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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4 11:33:07

우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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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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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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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L 챔피언 결정전 우승 반지
2007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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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3점슛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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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f2023,#ddd
<rowcolor=#fff> 1997 시즌 1997-98 시즌 1998-99 시즌 1999-2000 시즌 2000-01 시즌
정인교
나래 / 4.3개
문경은
삼성 / 3.8개
문경은
삼성 / 3.3개
조성원
현대 / 3개
조성원
LG / 3.8개
<rowcolor=#fff> 2001-02 시즌 2002-03 시즌 2003-04 시즌 2004-05 시즌 2005-06 시즌
양경민
삼보 / 3.4개
문경은
빅스 / 3.5개
우지원, 문경은
모비스, 전자랜드 / 3.6개
문경은
전자랜드 / 3.2개
문경은, 양경민
SK, 동부 / 3개
<rowcolor=#fff> 2006-07 시즌 2007-08 시즌 2008-09 시즌 2009-10 시즌 2010-11 시즌
방성윤, 찰스 민렌드
SK, LG / 2.7개
방성윤
SK / 3.4개
마퀸 챈들러
KT&G / 2.3개
조상현
LG / 1.9개
김효범
SK / 2개
<rowcolor=#fff> 2011-12 시즌 2012-13 시즌 2013-14 시즌 2014-15 시즌 2015-16 시즌
김효범
SK / 2.1개
김영환
LG / 2개
변기훈
SK / 2.2개
허일영, 리오 라이온스
오리온스 / 1.8개
마리오 리틀
KGC / 2.3개
<rowcolor=#fff> 2016-17 시즌 2017-18 시즌 2018-19 시즌 2019-20 시즌 2020-21 시즌
테리코 화이트
SK / 2.9개
두경민
DB / 2.7개
마커스 포스터
DB / 2.7개
이대성
KCC / 2.4개
전성현
KGC / 2.6개
<rowcolor=#fff> 2021-22 시즌 2022-23 시즌 2023-24 시즌 2024-25 시즌 2025-26 시즌
전성현
KGC / 3.3개
전성현
캐롯 / 3.4개
이정현
소노 / 2.9개
<rowcolor=#fff> 2026-27 시즌 2027-28 시즌 2028-29 시즌 2029-30 시즌 2030-31 시즌
}}}}}}}}}}}} ||

