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원과 구도심 전경
스페인 지배기의 병영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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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랍어 القصر الكبير베르베르어 ⵍⵇⵚⵔ ⵍⴽⴱⵉⵔ
포르투갈어 Alcácer-Quibir
스페인어 Alcazarquivir
영어 El-Ksar el Kebir
모로코 북부의 도시. 탕헤르에서 남쪽으로 75km, 셰프샤우엔에서 서남쪽으로 55km, 라라슈에서 동남쪽으로 25km, 케니트라에서 동북쪽으로 100km 떨어진 해안에 위치한다. 인구는 13만명으로, 모로코 서북 해안 및 리프 산지와 모로코 중북부 세부 강 평원을 이어주는 요충지이다. 지명은 아랍어로 '큰 궁전'이란 뜻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도시로, 1578년 포르투갈 제국의 침공을 사드 왕조가 격파한 와디 엘마카진 (알카세르 키비르) 전투의 장소로 유명하다. 전장은 현 시가지의 동북쪽에 있다. 현재는 모로코의 주요 농업 지역 중 하나로, 모로코 설탕의 20%를 생산한다. 루쿠스 강 북쪽에 자리한 구도심에는 중세 시기 옛 건물 및 스페인 지배기의 건물이 많다.
2. 역사
루쿠스 강 하류를 따라 형성된 비옥한 흑토 지대에 위치했기에 선사 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하였다. 기원전 1000년경 카르타고의 도시로 세워졌고, 포에니 전쟁 후 로마 제국 하에서 오피둠 노붐 (Oppidum Novum)이라 명명되었다. 인접한 리쿠스 (현 라라슈)와 함께 번영하던 도시는 비록 반달 왕국 시기 쇠락했지만, 이슬람 정복 이전부터 유지되던 모로코의 7대 도시 중 하나였다.2.1. 중세
1578년 '세 왕들의 전투' 전장 | 무와히드 왕조기 성벽 |
8세기 이드리스 왕조 성립 후 일대에는 쿠타마 부족이 정착하였고, 수크 쿠타마 혹은 크사르 쿠타마라 불렸다. 이는 후일 크사르 엘케비르로 바뀌었다. 11세기 안달루스의 지리가 알 바크리는 수크 쿠타마에 대해 리쿠스 강을 굽어보는 언덕 위에 성채가 있다고 기록하였다. 12세기 알 이드리시는 탕헤르, 아실라, 체미쉬 (라라슈), 페스를 이어주는 교차로로써 여러개의 큰 시장이 자리한다고 묘사하였다. 11-12세기 무라비트 왕조 시기 크사르 엘케비르는 안달루스 원정의 거점 중 하나였고, 이드리시 모스크의 증축과 함께 도시 확장이 이루어졌다. 12-13세기 무와히드 왕조 시기에는 안달루스 출신 가문들이 레콩키스타를 피해 고향과 비슷한 입지 조건을 갖춘 크사르 엘케비르에 정착하였다. 그중에는 실베스 출신의 신학자 물라이 알리 부갈렙과 성녀 랄라 파티마 등이 있다. 전자는 사후 도시의 수호성인이 되었다.[1]
12세기 무와히드 왕조의 아부 유수프 야쿱 알 만수르는 도시에 성벽을 둘렀고, 대사원을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하였다. 또한 그의 치세 기간 동안 함맘 (목욕탕)과 관광서 및 사냥장 등이 세워졌고, 이때 크사르 엘케비르는 모로코 북부의 중심 도시 중 하나로 번영하였다. 14세기 크사르 엘케비르는 마린 왕조에 복속한 첫 도시들 중 하나였다. 마린 왕조기 도시는 안달루스의 과디시 성주 출신인 라이스 아퀠루라스 가문이 자치적으로 통치하였고, 이븐 칼둔 역시 이를 언급하였다. 아불 하산 알리의 치세에는 대사원 부속 마드라사가 세워졌고, 그의 아들들 중 하나가 외곽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3세기 가량 번영하던 크사르 엘케비르는 15세기 와타스 왕조 시기의 혼란과 그를 틈타 포르투갈 제국이 라라슈 등 해안 지역을 잠식하자 교류가 줄고 고립되어 쇠퇴하였다. 당시 분권화된 상황에서 도시에는 바누 압델 하미드 아루시 가문이 집권하였다.[2] 16세기 레오 아프리카누스는 크사르 엘케비르의 주민들은 아실라를 점거한 포르투갈의 위협 때문에 주변 6km 이내의 땅만을 경작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또한 15-16세기 도시는 종종 습격과 약탈을 당하였는데, 1578년 8월에는 모로코-포르투갈 역사의 운명의 장이 되었다. 포르투갈 국왕 세바스티앙 1세는 자신에게 망명한 압달라 모하메드를 왕으로 세우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상륙, 페스로 향하기 위해 진격하다 크사르 엘케비르 북쪽의 평원에서 사드 왕조의 압델 말리크[3]와 아흐마드 알 만수르가 이끄는 군대와 대치하였다. 이어진 크사르 엘케비르 전투에서 세바스티앙, 압달레 모하메드, 압델 말리크가 전사하였는데 결과적으로는 포르투갈의 패배였다. 참패와 왕위 단절을 겪은 포르투갈은 이베리아 연합이란 이름으로 스페인에게 사실상 병합되었고, 사드 왕조는 국제적으로 위신을 세우며 전성기를 누렸다.
