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1012e, #01013a 20%, #01013a 80%, #01012e); color: #ffc224; min-height: 34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조지 1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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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M PC FRS | |
<colbgcolor=#01013A><colcolor=#FFC224>본명 | 모리스 해럴드 맥밀런 Maurice Harold Macmillan |
출생 | 1894년 2월 10일 |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잉글랜드 런던 첼시 | |
사망 | 1986년 12월 29일 (향년 92세) |
영국 잉글랜드 서식스 주 윌든 | |
재임기간 | 제65대 총리 |
1957년 1월 10일 ~ 1963년 10월 18일 | |
신장 | 183cm |
작위 | 1대 스톡톤 백작[1] |
정당 | |
서명 |
[clearfix]
1. 개요
Harold Macmillan영국의 보수당 소속의 정치인이다. 제65대 영국 총리(1957년 1월 ~ 1963년 10월)를 역임하였다.
2. 생애
2.1. 정계 입문 이전의 생애
1894년에 런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맥밀런 출판(Macmillan Publishers)[2]이라는 출판사를 경영하는 출판업자였고, 어머니는 미국 출신의 예술가 겸 사회운동가였다.영국 최고의 명문 중고등학교인 이튼 칼리지를 다녔으며, 이후 옥스퍼드 대학교에 진학하였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맥밀런은 베일리올 컬리지(Balliol College) 출신이며, 옥스퍼드 유니언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3] 대학 진학 도중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맥밀런은 육군 장교로 참전하였다. 전선에서 복무하다가 1915년 9월 루 전투 당시 손과 머리에 중상을 입고 후송되었고, 복귀해서 다시 참호로 돌아갔다가 1916년 솜 전투 중에 또 중상을 입고 간신히 후송되었다.[4] 이때문에 휴 게이츠컬이나 랍 버틀러, 해럴드 윌슨 등 군복무 경력이 없는[5] 동료 정치인들을 대놓고 경멸했다는 말도 있다. 종전 이후 맥밀런은 옥스퍼드로 복학하는 대신, 자신의 아버지가 사장으로 있는 출판사에 입사하였다.[6]
2.2. 정치인으로서의 생애
1924년에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29년 총선에서 낙선하지만, 1931년 총선에 다시 당선되면서 정치 경력을 이어간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진행 중이었던 1940년에 윈스턴 처칠에 의해 보급부 장관[7]에 임명되었다. 1945년 총선에서 낙선했지만 그 해 11월에 있던 브롬리 지역구 보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며 서민원에 복귀했다. 이 후 보수당이 정권을 탈환[8]한 1951년에 다시 처칠에 의해 주택자치부 장관[9]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국방부 장관으로 승진한다. 이 후 총리로 취임한 앤서니 이든에 의해서 외무부 장관으로, 다시 재무부 장관으로 승진하면서 맥밀런은 이든을 이을 유력한 총리 후보 중 하나로 부상하게 된다.이 후 1957년에 이든이 제2차 중동전쟁을 발발시킨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사퇴하자[10], 맥밀런은 보수당 당수 겸 총리로 선출된다.[11] 총리로서 맥밀런은 제2차 중동전쟁을 둘러싼 외교 갈등으로 인해 소원해진 미국과의 관계를 회복시켰고, 민생안정을 위한 다양한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그의 내각에서 1950년대 중후반의 영국 경제는 일시적인 호황을 누렸다.
이를 두고 맥밀런은 "부자들에게 있어서도 사치였던 물건들이 널리 보급되어, 서민들의 생활에서도 필수적인 물건들이 되었다(The luxuries of the rich have become the necessities of the poor)"는 것을 강조하며, "대부분의 영국인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경제호황은 생전 처음일 것(Most people had not had it so good)"이라고 자신했다. 이러한 경제성과 덕분에 맥밀런이 이끄는 보수당은 1959년 총선에서 노동당을 상대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으며, 특히 전통적인 텃밭인 잉글랜드 남부에서는 의석을 싹쓸이하다시피 하였다.[12]
하지만 맥밀런 내각이 자랑하던 경제의 호황은 당시 영국 경제가 전후 가지고 있던 인플레이션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종의 거품 경기로 경제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린 것이었으며, 결국 해외 경기가 위축됨에 따라 수출이 감소세로 돌아서자 국내 경기 역시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이후 영국의 장기 불황으로 이어졌다.
