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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26 10:31:13

삼국지 : 조조의 아들을 죽이다

삼국지 : 조조의 아들을 죽이다
파일:삼국지 조조의 아들을 죽이다.png
장르 대체역사, 빙의, 회귀
작가 은수랑
출판사 KW북스
연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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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기간 2022. 04. 06. ~ 2023. 08. 09

1. 개요2. 줄거리3. 연재 현황4. 특징5. 등장인물
5.1. 장수 진영5.2. 조조 진영5.3. 유비 진영5.4. 손권 진영5.5. 유표 진영5.6. 원소 진영5.7. 장로 진영5.8. 기타 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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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삼국지 대체역사소설. 작가는 《삼국지 유봉전 : 계한의 부흥》을 집필한 은수랑.

2. 줄거리

조조가 아끼던 첫째 아들을 내가 죽였다.
그리고 조조에게 살해당할 미래를 깨우쳐 버렸다!

"조공은 원한만으로 장군을 해하지는 않을 겁니다."

미래의 기록처럼 죽지 않고자 조조에게 항복했지만,
돌아온 건 반역 누명과 가족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깨어난 2회차 인생!

"이번 생엔 씹어먹을 조조에게 복수도 하고, 내 가족도 지킬 것이다!"

가족의 행복과 전생의 복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 장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조조가 숙모를 범하자 장수는 격분하여 조조를 습격, 조앙전위를 죽이고 조조를 쫓다가 낙마한다. 이때 미래 대한민국에서 교통사고로 죽은 장수가 빙의하고, 미래 역사에서 본인은 오환족을 정벌하다 병사하고 자식은 위풍의 난에 휘말려 대가 끊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장수는 역사를 바꾸고자 조조에게 귀순한 뒤 은퇴했는데, 사이코패스 조비에게 갈굼을 당한 끝에 일가족이 참살당한다. 그리고 조조를 습격하다 낙마해 빙의한 시점으로 회귀한다. 빙의로 얻은 미래 지식과 1회차 인생으로 얻은 미래 지식을 바탕으로, 장수는 2회차 인생에서 조조와 조비 부자를 죽여버리기로 결심한다.

3. 연재 현황

2022년 4월 6일부터 문피아에서 연재를 시작하였다.

카카오페이지에 연재본이 발매되었다.

2023년 8월 9일 총 350화로 완결되었다.

4. 특징

형식은 전형적인 삼국지 대역물이지만, 미래에서 빙의한 인물이 한번 죽고 회귀하면서 단편적인 미래 지식과 1회차 인생의 경험을 결합시켜 착오를 줄인다는 아이디어와, 양주 기병을 거느리고 가후를 군사로 둔 시작부터 거칠 게 없는 주인공이 오직 조조를 죽이기 위해 천하통일이 아닌 군웅할거 난세를 조장한다는[1][2] 독특한 줄거리를 갖고 있다.[3]

