靑岩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平山) 이다. 평안북도 정주군(定州郡)의 오산학교(五山學校)에서 수학하였고, 이후 중국으로 이주하여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의 일본상업학교(日本商業學校)를 졸업하였다. 이 시기에 생업을 위해 일본인 거류민회(居留民會)의 사무원으로 일하였고, 이후 난징(南京)의 일본영사관 고등과(高等課) 직원으로도 근무하였다.3. 독립운동
일제 치하 난징의 국립중앙대학(國立中央大學) 재학 중, 중국 국민당 특파원 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특파공작원 김병호(金炳豪)[1]와 접선하여 같은 한국인 재학생 송지영(宋志英)·이일범(李一凡)·조일문(趙一文) 등과 함께 한족동맹(韓族同盟)을 결성하였다.이를 통해 한인 학생들을 규합하는 한편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귀순하고자 하는 한국인들을 탈출시키고, 관내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였다. 김병호와 중국인 동창으로 임시정부의 협력자였던 쑤징허(蘇景和)의 인솔에 따라 산시성(陝西省) 시안(西安) 소재 한국광복군 제 2지대(支隊)를 방문하여 제 2지대장 이범석(李範奭)에게 난징 내 지하공작 상황을 보고하고, 난징지구 특파원증을 받아 임시정부의 비밀 임무를 난징의 한인 학생들에게 전달하였다.
이 대학은 일제의 난익(卵翼)하에 세워진 왕징웨이(汪精衛) 정권의 「난징 중앙대학(南京 中央大學)」이다. 옛날의 진링대학(金陵大學), 지금의 난징대학 자리에 터 잡았으며, 5개 단과대학, 30개의 학과에 5000~6000명의 학생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중 한국 학생은 10여 명, 대부분은 법상대학에 제적하고 있었다. 그 중 나를 무척 따르고, 나의 지하공작에도 적극 협조하던 신영묵 군에게 딱한 사정이 생겼다. 그가 수 차 집으로 돌아오라는 연락을 받았는데, 그것은 면소(面所)에서 그를 일본 군대로 끌어가기 위해서였다. 나는 이모저모를 생각하다가 결국 쑤징허를 불러냈다.
"징허, 자네 한국국적 학생 신영묵(申榮黙)군 알지?"
"알구 말구요. 그 미남 운동선수 말이죠?"
"그래, 그 친구 신변에 곤란한 일이 생겨서 여기를 떠냐야 하게 되었네"
"그래서요?"
"사실은 내가 신군을 시안(西安)의 한국 광복군 부대에 보낼 생각이네. 그런데 누가 안내해 줄 사람이 있어야지. 자네도 알다시피 그는 훤칠한 키에 어디 내놔도 영락없는 한국 청년이 아닌가? 게다가 중국어도 능숙치 못하니. 중국 옷을 입히고 중국인 신분증을 만들어 주어도 금방 들통이 날 것이 아닌가?"
"라오짜오, 그게 무슨 걱정이요?" 내가 데리고 가면 되잖아요."
그는 3개월 만에 난징(南京)-시안(西安) 6000리 길을 거뜬히 다녀왔다. 둘이 마주 앉자.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 갑을 꺼내더니, 그 중 한 대를 뽑아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담배 개비가 아니라.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광복군 총사령부 이청천 명의로 된 「광복군 특파원증」및 「공작지령서」였다. 나는 그 내용을 정독한 다음, 담배 연기와 함께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징허, 자네 발 아프지 않나?"
그는 한 참 머뭇거리더니 "따거(大哥)! 괜찮아요.(没有問題)" 하는 것이었다. 그의 나에 대한 호칭이 「라오짜오(조형)」로부터 "따거(형님)"로 바뀐 것이 놀라왔다. 이제 우리는 피차 「이방인」이 아니라 「한 집안 식구」가 되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 후부터 그는 나를 줄 곧 "따거"로 불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억지로 그의 양말을 벗겼다. 몇 번 물집이 터지고 다시 아물어 붙은 상처투성이의 발이었다. 그 발로 그는 또 한 차례 난징 -시안을 오로 갔다. 내가 보내는 사람들을 데리고 또 내가 보내는 편지를 가슴에 깊이 품고
"징허, 자네 한국국적 학생 신영묵(申榮黙)군 알지?"
"알구 말구요. 그 미남 운동선수 말이죠?"
