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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위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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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 알라위 왕조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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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22229><colcolor=#fff> 알라위 왕조
سلالة العلويين الفيلاليين
파일:모로코 국장.svg
창립일 661년 1월
창립자 하산 이븐 알리
現 당주 모하메드 6세
국가 모로코 왕국

1. 개요2. 역사
2.1. 건국2.2. 통일전쟁2.3. 전성기? : 물라이 이스마일2.4. 내전과 위기2.5. 안정의 회복2.6. 외세의 침공과 근대화 시도2.7. 식민 지배와 저항
3. 역대 군주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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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1013px-Royal_standard_of_Morocco.svg.png
알라위 왕조의 문장
현대 모로코의 왕가. 이슬람 선지자 무함마드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2. 역사

파일:Alouids.png
무함마드의 5대손부터 나타낸 알라위 왕조의 계보도

알라위 왕조는 무함마드의 외손자 하산 이븐 알리를 조상으로 여기고 있다. 때문에 가문원들은 존칭으로 '샤리프(شريف, Sharif)'라고 불리고 있으며, 왕조명인 알라위는 (하산의 부친이자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후손이라는 뜻이다. 16세기부터 모로코 지역은 스스로를 무함마드의 후손이라 주장하는 두 가문, 사드 왕조와 알라위 왕조의 지배를 연달아서 받게 된다. 1631년 샤리프 이븐 알리(الشريف بن علي, Sharif ibn Ali)가 타필랄트(تافيلالت‎, Tafilalt)의 아미르가 되면서 알라위 왕조가 시작되었고, 1659년 사드 왕조가 멸망한 이후 1666년 타필랄트 아미르 알 라시드 빈 알 샤리프(الرشيد بن الشريف, Al-Rashid of Morocco)가 페스에 입성하고 모로코를 통일하면서 알라위 왕조는 모로코의 술탄으로 군림하였다. 1912년 모로코는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고, 북부 모로코의 일부 지역은 스페인에 할양되었다. 리프 전쟁 이후 알라위 왕조는 사실상 스페인-프랑스의 꼭두각시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술탄들이 분연히 독립 운동을 일으켜 1956년 모로코가 독립한 다음 1957년부터 술탄에서 국왕(ملك)으로 작위를 바꾸었다.

2.1. 건국

파일:모로코 알라위 1.jpg
시질마사 (리사니)에 남아있는 알라위 왕조 초기 수도 유적

알라위 가문은 12-13세기 무렵 그들의 존재로 인해 은덕을 입길 원하던 동부 모로코 타필랄트(시질마사) 지역민들의 초대를 받아 히자즈에서 이주해왔다. [1] 15세기 그 지도자인 알리 앗 샤리프가 세우타, 탕헤르에 대한 '성전'에 참가하고 그라나다 측의 초대로 카스티야에 대한 전투에 참가하며 알라위 가문은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17세기에 이르면 알라위 가문은 시질마사의 주요 세력들 중 하나로 부상해있었고, 1589년 알리 앗 샤리프의 5대손인 샤리프 이븐 알리[2]가 시질마사에서 태어났다. 당시만 해도 사드 왕조는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지만 10여년이 지난 후부터 쇠퇴하기 시작, 1630년에 이르면 페스-마라케쉬 일대를 제외한 해안과 내륙 지방 각지에서 독자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다. 서쪽부터 살레-라바트의 부레그레그 공화국, 북부 리프 지방의 무함마드 알 아야쉬, 중부 산악 지방의 딜라이 수피 공동체 (자위야 딜라이야), 남부 수스 지방의 아부 하산 알리 앗 시믈알리 등이었다. 그중 앗 시믈알리와 딜라이 세력이 시질마사의 패권을 두고 다투었는데, 현지인들은 샤리프를 술탄으로 추대하여 맞섰다.

1635년 샤리프는 앗 시믈알리의 수비대가 있는 타부삼트를 공격했으나 패하였고, 사로잡혀 수스 협곡으로 유배되었다. 다만 고귀한 혈통을 해치기보다 동맹으로 삼으려 했던 앗 시믈알리는 흑인 첩을 선물하는 등 잘 대해주었다. 한편 샤리프가 부재한 시질마사에서는 그의 장남 시디 무함마드가 지휘권을 이어받아 재차 봉기하였고, 1641년 앗 시믈알리의 병력을 축출한 후 술탄을 칭하였다. 하지만 1648년 이번에는 딜라이야 군이 침공하여 시질마사 남쪽과 서쪽의 영토를 빼앗았다. 무함마드는 모로코 북부 대부분을 장악한 달라이야와 맞서는 대신 반대쪽인 동북쪽, 즉 오스만령 알제리 방면으로의 확장에 나섰다. 1650년 그는 알제리 중북부 아그와트와 틀렘센까지 공격하였고, 바누 마킬을 포함한 아랍 부족들을 포섭한 후 우지다를 새 근거지로 삼았다. 알라위 군의 공격에 대응한 오스만 제국은 반격에 나서 그들을 시질마사까지 몰아낸 후 협상, 다시 국경을 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휴전하였다. 비록 영토는 크게 늘지 않았지만 많은 아랍 부족 병력을 확보한 무함마드는 모로코의 주요 세력들 중 하나로 인정받았다.