5. 등장인물

5.1. 장수 진영

5.2. 조조 진영

5.3. 유비 진영

5.4. 손권 진영

5.5. 유표 진영

5.6. 원소 진영

5.7. 장로 진영

5.8. 기타 진영



[1] 관도대전이 조조의 승리로 끝나는 순간 사실상 천하대세가 결정나기 때문.[2] 물론 이는 진정으로 통일을 막기 위함이 아닌, 유비의 세력기반으로 형주와 양주를 생각하고 있고, 이 기반이 갖춰지기 전까지 조조가 성장하지 못하도록 견제하기 위함이다. 당장 최강의 세력은 원소지만 실질적인 역사를 아는 장수나 가후, 제갈량, 방통, 서서 등을 비롯한 책사진들은 조조가 곧 원소 세력을 압도할 것을 예측했기 때문.[3] 조조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대항마로 선택한 유비의 세력이 안정권에 들어서자 익주를 제외하면 유비 조조 원상 3개 세력의 삼국정립 구도로 흐르고 있다. 원래 역사에서 형주를 3개 세력 모두가 일부를 점유했듯 바뀐 역사에서 서주를 3개 세력이 나눠 가진 점도 비슷하고, 원상이 서주 점유를 위해 뒤통수를 시도한 것마저 동일하다. 차이점이라면, 익주의 경우 익주로 들어갈 길목(한중, 형주)을 모두 점령한 유비가 조조와의 빠른 결전을 위해 방치해두었기 때문에 작품 끝까지 독립된 세력으로 남았으며, 장강 방어선을 낀 손권과는 다르게 원상은 조조의 공세를 제대로 막아내지 못해 사실상 청주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이탈해버렸고 원상 자신을 배신한 고간(병주), 원희(유주), 공손강(요동) 등과 비슷한 규모로 쪼그라들어 사실상 유비-조조 이강체제로 접어들게 되었다.[4] 이는 휘하 기병들의 신임을 얻기 위한 안배였다. 원래라면 아예 추격을 하지 않는 것이 제일 좋았으나 호전적인 양주 기병의 불신을 살 우려가 있기 때문.[5] 천재 기믹이 있는 등장인물 가운데 왕찬은 업무 짬처리로 입을 막아버릴 수 있지만, 미래의 사위나 다름없는 소년 주불의가 찾아오면 쩔쩔매는 개그가 나온다.[6] 즉,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울타리에 들이지 않기에 세력 확장에 큰 제약이 있다. 유비나 조조가 대인배스러운 모습을 보이면서 세력을 확장하거나 온존한 모습과 같은 걸 보여줄 생각이 없다는 뜻.[7] 제갈량 뿐만 아니라 작중 다른 인물들도 '조조가 죽을 죄를 지은 건 맞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장수가 너무 막나가는 거 아닌가' 의아해한다. 회귀한 장수 입장에서는 전생에 본인을 포함한 일가족의 원수지만, 이 시대 사람들 눈에는 숙모를 욕보인 죄를 추궁하는 것이니. 오히려 장남과 호위무사, 핵심 장수를 살해당한 조조가 장수에게 죽자고 덤벼야 정상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타도 조조를 외치는 처지에 대놓고 이를 지적하는 인물은 없다.[8] 손권이 멸망하지도 않았는데 합비를 먼저 친다는 선택을 했던 건, 시간을 주었다가 합비가 아예 난공불락이 되어 조조가 마음 놓고 원상을 칠 수 있기 때문이다. 제갈량조차도 합비의 사정을 파악한 뒤 납득했다. 장수 역시 조조의 복수가 우선이되 가후의 조언을 받아들여 유비 세력과 척지지 않게 적절히 양보할 땐 양보해주었다.[9] 원래 역사와 달리 여남에서 유비를 구해주며 어느 정도 군세를 갖출 수 있었고, 장수 자신이 지키던 완성을 내주어 형주에 기반을 마련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양주 점령에서도 육손과의 내통을 미리 구상하고 오군 점령에서 공을 세우는 등 활약하여 사실상 유비의 세력 기반을 만드는 데 장수의 공은 제일에 가까웠다. 또한 조조의 남진을 피해 백성을 이끌고 남하하던 유비를 구해준데다, 책사들을 천거해 유비 세력의 대전략을 구성할 수 있었고, 구봉의 입양을 막아 후계자 분쟁조차 없애주었기 때문에 유비 입장에서는 어마어마한 은혜를 입은 셈. 사실 원 역사에서 이엄이 탁고를 받기 전까지의 (역사 기록 상의) 공적은 장수에 비견될 수 없는 수준이다.