또한, 맥밀런 내각이 자랑하던 또다른 측면인 대외 정책의 회복 역시 미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합격점을 줄 수 있겠으나, 유럽과의 관계는 극히 냉랭해졌다. 당시 유럽은 미국이 유럽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원치 않았으며, 영국이 미국과 밀월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하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의 샤를 드골 대통령이 영국과 맥밀런 내각에 가지고 있던 태도는 이를 잘 보여준다.(영국의 ECC가입 거부 등)
한편, 1959년부터 1963년까지 맥밀런의 2기 내각이 이어졌다. 2기 내각에서도 경제 정책과 대외 정책의 기본적인 기조는 유지되었다. 다만, 아프리카 식민지의 독립 열망이 높아지고 식민지 유지 비용의 문제 등이 대두됨에 따라(그리고 유럽에서 냉대받음에 따라 아프리카에서의 영향력이라도 유지하기 위해) 독립을 원하는 식민지는 독립하는 것을 막지 않는 쪽으로 식민지 정책이 변화된 시기이다. 총리 본인이 남아프리카 연방 케이프타운에서 한 유명한 연설인 '변화의 바람(Wind of Change)' 은 이와 같은 식민지 정책 변화의 중요한 분기점이자 상징이다.[13] 이 연설을 통해 영국 정부는 식민지의 독립을 막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이에 따라 1960년 나이지리아, 영국령 소말리아 등이 독립한데 이어 남카메룬, 탕가니카(오늘날의 탄자니아), 북로디지아(잠비아), 니아살랜드(오늘날의 말라위) 등이 차례로 독립하였다. 이후로도 영국 식민지의 독립은 이어졌으며, 아프리카 뿐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식민지들도 이 시기에 독립하였다(말라야, 사바, 사라왁, 싱가포르가 1963년 말레이시아로 독립).
1962년에는 대규모 개각을 단행해 당시 21명의 각료 중 7명을 갈아버린다. 워낙 파장이 커서 언론에서는 나치 독일 시절 친위 쿠데타인 장검의 밤에 빗대어 The Night of the Long Knives라고 칭하기도 했다. 파장이 컸던 개각 끝에 지지율이 반등했지만, 이후 프로퓨모 사건[14] 이 터졌고, 처음에는 총리 본인이 존 프로퓨모를 옹호했으나 결국 사건이 커짐에 따라 해럴드 맥밀런은 이에 책임을 지고 1963년 10월 사임하였다. 후임으로 알렉 더글러스 흄이 내각을 승계해 1년 정도 임기를 보냈으나, 결국 다음해 실시된 총선에서는 10여년 만에 노동당이 보수당을 누르고 승리함에 따라 노동당 내각이 탄생하였다. 총리는 해럴드 윌슨.
3. 평가
전임자인 앤서니 이든의 최대 실책 중 하나인 수에즈 사태 이후 혼란에 빠진 영국 정치를 비교적 잘 수습하였고 어느 정도의 경제 정책의 성과를 일구어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다. 집권 말기에 보여준 무자비하고 변덕스러우며 독단적인 일반적 면모 뿐 아니라, 경제 정책의 수립에 있어서도 입안 과정에서의 독단적 모습, 일관되지 않은 경제 정책 입안 등의 모습을 비판하는 부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학계나 하원의원, 대중에게의 전반적인 평가는 그럭저럭 평균 이상에 드는 편이다.[15] 최악의 총리 중 하나로 꼽히는 이든은 당연히 앞서고 후임들 중 히스나 캘러헌보다 평가가 좋은 편이며 해럴드 윌슨과 엇비슷한 정도이다.해럴드 맥밀런의 임기 이후 영국 경제는 완전히 수렁으로 빠져들었으며, 그의 뒤를 이은 해럴드 윌슨, 에드워드 히스, 제임스 캘러헌[16] 등의 재임기에도 영국 경제는 침체를 벗어날 수 없었다. 마가렛 대처의 시기에 이르러 신자유주의를 전격적으로 도입하면서 이러한 상태에 반전이 생기게 되지만, 이 반전에 대한 평가 역시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매우 강하게 엇갈린다.
