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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01:18:31

신명철/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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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아마추어 시절3. 프로 시절
3.1. 롯데 자이언츠 시절3.2. 삼성 라이온즈 시절
3.2.1. 2007 시즌3.2.2. 2008 시즌3.2.3. 2009 시즌3.2.4. 2010 시즌3.2.5. 2011 시즌
3.2.5.1. 포스트시즌
3.2.6. 2012 시즌3.2.7. 2013 시즌
3.3. kt wiz 시절
3.3.1. 2014 시즌3.3.2. 2015 시즌
3.4. 국가대표 경력
4. 은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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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명철의 선수 경력을 서술한 문서.

2. 아마추어 시절

용지초, 마산동중, 마산고등학교연세대학교 체육교육학과(1997학번)를 거치며 98 아시안게임(드림팀) 금메달 등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으며, 이보다 앞서 열렸던 세계선수권(이후 야구 월드컵으로 바뀌었다가 프리미어 12의 창설로 폐지) 결승에서는 쿠바의 에이스이자 훗날 망명하여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로 진출하는 호세 콘트레라스에게 영봉패를 면하는 홈런을 뽑아내는 등 공수주를 두루 갖춘 아마최강의 내야수라고 평가를 받으며 2001년 계약금 3억 2천만원을 받으며 롯데에 입단했다. 이 금액은 2012년까지도 역대 롯데 신인 야수 중 최고 계약금.

3. 프로 시절

3.1. 롯데 자이언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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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고졸우선지명을 받고 입단한만큼 기대를 크게 모았으나, 입단 첫 해에는 롯데 내야에 박정태, 김민재의 거물 키스톤 콤비들이 자리하고 있었기에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2001년을 끝으로 김민재가 SK로 이적하고 박정태가 노쇠화를 보이면서 기회는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으나, 그다지 눈에 띄는 활약을 하지 못했다. 2004년 2루수로 전업한 조성환이 손등 골절상으로 시즌 아웃되면서 주전을 확보하나 싶었으나 본인 또한 얼마 뒤에 부상으로 아웃되었다는 게 함정.

성적 역시 연차를 거듭할수록 꾸준함을 보였는데, 문제는 이 꾸준함이 밑바닥의 꾸준함이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겠다. 단 한번도 2할 7푼 이상을 찍은 적이 없으며, 대충 들어오는 공이면 시원한 선풍기 스윙으로 삼진을 당하는 등 선구안 역시 엉망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출루율 또한 상위타선에는 절대로 못써줄 수준. 다만 주루 센스는 나쁘지 않았으며, 아주 가끔 정신줄을 놓는 일만 아니면 수준급의 수비를 보여주기도 했다. 번트 대는 능력도 좋아서 국내 타자중 수위를 다툴 만한 작전수행능력도 가지고 있다. 이렇게 기대를 버릴 만하면 또 어느 정도 하고, 기대를 가질 만하면 또 실망스럽게 만드는 그런 선수였다.

롯데에서의 실질적인 커리어 하이 시즌인 2005년에는 116경기 출전하여 타율 0.256 88안타 5홈런 33타점 21도루...에 볼넷 25개, 삼진 79개를 기록했지만, 그 이후 구단과 연봉협상과정에서 시간을 질질 끈 나머지 훈련량이 부족해서인가, 2006년에는 73경기 출전 타율 0.175 29안타 9타점 5도루, 완벽한 막장 성적을 보여주며 같은 팀의 손인호와 엮여 'SS201-인호, 명철 2명은 영(0)원한 1할타자'라는 우스개소리를 듣기도 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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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으로 '신명철 새우버거'라는 이름으로 돌아다니는 이 짤방이 유명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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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게 원본이다. 2005년 8월 25일 SK전 결승타를 쳐서 데일리 MVP 선정 기념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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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삼성 라이온즈 시절

3.2.1. 2007 시즌

결국 더 이상 성장을 바랄 수 없다고 판단한 롯데 코치진에 의해 2006년 11월 21일, 삼성 라이온즈의 좌완 투수 강영식을 상대로 서로 잉여 자원끼리 맞트레이드되었다.[2] 당시 강영식권혁에게 밀려 잉여가 된 데다가 삼성의 내야에는 2루수 박종호의 부상 및 노쇠화, 박석민[3]의 상무 입대에 의해 거의 무주공산이었던 터라 무혈입성했지만... 역시나 명철신은 명철신,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언제나 해오던 만큼'만' 활약했다. 트레이드 첫 해였던 2007년 시즌 성적은 126경기 전 경기에 출장해 타율 0.252, 105안타, 5홈런, 31타점, 19도루.

