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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7 02:55:25

서정환/지도자 경력

1. 개요2. 코치 1기
2.1. 해태 타이거즈 시절2.2. 삼성 라이온즈 시절
3. 삼성 라이온즈 감독4. 코치 2기5. KIA 타이거즈 감독6. 평가
6.1.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서6.2. KIA 타이거즈 감독으로서
7. 감독 전적

1. 개요

서정환의 지도자 경력을 서술한 문서.

2. 코치 1기

2.1. 해태 타이거즈 시절

1989년 시즌 종료 후 은퇴한 뒤 곧바로 해태 타이거즈의 코치로 선임되었다. 이후 1994년까지 해태에서 코치로 재직했고, 주로 작전, 주루, 수비코치 등 다양한 보직을 맡다가 1995년 일본으로 건너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1년간 코치 연수를 받았다.

다만 이 당시에 삼성에서 밑밥을 깔아두고 1995년에 서정환을 인스트럭터로 기용하려고 했으나, 이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유학을 보낸 쪽에 가깝다. 당시 해태에서 삼성의 이런 얌체짓 때문에 유능한 인재를 허락 없이 빼돌렸다고 거센 항의가 있었다.[1]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술회하기를 해태 코치 시절 롯데 자이언츠와의 원정 경기에서 김응용 감독이 히트 앤드 런 작전을 걸었으나 이건열이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경기에서 패했고 광주로 돌아오는 길에 지리산 근방에서 차를 세워 서정환 코치와 이건열을 차에서 내리라고 했다. 서정환 코치는 '제가 선수에게 사인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고 이건열을 감싸자 넘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김응용 감독은 코치들에게 모든 걸 맡기는 타입이고 저런 사소한 것까지 되짚고 넘어가려고 하는 걸 보니 괜히 우승을 9번이나 하는게 아니라는 말을 덧붙였다.

또한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에게 1승 1무 2패로 수세에 몰리게 되자 김응용 감독이 코칭스태프 회의를 소집해서 '야 이거 어떡하냐' 말을 하자 '놔두세요. 제가 작전 내고 할께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2] '야 내가 언제 작전 내지 말라고 했냐! 서 코치가 알아서 해'하고 서정환 코치에게 일임하자 이종범에게 그린라이트를 부여했고[3] 이종범은 그 뒤 5차전에서 한국시리즈 한경기 최다도루 3개 등 3경기에서 7도루를 하는 등 날라다니고 그 외 선수들도 5도루를 해 12도루를 하며 전세를 뒤집는데 성공했다. 이 일로 삼성에 코치로 스카웃이 되는 계기가 된다.

2.2. 삼성 라이온즈 시절

귀국한 후 1996년 시즌을 앞두고 친정팀 삼성 라이온즈의 수비코치로 영입되었다. 이후 이 사람과 비슷한 행보를 보인 사람이 해태 시절에 후배였던 이순철. 참고로 이순철이 은퇴하고 코치 생활을 처음으로 시작한 게 당시 삼성 감독이던 서정환이 그에게 코치로 일해달라고 제안해서 코치 경력을 시작했다.[4] 삼성에서도 2년간 수비코치를 맡으면서 백인천 감독 체제에서 새로운 내야 체제인 이승엽-정경배-김태균-김한수를 구축하는데 이바지했고, 역시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이 시절부터 최익성을 홀대했고, 결국 이는 돌이킬 수 없는 악연의 시작이었다.

3. 삼성 라이온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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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No.72
서정환(徐定煥)

이후 1998년, 43세의 젊은 나이에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부임한다. 지난 시즌 감독 대행으로써 팀을 수습하고 무난하게 이끌었던 조창수 대행이 백인천의 자리를 메꾸며 괜찮은 모습을 보였음에도 굳이 그를 정식 감독으로 승격시키지 않고 서정환 코치를 감독 자리에 앉힌 것은 당시 삼성의 우승을 향한 갈망 때문이었다. 매번 KBO 한국시리즈에서 물을 먹던 삼성으로서는 경북고 출신이라 연고 지역 TK 출신이기도 했으며, 해태 타이거즈에서 한국시리즈 우승 경험을 많이 해 봤던 그를 통해 한국시리즈에서의 한을 풀고자 했던 것.[5] 참고로 삼성 라이온즈 역대 감독 중 최초로 삼성 선수 출신 감독이다.[6]

일단 부임 첫 해인 1998년에는 현대 유니콘스에 이은 정규리그 2위로 시즌을 마무리하면서 무난한 데뷔를 한다.[7] 단, 플레이오프에서는 3위였던 LG 트윈스에게 1승 3패로 업셋당하며 한국시리즈 진출이 좌절됐고, 최종 순위 3위로 마무리한다.

