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로코 역사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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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로코의 역사2. 고대
로마 시대 유적인 볼루빌리스 (왈릴리). 788 ~ 809년간 중세 모로코의 첫 국가라 할 수 있는 이드리시 왕조의 첫 수도였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마우레타니아(Mauretania)라고 불렸다. 원주민은 베르베르인 계열이었다. 고대 카르타고, 누미디아와 교류가 활발했던 마우레타니아는 포에니 전쟁 이후 지중해의 강대국이 된 고대 로마의 영토가 되었다.
로마의 동서분할 이후 서로마 제국에 속하게 된 이 지역에서는 길도라는 이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스틸리코에 의해 진압되었다. 당시 서로마 제국의 기록을 보면 마우레타니아 내륙 원주민들은 상당히 원시적이고 낙후된 것으로 묘사되었는데, 아닌게 아니라 서로마 제국이 몰락하는 과정에서 반달족들이 모로코 일대를 지나쳐 튀니지 일대를 중심으로 정착하였고, 동로마 제국의 벨리사리우스가 반달 왕국 재수복하는 과정에서도 역시 모로코는 일부 해안 지대 외에는 재수복이 되지 못하고 방기되었다.
3. 중세
이드리스 1세 영묘
8세기 이슬람 제국의 대정복 이후 아랍인들이 대거 유입되었고, 해 지는 곳이라는 뜻의 마그레브라고 불리게 되었다. 비록 반세기에 걸친 저항 끝에 우마이야 왕조에게 정복되었으나 이슬람 개종 후에도 자신들을 차별하는 아랍인들에 대한 현지 베르베르 인들의 분노가 축적된 결과 모로코에서 시작된 베르베르 대항거는 마그레브 전역의 실질적 독립으로 이어졌다. 이슬람화 이후 최초로 모로코 주요부를 지배한 토착 왕조는 786년 들어선 아랍계 이드리시 왕조로, 중세 모로코의 수도로 기능한 페스가 세워진 것이 이때이다. 약 한세기간 번영을 누린 이드리시 왕조는 10세기 들어 북쪽 안달루스의 후우마이야 왕조와 동쪽 이프리키야의 파티마 왕조 간의 패권 다툼에 휘말려 쇠퇴하였다.
그후 10세기 말엽 파티마 조의 속국인 지리 왕조가 패권을 잡는가 싶었으나 현지 베르베르 부족들의 반발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하였다. 그리고 11~14세기 들어 모로코를 기반으로 한 무라비트 왕조와 무와히드 왕조가 안달루스, 알제리, 튀니지에 이르는 넓은 영역을 점유하였고 이베리아 반도로의 진출을 시도하며 안달루스의 토후들을 도와 기독교 왕국들과 전쟁을 벌였으나 레콘키스타의 성공, 사막 유목민들의 침략[1], 결정적으로 내란과 내전으로 인해 쇠퇴했다. 이후 마린 왕조를 비롯한 모로코 왕조들은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고 대개 현재의 모로코 영토를 유지했다.
4. 근세
오스만 제국도 끊임없이 정복을 시도했으나, 결국 실패하여 북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오스만 제국의 지배권 밖에 있었다. 다만 알제리 주둔 오스만 군이 모로코의 여러 내전에 개입하였고 1554년과 1576년 페스를 점령한 후 사드 왕조로부터 연공을 얻어내기도 하는등 오스만의 패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현재 왕가인 알라위 왕조는 무함마드의 후손으로 전해지며, 입향조는 13세기말 인물인 알 하산 앗 다르킬(Al-Hassan Ad-Dakhil)이라는 인물인데, 메디나 근교 얀부로부터 이맘으로 초청받은 모로코의 한 마을로 이주했다고 한다. 이후 그의 후손들은 아틀라스산맥 지역에서 세력을 키워가다 사디 왕조의 혼란을 계기로 알라위 왕가의 사실상 시조로 여겨지는 샤리프 이븐 알리(Sharif ibn Ali)가 1631년 타필랄트의 술탄임을 선포해 즉위했고, 아들 물라이 알 라시드(Mulai Al-Rashid)는 1666년 페스를 점령해 왕조의 수도로 삼은 데 이어 1669년 마라케시까지 점령해 모로코 통일에 성공한다.