그래도 삼성 이적 후 첫 시즌부터 데뷔 첫 100안타도 쳐 보고, 가을야구도 해 보고, 포스트 시즌에서는 2001년 이후 롯데 선수들은 해 보지 못한 포스트 시즌 안타, 출루, 득점, 홈런 등을 모조리 해 본 데다 시즌 후 연봉 협상에서도 처음으로 억대 연봉을 받으면서 롯데 자이언츠를 나가 출세했다는 평을 들었다. 강영식도 2008 시즌 불영식에서 롯데 필승조로 거듭났으니 결과적으로 이 트레이드는 보기 드문 윈-윈 트레이드가 된 셈. 거기에 아마 시절의 라이벌격 선수였던 박한이의 부진에 의해 상대적으로 더 돋보이기도 했으니 프로에 와서 간만에 행복한 시즌을 보내지 않았을까. 트레이드되고 조금 더 지난 후의 일이지만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해 보기도 하고, 20-20도 찍어 보았고, 팀의 우승도 2번 맛보았으니.

3.2.2. 2008 시즌

2008년에는 시즌 도중에 박한이양준혁, 진갑용을 제외한 거의 모든 주전 타자들이 세대교체로 물갈이 되는 와중에, 또다시 SS201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놀라운(?) 성적을 올렸으며, 그 엄청난(?) 타율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타율의 허승민과 함께 선발 라인업에 끼는 매우 신기한(?) 일이 벌어지면서 삼성 팬들의 욕을 양분했다. 정규시즌 기록은 타율 0.184(...), 홈런 1개에 17타점, 9도루를 기록.

하지만 가을야구가 시작하자 두산과의 플레이오프에서 무려 4할이 넘는 타율과 함께 2차전에서 이용찬한테 연장 14회 초 결승 2타점 적시 3루타를 쳐내고 경기 MVP까지 수상하면서 김재걸과 같은 가을사나이로 등극. 신명철이 그동안 활약하지 못했던 이유는 가을야구를 한 적이 없는 롯데에서 사용법을 몰랐기 때문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아무튼 삼성은 2008 플레이오프에서 아쉽게 두산에 시리즈 전적 2:4로 밀리며 KBO 한국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신명철은 유혹의 명철신으로 복귀하며 다음 시즌을 다시 기대하게 만들었다.

또한 2008 플레이오프의 경우 2차전에서 연장 혈투 끝 결승타를 쳐낸 신명철 덕분에 시리즈 전체가 대박 흥행을 기록한 건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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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3. 2009 시즌

시범경기에서 신인 선수들의 활약으로 2009 시즌 초반에는 주전 경쟁에서 탈락하며 이대로 명철신의 유혹은 여기까지인가...라고 생각했으나 5월부터 슬슬 타선에 힘을 보태기 시작하더니 5월 6일 대전 한화전에서는 무려 2홈런, 싹쓸이 3루타로 6타점이나 쓸어 담으면서 팀을 승리로 이끈다. 시즌 3할 진입에 데뷔 후 최초 연타석 홈런 기록까지 세우면서 이 날 만큼은 유혹의 명철신의 날이었다.

5월 22일, 대구에서 열린 홈 경기에서는 전설적인 이 경기가 열린 지 2주년에 대첩 당사자 중 하나이자 친정팀인 롯데를 만나 9회말 2아웃에 끝내기 투런을 작렬시키며 삼성의 대역전승을 이끌었다.