[10] 다른 군웅이라면 은혜를 입고도 언제든 상황이 달라지면 입을 싹 씻겠지만, 인의를 앞세우는 유비라면 어떤 상황이 닥쳐도 은혜를 잊지는 않을 것이라는 장수의 계산도 있었다.[11] 2차 관도 대전의 마지막 순간, 조조를 눈앞에 두고 화살이 다 떨어져 자신의 손으로 조조를 죽이지 못하게 되자 닿을리 없는 창을 던지고 한탄했으나, 마지막 남았던 화살 한 발이 아들 장천에게 주어졌고, 장천이 조조를 격살하게 된 것. 장수는 이를 두고 자신 역시 조조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지만, 1회차 인생에서 자신을 죽인 것은 조비였으나 장천을 죽인 것은 조조였고, 이 때문에 복수 역시 장천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 순리였다는 것을 깨닫는다.[12] 헌제는 장수를 유비의 견제책으로 내세울 작정으로, 특별히 공을 치하하면서 청을 한 가지 들어준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장수는 헌제가 여전히 유약함을 보였고, 애초에 본인의 지향점 역시 조조-조비에게 복수를 한 뒤에는 가족과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기 때문에 사직을 요청하였다.[13] 장천은 장수가 은퇴하자 본인도 은퇴하려 했으나, 이렇게 되면 유비가 장수를 아예 정계에서 배제하려고 은퇴시켰다는 의심을 살 수 있으므로 유비가 적극적으로 말렸다고 한다. 사실 유비 세력에서 장수가 거의 자신 수하인 랑연군을 비롯한 정예 기병을 전담하다시피 한데다 장수 본인이 유비와 대립할 의사가 없음을 은퇴로 드러내기도 했고, 무엇보다 장천이 유비 세력의 핵심인 관우의 사위였기 때문에 랑연군을 장천이 이끌게 하는 것은 유비에게 명분으로나 실리로나 이득이었다.[14] 그렇지 않아도 이 시점에서 이미 동탁과 사도구의 부하로 있던 데다, 자신이 제시한 계략으로 사도구가 삼보에서 벌인 깽판 탓에 이력에 큰 흠이 있는 상태이다.[15] 둘 모두 유비 휘하에 들어간 시점이 208년 이후인데, 200화 기준으로 아직 207년이다. 원래 역사라면 두 사람 모두 재야에 있을 시점이며, 이론이야 나름 충족되었지만 이를 실전에 펼칠 경험이 부족한 상황이다. 이 경험이란 것이 중요하게 묘사되는데, 그 주유마저도 장수의 기병을 이론상으로만 알고 여몽에게 대 기병 전술을 전수해주었으나 여몽이 실전과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완전히 탈탈 털려버린 것이 대표적이다.[16] 유비 세력 내에서 입지를 구축하기 위해 많은 양보를 했던 장수이지만, 가후만큼은 내줄 생각이 티끌만큼도 없을 만큼 서로를 신뢰하고 있다. 장수는 하루 빨리 조조의 복수를 하고 싶어하지만 가후의 조언을 듣고 유비의 양주 정벌을 지지하는 등, 가후의 조언을 항상 귀담아듣는다. 1회차에서 가후의 조언으로 위풍의 난과 연루되기 전까지 장수가 조조의 은밀한 토사구팽을 피한 기억도 장수가 가후에게 호감을 갖는 이유다.[17] 이 수행원이 바로 위풍이다.[18] 회귀한 장수가 가후에게 시류에만 맡기지 말고 주도적으로 살라는 조언이 가후에게 있어서는 평생 남을 뻔한 후회를 남기지 않게 해준 조언이었던 것이다.[19] 보통 장수의 숙모 추씨가 주목받지만, 호거아도 조조가 직접 뇌물까지 주면서 빼오려고 했을 정도로 유능한 무장이라는 기록이 있다. 작중에서는 호거아에게 황금을 내려 장수에게 이간책까지 펼친 것으로 묘사된다.[20] 원앙진을 습득한 농병을 이끄는 황충이 야전에서 수비와 토벌전 위주인 반면, 금범적을 다루는 감녕은 주로 공성전과 수전에서 활약하기 때문이다. 역할 자체가 겹치지 않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공을 비교할 뿐이라 싸움 전에 서로 임무를 자기가 맡겠다고 전공을 다투는 갈등양상을 나타날 일이 없다.[21] 이게 왕찬에게는 트라우마가 되었는지, 영웅기를 집필하던 왕찬에게 이 일을 다시 끄집어내자 바로 격분하면서 다시 대결하자고 악을 쓴다(...)[22] 영웅기가 전후편으로 나뉘었는데, 후편의 경우 장수의 간섭으로 서술하지 못한 내용들을 적어둔 것이다.[23] 장수 역시 의도치 않게 연의처럼 반골의 상의 이미지를 씌우게 된 터라 위연에게 내심 미안해했다.