그의 별명 중 하나였던 Super Mac은 해럴드 맥밀런의 재임 기간을 잘 보여준다. 재임 초기에는 그가 스스로 자랑했던 경제 정책 및 대외 정책과 관련해서 긍정적인 의미로도 일부 사용되었으나, 재임 기간이 길어지고 맥밀런 본인과 보수당 내각의 실책이 이어짐에 따라 부정적인 의미로 바뀌어 시대착오적이고 무능함에도 불구하고 노동당의 실책이나 기타 행운에 따라 간신히 총리직을 유지하는 맥밀런과 보수당 내각을 풍자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또 한국전쟁 당시 소련 간첩으로 영국에 주둔하며 미국이 한국전쟁에서 원자탄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밀을 알려 중국군의 참전을 도운 킴 필비를 처벌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4. 선거 이력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1923 | 1923년 영국 총선 | 스톡-온-티즈 | | 11,661 (34.3%) | 낙선 (2위) | |
1924 | 1924년 영국 총선 | 15,163 (42.0%) | 당선 (1위) | 초선 | ||
1929 | 1929년 영국 총선 | 16,572 (36.1%) | 낙선 (2위) | |||
1931 | 1931년 영국 총선 | 29,199 (61.6%) | 당선 (1위) | 재선 | ||
1935 | 1935년 영국 총선 | 23,285 (48.9%) | 3선 | |||
1945 | 1945년 영국 총선 | 18,464 (37.4%) | 낙선 (2위) | |||
영국 하원 보궐선거 | 브롬리 | 26,367 (49.6%) | 당선 (1위) | 4선[17] | ||
1950 | 1950년 영국 총선 | 23,042 (57.3%) | 5선 | |||
1951 | 1951년 영국 총선 | 25,710 (65.4%) | 6선 | |||
1955 | 1955년 영국 총선 | 24,612 (68.2%) | 7선 | |||
1959 | 1959년 영국 총선 | 27,055 (70.0%) | 8선 |
5. 여담
- 역대 영국 총리 중 가장 마지막으로 콧수염을 기른 사람이다. 해럴드 맥밀런 이후 영국 총리는 모두 전부 면도를 했다.
- 아내 도로시 맥밀란은 9대 데본셔 공작의 딸로서 높은 신분의 귀족이었다. 그녀는 1929년부터 보수당의 정치인 로버트 부스비 남작과 불륜을 시작했는데 이 관계는 1966년 도로시가 지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상류사회에서는 대를 이어갈 자녀들을 출산하고 나면, 이혼하지 않고 부부 각자 애인을 두며 자유로운 연애를 하는 이른바 "오픈메리지(Open Marriage)" 관계를 평생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혼은 당시 정치인에게는 큰 오점이 되었기에, 맥밀란 총리도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아내의 불륜을 묵인하면서 결혼생활을 이어나갔다. 말년에 쓴 자서전에서 그는 아내의 불륜으로 큰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사랑했다고 밝혔다.
- 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 시즌 2에 등장하며 앤턴 레서[18]가 연기한다. 앤서니 이든을 부추겨 수에즈 전쟁을 유발시키고 책임을 덮어씌워 그를 총리 자리에서 몰아내는 정치력과 이후 혼란을 수습하는 뛰어난 행정력을 보여주지만[19] 동시에 이든 내각의 일원으로서 응당 가져야할 전쟁에 대한 책임이 자신의 일이 아닌 것처럼 얘기하기도 하고, 스푸트니크 쇼크에 대해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에게 설명할 때 여왕이 뭐라 말하기 전에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자기 말만 해버리는 비호감적인 행동을 보인다. 마지막엔 프로퓨모 스캔들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채 임신한 상태였던 엘리자베스 2세의 만류에 불구하고 양성 종양을 핑계로 사임해버리는 무책임한 모습을 같이 보여준다.[20] 이렇게 전임 총리들에 비해 상당히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반대로 그의 업적은 거의 드러나지 않지만 한편으론 맥밀란 개인의 불행한 가정사[21]를 다루며 인간적인 면모도 보여준다.
- 왕족을 제외하고 마지막으로 세습귀족 작위를 받은 사람이다. 역대 영국 총리들은 본인이 거절하거나, 재임 중 사망하거나, 이미 귀족인 경우를 빼면 통상적으로 퇴임 후 백작위와 가터 대훈장을 받았는데, 맥밀란 이후의 총리들은 세습귀족 작위를 받은 사람이 없다. 이는 1958년 일대귀족법이 재정되며 은퇴하는 정관계 인사들에게 세습귀족 작위 대신 일대귀족 작위를 수여하는 것으로 문화가 바뀌었는데, 맥밀런 이후 알렉 더글러스흄[22], 해럴드 윌슨, 마가렛 대처 등이 일대귀족 작위를 받았다.