이후로도 신들린 듯한 타격감을 계속 이어가면서 100타석 이상 들어서고 5월까지 3할 치는 명철신은 유혹의 명철신이 아니라 진짜 3할타자라는 주장이 조금씩 힘을 얻고 있다. 확실히 5월 들어서면서 상기한 한 경기 2홈런 6타점, 9회말 투아웃 역전 끝내기 홈런말고도 선두타자 홈런, 선두타자 안타, 안타 치고 안타 치고 홈런 등 이전까지의 신명철과는 확실히 다르다. 보통 신명철의 유혹은 하루이틀 정도 지속되고, 그 후 삼진/내야플라이 신공을 작렬하며 경기후반 대수비요원으로 지위강등이 기본 패턴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5월 26일 기준으로 규정타석을 70% 이상 채운 2루수 가운데 신명철은 정근우에 이어 OPS 2위를 기록하고 있으며 홈런, 타점, 장타율은 1위. 게다가 팀내에서의 타순이 1번타자임에도 불구하고 팀 내 타자 중 타점과 홈런 1위이다.(...) 타율은 6월 10일 기준으로 .316. 현재로서는 1번타자에 기용하는 것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다. 본인은 이에 대해 인터뷰에서 "역시 답은 연습밖에 없는 것 같다"고 밝히고 있으나 자세한 것은 아무도 모르는 법. 신인 김상수에게 시즌 초반 주전을 밀린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식의 설명이 있다. 과연 상수로이드.

전반기 막판에 다소 부진하면서 원래 위치로 돌아가나 싶었지만, 간염으로 시달리던 김상수가 복귀함에 따라 다시 맹활약하더니(...) 전반기 마지막 경기인 7월 23일 목동 히어로즈전에서 패색이 짙던 9회초에 선두타자로 나와 신철인을 유혹해서 스코어 4:5를 만드는 1점홈런을 작렬하더니, 연장 10회에 1사 1루 상황에서 또 다시 이보근을 상대로 투런 홈런을 작렬하며 최종스코어 7:5 대역전승리의 주역이 되었다. 전반기 성적은 타율 0.285, 79안타, 15홈런, 49타점. 정말 각성인지, 유혹이 길게 지속되는 것인지는 올 시즌 끝까지 지켜봐야겠지만, 어쨌건 커리어하이를 찍고 비록 감독추천이기는 해도 올스타전에도 출전, 야구인생 최고의 시즌을 맞고 있다. 그리고 생애 첫 올스타전에서 2타수 2안타, 1도루로 올스타전 우수 타자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2009년 9월 23일, 마침내 20홈런-20도루에 성공하면서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두 번째로 20-20 클럽 가입 2루수가 되었다.[4] 완전히 각성. 비록 이 해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은 결국 실패했지만, 명철신은 2009년 삼성팬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도저히 작년에 타율 1할대를 찍은 타자라고는 생각하기 힘들 정도. 얼떨결에 강봉규와 쌍두마차를 결성하게 되었다.[5]

2009 시즌 최종 성적은 타율 0.291, 출루율 0.362, 장타율 0.482, 123안타, 20홈런, 21도루, 61타점으로 가히 한국프로야구 탑 클래스 2루수의 성적이다. 하지만 타율 0.350에 53도루를 기록하고 득점왕까지 오른 정근우 때문에 골든 글러브는 힘들 듯. 골든글러브는 예상대로 정근우가 수상했고, 신명철은 18표를 얻어 수상에는 실패했다. 문제는 그 해 입단한 신인 선수인 안치홍이 38표를 얻었다는 거...

2009년의 활약에 힘 입어 온라인 야구게임 마구마구에서도 최초로 신명철의 레어카드가 나왔지만, 하점캐가 안 달려있어 김성래박진만의 쌍하점 삼올은 여전히 유지되었고, 신명철은 사라졌다. 지못미 명철신...

참고로 2루수로써 20홈런을 기록한 건 1987년 김성래-1999년 홍현우 이후로 3번째이지만,[6] 존재감이 미미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2014년에 삼성의 용병 야마이코 나바로가 20홈런을 치자 기레기들이 제대로 조사도 안 하고 급하게 서로 복붙했는지 20홈런 +를 기록한 역대 2루수들 중에서 신명철만 쏙 빼놓고 나바로를 3번째라고 적어 버렸다.(...)