{{{#!wiki style="margin: -5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1658><tablebgcolor=#001658> 파일:한국농구연맹 로고 화이트.svgKBL
역대 자유투 1위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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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f2023,#ddd
<rowcolor=#fff> 1997 시즌 1997-98 시즌 1998-99 시즌 1999-2000 시즌 2000-01 시즌
정재근
SBS / 87.1%
김상식
나산 / 90.5%
김영만
기아 / 87.1%
추승균
현대 / 91.1%
조성원
LG / 85.4%
<rowcolor=#fff> 2001-02 시즌 2002-03 시즌 2003-04 시즌 2004-05 시즌 2005-06 시즌
추승균
KCC / 87%
문경은
빅스 / 89.1%
추승균
KCC / 89.5%
우지원, 추승균
모비스, KCC / 90%
추승균
KCC / 87.3%
<rowcolor=#fff> 2006-07 시즌 2007-08 시즌 2008-09 시즌 2009-10 시즌 2010-11 시즌
김승현
오리온스 / 88.4%
추승균
KCC / 90.2%
문경은
SK / 94.6%
마퀸 챈들러
동부 / 89%
조성민
kt / 91.2%
<rowcolor=#fff> 2011-12 시즌 2012-13 시즌 2013-14 시즌 2014-15 시즌 2015-16 시즌
조성민
kt / 92.3%
조성민
kt / 91.9%
조성민
kt / 89.9%
이재도
kt / 89.5%
허웅
동부 / 88.5%
<rowcolor=#fff> 2016-17 시즌 2017-18 시즌 2018-19 시즌 2019-20 시즌 2020-21 시즌
정영삼
전자랜드 / 85.8%
레이션 테리
현대모비스 / 84.3%
이관희
삼성 / 82%
김시래
LG / 89.1%
닉 미네라스
SK / 83.4%
<rowcolor=#fff> 2021-22 시즌 2022-23 시즌 2023-24 시즌 2024-25 시즌 2025-26 시즌
이관희
LG / 85.9%
이대성
한국가스공사 / 86.8%
최성원
정관장 / 89.1%
<rowcolor=#fff> 2026-27 시즌 2027-28 시즌 2028-29 시즌 2029-30 시즌 2030-31 시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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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식스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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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f2023,#ddd
<rowcolor=#fff> 1997 시즌 1997-98 시즌 1998-99 시즌 1999-2000 시즌 2000-01 시즌
김유택
기아 / 센터
김용식
나산 / 가드
신종석
나래 / 포워드
황문용
기아 / 포워드
강혁
삼성 / 가드
<rowcolor=#fff> 2001-02 시즌 2002-03 시즌 2003-04 시즌 2004-05 시즌 2005-06 시즌
정재근
KCC / 포워드
박규현
LG / 가드
표명일
KCC / 가드
이병석
모비스 / 포워드
이창수
모비스 / 센터
<rowcolor=#fff> 2006-07 시즌 2007-08 시즌 2008-09 시즌 2009-10 시즌 2010-11 시즌
우지원
모비스 / 포워드
김일두
KT&G / 포워드
함지훈
모비스 / 포워드
박종천
모비스 / 포워드
이현호
전자랜드 / 포워드
<rowcolor=#fff> 2011-12 시즌 2012-13 시즌[a] 2013-14 시즌 2014-15 시즌 2015-16 시즌
이정현
KGC / 가드
변기훈
SK / 가드
주희정
SK / 가드
유병훈
LG / 가드
신명호
KCC / 가드
<rowcolor=#fff> 2016-17 시즌 2017-18 시즌 2018-19 시즌 2019-20 시즌 2020-21 시즌
정병국
전자랜드 / 가드
김주성
DB / 포워드
김낙현
전자랜드 / 가드
최성원
SK / 가드
장재석
현대모비스 / 센터
<rowcolor=#fff> 2021-22 시즌 2022-23 시즌 2023-24 시즌 2024-25 시즌 2025-26 시즌
전현우
한국가스공사 / 포워드
박지훈
KGC / 가드
박인웅
DB / 가드
<rowcolor=#fff> 2026-27 시즌 2027-28 시즌 2028-29 시즌 2029-30 시즌 2030-31 시즌
[a] 2012-13 시즌부터 기존의 '우수후보 선수상' 대신 '식스맨상'으로 시상.
}}}}}}}}}}}} ||

{{{#!wiki style="margin: -5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001658><tablebgcolor=#001658> 파일:한국농구연맹 로고 화이트.svgKBL 2005~2010
월간 MVP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f2023,#ddd
<rowcolor=#fff> 11월 12월 1월 2월 3월
2005-2006 시즌
크리스 윌리엄스
모비스
방성윤
SK
나이젤 딕슨
KTF
김승현
오리온스
이병석
모비스
2006-2007 시즌
강혁
삼성
우지원
모비스
양동근
모비스
조상현
LG
피트 마이클
오리온스
2007-2008 시즌
표명일
동부
주희정
KT&G
강혁
삼성
김주성
동부
추승균
KCC
2008-2009 시즌
주희정
KT&G
이규섭
삼성
추승균
KCC
서장훈
전자랜드
하승진
KCC
2009-2010 시즌
함지훈
모비스
전태풍
KCC
하승진
KCC
조성민
kt
}}}}}}}}}}}} ||

}}} ||
우지원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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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 align=center><table width=100%><tablebordercolor=#ff7518><tablebgcolor=#ff7518> 파일: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영문 엠블럼.svg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
역대 주장
(대우-신세기-SK빅스 시절 포함)
}}} ||
{{{#!wiki style="color: #ffffff; 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or: #555555"
{{{#20272c,#d3dade
초대 2대 3대 4대 5대
김성헌
(1997)
조성훈
(1997~1998)
정재헌
(1998)
조현일
(1998~1999)
우지원
(1999~2001)
6대 7대 8대 9대 10대
문경은
(2001~2003)
홍사붕
(2003)
문경은
(2003~2006)
최명도
(2006)
김태진
(2006~2008)
11대 12대 13대 14대 15대
윤영필
(2008~2010)
신기성
(2010~2012)
강혁
(2012~2013)
이현호
(2013~2014)
포웰
(2014~2015)
16대 17대 이후 구단 역사
주태수
(2015~2016)
정영삼
(2016~2021)
한국가스공사 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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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e20e0e><tablebgcolor=#e20e0e> 파일: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엠블럼.svg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역대 주장
}}} ||
{{{#!wiki style="margin: 0 -10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20272c,#d3dade
<rowcolor=#ffffff> 초대 2대 3대 4대 5대
이창수
(2004~2007)
우지원
(2007~2010)
김동우
(2010~2012)
양동근
(2012~2020)
함지훈
(2020~2024)
<rowcolor=#ffffff> 6대 파일: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워드마크.svg
장재석
(2024~)
}}}}}}}}}}}}}}} ||
우지원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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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우지원모비스.jpg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영구 결번
No. 10 우지원

