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 애버벤 참사 Aberfan Disaster | ||
<colbgcolor=#bc002d> 발생일 | 1966년 10월 21일 오전 9시 15분 사고일로부터 [dday(1966-10-20)]일 | |
발생 위치 | 영국 웨일스 애버밴 | |
유형 | 산사태/폭우/붕괴[1] | |
원인 | 채광으로 인한 폐기물 발생 및 폭우 | |
인명피해 | <colbgcolor=#bc002d><colcolor=#fff> 사망 | 144명 |
실종 | n명 | |
부상 | n명 | |
구조 | n명 | |
재산 피해 | n원 | |
소실 면적 | 초등학교, 중학교, 가옥 18채 소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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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6년 10월 21일 영국 웨일스 애버밴에서 발생한 참사.2. 사고 이전
2.1. 애버밴 마을
웨일스 지방은 19세기 산업 혁명 시기부터 석탄과 철광석 같은 귀중한 자원들 대량으로 채굴되면서 광업이 크게 발달한 지역이다.[2] 애버밴 지역은 웨일즈 남부 지역 산악 지대의 계곡 경사면 아래쪽에 위치한 마을로 탄광 사업이 발달하며 사건 당시에는 약 5000명의 인구가 거주하던 규모 있는 마을이었다.채광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마을 위쪽에 위치한 탄광 주변에서는 여러 종류의 폐기물들이 발생되기 시작했다. 1947년 영국 정부가 석탄 산업을 국유화한 이후 국내 석탄광의 개발은 국가석탄위원회(NCB)에서 관리 아래에서 이루어졌는데, NCB는 대량의 채광 폐기물들을 탄광 근처에 쌓아두기만 하고 별다른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이렇게 폐기물들이 쌓여가면서 탄광 인근에는 폐기물 더미가 만든 봉우리가 무려 7개까지 늘어났는데 이 봉우리들은 작게는 17m에서 크게는 50m가 넘어가는 엄청난 부피를 가지고 있었다.
탄광 지역은 석탄 찌꺼기 산으로 뒤덮여 풀 한 포기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수준까지 오염되었고, 이로 인해 인근 지역들은 '죽음의 땅'이라는 별명까지 생겨버리게 되었다.[3]
2.2. 전조
폐기물 봉우리들은 모두 마을 위쪽에 위치하여 만약 붕괴사고가 발생했을 때 인명피해를 야기할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봉우리의 규모가 불어나면서 크고 작은 산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는데, NCB는 이것들은 대부분 폐기물 더미의 표면이 살짝 흘러내린 것이지 대규모 붕괴로 이어질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그래도 대책이라고 봉우리 근처에 배수로를 설치하는 작업이 이루어졌으나 근본적인 해결 방법은 아니었다. 1944년 11월에 폐기물 더미의 일부가 무너지는 사고를 시작으로 1963년 5월에는 봉우리의 살짝 무너지고 11월에는 더 큰 규모의 사고가 발생하였다. NCB는 여전히 붕괴사고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 보고 배수로를 정비하는 수준의 대책만 실행하였다.7개의 폐기물 봉우리는 언제든 무너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특히 4, 5, 7번 봉우리 주변에는 개울이나 샘이 위치해 있어 구조적 안정성이 상당히 불안한 상황이었고, 애버밴 지역에 폭우가 내릴 때마다 폐기물 봉우리에서 발생된 오염된 물들이 마을로 흘러들어오자 주민들이 NCB측에 항의하고 나섰지만 NCB의 조치는 여전히 배수로를 정비하는 것 뿐이었다.