문제는 부임 2년차인 1999년에 일어났다. 시즌 전부터 우승을 목표로 하고 모기업의 엄청난 지원을 통해 임창용, 김기태, 김현욱, 김상진을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해오는 등[8] 대대적인 전력 보강이 이뤄졌고, 시즌 들어서는 이승엽이 54홈런으로 타격 부문 5관왕을 했고, 임창용의 맹활약으로 삼성을 매직리그 1위, 플레이오프에 직행시켰다. 문제는 애니콜 임창용을 미친듯이 부려먹는 바람에[9] 정작 롯데 자이언츠와의 플레이오프에서는 임창용이 5차전과 7차전에서 혹사 후유증이 몰려오면서 결국 무너지고 말았고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 시즌 종료 후 해임되었다.[10] 결국 김용희 수석코치에게 감독직을 넘겨준 다음[11] 잔여 연봉을 챙겨주기 위해 사장 보좌 역으로 1년을 보내고 해임된다.

당시 막강한 타격에 비해 투수진이 시원찮았던 삼성은 이를 메우기 위해 간판 스타 양준혁을 현금 20억과 함께 해태 타이거즈에 내 주는 대신 임창용을 데려오고, 쌍방울 레이더스에 현금 20억을 내주고 김기태[12]김현욱[13]을, 두산 베어스에서는 김상진을, 한화 이글스에서 노장진까지 데려왔다. 여기에 1999 시즌 중에는 포수 보강을 위해 두산 베어스에서 진갑용을 트레이드하여 영입했다.[14] 한 마디로 우승 못 하면 모든 게 감독 탓이 될 분위기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정규시즌 성과[15]에도 중도 해임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여기까지만 보자면 나름 괜찮은 감독으로 보일 수 있겠으나, 실제로는 평판이 상당히 낮은 편이다. 20세기 삼성 라이온즈 감독 중 김성근 다음으로 평판이 낮으며, 아울러서 역대를 다 통틀어서도 김한수, 허삼영, 김성근, 선동열 4대천왕 다음으로 평판이 낮다. 자세한 이유는 후술돼 있는 평가 문단 참조.

4. 코치 2기

KIA 타이거즈 No.89
서정환(徐定煥)
2001년 시즌을 앞두고 해태 타이거즈의 2군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다시 타이거즈에 복귀했다. 이후 1군 수비코치로 보직이 바뀌었다가 2003년부터 다시 2군 감독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6월 16일에 음주운전을 저질러 면허가 취소되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2004년에는 이상윤 수석코치가 투수코치로 보직이 바뀌면서 1군 수석코치 겸 수비코치로 임명되어 김성한 감독을 보좌했으나 6월 21일부로 유남호와 보직을 맞바꿔 다시 2군 감독으로 내려갔다. 이후 KIA는 2004년 7월 26일부로 김성한 감독이 경질된 뒤 유남호 수석코치가 잔여 시즌 동안 감독대행을 맡았고, 시즌 후 정식 감독으로 승격하였다.

하지만 유남호가 정식 감독으로 승격된 2005년 시즌 초부터 팀 성적이 하위권으로 떨어지자 코칭스태프 교체 과정에서 다시 1군 수비코치로 올라왔다. 결국 유남호 감독이 성적 부진을 이유로 2005년 7월 25일 자진 사퇴하자 감독대행으로 선임되면서 잔여 시즌을 소화하였다. 그러나 이 때도 마해영과 마찰을 빚으며 사실상 그를 전력 외로 분류해버렸고, 결국 마해영이 FA 계약기간도 다 못 채우고 LG로 트레이드되는 단초를 제공하고 만다.

5. KIA 타이거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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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A 타이거즈 No.89
서정환(徐定煥)

2005 시즌이 끝나자마자 기아와 3년 6억의 계약을 맺고[16] 정식 감독이 되었다. 6년만에 다시 감독이 된 서정환은 조계현, 이케우치, 신동수 투수코치와 박철우 타격코치, 백인호, 김태룡 수비코치를 해임하고 김종모, 이건열 타격코치와 김태원, 이강철 투수코치, 김종윤, 차영화 수비코치, 정인교 배터리코치를 새로 영입하면서 야심차게 시즌을 시작했다. 게다가 10억 유망주 한기주의 입단 소식도 기아에게 희망적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서정환은 과한 혹사와 성적 부진이 겹치면서 김종국 이전까지 프랜차이즈 역대 최악의 감독으로 평가받았다. 돌정환, 서토라레[17], 서백정, 서환장 등 오만 부정적 별명들로 불리며 남에게 모두 읽히는 작전 구사 능력의 소유자라 불리며 팬들에게 엄청나게 까였다. 그래도 2006년 기아가 4위를 기록하며 이듬해를 기대하게 했으나, 후술하겠지만 이는 투수진을 갈아넣어서 억지로 쥐어짜낸 성과였고, 이듬해인 2007년에는 그 여파를 맞고 투수진이 줄줄이 이탈했으며, 거기에 보너스로 서머리그[18] 우승 드립을 치면서[19] 무릎 부상 상태의 장성호까지 날려버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서정환이 혹사시킨 투수들이 제 기량을 회복하지 못하면서 사실상 감독으로써의 평가는 완전히 시궁창에 처박히게 되었다.