3.2.4. 2010 시즌

2010 시즌 개막전에 9번 타자로 등장, 역전타 포함 3타점을 올리면서 올해도 명철신의 유혹은 계속됨을 선언했다. 심지어 결정적인 순간 9번 타자임에도 불구하고 고의사구를 받아내면서 위엄을 떨쳤다.

그리고 2010년 8월 5일 기준으로 2루수 OPS 2위.[7] 정근우의 장타력이 하락하고 고영민이 2007년/2008년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명실공히 리그 2루수 2인자로 자리잡았었다. 다만 해가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2루 수비는 리그 전체로 봐서도 매우 떨어지는 편으로써 횡스텝으로 땅볼 타구를 쫓아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전진대시 능력 역시 크게 감소하였다. 수비 쪽으로 유일하게 장점이라 할 수 있는 건 타고난 손목힘이 바탕이 되는 스냅토스를 통한 더블플레이 중계능력이 전부라고 할 만한 수준. 포수쪽과 더불어 대체 자원들의 기량이 떨어지는 터라 향후 삼성 라이온즈의 내야 포지션 중에서 가장 급한 자리가 될 것으로 예상됐다.

두산 베어스와의 2010년 플레이오프에서 12타수 1안타 2볼넷 1득점, 타율&장타율 .083, 출루율 .214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3승 2패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SK 와이번스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12타수 2안타 1볼넷 1득점, 타율.167, 장타율 .250, 출루율 .231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패로 준우승에 그쳤다.

2010년 포스트시즌에서 24타수 3안타 3볼넷 2득점, 타율 .125, 장타율 .167, 출루율 .222를 기록했다.

3.2.5. 2011 시즌

2011시즌 초반 양호하게 성적을 올리나 했더니, 이후 망했다.

2011년 5월 24일에는 롯데와의 어웨이 경기에서 신명철의 타구가 세 번이나 야수들의 실책을 유도했고, 강민호의 태그조차 그를 피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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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19일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게리 글로버에게 사사구를 얻어맞자 화난 표정을 지으며 욕설을 3번 외쳐주시고[8] 배트를 그라운드에 투척하고 글로버에게 달려갔다. 그리하여 몇 분동안 벤치 클리어링이 발생했다. 정상호와 심판이 이것을 목격하고 즉시 말렸기에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핵전쟁수준의 난투가 벌어졌을지도...그런데 진작 욕 얻어먹은 게리 글로버는 신명철에게 다가가 상황을 설명하고 1루로 가라고 한 뒤 머리를 가볍게 숙여 사과했다. 이것 때문에 삼빠 아재들한테 류중일 저 색휘 안빼고 뭐하노? 하면서 대차게 까였다. 당시 해설과 캐스터도 글로버의 투구가 고의는 아니었던 걸로 보여진다라고 말하면서 신명철의 이미지는 더욱 떨어졌다. 거기다 나중에 글로버가 또 조영훈에게도 헤드샷 사사구를 날렸는데[9], 조영훈은 신명철과는 달리 아 머리 안 맞아서 다행하며 항의 없이 그냥 넘어갔기 때문에 더 까였다. 신멍청이라는 별명과 삼빠 아재들의 까임권을 보유하게 된 건 당연지사.

결과적으로 2011시즌의 성적은 멘도사 라인 근처의 0.208에 홈런도 달랑 2개에 40타점도 올리지 못하며 명실상부한 우승팀 삼성 라이온즈의 타격 구멍으로 자리잡았다(...) 2루수 순위권에선 아예 벗어난 수준.
3.2.5.1. 포스트시즌
페넌트레이스의 부진을 딛고, 2011년 10월 25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SK 와이번스와의 2011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 스코어 0:0 4회말 2사 1,2루 상황에서 SK의 선발투수 고효준을 상대로 2타점 결승 2루타를 때려내어 SK를 유혹하는데 성공했다. 비록 다른 타석에서는 그다지 활약을 못한 관계로 1차전 MVP가 되지는 못했지만, 임팩트하면 명철신이라는 것을 입증하였다. 이날 팀은 0:2로 승리하였고 3타수 1안타 2타점을 기록하였다.