1966년 10월은 애버밴 지역에 집중 폭우가 내리던 시기였다. 10월 20일 밤 시간에 들어 폭우로 인해 7번 봉우리의 높이가 3m 가량 내려앉았는데, 다음 날인 21일 오전 7시 30분 광산으로 출근한 작업반 인원들은 봉우리의 상태가 심상찮음을 감지하고 광산 관리자를 호출하였다. 관리자 역시 봉우리의 상태가 이상함을 감지하고 우선 당일 작업을 정지하고 봉우리를 점검하고 위치를 이동시키는 조치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폭우로 인해 봉우리의 안정성이 크게 손상된 상황이었고, 1966년 10월 21일 오전 9시 15분. 7번 봉우리가 붕괴하면서 계곡 아래로 쏟아지는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2.3. 애버밴 참사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폐기물 더미는 산사태를 발생시키며 계곡을 따라 마을 쪽으로 쇄도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규모의 잔해들은 우선 2개의 농장과 오두막을 덮쳤는데 농장에 있던 거주자가 이 참사의 첫번째 희생자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후 잔해들이 계곡에 있던 수도 시설을 파괴하였는데, 이로 인해 대량의 물이 쏟아지며 산사태의 규모와 속도가 더욱 흉악해지기 시작하였다.산사태는 계곡 마을에 있던 Pantglas 초등학교와 중학교, 주변에 있던 가옥 18채를 파괴하고 나서야 힘을 잃고 잠잠해졌다. 당시 초등학교에는 방학을 하루 앞두고 등교한 학생과 교사들로 가득했었는데, 어린 아이들이 자리에 앉아 출석을 받는 와중에 산사태가 학교 건물 전체를 집어 삼키고 말았다. 사건 이후 집계된 사망자는 144명. 이들은 7세에서 10세 사이의 어린아이 116명과 28명의 성인들이었다.[4]
산사태가 발생시킨 엄청난 굉음은 천둥번개나 제트기의 소음에 비견될 수준이었다. 놀란 주민들이 길거리로 뛰쳐나왔을 때 마을 한 곳이 참혹한 사고 현장으로 변해있었고, 지역 경찰과 소방대가 도착하기도 전에 주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손과 도구를 이용해 잔해를 파내려가기 시작했다. 소식을 들은 인근 광부들도 집결하여 구조 작업에 나섰고, 시신과 생존자들이 수습되어 각각 예배당과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산사태가 파괴한 수도 시설에서는 여전히 대량의 물이 쏟아져 내려오며 구조 작업을 방해하였는데, 오전 11시 30분이 되어서야 당국에 의해 겨우 수도관이 차단될 수 있었다. 시신들은 인근 예배당으로 옮겨져 신원 확인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시신이 워낙 많은 탓에 주변에 있는 예배당 하나를 더 비워 영안실로 사용해야 할 지경이었다.
보도 등을 통해 현장에 수천 명에 달하는 자원봉사자들이 모여들고, 영국 육군 등지에서도 구조 인원이 파견되는 등 구조 작업에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다. 산사태가 수습되는데는 약 일주일의 시간이 소모되었다.
3. 사고 이후
3.1. 무책임
애버밴 참사는 수십 년 전부터 예견되었던 일이었다. 지역 주민들이 NCB측에 사고 위험성을 경고하며 대책 마련을 주문했음에도 국가석탄위원회NCB는 무책임으로 일관했고, 결국 끔찍한 참사로 이어지고 만 것이다.NCB의 무책임은 사고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국가석탄위원회장 알프레드 로벤스(Alfred Robens)는 사고 당일 관련 사실을 보고받고도 국장급 인사와 수석 엔지니어를 파견하기만 하고 본인은 서리 대학교 총장 취임식에 참석하였다. 사건 현장의 주민들과 유가족들이 NCB를 비난하자 현장에 파견된 NCB 간부들은 로벤스 위원장이 구조활동을 지휘하고 있다는 거짓말을 늘어놓았고, 로벤스 위원장은 사건 다음날 저녁에서야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으나 기자회견을 열어 NCB는 사건 조사에 협력할 것이지만 사고의 책임은 전면적으로 회피하는 뻔뻔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이후 사건조사위원회가 발족하였으나 NCB는 여전히 사건 책임을 부정하였다. 144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대형 참사에서 책임을 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NCB 간부나 직원 그 누구도 기소되거나 징계를 받지 않았다. NCB는 유족들에게 50파운드의 보상을 제시하였으나 비판을 받자 500파운드로 액수를 올려 보상안을 제시하였다. 유가족들은 NCB의 뻔뻔한 태도에 분개하였으나 NCB는 사과도 책임도 없이 비판에는 무시로 달관하기만 했다.
지역 회복을 위해 기금이 설치되었고 몇 개월만에 8만 건이 넘는 기부금이 접수되어 1,606,929파운드의 액수가 모집되었다. 그러나 지급 위원회는 지급 액수를 두고 논쟁을 벌이며, 희생자와 유족과의 생전 관계를 조사하여 유족의 정신적 고통을 정량화해야 한다는 소리를 늘어놓으며 제대로 돈을 내놓지 않았다.
심지어 남은 폐기물 봉우리의 처리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고 이후 주민들은 봉우리 처리를 요구했으나 처리 비용을 두고 웨일즈와 잉글랜드 당국, NCB 사이에 알력다툼이 벌어지고 비용절감을 이유로 봉우리를 단지 정비만 하겠다고 발표했다가 비난을 받고 철거로 입장을 바꾸는 등 사고에 책임을 져야할 자들이 나서 비참한 참사의 비극을 한 층 더하는데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몇 년 넘도록 작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심지어 철거 비용을 마련한답시고 재난 기금에서 150,000파운드를 빼가는 짓거리까지 벌어지기에 이르렀다.[5]
이 당시 빼앗은 15만 파운드는 사건 발생 이후 30여년이 흐른 1997년에서야 기금에 반환되었다. 이나마도 30년이 흐르면서 물가 상승이나 이자 비용 등은 모두 무시되었고 정확하게 15만 파운드만 반환되는 등 정부 당국은 최후의 최후까지 유족의 마음을 후벼파기만 했다.