{{{#!wiki style="margin: -10px -10px"<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001658> 파일:한국농구연맹 로고 화이트.svg한국프로농구
영구 결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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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안양 정관장 레드부스터스 엠블럼.svg파일:안양 정관장 레드부스터스 엠블럼 흑색배경.svg 파일:서울 SK 나이츠 엠블럼.svg 파일:창원 LG 세이커스 엠블럼.svg파일:창원 LG 세이커스 엠블럼(유색배경).svg 파일: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엠블럼.svg 파일:고양 소노 스카이거너스 엠블럼.svg
양희종
11
문경은
10

전희철
13
- 양동근
6

우지원
10

김유택
14
-
파일:부산 KCC 이지스 엠블럼.svg 파일:원주 DB 프로미 엠블럼(녹색).svg 파일:수원 kt 소닉붐 엠블럼.svg파일:수원 kt 소닉붐 엠블럼(유색배경).svg 파일:대구 한국가스공사 페가수스 엠블럼.svg 파일:서울 삼성 썬더스 엠블럼.svg파일:서울 삼성 썬더스 엠블럼(유색배경).svg
추승균
4

이상민
11
허재
9

김주성
32
- - 김현준
10
미승계 결번
파일:고양 오리온 오리온스 엠블럼.svg
김병철
10
}}}}}}}}}}}} ||

}}} ||
우지원의 역대 등번호
{{{#!folding [ 펼치기 · 접기 ]
{{{#000000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인천 신세기 빅스]] 등번호 10번}}}
창단 우지원
(1997~2001)
문경은
(2001~2006)
{{{#ffcc33 [[서울 삼성 썬더스|서울 삼성 썬더스]] 등번호 23번}}}
브라이언 힐
(1999)
우지원
(2001~2002)
박영민
(2002~2003)
울산 모비스 피버스 등번호 10번
딜론 터너
(2001~2002)
우지원
(2002~2010)
영구 결번
}}} ||
}}} ||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No. 10
ULSAN HYUNDAI MOBIS PHOEBUS
파일:우지원프로필.jpg
우지원
禹智元
<colbgcolor=#e20e0e> 출생 1973년 4월 2일 ([age(1973-04-02)]세)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본관 단양 우씨 (丹陽 禹氏)
학력 서울개원초등학교 (졸업)
삼선중학교 (졸업)
경복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 / 학사)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체육교육학 / 석사[1])
신체 신장 191cm|체중 85kg|혈액형 A형
부모 아버지, 어머니
형제 여동생
자녀 장녀 우서윤(2003년생), 차녀 우나윤(2008년 12월 16일생) [2]
포지션 스몰 포워드
실업 입단 1996년 대우증권 농구단
현역 시절 등번호 10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 / 영구 결번), 23[3]
소속 구단 대우증권 농구단 (1996~1997)
인천 대우증권 제우스-신세기 빅스 (1997~2001)
서울 삼성 썬더스 (2001~2002)
울산 모비스 피버스 (2002~2010)
해설 위원 SBS ESPN (2010~2013)
SBS Sports (2014~2016)
SBS (2014)
소속사 스타티드엔터테인먼트
링크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1. 개요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2.2. 프로 초기2.3. 모비스 시절
3. 플레이 스타일4. 해설 위원 경력5. 가족 관계6. 논란 및 사건 사고7. 여담 및 방송 활동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농구 선수.