팀이 시리즈 전적 2승 1패로 앞서던 2011년 10월 29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2011년 한국시리즈 4차전에서는 그야말로 유혹의 진수를 보여주었는데, 팀이 스코어 2:1로 한 점차 앞선 4회 무사 1루 상황에서 바뀐 투수 이재영을 상대로 보내기번트를 두 차례나 실패하더니, 강공 전환 이후 우측 담장을 넘기는 투런홈런을 작렬시켰다. 이재영과 SK벤치는 멘붕. 이날 팀은 8:4로 승리하였고 4타수 2안타 1홈런 2타점 1득점을 기록하여 경기 MVP로 선정되어 다시 한 번 돈성캘리버임을 과시했다.

SK 와이번스와의 2011년 한국시리즈에서 18타수 3안타 1홈런 4타점 1득점 타율 .167, 장타율 .389, 출루율 .167을 기록하였다. 타율은 낮지만 1차전 2타점 2루타와 4차전 2점포로 결정적일 때마다 천금 같은 장타를 쳐주며 활약해줬다. 시리즈 내내 삽질한 이 보단 낫다 팀은 시리즈 전적 4승 1패로 우승하면서 신명철 본인도 커리어 첫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를 얻어보게 되었다.

시즌 후 FA가 되었고, 2년 총액 4억 5000만 원(계약금 1억 5000만 원, 연봉 1억 5000만 원)에 삼성과 계약을 맺으며 잔류했다.

3.2.6. 2012 시즌

초반 삼성이 부진할 때는 잘 나오지 않다가, 5월부터 채태인의 부진을 참지 못한 팬들의 분노폭발로 인해 이제서야 선발로 나오는 중. 전체적인 타격은 별로 좋지 못하여 까이기도 하지만 유독 그가 치는 안타는 또 유혹타가 되는 경우가 더러 있다. 사실상 유혹의 명철신의 재림.

5월 27일 2군으로 내려갔는데, 2루수가 아닌 지명타자로 출장하면서 그나마도 한 타석 정도 나오고 바로 교체되는 수준이었다. 이대로라면 영영 볼 일이 없을 듯 했지만 8월 10일 1군에 복귀했다. 8월 19일에는 2루수로 선발출장했다가 1루수 이승엽이 교체되면서 대신 1루수를 보기도 했다. 9월 13일 김경모가 올라오면서 반대급부로 다시 2군행.

10월 3일 다시 1군에 올라왔다. 같은 날 두산 베어스와의 마지막 홈 경기에 대수비로 중간에 투입 후, 6회말 3루 내야안타로 1타점을 올리더니, 7회 초에는 2루수로 수비 서면서 안타성 타구를 점프해서 잡아내는 공수 양면으로 유혹을 성공시켰다. 10월 4일 SK 와이번스 전에서도 7회말 안타 치고 1득점하여 동점을 맞추는 등, 가을사나이라는 또 다른 별명에 걸맞은 활약을 했다.

늘 그랬듯이 가을에 좋은 활약을 해주고 있기 때문인지 2012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도 입성에 성공했다.

SK 와이번스와의 2012년 한국시리즈에서 2차전은 대타, 3, 4차전은 대수비로 출장하여 3타수 1안타 1타점, 타율&장타율&출루율 .333를 기록했고, 팀은 시리즈 전적 4승 2패로 우승하여 2년 연속 페넌트레이스&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다.

3.2.7. 2013 시즌

작년부터 2루수 주전으로 자리잡은 조동찬으로 인해 경기 후반부에나 2루수로 교체 출장하는 정도에 그치고 있지만 박석민이 지명타자로 출장하면서 3루수로 간 조동찬으로 인해 공석이 되어버린 2루수에 모처럼 선발 출장한 4월 9일 한화와의 경기에서 1회초 2사 1루에서 김태균의 2루수 땅볼성 타구를 잘 처리하지 못하면서 김태균을 유혹하더니 바로 1회말 2사 1,3루에서는 유격수-2루수 사이로 빠지는 적시타를 터트림으로서 유창식을 유혹하였다. 3회말 2사 3루 상황에서도 적시타를 치는 등 4타석 2안타 2득점으로 활약하였다. 바로 다음날인 4월 10일에도 2루수로 선발출장하였으나 이번에는 3타석 1안타 2삼진으로 본인이 상대 선발 바티스타한테 유혹당하였다.