결국 2007 시즌을 한 경기 남기고 총감독 추대[20] 및 1군 감독직 사퇴 형식으로 기아에서의 감독 커리어는 물론 지도자 커리어도 끝났다. 말이 사퇴지 사실상 잘린 것에 가까웠는데, KIA 구단은 서정환 체제의 실패를 느끼면서 그 전 시즌까지 SK 와이번스 감독을 맡았던 조범현을 시즌 중간에 배터리코치로 영입하면서 그의 지도력에 의구심을 표한다. 게다가 구단주 대행 겸 구단 사장과 같은 인하대학교 동문이기도 했으니 성적도 육성도 못 잡는 서정환 감독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었다. 마침 말이 정규시즌이지 정규시즌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경기가 한 경기 남아 있으니 욕도 덜 먹을 겸 알아서 나간 것. 남은 한 경기조범현이 정식 감독으로 부임해서 마무리했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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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짤방과 관련된 기사 [22]

비슷한 시기에 막장테크를 탄 이순철, 강병철 감독과 셋이서 싸잡아서 까였으며, 공교롭게도 이 세 팀이 바로 엘롯기다. 아무튼 이 세 분들이 얻어먹은 욕만 해도 불로불사가 가능할 정도니 말 다 했다.[23] 그나마 강병철은 이전에 쌓아온 감독 커리어 자체가 다른 둘과는 비교가 안 되는 수준인데다, 시간이 지나면서 강병철의 양아들로 대표되는 타자 유망주들이 대부분 포텐을 터뜨리며 안목은 있었다고 재평가라도 되었지 서정환은 그럴만한 여지도 없다. 하지만 당시 서정환이 무능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연패를 끊으면서 팬들에게 절하는 모습을 회상하면서 조범현 감독 지휘하에 16연패를 당했던 KIA 타이거즈의 팬들로부터 조금이나마 재조명을 받았다.[24] 나중에는 07 시즌 부진했던 이종범을 신인 육성이란 명목하에 케어하지 못한 것에 미안함을 전하기도 했다.[25]

6. 평가

선동열과 함께 해태 출신 선수에 삼성, KIA의 감독을 맡았다는 점에서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는데, 감독으로서의 평가가 최악인 것도 데칼코마니이다.[26]

가장 큰 문제점은 단연 투수 혹사인데, 김경문, 김성근, 김기태 못지않게 혹사를 과하게 해서 투수들을 망친 전적이 많다. 삼성 시절에는 '애니콜' 소리까지 듣던 임창용이 대표적이며, 기아에서는 한기주2달간 약 60이닝[27]이라는 기록적 혹사를 당했고, 그 외에도 신용운 등 여러 선수들이 서정환 감독 밑에서 혹사당하다 아작났다. 혹사 강도만 따지면 2015년 시즌의 김성근 감독과 비슷하다. 그나마 이쪽은 망가뜨린 선수가 김성근 감독보다 적은 편이기에 망정이지만...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단기전인 KBO 포스트시즌의 성적도 김응용 감독의 수제자 이미지에 걸맞지 않게 좋지 못했다. 두 팀에서 총 세 차례[28] 나갔는데 모두 패했으며, 특히나 1999년 플레이오프는 다 이긴 시리즈를 투수 운용 미숙으로 놓치며 스스로 단명을 자초했다.

어쨌든 전체적으로는 감독으로서는 호평보다는 혹평이 우세한 인물이다.

6.1.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서

요약하자면 최강의 리드오프가 될 수 있던 타자를 내쳤고 당시 리그 최고의 마무리무너질 때까지 신나게 굴렸다.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 시절에는 성적은 괜찮았고[29] 흥행도 준수했지만 팬덤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좋지 못한 평가를 받는다. 그나마 전임자가 평가가 더 좋지 않았던 김성근이라 혹평이 상대적으로 적어보이는 정도이며, 호평은 거의 없다. 1997년 삼성 타선의 한 축이자 20-20까지 했던 최익성저니맨으로 만들어놓고[30], 임창용을 무지막지하게 부려먹은 결과 플레이오프 7차전 역전패의 빌미를 제공한 것만으로도 최악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31][32] 우승에 대한 압박으로 선수층을 쥐어짜며 어떻게든 성적을 내려 했지만 결과가 좋지 못했고, 팀만 어수선해졌던 것이기 때문에 지금도 삼성팬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다만 삼성은 기반 자체가 탄탄했던 팀이었고 후임 김용희 감독이 뒷수습을 잘 해주었기 때문에 KIA와는 달리 선수 혹사로 인하여 암흑기로 굴러떨어지는 일은 없었다.[33]

이승엽과는 케미가 잘 맞아떨어졌다고 한다. 2007년 KIA 감독 재임 당시 타격 폼이 엉망이던 김주형의 타격 폼 개선을 하고자 요미우리 소속이었던 이승엽을 추천했을 정도. 참고로 서정환과 이승엽은 고등학교 직속 선후배 관계 이기도 하다. 물론 김주형의 기량은 은퇴할 때까지 발전이 없었다(....).

