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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6 21:50:13

토리 캐니언 호 좌초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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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사고 관련 서술 규정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1. 개요2. 토리 캐니언 호3. 좌초4. 대응5. 후일담6. 둘러보기

1. 개요

Torrey Canyon oil spill

당시 기준으로 역대 최악의 해상 환경재앙.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고 이상의 대형 사고들이 생겨 순위에서 많이 밀려났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순위권인 대참사이며, 사건이 일어난 장소가 제3세계가 아닌 유럽, 그것도 영국프랑스 일대라는 점, 그리고 후술할 여러 영향 때문에 비슷한 사고들이 생기면 늘 제일 먼저 거론되는 사고다.

2. 토리 캐니언 호

토리 캐니언(Torrey Canyon)은 1959년 미국 뉴포트뉴스 조선소에서 건조된 수에즈맥스급 크기의 유조선으로 원유 5만 4천 톤을 수송할 수 있었지만 몇 년 후 일본에서 원유운송량을 11만 톤으로 증설하는 공사를 받았다.

소유주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소재한 유니온 오일(Union Oil Company)[1]이었고 라이베리아 선적이었다.[2] 사건 당시에는 중동-유럽 항로를 운항 중이었다.

3. 좌초

1967년 2월 19일 쿠웨이트에서 원유를 만재하고 출항한 토리 캐니언 호는 희망봉을 돌아 3월 14일 카나리아 제도에 도착한 뒤 바로 영국의 밀퍼드 헤븐[3]으로 향했다.[4] 3월 18일 저녁무렵 토리 캐니언 호는 란즈엔드곶 서쪽 해역으로 진입하려고 했는데 이때부터 문제가 생겼다. 토리 캐니언 호는 거센 조류로 인해 예정항로보다 훨씬 동쪽으로 밀려나 연안에 근접했다. 배가 연안으로 들어오면서 수많은 소형 선박들(주로 어선)이 등장했고 항해사들은 충돌 회피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 때문에 토리 캐니언 호는 예정된 항해 일정보다 시간이 많이 지연되었다.

선장 Pastrengo Rugiati는 시간이 늦어지자 초조해졌다. 사실 항로를 이탈했어도 다시 원래 항로로 복귀하기는 어렵지 않으므로 천천히 하면 되었지만 토리 캐니언 호의 진로 앞에는 악명 높은 실리 제도의 세븐 스톤스 리프가 있었는데 18세기 초에 영국 해군이 이곳에서 집단 좌초하는 실리 영국 해군 참사로 2천여 명에 달하는 승조원들이 수장된 바 있었다. 즉, 토리 캐니언 호는 속도를 유지한 채 변침하지 못하고 암초를 피하기 위해 급히 속도를 줄인 다음 변침해야 했다. 당연히 늦어진 항해 일정이 더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선장은 조바심에 못 이겨 감속도 변침도 하지 않고 그대로 세븐 스톤스 리프를 돌파하는 항로를 선택하는 최악의 수를 두고 말았다. 문제는 선장이나 항해사들이나 이 지역에 대해 말만 들었지 실제 위험도는 몰랐다는 것이다. 이 탓에 토리 캐니언 호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속도인 15.75노트로 암초지대로 돌진했다.

오후 8시 토니 캐니언 호가 속도도 줄이지 않고 들어오는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보고 실리 제도의 등대는 경악했다. 그래서 즉시 조명을 비추고 신호탄을 발사하면서 필사적으로 배를 멈추려고 했으나 선장은 이를 무시했다. 결국 이런 만용의 결과는 몇 분 지나지 않아 토리 캐니언 호가 세븐 스톤스 리프 중 Pollard 's Rock에 정면 충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4. 대응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토리 캐니언 호의 18개 원유탱크 중 14개에서 구멍이 났고 이들 탱크에서는 당연히 대서양 바다를 향해 미친 듯 원유를 토해내었다. 사건 초기 영국 정부가 파악한 기름띠는 길이 30km, 너비 6.5km, 두께는 가장 두꺼운 곳이 46cm로 그야말로 전례가 없는 수준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군함이나 유조선이 격침되어 기름이 유출된 적은 있지만 이 정도로 대규모인 적은 없었다. 추정도 절망적이었는데 영국의 모든 생산력을 풀가동하여 1년 동안 만들어낼 수 있는 세정제로도 원유를 중화할 수 없다는 수치가 나왔다.

