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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1381년 또는 1382년 ~ 1459년
재위: 1389년~1442년(노르웨이 국왕),
1396년~1439년(스웨덴 국왕&덴마크 국왕),
1446년~1459년(포메른-슈톨프 공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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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포메른을 통치하던 그라이펜 가문의 덴마크 국왕, 노르웨이와 스웨덴 칼마르 동맹의 제2대 국왕, 포메른-슈톨프[1]의 공작.국가별로 왕호가 다르다. 덴마크에서는 에리크 7세(Erik 7.), 노르웨이에서는 에리크 3세(Erik III), 스웨덴에서는 에리크 13세(Erik XIII), 신성 로마 제국과 폴란드 왕국의 포메른 공작[2]으로서는 에리히 1세(Erich I. von Pommern)로 불린다. 그래서 보통은 '포메른의 에리크'라고 부른다.
2. 언어별 표기
덴마크어 | Erik 7. af Pommern |
노르웨이어 | Erik III av Pommern |
스웨덴어 | Erik XIII av Pommern |
핀란드어 | Eerik XIII Pommerilainen |
독일어 | Erich I. von Pommern |
폴란드어 | Eryk Pomorski |
3. 생애
포메른-슈톨프 공작 바르티슬라프 7세와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마리아의 아들로, 본명은 보기슬라프(Bogislaw)[3]였다. 외할머니 잉에보르가 덴마크 국왕 발데마르 4세의 딸이었던 덕분에 외종조할머니(외할머니의 여동생) 마르그레테 1세의 후계자가 되어 칼마르에서 대관식을 갖고 공동 통치자가 되었으나 마르그레테 1세가 죽을 때까지 실권은 없었다. 마르그레테 1세의 명령으로 잉글랜드 왕국 헨리 4세의 딸 필리파와 결혼했다.1412년 마르그레테 1세가 죽자 친정을 시작했으며 셸란 섬 끝자락 헬싱외르에 크론보르 성을 지어 바다 건너편 스코네의 헬싱보리와 함께 외레순 해협을 통제하려 했다. 이로 인해 등장한 개념이 외레순 통행세(Øresundstolden)[4]인데 1429년 도입된 외레순 통행세 덕분에 덴마크는 발트해 무역으로 막대한 수입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평소 덴마크 위주의 국정 운영에 불만을 품은 스웨덴에서 엥엘브렉트 엥엘브렉손(Engelbrekt Engelbrektsson 1390?~1436)의 주도로 봉기가 일어났고 결국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에서 차례로 폐위당했다.
4. 대중문화에서
작가 까다롭스키가 쓴 대한민국의 대체역사소설 <마지막 바이킹>에서 등장한다.2021년 상영된 덴마크 영화 '마르그레테:북방의 여왕(Margrete den Første)'의 주연 인물로 등장한다. 죽은줄 알았던 마르그레테 1세의 아들 올루프 2세가 살아 돌아오자 입지에 타격을 입고 전전긍긍하지만 올루프가 가짜임을 증명해 군주 기만죄로 사형을 선고하고 덴마크와 스웨덴 귀족들의 지지를 얻어낸다. 마르그레테 1세는 노르웨이 귀족들과 항의하며 가짜 올루프를 탈출시키려 하지만 튜튼 기사단이 스웨덴 침공을 계획중이고 잉글랜드 왕국과의 동맹 파기와 칼마르 연합 국가들의 분란을 조장하는 것이 목적이라는 것을 알게되자 개인적인 감정을 접고 가짜 올루프는 에리크의 뜻에 따라 화형에 처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