4. 이후
당시 영국 총리였던 해럴드 윌슨은 사고 당일 왕실 전용기를 대여하여 사고현장을 방문해 유가족들을 위로하였다. 그런데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는 현장 방문을 바로 계획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영국 노동당 등에서 큰 비판을 받고 뒤늦게야 사고현장을 방문해 유가족들을 위로하는 일도 있었다.[6]사고로 아이들을 잃은 애버밴 지역의 광부들은 추모를 위해 합창단 Ynysowen Male Choir[7]을 조직했다. 이후 영국과 유럽 곳곳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펼치고 수익금으로 자선 사업을 한다.
애버밴 지역엔 사고를 추모하는 추모공원이 지어졌다.#
4.1. 예지몽?
사고 전날, 애버밴 지역의 아이들이 "친구들이 죽는 꿈을 꿨다." 며 등교를 거부하는 등의 일이 있었다.사고 현장에서 아이들을 구조한 정신과 의사 존 바커는 이러한 사례를 듣고 예지몽 연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애버밴 참사 예지몽을 겪었다는 편지 76통을 받았다.
5. 매체
- 더 크라운: 엘리자베스 2세의 전기에 대해 다룬 영국 드라마로 시즌 3에서 이 사고를 다뤘다.
-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2020년 2월 23일자에서 예지몽에 대해 다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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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 | 민주사회주의 · 사회민주주의 | |||
사건사고 | 애버밴 참사 · 토리 캐니언 호 좌초 사고 · 오일 쇼크 | |||
전쟁 | 베트남 전쟁 | |||
역대 선거 | 1974년 2월 영국 총선 | |||
지역구 | 하이튼 | |||
관련 정치인 | 제임스 캘러헌 · 에드워드 히스 · 휴 게이츠컬 · 클레멘트 애틀리 · 윈스턴 처칠 · 마거릿 대처 · 해럴드 맥밀런 · 알렉 더글러스 흄 | |||
기타 | 해럴드 윌슨 내각 · 1차 G6 정상회의 · 영국병 · BAC TSR-2 · LNER A1/A3 · 더 크라운 · 1963년 영국 노동당 지도부 선거 · 노동당 | |||
사회주의 | }}}}}}}}} |
[1] 폐기물 봉우리 중 하나가 붕괴하였다.[2] 이 때문에 '대영제국의 발전소' 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3] '죽음의 땅'이라는 별명은 애버밴 지역에 국한된 명칭은 아니었다. 환경오염의 심각성은 커녕 오염의 개념도 존재하지 않던 시절부터 무차별 개발이 이루어진 터라 웨일스에 위치한 광산 인근 지역들은 대체적으로 오염도가 심각한 수준에 다다르고 있었다. 채광 작업으로 발생되는 석탄과 철광석 찌꺼기 등의 부산물들은 광산 주변에 아무렇지 않게 버려지고 있었고 당국이 위험성을 파악했을 당시에는 무려 웨일스 면적의 약 8% 가량이 심각하게 오염된 뒤였다. 웨일스 당국은 이후 웨일스개발청(WDA)를 설립하여 대대적인 토양오염 정화에 나섰다. 오염 지역의 토양을 갈아 엎어 유해물질을 제거한 뒤 헥타르랑 약 200톤의 닭똥을 살포하고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녹화 작업을 개시, 1988년에 들어서는 약 18000 헥타르 면적의 지역을 정화하는데 성공하였다.[4] 교사나 학교 직원들은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희생하려 했으나, 엄청난 규모의 참극 앞에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모두 시신으로 발견되고 말았다.[5] 지급 위원회는 유족들에게 줄 돈은 지급하기 싫어하면서 15만 파운드를 지출하는건 순순히 동의해준 것이다.[6] 훗날 엘리자베스 2세는 재위 기간 중 가장 후회하는 일이 애버밴 참사때 바로 사고지역을 방문하지 않은 것이라 말했다. 이후 여왕은 꾸준히 4차례 더 에버밴을 직접 방문했고, 50주기에도 주민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메세지를 보내기도 했다.# 2017년에는 이와 정확히 반대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런던 그렌펠 타워 화재사고로 인해 큰 인명피해가 발생하자 당시 총리인 테레사 메이는 다음 날에야 나타나 (피해자들은 만나지 않고)소방 간부들의 보고만 듣고 떠나 논란이 일었는데, 이후 엘리자베스 여왕이 주민들과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화재를 진압한 소방관들과 자원봉사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윌리엄 왕자와 함께 사고 현장을 방문하자 그제서야 다급하게 다시 피해자들을 만나러 와 큰 지탄을 받았다. 국민의 슬픔앞에 지도자가 권위를 내세우기 보다는, 그들의 슬픔을 직접 위로함이 중요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낀 사람이 바로 엘리자베스 여왕이었으니 이는 당연한 행보라고 할 수 있다.[7] Ynysowen은 웨일스 Merthyr Vale 지역의 웨일스어 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