그리고 그의 유혹본능은 한화와의 3연전 마지막 경기에도 이어지게 된다. 4월 11일 2회말 자신의 타석에서 변태같은 내야안타로 상대 팀 3루수 오선진을 유혹하고 2사 1,3루에서 이지영의 도루시도를 틈타 홈으로 들어오려다가 협살에 걸렸으면서도 중간에서 가만히 서있는 모습이 보이면서 삼빠들의 속을 태웠으나 그 상황에서 기어코 상대 팀 2루수 조정원을 유혹함으로써 주루 방해를 유도해 내는데 성공. 그대로 득점에 성공하며 이날 결승 득점의 주인공이 되었다. 다만 4회초에는 1사 1,3루 상황에서 병살성 타구를 잘 처리하지 못하고 1루로 악송구하며 장원삼의 1실점까지 유혹해낸다. 그야말로 한화와의 3연전에서 공격 수비 소속팀 상대팀 가리지 않고 마구 유혹하는 등 유혹의 명철신 본능을 제대로 발휘한 셈.

4월 12일 넥센과의 경기에서도 상대 선발 나이트를 상대로 3타석 1안타 2볼넷을 유혹해내는데 성공한다. 대부분의 삼성 타자들이 나이트를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한 것을 생각하면 신명철의 최근 타격 페이스가 많이 올라온 것을 알 수 있는 지표라 할 수 있겠다. 다만 나이트를 상대하느라 유혹력이 다 떨어졌는지 9회초 1사 상황에선 손승락에게 삼진을 당하였는데, 뒤의 타자 진갑용김태완이 연속 안타로 출루한 것을 생각하면 다소 아쉬운 경기 마무리였다.

최근 타격감이 좋았기 때문에 박석민이 3루수로 복귀한 4월 13일 경기에서도 2루수로 선발 출장하여 5타석 2안타 1볼넷을 기록하였으나 메가라이온즈포가 터지는 바람에 이대로 특별한 유혹 없이 경기가 끝나는 듯 싶었으나 9회초 본인과 후속타자 진갑용의 연속 안타로 무사 1,2루 상황에서 다음 타자 김태완의 뜬공을 상대팀 우익수 유재신이 잡을 수 있는 타구를 놓쳐 버렸는데 신명철과 진갑용은 당연히 잡을 거라 생각하고 본인이 있는 루 상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김태완의 타격은 2루수 앞 땅볼이 되었고, 1루 주자 진갑용만 아웃처리가 되는 아주 보기 드문 장면을 연출하였다. 4월 14일 경기에서는 4타석 1안타 1타점 1득점 1볼넷을 기록하였다.

4월 16일 SK와의 경기에서는 4타석 1안타 1타점 1득점을 기록하였다. 다만 5회초에 한동민이 친 타구를 잘 잡지 못하는 등(안타성 타구의 성질이 더 컸다고 판단했는지 에러로 기록되진 않았다.) 조금씩 수비에 대해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점은 걱정거리다. 4월 17일 경기에서는 4타석 1안타 1타점 2득점을 기록했으며, 특히 8회말 5:5 동점 상황이었던 1사 1,2루 상황에서 1루 주자로 나서서 후속타자 진갑용의 좌익수 뒤 2루타성 타구를 상대 좌익수 이명기가 잘 잡지 못하도록 유혹하였다. 4월 18일 경기에서도 4타석 1안타 1도루를 기록하였으나 7회초 1:2 상황이던 1사 만루 상황에서 이명기가 친 땅볼 타구를 더듬으면서 병살 플레이로 연결하는 데 실패하는 등 수비에 대한 불안요소가 더 커져가는 중이다. 4월 21일 롯데와의 경기에서도 9회초 2아웃 상황에서 상대 타자 손아섭이 친 2루 땅볼 타구를 악송구해 실책 1개를 기록하였다.

4월 24일 LG와의 경기에서도 3타석 무안타 1삼진 1병살타를 기록했으며 특히 그 병살은 초구본능으로 인한 병살이었기 때문에 삼성 팬들에게 엄청 욕을 먹었다. 바로 다음 회에 김태완으로 교체. 질책성 교체로 보여졌으나 사실은 햄스트링 부상을 입었다고 한다.