2.2. 카디르 가일란
전근대 시기 크사르 엘케비르의 마지막 번영을 일군 카디르 가일란 / 도시를 파괴한 물라이 이스마일 |
사드 왕조의 쇠퇴기 북부 모로코는 재차 무주공산이 되었고, 1652년 그라나다 출신 가문의 군벌 카디르 가일란이 크사르 엘케비르를 장악하였다. 그는 도시에 있는 자신의 반대 파벌인 칸타리 부족을 학살하였고, 다르 가일라니 궁전을 세워 자신의 근거지로 삼았다. 일대를 석권한 카디르 가일란은 1655년과 1657년 스페인령 라라슈를 포위했으나 실패하였다. 한편 탕헤르에 대한 그의 압박은 효과를 내어 1662년 포르투갈은 도시의 소유권을 영국에 넘겼다. 이후로도 카디르 가일란은 탕헤르 동쪽 말라바타에 성채 (카스바 가일란)를 축조하고 리프 산악 부족들을 조직하여 지속적으로 도시를 고립시켰고, 1664년 5월 영국인 총독을 기습해 전사시켜 유리한 조건의 휴전을 얻어내기도 하였다. 다만 1666년 라라슈에 대한 3차 포위 공격은 동생의 전사와 함께 재차 실패로 귀결되었다.
그리고 1667년 알라위 왕조의 물라이 알 라시드가 페스를 장악하고 북상, 카디르 가일란을 격파하고 이듬해 크사르 엘케비르를 점령하였다. 이후 오스만령 알제리로 망명한 카디르 가일란은 1672년 알 라시드가 사망하자 모로코로 귀환, 물라이 이스마일에 반기를 든 조카 아흐메드 벤 마레즈와 연합하였다. 타자 포위 도중 카디르 가일란의 습격으로 물러선 물라이 이스마일은 보복에 나섰고, 1673년 9월 크사르 엘케비르에서 카디르 가일란은 알라위 군대에 패하고 전사하였다. 전란으로 시가지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물라이 이스마일은 적의 거점이던 크사르 엘케비르의 성벽을 허물고는 도시를 재건하지 않았다. 한편 카디르 가일란의 시신은 그를 존경하던 주민들에 의해 수습되어 시내에 매장되었는데, 1984년 알라위 왕가의 지시로 파괴되었고 그 자리에는 모스크가 세워졌다.
2.3. 근대
16세기에 세워져 북쪽 도시의 중심이 된 엣-사이다 모스크
17세기 중반의 번영을 마지막으로 도시는 한동안 폐허인 채로 방치되며 쇠락하였다. 1745년에는 리프 산지의 호족이자 탕헤르 총독 아흐메드 알-리피가 도시 외곽에서 벌어진 엘민자 전투에서 알라위 술탄 물라이 압델라에 패하고 전사하였다. 크사르 엘케비르는 점진적으로 복구되었지만, 중소도시로 머물렀다. 1883년 도시를 시찰한 스페인 조사단은 도시가 강과 가까운 (따라서 가끔 홍수가 나는) 이드리스 ~ 무와히드기 시가지와 16세기 무렵 비교적 고지대에 조성된 츠리아, 그리고 둘 사이에 있는 옛 비단 시장과 멜라 (유대인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기록하였다. 도시 전체를 두르던 성벽은 대부분 허물어져 있었으며 도시 주변, 특히 서남쪽에는 과수원이 즐비하였다.
2.4. 근현대
현대적 시가지로 개발하기 전인 1900년의 크사르 엘케비르
1911년 모로코 북부를 점령한 스페인은 폐허로 남아있던 크사르 엘케비르를 군대 주둔지로 삼아 재건하였고, 알카자르 키비르라 명명하였다. 스페인령 모로코 시기 도시는 프랑스령 모로코와의 경계로써 스페인의 주요 거점 중 하나로 중시되었고, (중세 때처럼) 스페인 이주민들이 정착하여 기존 메디나의 동쪽과 북쪽에 병영과 철도역을 중심으로 신도심을 이루었다. 수천이던 인구는 탕헤르-페스 철도의 개통 및 라라슈 등지로의 도로 개설과 함께 1만 5천으로 늘었고, 1920년대 시가지 확장과 함께 잔존하던 성벽은 완전히 헐렸다.
1940년대 도시 계획에서 유럽인 구역은 고층, 무슬림 구역은 저층으로 규정되어 은연 중의 격차를 나타내었다. 스페인 시기 크사르 엘케비르에는 페스, 마라케쉬와 마찬가지로 많은 '네오-아랍 양식'의 건물들이 세워졌다. 1956년 독립 후 시내의 스페인, 유대인들은 대부분 국외로 이주하였다. 1970년대 하산 2세는 도시의 동남쪽 7km 지점에 와디 엘마카진 저수댐을 세웠고, 이와 함께 활발해진 루쿠스 강을 이용한 관개 농업 덕에 크사르 엘케비르는 30년간 농경지가 3배로 증가하는 등 모로코의 주요 농업 중심지 중 하나로 부상하였다.
3. 볼거리
수키야 모스크 | 스페인 지배기에 세워진 바샤 탑 |
- 구도심 (메디나)
옛 모스크와 시장, 좁은 골목을 지닌 전형적인 구도심이다.
- 대사원
이드리스 왕조 시기에 처음 세워져 지속적으로 보강되었다.
- 다르 엘다바가 (دار الدباغة)
페스 다음가는 모로코 북부의 염색 공장이었다.
- 스페인 시기 병영 유구.
현재는 모하메디아 고등학교의 정문이다. 주변의 시청과 성당도 스페인 보호령 시기에 세워진 건물들이다
- 크사르 엘케비르 기차역.
20세기 초엽 스페인 보호령 시기에 세워져 1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