2.2. 통일전쟁

파일:모로코 1660.png파일:모로코 성채.jpg
1660년, 사드 왕조의 멸망 후 모로코. 보라색이 알라위 조 물라이 알 라시드가 건설한 카스바 셰라르다

그 예시로 1650년 6월 페스 엘 발리의 지도부가 무함마드를 초청하여 딜라이야에 대한 반란을 시도하였다. 다만 무함마드가 실제로 페스에 당도했을 때에 달라이야 군이 다가오자 현지 지도부는 재차 그에 복속, 무함마드는 요청에 따라 귀환해야 했다. 한편 1637년 합의금과 함께 석방되어 시질마사로 돌아온 후 상왕 역할을 하던 샤리프가 1659년 사망하자 무함마드와 동생 알 라시드 간의 분쟁 끝에 후자는 시질마사를 떠나 동북쪽 우지다 부근 안가드에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였다. 형 대신 바누 마킬과 베르베르계 아잇 야즈나신 부족들을 포섭한 그는 1663년 새 거점인 이프란 부근 아즈루에서 술탄을 칭하였다. 이에 무함마드는 안가드를 공격하였으나 패하고 전사하며 알라위 왕조는 알 라시드 하에 단합되었다. 한편 1662년 딜라이 술탄 무함마드 알 핫즈가 사망한 후 그 세력은 약화되어 본거지인 아틀라스 산지로 축소되었다.

이에 알 라시드는 아랍 부족 병력인 구이쉬[3]를 중심으로 중부 지방 정복에 나서, 1664년 타자를 점령하였다. 다만 페스는 복속을 거부하였고, 1665년 알 라시드는 페스를 포위했으나 격퇴되었다. 이에 굴하지 않고 그는 북부 리프 지방을 원정해 세력을 불린 후 재차 포위하여 1666년 6월 페스의 항복을 얻어내었다. 페스를 수도로 정한 알 라시드는 부족 병력들의 주둔을 위해 새 성채인 카스바 셰라르다를 세웠다. 1668년 6월 그는 중부 아틀라스 고원을 원정, 딜라이야 잔당을 격파하였고 기세를 몰아 다음달 (사드 조를 찬탈한) 압둘 카림 아부 바크르 앗 샤바니가 통치하던 마라케쉬를 점령하였다. 같은해 알라위 군대는 수스 협곡과 크사르 엘케비르 일대를 점령하였고, 살레-라바트의 해적들이 복속하였다. 이로써 모로코를 대부분 통일한 알 라시드는 평화를 오래 누리지 못한 채 1672년 4월 마라케쉬에서 낙마 사고로 사망하였다. 사후 동생 물라이 이스마일이 계승하였다.

2.3. 전성기? : 물라이 이스마일

파일:모로코 이스마일.jpg파일:모로코 물라이 이스마일.jpg
물라이 이스마일 빈 샤리프의 초상화

페스에서 술탄에 오른 26세의 이스마일은 보다 더 국토 중앙부에 위치한 메크네스로 천도하였다. 다만 그는 곧 조카 아흐마드 벤 마레즈와 동생 하란의 반란에 직면하였다. 전자는 마라케쉬에서 술탄을 칭하였고, 후자는 시질마사에서 자립하였다. 또한 테투안의 군벌 카디르 갈리안 역시 복속을 거부하였다. 우선 가장 시급한 문제부터 해결하기로 한 이스마일은 즉위한지 2주도 되지 않은 4월 27일 마라케쉬로 남하, 포병대의 활약과 함께 도시를 점령하였고 총상을 입은 아흐마드는 산지로 도주하였다. 6월 4일 이스마일은 마라케쉬에서 술탄으로 인정받았고 도시에 관용을 베푼 후 북상, 페스에서 알 라시드의 장례를 치르고 메크네스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직후 페스에서 반란이 일어나 알라위 주둔군이 축출되었다. (1672년 8월 26일)