5월 1일 넥센과의 경기에서 오랜만에 2번타자로 선발출장해 5타석 1안타 2득점 1볼넷을 기록했으나 대타로 나선 5월 2일 경기에선 1사 1루 상황에서 병살을 치는 등 유독 땅볼성 타구가 많아지고 있다. 5월 12일 KIA와의 경기에서도 오랜만에 2루수로 선발출장했으나 3타석 무안타에 그쳤다. 이후론 계속해서 대수비로 출장하다가 5월 19일 NC와의 경기에서 다시 오랜만에 2루수로 선발출장해 5타석 1안타를 기록하였으나 여전히 수비에서는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6월 2일자로 2군으로 내려갔다.

보면 타격의 부진도 부진이지만, 더 큰 문제는 수비 툴이 망가졌다는 것. 거기에 나이도 36세인 만큼 프로에서 2루수로는 더이상 출전하기 힘들 정도로 수비 능력이 저하된 모습을 보였다.[10]

2군으로 내려온지 얼마 되지 않아 결막염에 걸려[11] 나올 수가 없었는데, 그럼에도 결장이 너무 길어졌다. 그러던 중 8월달에 삼성 홈페이지 선수단에서 신명철이 없어지는 일이 생기면서[12] 방출설까지 돌았다. 하지만 삼성 홈페이지에서 신명철이 없어진 일이 일어나기 며칠 전에 3군에서 멀쩡히 훈련하고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어쨌든 2군 경기에는 단 1경기도 나오지 못했다.

시즌 종료 후인 11월 28일 구단에 방출을 요청하였고, 삼성에서 이를 받아들여 그를 풀어주었다. 이후 12월 6일 kt wiz와 입단 계약에 합의하였다. 1년 동안 1군 무대에서 뛸 수 없다는 어려움이 있지만 이를 감수한 것으로 보인다.

3.3. kt wiz 시절

3.3.1. 2014 시즌

kt wiz에 입단하고 주장을 맡으며 2014년은 창단 첫 해인 팀 사정상 당연히 퓨처스리그에서만 뛰었다. 부상으로 인해 많은 경기를 출전하지 못했지만, 3할 타율에 4할 출루율을 기록하면서 1군 짬밥이 헛되지 않았음은 보여줬다.

3.3.2. 2015 시즌

파일:external/www.ktwiz.co.kr/20150515102346278.jpg

5월 23일 한화전에서 경기가 끝난 직후 한화의 덕아웃을 향해 막말과 식빵을 구우며 구설수에 올랐다. 그간 논란이 되는 행동이 많았기 때문에, 더 큰 일이 되고 있다.[13] 이유는 예상컨데 5점 앞서있는 9회 상황에서 강경학이 도루했다는 거와 투수를 자주 교체했다는 것인데, 한화 벤치는 강경학이 과했다고 생각해 허도환으로 교체했다. 하지만 5점 차는 충분히 엎을 수 있는 점수로 기만이니 뭐니 해서 화냈다는건 과하다는 평이 많다. 실제로 바로 다음날 경기에서 kt타선은 5회에만 7점을 기록함으로써 신명철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6월 10일 롯데와의 경기에선 소속팀 kt가 9회에 5점 리드를 따라잡고 끝내 승리하게되는 놀라운 일도 벌어지면서 새삼 그의 행동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SBS 주간야구에서는 이 사건을 다루면서 5점차를 승부가 기울어졌다고 보는 시각에 대해 부정적으로 다뤘고[14], 신명철의 행동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를 비췄다. 방송보기

5월 27일 LG전에서 7회말 1:7로 kt가 크게 뒤져 있는 상황에서 김용의의 도루가 나오자 문자중계 응원창에 "6점차 도루인데 식빵 안 굽냐"며 신명철의 이름이 다시 나오는 드립이 쏟아졌다.

6월 16일 NC전에서 무사 1 2 루 찬스에서 번트를 대고 이태양의 고의낙구로 병살을 친 후 다음 회에 대수비 문상철로 교체되었다.