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초등학교 4학년때 학교에 농구부가 생기면서, 농구선수를 시작했다. 초등학교 5학년때, 자전거를 타다 교통사고를 당했다. 농구를 시작한지 3개월만의 일이다. 오른 팔의 부상으로 팔이 휘어져서 장애 진단을 받았다. 이 때문에 슛 폼이 보통 선수들과 좀 다르다. 삼선중학교와 경복고등학교에서 농구부 선수였다. 두 학교는 농구 명문이다. 중학교 때 슛 연습을 하루 1000개 이상씩 했다고 한다. 이충희 선수가 슛을 1000개 연습했다는 기사를 보고, 본받아서 따라한 것이라고 한다. 중학교&고등학교에서 6년간 함께 했던 동기가 전희철 선수다. 경복고등학교 시절에 동갑내기 동료인 전희철과 함께 경복고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두 선수는 경복고 2학년때 청소년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다. 대학 진학 과정에서 전희철과 진로가 갈리게 되었지만(우지원은 연세대, 전희철은 고려대) 대학 때도 그렇고 지금도 두 사람은 친한 친구다.
경복고 3학년때 연세대 스카우트 되어, 예비 소속으로 경기를 뛰었다. 데뷔 전에서 스타 선수 김유택을 홀로 막아내고 15득점 5리바운드라는 좋은 기록을 남기며 주목받았다.
연세대학교에 진학했는데, 재밌게도 그의 전공은 법학[4]. 이것은 체육 관련 학과 T/O 문제로 나머지 학과들에 체육특기생을 배정하였기 때문[5]. 물론 실제 수업을 들은 적은 거의 없다고 한다.[6]
파일:external/dimg.donga.com/71756803.3.jpg
당대 최강이라 평가받던 연대 농구팀. 우측에서 2번째가 우지원이다.

1학년때 농구대잔치 1992-93시즌에서 신인상을 받았다.
2학년때 농구대잔치에서 최희암 감독 지도 아래 연세대가 대학 팀 사상 최초로 우승을 차지할 때, 주역으로 활약했던 선수다. (1993-94 시즌 연세대: 정규리그 14전 전승, 플레이오프를 포함해 20연승) 외곽에서 문경은과 함께 팀의 쌍포로 대활약했고, 문경은이 졸업한 후에는 동기인 김훈과 함께 팀의 쌍포로 군림하며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잘생긴 외모로 이 때부터 이미 팬들을 쓸어모으고 다녔다.

다만, 이 최희암과 함께 한 세월은 우지원에게 그렇게까지 도움이 된 것은 아니었다. 최희암은 철저한 분업 농구를 추구하는 감독이었고, 선수들이 다양한 기술을 연마해서 상대와 맞서기보다는 한 가지 우물을 파고 이를 조직력이라는 이름으로 조합하는 타입이었다. 이 때문에 이상민은 패스하는 기계가 되었고, 우지원은 슛하는 기계가 되었다. 3학년 때 농구대잔치 정규리그 전승을 이끌 당시 50%에 육박하는 경이적인 3점슛 성공률을 보였지만 그 반대급부로 '반쪽짜리 슈터'라는 까임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이상민도 졸업하고 서장훈도 유학을 가면서 주요 핵심들의 이탈로 전력이 크게 약해진 1995-96 시즌에는 주장으로서 후배 선수들을 잘 이끌었다. 골밑 플레이, 몸싸움, 리바운드를 마다하지 않으며 전천후로 활약했고, 연세대는 그해 농구대잔치에서도 우승팀인 기아자동차를 잡아내고 정규리그 전승팀 고려대를 상대로는 연장 접전을 이끌어내며 8승 5패라는 기대 이상의 성적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플레이오프에서도 선전해 준결승전까지 진출했다.
1991-92 시즌 (입학 전 예비소속) 등번호 21이었고, 1992-93 시즌 (1학년)에는 등번호 8이었다. 1993-94 시즌부터는 등번호 10번이다.

1995년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5년간 국가대표 선수로 뛰었다. (1997 아시아선수권 대회 우승, 1999 아시아선수권 대회 준우승)

어쨌거나 우지원은 대학 시절 슈퍼스타로 이름을 날렸고, 연세대학교 출신 선수들을 주축으로 창단한 대우증권 농구단에 지명되어 동기인 김훈, 석주일과 함께 입단하게 되었다.