페스 반군의 초청을 받은 아흐마드는 타자에 이르러 재차 술탄을 칭하였고, 알 라시드의 사후 오스만 지원과 함께 테투안으로 돌아온 카디르 갈리안 역시 이에 호응하였다. 이스마일은 페스를 봉쇄하게 한 후 타자로 진군, 수개월 간의 포위 끝에 도시를 항복시켰고 아흐마드는 사막으로 도주하였다. 그후 1만 2천 병력과 북상한 이스마일은 북부 지방을 잠식해 가던 카디르 갈리안을 크사르 엘 케비르에서 전사시켰다. (1673년 9월 2일) 이렇게 북부를 평정한 그는 페스로 귀환하였고, 14개월의 포위 끝에 도시는 항복하였다. 이스마일은 약속대로 주민들을 사면하였고 그 지배 구조를 개편하였다. 한편 반란을 진압하며 이스마일은 기존 구유쉬 아랍 병력 대신 대부분 이슬람으로 개종한 10만 흑인 부대[4]인 아비드 알 부카리를 핵심 병력으로 삼았다. 이스마일 역시 흑인 모친을 두어 과거 아불 하산 알리처럼 흑인 술탄으로 불렸고, 흑인 부대는 그에게만 절대 충성하였다.

파일:모로코 메크네스 2.jpg
메크네스, 카스바 정문 일대의 성벽

제국을 안정시킨 이스마일은 새 수도 메크네스에 둘레 8km에 달하는 카스바를 건설하였고, '모로코의 자금성'으로도 불리는 이 궁전도시는 반세기 이상 공사가 지속되었다. 그는 또한 오스만 조의 침공에 대비하기 위해 동쪽 국경을 따라 요새들을 건설하고 흑인 친위대를 배치하였다. 한편 이전 사드 왕조와 마찬가지로 오스만 제국의 간섭은 이어졌다. 1668년 멸망 후 틀렘센에 망명했던 달라이야 공동체는 오스만 조의 지원을 받아, 옛 수장 무함마드 알 핫즈의 손자 아흐마드 앗 달라이 하에 규합하여 모로코로 돌아왔다. 1677년 그들은 알라위 군을 격파하고 중부 지방의 타들라를 점령했는데, 1678년 4월 와디 알 아비드 근처에서 이스마일이 보낸 토벌군에게 격파당하였다. 도주한 아흐마드 알 달라이가 1680년 초엽 병사하며 반세기 가량 이어진 달라이야 공동체는 마침내 소멸하였다. 보복으로 이스마일은 1679년과 1682년 오스만령 알제리를 습격하게 하였고, 1686년에는 역시 오스만측 지원을 받아 수스 지방에 할거하던 조카 아흐마드를 타루단트 부근에서 격파하고 제거하였다. 이로써 모로코는 이스마일 휘하에 확고히 통합되었다.

이스마일은 또한 사드 왕조의 쇠퇴로 자립한 말리의 파샤 정권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시도하였다. 1645년부터 알라위 조에 복속하던 알제리 중남부 투아트 오아시스에 대해 그는 1676년 태수를 파견해 직접 지배에 나섰고, 1678-79년 현 모리타니아 서남부인 트라르자, 브라크나 부족들을 복속시켜 세네갈 강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한편 1662년 포르투갈-잉글랜드 혼인 동맹[5]으로 탕헤르가 지참금으로써 잉글랜드에게 넘겨졌고, 1680년 여름 그에 대한 이스마일의 포위는 실패하였다. 다만 리프 군대[6] 혹은 무자헤딘이라 불린 현지 전사들이 지속적으로 공격과 봉쇄를 가한 끝에 1684년 2월 영국 주둔군은 도시를 파괴하고 철수하였다. 즉시 탕헤르를 접수한 이스마일은 도시의 재건과 재정착을 장려하였고 리프 군대를 이끈 테투안 총독 알리 알 리피에게 자치적인 지배권을 주었다. 이후 리피 가문은 1912년까지 탕헤르와 테투안의 총독직을 이어간다. 그외에 이스마일은 1681년 메흐디야, 1689년 라라슈 (알 아라이쉬), 1691년 아실라 등 스페인령 서북 해안의 도시들도 재정복하였다.

파일:모로코 궁전 1.jpg
이스마일의 마굿간. 1만 2천 필의 말이 사육되었다고 한다.