7월 10일 삼성전에서 3회 말 1사 1 2루 상황에서 타일러 클로이드의 슬라이더를 오훈규 주심이 스트라이크 판정하자 강하게 불만을 어필하다 퇴장당했다. 신명철 본인은 몸 쪽으로 빠진 공이었다고 생각한 모양. 이날 주심의 스트라이크 존이 지나치게 삼성에 후한 감은 있었지만 해당 공은 스트라이크라 판정할 만했다. 신명철은 이 판정에 매우 강하게 항의하였으며, 이에 오훈규 주심은 비교적 차분하게 대응하다 이후 신명철의 항의가 심하게 지속되자 퇴장명령을 내렸다. 선수 본인이 스트라이크 판정에 어느정도 불만을 어필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결국 판정을 하는 것은 심판의 고유 권한이기에 신명철처럼 도를 넘어선 항의를 하는 것은 옳지 않은 행위이다.

3.4. 국가대표 경력

3.4.1.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4. 은퇴식

2016년 7월 24일 은퇴식을 치렀다. 마침 kt wiz삼성 라이온즈의 경기라서 은퇴식을 준비했던 것 같다. 삼성 시절에 전성기를 보냈고, 자신이 직접 2013년 11월 구단 측에 방출을 요청했고 구단은 신명철이 1군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이를 수용했으며, 신명철은 kt와 계약했다. 은퇴식에서 박한이, 류중일 그리고 현 kt 주장인 박경수와 포옹을 나눴다. 그리고 신명철이 kt에서 달았던 등번호 35번 유니폼이 응원석 쪽에 배치되었다. 그리고 베이스를 돌면서 자신의 지인, 그리고 양팀의 선수들과 악수를 나눴다. 이 날 시구자는 신명철, 시포자는 박경수.[15]

시즌 끝나고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구단에서 코치 제의를 했으며, 신명철은 이를 수용했다.

[1] 그래도 손인호는 나중엔 1할대 타율을 벗어났다.[2] 당시 롯데 시절의 활약(?)으로 쌓은 명성(?)과 트레이드 맞상대인 '불영식'(삼성 시절 강영식의 별명이었다)의 임팩트로 인해 야구 팬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시전한 트레이드였다. 이 날 신명철은 실시간 검색어 순위 1위에 올랐을 정도.[3] 많은 야구팬들이 모르는 사실이지만 신인시절의 박석민은 수비에 능한 날렵한 내야수였으며, 유격수 대수비로 출장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상무를 거치며...[4] 최초는 30-30 클럽을 달성했던 1999년의 홍현우.[5] 강봉규는 기존 쌍두마차인 김창희를 잃는 대신 신명철이라는 새 파트너를 얻었다. 물론 나가시마 타격코치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되었다.[6] 다만 홍현우의 경우에는 3루수로 나온 경기도 몇 경기 있었다.[7] 1위는 조성환[8] 맞았을 때, 1루로 진루할 때, "머리 맞았잖아!" 하고 헬멧을 가리키며 항의하고 난 뒤 미사여구.[9] 글로버가 물론 그때도 다가가 사과했다.[10] 보통 내야수의 경우 35세를 전후로 수비 범위가 급격히 좁아지거나 글러브질에서 확실히 젊은 선수들과 차이를 보일 정도로 노쇠화가 찾아오는 시기기도 하다.[11] 그런데 신명철이 결막염에 걸렸던 시기와 강명구가 결막염 때문에 2군으로 내려온 시기가 비슷했다.[12] 정확하게 제일 처음에는 신명철과 채상병만 없어졌는데, 그 다음날에는 권오준김기태도 없어졌다. 며칠 후 4명 모두 복구되었다.[13] 신명철 개인주장으로는 한화 벤치에서 먼저 욕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기사에서는 자신이 먼저 욕했다는 것을 시인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화 벤치에서 먼저 욕을 했다는 발언은 자기 합리화를 위해 대충 둘러대느라 나온 말로 보인다.[14] 특히 안경현승부조작이나 다름없다는 강경한 표현까지 썼다.[15] 은퇴식이 끝난 후 "은퇴식은 생각하지도 못했는데"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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