2.2. 프로 초기

프로 초기 시절의 우지원은 사실 저평가받는 선수 중 하나다. 돌파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한계가 명확하다는 단점이 있었다. 확실히 우지원은 외곽에서 정말 슛만 던지는 기계였다. 거기다 소속팀인 대우증권/신세기통신이 6강 PO에는 어찌어찌 올라가도 4강 이상은 못 가거나, 아예 바닥을 치던 비인기 팀으로 전락한 것도 컸다. 이미 프로농구의 대세는 -- 라인의 현대로 넘어갔고, 우지원은 프로농구의 주역으로 활약하지는 못했다.
파일:external/sports.chosun.com/a4t74105_2.jpg 파일:external/sports.chosun.com/a4t74105_3.jpg
인천 대우증권 제우스 시절 인천 신세기 빅스 시절

그래도 외곽에서 슛쏘는 기계라고 하지만, 기계가 열심히 작동해서 슛을 제대로 꽂아넣는데 다른 비평은 필요 없었다. 적어도 슛 하나는 기가 막히게 집어넣었고, 인천 대우 시절에 평균 두 자리 수 득점은 기본으로 넣었다. 위의 기록을 보면 알겠지만, 결코 못하는 선수가 아니다. 팀의 주포로서 매번 자기의 역할은 항상 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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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삼성 썬더스 시절

그런데 저평가받게 된 것은 본의 아니게 저니맨이 돼버린 탓이 컸다. 김동광 감독과 팀 비중을 놓고 갈등이 있던 문경은서울 삼성 썬더스가 전격적으로 인천 신세기통신으로 보내면서 대신 우지원을 받아온 것. 그런데 이 트레이드는 결과적으로 삼성의 실패작이었다. 문경은은 신세기통신을 6강 PO에 올려놓았지만, 우지원이 가세한 삼성은 전년도 우승팀에서 6강 PO에 실패한 팀으로 전락한 것. 그리고 그 책임은 우지원이 다 뒤집어썼다. 성적만 놓고 보면 사실 평균 14.9점으로 못한 것은 아니지만, 희생양은 우지원이 되었다.

결국 한 시즌 만에 서장훈이 삼성으로 이적하는 과정에서 보상 선수로 서울 SK 나이츠에 지명되었고, 지명 당일 중앙대 및 기아자동차의 색채 빼기에 전념하던 대학 시절의 은사 최희암 감독이 이끄는 모비스로 김영만과 맞트레이드되었다. 그러나 우지원이 서장훈의 보상선수였다는 사실은 훗날 이상민이 서장훈의 보상선수로 삼성으로 이적한 사실에 비해 그다지 아는 농구 팬들이 많지 않다.

2.3. 모비스 시절

모비스 입단 후에는 최희암 감독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팀의 주포로 활약했다. 2002-03 시즌 평균 15점, 2003-04 시즌 평균 20득점을 기록하면서[7] 실력은 분명 확실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하지만, 다소 약한 수비력, 여전히 외곽슛 외에는 돌파력이 없다고 까였고, 그렇지 않아도 기아자동차의 색채를 파탄 낸 모비스의 새 주역이 된 탓에 경기 외적으로도 더 까였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가 주역이 된 시즌은 모비스의 최악의 암흑기 중의 암흑기. 이대로 가면 우지원은 한 때 좀 잘했지만 결국 자기만 잘 하다가 끝난 농구 선수로 남을 뻔 했다. 더군다나 우지원도 나이를 들기 시작했고, 부상이 왔다. 2004-05 시즌 급격하게 떨어진 평균 득점은 비록 두 자리 수는 넘겼다고 하지만 겨우 10점대 초반이었다.

이때 우지원은 자신의 스타일을 철저히 바꿨다. 과거 코트의 귀공자, 황태자로 불렸던 슛 위주의 자기 중심의 플레이에서 철저한 팀 플레이어로 변신한 것.[8] 팀의 중심도 후배인 양동근에게 넘어간 것을 인정했고, 식스 맨으로 뛰면서 벤치에서 후배들을 독려하고, 승부처에서 특유의 슛을 터뜨리는 제한적인 역할로 만족했다. 리바운드도 더 적극적으로 덤벼들고, 수비도 악착같이 덤비는 마당쇠로의 변신이었다. 달라진 우지원의 스타일은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 역시 데이비드 베컴과 겹치는 이미지. 베컴 또한 귀공자스타일의 외모와는 달리 블루워커 타입의 선수이고 상당히 터프한 플레이스타일을 보였다.