이스마일은 모로코 해적들로 유럽 상선들을 공격함과 동시에 유럽 상인들의 무역을 허가하였다. 다만 외국 상인들의 행동은 철저히 규제되었고 총독들에게 관세를 바치며 합의해야 했다. 포로로 잡힌 유럽인들은 석방 전까지 노역에 동원되었고, 스페인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의 중재로 석방되었다. 또한 1682년부터 그는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대스페인 동맹을 모색하였으나 후자의 무관심으로 흐지부지되었다. 그러던 1692년 봄 알제 총독 핫즈 샤바니가 1만 5천의 병력과 함께 우지다를 지나 진격하였다. 이에 이스마일은 2만 대군을 모아 반격에 나섰으나 물라야 강 전투에서 5천을 잃고 대패하였다. 알제리 군은 페스 성벽까지 패잔병을 추격하였는데, 그곳에는 4만이 넘는 수비대가 배치되어 있었기에 진격을 멈추었다. 이스마일은 반격에 나서는 대신 친히 적진을 방문하여 오스만 술탄에게 복속을 표한 후 물라야 강을 경계로 삼아 화친하였다. 이로써 우지다는 한세기 이상 오스만령 알제리에 속하게 되었다. 그후로도 이스마일은 1693년, 1694년, 1701년, 1707년 재차 물라야 강 동쪽으로 습격대를 보내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1693년의 경우 이스마일이 2만 대군으로 스페인령 오랑을 포위하자 알제 총독이 스페인을 지원하기도 했다. 1701년 초에는 모로코-튀니지-리비아 동맹이 결성되었고 이스마일의 아들 제이단이 틀렘센마스카라를 점령, 후자에 위치한 베이 궁전을 약탈하는 성과를 올렸다. 하지만 이내 그는 전리품을 지키기 위해 휴전을 맺고 점령지를 포기한 채 철수하였다. 분노한 이스마일은 제이단을 해임하고 친히 4만 대군을 이끌고 진격, 알제리 중서부 츨레프 협곡까지 진격하였다. 휴전 동안 튀니지-리비아 군을 격파한 알제 총독 핫지 무스타파는 1만 대군과 함께 맞섰다. 1701년 4월의 전투에서 이스마일은 8천 병력을 잃고 겨우 도주하여고, 그의 말이 사로잡혀 루이 14세에게 보내지기도 하였다. 한편 이스마일의 남방 진출은 더 효과적이었고, 1696년에는 말리 북부의 타가자에 카디를 임명해 다스리게 하였다. 1724년에는 세네갈에 대한 프랑스의 영향력에 맞서 트라르자 부족을 돕기 위해 군대를 파견, 모리타니아 중북부 쉰게티에 태수를 봉하며 남쪽 국경을 확장하였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사하라 횡단 교역은 이전처럼 활성화되지 못하였다.

파일:모로코 메크네스 1.jpg
메크네스 카스바의 정원, 현재는 왕실 골프장이다.

이스마일은 하렘에 수천의 여인들을 후궁으로 두었고, 그들로부터 수백의 자녀를 얻었다. 정실 부인은 넷으로, 그들과는 10명의 적자를 두었다. 1700년경 환갑에 가까워진 이스마일은 적자들 중 아흐마드는 타들라, 압둘말리크는 다라 협곡, 무함마드 알 알람은 수스, 알 마문은 시질마사의 총독으로 봉하였다. 하지만 18세기 들어 아들들 간의 분쟁이 심화되어 왕자 나세르가 압둘말리크를 패배시키고 다라를 차지했으나 이스마일에 의해 샤리프로 대체되기도 하였다. 이스마일이 가장 총애하던 부인 랄라 아이샤 무바르카는 친아들 제이단의 계승을 위해 노력하였고, 이에 장남 무함마드 알 알람이 반란을 일으켜 마라케쉬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1703년 3월) 이에 제이단이 토벌에 나서자 무함마드는 타루단트로 도주했다가 사로잡혀 한 팔과 한 손이 잘렸다.[7] 다만 무함마드 알 알람은 결국 자살하였고 제이단 역시 타루단트 주민들을 학살한 것에 대해 1707년 이스마일의 지시로 취중에 부인에게 살해되었다. 나세르 역시 반란을 일으켰다가 총독에게 살해되었다.

결국 이스마일은 조용히 지내던 타들라 총독 아흐마드를 후계자로 삼았다. 한편 이스마일은 18세기 초엽 유럽을 뒤흔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영국-오스트리아 편을 들었고, 1704년 영국의 지브롤터 점령에 간접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에 대해 스페인의 펠리페 5세는 1720년 반격으로 1694년부터 모로코 측의 봉쇄에 놓여 있던 세우타에 함대를 파견하였다. 이로써 봉쇄는 풀렸으나 이스마일은 이듬해 재차 봉쇄를 이어가게 하였고, 대함대를 조직해 약화된 스페인 본토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으나 1722년 폭풍으로 함대가 파괴되며 좌절되었다. 역사상 가장 긴 26년, 다시 7년간 이어지던 포위는 1727년 3월 22일 이스마일이 81세의 나이로 사망하며 풀렸다. 55년에 걸친 이스마일의 치세 동안 모로코는 통합되었고 서/북 해안과 남쪽 사막 지대로 영토가 팽창되었다. 하지만 이스마일은 1699-1705년에 걸쳐 왕국 내의 21만에 달하는 모든 흑인들을 (심지어 무슬림이나 자유인까지) 노예화하는 잔혹한 지시를 내리기도 하였다. 또한 후계자 아흐마드의 입지를 확고히 하지 못하여 사후 알라위 조는 30년에 걸친 내전에 시달리며 쇠퇴기를 겪는다.