[24] 방통은 공을 세워서 직위를 올려준 게 아니라 공을 세우라고 직위 먼저 올려준 거 아니냐고 딴죽을 걸었다. 물론 장수 입장에서도 재능을 알고 있었으니 십인장 직위는 미리 준 것이 맞다.[25] 조비가 장수에게 대패한 당시에 조창과 조식은 공을 세웠기 때문.[26] 장수의 생각으로는 저놈은 남의 고통을 느껴봐야 한다 했었다. 특히 자신의 아들을 죽이고 가정 자체를 파탄내버렸으니 더더욱 그렇게 고통을 주고 싶었을 것이다. 명령으로도 아예 조비를 죽이고 항복하면 벌하고, 그냥 도망치면 살려주겠다고 했을 정도.[27] 덤으로 이 때 유비의 가족들과 함께 서서의 모친도 있었기 때문에 서서는 장수에게 은혜를 입은 셈이 되었다.[28] 다만 장수는 어차피 유복의 상위호환인 제갈량을 얻을 텐데 영입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찔러본 것에 불과했다.[29] 유복 입장에서야 당연히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지만, 이를 보고받는 조조의 입장에서는 자신조차 패배시켰던 장수에게 합비가 위험해보이는 것이 당연했고, 하북을 침공한 상황에서 대규모 원군을 꾸리지 못하니 당연히 장수가 잡아먹을 수 있는 규모의 원군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30] 추수 직후 합비를 이중 목책으로 포위한 뒤, 다음 해 여름까지 진득하게 포위했다. 원군으로 파견된 하후연은 공성이 실패하고 퇴각하는 적군을 추격해 피해를 입히는 역할이었어서 목책을 공성하는데는 부적합했고, 포위당한 합비성의 유복군 역시 수성에만 일가견이 있었을 뿐 성 밖을 나서는 순간 오합지졸이 될 게 명약관화해서 이중 목책을 통한 포위를 뚫어낼 수 없었다. 그나마 낙관적인 상황이라면 포위에도 불구하고 합비성의 군량이 추수 직후라 꽤나 넉넉하다는 점이었는데, 장수는 이 점을 이용했다. 이중 목책을 이용한 포위는 사실 페이크였고, 진짜 계책은 몰래 건설한 둑을 폭파시켜 합비를 수장시키는 것이었다. 마침 추수 이후에 들이닥친 공성전이라 백성들까지 성내에 몰린 상황에서 물난리로 인해 군량이 모조리 바닥난 상황이 되었고 덕망으로 유명한 유복이 이를 방치할 수 없어 끝내 항복을 받아냈다. 유복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혼잣말로 심배였다면 항복하지 않았을거라고 중얼거린 건 덤이다.[31] 장수는 조조를 죽이기 위해 북진이 유일한 길이지만, 유비는 손권을 끝장내고 형주와 강동을 아우르거나 혹은 원래 역사대로 파촉을 차지하는 선택지가 있었다. 때문에 유비의 관심사를 세력 안정이 아닌 타도 조조로 돌리기 위해서는 북벌의 거점이 될 합비를 꼭 점령해야 했다.[32] 유복의 수비군은 수비에 특화되어 있어 야전에서 큰 활약을 하지 못하는데다 장료는 고작 500명의 결사대만 이끌고 성 안으로 진입했기 때문에 원군과의 기각지세가 사실상 불가능했다. 결국 1차 원군은 박살나고 정작 원군에 남아있으면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장료는 무력화된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33] 정확히 말하면 관우만 합비를 공격하며 시선을 끄는 동안 장수는 슬쩍 서주로 빠져 그곳을 공략하는 책략이었다.[34] 병력 수는 주유가 우위였으나 정예 병력이 손권에게 대부분 배치되어 있던 주유에 비해 관우는 정예를 거느려서 팽팽한 싸움이었지만, 형주에서 얻은 요화 곽독 곽준이 오의 숙장들 못지 않게 잘 싸워준 덕분에 승패가 갈렸다.[35] 원래는 장수의 딸 장은과 자신의 차남(관흥)을 연결해 줄 생각을 했으나 혼처가 이미 정해진데다 장수의 아들에 대해 관평이 호의적으로 말해주어 성사되었다.[36] 다만 능력은 인정하지만 둘 간의 사이는 대놓고 대립각만 안 세울 뿐 썩 좋진 않다. 장수만 봤다하면 말을 틱틱 쏘고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가는 말이 곱진 않으니 장수 역시도 말이 곱게는 안 나오는 모습을 보인다. 관우와 장수가 사돈이 된다는 말에 왜 하필 그 집안이랑 사돈 맺냐며 한탄하기도 한다.