양동근, 함지훈과 같은 좋은 후배들도 들어오면서 우지원은 선수 생활 내내 인연을 맺지 못하던 프로농구 정상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2006년 12월에 월간 MVP 수상했다. 그가 식스맨 상을 수상한 2006-07 시즌 마침내 첫 우승 반지를 손에 쥐었다.[9][10] 그 이후에도 꾸준히 식스맨으로 활약했다. 점차 나이가 들면서 식스맨으로도 활약상이 줄어 들었지만, 벤치에서 팀의 고참으로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은 아직 우지원의 몫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2009-10 시즌에 다시 우승 반지를 차지했다. 그 해를 끝으로 명예롭게 은퇴하며, 2010년 10월 15일 은퇴식을 했다.

기아자동차의 색깔이 완전히 사라진[11] 모비스 입장에서는 팀의 새로운 상징이 필요했고, 한 때 팀의 주포이기도 했으며, 팀을 위해 헌신한 우지원은 그런 새로운 상징에 가장 적격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2010-11 시즌 개막전에 우지원은 팀의 두 번째 영구 결번(10번)의 영광을 안았다. 동년배의 농구대잔치 선수 중에서 가장 명예로운 은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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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플레이 스타일

외모가 덜 잘생겼다면 평가가 더 나았을 수도 있는 선수이긴 하지만, 실력에 대한 평가는 많이 갈린다. 슛만 쏠 줄 아는 국내용이라는 비아냥도 있었고, 실제로 국제 대회에서는 별 활약이 없다.[12] 키가 작은 편은[13] 절대 아님에도 몸싸움이나 점프력이 좋은 편이 아닌데다 드리블이나 패싱 능력도 그렇게 뛰어난 편은 아니었다.[14] 젊은 시절에는 이쁘게만 농구하려고 든다는 비판도 받았고, 전성기에는 팀 성적이 좋지 않았던 것도 사실. 결론은 스팟업 3점 빼고는 그다지 거론할 것이 없다.

원래 포지션은 센터였지만, 더이상 키가 크지 않아서 센터로서는 힘들겠다는 얘기를 듣자 그 이후부터 열손가락의 지문이 다 닳아서 없어질 정도로 엄청난 슈팅 연습을 했다고 한다. 겉보기에는 곱상한 이미지지만 안 보이는 곳에서의 노력과 근성은 대단했던 듯 하다. 공교롭게도 만화 슬램덩크신준섭과 비슷한 일화다.

특히 어릴 때 교통사고로 팔을 다친 후유증으로 인해 슛 궤적이 정상적이지 않은데도 외곽슈터로서 활약했다는 것에서 정말 남보다 더 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15] 우지원의 슛은 포물선을 그리기보다는 직선으로 날아가 림에 꽂히는데, 이런 독특한 궤적을 만들기 위해 우지원 자신은 정말 부단히 노력하고 연습했다고 한다.

또한 우지원의 자기 관리는 철저해서 프로에 들어와서 그가 결장한 경기는 커리어 마지막이었던 2009-10 시즌(16경기 출전)을 빼면 31경기에 지나지 않는다. 부상 없이 자기 관리에 임하고, 연습하고 노력한 결과 한국을 대표하는 외곽 슈터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기량은 굉장히 저평가 되어있다. 농구대잔치 시절에도 득점랭킹 4위에 기록될 만큼 훌륭한 득점력을 선보였고 프로에 온 이후에도 꾸준히 10점대 중후반을 기록하던 괜찮은 토종 옵션이었다. 이런 득점력은 단순히 3점 슛만 쏘는 반쪽짜리 포워드가 기록할 수 없다. 우지원은 전성기 시절 경기당 3개정도의 3점 슛을 기록했다. 나머지는 돌파와 점퍼로 기록한 득점이다.[16] 또한 수비가 약하다고 하지만 추승균, 양경민, 김영만 같은 극강 수비수들에게 밀렸을 뿐이지 그 세명 말고 다른 선수는 그럭저럭 막긴 하였었다. 선수 말년에는 마당쇠처럼 뛰어다니기도 하였고... 적어도 열심히 수비를 하는 선수이긴 하였었다.