2.4. 내전과 위기

이스마일 사후 벌어진 내전은 가혹한 세금에 대한 반란과 겹쳐 모로코에 큰 혼란을 야기하였다. 또한 이스마일 시기에 큰 권력을 지니게 된 흑인 부대 (아비드)는 술탄들을 옹립하고 폐하기를 반복하며 전횡을 일삼았다. 우선 1727년 후계자 아흐마드 앗 다하비가 술탄에 올랐으나 1728년 형 압둘 말리크에게 찬탈당했다가 복위한 후 1729년 사망하였다. 그후 아비드의 지지를 받은 동생 물라이 압둘라가 계승, 내분으로 얼룩진 메크네스 대신 페스 근교에 다르 드비베그를 건설하고 머물렀다. 그러나 압둘라가 점차 아이트 이드라신 베르베르 부족, 우다야 아랍 부족, 페스 주민들과 가까워지자 권력을 독점할 수 없게 된 아비드 세력이 알리와 무함마드 등 다른 왕자들을 지원하며 1733년부터 재차 내전이 지속되었다. 그동안 압둘라는 도합 8년 가량 6번 찬탈당한다. 특히 그 중 3번 찬탈한 알 무스타디는 1738-40년, 1742-43년, 1747-48년 재위하였다.

한편 내전 동안 모로코 북부는 알리 알 리피의 아들 아흐마드의 지도 하에 사실상 독립하였다. 탕헤르를 수도로 삼은 아흐마드 알 리피는 해협 건너 지브롤터의 영국인들과 교역하고 외교 관계를 맺었다. 그는 알 무스타디 및 아비드와 동맹하였기에 압둘라와 대립하였고, 1741년에는 페스를 침공하기도 하였다. 반격에 나선 압둘라는 1743년 아흐마드 알 리피를 격파, 전사시킨 후 모로코 해안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였다. 1748년 알 무스타디를 마지막으로 폐위시킨 후 즉위한 압둘라는 부친과 달리 많은 아들을 낳지 않았고, 9년간의 안정된 통치 후 사망할 때에는 아들이 시디 무함마드 (무함마드 3세) 뿐이었기에 분쟁 없이 즉위할 수 있었다. 이는 모로코 근세 역사에 있어 16세기 아흐마드 알 만수르 이후 가장 매끄러운 계승이었다.

2.5. 안정의 회복

파일:모로코 에사우이라.jpg
무함마드 3세가 건설한 유럽식 항구 도시 에사우이라

마라케쉬 총독을 거쳐 1757년 즉위한 무함마드 3세는 조부 이스마일에 버금가는 33년에 달하는 치세동안 모로코를 안정적으로 통치하였다. 내전기 동안 약화된 아비드 병사들은 상당수가 퇴역하여 일반인이 되었고, 무함마드는 남은 이들을 정예 부대로 편성하였다. 다만 압둘라를 도우며 영향력을 키운 우다야 베두인들이 페스에서 소동을 일으키자 1760년 무함마드는 군대를 이끌고 페스에 진입, 우다야 지도부를 체포하고 병사들 다수를 살해하며 조직을 해체하였다. 이후 그는 소규모의 우다야 부대를 편성하여 메크네스에 주둔시켰다. 한편 대외관계를 중요하게 여겼던 무함마드는 포르투갈령이었다가 1541년 버려진 후 작은 항구로 전락해 있던 모가도르를, 영국 출신 건축가 아흐메드 엘 인글리지를 고용해 유럽 상인들을 위한 국제 교역항이자 마라케쉬의 외항 에사우이라로 변모시켰다. (1764년) 그는 세금을 낮추는 대신 무역을 통해 차익을 매우고자 하였다. 또한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파괴된 카사블랑카 (안파)에서 포르투갈인들이 떠나자 재건에 나서 현존하는 메디나 (구시가지)를 건설하였다.
파일:모로코 미국.jpg파일:모로코 미국 1.jpg
1787년 7월 18일 비준된 미국-모로코 우호 조약. 미국 정부가 구성 (1789년) 되기도 전에 체결되었고,
1786년 존 애덤스토마스 제퍼슨이 대표로 서명하였다.[아랍어]