6.2. KIA 타이거즈 감독으로서

삼성 감독 시절에도 흑역사였던 삼성 김성근과 다를 바 없는 혹평을 받는데 KIA 감독 시절은 더욱 처참하다.[34] 심각한 투수 혹사로 2006년 간신히 팀을 가을야구에 진출시켰으나 그 댓가로 2007시즌을 팀 역대 최악의 시즌으로 만들어버렸으며, 단숨에 꼴아 고양이즈라는 멸칭이 생길 정도로 2000년대 KIA에 큰 악영향을 끼친 인물로 꼽힌다. 종합적으로 김종국 감독 이전까지 타이거즈 프랜차이즈 역대 최악의 감독으로 평가받으며[35], 2000년대 KBO 전체를 통틀어서도 감독 취급조차 못 받는 것을 넘어 공적 자체까지 말살당한 백인천, 이순철을 제외하면 최악의 반열에 들어간다.

2005 시즌 유남호가 성적 부진으로 시즌 도중에 경질이 되면서 감독 대행으로 남은 시즌을 치른 후, 정식 감독이 된 2006 시즌에 팀을 4강권으로 올려놓았지만, 그 이면에는 최악의 투수 혹사가 있었다. 신용운한기주는 이른바 신한카드 카드깡이라고 불리며 엄청나게 갈렸는데, 신용운은 2005년 9월 10일에 토미 존 수술을 받은 선수가 1년도 안 쉬고는 8월 22일에 복귀하더니 한 달 조금 넘는 기간에 18경기 37.2이닝으로 무지막지하게 혹사당했고, 한기주는 선발로 시즌을 시작했다가 고교시절 혹사로 인한 본인의 한계투구수(40구) 문제 때문에 불펜으로 전환했는데, 8월 12일 불펜 전환 후 호투를 이어가자 서정환은 이 선수를 한 달 반 남짓한 기간에 58.1이닝을 던지게 했다. 특히나 신용운은 팔꿈치에 칼을 대고 꽤 일찍 복귀한 선수고, 한기주는 혹사가 만연한 고교야구를 이제 막 끝낸 고졸 신인이었다. 두 선수 모두 조심스럽게 관리하며 써도 모자랄 판에 몸 상태가 정상인 선수도 견디기 어려운 수준의 혹사를 감내한 것이다. 이러한 혹사는 비단 신한카드 듀오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김진우는 어깨 부상 때문에 6-7월간 등판하지 않았음에도 선발로 100이닝 넘게 소화했고, 윤석민장문석이 부진하자 7월부터 마무리를 보는 등 불펜 전천후로 뛰면서 순수 구원으로 63경기 94.2이닝을 소화했고, 그 장문석이 부진에 빠진 이유도 7월 9일까지 21경기 26이닝이라는 기록에서 보이듯 마무리를 전혀 관리하지 않고 멀티이닝으로 무작정 굴린 여파가 6월에 터져서 부진하게 된 것이었다. 장문석은 7월 9일 이후 선발로 전환되어 8경기 27.2이닝을 더 던진다. 정원은 투구 이닝(30경기 38.1이닝)은 좀 덜하지만 4, 5월 두달 동안 17경기 26이닝을 던지는 등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등판한데다 부상당한 선수를 제대로 회복시키지 않았고[36], 이상화[37]전병두[38]는 고정 보직을 받지 못하고 선발과 불펜을 오가면서 굴렀다.

결국 이러한 혹사의 여파는 2007 시즌에 제대로 터졌다. 선발로 완전히 고정된 윤석민과 마무리로 고정된 한기주만이 좋은 모습을 이어갔을 뿐, 신용운은 구위가 급전직하했고 김진우, 이상화, 정원은 완전히 망가졌다. 차정민과 전병두는 1군에서 얼굴을 보기 힘들었고, 장문석은 혹사 여파에 노쇠화와 본인의 자기관리 실패가 겹치며 1군에서 사라졌다. 지난해 팀의 4강을 이끈 투수진이 처참히 박살났으니 팀 성적이 급격히 추락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 그런 와중에도 혹사 기질은 여전해서 한기주는 70이닝을 소화했고, 부상으로 빠진 투수진을 메우기 위해 올린 양현종, 진민호, 김희걸, 이범석, 손영민 등은 멀티이닝 소화가 기본이었다.

