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명이인의 교수에 대한 내용은 서경덕(교수)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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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徐敬德1489년(성종 20) ~ 1546년(명종 1)
조선 중기의 주기론 유학자. 본관은 당성(唐城). 자는 가구(可久), 호는 화담(花潭), 복재(復齋). 시호는 문강(文康).
2. 생애
1489년 경기도 개성부에서 아버지 수의부위(修義副尉) 서호번(徐好蕃)과 어머니 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어릴 적 집안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13세에 처음으로 글을 읽었고 스승 없이 독학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18세에 <대학>을 읽고 격물치지에 뜻을 두었다고 하며 종달새 울음소리를 듣고 하루종일 이를 탐구했다는 일화도 있다. 1519년 현량과에 추천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개성 화담에 서재를 세우고 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이후 어머니의 요청으로 1531년(중종 26) 식년 생원시에 응시하여 2등 7위로 입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했다. 그의 호 화담은 그가 은거하면서 후학을 양성한 곳의 지명에서 따왔다고 한다. 사후 1575년(선조 8) 우의정에 추증(追贈) 되었다.
그의 철학은 철저한 주기론이며 태허설(太虛說)이라고도 한다. 그는 기가 모이면 물질이 되고 기가 흩어지면 태허가 된다고 보았다. 이 때 태허(太虛)라는 것은 기가 띄엄띄엄 흩어져 지각되지 않는 상태이며 소멸한 무(無)의 상태가 아니다. 이 때문에 그의 철학은 지극히 현세 지향적인 성격을 띠며 그가 불교 철학을 비판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물질을 구성하는 것과 태허로 돌아가는 것은 음양의 원리에 따라 순행하는데 어떻게 뭉치고 흩어지느냐 하는 것이 바로 이(理)이다. 하지만 그가 이를 언급하는 것은 이 정도 수준에서 그칠 뿐이며, 그 이외의 부분은 대개 기에 대한 설명으로 전개된다. 종달새를 하루 종일 탐구했다든가 하는 일화들 또한 기를 탐구해 그 속에 숨은 이를 찾으려 하는 서경덕 철학을 잘 반영한 일화인 것이다.[1][2]
이러한 그의 철학은 정작 성리학의 중심이 되는 이를 가볍게 여기고 때문에 성리학에서 제시한 방대한 이에 대한 설명을 그의 철학 체계 안에 넣지 못하는 한계가 있었다. 또한 기의 순환을 통해 우주론을 설명했다 하더라도 이를 인륜에 적용시켜야 하는 유학의 기본 입장상 이가 단순히 자연 이치로 머문다면 이는 바람직한 철학이라고 볼 수 없었다.[3] 때문에 생전의 서경덕은 이황과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이와 기를 포괄적으로 설명한 주기론자 이이의 철학이 등장하면서 조선 주기론은 이이 철학 중심으로 흐르게 된다.
마지막 순간에 제자가 "지금 심정은 어떠신지요?"라 물어보니 "살고 죽는 이치는 깨달은지 오래야. 그래서 마음이 편해."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는 『화담집(花潭集)』이 있으며, 그의 사상적인 면모를 밝혀 주는 「원이기(原理氣)」 · 「이기설(理氣說)」 · 「태허설」 ·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등의 대표적인 글을 수록하고 있다[4]
3. 기타
- 제자 중에 유명한 사람으로는 토정비결로 잘 알려진 이지함이 있다. 이지함 또한 농업과 상업의 병진론을 주장하는 등 당시 사상가 중에서 획기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기에 서경덕 유파가 이어지지 못한데 아쉬움을 보이는 학자도 있다. 그 외에도 박순[5], 허엽[6], 박지화[7], 양사언, 한백겸[8], 민순[9], 차천로 등이 있다. 그의 학파는 대체적으로 스스로 깨닫고 아는 것을 중시하고 주역을 모범으로 삼았다는 특징이 있다. 반면 붕당에 있어서는 통일된 당을 형성하지 않고 각자 흩어졌고, 화담학파가 경기지방이라는 유리한 정치적 고지에서 형성되었음에도 조선 후기까지 학파가 이어지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다.