1769년 포르투갈은 주민들을 브라질 남부로 이주시키며 모로코에서의 마지막 거점 마자간 (엘자디다)에서 철수하였다. 이로써 1415년 세우타 점령 후 3세기 넘게 계속된 포르투갈의 모로코 간섭 역시 종료되었고, 양국은 비로소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이로써 외세가 장악한 모로코 해안은 (현재와 마찬가지로) 스페인령 세우타와 멜리야만이 남았다. 이마저 일소하기 위해 무함마드는 1774-75년 4만 대군을 이끌고 친히 스페인령 멜리야를 포위하나 약속되었던 영국 측의 원조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실패로 귀결되었다. 1777년 12월 20일 무함마드는 모로코의 항구에서 교역할 수 있는 국가 목록에 미국을 포함시켰다. 독립을 선언한지 불과 1년 후였고, 비록 직전의 새러토가 전투가 있었다고 하나 미국의 존립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세계 최초로 미국을 정식 국가로 인정한 것은 큰 의미가 있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양국은 1787년 미국-모로코 우호 조약을 체결하였다.

한편 1775년에 그는 우다야에 이어 아비드 부대 역시 견제, 수도 메크네스에서 북쪽 탕헤르로 이동시키며 권력에 거리를 두게 하였다. 이에 아비드는 반발하며 무함마드의 아들 야지드를 술탄으로 칭하였다. 그러나 야지드가 마음을 바꿔 부왕과 화해하며 반란은 졸속히 끝났고, 아비드 부대는 여러 소부대로 나뉘어 탕헤르 / 라라셰 / 라바트 / 마라케쉬 / 수스 등지에 분산 배치하였다. 그럼에도 그들은 1782년까지 소요를 벌였고, 1776-82년의 가뭄과 흉작, 1779-80년의 역병이 겹치며 모로코는 7년간 재난을 겪었다. 이에 무함마드는 밀을 수입하고 세금을 인하했으며 식량과 돈을 풀어 구휼에 나서 피해를 완화하였다. 치세 말기의 무함마드는 앞서 언급된 미국과의 우호 조약 외에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1790년 4월 그가 사망하자 계승한 아들 물라이 야지드는 부왕의 개항 정책을 뒤엎으며 유럽과의 조정자 역할을 하던 유대 공동체를 탄압하였다.

1792년 세우타 공격에 나선 야지드가 부상을 입고 사망하자, 동생 술레이만 (슬리마니)이 다른 두 동생인 북쪽의 마슬라마와 마라케쉬의 히샴을 꺽고 계승하였다. 술레이만 역시 쇄국 정책에 나서 유럽과의 교역을 거의 중단시켰으나 야지드처럼 잔혹하지는 않았다. 한편 당시 유럽과 지중해를 뒤덮던 나폴레옹 전쟁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은 모로코에 중립을 유지할 것을 강권하였고, 술레이만의 쇄국 정책은 이와 같은 기류와 함께 유지되었다. 다만 그 역시 미국에 대해서는 탕헤르에 2층 석조 건물을 하사하는 등 우호를 이어갔다. 이는 미국이 국외에 처음으로 얻은 재산이었고, 향후 140년간 영사관으로 기능하였다. 1811년 이후 술레이만은 와하비 근본주의를 지지하며 수피 종단들을 억누르려 하였는데, 당시 모로코에서 수피는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으며 술레이만 본인 역시 그중 하나인 티자니야 종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30년간 통치한 술레이만은 1822년 11월 사망하였고 조카 압둘 라흐만 벤 히샴이 계승하였다.

2.6. 외세의 침공과 근대화 시도

파일:탕헤르 모로코.jpg파일:압둘라흐만 모로코.jpg
탕헤르의 옛 미국 영사관 건물 압둘 라흐만과 아비드 친위대

압둘 라흐만은 국내의 지식인들을 등용하고 점차 확대되는 서유럽 세력의 영향력에 맞섰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모로코의 경제는 매우 침체되어 있었고, 세수로는 정부 지출이 충당되지 않았다. 이에 압둘 라흐만은 30년 이상 중단되었던 대외 무역을 재개함과 동시에 바르바리 해적들을 후원하였다. 다만 후자로 인해 분노한 유럽 열강들이 모로코 해안을 공격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1828년 영국이 탕헤르를 봉쇄하였고 1829년 오스트리아 해군이 라라셰, 아실라, 테투안을 포격하였다. 그러던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를 침공하자 모로코에서는 알제리 지원을 위한 여론이 들끓었고, 많은 무기와 자원자들이 알제리 저항군 지도자 압델 카디르로 향하였다. 1837년에는 모로코의 울라마가 지하드를 제창하는 파트와를 내릴 정도였다. 하지만 압둘 라흐만은 프랑스에게 모로코를 침공할 구실을 주기 싫었고, 최소한 표면상으로나마 중립을 표방하였다.