"그래, 그 친구 신변에 곤란한 일이 생겨서 여기를 떠냐야 하게 되었네"
"그래서요?"
"사실은 내가 신군을 시안(西安)의 한국 광복군 부대에 보낼 생각이네. 그런데 누가 안내해 줄 사람이 있어야지. 자네도 알다시피 그는 훤칠한 키에 어디 내놔도 영락없는 한국 청년이 아닌가? 게다가 중국어도 능숙치 못하니. 중국 옷을 입히고 중국인 신분증을 만들어 주어도 금방 들통이 날 것이 아닌가?"
"라오짜오, 그게 무슨 걱정이요?" 내가 데리고 가면 되잖아요."
그는 3개월 만에 난징(南京)-시안(西安) 6000리 길을 거뜬히 다녀왔다. 둘이 마주 앉자. 그는 주머니에서 담배 갑을 꺼내더니, 그 중 한 대를 뽑아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담배 개비가 아니라. 임시정부 주석 김구와 광복군 총사령부 이청천 명의로 된 「광복군 특파원증」및 「공작지령서」였다. 나는 그 내용을 정독한 다음, 담배 연기와 함께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징허, 자네 발 아프지 않나?"
그는 한 참 머뭇거리더니 "따거(大哥)! 괜찮아요.(没有問題)" 하는 것이었다. 그의 나에 대한 호칭이 「라오짜오(조형)」로부터 "따거(형님)"로 바뀐 것이 놀라왔다. 이제 우리는 피차 「이방인」이 아니라 「한 집안 식구」가 되었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 후부터 그는 나를 줄 곧 "따거"로 불렀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억지로 그의 양말을 벗겼다. 몇 번 물집이 터지고 다시 아물어 붙은 상처투성이의 발이었다. 그 발로 그는 또 한 차례 난징 -시안을 오로 갔다. 내가 보내는 사람들을 데리고 또 내가 보내는 편지를 가슴에 깊이 품고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1구대(區隊)의 2분대 소속으로 적 후방에서의 심리전·선전전과 동지 초모(招募) 임무에 종사하던 중 임시정부와 미국 전략첩보국(OSS) 사이의 공동작전계획이 확립되고, 1945년 4월 3일 임시정부의 김구(金九) 주석과 전략첩보국의 클라이드 사전트(Clyde B.Sargent) 대위가 한반도 탈환에 앞서 한인 요원을 국내에 잠입시키는 독수리 작전(Eagle Project)의 실행을 추진하자 다른 제 2지대원과 함께 요원 양성을 위한 훈련에 참가하였다. 이때 잠입과 사보타주를 위한 유격·폭파훈련과 암호통신 교육을 마치고 독수리 요원에 최종 선발되었다.
1945년 7월에는 송면수(宋冕秀), 민영완(閔泳琬)과 함께 국민혁명군 제 9전구에 파견되어 장차 국내진공작전 실행을 위한 동지 모집과 함께, 심리전·선전전과 무선통신 연락 업무를 주관하던 중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면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일제 패망 이후 난징에 설치된 한국광복군 잠편지대(暫編支隊) 소속으로 지대장 안춘생(安椿生) 휘하의 참모로 지달수, 문응국과 함께 복무하였고, 국민혁명군을 도와 중국 내 일본군의 무장해제 작업 및 관할 내 치안 유지, 한국인들의 신변 보호, 귀국 절차 원호를 담당하다가 1946년 중국 정세가 악화됨에 따라 국내로 귀환하였다.
4. 해방 이후
귀국 이후, 서울에 거주하며 대한민국 내무부 치안국에 입직하여 1951년 치안국 교육과 경감(警監)으로 복무하였으며, 이후 1955년 외자청(外資廳)에 입직하여 구매처(購買處)에서 사무관·비서관 직위로 근무하여 경제 관료로 활약하였고, 외자청 퇴직 이후 삼척실업주식회사(三拓實業株式會社) 이사,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 중앙상임위원, 대한염업주식회사(大韓鹽業株式會社)[2] 감사 및 상임이사, 광복군동지회 상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1979년 10월6일 오후 5시 30분, 낚시 중에 한강변에서 익사한다. 향년 58세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5. 참고자료
독립유공자 공훈록최종 거주지 : 서울 강남구 잠실동 주공아파트 362동 509호
한국독립사(김승학) 하권 179·318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6권 407·442·443·545·612면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9권 857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