[37] 이는 장비의 성격에서 기인하는 면이 큰데, 군자는 우대하지만 소인은 대놓고 혐오한다고 정사에도 적혀있다. 북방 출신인 장수의 성격도 군자와는 거리가 머니 그래서 싫어하는 것.[38] 3차 합비 원정에 불려온 위연은 궂은 일인 예장 수비를 스승인 장비에게 떠넘긴 셈이라 생각했는지 난색을 표하기도 했다.[39] 호불호가 너무 명확하고 인재들을 소수 정예로 운영하기에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기에 자신이 장수에게 임관하지 않고 유비에게 갔다는 의견도 덧붙였다.[40] 장수의 무한신뢰에 오히려 조운이 '도대체 이 사람이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이렇게 믿어주지?' 곤혹스러워할 정도다. 그도 그럴게, 조운은 공손찬 휘하에서 기병대장으로 활약한 경력이 있긴 하지만, 장수는 이미 유비조차도 이기지 못했던 조조를 이긴 몇 안되는 명장이었던데다 그의 휘하 기병은 명성이 매우 높은 양주 기병이었기 때문이다.[41] 가후는 제갈량이 두 번이나 거절했던 이유를 추측하기를, 만인지적이라 불리는 관우와 장비가 유비의 양팔 노릇을 하고 있기 때문에 곧장 임관하면 관우와 장비에게 휘둘릴 여지가 크므로 자신의 입지를 굳히기 위함이라고 한다.[42] 특히 마초가 제갈량의 매복계에 혼쭐이 났다. 매복을 피해서 우회하는 족족 새로운 매복에 걸렸다(...)[43] 다만 카운터라고 해서 주유나 순욱이 절대 여유롭지는 않았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받아치고 운 좋게 그게 통한 상황이었다. 순욱 같은 경우는 원상과 대치하던 병력을 빼내 허도를 침공하는 관우를 쳤는데, 원상이 고간과 대립하는 입장인지라 당장 군대가 이동해도 바로 빈틈을 노리지는 못할 거라는 확신을 갖고 벌인 도박이었다. 반대로 주유의 경우 전술 측면에서 제갈량에게 꽤나 곤란함을 먹이기도 했지만, 이를 예측한 장수와 가후가 바로 오군으로 들이닥친다는 비책을 적중시켜 결국 주유가 상황 역전에 실패하고 말았다.[44] 조조가 북방을 어느 정도 평정했으므로 호표기의 전력이 강해졌기 때문에 이를 대처할 필요가 있었다.[45] 덕분에 오군 정벌에서 가후, 제갈량, 육손 위촉오 삼국을 대표하는 세 책사가 작전회의를 여는 진풍경이 벌어진다.[46] 장수는 복수의 기회를 육손에게 직접 주고자 했고, 양주에 파견되었던 관우는 손가를 품으려는 유비의 계획이 손가 멸문과 함께 틀어질 것을 우려해 장수와 갈등을 빚고 있었다. 육손은 이에 대해 자신이 직접 손가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대의와 복수를 타협함으로써 관우와 장수를 중재했다.[47] 사실 육손이 유비 세력 내에서 친한 파벌이 몇 없기도 했다. 같이 항복했던 오군 사성 중 인척관계인 고가의 고옹을 제외하면 나머지 두 가문은 경쟁관계이기 때문.[48] 심지어 3만 명 중 1만 명은 갓 징집한 농병이었다. 이전 관우와 함께 합비 공략에 나섰을 때도 4만 명으로 갔던 걸 생각하면 합비 공략을 하기엔 적은 병력이었다.[49] 주환이 계속해서 주가군을 어필했던 것도 중요한 임무를 달라는 것이었는데, 의도치 않게 주환이 불만을 품지 않을 상황이 된 것.[50] 만약 합비 공략전에서 주가군에게 공적이 적게 돌아왔다면 주환도 의심해서 이를 듣지 않고 항명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당장에 불만이 없던 상태인 주환도 처음 오군으로 돌아가라고 하자 골칫거리처럼 보이는 주가군을 오군으로 돌려보내는 게 아닌가 의심을 할 정도로 장수의 지시가 터무니없었기 때문.[51] 방금 막 합류한 후군으로 우회하는 적을 막으라는 임무였는데, 곽준은 관우의 지시를 이해하고 휴식을 취하되 전투 태세를 풀지 말 것을 강조했고 원 역사대로 다수의 적을 상대로 후군을 방어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주유의 노림수를 격파했고, 곽준을 믿은 관우가 전방에서 주유군을 격파함으로써 대승을 거두었다.[52] 암살에 대해 말해봐야 도리어 의심만 살 테니 암살당하는 것은 필연이라고 할 정도로 격한 성정의 소유자였다.