이러한 혹사의 여파는 팀의 미래를 송두리째 잡아먹은 것도 모자라 10년이 넘은 시점까지도 그 여파가 남아있기에, 기아 감독으로서 서정환에 대한 평가는 무슨 이야기를 하더라도 좋게 언급할 수가 없다. 신용운의 경우, 전임인 김성한, 유남호 감독 시절부터 혹사를 당했지만, 최종적으로 사형선고를 내린 것은 서정환이었고, KBO 최고 유망주 중 한명이었던 한기주의 조기은퇴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39] 그 외에 자주 언급은 되지 않지만 이상화, 정원 등을 갈아마셨고 장성호[40]윤석민[41]의 내구성에 결정타를 먹인 사람도 이 사람이다. 야만없이겠지만, KIA 타이거즈에 최소한 신한카드 중 한 명이라도 남아있고, 장성호와 윤석민의 내구성이 양호했다면, 포스트시즌 단골손님으로 계속 남아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서정환이 저렇게 갈아넣은 투수들 가운데 신용운, 한기주같은 선수들이 혹사를 피하고 어느 정도 건강을 유지했다면, 2010년대 KIA 타이거즈에 불펜진이 증발해버리는 대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42][43] 또한 2007년 시즌 내내 모든 패배에 핑계를 대면서 도망다녔고, 언론에서 선수를 띄워줄때 항상 자신이 나서서 선수를 띄워주는 짓거리들을 해왔고 전혀 납득이 가지 않는 라인업들을 쓰고, 베테랑들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있었다.

조범현 감독과 비교하자면, 조범현도 대구 출신에 해태 프랜차이즈가 아니었던데다가 2010년의 16연패와 2011년 후반기의 DTD로 많은 어그로를 끌긴 했지만, 적어도 2009년 한국시리즈에서 팀에 우승을 안겨주었고 무엇보다도 김선빈-안치홍으로 이어지는 젊은 키스톤 콤비와 윤석민, 양현종 등의 투수를 발굴하여 강팀의 기반을 닦아놓은 감독으로 인정을 받았다. 그나마 비교하자면 선동열과의 유사성이 많은 편. 서정환과 선동열 모두 프랜차이즈 출신 감독임에도 기대 이하의 모습으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케이스. 차이점이라면 서정환이 팀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위해 투수진을 갉아먹어서 미래를 망친 감독이라면, 선동열은 대졸 성애자답게 드래프트와 유망주 육성의 미비로 팀의 미래를 망쳤다는 것이 차이점.

결론적으로 정재공 단장과 더불어 KIA를 원조 강팀에서 애매한 중위권-중하위권 팀으로 추락시킨 원흉 중 하나로 꼽힌다. 두산 팬덤에게 있어서 송일수나 SK-SSG 팬덤에 있어서 염경엽 정도는 애교로 보이고, 거의 롯데 자이언츠 팬덤에 있어서 백인천, 이윤원이나 삼성 라이온즈 팬덤에 있어서 홍준학, 김한수, 정현욱, 박진만, 한화 이글스 팬덤에 있어서 이상군, 김성근[44]에 비견될 정도로 팀에 끼친 해악이 크다는 평가를 받는다. KIA는 2001년 현대기아차가 해태 타이거즈를 인수한 이후 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김성한 감독 하에서 꾸준히 플레이오프를 진출하는 등 성과를 냈고, 비록 유남호 감독 시기 부침은 있었지만 여전히 삼성 라이온즈, 현대 유니콘스 등과 경쟁하는 명가였다.[45] 그러나 서정환 감독이 2006년 포스트시즌 진출을 위해 팀의 를 다 갉아먹은 결과, 서정환 감독 이후 엘롯기로 한데 묶이는 약팀이 되었다. 투수진은 윤석민, 양현종 외에 믿고 볼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처참했으며, 타선도 김기아, 기탈리아로 대표되는 식물타선이었다. 이 이후 이뤄진 KIA의 의 우승은 모두 부실한 투수진을 용병들과 외부에서 수혈한 불빠따로 메운 것이며, KIA가 이를 극복하고 두터운 투수진을 구성하는 데까진 1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그나마 이현곤에게 망치 타법을 전수해서 KIA 역대 최악의 시즌인 2007년에 타격왕을 만들어준 게 몇 안되는 업적이다.

7. 감독 전적

역대 감독 전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최종순위
1998 삼성 라이온즈 126 66 58 2 2위 3위[46]
1999 132 73 57 2 3위[47] 3위[48]
통산 258 139 115 4
연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최종순위
2005[49] KIA 타이거즈 42 15 27 0
2006 126 64 59 3 4위 4위[50]
2007 125[51] 51 73 1 8위 -
통산 293 130 159 4
총계 551 269 274 8