5. 근대
이후 역대 술탄들은 중앙집권화에 노력했고 1777년에는 미국과 조약을 맺어 세계최초로 미국을 승인한 나라가 되었다. 모로코 역시 알제리, 튀니지 등과 함께 마그레브 해적들의 소굴이자 백인 노예무역의 거점 중 하나였는데, 19세기 아프리카 대륙 식민화가 시작되자 모로코의 안위도 위태롭게 되었다. 19세기 들어 프랑스가 해적 토벌을 명분으로 알제리를 공격해 식민화하자 알제리를 돕다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면서 모로코의 군사적 약세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1860년에는 중세시절부터 꾸준히 갈등을 거듭하던 스페인의 공격을 받고 테투안 전쟁에서 크게 패하여 와드라스 조약을 맺고 스페인의 진출도 허용하고 말았다.이후 영국과 조약을 맺고 유럽 열강과 미국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며 제국주의 시절 모로코 위기가 발생한 끝에 1912년 12월 수도 페스에서 조약을 맺어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전락했으며, 북부 일부는 스페인의 통치에 들어가 식민 지배를 당했다. 1921년 베르베르인들이 일제히 봉기하여 리프 전쟁을 일으켰으나 프랑스-스페인 연합군이 수십만 대군을 동원하고 화학무기를 비롯한 당대의 각종 첨단무기들을 총동원하여 결국 패배하였다.
모로코는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스페인과 매우 밀접한 지역이다. 중세시대 당시에는 레콘키스타의 대상이었고 이후로도 충돌했으며 중남미 지역이 독립하고 미국-스페인 전쟁으로 쿠바, 필리핀 등 나머지 스페인령 식민지까지 상실하는 와중에도 가장 마지막까지 보유했던 곳이 이 모로코 지역이었다. 당연히 스페인의 모로코에 대한 집착은 대단했으며 근대 이후 스페인군의 양적, 질적 주력 부대는 '아프리카 군단'으로 불렸던 모로코 주둔 병력이었다. 때문에 모로코는 스페인 내전과도 간접적으로 연결된다. 내전을 일으킨 프랑코가 이 모로코 주둔 병력의 사령관이었기 때문이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6. 현대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연합군이 횃불 작전의 일환으로 상륙하여 비시 프랑스군, 독일군과 혈투를 치른 장소이기도 하다. 1925년에는 프랑스 통감에 의해 수도가 라바트로 천도된다.195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그것을 주도하던 술탄 무함마드 5세가 1953년 코르시카로 유배를 당하고 프랑스가 괴뢰 왕을 세우기도 했다. 1955년에 무함마드 5세는 복위하였고, 1956년 3월 2일 술탄국으로 독립하였으나, 1957년 왕호를 술탄에서 왕(Malik)으로 바꾸어 왕국이 되었다. 1961년 하산 2세가, 1999년 무함마드 6세가 즉위하였다. 바레인에서 기존의 하킴 칭호에서 1999년 아미르, 2002년 말리크로 칭호를 격상한 것과 역순이라 할 수 있다.
2011년 튀니지와 이집트를 덮친 민중혁명의 여파가 자국에도 미칠지 왕가가 불안해하고 있다. 그동안 친미 및 비공식적인 친이스라엘 정책을 취해 왔기에 이슬람교도들에게 반발을 받아 왔고 이집트처럼 여러 면에서 경제가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모로코는 튀니지나 이집트와 다르게 나름대로 민주화가 진척되었기는 하나, 2002년 진행된 선거도 눈속임이라는 비난이 많다. 왕권이 여전히 절대적이며 총리는 허수아비라는 비난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시위가 벌어져 사망자가 생겨나고 있다. 리비아와 전쟁 중이며 바레인 등 여러 나라의 사상자가 더 많기에 국제적으로 묻혔지만 모로코도 2월 말까지 수백여 명의 사상자가 생기며 수천여 명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수도인 라바트에서 3~5천여 명의 시위대가 모여서 왕권 축소, 총리 퇴진, 경제 평등 확보 등을 외치면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래도 시국이 안정되면서 2012년 들어서 시위는 거의 사라졌는지 외신 보도도 되지 않으며, 모로코에 간 사람들도 시위를 보지 못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1] 모로코 왕조들은 사하라 사막으로의 진출도 시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