[53] 사실 완전히 같지는 않다. 원 역사에서는 손권이 200년에 후계를 물려받은 뒤, 황조 토벌을 시작하는 해가 203년이었다. 하지만 작중에서는 장수의 안배로 인해 이술이 반란을 시작하기도 전에 숙청당한 데다 손보는 반란 의도를 숨겼기 때문에 후계를 물려받았고, 암살을 시행한 주숙렴의 배후에 형주 호족이 있다는 정황이 진작에 발견하면서 당장 강하 원정을 시작할 배경이 되었다.[54] 아예 '내가 천하에서 인정하는 다섯 사람 가운데 하나'라고 공공연히 말한다.[55] 육손이 배반해서 강동 정세를 알려주고, 제갈량의 고전을 상정한 가후의 책략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주유가 더 뛰어나다고 보기도 힘든 것은, 손견 시절부터 경험을 쌓아온 주유와 달리 제갈량은 첫 출전이였고, 육손은 항장에 어린 나이라 유비의 믿음을 사지 못해 계책이 일부만 쓰였다.[56] 이는 유비가 완성에 자리잡은 뒤 워낙에 빠르게 민심을 잡아서 유표의 경계심을 산 게 원인이었다. 때문에 유비를 막을 역할로 문빙을 남기고 상대적으로 문빙보다 능력이 부족한 유반을 파견했던 것.[57] 태사자 역시 작중에서 무예 자체는 장수보다 우위였으나 기마술의 차이로 인해 장수에게 죽고 말았다.[58] 장수는 유표의 죽음을 틈타 조조가 남진을 할 것을 우려하여 미리 조직력을 맞춘 것이었다.[59] 유비의 결정에 아무런 의견을 달지 않는 유기가 유일하게 나서는 경우가 장수가 전쟁에 나설 경우 지원을 해달라는 요청 뿐이라고 한다.[60] 당사자인 왕찬은 용모가 추레한 자신을 피하던 유표의 잘못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유기는 자신 때문에 왕찬이 중앙인 양양에서 벽지인 장사로 좌천되었다고 생각해서 이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61] 취소선 처리했지만, 장수와 가후가 유비를 반조조 세력의 수장으로 삼을 계획을 수립한 게 여포와 원술의 멸망 이전 유비가 조조의 밑에 의탁하고 있을 때였으며, 계획이 수립된 이후 작중에서는 (원 역사처럼 전개되어) 유비가 여남에 별동대로 파견된 내용이 바로 진행되었다.[62] 장수는 이를 듣고 힘을 잔뜩 끌어모아놓고는 잔손질이나 하다 망했다고 표현했다.[63] 2만이나 더 살리긴 했으나 당장은 이점이 아니었다. 2만이라는 병력이 죄다 청주 쪽의 병력이라 원담의 세력이 그만큼 커져 후계자 대립에서 원상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었던 원소에게 더 큰 골칫거리가 되었기 때문. 실질적으로는 장수의 안배로 신평-신비 형제가 원담 지지에서 원상 지지로 선회한 덕에 관도대전에서의 실책이 죄다 곽도에게 몰려 원 역사에 비해 후계 구도가 안정화된 것이 컸다.[64] 물론 여광, 여상 형제와 고간이라는 예외가 있긴 했지만 원 역사의 내분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수준이고 그나마도 여광, 여상은 제대로 배신도 못하고 신비가 파견한 견초에게 컷당했다.[65] 이는 유비와 제갈량도 똑같이 염려한 상황이다.[66] 서주의 일부를 가져온 탓에 유비 세력을 별도로 경계해야하기 때문. 오히려 서주를 온전히 내주었으면 원상과 유비 사이의 경계선이 산맥이 되어 유비 쪽의 경계는 훨씬 적은 전력으로 방비하고 병주를 탈환할 전력을 집중할 수 있었다.[67] 제갈량이 원앙진에 영감을 받아 생각해낸 대 기병전 전술도 꺼내들지 않은 채로 적당히 패배를 방치했고, 오히려 청주에 조조의 시선이 쏠린 틈에 하후돈이 지키던 완성을 탈환한다.[68] 사실 유비 입장에서는 원상을 도울 이유가 없어진 것이 맞다. 기존에야 유비와 원상이 힘을 합쳐야만 조조와 동등한 세력이 될 수 있어서 원상의 서주 일부 점유를 눈감아주거나, 허도 급습 당시 서주에 뒤통수를 친 것도 넘어갔으나 남방 개발이 완료되고 유비 단독으로 조조와 맞설 수 있는 세력이 된 상황에서는 원상은 괜히 세력을 유지시켜주었다가 조조와 연합하면 골치만 아파질 수 있었기 때문.[69] 실제로 신비가 허유를 고발하면서 원 역사의 오소 참사를 막을수도 있었지만 원담이 일부러 쉬쉬해버리는 바람에 오소 참사는 그대로 벌어졌다.