당대 문경은을 비롯해 김영만, 추승균 같은 레전드급에 밀렸을 뿐이지 충분히 훌륭한 선수였고, 결국엔 늘 자신을 잡아먹던 김영만보다 더 길게 가고 기록도 더 우수해졌다.

식스맨 시절인 2008-09 시즌에 우지원은 3점슛 성공률이 51.5%라는 엽기적인 기록을 남긴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적어도 슛 하나는 기가 막힌 선수였다. 그리고 2009-10시즌 은퇴 후에 2012년 은퇴 선수 올스타 경기에서 늘어난 3점슛 길이에서[17] 아무렇지도 않게 3점슛을 미친듯이 꽂아넣는 모습을 보면서, 우지원이 새삼 대단했다고 느끼는 팬들이 많다. 우지원의 경우 다른 슈터들에 비해서 슛할 기회를 잡기 위한 움직임은 떨어질 지 몰라도 프리한 상황에서의 3점 슛 능력은 어떤 선수와 비교해도 꿀리지 않았다. 2000년대 후반 들어 등장한 젊은 선수들의 환장하는 슛 성공률을 보면서 더더욱 그런 감정을 느끼는 듯하다.

4. 해설 위원 경력

은퇴 이후 SBS Sports에서 해설을 시작했는데, 해설자로서는 평가가 영 좋지 못하다. 밋밋하고 재미없는 해설은 그렇다 치더라도,[18] 농구인임에도 불구하고 규칙을 잘못 설명하는 경우가 많고 심한 때는 그냥 어물쩍 넘어가기도 한다. 농구계의 양준혁에 비견되기도 할 정도다. 그리고 발음도 좋지 않고, 더 심한 것은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지 알 수가 없을 정도이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정리를 안 하고 그냥 막 입 밖으로 내뱉는 듯하며, 계속 듣다 보면 말하는 문장이 끊어지지 않고 횡설수설해서 듣는 이가 혼란스러울 정도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 '아...저 그 어떤 말이죠... 그...김선형 선수의 그...알토란 같은 돌파에 이은 득점이 나왔어요.' 오히려 안 좋은 평을 받던 해설 초보자인 현주엽이 점차 괜찮아지는 것에 비하면 정말 말 솜씨가 안 늘고 있다.[19]

참고로 공격 리바운드를 "세컨드 리바운드(Second Rebound)"라고 부르는 특징이 있는데, 해당 용어는 한국 농구계에서만 쓰는 콩글리시다.

5. 가족 관계

잘생긴 외모에도 스캔들 전혀 없이 굉장히 모범적인 선수 생활을 했다. 후에도 스타부부쇼 자기야나 딸과 함께 스타주니어쇼 붕어빵에 나와서 좋은 가장의 모습을 보이는 등. 지금은 SBS Sports에서 해설위원을 맡고 있으며 방송 출연도 하고 있지만 정식으로 방송을 할 생각은 없다고 한다. 농구의 저변 확대라는 차원에서 출연한다고.

배우자 이교영은 서울대 작곡과 출신이라는 기사가 있다. 졸업생 조회가 안 되는 것으로 봐서는, 입학은 했는지 모르겠으나 졸업은 못한 듯하다. 2002년에 결혼했고, 두 명의 딸을 낳았으나 2019년 우지원과 이혼했다.[20] 양육권은 본인이 큰딸을 전처는 막내딸을 각자 담당하고 있다고 하지만 딸과 사이는 원만하다고 한다.