[1] 해태 코치 시절이던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 적극적인 작전야구로 한국시리즈를 뒤집은것이 삼성 수뇌부들에 눈에 띄였고 이 때부터 서정환을 삼성으로 데려오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2] 당시 삼성은 수비형 포수 박선일이 포스트 시즌에 부상을 당해 제대로 수비를 하는 포수가 없었으나 4차전까지 해태는 소극적인 주루플레이를 했다. 3차전때도 소극적인 주루플레이로 말이 나왔고 4차전 때 불만이 폭발하게 된다.[3] 신인이 큰 무대에서 흥분할까봐 김응용은 이종범에게 도루 자제를 지시하고 있었다.[4] 이순철과 비슷한 것이 수비코치로서는 정말 높은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주루 및 작전 코치로 호평을 받아 감독에 오른 이순철과 거의 유사하다. 현역 시절 포지션은 다른데, 이순철은 데뷔 초창기를 제외하고 외야수로 뛰었기 때문이다.[5] 아이러니한 것은 그에게 밀려난 조창수 대행은 광주일고 감독 시절 대통령배 우승 감독이었고, 해태 타이거즈와 LG 트윈스의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한지라 단기전 우승 경험은 서정환 못지 않게 풍부했다는 것이다.[6] 다만 원년 첫 해만 삼성에서 뛰다가 이듬해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된 뒤 거기서 은퇴했기 때문에 사실상 해태맨 이미지가 강하다. 이후 2011년 류중일이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최초의 삼성 프랜차이즈 출신 감독이 된다. 간혹 우용득 감독을 최초의 삼성 선수 출신 감독으로 볼 수 있지만, 이쪽은 애초에 프로 출범 전 은퇴하고 지도자 생활을 한 데다 프로 원년 초기에는 비상시를 대비해 선수 등록만 해둔 사실상 플레잉코치 신분이었다.[7] 그런데 승률은 0.532로 그리 높지 않았고, 오히려 정규리그 4위로 마쳤던 전년도(0.552) 승률보다 낮았다. 더군다나 1위 현대 유니콘스와 경기차는 무려 14경기. 이러한 이례적인 현상이 발생했던 이유는 다름아닌 현대가 시즌 초반부터 치고 나가며 압도적으로 양민학살급 포스를 보였기에(무려 111경기만에 정규리그 1위를 일찌감치 확정했고 승률은 0.643이었다) 엄청난 승률 디플레가 일어났기 때문. 정규리그 3위이자 한국시리즈 준우승팀 LG 트윈스도 0.504로 겨우 5할 승률에 턱걸이했고, 시즌 막판 극적으로 4위에 안착한 OB 베어스는 승률 0.496으로 5할에도 미치지 못하는 등 매우 낮았던 역대 최악의 승률 디플레 시즌이었다.[8] 이외에도 최익성을 내주고 한화에서 노장진을 데려와 선발진을 보강했고, 더군다나 시즌 중에는 두산에서 진갑용까지 트레이드로 영입하며 포수 보강까지 성공했다.[9] 선발 등판 없이 71경기 138 2/3 이닝을 소화하며 13승 4패 38세이브 ERA 2.14를 기록했다.[10] 플레이오프에서 무리한 투수 운용, 결과적으로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는 바람에 구단 고위층에서 극대노했고, 계약 기간이 남았음에도 해임당했다.[11] 원래 김응용 감독이 부임하기로 했으나, 해태팬들의 반대로 1년만 해태 감독을 더 하기로 해서 1년간 땜빵으로 있었던 터라 감독으로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고, 결국 2000년 시즌 후 김응용이 오자마자 자리에서 물러났다.[12] 양준혁을 내 주고 빈 좌타 거포 자리를 메꾸기 위해 데려왔다. 재정난으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던 쌍방울이라 삼성 입장에서는 현금을 주고 별 무리 없이 쉽게 데려올 수 있었다.[13] 아이러니하게도 이 쪽은 원래 삼성 선수였는데, 데뷔 초기에는 별 볼일 없던 유망주였으나, 쌍방울로 트레이드된 뒤 맹활약하며 주가를 올렸다. 어찌 보면 삼성은 이 투수를 별볼일 없다며 쌍방울로 보냈으나 나중에는 현금 20억까지 얹어주며 다시 데려온 셈.[14] 당시 삼성은 비단 투수진 뿐 아니라 은퇴한 이만수를 이을 주전 포수도 마땅치 않았다. 현대 유니콘스박경완을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해 1998년 한국시리즈를 제패했던 모습을 본 삼성은 이를 귀감으로 삼아 당시 두산 베어스에서 홍성흔의 등장으로 입지가 흔들리던 진갑용을 현금 트레이드로 데려오게 된다.[15] 이승엽이 54홈런으로 홈런왕 자리에 오르며 본격적으로 홈런타자의 반열에 들기 시작했으며, 김한수3루수 KBO 골든글러브를 2번이나 타는 등의 성과는 있었다. 