[1] 1st Earl of Stockton[2] 영미권 최대 출판사 중 하나다. 영미권에서는 흔히 맥밀런과 펭귄 랜덤 하우스, 하퍼콜린스, 해체트(Hachette), 사이먼앤슈스터(Simon & Schuster) 다섯을 묶어 출판업 Big 5로 분류한다.[3] 현 영국 총리 보리스 존슨은 맥밀런의 이튼스쿨, 베일리얼 칼리지, 옥스퍼드 유니언 후배이다.[4] 당시 중상을 입은 채 12시간동안 방치되었는데, 그 동안 독일 제국군의 눈을 피해 죽은 척을 하기도 했고, 아이스킬로스를 그리스어 원문으로 읽으면서 구조를 기다렸다고. 이 부상이 완치되는 데에 거의 4년이 걸렸고, 이후에도 살짝 다리를 절었으며 손글씨를 쓰기 버겨워했다.[5] 게이츠컬이나 윌슨은 나이가 너무 어려 참전이 불가능했다. 게이츠켈은 개전 당시 6살이었고, 윌슨은 아예 1916년생이기 때문. 버틀러는 어렸을 때 사고로 오른팔에 복합골절을 입었다가 치료에 실패해서 악수도 제대로 못 했다.[6] 이를 두고 맥밀런은 '독일 황제가 나를 퇴학시켰다'라고 농담을 했다.[7] 전시 상황을 위한 임시 보직[8] 1945년부터 1951년까지는 노동당이 여당이었다.[9] Minister of Housing & Local Government. 공공주택 보급과 지방자치 감찰을 담당하는 부처이다. 현재는 다른 부처들로 통폐합되었다.[10] 다만 맥밀런도 이집트를 침공하는 것에 강하게 찬성했던 인물 중 한 명이다.[11] 다만, 당시 가장 유력한 차기 총리 후보자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더 유력한 총리 후보는 앤서니 이든 내각에서부터 내정을 주로 담당했던 재무부 장관 출신이자 앤서니 이든이 건강 문제로 부재할 당시 내각을 이끌었던 랍 버틀러였다.[12] 마거릿 대처도 이 선거에서 하원에 입성한다. 다만 보수당은 해당 선거를 기점으로 하여 단 한 번도 스코틀랜드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13] 정확히는 영국 보수당의 기조 변화를 상징한다. 2차 대전 종전 직후 집권했던 노동당의 클레멘트 애틀리 내각은 이미 식민지의 독립을 정책으로 추진한 바 있다. 하지만 1951년 선거에서 패하여 다시 보수당이 집권함에 따라(총리는 윈스턴 처칠) 이 정책은 중지되었다.[14] 1963년 국방장관 존 프로퓨모가 불륜 및 소련 스파이 등과 연루됨에 따라 사임하게 된 정치 스캔들[15] BBC 라디오 1999년 학계 조사, 리즈 대학 조사, 2013년 하원의원 대상 설문조사, BBC 2007년 및 2008년 여론조사 등[16] 해럴드 맥밀런 사퇴 이후 1년만 재임한 앨릭 더글러스 흄은 제외.[17] 전임자 에드워드 켐밸 사망[18]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서 콰이번 역을 맡은 것으로 유명하다.[19] 그러나 드라마 상으로는 딱히 눈에 띄지 않는다. 그나마 미국과의 외교관계를 중시하는 정도만 묘사된다.[20] 그래서인지 해당 장면에서 엘리자베스 여왕 역시 "제 총리들은 너무 늙어서, 너무 아파서, 아니면 너무 나약해서 다들 임기를 못 채우는군요." 라고 신랄하게 꼬집는다.[21] 아내 도로시의 불륜을 알면서도 묵인하는 상황이 나온다.[22] 다만 더글러스흄의 경우에는 그 본인이 세습귀족 가문의 후계자로서 세습귀족 작위를 받아 세습귀족이었다가 서민원 출마를 위해 세습귀족 자리를 본인 대에 한해서 일시적으로 포기하고 서민원 의원이 된 뒤 정계 은퇴 후 다시 일대귀족을 받은 케이스라 조금 결이 다르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