- 성리학자였지만 노장 사상과 불교에 대한 이해 또한 깊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이에 대한 비판 또한 제기한 바 있다. 그런데 왜인지는 모르지만 후대에는 성리학을 연구하는 철학자가 아닌 도사 이미지로 자주 각색이 되어서 전우치 설화를 비롯한 조선 시대 민담 소설이나 기담에 노장 사상이나 선술(仙術)의 대가로 엄청난 도술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도사로 등장한다. 설화 전우치전에서는 도술만 믿고 깽판치고 다니던 전우치를 굴복시켜서 선계로 데려가는 등 전우치의 뒷수습을 주로 맡는다. 동국여지지 전우치에 대한 설명 중 ' 同時徐敬德之弟崇德,亦有異術云'(동시대 서경덕의 아우 서숭덕이 있는데 역시 특이한 술법에 있었다 한다.)라는 구절이 있다.
- 종달새 일화처럼 공부 방법이 현재의 명문대 공부법과 유사했다. 전해지는 방법으로는 단어를 방 안에 써 붙여 놓고 그 단어를 하루 종일 들여다보며 근본부터 사색을 하거나 고전들을 뒤져보며 탐구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세운 가설에 대해 검증하고 확인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그의 사색적인 성향은 <상서>를 공부할 때 훈장이 그에게 한 말에서 잘 드러난다."훈장인 나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홀로 깊이 생각해서 15일 만에 알아내고 말았으니 너는 상서를 사색으로 깨우친 것이다."
그래서 뒷날 추증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선조가 "이 사람 공부는 수신(修身)이 없으니 의심스러운데?"라고 의문을 제기했는데 율곡 이이는 서경덕의 공부법에 대해 이런 평가를 내리며 서경덕이 우의정에 추증되는데 역할을 했다.[10]"그의 공부법을 꼭 본받을 것은 아니지만, 깊이 생각하고 멀리 나아가 스스로 얻은 것이 많아서 문자로만 익히고 말 학문은 아닙니다. 요즘 학자들은 성현의 학설을 모방해 말할 뿐 마음으로 터득한 것이 없지 않습니까?"
- 야사 한정으로 황진이의 유혹을 뿌리치고 그녀의 스승이 되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유혹을 자세히 묘사한 이야기들도 자주 보이는데 이런 곳에 등장하는 서경덕의 모습은 목석으로 묘사된다. 때문에 황진이에게 10년(혹은 30년) 수행을 날려먹은 지족 선사[12]와 비교되어서 '비인간적이다'라는 다소 어이없는 이유로 까이는 수준이다. 이런 서경덕의 모습이 일반 사람들에게는 어지간히 문제가 있었는지 사실은 시문을 통해 황진이를 그리워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고 겉으로만 그러는 척 했지 실제로는 할거 다 했을 거라고 억지 쓰는 사람들도 있지만 애초에 야사이므로 황진이를 만났는지 조차도 확실하지 않다.
- 평생 벼슬하지 않고 독창적인 주기 철학을 수립하였다.
- 서남수 교육부장관이 당성 서씨(唐城 徐氏)로, 서경덕의 후손이다.2013년 5월 10일 문화일보 기사 실향민이던 부모님의 고향이 서경덕이 살았던 경기도 개풍군 영남면 용흥리(現 개성시 용흥동)이었다고.
4. 대중매체
- 2009년 개봉한 영화 <전우치>에서는 배우 김윤석이 연기했다. 그의 호에서 이름을 따온 듯한 화담이라는 인물이 도술의 고수로 나오지만 진짜 정체는 십이지 요괴 중 양 요괴이다. 평소 인격자로 묘사되는 그를 완전히 비틀어 교활함의 끝을 보여주는 악역으로 그렸다.
- 정은궐 작가의 소설 <해를 품은 달>에서 월이라는 이름의 무녀를 만난 왕이 "화담의 시를 아는 무녀라..."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 조선일보에서 연재하던 아동만화 <맛있는 한자> 전우치전에서 등장. 전우치와 대극을 이루는 캐릭터로 전우치가 구미호 구슬을 얻어 운좋게 뛰어난 도인이 된 케이스인 반면 순수 노력과 재능으로 성장한 도인이다. 작 중 메인 악역인 흑우를 해치우는 업적을 달성했으며 이후 망나니짓을 하며 방황하던[13] 전우치를 제지하는 과정에서 도술 대결을 벌이게 된다. 각자 청룡과 적룡으로 변신해 벌이는 전투가 볼거리.[14] 아무래도 구미호 구슬이라는 템빨을 가진 전우치에게 다소 밀리지만 대결 중 전우치의 스승이 나타나[15] 전우치를 꾸짖자 당황한 전우치의 빈틈을 노려 승리한다. 이후 전우치와 함께 산에 들어가 도를 닦게 된다.