다만 이 쪽은 백인천 감독의 공이라 보는 이들이 많다.[16] 연봉 1억 5천, 계약금 1억 5천에 3년 계약.[17] 남에게 생각이 모두 들키는 사람을 다룬 드라마 '사토라레'에서 따왔다.[18] 2007년 당시 야구 인기를 회복하고자 그해 7월 15일 ~ 8월 14일의 경기를 서머리그라 하고 우승팀에게는 2억원의 상금이 주어졌다. 참고로 서머리그 챔피언은 삼성이었으며, 괜히 여름에 강한 것이 아님을 증명했다.[19] 자신도 이미 프로야구 감독으로써 커리어가 끝이 난걸 알았고 조금의 성과라도 내보여 팬들에게 즐거움을 드리고자 서머리그라도 우승하자는 갈망을 보였다고 한다.[20] 자진사퇴였으니 잔여 연봉은 줘야 한다.[21] 해태와 KIA를 포함해 유일하게 7이 들어가는 해에 우승을 못했다. 참고로 1987, 1997, 2017년에는 우승했다.[22] 훗날 이러한 행동을 한 이유는 프로야구 감독으로써 다시 일어설 수 없다는걸 인지한 상태여서 감독이 이러한 행동을 함으로써 선수단이 자극받고 오신 관중 및 시청하는 야구팬들에게 꼴찌지만 무기력하게 당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않아 그랬다고 한다.[23] 정확히 서정환이 바닥에 추락한 2007년에는 이미 이순철은 잘리고 없었고, 김재박이 LG를 이끌며 그나마 어찌저찌 수습에 성공하고 팀을 5위까지 끌어올렸다. 물론 그 다음 해부터 김재박도 자신의 발언을 몸소 입증하며 날개없는 추락을 겪게 된다.[24] 절을 하게 된 비화는 서정환 감독의 부인이 연패 중인데도 더운 날씨에 나와서 응원하는 팬들이 안쓰럽다고 말한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25] 이 때 이종범의 성적은 프로선수 생활 19년을 하면서 기록한 성적 중 커리어 로우였다.[26] 특히나 이 둘 모두 삼성 시절이 KIA 시절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감독으로써나 선수로써나 선동열의 평가가 더 높기에 종합적인 위상은 선동열이 몇 수는 더 위이며 어찌 되었던 선동열은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여러 팀에서 감독 제의가 들어오고는 있으니, 8위를 찍고 완전히 은퇴한 서정환과는 상황이 다르다.[27] 말이 60이닝이지 불펜 전환 직전 선발 등판까지 합치면 거진 70이닝이다. 110구 던지고 이틀 쉬고 불펜으로 나오더니 그 후 두 달간 60이닝 가까이 소화했다. 참고로 162경기를 진행하는 메이저리그에서는 불펜투수가 한 시즌에 평균 70이닝 가량을 소화하는데, 한기주는 그걸 두 달만에 다 채운 것.[28] 삼성 시절 1998년 VS LG : 1승 3패, 1999년 VS 롯데 : 3승 4패, KIA 시절 2006년 VS 한화 : 1승 2패.[29] 1998년 2위, 1999년 매직리그 1위였다.[30] 최익성스톡킹에 나와서 한 말에 의하면 코치 시절부터 서정환과의 궁합이 잘 안 맞았으며 사이가 엄청 안 좋았다고 회고했다. 실제로 서정환이 삼성 코치 시절 최익성의 타격폼에 대놓고 디스를 하고 마찰을 빚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더군다나 서정환의 삼성 시절 보직이 수비코치였고 당시 삼성에 타격코치가 따로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수비코치가 타격폼을 가지고 이래라저래라 하면서 지적하는 건 엄연히 월권 행위다. 다행히 백인천 감독은 최익성에게 별 태클을 걸지 않았고 오히려 이러한 행위를 한 서정환 코치를 따로 불러 지적하는 등 최익성의 편을 들어줬다. 최익성은 스승인 백인천 감독이 전수 받은 타격폼으로 준수한 성적을 기록했다. 그러나 1997 시즌 종료 후 자신의 은사인 백인천 감독이 떠나고 후임 감독으로 부임한 사람이 하필이면 서정환이었고, 1998년에는 서정환 감독이 하라는 대로 타격폼을 바꿨는데 그 타격폼이 생각보다 잘 맞지 않아 타격감이 올라오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신인이었던 강동우가 뛰어난 활약을 보이면서 출장기회를 조금씩 잃어가면서 그는 어쩔 수 없이 한화로 트레이드 되었다. 이때부터 최익성 본인의 야구인생이 꼬이면서 저니맨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후 최익성이 사사방과 자서전에서 서정환을 대놓고 강도 높게 깠고 스톡킹에 출연해서도 서정환과 있었던 악연을 죄다 폭로했을 정도로 자기 야구 인생에서 서정환을 최악의 인물로 꼽고 있다. 백인천 감독과 조창수 감독대행에게는 최익성의 야구열정에 대한 이해도를 열었지만 서정환에게는 그런 것도 없었다고 한다. 