더군다나 선주의 긴급의뢰를 받고 선박을 어떻게든 빼내 보려던 네덜란드 구난회사의 작업은 토리 캐니언 호의 기관폭발과 함께 구난회사 직원 1명이 사망하는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 폭발로 토리 캐니언 호의 원유 유출이 가속화되었고 네덜란드 회사는 작업 불가를 선언하고 현장에서 철수했다.

해럴드 윌슨 총리 이하 영국 내각은 즉시 비상사태에 돌입하고 전 국가적으로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투입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윌슨 총리는 모든 기름을 중화할 수 없고 토리 캐니언 호에 남아있는 원유를 무사히 빼낼 방법도 없다는 조언을 받아들여 '공군을 동원해 토리 캐니언 호를 폭격하고 기름을 불태운다!'는 결정을 내렸다.

내각의 결정에 따라 영국 공군은 토리 캐니언 호 및 그 주변의 기름띠에 네이팜탄을 포함한 대규모 폭격을 감행해 토리 캐니언 호를 완전히 침몰시키고 배 안에 남아 있던 원유 약 3만 톤을 불태웠다.[5] 그러나 이 말인즉슨 이미 7만여 톤에 달하는 원유가 대서양으로 빠져나갔다는 의미였다. 폭격은 원유 10만 톤이 모두 바다로 유출되는 최악을 막았을 뿐이었다.

이쯤 되면 영국만의 문제가 아니었으며 바다 건너 프랑스도 국가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프랑스 언론은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사상 최대규모의 해안방위작전이 시작되었다고 표현했다. 영국의 콘월 지방과 프랑스의 브르타뉴 지방으로 양국의 가용가능한 장비와 인력, 중화제가 모조리 모여들었다. 배와 항공기에서 미친 듯이 중화제를 퍼부었고 당장의 생계가 달린 어부들도 일제히 나아가서 짚단 등으로 원유를 한 방울이라도 더 없애기 위해 처절하게 노력했다. 원유가 조류를 타고 영국 해협을 따라 올라올 수 있다는 경고 때문에 벨기에네덜란드, 서독, 덴마크 정부까지 긴장할 정도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콘월 해안 190km, 브르타뉴 해안 80km가 오염되어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는데 수많은 어류, 어패류, 해조류들이 몰살당했고 원유를 뒤집어쓴 철새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사람들은 맥 없이 지켜봐야만 했다. 피해지역은 10년에 걸쳐 길게 회복해야 했는데 당연히 그동안 주변 지역의 어업관광업은 괴멸되었다.

5. 후일담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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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후일 타 회사와 합병하여 유노칼(Unocal)이 되었지만 2005년 쉐브론에 인수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2] 세금 문제로 수많은 상선들이 라이베리아나 파나마 선적으로 등록했고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이를 '편의치적'이라고 한다.[3] 아일랜드 해에 접한 웨일스 지방 항구도시[4] 수에즈 운하는 같은 해 6월 제3차 중동전쟁 발발과 함께 폐쇄되었지만 이전부터 긴장이 고조되어서 운하 항행을 포기하고 안전하게 희망봉 루트를 선택하는 선박들이 많았다.[5] 당시 상황이 워낙 긴급했던지라 선박의 기국인 라이베리아 측의 동의를 받지 못했다. 이후 국가 책임에 대해 영국은 국제법위법성 조각사유 중 긴급피난/필요성(necessity)에 의한 위법성 조각을 주장하였고 국제적으로 이는 수용되었다.[6] 이후 추가의정서를 통해 조치 대상이 유류 이외 물질로도 확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