그럼에도 1844년 압델 카디르가 모로코로 망명해오자 이를 거부하지 못하였고, 여론의 성화에 피난처를 제공해주어야 했다. 그의 예상처럼 프랑스 군은 이를 구실 삼아 침공, 같은해 8월 우지다 부근 이슬리 전투에서 모로코 군을 괴멸시켰다. 같은 달 프랑스 함대는 탕헤르와 에사우이라를 포격하였고, 이에 압둘 라흐만은 1844년 10월 탕헤르 조약과 1845년 3월 18일 랄라 마기나 협정에 서명하여 프랑스의 우위와 알제리 지배를 인정하였다. 더이상 술탄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압델 카디르는 자치적이던 북부 리프 지방에 피신했다가 1848년 결국 프랑스에게 항복한다. 한편 1845년 이후 압둘 라흐만은 후계자인 아들 무함마드에게 군대의 근대화를 도맡게 하였다. 후자는 튀니지 장교들을 초청하여 신식 군대인 아스카리를 창설, 기존의 아비드나 구유쉬를 대체하였고 알제리 주둔 프랑스 장교[9]를 로비 끝에 개종시켜 그의 지도 하에 페스에 무기 학교인 마드라사 알 무한디신을 건립하였다. 또한 무함마드는 친히 공학과 과학에 대한 유럽 서적들의 번역을 이끌었고 지브롤터와 이집트의 영국군에게 모로코 포병들의 정기적인 훈련을 부탁하였다.

한편 19세기 중반 반프랑스 감정이 심화된 와중에 식량난에 시달리던 살레 주민들이 프랑스 물품을 약탈하자 1851년 프랑스 해군은 살레와 라바트를 포격, 포대를 파괴하였다. 이로써 살레의 관민 20여명이 희생되고 시가지 상당 부분이 전소하였다. 다만 수비대의 대응에 프랑스 군 역시 4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하였다. 이후 프랑스가 탕헤르 역시 포격할 것이라 협박하자 11월 압둘 라흐만은 (약탈에 대해) 10만 프랑의 배상금을 내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1856년에 모로코는 영국에게 관세를 10%로 낮추는 무역 협정을 맺었고, 외세의 간섭이 본격화되던 1859년 8월 압둘 라흐만은 37년의 재위 끝에 사망하였다. 사후 아들 무함마드 5세가 계승하였다. 그는 개혁을 이어나가려 하였으나 곧 스페인과의 전쟁에 직면하였다. 1844, 45, 48년 리프 지방 부족들의 세우타와 멜리야 공격에 대한 (10년 후의) 보복을 핑계로 1859년 말엽 4만 5천의 스페인 군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모로코를 침공하였다. 스페인 함대는 탕헤르, 테투안, 아실라를 포격한 후 세우타에 병력을 상륙시켰다. 이에 부분적으로 근대화된 모로코 군 역시 북상하여 맞섰다.

그러나 1860년 초엽 테투안 전투에서 승리한 스페인 군은 테투안을 점령하였고, 4월 무함마드는 와드 라스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마무리하였다. 모로코 군은 6천의 전사자를 내었고 스페인군 역시 전사 1200에 2900여 병사자를 내었기에 휴전은 빠르게 성사되었다. 모로코는 스페인에게 서남 해안의 시디 이프니와 북해안의 자파린 제도를 할양하고 200만 두로의 배상금을 납부하게 되었다. 또한 기독교 선교가 공인되었고 테투안에 교회가 건립되었으며 스페인은 최혜국 지위를 얻었다. 스페인 군은 영국에게 빌린 돈에 의해 배상금 납부가 완료된 1862년에야 테투안에서 철수하였다. 여러 노력에도 패전하고 경제 위기에 몰린 무함마드는 절망하여 학문에만 열중하며 사실상 정사에서 물러났다. 한편 재정 적자를 타개하기 위해 그는 부족 지도자 (암가르)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요구하였고, 그들이 거부하자 카이드 (장군)를 대신 파견해 이를 강제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카이드들이 해당 부족들을 기반으로 기존 이상의 자치를 구가하자 중앙 정부는 더욱 약화되었다. 암울한 상황에서 1873년 무함마드는 사망하였고 동생 하산 1세가 계승하였다.

2.7. 식민 지배와 저항

하산 1세의 치세에 열강의 입김은 더욱 강화되었다. 특히 12개국과 체결한 1880년의 마드리드 협정에서 열강들은 각자 소유한 모로코내 부동산과 재산에 대한 지배권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모로코 내부 역시 분열된 상황에서 하산은 1893년 6개월에 걸친 순행에 나섰다. 하산은 케니프라, 서사하라 일대의 카이드를 새로 임명했는데 그들은 후일 프랑스에 대한 독립 투쟁의 주요 지도자들이 되었다. 순행을 마친 후 하산은 1894년 6월 마라케쉬에서 사망하였고, 라바트에 매장되었다. 그를 계승한 아들 압델아지즈의 치세에는 열강들이 모로코를 두고 다투며 1905년 모로코 위기와 1906년 알헤시라스 회담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1907년에는 마라케쉬에서 군중에게 프랑스 인이 살해된 것을 핑계로 프랑스 군이 침공, 우지다를 점령하였다. 같은해 카사블랑카에서는 반프랑스 봉기가 일어나 철도 노동자들이 살해되었고, 이에 프랑스 함대가 도시를 포격한 후 장악하였다.