- 까다롭스키의 대체역사물인 <임꺽정은 살아있다>에서는 어린 시절로 회귀한 임꺽정이 모시던 스님의 소개를 받아 서경덕의 제자로 들어갔다. 그냥 갔다가는 문전박대당해서 임꺽정 성격에 깽판치다가 잡혀갈거라고 걱정한 스님이 소개를 해주기로 하는데 해당 스님의 속명이 다름아니라 전우치였다.
- 네이버웹툰의 먹지마세요 에서 최고악역으로 등장. 불로불사의 정법서를 만들겠답시고 어린아이들을 죽여 원귀로 만드는 실험을했지만 인간과 요괴를 평화롭게 하였다는 이유로 죽은후 옥황상제에게 명패를받아 신이 된다. 전우치의 스승으로 본인이 죽은 후에도 본인을 위해 살던 전우치를 끝까지 이용해먹고 죽여 원귀로 만든다.
[1] 이러한 서경덕 철학에 대해 원자설, 경험론과 유사하다는 평이 있으며 북한에서는 서경덕을 유물론의 시초로까지 끌어올린다. 당연히 사회주의적인 정치색이 섞여 있고 남한이 아닌 북한 출신이니만큼 띄워주는 면도 있겠지만...[2] 그러나 러시아과학아카데미에서 편찬하여 현재도 간행 중인 <세계철학사>에서도 서경덕의 기일원론 철학을 유교 계통의 유물론으로 분류하며 그 시초로 북송의 성리학자 장재를 꼽는 만큼 이와 같은 억측은 적당히 걸러봐야 한다. 이후 임성주, 최한기 등이 조선의 기철학을 계승한다.[3] 사실 서경덕은 태허에서 하늘의 뜻(이)에 따라 실체가 이루어지므로 항상 고요한 마음을 가지라는 수양론을 제시했고 그가 평소에 중시하던 자연 과학적인 관찰 또한 하나의 방법론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조선은 정치 혼란과 민생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철학을 요구하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과 서경덕 철학은 어울리지 못했다.[4]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5] 문하에서 가장 명성이 있었던 인물. 이황과 조식의 문하에도 있었다. 서경덕 학파 특유의 독자 연구도 하였던 흔적이 있으나 한계를 느꼈던 것 같다. 서인 강경파[6] 스승의 영향인지 이황과 조식에게 학문이 부족하다고 까인다. 동인 강경파[7] 서얼 출신[8] 이항복, 정경세의 친구로 조선 주역 연구의 1인자.[9] 화담학파의 학문을 조선 중기 이후까지 계승시킨 장본인으로, 책을 읽음에 있어서 스스로 깨닫는 것(자득)과 핵심을 파악하는 것(대요)을 중요시했으며 감정을 중시하는 주정설을 주장했다.[10] 물론 서경덕의 후학은 이 평도 마음에 안 들어했다. 이건 조식이나 이황 후학들도 마찬가지.[11] 근데 송도 삼절은 황진이 자칭이라 실제로 저 셋이 세트로 묶여 칭송받았는지는 애매하다.[12] 여기서 '10년 수행 도로아미타불'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말이 있다.[13] 조선 최강이자 최악의 도인인 흑우를 서경덕이 해치웠다면 전우치는 명나라 최강의 도인인 노헌을 해치우는 업적을 달성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전우치와 사랑하는 사이가 된 구미호가 전우치를 돕다 살해당하면서 멘탈 붕괴로 방황하게 된 것.[14] 작 중 설정상 용으로 변하는 것은 도술의 극한까지 달한 최고의 도인만이 가능하다고 한다.[15] 죽은 인물이었는데 전우치가 망나니짓을 벌이고 다니자 참다못해 이승으로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