딸바보이다. 유자식 상팔자에서 자신의 소원을 "3층 집을 짓고 두 딸 내외와 함께 사는 것"이라 밝힌 바 있다. 둥지탈출 시즌3에서는 두 딸과 농구 대결하는데 한 손만으로[21] 딸들을 봐주지 않겠다는 기세로 결국 슛을 넣었고 혀 내밀고 약올리기까지 했다. 또 그 아빠에 그 딸답게 딸도 큰 키와 엄청난 승부욕 소유자다운 모습을 보였다.# 또 여행 출발하기 앞서 집합 장소를 찾기 위해 인천공항을 돌아다녔는데 너무나도 걱정스러웠는지 몰래 뒤따라갔으며 집합 장소에 왔을 당시 먼저 모여있던 3명 모두 남자아이들이었던 탓에[22] 더 경계하는 전형적인 딸바보의 면모를 보였다.# 큰딸은 고교 졸업 후 미국 유학을 떠난 상태이며 어떻게든 영상통화를 이어가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6. 논란 및 사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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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여담 및 방송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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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석사 학위 논문 : 지도자의 리더쉽 유형이 신뢰와 선수만족에 미치는 영향(2009. 8).[2] 두 딸 모두 전처 소생[3] 서울 삼성 시절. 나중에 유튜브 방송에 출연해서 밝히길 23번을 선택한 건 마이클 조던 때문이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같이 출연한 신기성, 김승현은 '형이 무슨 조던이야'라면서 야유를 보내기도 했지만. 사실 삼성에서 10번은 김현준의 영구 결번이라서 달 수 없었다.[4] 동기 농구선수 김훈도 같은 전공이었다.[5] 여타 대학에서도 이런 일은 벌어진다. 고려대학교에 98학번으로 입학한 최희섭이나 성균관대학교 97학번으로 입학한 김병현의 전공도 법학과이다.[6] 여담으로 아직 마지막 승부세대가 유명세를 얻고 있던 2000년대 초반까지는 연세대 법학과에서 우지원이 법대 꼴찌, 김훈이 뒤에서 3등을 했는데 뒤에서 2등, 즉 우지원과 김훈 중간의 사람이 특기자가 아니라 일반 법대생이었었다는 카더라가 전설처럼 내려왔었다. 물론 진위는 미상.[7] 시즌 마지막 경기의 3점슛 몰아주기 추태 덕분에 평균 20득점을 넘겼다.[8] 이 시절 우지원은 마당쇠, 5분 대기조로 불렸다.[9] 경기가 종료된 후 유재학 감독에게 뛰어가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는데 유재학 감독도 첫 우승이었기에 같이 눈물을 흘렸다.[10] 유재학 감독은 우지원의 대학교 시절 코치였다.[11]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선수 중 마지막 기아맨이었던 하상윤이 2010 - 2011시즌까지 뛴 뒤 은퇴했다.[12] 애초에 국가대표로 뽑힌 적이 많지 않다.[13] 191cm였고 그 당시 상대 매치업보다 늘 2~3cm는 컸다. 단 두 양반들은 제외다.[14] 대학 시절 연세대의 분업 농구 때문에 돌파력이나 패싱력을 키울 기회를 잡지 못한 것도 사실이지만, 프로와서도 이게 고쳐지지는 않았다.[15] 수술 후유증으로 오른팔이 쭉 펴지지 않는다. 일반적인 슛 폼은 공을 잡은 오른팔을 똑바로 수직으로 한 상태로 공을 던지지만, 우지원의 경우는 오른팔을 살짝 비스듬하게 두고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밀어내는듯한 독특한 슛폼을 가지고 있다.[16] 3점슛 4개를 늘 쏜다해도 돌파와 점퍼가 없으면 자유투를 쏜다하더라도 12~14점만 넣는 것이다.[17] 그의 마지막 시즌인 2009-10시즌에 KBL에서도 변경된 FIBA 표준에 맞춰 3점슛 거리가 6.75m로 0.5m 늘어났다.[18] 이런 평가 때문인지 샤우팅을 하기도 하는데, 굉장히 작위적이란 티가 더 난다.[19] 사실 현주엽의 해설 초창기에 문제가 됐던 건 해설자임에도 불구하고 답답할 정도로 말을 안 하려고 하던 태도에 있었지 일단 말문이 트이면 (짧게나마) 괜찮았으며 경기보는 눈만큼은 이미 그 때부터 좋았다.[20] 이 소식은 상당한 시간이 지난 2024년에 알려졌다.[21] 큰딸이 패널티를 걸었다.[22] 둥지탈출 시즌3 4기 멤버들로 강찬희, 김경민(김봉곤 훈장의 아들), 유선호였으며 딸 우서윤은 유일한 여자일원인 홍일점이었다.[23] 여담이지만 당시 연대 농구부와 우지원의 인기는 1년 선배 이상민과 더불어 마지막 승부에 출연했던 장동건이나 손지창 등 당대 하이틴 스타들에 밀리지 않을 정도였다.[24] 런닝맨에서도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