혼란이 이어지던 무렵 마라케쉬 총독이던 압델아지즈의 형 압델하피드가 술탄의 친유럽 행보를 비난하며 카이드 마다니 알 갈루이의 지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1908년 압델하피드는 페스를 점령, 모로코 내륙을 장악하였고 압델아지즈는 라바트에서 해안 일대만을 통치하였다. 같은해 압델하피드는 동생에게 승리를 거두었고, 이듬해 압델아지즈가 양위하고 탕헤르로 은퇴하면서 압델하피드가 단독 술탄이 되었다. 1911년 재차 반프랑스 봉기가 일어나자 독일이 개입하였으나 결국 협상을 통해 물러났고, 거칠 것이 없어진 프랑스는 1912년 3월 30일 압델하피드를 압박하여 모로코가 프랑스와 스페인의 보호령이 된다는 페스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에 대한 반발로 4월 17일 페스 주민들과 군인들이 봉기하여 약 백여명의 유럽인과 유대인들을 죽였으나, 프랑스 군의 포격으로 6백명이 살상당하며 진압되었다. 같은해 8월 압델 하피드가 동생 유세프에게 양위하자 남부의 카이드 아흐마드 알 히바 역시 타루단트에서 술탄을 칭하며 봉기하였다.

반외세를 주장한 알 히바는 아가디르와 다라 협곡 등 남부 일대와 갈루아 가문의 지지를 받으며 8월 18일 마라케쉬에 입성하였다. 진압에 나선 프랑스 군은 9월 6일 마라케쉬 부근 시디 부 우스만 전투에서 알 히바를 격파하였고, 2천여 부족 병사들이 전사하였다. 이후 알 갈루아 가문은 프랑스 측으로 전향하였고, 알 히바는 수스 지방으로 밀려났다. 다만 그는 1919년 6월 사망할 때까지 저항을 이어나갔고, 사후 동생 메렙비 렙부 역시 고산 지대에서 반란을 지속하였다. 북부 리프 지방에서는 1921년 압델 카림이 봉기하여 스페인 군을 몰아내고 리프 공화국을 건설,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다. 4년간 독립을 유지한 리프 공화국은 1925년 스페인-프랑스 공동 토벌로 붕괴되었다. 이러한 혼란의 상황 속에서 술탄 유세프는 프랑스의 영향력이 강한 해안의 라바트로 거처를 옮겼고, 이로써 현재까지 모로코의 수도로 기능하게 되었다. 1927년 유세프는 사망하였고, 현대 모로코를 이룩한 아들 무함마드 5세가 계승하였다. 그의 지도 하에 모로코는 1955년 독립하였고, 현재 그 손자인 모하메드 6세가 재위 중이다.

3. 역대 군주

파일:모로코 국장.svg
모로코 알라위 왕조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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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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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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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모로코 왕국 서사하라
※ T는 북부 탕헤르 일대, N은 지중해 연안 리프 지방, C는 카사블랑카, F는 페스(중북부), M는 마라케시, A는 아틀라스 산지, S는 동부 테필랄트(시질마사), WS는 서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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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는 비슷한 시기 남부 수스로 이주한 사드 왕가와 비교된다.[2] 본명은 알리인데 부친과 헷갈려 그냥 샤리프라 불렸음[3] 표준 아랍어로는 자이쉬, 즉 군대를 뜻함[4] 서아프리카 흑인 노예 혹은 그 후손들[5] 주앙 4세의 딸 카트린느와 찰스 2세의 결혼[6] 이들은 1664년 5월 영국인 총독을 습격해 살해한 바 있다[7] 이때 이스마일은 그의 피를 땅에 뿌리게 했는데 무함마드 후손의 피를 뿌리는 것에 거부감을 느껴 불복한 도부수와 동의한 도부수 모두 처형하였다고.. 그해 7월 무하마드 알 알람은 메크네스에서 자살한다[아랍어] 원문 الحمد لله هذا تقييد شروط الصلح التي جعلناها مع الماركانوس وأثبتناها في هذا الدفتر ووضعنا عليها طابعنا لتبقى مستمرة إن شاء الله وكتبت بحضرة مراكش في الخامسة والعشرين من شعبان المبارك عام مائتين وألف[9] 조제프 드 사울티. 이슬람 개종 후 압둘 라흐만 알 알리로 개명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