성실한 선수와 비정한 지도자의 이면을 잘 드러내는 사례이자 삼성 시절 서정환의 대표적인 삽질로 꼽힌다.[31] 이 때문에 삼성 역사상 최악의 감독을 언급하려면 김성근, 선동열과 같이 종종 언급되기도 한다.[32] 임창용 혹사는 해태시절 김응용 감독때 2년 동안 혹사당하고 삼성 이적 이후 서정환 감독에 이르러서야 절정에 달했다는 변론이라도 있지만 최익성은 서정환 감독이 코치 시절부터 최익성의 타격 폼을 보고 대놓고 태클을 먼저 걸었고 두 사람간의 마찰이 빚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건 빼도 박도 못한 서정환의 잘못이다. 실제로 최익성은 최고의 인물과 최악의 인물을 놓고 대답했을 때 최고의 감독은 백인천 감독을 꼽았고 가장 꼴사나운 최악의 인물로 서정환 감독을 꼽았을 정도로 단호하게 말했을 정도다. 최익성은 서정환 감독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주 치를 떨고 있다고 한다.[33] 사실 팀 타선을 리빌딩한 백인천 감독의 공이 컸다. 2000년대 초 삼성은 임창용, 배영수, 김현욱, 김진웅, 노장진 정도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투수가 별로 없었지만 대신 이승엽을 위시한 강타선으로 성적을 냈던 팀이었다.[34] 공교롭게도 김성근 감독 역시 한화 이글스 시절은 더욱 처참해서 백인천, 이순철 다음가는 역대 최악의 감독 3위에 언급될 수준이다.[35] 김종국은 성적도 성적이지만 배임수재 혐의를 저질렀기 때문이다.[36] 5월 말에 어깨 부상을 당했는데, 재활 중간에 1군에 끌려나와 6월 말에 2경기 3이닝 던지고 다시 재활, 8월 초에 2경기 0.1이닝 던지고 다시 재활하다 9월 10일에 복귀해서 9경기 9이닝을 던지고 시즌 종료.[37] 시즌 초엔 불펜 패전조로 등판했다가 5월에 필승조 승격, 5월 24일부터는 4선발로 투입되다 6월에 계투 알바, 6월 21일부터 다시 선발 로테이션을 두 차례 돌다가 7월에 다시 계투 전환, 그렇게 계투로 뛰다가 8월에 한기주와 보직을 바꾸면서 다시 선발 등판, 그러나 9월에도 선발 로테이션을 도는 중 간간이 불펜 알바를 해야 했다.[38] 시즌 초에 불펜으로 뛰다가 6월에 김진우가 부상으로 빠지면서 선발 전환, 8월까지 로테이션을 돌다가 9월에 다시 불펜 전환.[39] 물론 한기주의 혹사는 고교야구 시절부터 시작해 후임인 조범현 감독도 책임이 있지만, 그 단초를 제기한 사람은 엄연히 서정환 감독이다. 신용운의 팔이 아작나면서 수술대에 오르자 그 수술 자국이 들어간 사진을 보며 욕을 엄청나게 바가지로 먹은 건 덤.[40] 실제로 장성호는 2006년까지 3할은 기본에 전 경기 출장도 무난하게 달성하는 등 내구성이 좋은 편이었지만 2007년 시즌 가벼운 무릎 부상을 달고 있었는데, 이 상태에서 무리하게 경기에 출장시키는 바람에 부상이 더욱 악화되었고 부상 덕분에 신체 밸런스가 무너져버리면서 타격감에도 영향을 미쳤고, 이후 풀타임을 치르지 못하고 백업을 전전하는 등 저니맨 신세가 되어버린다.[41] 윤석민은 고3때부터 아킬레스건이 안 좋았는데, 2005-2006 두 시즌 동안 기록적인 혹사를 당하고 2007 시즌 아킬레스건 부상을 당한다. 이후 윤석민은 러닝을 제대로 못 하는 몸이 되었고, 이로 인한 운동 부족은 은퇴 시까지 잔부상들을 달고 다니는 주요 원인이 되고 만다.[42] 이 영향으로, 2022년 기준 KIA는 88년생인 양현종이 투수조 최고참이 될 정도로 30대 후반을 넘어가는 투수가 한 명도 없다. 있어봐야 타 팀에서 이적한 선수들이 대다수고 그나마도 얼마 안가서 이적하거나 은퇴했다.[43] 마무리로 시선을 돌려도 2년간 마무리로 활약한 한기주 이후 2021년부터 마무리로 활약하고 있는 정해영이 나오기 전까지 2년 이상 활약한 마무리 투수가 없었다. 덕분에 2010년대 기아의 불펜진은 매 시즌마다 마무리가 바뀐다거나 이로 인해 정립이 되지 않는 불펜진 체계로 인하여 방화범들로만 구성되기도...[44] 김한수, 정현욱, 박진만, 이상군은 그나마 선수로써 팀에 크게 공헌했기에 이 정도로 비판받지는 않는다.[45] 실제로 서정환 감독 취임 이전까지의 KIA는 승률이 5할 이상이다.[46] 플레이오프에서 LG에 패배[47] 매직리그 1위[48] 플레이오프에서 롯데에 패배[49] 시즌 중도 경질된 유남호 감독대행[50] 준플레이오프에서 한화에 패배[51] 정규시즌 1경기를 남겨놓고 경질되었는데 KBO의 막장 운영 때문에 벌어진 일. KBO 슈퍼 한국시리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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